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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바벨의 물고기-2

2005.10.26 23:3910.26

바벨의 물고기


10


공무원시험 준비생인 L은 가까워진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취업대란이었고, 쉽게 될 꺼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필사적인 면이 있었다. 벌써 몇 달째 도서관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몰랐다. 기숙사형의 고시원도 있다는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을 안 뒤로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이때까지 까먹은 돈만으로도 충분했다.
얼마 전까지 사귀던 여자친구와는 결별했다. 사실은 차인 거다. 장래성이라는 게 어느새 우리나라 남자친구의 두 번째 조건이 되어 버렸다. 첫 번째는 물론 돈이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며 L은 피식 웃었다.
공부는 잘 되지 않았다. 문장과 문장사이에서 헤매다 보면 어느새 다른 생각으로 빠지곤 했다. 그녀는 예뻤는데 생각하며 아쉬워졌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잡아야 하지 생각하고 책을 읽다보면 다시 제자리다. 책의 진도는 나가지도 않고, 이해는 전혀 되지 않았다. 달달 외우려 해도 기억력이 문제였다. 이번에도 물먹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L의 손에 잡혀있는 책의 글자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L은 지진인가 생각하고 오싹해졌다. 하지만 그 떨림은 점점 심해지고, 책장 밖으로까지 비어져 나가는 글자들도 있었다. 책이 떨리는 게 아니었다. 마치 글자들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책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 같았다. L은 화들짝 놀라 책을 던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글자로만 구성된 세계로 변해있었다. 고장난 TV화면 같았다. 도서관의 모든 책꽂이와 오후 해질 녘 햇살이 비치는 오랜 바닥까지 모두 글자로만 되어있었다. 글자의 세계였다.

그러나 어쩐지 불안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L은 천천히 글자의 길로 걸어갔다. 글자는 L의 주변으로 바글대며 몰려들었다. 마치 종이가 물을 흡수하듯이 글자들은 L에게 다가왔다.

'시험? 약속?'

L은 시험과 약속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글자들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어느새 파도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약속이었다. L은 그 파도 속에 몸을 맡겼다.



O는 책을 고르고 있었다. 독후감상문으로 쓸 책이었다. 과제는 꽤나 귀찮으면서도, 필수적이어서 해가지 않았다가는 내신에 구멍이 났다. 내신에 구멍이 난다는 건 대입에서 큰 악영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이 책도 저 책도 다 비슷한데다가, 책을 얼마나 잘 고르냐에 따라 성적이 달라졌다. 하루하루가 무슨 시험 같다. O는 이럴 때 멋진 남자가 나타나서 책을 골라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웃기는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이 책을 골라준다니, 그야말로 아이러니였다. 게다가 성적을 위해서라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책장사이를 헤맬 때였다. O의 눈에 뭔가 반짝임이 들어왔다. 그녀는 무엇인가 하고 다가가 보았다. 책 한 권이 반짝이고 있었다.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분명 그 책만 다르게 반짝였다. O는 어쩐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책을 뽑았다. 달랐다.

그 책은 투명한 유리 같았다. 유리판에다가 글자들이 잔뜩 새겨놓은 것처럼 그 책 속의 글자들이 비쳐졌다. 그리고 그 글자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 것 같았다. 이거였구나. O는 막연히 생각했다.

'골라주기를 기다린 거야?'

O는 자신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두근거렸다. 기대감이 가득해졌다.

'나를 만나기 위해?'

O는 그 책을 펼쳤다. 아니 펼쳤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었다, 그 책은 이미 투명하게 펼쳐져 있었으니까. 단지 의지를 가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O가 펼친다고 생각한 순간, 글자들은 폭발처럼 그녀에게 안겼다. O는 기쁨을 느꼈다.



V는 전교에서 알아주는 수재였다. 하지만 그가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V에게 있어 도서관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여렸을 때부터 도서관 구석에 앉아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기분을 나아졌었다. 공부에서 벗어나 단지 기분 좋은 마음이었다. 의지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은 완벽한 것이었다. V가 아무리 노력해도 책을 이해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물론 불완전한 책도 있었다. 하지만 V가 읽고 이해하는 순간 책은 완벽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다른 무엇과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어쨌든 V는 연인에게 다가가는 심정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그 날도 V는 책장 구석에서 번데기처럼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학교는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해 나왔다. 요즘 부모님의 지루한 장마 같은 부부싸움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짜증도 났지만 이젠 귀찮고 답답함뿐이었다. 남 일처럼 느껴졌다. 왜 저러고 사는 걸까. 하고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V의 눈에 한 구절이 들어왔다.

"그 무엇보다도, 당신이 필요해.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네가 필요해."

무슨 연인의 고백 같지만, 살인자의 독백이었다. V는 그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V는 그 절실한 필요함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 어떤 연인의 고백보다도 절실하고 간절했고 가슴마저 아리게 만들었다. V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도 필요해."

V는 책의 구절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 글자들이 V의 손에 묻어났다. 마치 매달리는 것 같았다. 글자들은 V가 필요했다. V는 글자들이 필요했다. 그 순간 글자들이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V를 향해 떨어졌다. 비록 그것이 반대로 흐르는 빗줄기라도 V는 마음에 들었다.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했다.



E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분위기상 책을 하나 펼쳐놓았다. 몇 년 동안 도서관이라는 곳을 찾아본 적이 없었는데, 쓸데없이 왔구나.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앉아 있을 곳이 필요해서 가까이의 공짜로 앉을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도서관이었다. 어렸을 때는 꽤 좋은 기억이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답답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펼쳐 논 책도 몇 줄 읽다가 던져놓고 노래만 듣고 있었다.
그러다 핸드폰을 들고 약속인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벌써 다섯 개째였다. 그러나 답문이 이상하게 오지 않았다.

'말 한마디 문자라도 보내면 덧나나. 난 벌써 나와있는데.'

연락이 없다. 준비로 바쁜 건가 생각해봐도 너무 이상했다. 기분이 나빠진 E는 책을 심술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글자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는 하품까지 해버렸다.

"하아암. 심심해."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손장난하는 것도 몇 분이었다. 그 마저도 시들해지자 기운이 빠져버렸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몇 분이 남아있긴 했지만, E는 진작에 나와있었다. 오랜만에 약속이라고 흥분해 버린 탓이다.
주위를 둘러본 E는 조용하게 공부하는 도서관의 분위기에 기가 질려버렸다. 그러다 어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 할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E는 의아했지만, 할머니의 눈가에 남아있는 진득한 감정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에 와 닿았다.

'처절한 외로움'

그 감정에 답답해진 E는 고개를 숙였다. 책이 있었다. 그녀의 눈에 책의 구절 하나가 들어왔다. 마치 물어보는 것 같았다.

'외로운 거야?'

'아니 외롭지 않아. 나에겐 친구들이 있는 걸.'

속으로 대답을 해버린 E는 피식 웃었다. 차가운 마음으로는 진정한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책의 구절은 그녀에게 대답하듯 쓰여있었다.

'외로운 거야?'

"조금"

'그럼 나와 친구가 되자.'

E는 화들짝 놀랐다. 책에는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글자가 있었다. E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에게 물었다.

"네가 대답한 거야?"

'그래. 나야. 나와 친구가 되자.'

E는 미심쩍었지만 다시 물었다. 책이 대답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너는 누구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난 너를 기다려왔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 서로를 이해하는 진실한 친구.'

"나를 기다려왔다고, 어떻게?"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지. 너도 이리로 와. 심심한 이야기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자.'

E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한 이야기는 싫다. 외로운 것은 싫었다. 책은 그녀에게 친구라고 불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단지 두려웠을 뿐.

'두려워 할 것 없어.'

E의 생각을 읽은 듯이 책이 말했다.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녀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 친구야."

E의 몸이 빛으로 물들었다. 수없는 글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11.


책을 놓은 지연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개운함과 답답함. 아쉬움. 아련함. 자유로움. 슬픔. 상쾌함. 등등의 수없는 감정이 들었다. 그 감정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찾아 보려한 지연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 감정의 끝에 '그'에 대한 감정이 섞여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연은 미묘한 차이를 깨달았다.
단지 감정뿐이었다. 아무리 떠올려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지연은 공포감마저 들었다. 유일하게 붙들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상실감은 더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지만, 이것은 뭔가 달랐다. 지워진 것처럼,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러다 생각이 떠오른 지연은 지갑을 꺼내었다. 지갑에 분명 '그'와 찍은 사진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은 있었다. 하지만 사진에 찍혀있는 것은 지연의 환한 표정뿐이었다. 그는 없었다.
지연은 자신이 뭔가 착각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 그와 찍은 사진을 넣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렇게 위안했다.

지연은 읽은 책의 내용에 집중하기로 했다. [끝없는 이야기]는 특별한 책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 절묘하게 맞닿아 있었다. 그녀는 '여제'의 이름을 찾아 떠나는 '바스티안'같았다. 뭔가 막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남긴 책에 담긴 예사롭지 않은 내용을 힌트라고 생각하는 것은 억측일까? 모든 게 그의 힌트로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통해 점점 사건들이 일어났다. 사서를 만난 뒤 글자는 사라졌다. 만약 사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글자가 사라진지도 몰랐을 것이다.

'혹은 사라지지 않았을 지도.'

사서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사서가 '그'와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쪽지는 주소를 나타나게 했다. 그 주소를 찾아간 그녀는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와 만난 뒤 급격한 '글자화'가 진행되었다. 그녀와 만난 뒤 일어난 일이었다. 그 전부터 그런 일이 있었다면, 병원이 무사히 유지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나와 만난 뒤에 벌어진 거야.'

모든 사건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 모두는 '그'가 남긴 흔적-힌트-를 쫓아가기 위해 움직인 것들이었다. 지연은 '그'가 이 모든 걸 이끌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분명 '그'였다.

'내가 '그'를 이끌고 있는 걸까? 이야기를 따라서 '그'를 이끌고 있을까?'

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떠올렸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이라면?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이어진다면?'

지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쪽지를 보았다. 다행히 변함이 없었다. 지연은 사서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오래 연락이 없어서 불안했다.
신호음이 울리고 한참이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연은 불안했다. 만약 사서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책도 없고 막막하기만 했다.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난 아무것도 아닌데. 어쩌다가 이런 일에 휘말려 버리고만 걸까.'

모두 '그'를 만난 탓이다. '그'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어떻게 만났더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시 지연은 쪽지를 바라보았다. 두렵게도 그곳에서는 새로운 글씨가 떠오르고 있었다.

'글을 읽은 이. 당신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연은 뛰어내리듯 창문으로 다가갔다. 밖에서는 수많은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늘을 물들이며 날아오는 네 개의 물체가 있었다. 셀 수없는 글자들이 그 물체를 보호하듯 휘감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의 움직임처럼 그 물체들의 주변에서 날리고 있었다. 구름같이 반짝이는 글자들이 그 물체의 발 밑에서 강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길게 뻗어간 치밀한 여섯 장의 날개는 나방가루처럼 글자들을 떨구고 있었다. 흩어져 떨어진 글자들은 곳곳에서 전염병처럼 글자들을 물들였다. 사물들은 모두 글자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글자를 전하는 전도사 같았다. 세계를 바꾸는 천사.

그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곧게 뻗은 그 손은 그대로 천천히 내려져 지연을 향했다. 상당히 먼 거리였음에도, 지연은 그 손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석처럼. 자신에게 향할 수 밖에 없다. 지연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 대해 의아함이 들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부터, 수없는 '의미'들이 나타났다. 그 '의미'들은 그래도 쏘아져 '끊임없는 글자'가 되었다. 화살같이 쏘아진 글자들 뒤로 벌떼같은 수만 단어의 글자들이 뒤따랐다. 필연성에 따라 이어진 문장의 이어짐. 복선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사건의 단어들. 폭풍처럼 치달은 글자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지연은 몸을 움츠렸다.
두려웠다. 너무 두려웠다.
한참이나 바들대며 떨던 지연은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서는 수없는 글자들이 스러지고 있었다. 글자들이 끊임없이 들이닥쳤지만, 미처 지연에게 이르기 전에 사라지고 있었다. 글자들의 비명소리라도 들릴 것 같았다. 얼마나 치열한지 불꽃이라도 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지연은 무의식중에 말했다.

"닿지 않아."

그리고 네 명에게 외쳤다.

"닿지 않아!"

네 개의 물체들도 당황한 듯했다. 의외의 곳에서 저항을 받은 탓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상황을 받아들인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 명이 동시에 손을 들 리가 없을 테니까. 네 명의 높이 들려진 손은 그대로 지연을  가리켰다. 거대한 날개짓같은 글자들이 불꽃처럼 부풀었다. 봇물이 터지듯 치달은 글자들은 지연의 근처에서 저항에 거세게 부딪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물이 갈라지듯 지연을 둘러싸고 글자들이 나뉘었다. 그것이 물길과 다른 점은 갈라진 글자들이 그대로 지연을 감싸듯 에워쌌다는 것이다. 수없는 글자들이 사라졌지만, 금새 지연의 모든 시야가 가려졌다. 글자들은 거대한 구의 형태로 지연을 감싸고 있었다. 지연은 자신의 주변의 글자들이 어김없이 부서지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글자가 워낙 많았다. 그 모든 글자들이 동시에 한가지 의문을 던졌다.

'.......어디지? 어디?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그곳은? 어느 곳에? 어디에도? 무엇에도? 그 무언가 에도? 어딘가에? 어디로? 어디 엔가? 그곳에도? 저곳에도? 저곳도? 저곳엔? 무언가도?........'

동시다발적이었고, 다른 글자들이었지만 모든 것은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눈이 어지럽다고 생각하며 지연이 외쳤다.

"뭘 찾는 거야!"

글자들은 눈동자처럼 바뀌었다.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

"나도 몰라. 나와 같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 어쩌려는 거야."

'.......살해. 죽음. 의문사. 완벽한. 자유로움. 벗어남. 해탈. 덧씌워짐. 자유. 부활. 심장 멎음. 자살. 까무러침. 베어짐. 사라짐. 흩어짐. 쪼개짐......'

수없는 글자들이 동시에 바뀌는 것은 어지러웠다. 게다가 모두 다른 글자들이었다. 하지만 지연은 무언가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죽음을 원하는 것일까? 그의 죽음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나 지연은 그 글자들 틈에서 완벽함과 벗어남 등등 또 다른 세계. 완벽한 세계를 의미하는 글자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죽이면 완벽한 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 그가 글자들을 사라지게 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는 없어!"

지연이 소리쳤다. 그 순간 지연은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이 지탱 못할 정도로 흔들렸다. 글자들이 그녀를 둘러싸 떠오르려 하는 것이다. 중력의 영향에 의해, 발 아래의 글자들이 빠르게 부서지고 모이기를 반복했다.

"어디를 가는 거야!"

'그에게로!'

모든 글자들이 외쳤다. 지연은 그것이 둘로 나뉘어진 '그'중에 글자를 사랑하는 '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부르고 있었다. 지연을.


12.


사서는 발악하는 외쳤다.

"그렇게 되지 않아!"

열심히 달렸지만, 글자는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야금야금 세상을 파먹으면서 글자들의 전염은 가속화되고 있었다. 사서는 숨이 턱까지 차 오르는 것을 무시한 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글자들은 어김없이 사서에게까지 닿을 것이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두진 않을 꺼야!"

사서는 노부인을 찾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노부인을 찾아서 깨웠다면, 이 글자화는 단번에 원래대로 변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서가 수첩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글자화는 이미 너무 많이 진행되어 있었다. 정신을 차린 사서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땐, 이미 노부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글자화 되어 버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고, 사서는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저것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서는 황혼녘의 하늘을 나는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천사라고 불릴 만했다. 그것들 주위로는 수없는 것들이 날고 있었다. 아마도 글자들이리라. 사서는 생각했다. 글자들은 그것들 주위를 바람처럼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섬세하게 뻗은 날개 역시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곧게 뻗은 여섯 장의 날개들은 눈송이처럼 글자들을 떨구고 있었다. 글자들이 지표면에 닿을 때마다 세상은 글자화가 되었다. 마치 글자를 전하는 전도사 같았다. 세상을 바꾸는 천사.

사서는 두려웠다. 도망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가 저런 것을 원한단 말이야!"

하지만 사서는 원했었다. 세상이 바뀌기를 원했었다. 완전한 이해의 세계로 가기를 원했었다. 세상이 저렇게 완전히 글로 바뀌게 되면, 더는 몰이해의 오해는 없을 것이다. 사람을 읽고 사물을 읽고 세상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완벽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사서는 아직도 그것에 찬성하고 있는 자신의 일말의 마음에 조소를 보내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도망치고 있는 것이냐.'

하지만 지연이 있었다. 지연에 대한 감정은 애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부채감에 가까웠다. 그녀를 속인 것에 대한. '그'에게 찬성하고 '그'에게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그'를 찾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도 서지 않았지만, '그'를 찾아야만 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는데.'

사서는 소름이 돋았다. '그'가 죽었다면 사서가 본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지연이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수첩에서 본 것들은 분명 한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죽었다. 지연에게 가야했다. 지연을 찾아 해결점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휴대폰도 이미 잃어버린 뒤였다.

그 순간 사서는 시선이 어지럽다고 느꼈다. 빙글 하고 세상이 도는 것 같았다. 저것은 하늘이군. 사서는 파격적으로 변한 하늘에 조소의 한숨을 삼켰다. 저것은 땅이군. 사서는 무릎이 너무 아프다는 사실에 현실감각을 찾았다. 그리고 발 저편에 놓인 쇠파이프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위기인데, 고작 저런 것 때문에 쓰러져야 하나!'

글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사서는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달린 방향은 반대였다. 사서는 글자를 향해 달렸다. 그래서 아슬아슬한 순간 수첩을 쥘 수 있었다. 넘어지면서 수첩을 떨군 것이다.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수첩에 '그'를 죽일 방법이 적혀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다지 아슬아슬하진 않은 듯했다. 이미 수첩의 일부는 글자로 변해있었다. 그 글자들은 빠르게 사서에게 물들었다.

"아아아!"

고통은 없었지만, 공포감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첩만이 글자로 변해 사서에게 스며들었을 뿐이었다. 사서는 글자로 변하지 않았다. 사서를 무시한 채 글자들은 주변만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도 특별취급인 건가.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났기 때문에?'

글자들이 스며든 얼마 뒤 사서는 알았다. 말 그대로 알 수 있었다. 수첩의 내용은 고스란히 사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야기 세계가 위험에 빠지자 아트레유는 그것을 해결할 이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많은 모험과 위기를 겪고 돌아오지만 결국 아트레유는 아무것도 얻어오지 못했다-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다. 그 아이는 세상에 나갈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친구도 없었다. 친구가 있었다면 오로지 책뿐이었다. 그 아이는 책을 읽었고, 책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 할 수 있었다. 그 아이에는 오로지 책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결국 그 아이는 자폐증이라는 정신병을 얻고 말았다.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해 버렸다. 나는 그 아이에게 세상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글로 바꾸어서 그 아이에게 주었다. 그 아이는 글을 통해서 세상을 알아갔다.-

-하지만 아트레유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바스티안을 데려온 것이었다. 바스티안은 이야기 세계의 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이였다. 이야기 밖에서 책을 읽던 바스티안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망설였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나 때문에 그 아이는 두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 아이의 세계는 둘로 나누어졌다. 글로 이루어진 세계와 실제적인 세계. 그리고 그 아이는 오로지 글로 이루어진 세계만을 인식하고 느꼈다. 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의 인격을 제거하고 새로운 인격을 심어주기로 했다. 그런 치료는 굉장히 위험했다. 비록 피와 살이 튀는 치료는 아니었지만, 사람의 인격하나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음악과 대화법을 통해 그 아이의 인격은 제거되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인격이 생성되었다. 나는 성공의 기쁨을 느꼈다.-

-바스티안의 망설임 때문에 여제는 고민했다. 결국 여제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제는 이야기를 쓰는 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 때문에 바스티안 역시 영원한 이야기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해결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여제의 새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과거의 인격은 오롯이 글 속의 세계에 살고 있었기에, 인격이 제거되자 그 세계 역시 사라졌다. 새로운 인격은 현실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 인격은 원래 인격과 반대의 인격을 갖게 되었다. 그 아이는 글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 아이 마저 시름시름 앓게 되자 나는 슬펐다. 결국 죽고 나자 나는 절망했다. 나 때문에 그 아이가 죽게 되었다. 내 사랑하는 아이가.-

-바스티안은 결국 새로운 여제의 이름을 불렀다. 빠르게 이야기 세계는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방법을 생각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나는 그 아이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글 속 세계에서 만이라도 살아가길 바랐다.-

-바스티안은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그 아이가 첫 번째로 읽혔다.-

-이야기 세계가 살아났다-

-그 아이가 살아났다-]


사서는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구가 날아오고 있었다.  노을 사이를 꿰뚫고 현실을 무시한 채 날아오는 구를 바라보며 사서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마감하기 위해서는 '그'를 처음 읽은 이가 있어야 했다.

"지연!"



지연은 구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구는 '그'를 향해 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알던 '그'와는 달랐다. 과거의 '그'였다. 지연은 세상이 변해 가는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무력했다. 실제로 지연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글자를 없애는 것은 '그'였다. 한순간 글자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의미들이 여러 가지의 행동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연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글자들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중력이 느껴졌다. 지연의 아래편 글자들이 사라져갔다. 지연은 자신이 까마득하게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비명을 질렀다.

"죽기 싫어!"

그러나 지연은 빠르게 자유낙하 했다. 글자가 옅어진 틈으로 지연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래쪽의 세상은 모두 글자로 변해있었다. 지연의 시선이 닿은  저편 지평선까지 모조리 글자들이 독식하고 있었다. 저녁의 스러져가는 태양만이 묘한 현실감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연의 뺨을 할퀴듯 스치는 바람도. 지연은 무서웠다. 이대로 죽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글자들은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땅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글자들은 원뿔형의 추를 구성하며 지연에게 다가갔다. 지연은 수없는 글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창같이 뾰족하다고 느낀 지연은 그것에 찔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글자들이었다. 글자들은 지연의 무게를 견디면서 부서졌다. 첨단부가 폭죽처럼 터졌다. 글자가 부서지면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버티고 있었다. 지연의 낙하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연은 안심할 수 없었다. 글자들의 품에 빠지는 것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지연을 품에 안은 글자들은 그대로 지표면을 향했다. 지표면은 온통 글자들이 독식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지연을 받아들였다. 마치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수없는 글자들이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지표면 이곳저곳에서 수없는 글자들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한 높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서는 그것들이 사람에게서 솟아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천사들은 글자를 떨구는 것을 멈추고 지연을 품에 안은 지표면으로 날아갔다. 지연이 도착했고, 또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사서는 그것이 말 할 수 없이 두려웠다.


13.


처음에는 그저 글자의 접합에 불과했다. 단어와 단어가 잇대어 문장을 만들었다. 문장은 곧 다른 문장들과 잇대어 문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문단은 또 다른 문단을 만나 하나의 이야기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문단과 문단 사이를 잇는 필연성의 고리는 다른 이야기와도 연결되었다. 점점 거대해져가던 이야기는 하나의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류의 이야기였다. 태초부터 이야기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하나의 이야기였다. 창조부터 멸망까지의 끊임없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인류의 땅 지표면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꿈을 꾸었다. 새로운 세계로. 완전한 세계로. 신에게로. 이야기는 자신을 높이 세웠다. 그리고 연모하던 그곳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사서는 수없는 글자들이 갑자기 꿈틀댄다고 느꼈다. 어떤 생명체처럼, 열망에 꿈틀대는 것 같았다. 사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을 들어 바닥에 밀어 넣었다. 글자로 이루어진 바닥은 쉽게 손을 받아들였다. 혹시나 하는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사서는 깨달을 수 있었다.

'바벨!'

글자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뱀의 움직임처럼 꿈틀거리며 하늘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수없는 글자들이 가지처럼 첨단 부의 도약을 도왔다.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첨단 부는 빠르게 하늘로 향해 솟구쳤다. 그 속도를 짐작해본 사서는 그 아찔한 속도에 경이감마저 느꼈다. 그것은 마침내 하늘을 꿰뚫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솟구쳐 올랐다. 그것이 시선이 미치지 않는 저편까지 솟구쳐 올랐을 때는 사서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자신도 저곳에 있었다면. 완전한 세계에서 버림받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지연은?

지표면이 다시 한번 꿈틀대기 시작했다. 지표면에서 태어나는 그것은 처음에는 단순한 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구를 이고 있는 그것은 분명 물고기의 형태였다. 섬세한 꼬리지느러미부터 가슴지느러미까지 완벽하게 물고기를 재현하고 있었다.

'헤엄치는 건가?'

그랬다. 물고기는 동그란 구를 인 채 하늘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바벨의 탑에 잇대어 물고기는 빙글빙글 돌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지연이 어디 있으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고기가 이고 있는 구에 분명 지연이 있으리라. 지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서는 지연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사서의 머릿속에 노부인이 떠올랐다.

'내가 특별취급이라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그녀를 찾아야 한다. 그녀를 깨워야 해!'

사서는 도서관이 있던 곳이 어딘지 고민하지 않았다. 탑의 중심부였다. 그곳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으니까. 사서는 빠르게 탑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발끝에서는 글자의 먼지가 날렸다.


지연은 자신이 다시 떠오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구는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지연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있었다. 글자를 통해 구성되어진 그는 현실감이 동떨어진 모습으로 지연과 함께 서있었다. 하지만 지연과는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글자였기에,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 유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지연은 너무나도 만나고 싶었던 '그'였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보고 싶었다고 말할까?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할까? 하지만 어떻게?

'지연.'

그의 글자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글자로 변했다. 지연은 고개를 돌렸지만, 그 곳에도 그가 있었다. 그는 글자들 전부였다. 사방에 그가 있었다. 지연은 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인가요?"

'그래.'

긍정의 의미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지연은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까지 찾아왔던 것이 다 헛수고가 된다. 지연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여기서......여기서 뭐 하는 거에요?"

'우리는 신에게 가려고 하고 있어.'

'그'가 우리라는 말을 썼다는 것을 지연은 간과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왜요?"

'우리는 아파했어. 서로 상처 입히고 또 고통스러워했지. 우리가 하나의 언어가 아닌 여러 언어로 말하는 탓에 우리는 서로를 몰라. 혼란이었지. 그러나 이제 우린 다시 하나가 되었어. 네가 나를 알아볼 수 있었듯이 우리는 우리를 완전히 이해해. 더는 아프지 않게 되었어.'

"그래요?......난 여전히 아픈걸요."

'도착하게 되면 너도 곧 우리가 될 꺼야. 그렇게 되면 아프지 않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이해하게 될 꺼야.'

지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지연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런 게 이루어질 리가 없어요! 이건 꿈일 뿐이에요!"

'이루어지는 것도 꿈이지.'

"아니에요! 나는 실패할 거에요! 아파할 거에요! 힘들어 할 거에요! 그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당신이 아파해서 전 기뻤어요! 당신이 힘들어해서 전 좋았어요! 분명 당신이 고통스러워서 저도 고통스러웠지만, 저는 그게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그게 아니었나요?"

'몰이해의 소치다.'

"그게 사랑이에요!"

'사랑이 아니다.'

"그럼 나에게 있는 이 사람은 뭐죠?"

지연은 자신을 가리켰다. 지연은 자신 속에 있는 '그'를 느꼈다. '그'는 지연을 절실히 사랑하고 있었다. 글자를 증오하는 '그'는 지연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와 고통으로 주변의 글자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글자를 사랑하는 ‘그’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무런 표정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글자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파편일 뿐이다. 지워야할 감정이다'

"그것도 당신이에요!"

'자유롭기 위해 벗어둔 허물일 뿐이다. 그 허물을 벗었기에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제 곧 도착할 것이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지연도 고개를 들었다. 글자들 틈으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탑의 거의 끝에 근접해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너무 아름다운 세상이다. 저곳에만 도착한다면!'

"저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도착하면 알게 될 꺼다. 우리는 하나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지연은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될 순 없어요!"

지연은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14.


끊임없이 노부인을 찾아 헤매던 사서는 마침내 노부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부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노부인은 바벨의 중심에서 높이 떠올라 있었다. 도약한다고 해서 도무지 닿을 높이가 아니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사서는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요! 제발! 일어나요!"

하지만 목소리가 노부인에게 닿을 수 있을지 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글자들의 움직임이 빨랐지만, 아무런 저항이 없었기에 사위는 유난히 조용했다. 하지만 워낙 높았다. 게다가 소리의 공명마저 없었다. 그랬기에 사서의 목소리는 공간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차라리 천사 같은 존재가 된다면 저곳에 닿을 수 있을 텐데.

'글자들?'

사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일단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사서는 바닥에 손가락을 닿고는 빠르게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일단 쓰기 시작하자 바닥에는 사서의 손가락을 타고 글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이 사서가 바라는 형태를 보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의미하더라도 시도해봐야 했다. 사서는 바닥에 자신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워낙 글을 많이 읽은 그였기에, 고민 없이 자신을 묘사할 수 있었다.

[사서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글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에게 많이 읽히기 위해서였다. 사서는 말 그대로 책을 지키는 사람에 가까웠다. 책을 지키고 그 책이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게 인도한다. 그것이 사서의 임무였다. 그렇기에 사서는 모든 사물이 글로 변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아니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순했다. 책은 읽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을 묘사하는데 노력한 사서는 점점 그 글자들만이 뚜렷한 의지를 가지고 원래의 글자들에서 분리되는 보았다. 처음에는 흡수되는 듯 흩어졌지만, 곧 그 글자들은 원래의 자리를 찾아 글자들에게서 분리되었다. 사서는 그 글자들에게 또 다른 묘사를 덧붙이려 노력했다. 사서는 날개가 달린 존재가 되길 빌었다.



'그'는 빠르게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부서지는 만큼 금새 복구되고 있었다. 지연은 자신의 품안에서 '그'의 감촉을 느꼈지만, 흩어지고 부서지는 것에 어지러움증을 느꼈다. 거세게 껴안아 보았지만, 흩어짐과 사라짐이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모아짐과 새로 쓰여짐도 빨라졌다.

"제발! 제발 죽어요!"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저곳에 도달해야 한다.'

"제발!"

지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랑하는 '그'를 죽이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러는 지는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단순히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한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이 인류에게 큰 죄를 짓는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연은 버틸 수가 없었다. 지연이 바라는 것은 단지 '그'였다.

'마침내 도달한다.'

'그'가 쓰였다.


물고기는 탑의 가장 상층부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탑은 끝이나 있었다. 물고기는 그 탑의 끝에 천천히 올라섰다. 벌써 시야는 우주의 저편까지 보일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이미 산 뒤편으로 넘어갔을 태양이 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머나먼 곳에는 달이 굽어보듯 떠있었다. 물고기는 탑의 상층부에 도달한 것이 못내 만족스러운지 글자를 흩뿌리며 전율했다.

마침내 도달했다.

마침내 도달했다.

마침내 도달했다.

글자들은 소란스럽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나 하나의 글자들은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무엇도? 어느 것도? 아무 곳에도?'

처음에는 작은 의문으로 시작했지만, 곧 총체적인 의문으로 바뀌었다. 그곳에 도달했지만 아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글자들을 끌어 모아 탑을 쌓고 그 탑 끝에 도달했지만,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신에게 닿지 못했다.

'어째서? 어느 것도? 무엇도?'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어째서!'

지연은 대답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마침내 자신을 날개가 달린 존재로 바꿀 수 있었던 사서는 날개를 퍼덕이며 노부인에게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첫 날갯짓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사서는 자신을 제어하려 노력했지만 점점 바벨탑의 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래서는 그대로 빠져나가고 말 것이다. 사서는 의지를 글자처럼 표현해서 외쳤다.

"저기로!"

그것은 공간을 글자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두어 번 바벨 벽 근처까지 떨어질 뻔해서야 겨우 노부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노부인은 꿈을 꾸는 듯한 자세로 얌전히 누어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고요한 자세였다. 사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봐요."

그러나 노부인은 깰 기미가 없었다. 사서는 날갯짓을 제어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수십 번의 도전 끝에야 노부인을 붙잡을 수 있었다. 사서는 그녀를 흔들며 외쳤다.

"이봐요. 일어나요! 꿈에서 깨어나요!"

처음에는 아무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사서가 끈질기게 깨우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사서는 기쁨의 탄성을 외쳤다. 그러나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의 날개가 빠르게 부서지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그'가 외쳤다. 하지만 지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쩔 수 없어요. 제발......돌아와요. 원래의 당신으로요."

'그럴 수는 없어!'

"아니요. 그럴 수 있어요."

그 순간 '그'가 허물어졌다. 지연은 안고있던 것이 사라지자 앞으로 쓰러지듯 넘어졌다. 그리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쓰러지는 자세 그대로 지연은 바닥을 꿰뚫었다. 떨어지면서 바라본 지연은 탑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망에 못 이겨서 무너지는 것일까? 하지만 지연은 상쾌함 마저 들었다. 이대로 죽으면 되었다. 모든 절망을 끌어안은 채.

물고기는 지표면을 향해 흩어졌다. 탑이 무너지는 속도도 그에 못지 않았다. 세상의 글자들은 자유낙하해서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좌절이었다. 그 무엇도 세상이 느끼는 좌절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어떤 시인도 이 좌절을 노래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노래도 이 좌절에 닿을 수 없었다. 세상은 사멸하고 있었다. 완연한 죽음이었다.


깨어난 노부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서는 이미 부서지는 날개를 못 이겨 바닥에 쳐 박혀 있었다. 하늘은 검게 보일 만큼 어두워져있었다. 온통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글자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수없이 쏟아지는 글자들에게서는 좌절만이 느껴졌다. 그렇게 둥글게 쏟아지는 글자들을 바라보며 노부인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렴. 세상을 구할 수 있게......."

그 의미는 빠르게 하늘로 솟구쳤다.


지연은 노부인의 목소리를 보았다. 글자처럼 날아온 그 의미를 부서지기 전에 지연은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바람에 눈이 시렸지만 지연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이래서는 완전히 죽음의 세계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오해를 하고 상처받지만 생명인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지연은 결심했다.

'허무'가 끌어안은 이야기의 세계는 허물어져가기 시작하고.....

바스티안은 여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연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연은 바람결에 묻어나듯 조용히 그 이름을 읊조렸다. 그 순간 화득 분 바람소리가 그 목소리를 앗아갔다.

"......!"

하지만 세상은 들을 수 있었다.

작은 씨앗하나에서 거대한 고목이 되는 것처럼. 작은 빛 하나에서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다시 세계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름이 불려진 세계는 올바른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심장을 맥동시켰다. 그런 세상에 미소를 던지고는 지연은 자신을 꼬옥 끌어안고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이름을 부르는 순간 지연은 자신 속의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세상도 '그'를 느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그'를 느꼈다. '그'는 사랑하고 있었다. 세상은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사랑해."

지연의 마지막 말만은 바람이 가져갈 수 없었다. 지연은 그를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15.


“그녀는 마침내 그를 찾아 낼 수 있었답니다."

그녀는 누어있는 아이에게 책의 마지막을 읽어주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오랜 병실생활에 아이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다. 그나마 그녀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너를 구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구나. 너를 그 감옥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게 할 사람이......"

그녀는 눈물을 머금었다.



-fin-


---------------------
상상마당 공모전에 낸것.

웹상에 올려도 별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올립니다.;;;

에효....

머리 아픕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빌어주세요;
요한
댓글 1
  • No Profile
    華爛 05.11.01 21:17 댓글 수정 삭제
    글자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니 뭔가 스펙타클하네요..좋은 결과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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