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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淚)


01. 몽현(夢現)의 경계

4.
이것은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또다시 이어지는 광경, 숙부의 배신과 디트리히 경의 죽음을 암시하는 이 영상들을 보며 나는 무엇을 다짐해야 하는 것일까.

1725년 09월 14일, 나의 즉위식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기에 나의 꿈은 이다지도 끈질기게 숙부의 반란을 시사하는지. 숙부가 이토록이나 강경하게 몰아붙여야 할 정도로 나의 자질이 부족함을 뜻하는 것인가?

여왕의 즉위식이 끝나는 순간, 순백의 성 에스텔의 성좌(聖座)는 마치 하늘을 뱃길로 착각한 듯한 모습으로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배들이 드리운 그림자에 묻혀버렸다.

“루아르 나이트 전원 현 위치 고수, 공중으로부터의 공세에 대비하라! 에스테리아 나이트는 전원 출정하여 적군을 끌어내려라!”

친위기사단 루아르 나이트의 단장이자, 이슈테르의 총 기사단장인 리타이너 경의 외침과 함께 300여 명에 이르는 중앙기사단 에스테리아 나이트들의 *영갑에서 푸르른 날개가 쏟아져 나오며 하나 둘 허공으로 비상하기 시작했다.(*영갑令鉀 : 영력을 이용해 능력이 증폭되도록 영법 처리된 갑옷.)

그리고 그 순간, *비선들로부터 500여 명은 되어 보이는 일련의 무리가 역시 푸르른 영력의 날개를 휘저으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긴 은발을 휘날리며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비선飛船: 영력을 이용해 공중을 부유할 수 있도록 제조된 배.)

“프리스 데 루아르······.”

에프리안 공국의 공왕, 프리스 대공의 검이 영력에 휩싸여 눈부신 빛을 발하는 순간 다섯 명이나 되는 에스테리아 나이트가 허공으로부터 힘없이 추락했다. 엄청난 힘의 차이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숙부님의 무위는 너무나도······.’

바로 그때, 율리아나를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디트리히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에스테리아 나이트 소속의 휴이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디트리히와의 약혼 이후, 친위기사단과는 별개로 운영되고 있는 율리아나 직속의 호위부대의 구성이었다.

“우선 이곳을 탈출해야 합니다, 폐하.”

디트리히가 차분한 목소리로 율리아나에게 고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위험하다고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와 휴이 경만이 자신을 호위하여 이 곳을 벗어나려 한다. 매번 실패하면서도 이 작전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지금 이 상황이 모두 꿈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다시금 만류하고야 마는 것은 역시 그의 추락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겠지.

“고작 두 분이서 저를 보호하는 것은 위험해요. 저들의 목표는 저일 것입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다른 기사들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그건 더욱 위험합니다. 이런 혼란스런 곳에 폐하를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다른 기사들을 전장에서 빼돌렸다간 전황에 불리하게 작용할 터이니, 차라리 다른 비선을 타고 신속히 수도를 벗어나는 것이 안전합니다.”

역시 언제나 같은 대화들이 오간다.

“휴이, 내가 직접 길을 뚫겠다. 폐하를 안전하게 모셔라!”
“알았어!”

곧 디트리히의 검과 몸에서 푸르른 영력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슈테르 왕국이 자랑하는 검의 명가(名家), 아르킬레우스 가의 두 형제가 뿜어내는 무위는 능히 프리스 대공을 뛰어넘음이 가능해보일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여왕이 달아난다! 막아라!”

어느새 율리아나와 두 기사들의 도주를 눈치 챈 프리스 대공의 외침이 들려오고, 그 순간 앞에 선 디트리히와 여왕을 부축한 휴이의 등 뒤에서도 푸르른 영력으로 이루어진 빛의 날개가 뻗어 나왔다. 루아르 나이트와 에스테리아 나이트의 두 엘리트는 여왕을 호위하면서도 엄청난 속도로 영력을 운영해 빠르게 비상하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앞을 막기 위해 몇몇 아니힐 나이트들이 검을 휘둘러보았지만, 번번히 디트리히의 검에 물러날 뿐이다.

아래로 혼란에 빠진 왕의 도시, 하야스의 전경이 보인다. 언제나 평온하고 활기찼던, 생동감 넘치던 도시는 그저 아비규환의 풍경을 그려내며 깊은 혼란에 몸을 담구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그런 이들 사이에서 도주하는 왕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들이 보였다. 여왕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이들인 것일까? 율리아나는 괜한 자책감에 고개를 저었다.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인걸.’

바로 뒤에서 몇몇의 아니힐 나이트가 추격하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지만, 쉽게 따라잡힐 디트리히와 휴이는 아니었기에 여왕은 어느 정도 여유 있는 태도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드디어 비행장이 보이고 있었다.

이슈테르 소속의 범선의 형태를 빌린 비선 십 여척이 언제나 항해할 수 있도록 정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본디 마흔 척 가까이 대기하고 있어야 했으나, 아무래도 프리스 대공이 반란을 위해 빼돌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비행장이 가까워옴에 따라 디트리히와 휴이의 고도 역시 점차 뱃전에 맞추어 낮아지기 시작했다.

“휴이! 폐하를 비선으로 모시고 이륙준비를 서둘러라! 뒤는 내가 막고 있겠다.”

디트리히의 외침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휴이는 그대로 가까운 비선의 갑판위로 날아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폐하.”

휴이의 당부가 들려왔으나, 율리아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제 곧 다시 봐야 한다. 그의 죽음을, 아니 어쩌면 죽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의 추락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두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여왕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조금 아래에서 아니힐 나이트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 디트리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상대의 검을 흘려내고 받아내고 틈을 보아 찌르고 베는 디트리히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흑사자처럼 날렵하고 우아하게 보였다.

“하아앗-!”

긴 기합과 함께 파고든 디트리히의 검이 급격한 호선을 그리며 치솟아 올라 다시금 한 기사의 목을 꿰뚫었다. 같은 이슈테르 인임에도 이러한 비극을 불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디트리히는 고민 속에서도 쉼 없이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남은 상대는 다섯.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모두 다 베어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힐 나이트가 비록 수가 많고, 그 검술의 효율성 덕분에 실력들도 상당한 편이지만, 쉽게 익힌 검술인 만큼 최상의 검술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검술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검의 명가라고 불리는 아르킬레우스 가의 현 가주인 디트리히의 검술은 이미 에프리안의 공왕, 프리스 대공과 비견될 정도의 검력을 쌓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검이 어렵지 않게 또 하나의 아니힐 나이트 소속의 기사를 쓰러트리는 순간, 율리아나는 비선이 곧 상승할 것임을 눈치챘다. 점점 이 슬픈 꿈도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비선의 중심으로부터 영력을 조금이라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시원하다고 느낄 만한 영력의 회오리가 소용돌이치며 비선을 공중으로 부유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디트리히는 또 다른 기사를 베어 넘기며 부유를 시작하는 비선을 향해 떠오르며 물러나고 있었다.

“디트리히 형! 이제 올라와!”

어느새 비선의 이륙시스템을 가동시키고 갑판으로 뛰쳐나온 휴이가 주위를 경계하며 아래쪽에서 분투하고 있는 디트리히를 향해 소리쳤다.

“휴이경······.”

그리고 그때, 율리아나의 마른 입술이 잔뜩 쉰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런 여왕을 묵묵히 바라보던 휴이는 곧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주군에 대한 예를 취했다.

“예, 폐하.”

여왕의 잔뜩 죽은 목소리가 휴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가서 디트리히 경의 퇴각을 도와주세요. 누군가 그를 막을 것입니다.”

깜짝 놀란 휴이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가 디트리히를 막을 것이라니, 그만한 실력자가 저 아래에 있단 말인가.

휴이는 믿을 수 없는 말임에도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예를 올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멈추어라!”

쿠아앙!

엄청난 영력의 충격파가 부유하고 있는 비선의 옆면을 강타했다. 그로인해 비선은 뒤집힐 듯 흔들리며 기존의 위치에서 수십 미터나 밀려나야 했다.

“프리스 대공!”

그와 함께 비선의 갑판을 향해 몸을 날리던 디트리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뱃전을 타고 흘러들어온 충격을 속으로 삼키며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선 휴이의 시선에 악몽이라고 불러도 무색할 모습으로 맹렬히 날아들고 있는 프리스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이슈테르 왕국의 기사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적에게 등을 보이다니 아르킬레우스 가에 대한 나의 평가가 너무 관대했던 모양이구나!”
“주군에게 검을 드는 기사에게 기사도를 조언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휴이! 비선의 속도를 최고출력으로! 방향은 기린으로 잡아라! 곧 뒤따라가겠다!!”

프리스 대공의 조롱에 응대하며 칼날에 묻은 붉은 피를 맹렬하게 떨쳐낸 디트리히가 순간적으로 영력의 날개를 가속하여 대공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럼······. 아니힐의 검술을 견식하겠습니다.”

채챙!

엄청난 속도로 맞닿은 대공과 디트리히의 검이 점점 더 속도를 빨리하며 서로에게 치명타를 입히기 위한 검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결투는 곧바로 디트리히에게서 절망을 닮은 듯한 기백이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이어졌고, 대공에게서도 마치 산사태가 일어난 것만 같은 기백이 엄청난 무게감으로 밀어닥치며 쏟아져 나왔다.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영력의 회오리가 맞부딪치며 대공과 디트리히의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영력의 회오리가 그들의 주변을 맴돌며 한쪽의 힘이 다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듯 섬뜩한 빛 무리를 뿌렸다.

그 정도로 루아르의 유망주 디트리히의 검술은 벌써 수 십 년간 이슈테르 지존의 자리를 지켜온 검사인 프리스 대공과 견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채애앵!

하지만 격렬하게 검격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프리스 대공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디트리히의 검을 받아내었다. 그렇다고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힘을 조금 아껴두고 있을 뿐이다.

“과연, 아르킬레우스 가의 가주답군.”

여유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검술을 평가하는 대공의 모습을 보며 디트리히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다른 곳에는 신경 쓸 틈도 없는 자신과는 달리 대공의 검술은 여유가 있어보였던 것이다. 분명, 자신의 실력으로도 대공과 호각을 이룰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패배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디트리히는 단 몇 수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이 정도의 적수와 전력을 다해 겨뤄볼 수 있다는 것에, 그리고 이런 적수를 상대로 그녀를 무사히 탈출 시킬 수 있다는 것에 디트리히는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지.’

실력차를 눈치 채고 포기하는 듯 하던 디트리히의 눈빛이 다시 되살아나고 뒤이어 맹렬하고 정확한 검술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고 대공은 작게 혀를 찼다.

‘인물이로군.’

그리고 그 순간, 대공의 검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검은 어느새 디트리히의 가슴을 찢으며 피의 기둥을 허공으로 피워 올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디트리히가 운용하던 영력의 흐름이 끊어짐이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대공의 오른발이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디트리히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신성의 추락······.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갈 곳을 잃은 디트리히의 영력이 마치 꽃잎처럼 흩어져내려 바닥에 닿고, 그 위로 그의 몸이 석고상처럼 힘없이 떨어져 내렸을 때, 휴이는 자신의 신이 무너졌음을 느꼈다.

언제나 우상이 되어주었고, 희망이 되어주었던 형은 이제 날개를 접고 심연 속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현실이었다.




* 문학 커뮤니티 베스트셀러를 꿈꾸다 ( http://cafe.daum.net/Besel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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