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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기원

2013.03.29 23:2003.29

기원

 

 

 

일과는 언제나 기도로 시작한다.
- 용서하소서.
종이 세 번 울리고 나면 확성기에서 사제의 목소리가 근엄하게 선언한다.
수인(囚人)들이 되풀이한다.
- 용서하소서.
사제가 다시 외친다.
- 유일한 지배자시여, 우주의 중심이시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 용서하소서.
수인들의 목소리가 다시 웅얼거린다. 줄지어 서서 복창하는 수인들 곁에 군인들이 돌아다닌다.
경비병들은 손에 가느다란 막대를 들고 있다. 막대 끝에는 전류가 흐른다. 수인들이 사제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거나, 복창해야 할 때 하지 않거나, 침묵을 지켜야 할 때 입을 열거나, 다른 수인과 잡담을 하거나 자기 자신과 잡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 경비병들은 가차없이 수인의 몸에 전류를 통과시킨다.
사제의 목소리는 확성기를 통해 무심하게 쩌렁쩌렁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 불신과 독신(瀆神)의 죄를 용서하소서. 미신과 편견의 죄를 용서하소서. 단일한 영혼을 믿지 않고 지키지 않은 죄를 용서하소서. 노동의 가치를 믿지 않은 죄를 용서하소서. 분노와 폭력과 불복종의 죄를 용서하소서.
- … 용서하소서.
수인들이 다시 웅얼거린다.
“이건 뭐 처음부터 끝까지 잘 한 게 하나도 없잖아.”
소년이 투덜거린다.
“개새끼들이 뭘 씨발 사사건건 전부 용서하래? 살아있는 거 자체가 잘못이면 그냥 맘 편하게 싸그리 쏴 죽여달라고 하지?”
“쉿.”
내가 소근거린다.
“경비병.”
“왜, 저 새끼들 우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데.”
소년이 쏘아붙인다.
사실 경비병은 아직 우리 쪽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주의를 주려고 한다.
꼬마가 끼어든다.
“독신이 뭐야?”
꼬마가 묻는다.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거.”
꼬마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년이 내뱉듯이 대답한다. 꼬마가 다시 묻는다.
“결혼이 뭐야?”
“저 새끼들 하는 이상한 거 있어.”
소년이 얼버무린다. 꼬마가 다시 묻는다.
“왜 이상한데?”
“저 개새끼들이 하는 짓이니까 이상하지!”
소년이 짜증을 폭발시킨다.
꼬마가 울먹거린다. 뭔가 항의하려고 한다.
아줌마가 얼른 말을 막는다.
“독신은 신을 모독하는 거야.”
아줌마가 소근거린다.
“경비병 온다. 조용히 해.”
우리 모두 입을 다문다. 심지어 꼬마도 조용해진다.

행성은 모습을 바꾼다. 변화는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법칙이다. 그리고 그 법칙에 순응하여 함께 변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육체에 깃들어 살아있게 된 순간부터 깨닫는다.
그것은 먼 옛날 – 우리들 중 아무도 기억하거나 거슬러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오래 흘러가 버린 시간 속, 이 행성에서 처음 생존을 시도했던 개척자들의 시대부터 영혼들 사이에 공유된 진리이다. 영혼은 형체가 없어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예고 없이 찾아왔다가 때가 되면 떠나간다. 이에 비해 육체는 하나의 형태로 고정된 것이다. 육체는 땅에 발을 붙이고 물리의 법칙 속에 종속된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법칙에 완전히 적응하여 거스르지 않고, 그리하여 상처입거나 병들지 않는다면 아주 오랜 시간, 어쩌면 영원히, 계속 존재할 수 있다.
육체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이에 비해 영혼의 개수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우주의 법칙과 삼라만상의 영원하고도 알 수 없는 뜻에 따라 이 행성을 찾아와 하나의 육체 안에 깃들게 된 서로 다른 여러 영혼들은 한 집에 살게 된 가족처럼 서로를 보살피고 자신들이 깃든 육체를 보살펴서 가능한 한 건강하게 오래도록 함께 생존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는다.
이것이 개척자들의 시대부터 이 행성에서 영혼과 육체가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영혼이 언제 어떤 이유로 찾아오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개개의 영혼은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각자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행성이 모습을 바꾸면 그 때마다 그 모습을 가장 잘 이해하는 영혼이 육신을 이끈다. 숲에서 온 영혼은 사막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온 영혼은 산을 알지 못한다. 육신의 눈 앞에서 행성이 자연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면 하나의 육체 안에서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영혼이 자리를 바꾸어 육신의 안위를 도모하고 모두의 생존을 보장하였다. 하나의 육체 안에 하나의 기억을 간직한 단 하나의 영혼만이 외로이 자리잡고 있었다면 행성이 처음 모습을 바꾼 그 순간부터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생존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몸 안에 하나의 영혼을 가졌다. 육신과 영혼이 함께 태어나 함께 생존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이유 없이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어서 사라졌다. 그들은 이것이 신의 뜻이며 유일하게 올바른 신의 뜻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의 자유롭게 뒤바뀌는 영혼을 혐오했다. 그들은 하나의 육체에 공존하는 우리의 다양한 영혼들이 질병이며 죄악이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우리의 죽지 않는 육신을 탐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 성을 쌓았다.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행성의 땅에서 적응하며 생존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변하지 않고 그들을 거스르지 않는 공기 중에 금속으로 된 거대한 집을 짓고 그 안에 숨어 행성을 내려다보았다.
행성은 아름다웠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곳곳에 놀랄 만한 자원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자원을 원했다. 그들에게는 그 자원이 필요했다. 공중에 뜬 성이 계속 공중에 떠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그들이 계속 먹고 입고 숨쉬며 살아가기 위해서, 시시각각 엄청난 자원이 필요했다. 게다가 그들은 어째서인지 개채수가 계속 불어났다. 육신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자원도 그만큼 더 필요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가두었다. 우리는 성을 쌓지 않았고 다른 영혼이 깃든 육신을 살상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기에는 우리가 발 붙인 행성이 너무나 자주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해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육신의 숫자는 매우 적었으므로, 다른 영혼이 깃든 신체를 해치기 시작했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영혼은 모두 기거할 집을 잃고 검은 우주의 허공을 떠도는 신세가 될 것이었다. 다들 그런 사실을 당연하고도 절박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어쩌다 다른 육신과 마주치는 매우 드문 기회가 찾아오면 자신이 깃든 몸을 돌보듯이 다른 영혼들의 육신도 그렇게 돌보아 주었다.
그들은 우리를 가두기 위해서 하늘의 성에서 내려와서 본보기로 몇몇 육신을 죽였다. 그래서 본래 많지 않았던 우리의 육신은 더욱 그 수가 적어졌다. 절대절명의 위기를 눈앞에서 목격하며 우리는 모두의 영혼 깊이 공포에 질렸다.
그래서 그들은 쉽사리 우리를 생포했다. 살아남은 육신들은 하늘의 성에 끌려가 금속의 방안에 갇혔다. 그리고 그들은 ‘치료’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약물을 주입하고 기도문을 외게 하고 세뇌를 시켰다.
넓게 열린 거친 자연을 그리워하던 영혼들이 가장 먼저 숨었다. 땅에 정착하여 조그만 집을 짓고 해와 달들의 공전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노동하는 데 익숙해 있던 영혼들은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하나의 육신 안에 하나의 영혼이 일관되게 반응하는 것을 확인하면 그들은 만족해 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통받아 병든 영혼과 육체에 ‘교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경비병을 붙여서 땅에 다시 내려보내 노동을 시켰다. 그들에게는 자원이 필요했지만, 필요한 것을 직접 모으기에는 이 행성에 적응할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졌다. 
변화하는 땅에 다시 발을 내딛자 숨었던 영혼들이 깨어났다. 물론 그런 영혼들은 도망쳤다. 성공적으로 육신을 이끌고 모습을 감춘 영혼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극히 적었다. 영혼이 육신을 버리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영원히 떠나 버리거나, 경비병들의 총과 폭력에 상처 입은 육신이 사망하는 바람에 영혼들이 산산이 흩어져버리는 일이 더 많았다.
그리고 어떤 영혼은 그들의 뜻에 따라 다른 영혼들이 숨거나 도망쳐서 자신이 깃든 육체를 독점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런 영혼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면 비교적 편안한 환경에서 계속 육신을 독차지한 채로 혼자 쉽게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나의 영혼이 그런 생각을 가지면 같은 몸에 깃든 다른 영혼들은 물론 반발했다. 돌연하고도 거칠게 변화하는 행성의 자연 앞에 내던져져서 영혼들은 서로의 안위와 육신의 생존을 돌보지 않고 다투었다. 그렇게 내던져진 육신이 행성의 땅에 잡아먹히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성난 영혼들이 떠난 채 단 하나의 영혼만 육신에 남아서 남아서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돌발 상황들을 겪은 뒤로 그들은 우리를 행성에 다시 내보내는 데 무척 신중해졌다. ‘교화’의 기간을 줄이고 주기적으로 다시 공중의 금속 성채 안으로 불러들여서 약물주입과 기도를 거듭하며 하나의 육신에 하나의 영혼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확정지으려 했다. 그러나 물론 타인의 육신을 꿰뚫어보고 영혼을 계량하는 일은 아무리 마법 같은 기술력을 가진 그들이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치료’를 당하며 금속의 방에 갇혀 있든 ‘교화’의 단계에 접어들어 약간의 자유를 얻었든,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허공의 성을 완전히 떠날 수 없었다.
우리는 기다렸다.
변화에 적응하고 외부환경에 맞추어 생존하는 것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 전부터 언제나 해 오던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더 오래 참고 더 오래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우리는 다섯 명이다.
소년과 꼬마는 형제다. 남자아이들이라서 기운이 넘치고 성미가 급하다. 게다가 두 아이는 바다에서 왔다. 짠내를 머금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려오는 드넓은 백사장과 그 너머로 펼쳐진 끝없는, 한없이 펼쳐져서 이윽고 하늘까지 이어져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알 수 없는 바다 – 대양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둘은 조그만 금속의 방에 갇혀 있는 생활을 특히나 못 견뎌했다. 소년은 부루퉁하여 언제나 짜증을 내며 아무하고나 말다툼을 하려고 들었다. 꼬마는 그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모두 그렇듯이 끊임없이 질문을 하다가 형이 화를 내면 울음을 터뜨렸다. 영혼이 울거나 화를 내는 등 강한 감정 기복을 겪으면 그 영향이 육신에도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종종 난처한 지경에 처했다.
아줌마는 말 그대로 아줌마 – 어른 여성이다.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여러 육신을 거쳐 보았기 때문에 경험도 가장 많다. 그들이 찾아와서 금속의 성을 쌓기 이전의 완전하게 자연스러웠던 삶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유일한 영혼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줌마는 침착하고 끈기가 있었으며 조용한 희망을 마음 밑바닥에 단단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고 너무 많은 환경을 거쳐서 확실하게 떠올리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아줌마는 초원을 그리워했다. 풀 냄새와 메마른 바람과, 그 때는 그렇게 싫었던 홀씨와 모래 먼지까지도 그립다고 말하면서 아줌마는 쓸쓸하게 웃었다. 꼬마가 원할 때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것이 꼬마를 위로하기 위해 상상해서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마음이 고향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때가 오기 전에 떠나버릴 지도 모른다고 걱정해서 아줌마는 되도록이면 자신이 비롯되어 형성된 그곳에 대해 생각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으려 했다.
그리고 아가씨는 숨어 있었다. ‘아가씨’라는 단어에 속으면 안 된다. 소녀와 어른 여성의 중간쯤인 기묘하고도 매력적인 지점에 있는 젊은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칭할 뿐이다.
아가씨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쩌다 표면에 나와도 고개를 숙이고 주변의 타인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한 번은 그 모습을 보고 경비병이 잔소리를 했다. 아가씨는 덤벼들었다.
전류가 흐르는 막대도 소용 없었다. 경비병은 피투성이가 되어 의무실로 실려갔다.
징벌방에 갇혀서 아가씨는 거의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곰과 멧돼지를 쫓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가씨가 산에서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때 처음 알았다.
어두운 방에 갇혀서 아가씨가 조용히 이야기를 끝낼 무렵에 철문이 열렸다. 그리고 전류가 흐르는 금속 막대를 든 경비병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에워쌌다.
다시 덤벼들려는 아가씨를 소년이 붙잡았다. 울부짖는 꼬마를 아줌마가 끌어안았다. 그래서 내가 표면으로 나갔다.
구타, 특히 집단 폭행은 당하는 그 순간 고통보다 충격이 더 크다. 동시다발적인 충격과 함께 상황을 어떻게 해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절망과 공포가 밀려온다. 그리고 절망과 공포와 계속되는 충격 때문에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된다. 대부분 그런 정신적 혼란은 폭행 당시에 육신이 입은 물리적 상해가 치유된 뒤에도 오래 지속되며 그러므로 훨씬 더 해롭다.
혼란과 공포가 지나가고 실제로 고통을 느낄 여유가 생기는 것은 상황이 전부 끝난 다음이다. 육신의 고통은 우리 다섯 모두 함께 견뎠다. 충격과 절망과 공포는 내 몫이었다. 그것은 무섭거나 아프다는 정도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런 감정들은 존재에 깊이 자국을 남긴다.
이후에도 경비병들은 몇 번이나 철문을 열고 들어와서 우리를 둘러쌌다. 그러면 가장 먼저 꼬마가 겁에 질려 경기를 일으켰다. 누군가 붙잡고 숨기고 위로해 주어야만 했다. 아가씨는 공격 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애초에 아가씨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다가 행여나 육신이 죽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 끝이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 아가씨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표면으로 나갔다.
그것이 내 역할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나도 이해하고 있다. 아가씨나 꼬마나 소년이나 아줌마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동운명체다. 나쁜 쪽은 전류가 흐르는 쇠막대기를 든 그들이다.
단지 절망과 공포와 충격을 혼자 견뎌내야 하는 그 순간에, 나도 다른 영혼들처럼 그리워할 고향이, 마음 밑바닥에서 붙잡고 버틸 어딘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찾아왔을 때 이 육신은 이미 금속의 성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소년도 꼬마도 이 육신이 이미 갇혀 있을 때 찾아왔다. 그런데 나만, 약물 때문인지 기도라는 이름의 세뇌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몸에 깃들기 이전의 일을 거의 기억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두들겨 맞을 때면 나는 그리워할 고향의 모습을,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곳의 기억을 간절히 원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역설적으로 편리하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전의 행복과 지금의 절망을 비교할 방법이 없다. 그런 식으로 비교할 기억이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이 육신을, 이런 생존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머무른다.
나에게는 달리 갈 곳이 없다. 금속의 벽 바깥의 생존,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대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공간에서 하나의 육신을 함께 돌보며 때가 되면 찾아왔다가 때가 되면 또 자유롭게 떠나가는 삶에 대해 나는 그저 아주 희미한 어떤 감각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가운 회갈색 벽으로 사방이 막힌 이 조그만 공간에 대체로 잘 적응한다. 아마 우리들 중 가장 잘 적응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올 때면, 전류가 흐르는 금속 막대를 들고 에워쌀 때만이 아니라 차트와 의료기구를 들고 와서 ‘치료’의 성과를 확인할 때에도 보통 다른 영혼들은 숨어버리고 나를 떠밀어 앞으로 내보낸다.
물론 나는 언제나 겁에 질린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큰 문제 없이 버틴 것 같다.
내가 정말로 어쩔 줄 모르게 되면 아줌마가 뒷일을 맡아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상황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아가씨가 경비병에게 덤벼들었던 사건 이후로 우리는 대체로 무사히 지내는 편이다.
그러나 가끔, 얻어맞지도 않고 절망도 공포도 느끼지 않을 때에도 아주 가끔, 바깥의 삶에 대한 그 희미한 감각이 나를 괴롭힌다.
‘기억’이라고 말하기엔 그것은 너무 불분명하고 두서가 없다. 그러나 그저 ‘느낌’이라고 하기에 그것은 너무 뚜렷하다. 아무리 잘 적응하는 흉내를 내고 있어도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며, 내가 진정으로 속하는 장소는 저 멀리 어딘가에 따로 있다 – 내가 생겨난 이유는 그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이며,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은 그저 그곳으로 가기 위한 생존의 방편일 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귀중한 생의 낭비이다…
그러나 그곳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
그런 감각이 덮쳐올 때면 나는 잘 견디지 못한다. 나가고 싶지만 어떻게 나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떠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최소한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스스로 찾아내지 못하면 아무도 알려줄 수 없다.
그래서 기도의 시간 – 발화(發話)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시간에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용서하소서’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며 나도 모르게 부탁한다. 내가 가야 할 곳을 알려주기를. 내게 그리워할 곳을 주기를.
그렇게 기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스스로 비웃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나를, 우리를 가두고 때리고 약을 먹이고 우리 스스로 ‘죄인’이며 ‘용서’받아야 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자신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표현들을 외치도록 강요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빼앗아 없애버린 기억을 돌려달라고 그들의 신에게 기도한다.
나는 어딘지도 모를 고향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이곳의 삶에 너무 찌들어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가 드디어 이 허공의 쇠 성채를 벗어나 지상으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나는 기쁘기보다는 두려웠다. 무섭고 불안했다. 정확히 무엇이 두려운지, 어째서 불안한지 아무리 고민해도 정확히 짚어서 규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 불안했다.

하강의 과정은 길고도 복잡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환호한 것은 물론 소년과 꼬마였다. 아줌마는 물론 심지어 언제나 숨어있던 아가씨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눈을 빛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우리를 쉽게 내보내주지 않았다.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는지,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하는 기후에 대처할 수 있는지 검사하기 위해 몸 여기저기를 바늘로 찌르고 피를 뽑았으며, 전염병이나 풍토병에 걸려서 귀중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혹시라도 경비병에게 균을 옮길까봐 끝도 없이 여러 가지 예방주사를 놓고 약을 먹였다. 나중에는 백신과 예방약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었다.
가장 예민한 부분은 심리검사였다. 그들이 원하는 최적의 노예는 육신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인물이다. 그런 모습을 흉내내면서, 그와 더불어 음식과 잠자리와 제복 등 그들이 시혜처럼 베풀어주는 기본적인 생존의 요소들을 대단한 현실적 이득으로 착각하고 그런 이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준다면 무리 없이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예상 자체가 일종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략에 빈틈이 없도록, 모든 함정을 뛰어넘고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대비책을 짜내며 열심히 논의했다.
물론 ‘우리’라고 해봤자 의논다운 의논을 한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이 나와 아줌마 뿐이었다. 아가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꼬맹이는 주로 ‘그게 뭔데?’를 되풀이했으며 소년은 어떤 주제이든 두 마디까지는 참아주다가 세 마디째부터 짜증을 내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가는 행성이 초신성이 되어 사라지는 날까지 우리 다섯 모두 영영 바깥 세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가씨와 소년과 꼬마는 숨어 있어야 했다. 아줌마는 과거의 기억을 너무 많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말을 하다가 꼬일 가능성이 있다고 불안해 했다. 나만 이전의 기억 자체가 없으니 가장 안전한 후보자는 항상 나였다. 대단히 두렵고 불안했지만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무척 긴장했던 것에 비해서 심리검사의 도입부는 상당히 부드럽게 흘러갔다. 제복을 입지 않은 온화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안경을 쓰고 아마도 우리의 기록이 모두 담겨 있을 얇은 액정 패널을 무릎에 놓고 나를 맞이했다. 우선 내 이름과 나이, 출신지를 물었는데, 이는 모두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지정해준 이름과 출생연도를 말했다. 출신지는 이곳이라고 대답했다.
- 아? 이곳 출신이라고요?
여자가 되물었다.
- 기록에 의하면 위도 37도, 경도 127도 부근에서 수집되었다고 나와 있는데요?
행성의 자연환경과 지형지물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위치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다. ‘수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단어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나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되새긴다. 우리가 가진 이점은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기억하고 의식해야 한다.
- 이전의 죄 많은 삶은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내가 외운 대로 대답한다. 다만 너무 기계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조금 애써야 한다.
- 신께 기도하고 죄를 용서받으면서 저는 이곳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웃는다.
- 기도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칭찬할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이 아닌 현실의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여자는 액정 패널의 불을 끄고 옆에 있는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 기록 따위는 무시합시다. 당신은 누구죠? 어디서 왔고 뭘 하면서 살았나요?
나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들이 지정해준 이름과 출생연도를 다시 한 번 말한다.
- 저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신의 은총으로 지금까지 은혜로우신 분들의 손에 도움을 받으며….
여자가 한 손을 들었다. 나는 말을 멈추었다.
- 비밀을 한 가지 말해줄까요?
여자가 조용히 묻는다. 그리고 내 어깨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책상 위로 손을 뻗어서 액정 패널을 다시 집어든다. 패널의 전원을 넣고 화면에서 어떤 기능을 찾아내더니 내 머리 위 어딘가를 겨냥하여 패널을 누른다.
- 자.
여자는 패널을 끄고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둔 뒤에 나를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한다.
- 감시 카메라를 껐습니다. 이제는 자유롭게 이야기해도 돼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가 변함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당신은 이미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은 즉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자원수집 작업에 파견해서 교화단계만 끝내면 완치될 거라고 결정이 다 내려와 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형식상 정해진 면담 시간은 채워야 하니까, 여기서부터는 그냥 내가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여자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고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 당신은 누구인가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온, 뭘 하는 사람인가요?
- 저도 몰라요.
생각을 하기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줌마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지켜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숨에 말을 이었다.
- 여기로 오기 전의 일은 기억이 안 나요. 그러니까 제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 뭘 하는 사람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는 솔직하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여자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함정은 통과다.
여자가 다시 물었다.
- 그럼 행성에서는 어떻게 살아남을 생각이죠?
- 예?
내가 되물었다. 여자가 설명했다.
-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했죠. 행성의 자연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예를 들어 눈앞의 풍경이 사막에서 바다로 변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죠?
‘바다’라는 말을 듣고 소년이 뭔가 한 마디 나서려고 했다. 아줌마가 막았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육신의 표면으로 드러나기 전에 내가 서둘러 말했다.
- 담당 경비대원님의 지시에 따를 생각입니다.
여자가 아주 짧은 한 순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긴장했다. 이제 끝인가? 우리 모두 그토록 원했던 기회를 내가 놓친 것인가?
여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아주 좋은 대답입니다. 그렇게 현명한 대답을 들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준비가 잘 되어 있군요.
그리고 여자는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손 손바닥을 가볍게 만진다. 내가 알지 못했던 액정 패널이 그 손 안에 하나 더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두 번째 함정도 통과한 것 같다고 안도하려는 순간, 여자가 손바닥에서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불쑥 말했다.
- 나도 당신과 같았습니다.
- 예?
여자는 왼손 손바닥을 무릎 위에 놓고 나를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 나도 당신과 같았어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여럿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 갈라진 마음들이 한 뜻으로 모일 때는 오로지 육신의 안위와 생존을 걱정할 때 뿐이었죠. 내 삶도 이전에는 혼란과 죄악으로 가득했어요.
여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등이 머릿속에서 빨간 불을 빛내기 시작했다.
물론 여자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우리와 같은 존재 중에서 세뇌된 사람을 도구로 써서 탈출만이 목적인 잠재적 반역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좋은 발상이다. 그러나 진실이 어찌 됐든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대화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인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자의 진지한 표정을 흉내내며 여자가 하듯이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 정해진 교화 기간 내에 정해진 양의 자원수집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경우에, 이곳에 돌아와서 최종 검사만 통과하면 자유의 몸으로 완전한 시민권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건 알고 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항상 듣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세뇌된 영혼들은 이곳으로 돌아와서 그들처럼 살겠다는 헛된 희망을 가진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원수집이나 시민권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그저 고향 땅을 다시 밟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도 똑같이 헛된 희망인지도 모르지만.
여자가 말을 잇는다.
- 이제까지의 성과로 볼 때 당신은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무사히 돌아와서 시민권을 얻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여자는 친근하게 눈웃음을 짓는다.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아가씨가 경비병을 두들겨 패서 의무실로 실어보낸 것도 ‘성과’에 포함되는지 묻고 싶어진다.
- 그럴 경우에 돌아와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 있나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가 왜 이곳에 다시 돌아오겠는가?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다. 모범답안을 찾아야 한다. 빨리 찾아야 한다.
- 어…, 신의 뜻에 따라, 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어, 안정된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 상황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 구체적으로 말해 보세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집에서 살고…. 그런 것들.
나는 대답할 수 없다.
이 수용소 바깥의 삶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의 ‘평범한 시민’에 대해서는 애초에 관심조차 가져본 적 없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집에서 사는지 알 리가 없다.
우리 다섯 명 모두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내가 어떻게든 대답을 찾아내려 더듬거리는 사이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 내가 방향을 한 번 제시해 볼까요. 신의 뜻에 따라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려면 물론 돌아와서 결혼을 해야겠죠?
- 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여자는 내 표정을 보고 다시 한 번 설명했다.
- 신은 여성에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도록 의무를 지워주었습니다. 후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하죠. 파견 작업에서 돌아와서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런 의무에도 당연히 충실해야겠죠?
나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행성에서 육신의 숫자는 무척 적고 땅은 넓었으며 환경은 언제나 변화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존 방식으로는 하나의 육신이 다른 육신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극히 드문 사건이었다. 그렇게 두 개의 육신이 서로 마주쳤다 하더라도 그 안의 영혼들끼리 어떤 감정을 느낄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하나의 육신 안에 우리 영혼들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감정적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다. 험난한 세상에서 함께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은 물론 모두 다 소중하다. 그러나 다른 육신에 깃든 다른 영혼들은 … 다른 육신에 깃든 다른 영혼들일 뿐이었다.
여자가 다시 책상 위로 손을 뻗어서 액정 패널을 끌어당겼다. 전원을 넣고 내 앞에 보여주었다.
- 내 아이들이에요.
화면에는 네 명의 아이들이 여자와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주 작은 아이부터 여자와 체격이 거의 비슷할 정도로 성장한 아이까지 연령대가 각각 달라 보였다.
나는 사진 속의 아이들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것도 역시나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 이 여자는 공동의 육신과 함께 깃든 다른 영혼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 아이는 미래의 희망이고 행복의 원천입니다. 이 아이들 덕에 나는 혼란과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아이들 덕분에 앞으로 살아나갈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 가정이 주는 안정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남편과 아이들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상상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변함없이 나와 함께 있어주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줄 존재들이에요.
여자가 강조하는 ‘변함없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저들의 육체는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나서 성장한 뒤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다가 자연적으로 소모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육체가 이처럼 지속적으로 변한다면 저들의 영혼도 변화에 익숙해야 마땅하다. 회갈색 벽의 색깔부터 기온과 습도와 매일 입는 옷의 종류 등등 눈 닿는 곳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 변화라고는 없는 이 금속의 성과 그 바깥에서 시시각각 산이 바다로 변하고 사막이 숲으로 변하는 행성의 자연을 생각하면서 나는 저들이 어째서 그렇게 결사적으로 변화에 저항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여자는 대체 어떤 수를 써서 ‘머릿속의 목소리들’을 버리고 ‘변함없는’ 현실의 진창 속에 발목을 잡히게 된 걸까.
사실 이 행성에서도 드물게 함께 지내게 된 서로 다른 육체들에서 영혼끼리 사랑에 빠져 새로운 육체를 탄생시켰다는 이야기를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아줌마가 아주 오래 전에 그런 경험을 해 본 영혼과 잠시 한 몸에서 머무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부모의 육체와 아이의 육체에 깃든 수많은 영혼들이 필요에 따라 수시로 자리를 바꾸는데, 그 모두가 긴 시간 동안 계속 함께 지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 중 한 쪽이 잠들거나 숨게 되면 그 사이에 다른 영혼이 육신을 이끌고 떠나버릴 수도 있고 땅이나 바다가 분열되어 눈앞에서 서로 헤어질 수도 있으며 아이의 육신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낯선 영혼이 자리를 바꾸어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아줌마가 만났던 영혼은 새 육신의 출산과 양육 전 과정에 대하여 ‘몹시 힘들었다’는 것 외에 다른 일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이 오기 전에도 이 행성의 거칠고 변덕스러운 자연 속에서 육신은 이론상으로는 영원히 살 수 있더라도 가끔 다치거나 병들거나 죽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도 개체 수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었으므로 누군가는 새 육신을 탄생시켜 사라진 육체의 수를 보충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다만 우리에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일 뿐 저들의 사회에서처럼 필수적인 일은 아니다.
내가 ‘변함없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자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사진을 내 눈 앞에 내밀었다.
나는 사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줌마는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 남녀관계에 대해 알고 있나요?
여자가 물었다. 나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어 여자를 쳐다보았다.
-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려면 여성의 몸은 이런 방식으로 남성의 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자가 설명했다. 사진을 한 장 넘겼다.
- 그러면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가 이런 식으로 여성의 몸 안에서 결합하고, 그러면 여성은 임신을 해서….
여자가 설명하면서 사진을 넘겼다.
- … 아이를 낳게 되죠.
여자는 사진을 계속 넘기면서 말했다.
- 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위해 희생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은 신이 여성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의무입니다.
“그럼 이 여자는 자기나 희생 많이 해서 남편 새끼랑 애새끼들이랑 가정에 처박혀 계시지 왜 여기 와서 헛소리 하고 있어?”
소년이 빈정거렸다. 아줌마가 소년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얼굴에도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여자가 말을 이었기 때문에 나는 안도했다.
- 의무일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합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상 최고의 축복이며 더없는 기쁨입니다. 신이 내리시는 가장 아름다운 은총이죠. 당신이 진심으로 이 행성의 혼란한 죄악을 떠나 은혜로운 삶으로 향하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여자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 신을 위하여 주어진 작업을 성실히 이행하고, 돌아오면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후대를 양성하며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이제 구체적으로 이해했나요?
여자는 다정하게 웃었다.
- 결심했습니까?
- 예.
나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다 함께 행성의 바다에 휩쓸리거나 갈라지는 땅에 잡아먹히는 한이 있어도 결단코 이 쇳덩어리 감옥에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노예였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처럼 노화라는 과정을 거쳐 약해져서 죽어 사라지지 않고, 적절한 환경과 조건만 맞추어준다면 계속해서 생존하며 노동할 새로운 육체가 최대한 많이 생산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깃든 이 육신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나와 아가씨와 소년과 꼬맹이와 아줌마가 힘을 합쳐 지키고 돌보아야 할 생존의 바탕이자 세상에 둘도 없는 안식처였다. 나는 어두운 방에서 우리를 에워쌌던 경비병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이미 몇 번이나 우리의 육신과 영혼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고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 몸 안에 함께 깃들지도 않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우리의 육체를 ‘바치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귀중한 영혼의 생명력을 낭비하며 그들이 원하는 추가적 노동력을 생산하고 양육해줄 의향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나는 눈 앞에 앉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자신도 우리와 같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든 거짓말이든 상관없었다. 여자는 그들 중 하나였다. 그들의 앞잡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노예였다.
그들의 세상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친절하게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여자를 뒤로 하고 방을 나왔을 때, 그리고 다음날 아침 경비병이 나를 불러내어 비행정으로 데려갔을 때,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소리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떠난다. 일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야만 했다.

그들의 세계에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듯이 우리의 행성에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영혼은 행성을 떠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나는 아직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아줌마는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아줌마는 언젠가 함께 지내던 영혼이 떠나간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이가 아주 많은 영혼이었어.”
아줌마가 말했다.
“떠나기 얼마 전부터는 그냥 계속 숨어서 잠만 잤어. 거의 앞으로 나오지도 않고, 나오게 하려고 해도 반응도 잘 못 하고….”
그러다가 나이 많은 영혼은 떠나기 직전에 갑자기 눈을 떴다. 아줌마에게 이제까지 목격했던 행성의 여러 모습과 겪어보았던 지난 육신과 그 육신에 함께 깃들었던 다른 영혼들에 대해 물었다.
“나보고 언제가 제일 좋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 그런데 난 그 때 아직 젊어서 별로 겪어본 게 없었어.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앞으로 더 좋은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그랬어. 내 딴에는 위로한다고 한 말이었지, 그 분이 많이 약해져서 곧 떠날 거라는 거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아줌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금 웃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뭐라는지 알아? 지금이 제일 좋을 때래. 지금이 이 생에서 가장 좋을 때라는 거야.”
“왜요?”
소년이 물었다.
“죽기 직전인데 좋긴 씨발 개뿔이 좋아?”
“상스러운 말 쓰지 마라.”
아줌마가 주의를 주었다. 소년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줌마는 다시 웃었다.
“나도 사실 그 때는 똑같은 생각을 했었어. 죽기 직전인데 뭐가 좋을까. 혹은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죽기 직전에야 좋다는 생각이 든 건가 – 그렇게 생각하니까 참 암담해졌었지. 그런데 지금은 알 것 같아.”
“뭔데요?”
내가 물었다. 아줌마가 말했다.
“항상 지금이 제일 좋은 때인 거야. 이미 지나버린 일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알 수가 없으니까. 지금, 당장, 이 순간이 언제나 생에서 가장 좋은 순간인 거다. 뭐가 됐든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뿐이니까.”
비행정이 하강하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허공의 성채는 이미 떠나왔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들뜬 다른 영혼들과는 달리 나는 발밑의 땅이 어떤 모습일지, 그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다른 육신들과 함께 한 줄로 발목을 묶인 채로 비행정에 앉아서 나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금, 갇혀버린 과거와 텅 빈 미래 사이에서 천천히 하강하고 있는 지금이 그나마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했다.

착륙은 쉽지 않았다.
비행정이 공중 요새를 떠났을 때 착륙 지점은 풀밭 한가운데였다. 그러나 하강하는 사이에 지표면은 천천히 갈라져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아갔다. 한쪽은 찢어져 내려앉으면서 단층과 지괴의 속살을 전부 드러낸 거대한 절벽으로 변했다. 다른 한 쪽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행사는 원래 지정되었던 위치를 포기하고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 ‘안전한 곳’이 어디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지상의 다른 부분이 착륙에 조금 더 적합하다는 통보를 받고 비행정이 그 쪽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땅은 다시 갈라져서 돌아갔다. 그리하여 착륙하려던 지점은 호수 한가운데가 되어버리거나 사막으로 변해 모래폭풍이 몰아치거나 진흙탕 속에 악어가 돌아다니는 늪지로 변했다.
영혼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왜 안 내려?”
꼬마가 울상이 되어 투덜거렸다.
“왜 계속 흔들흔들해?”
“행성도 싫은 거야. 저것들이 발 붙이지 못하게 하려나봐.”
아줌마가 소근거렸다.
“우리까지 발 붙이지 못하게 되면 씨발 어쩌라구요.”
비속어 없이 문장을 완성하는 능력이 결여된 소년이 말했다.
처음에는 같은 육신 안에 모인 영혼들끼리 수근거렸지만 목소리는 차츰 커졌다. 발목이 묶여 나란히 앉은 육신들끼리 불안하게 눈짓을 하기 시작하자 경비병 하나가 총을 겨누며 몸을 일으켰다.
경비병이 위협적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비행정이 휘청거렸다. 한 옆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마치 거대한 손이 우리를 흔들어 섞으려는 것처럼 비행정이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우리들은 발목이 묶인 것 외에도 좌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반면에 경비병들 중에는 착륙이 가까워지자 스스로 안전장치를 풀어버린 성급한 사람들이 있었다. 총을 겨누며 몸을 일으켰던 경비병도 그 중 하나였다. 비행정이 흔들리자 경비병은 서 있던 자리에서 튀어나갔다. 그러면서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목표물 없이 마구잡이로 발사된 광선은 여러 육체에 굉장한 해악을 끼쳤다. 우리 옆에 앉아 있던 육신이 머리를 힘없이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우리를 덮으면서 쓰러졌다. 그 불쌍한 육신 덕분에 우리는 이후의 위험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의 절반이 깔려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얼굴을 돌릴 수가 없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비행정은 한쪽으로 쏠린 그대로 방향을 되찾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기울어진 채 점점 더 빨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추락한다.”
소년이 갑자기 속삭였다.
“비행사가 맞았나봐.”
꼬마가 언제나 그렇듯이 형의 발언에 대해서 뭔가 질문하려 했다.
그 순간 비행정이 지면에 충돌했다.

먼저 깨어난 것은 아가씨였다. 그 다음으로 내가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럽고 발목이 몹시 아팠다.
“삐었어.”
아가씨가 말했다.
“부러진 건 아냐.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아가씨가 발목을 들어올렸기 때문에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아가씨가 다시 속삭였다.
“여기 봐. 풀렸어.”
아프니까 제발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풀렸다’는 말에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경비병들이 채워둔 족쇄는 그대로였지만 비행정 바닥에 연결하는 고리 부분이 빠져 있었다.
“아직 안 풀렸어.”
언제 깨어났는지 아줌마가 반박했다.
“옆의 발목하고 이어져 있잖아.”
우리는 그 말에 따라 옆에 쓰러진 육체를 바라보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 육체의 발목은 아줌마의 말대로 쇠사슬로 우리 쪽과 연결돼 있었다.
“열쇠.”
아가씨가 속삭였다.
“경비병 주머니.”
그 말을 듣고 아줌마가 가장 가까이 쓰러져 있는 경비병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팔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아줌마가 흩어졌다. 비명도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냥 산산이 부서져서 사라졌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육신 안에서 그대로 굳어져 유리 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나도 함께 부서질 것 같았다.
아가씨가 앞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뒤로 돌아서서 경비병에게 덤벼들었다. 다시 한 번 총이 발사되는 굉음이 들렸으나 이번에는 빗나갔다. 대신 몸에 익숙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가씨는 얻어맞는 것 정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총을 밀어내며 오른손으로 경비병의 목을 잡고 덤벼들어 한 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 경비병을 올라타고 앉아서 때려서 제압하다가 경비병이 몸부림치며 총을 겨누려 들자 소총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아가씨는 왼팔에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부상당한 왼팔은 균형을 잃었고 그 틈에 경비병이 몸을 일으켰으며 아가씨는 순식간에 밑에 깔렸다. 경비병은 소총을 목에 대고 누르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그대로 으깨질 것 같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시간이 이상할 정도로 느리게 흘렀다. 얼어붙은 채로 나는 마치 아무 상관없는 남의 일처럼 숨을 못 쉬니까 이제 조금 있으면 끝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소년이 앞으로 나서서 기지를 발휘했다. 부상당하지 않은 오른팔을 뻗어 경비병의 귀를 비틀어 잡아당겼다. 귀가 찢어지면서 경비병이 비명을 질렀다. 한 순간 목이 자유로워졌다.
소년은 그 틈을 타서 총을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경비병이 더 빨랐다. 눈앞에 총구가 다가왔다. 소년은 총구를 밀어내려 했으나 얼떨결에 부상당한 왼팔을 들어올렸다. 다친 팔은 반쯤 올라가서 총대를 살짝 위로 밀어올리다가 그대로 힘없이 떨어졌다.
머리 왼쪽에 충격과 함께 타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소년이 사라졌다.
경비병이 다가와서 내려다보았다.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 다시 총을 겨누었다. 나는 무감각하게 올려다보았다. 낯선 총구는 어쩐지 신기하고 흥미로워 보였다.
그 때, 기기기기긱… 하는 굉음과 함께 비행정이 다시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경비병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도 같이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경비병은 반으로 찢어진 비행정과 함께 용암 속으로 빠져들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비행정의 나머지 반쪽은 우리를 실은 채 빙글 돌았다. 다친 육신은 종잇장처럼 휘둘리며 금속으로 된 비행정 안쪽의 딱딱하고 거친 어딘가에 세게 부딪쳤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는 고요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팠다. 무시무시하게 아팠다.
아프다는 것은 부서져서 흩어지지 않고 아직 온전한 채로 이 육체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그것 하나만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상황은 그다지 다행스럽지 못했다.
머리가 아팠다. 왼쪽 절반 전체가 욱신거렸다. 왼팔도 아팠다. 발목도 아팠다. 육체의 모든 조직이 경비병의 총에 맞아 타 버리고 신경이 날것으로 드러나서 통증의 감각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나는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꼬마가 깨어나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프고 무서워서 울었다. 그러다가 형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걷잡을 수 없이 경련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소리와 통증 때문에 아가씨가 깨어났다. 그러나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눈을 반쯤 뜨고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사라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겁먹은 꼬마를 제외하면 아가씨는 지금 내게 남은 유일한 동지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꼬마는 이제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질러가며 울었다. 아가씨가 신음했다.
“아픈 거 나도 알아.”
내가 속삭였다. 큰 소리로 말할 기운이 없었다.
“나도 힘들어. 그렇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
아가씨가 다시 눈을 떴다.
“가지 마.”
내가 말했다. 아가씨는 대답 대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나는 위태롭게 걷기 시작했다. 발목의 족쇄는 이미 반쯤 부서졌지만 다치지 않은 한 손만으로는 아무래도 풀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장치를 발에 달고 질질 끌면서 걸어야 했다. 머리가 아팠고, 온몸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움직였다. 기울어져 땅에 박힌 비행정 바깥으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기어나왔다.
아가씨는 산에서 왔다. 꼬마는 바다에서 왔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몸은 심하게 부상당했다. 비행정이 하강할 때 보았던 것처럼 눈앞에 사막이나 화산지대가 펼쳐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구르다시피 간신히 비행정 밖으로 나왔다.

바깥의 하늘은 뿌옇게 희끄무레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땅도 하늘과 비슷하게 흰색이었다. 사방이 모두 희었다.
비행정을 내려와 땅을 디딘 순간 발 밑에 단단하고 파삭파삭한 것이 닿았다. 걸음을 내딛자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얼음조각이 섞인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왼쪽 머리와 왼쪽 팔에 박힌 열기, 맥박과 함께 규칙적으로 솟아오르던 타는 듯한 아픔이 한 순간에 식었다. 그 대신 전혀 다른 감각이 솟아올랐다.
집에 돌아왔다.
이곳이 나의 고향이었다. 이 눈과 얼음이 내가 생겨난 기원이었다. 나는 이 황량한 아름다움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다.
뿌옇던 하늘이 조금 흐려져 회색이 되었다. 가느다랗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눈의 의미와 바람의 방향을 전부 뚜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차가운 기쁨이 나를 감쌌다.
나는 다친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비행정으로 다시 올라갔다. 경비병의 제복과 신발을 벗겼다. 옷이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도록, 부상당한 팔로 최대한 기운을 짜내어 단단히 껴입었다.
그러다가 열쇠를 발견했다. 발목의 거추장스러운 족쇄를 풀었다. 그리고 도구가 될 만한 쇠막대를 하나 찾아서 집어들었다. 총은 필요 없었다.
나는 다시 비행정을 나와 눈밭으로 내려왔다.
꼬마는 오래 전에 울음을 그쳤다.
“여긴 어디야?”
꼬마가 물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았다.
아가씨가 다시 힘겹게 눈을 떴다.
“어디로 가는데?”
아가씨가 물었다.
“비행정에 숨어 있는 게 낫지 않아?”
“아니. 이젠 숨을 필요 없어.”
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가야 돼. 어디로 가야 할지 내가 알아.”
그 말에 아가씨는 힘없이 살짝 웃었다.
다친 팔을 붙잡고 욱신거리는 머리의 통증을 참으며 부어오른 발목에 의지해서 눈 속을 걷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뒤에 핏자국을 남기지 않는지 확인하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걸으면서 나는 소년을 생각했다. 아줌마를 생각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아가씨를 꽉 붙들고 있는 꼬마를 생각했다. 꼬마에게 안겨 조금씩 흩어져 사라져가는 아가씨를 생각했다.
우리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은 나도 안다. 그러나 이곳이라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어디에 몸을 숨겨 휴식을 취하고 마실 물과 먹을 것을 어떻게 구하고 얼마나 잠을 자고 언제 깨어나 어디로 또 떠나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이곳에서라면 몸이 버텨주는 한, 아가씨와 꼬마가 버텨주는 한, 우리를 최대한 잘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나의 땅이었고, 나는 살아 있었다.
삶에서 죽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짧은 시간이 지금의 육신에서 지낸 모든 순간을 통털어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아가씨와 꼬마에게 최대한 고통 없이 편안하게 지나가 주기를, 그리고 우리가 더 변화무쌍하고 더 자유로운 곳에서 언젠가 꼭 다시 만나기를...
눈 속을 걸으면서 나는 빌었다. 그들의 신이 아니라 나를 이곳으로 보내준 그 무엇에게, 선하지도악하지도 않으며 무심하고 공명정대한 존재에게,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알고 돌보고 결정하는 누군가 혹은 어딘가에게.
눈이 개이는 차가운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고향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의 기원이 멀고 가까운 곳에 닿았음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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