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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노병들

2013.03.01 00:5003.01

노병들




처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안이니 조금 더 기다려보라는 친절한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자 휴대폰의 무게가 가볍게 뒷목을 자극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가락을 세워서 아주 천천히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네 장의 종잇장을 만졌다. 엄지손가락 끝으로 엷게 돋을새김 되어 있는 세종대왕님의 얼굴 윤곽이 느껴졌다. 4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적지 않다. 공원 뒤편에 늘어서 있는 고깃집에 들어가서 종범이 녀석과 술을 한잔할 수 있을 것이다. 고깃집이 아니라 중국 요릿집에 들어가서도 적당한 가격의 고급 요리에 술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종로 3가 역 바로 앞에 있는 일본식 돈가스 집에서 안심이나 등심을 시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에어컨 바로 앞에 앉아서 시원하게,

땀에 젖은 모시 적삼이 등줄기에 들러붙었다. 등을 꼿꼿이 세우려고 했지만 모시 적삼은 영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의 일이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며느리가 항상 화장대 오른쪽에 돈을 넣어둔다는 것을 안 건 정말 오래전이었고 그전에는 단 한 번도 그 돈을 꺼내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금 와서 며느리에게 말해 보아야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화장대 오른쪽에서 만 원권 한 장을 집어 들었을 때 문이 열렸고 무어라 입을 뗄 틈도 없이 며느리는 팔자로 처진 눈썹을 하고는 말없이 만 원권 네 장을 꺼내 내 주머니에 꽂아주었다. 나는 가래를 돋워 보도블록에 침을 뱉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경우 없는 계집애가 누굴 민망하게 만들려고…… 라고 생각하다 고개를 숙였다. 그 착한 며느리를 두고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생각이 아닌가. 더욱이 며느리는 지금 거의 남산만큼 배가 부른 상태였다.

나이 든 시아버지를 봉양해야 하는 딸아이 걱정에 얼굴이 어두운 사돈을 앞에 두고 나는 연금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혼자서도 괜찮다고 큰 소리 떵떵 쳤던 건 내 쪽이었다. 연금은 자주 연체되었다. 벌써 반년 가까이 연체되고 있는 연금을 달라고 전화를 걸면, 지금처럼 이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여자가 몇십 분 가까이 걸리는 통화 끝에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말해 준 뒤 전화를 끊기 일쑤였다.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퇴직 공무원이었다. 어디에도 내 근무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청와대에 글을 쓸 수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전화기 너머의 직원에게 내가 조국을 위해 바람을 불러왔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괴로웠다. 평생 나쁜 놈들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어느새 자신이 도둑놈이 된 셈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생활이 넉넉해 본 적은 없었고 결국 아내에겐 고생만 시켰지만, 아들을 마주할 기회만 있으면 나는 아무리 사정이 어렵고 생활이 괴로워도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기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마음속으로 내가 사회 속에서 사는 인간이라는 점을 몇 번씩이고 되새겨왔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는 아무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원망하다간 결국 내가 사는 세상마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설마하니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의 기둥까지 무너진 것일까. 가슴이 서늘해졌다.

전철 안에 자리가 없었다. 나이 어린 총각애 하나가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치어다 보고 있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많이 늙었고 저 청년은 그렇게 피로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청년 앞에 가서 섰다. 에어컨 바람이 모시 적삼 사이로 스며들면서 조금 등이 편해졌다. 청년은 계속 입을 벌리고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청년에게는 눈 앞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몇 번 헛기침 했고, 청년의 눈동자는 약간 흔들렸지만, 다시 천장에 고정되는 것을 반복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에어컨에서 쏟아져 내린 바람들을 몇 가닥 조심스럽게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므로 내 머리 위에서만 천천히 맴돌게 했다. 잠시 뒤, 나는 그 바람들을 죄다 청년의 엉덩이 밑으로 밀어 넣었다.

“으어!”

소리를 지르며 청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바람들은 청년의 등과 엉덩이를 떠밀어냈다. 나는 가볍게 바람들을 전철 안에 흐트러뜨리고 그 자리에 앉았다.

독립문역을 지나면서부터는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늘어갔다. 곧 도착이었다. 오직 이곳에만 정의의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역 계단을 올라오면서부터는 다시 내 몸에서 나는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결국, 며느리에게 새 빨랫감을 오늘도 늘려 주게 될 것이었다. 벚꽃처럼 수십 개의 태극기가 공원 문 앞에서 반짝거리며 흔들렸다. 나는 느릿느릿 배를 조금 내밀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손병희 선생의 얼굴은 오늘도 경건했고, 손병희 선생을 치어다보는 시야로 종범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형님, 이렇게 휴대폰 목에 걸고 다니다가 말년에 디스크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여, 스마-트폰은 두껍기도 두껍고 무겁기도 오죽이나 무거운데. 형님 같은 약골은 디스크 금방이야.”

팔각정에 도착하자마자 종범은 모자를 벗고 팔각정 한가운데 우뚝 섰다. 그리고 익숙하게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종범의 목소리에 실린 에너지는 하루가 다르게 옅어져 갔지만 미군정 때부터 종범은 포기를 모르는 놈이었다. 종범 역시도 자신의 목소리가 갈수록 힘없이 흩어지는 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종범은 굴하지 않고 애타게 목청을 부여잡았다. 영감들은 종범이 노래를 부르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몇몇은 얼쑤, 좋구나, 를 외치기도 했지만. 대체로 종범은 팔각정 주변의 영감들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기 위해 노래했다. 종범 덕분에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노인네들은 그럭저럭 유쾌한 기분으로 웃고 떠들었다. 종범 덕분인지는 영영 모르겠지만.

아리라흥, 우리라흥, 아리어리우리라흥.

바람이 모시 적삼 속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아이고, 시원허다.”

이마 위로 땀줄기가 스쳐 지났고 비둘기가 종종거리며 옆을 지나쳤다. 늘 그렇듯이 시원한 바람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바지춤에서 부채를 꺼내 들었다. 바람 정도야 이 부채만으로도 탑골공원 전체에 휘몰아치게 할 수 있었다. 가볍게 목 주변을 부채로 부치는 내게 종범이 슬그머니 웃어 보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이 어린 한 쌍이 손을 꼭 붙들고 천천히 걸어서 팔각정 옆으로 다가왔다. 계집아이 쪽이 종범 쪽을 손가락질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노래를 부르는 종범 대신 웃음을 터뜨린 계집아이에게 화단 근처의 얼치기 영감들부터 팔각정 가운데 자리 잡은 말 많은 영감들까지, 모든 노인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삿대질을 멈추지 않으며 연인을 치어다보는 계집아이의 하얀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계집아이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그럴 수도 있었지만, 모르는 게 있으면 알아가야 할 일이었다.

계집아이가 사내놈에게 달라붙어서 스위티, 어쩌고, 영어로 주절댔다. 사내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겨오는 팔을 몇 번 떨어내려고 시도했지만, 계집애는 그때마다 눈치 없이 다시 사내놈의 팔에 엉겨 붙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주둥이를 쭉 내밀었다. 사내놈은 계속 주변을 둘러보며 영감들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입이 귀에 걸릴 듯이 웃어대더니, 결국에는 계집아이의 입술에 손가락을 몇 번 가져다 대다가 슬쩍 계집아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계집애가 물을 만난 듯 사내놈의 혀에 혀를 얽어대기 시작했다. 세조의 비가 세조의 죄를 씻기 위해서 세웠던 그 원광사지 십층석탑 바로 앞에 서서. 그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누구나 모르는 게 있으면 배워야 했다.

나는 가래침을 뱉으면서 바닥을 발로 슬쩍 내질렀다. 중력의 도움을 받아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가래침은 그대로 신 나게 바람을 가르고 달려서 계집애의 허벅지에 철썩 들러붙었다. 잠깐 입술을 떼고 고개를 숙인 계집애가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계집애는 사자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지만, 석탑 근처까지 걸어온 영감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종범의 노래를 감상했다. 종범의 노래가 겨냥하고 있는 건 사내놈 쪽이었다. 종범은 분명히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저런 어린 놈의 기분 정도야 누워서 떡 먹기였다.

사내놈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비명을 지르는 계집애를 오만상을 찡그린 채 보고 있었다. 종범의 목소리가 흔들거리며 허공으로 날아들었고, 사내놈은 계집애에게 그만 좀 하라고 벌컥 소리를 지르며 계집애를 떠밀었다. 날뛰던 계집애는 모랫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치마가 뒤집혀 계집애의 파란 줄무늬 팬티가 보였고, 영감들은 슬그머니 모두 계집애를 주목했다. 계집애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영어로 소리를 치기 시작했고, 사내놈은 무어라 한 마디 내뱉고는 인사동 쪽 쪽문으로 휑하니 자리를 떴다. 계집애 역시 씩씩거리며 종로 쪽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모든 실패에서는 배우는 게 있게 마련이었다. 종범이 내 어깨를 툭 쳤다.

"형님, 안 죽었네."

말세는 말세였다. 하기야, 말세가 아닌 적이 어디 있기는 했던가. 우리는 여느 때처럼 장기를 두는 영감들 옆에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서 단둘이서만 아는, 끔찍한 말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격퇴해 온 말세의 끔찍한 망령들과 선량했던 옆집 처녀들을 충동질해 야산으로 데려갔던 빨치산 놈들에 대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 놈들 틈바구니에서 엿가락처럼 긴 팔을 뻗어 경찰들의 방패와 곤봉을 날리던 흉물스러운 그 남자에 대해서. 법이고 뭐고 없이 대로변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던 마녀 같은 그 여자에 대해서. 옛날이야기 속에선 여전히 대쪽같이 정의와 허기의 시간이 살아 있었다. 모두가 그때는 배가 고팠다. 허기를 감내하는 것이 정의였고, 허기를 막아줄 수 있는 것이 정의였다. 장기판 주변의 노인들은 눈을 빛내기도 하고 훈수를 두다 조용히 좀 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허나 그들 역시 정의와 허기의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흔들리는 종범의 모자 깃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깃털 너머로 낯익은 표식을 발견하고는 얼떨결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기판이 약간 흔들렸고, 이기고 있는 편의 몇 명이 안타깝게 소리를 질렀다. 틀림없었다. 눈앞으로 이파리 다섯 개 모양 대마초 문신이 뾰족하게 새겨진 팔뚝이 지나갔다. 이기고 있던 쪽이 내게 무어라 큰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꼼짝도 않고 녀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여멀건 한 얼굴, (숱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목을 덮는 구불구불한 곱슬머리, (근육이 모두 없어져서 헐렁해 보였지만) 러닝셔츠 같은 민소매 셔츠에 관자놀이 옆으로 지나가는 큰 흉터 자국이 모두 그대로였다. 도무지 잘못 볼 수가 없는 그 걸음걸이. 여전히 녀석은 어깨를 비뚜름하게 추켜올리며 해괴한 스텝으로 춤을 추는 것 같이 걸어갔다. 어느새 종범도 입을 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크게 열린 동공으로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녀석이었다.

녀석을 처음 만난 건 광복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있었던 파업 사건 때였다. 나는 탱크와 기관총 뒤에 숨어있었지만 내게 걸려있는 기대는 탱크 이상이었다. 군인들은 열다섯 살 소년을 조심스럽게 이동시켰다. 서울 어디든 골목골목마다 소문이 파다했던 바로 그, 대한민청 감찰부장님이 내 어깨에 따뜻하고 묵직하게 손을 얹었다. 나는 김좌진 장군의 피가 내 심장으로 흘러드는 기분이었다. 거의 열흘째 철도가 완전히 마비 상태였다. 장사꾼들은 물건을 나르지 못했고, 환자들은 병원에 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쌀, 쌀을 옮길 수 없었다. 감찰부장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넘어왔다. 네 손에 달려있다.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모든 무기보다도 바로 내 손이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굶고 있었다. 서울철도 파업단에는 수많은 사람이 진을 치고 있었다. 두 대오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났고 함성이 하늘을 치받으면서 경관들 앞에 선 대한노총 청년들은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사람들에게 쌀을 실어다가 줄 기차를 움직이기 위해 방망이들이 용감하게 움직였다. 감찰부장님은 힘차게 내 등을 쳤다. 자, 나가라. 나는 그들을 노려보며 힘껏 바람을 떠밀었다. 방망이들 사이로 날카롭게 달려나간 바람은 격전지를 한참 지나 적진 한가운데에서 칼을 뽑아들었고 곧 피가 솟구쳤다. 바람에 얻어맞고 몇 명이 바닥에 나뒹군 듯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정신없이 양손을 뻗었다. 어디로 바람이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바람 끝에 휘말려 눈이나 손을 잃어가고 있을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어린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휘젓다가 손을 붙잡는 강한 힘에 바닥에 넘어졌다. 다루고 있던 바람이 사방으로 터졌고, 내 옆에 서 있던 경관의 양 발목이 끊어졌다. 손을 붙잡은 건 땅속에서 불쑥 뻗어 나온 손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손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땅 밑에서 뻗어 나온 긴 팔은 더욱 억세게 내 손을 휘감았다. 손에 이끌려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버둥거리고 있자, 감찰부장님은 부대들에 각기 지시를 내리고 나서 권총을 들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손목을 휘감은 손가락은 가늘고 희었지만, 도무지 떨치지 않았다. 감찰부장님은 망설임 없이 내 손을 향해 총을 쏘았고 나는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손이 자유로워졌다. 바닥에 구멍만 남기고 기괴한 손은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적진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손을 넣고 있던 소년 하나가 자기 손을 깨끗이 회수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쩡한 길이의 팔로 이쪽을 돌아보는 짧은 더벅머리의 소년은 나보다 한 뼘이나 키가 작았다. 뼈가 흐느적거리며 늘어나서 땅속을 통과해 오다니. 엿가락도 아니고. 소년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등줄기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의 넋 나간 시선을 받으며 아무렇지 않게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간 엿가락은 팔각정에서 가장 목이 좋은 그늘 자리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그는 노인 특유의 부들부들하게 살가죽이 늘어진 팔로 많이 구겨진 담배 한 갑을 꺼냈다. 그는 멍하니 담장 너머를 응시하며 담배를 빼어 물었다. 라이터를 찾느라 한참 가슴팍의 앞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뒤적이더니 불을 빌리기 위한 요량인 듯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끝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오래전 어느 순간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 주변을 훑어서 종범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길게 찢어 히죽 웃었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재빠르게 녀석의 주변을 훑어보았다. 마녀는 보이지 않았다. 백 걸음도 안 될 거리에서 서로 말도 붙이지 않고 서 있다니. 나는 금방이라도 그의 손이 치솟아 오를 듯해 발끝으로 바닥을 슬슬 다져보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서자, 며느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묵묵히 방에 들어가서 모시 적삼을 벗었다. 땀에 젖어서 거의 반쯤 비치게 된 모시 적삼에서 냄새가 진동했다. 엿가락의 러닝셔츠 뒤에도 땀이 배어 있었다. 녀석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모두에게 유일한 정의의 장소였던 팔각정이 주춧돌부터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녀석을 몰아내야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녀석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나는 팔각정에서 멀리 떨어진 벤치에 앉았고, 종범은 바닥에 칵 소리 나게 침을 뱉고는 다시 팔각정 가운데에 서서 노래를 시작했다. 종범의 노래에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옷을 모두 벗어두고 방에 딸려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물소리 뒤로 며느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 옷을 챙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며느리가 준 4만 원이 여전히 주머니에 있을 터였다. 며느리는 꼼꼼한 아이였고 결코 돈을 세탁기에 넣는 일은 없었다. 따뜻한 물속에서, 나는 며느리가 부른 배를 한 손으로 안고서 지독한 땀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주머니를 뒤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알몸으로 욕실을 나오자, 갈아입을 옷가지와 주머니 속의 4만 원이 정갈하게 욕실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주름이 진 허벅다리가 오늘따라 유달리 말랑하게 느껴졌다. 하루가 다르게 부드러운 몸이 되어 가고 있었다.

팔각정 한구석에 어제와 같은 뒷모습이 보였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규칙을 전혀 모르는 태도였다. 가만히 보니 엿가락의 머리는 숱만 줄어든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세어 있었다. 저렇게 머리카락에 힘이 없어 보이는데도 곱슬거리는 모양새는 그대로라니. 공원 옆에서 들려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순라 행진의 음악 소리가 쨍쨍하게 들려왔다고, 엿가락은 늘 그렇듯이 그저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인데도 음악에 맞춰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는 것처럼 팔을 움직였다. 공원 안의 노인네들 대부분이 존재 자체가 이상한 이 녀석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슬그머니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십 년 전에도 엿가락은 불량해 보였고, 양놈처럼 빛나는 저 갈색 머리카락 덕분에 눈에 쉽게 띄었다. 수많은 경찰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저 불량한 차림새를 한 번도 바꾸려 들지 않은 놈이었다. 모두가 녀석을 수상쩍게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등 뒤에 탱크 군단이라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놈이 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한순간에 정의가 사라질 리가 없었다.

녀석은 담뱃불을 끄면서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이 비뚜름히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실쭉하니 웃어 보였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엿가락은 싸움을 걸어올 때면 먼저 웃었다. 귀신처럼 웃는 남자에 대한 소문은 오래도록 우리 쪽을 맴돌았고, 수많은 청년이 저 소름 돋는 미소에 희생되었다. 나는 수많은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저 눈을 피한 적이 없었다. 저 눈과 맞서 싸워 왔다. 오래전의 기억들이,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낡은 감각들이 손끝에서 다시 꿈틀거렸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 녀석은 주변을 휘둘러보고는 팔각정 밑으로 내려와 화단 쪽으로 다가섰다. 늘 볕 쬐던 자리를 잃어버린 고양이처럼 좌불안석이던 종범은 녀석이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늘 아리랑을 노래하던 자리로 뛰어 올라갔다. 나 역시 종범의 뒤를 따라 팔각정 한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았다. 엿가락은 여전히 춤을 추는 듯이, 양쪽 발끝을 희한하게 교차시키며 화단으로 다가가서, 화단 가운데 있는 벤치에 앉는가 싶더니, 벤치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화단 쪽 벤치에는 그늘이 없었다. 그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들은 지독히도 말이 없었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팔각정 쪽을 흘깃거리며 자기 옷자락만 때가 타도록 만지작거리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차라리 이상한 행동을 하는 노인들이 나았다. 말이 없는 노인들이 앉는 자리는 결국 화단 근처의 구석 자리였다. 오랫동안 싸워 왔던 나 같은 사람들은 그 노인들의 파리 쫓는 송아지처럼 끔뻑끔뻑한 눈동자만 봐도 어떤 종자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여럿이 모여서 목소리가 커졌을 때는 우리와 곧잘 맞섰으나 혼자 떨어지면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한 놈들. 이번에도 엿가락은 자신이 찾을 곳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돌이켜보면 녀석은 항상 저런 식이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도 않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힘이 없는 저 멍청한 놈들 옆에 붙어 앉아서 이러니저러니 그놈들의 성질머리를 돋우는 것엔 천부적 재능이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멀찍이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화단 쪽을 지켜보았다. 엿가락이 입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심한 얼굴들에 웃음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끝내는 왁자하게 웃음소리가 터졌다. 여기저기 앉아서 담소를 나누던 노인들이 모두 화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웃음소리와는 상관없는 공간에 앉아서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면서까지 웃고 있었다. 엿가락은 옆에 웅크리고 앉아 무어라 중얼거리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파도처럼 팔각정을 끼얹었고, 물을 맞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모두 조용해졌다. 안 될 일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종범은 팔각정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종범의 노랫소리에 조금씩 불안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팔각정은 하나였지만 화단은 공원 곳곳에 놓여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저 멍청한 놈들이 목소리만 커져서는 이 댓돌 위까지 올라오려고 할 수도 있었다. 한 놈씩 다가와서 말을 걸어오는 것과 여러 놈이 우르르 댓돌 위로 올라오는 건 정말이지 다른 일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불가능한 흰소리를 종범에게 던져 놓고 나는 낡은 가방 안에서 책을 꺼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책만은 계속 읽겠다고 결심한 것이 10년도 넘었다. 언제나 책은 읽는 것보다 읽을만한 것을 고르는 것이 난제였다. 읽을만하지 않은 책, 읽어서는 안 될 책, 읽는 것이 죽기보다 괴로운 책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다. 종이 아까운 줄 모르는 젊은 놈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리라. 책이란 적어도 바른 뜻을 펼치는 데에 사용되어야 했다. 책갈피를 집어 들고 읽은 곳을 빠르게 눈으로 훑어 내리다가 저자가 강한 어조를 사용한 부분에서 눈이 머물렀다.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이 땅에 엄존하고 있고, 그들이 남한 사회를 변혁시켜 한반도를 저들의 깃발 아래 통일하려고 하는 한 反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自由民主主義를 지키고자 하는 自由鬪士들의 고귀한 깃발이다. 反共은 역사 무대에서 매도되고 매장되어야 할 惡이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를 담보하는 善이다.』

까지 읽었을 때, 눈앞에 그늘이 지나갔다. 하늘에 구름이라도 끼고 있나 싶어 고개를 들자, 코앞으로 막 지나쳐 간 게 그 사이 친밀해진 엿가락과 화단 근처에 앉아 있던 녀석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저 얼치기들은 탑골공원에 자리를 잡은 지 몇 년 만에 느긋한 걸음으로 산책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팔각정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서서 석탑을 보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무언가 주절거리다가 탑돌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팔각정을 돌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화단들을 훑어보았다. 다른 화단에 웅크리고 있는 녀석들도 팔각정을 맴도는 저놈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멍청이들이 떼로 몰려서 옮기는 걸음. 나는 지금껏 수없이 저 걸음들을 목도해 왔고, 제일 앞에서 엉덩이를 쭉 빼고 어깨춤을 추고 있고 엿가락이 깃발만 치켜들면 한 장면이 완연해진다. 엿가락의 괴상한 몸짓에 얼치기 녀석들과 함께 탑을 구경하던 백인 여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헬로!”

엿가락은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찡긋했다. 허리춤에 살이 두툼한 오렌지 색 머리의 백인 여자가 싱글거리며 엿가락에게 무어라 영어로 말을 했다. 녀석은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며 듣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녀석의 얼굴은 여전했다. 쌍꺼풀이 짙게 자리한 눈동자는 엷은 재색을 띠었고 낯빛은 사내답지 못하게 허여멀건 했다. 녀석은 늘 반쯤 잠이 든 것 같은 나른한 표정으로 전장을 싸돌아다녔고 공순이들은 그게 멋지다고 수군댔다. 60년대에는 저 길게 기른 머리 위에 손으로 염색한 것 같은 천 쪼가리를 두르고서 혀를 굴리며 러브 앤드피스니 어쩌니 하면,

“쏘리, 아이 돈 노우잉글리쉬. 러브 앤드피스!”

그래, 저렇게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면서 휑하니 사라지면 경찰들도 저놈이 양놈인지 조선놈인지 구분을 못 하고 그냥 보내주곤 했었다. 백인 여자들은 깔깔대며 러브 앤드피스라고 녀석의 말을 맞받았다. 코리안 히피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팔뚝에 있는 대마초 문신을 가리키며 더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 좀 나아질 줄 알았건만, 저 나이를 먹도록 여전히 뭘 지켜야 하고 뭘 놓아야 하는 지도 구분을 못 하는 녀석이었다.

익숙한 풍경을 앞에 두고 종범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입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팔각정을 한 바퀴 돌아서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종범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종범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닫았다. 저 표정의 종범이 노래를 시작한다면 자칫 뉴스에 실릴 사달이 날 수도 있을 터였다. 녀석들이 우리 옆을 천천히 지나쳐갔다. 까불거리면서 엿가락이 힐끗, 이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도 밝혀져서는 안 되었다. 설령 연금이 제때 나오지 않아도,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와 종범은 죽을 때까지 이 비밀을 간직할 것이다.

정의의 시절들에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 텔레비전과 신문에 등장해서 자신이 당한 일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먹먹하게 모여 앉아 술을 부었다. 저항할 수 없는 약한 사람에게 끔찍한 짓을 했다고 젊은 놈들이 떠들어 댔다. 우리의 시절을 견뎌오지 않았던 어린놈들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시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당연히 나쁜 짓이지만, 그들은 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당이었다. 순진한 처녀를 희롱하고 있는 치한에게는 주먹을 날리는 것이 정의이듯이,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고 살해하는 빨갱이 악당의 소굴은 소탕하는 것이 정의였다. 더구나 세상은 결코 만화처럼 가볍게 굴러가지 않았다. 우리는 정의로웠지만, 우리의 정의를 위해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고문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세상은 들썩거렸다. 혹시라도 우리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들을 쏟아 낼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면 등 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정의롭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했다. 나는 맹세코 평생을 걸고 정의를 위해 노력해 왔다.

문득, 마녀가 떠올랐다. 마녀를 위해 손을 뻗었던 그 순간도 나는 노력하고 있었다. 마녀의 그 검고 커다란 눈동자도 장갑차 앞에서는 무력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향해 돌진하는 장갑차 앞에 선 마녀의 하얀 다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장갑차를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마녀의 긴 속눈썹이 가만히 감겼다. 나는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장갑차의 바퀴를 짓뭉갰고, 마녀는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 눈을 마주치면 안 되었던 거였는데. 그 새 마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칼바람, 이름이 뭐야?

철구.

난, 연주.

공중에서 엿가락의 긴 팔이 날아들어서, 마녀의 몸을 낚아챘다. 연주, 아니 마녀는 내 머릿속으로 미소를 보내고는 통신을 끊어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나는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녀는 그 순간 저항이 불가능한 가녀린 여성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뇌었다. 나는 여전히 내 조국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장기판 옆으로 갔지만, 장기에 훈수를 두기도 전에 종범은 푸르르 화가 났다. 어깨에 기타를 멘 계집아이 하나가 목이 훤히 드러나게 짧은 머리를 하고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공원 뒤쪽으로는 낙원 빌딩이 있었다. 낙원 빌딩에서 기타니 뭐니 낑깽이들을 팔기 시작하면서 영화관에 비역질하는 놈들이 모였고, 이제는 이 근처에서 저렇게 뻑뻑 담배를 피워대는 계집애 보는 것은 일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낙원아파트가 처음 생길 때는 결코 이렇지 않았는데. 아까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종범은 곧 담배를 피우는 계집아이를 익숙한 이미지에 연결 지었다.

“마녀 같은 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녀는 어떤 싸움판에서건 허벅지가 드러나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도로 한가운데에서 가늘고 긴 굽이 달린 빨간 구두를 신고, 마녀의 빨갛고 긴 손톱 사이에 끼워진 궐련, 궐련 끄트머리에 묻어 있던 빨간 루주. 언젠가 그녀는 <한국노총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쓰여 있는 천 쪼가리 아래, 약간 움츠려든 표정으로 소주병을 사이에 둔 채 모여 앉아 있던 석면 공장 근로자들 사이로 그 빨간 구두를 또각거리며 걸어 들어갔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주 느리게 한 쪽씩 다리를 들어서 발뒤꿈치부터 천천히, 구두를 벗었다. 누구의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좌중을 쭉 둘러보더니, 구두를 오른손에 모아든 그녀는 철퍼덕, 양반 다리를 하고 도로 한가운데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소주잔 하나를 집어 들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아직 진압 명령을 받지 못한 채 멀찍이 서 있던 나와 종범, 그리고 재성은 웃음을 터뜨리며 땅을 두드리는 마녀를 그저 지켜보았다. 석면 공장 작업복을 입은 젓가락이 사람들 사이에서 쓱 얼굴을 내밀고 마치 새처럼, 가지에서 가지로 뛰어내리듯이 마녀 옆에 앉았다.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술을 마신 마녀는 거칠게 엿가락의 팔을 잡아끌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근로자들 사이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고, 입술을 뗀 마녀는 요란스럽게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느새 그녀는 사람들의 중심에 앉아 있었고, 나는 파란 작업복 사이에 앉은 그녀가 파란 나뭇잎 사이에 피어난 열대지역의 꽃 같다고 생각했다.

굽 높은 구두에서 빠져나온 엄지발가락이 마녀의 웃음소리를 따라 까딱거렸다. 불그스름한 발뒤꿈치 위로 불거져 나온 복사뼈, 파란 실핏줄이 도드라진 종아리를 지나서 하얀 허벅지를 보았다. 마녀의 루주가 엿가락의 입술로 번져 있었다. 이 싸움이 끝나고 저 둘은 늘 그랬듯 무사히 이 싸움판을 빠져나가고, 엿가락이 자신의 입술에 있는 루주를 저 잡스럽게도 하얀 허벅지에 다시 문지르는 장면을 떠올리다가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저 간첩 년이 사람들을 홀려서 이 지경이 되었구만.”

아직 싸움 경험이 많지 않았던 종범은 긴장하고 있던 듯 빠르게 말을 받았었다.

“아주 시뻘건 빨갱이 년입니다.”

재성이 종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인마.”

대전에서 체불임금을 내놓으라고 공장 문을 닫아버렸던 실밥 따는 계집애들이 저 마녀에게 언니, 언니 하며 팔짱 끼는 모습을 보고, 나는 집에 와서 아들놈을 불러 앉혔다. 공순이들은 필연적으로 함부로 몸을 굴려 임신을 하고 사창가에 빠지는 아이들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공순이들은 만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졸음 섞인 눈으로 네, 아버지, 네, 아버지, 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열 번 이상 듣고서야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다행히 방직 공장에서 일하던 아내는 그날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아내는 경탄할 만큼 조신한 몸짓으로 옷을 갈아입고 내 옆자리에 몸을 눕혔다. 재성의 부인은 아내와 함께 일했지만 언제나 아내와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마녀와 엇비슷할 만큼 속 시원하게 잇몸을 드러내면서 웃던 얼굴을 떠올리자, 아내가 웃으면 옆에서 같이 낄낄대고 웃어대곤 하던 재성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어 그 얼굴을 지워냈다.

아무튼, 저 계집애를 마녀와 비교하는 건 도무지 어불성설이었다. 저렇게 평범한 계집아이도 담배를 물고 뻔뻔하게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게 한스럽다면 한스럽기는 했지만.

“무슨 말이야. 마녀라면 이런 거쯤은 막아내고도 남을 텐데.”

나는 손톱을 튕겨 담배꽁초를 날려버릴 생각으로 가볍게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마주 댔다. 그리고 바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언가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담배를 피우던 계집아이가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내 꼴을 보고 키득거렸다. 엉덩이께를 더듬자, 차가운 손가락이 만져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문 안쪽을 노려보았다. 역시나, 화단 근처에 웅크리고 앉은 엿가락은 송곳니로 담배를 꼬나물고는 키득키득거리며 땅바닥에 손을 쑤셔 박고 있었다.

나는 손 위에서 바람을 굴리면서 담벼락에 닿지 않도록 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자칫해서 담벼락에 닿았다가 담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매우 곤란해질 터였다. 첫 번째 바람은 3분의 2 정도 가다가 중간에 흩어졌다. 젊을 때에는 날아가던 바람도 한가운데에서 자유롭게 휘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직선거리로도 바람을 보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두 번째 바람이 엿가락의 팔에 맞았다. 엿가락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팔을 흔들다가 급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녀석을 핀치에 몰아본 것은 처음이라, 순간 가슴이 떨렸다. 녀석은 팔을 흐물흐물하게 만들려고 잠깐 시도했지만, 바람이 닿는 지점을 착각했고, 오히려 팔이 바람에 끊어질 것 같다고 판단하자 다시 몸을 원상태로 만들었다. 녀석의 상황 판단 자체는 아직 녹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충격이었다. 직선으로 바람을 보냈는데도 그 엿가락이 팔을 직격으로 맞았다. 85년 여름, 구로에서 맞붙었던 때, 엿가락만을 노리고 그의 온몸을 칭칭 휘감는 바람을 보냈던 기억이 났다. 악을 쓰는 미싱사 소녀들 사이에 주저앉아, 녀석은 멀찍이 서 있는 이쪽 청년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미싱사 소녀들은 녀석을 의식하고 있었다. 녀석이 바람에 휘말려 온몸이 뜯겨 나가면 분명 전열이 흐트러질 것이었다. 바람이 밧줄처럼 몸을 휘감으려고 한다는 걸 느끼자 엿가락은 몸 전체를 엿가락처럼 녹여서 납작하게 만들더니 칼바람의 오라를 빠져나갔다. 엿가락의 흐물흐물한 몸을 보면서, 우리의 싸움을 주의 깊게 지켜본 누군가가 있다면 내게도 엿가락에게도 박수를 보내줬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녀석의 팔뚝에서는 핏방울이 비쳤다. 엿가락도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예전 같았으면 팔을 끊었을 수도 있을 것을 핏방울만 비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엿가락의 눈을 바라보기가 수치스러웠다. 엿가락의 손아귀 힘이 약간 느슨해졌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차가운 손가락에서 바짓가랑이를 빼냈다.

나는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것처럼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려 했다. 바닥에서 두 개의 손목이 치솟아 올랐다. 두 개의 손은 노련했다. 한쪽 손바닥이 내 무릎을 밀어내고 다른 손은 그 손이 보이지 않게 빠른 속도로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려다 도로 자리에 앉았고, 발을 동동거려 담벼락에 붙어앉았다. 어디까지나 남들이 보기에는. 나는 있는 힘껏 엉덩이를 담장에 내리 찍혔다.

“거, 이 씨. 많이 더워? 땅바닥에 앉고 그래.”

“그늘이 시원하구만.”

손등으로 땀을 훔치면서 나는 일부러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몇몇 노인들은 날 턱짓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통의 표정은 완전히 숨길 수가 없었다. 꼬리뼈가 깨진 것처럼 아팠다. 이전 같으면 담벼락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내 내장까지 전부 파열시킬 수 있었을 텐데, 정말이지, 녀석도 많이 늙어 있었다.

종범의 목소리가 높고 거칠게 울려 퍼졌다. 종범은 엿가락의 파장에 맞춰서 노랫가락에 불쾌감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엿가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쾌감의 파동은 점점 강해졌고, 강한 파동을 견디다 못해 파동 자체가 일그러져 불쾌감이 주변으로 튀기도 했다. 뜬금없이 장기를 두던 노인 하나가 장기판을 거세게 내리쳤다. 엿가락의 주변에는 거대한 분노의 바다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바짓가랑이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종범의 대실패였다. 종범의 노래는 엿가락의 기분은 상하게 했지만, 엿가락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엿가락의 공격성은 몇 배로 뛴 것처럼 느껴졌다. 이 상태라면 오히려 엿가락의 이성이 끊어져서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엿가락은 있는 힘껏 내 엉덩이를 꼬집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꾹꾹 참았다. 개자식 같으니라고. 나도 굴하지 않고 녀석에게 바람을 날렸다.

빌어먹을 녀석, 손가락에 쇠뭉치라도 달았는지 엉덩이에는 감각이 없어져 갔고, 녀석이 엉덩이를 쥐어짤수록 손가락에서는 힘이 빠졌다. 하지만 녀석 역시도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이제 바람은 녀석에게 피 한 방울 내지 못했고, 그저 손바닥으로 슬슬 치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주먹질이었다. 그 주먹질에도 녀석의 러닝셔츠는 비라도 맞은 듯 땀으로 젖어 있었다. 녀석의 손아귀 힘이 느슨해졌다. 하지만 이미 나는 엉덩이가 너무 아파 일어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담벼락 아래로 축 늘어진 녀석의 손은 여린 나뭇가지 묶음을 닮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바람을 하나 보냈고, 바람은 정문을 지나 녀석을 향해 가다가, 문득, 시원한 바람이 종로 한복판에 휙 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녀석의 손이 담벼락 아래에서 천천히 빠져나갔다. 예의 화단 옆 얼치기 놈들이 녀석에게 와서 음료수를 건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기진맥진한 엿가락은 늘 하듯이 어깨를 기울여 유쾌하게 음료수를 받으려다 음료수를 약간 흘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낙원상가 쪽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꼬나물었던 계집애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씻지도 않고 텔레비전 앞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며느리는 대자로 뻗은 내 꼴을 내려다보더니 조용하고 빠르게 거실 구석에 놓인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삑, 삑. 가벼운 기계음과 함께 상쾌한 바람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숨이 확 트였다. 마치 여름이 아닌 것처럼 온몸을 감도는 공기가 너무도 시원해서, 나는 그만 며느리에게 호통을 쳐 버렸다.

“이거 당장 꺼. 사람이 말이야, 여름에는 더운 걸 알고 살아야지. 조금 덥다고 에어컨 틀고 조급 춥다고 보일러 틀고, 그래서 어디 사람 산다고 할 수 있겠어?”

며느리는 대답 없이 조용히 에어컨을 껐고, 며느리의 손길처럼 차분하게 에어컨이 잦아들었다. 나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마녀를 체포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앓아누워 이틀 동안 설사를 하고 기운이 쭉 빠져서 사흘째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출근할 수 있었던 그날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공기조차 떠들썩했다. 누군가 내게 마녀가 잡혀 왔다고 귀띔해 주었다. 한창 연쇄 파업이 일어나던 방직 공장 중 하나에서 잡혔다고 했다. 하얀 줄로 줄줄이 몸이 묶여서 들어오는 여자들 가운데 눈과 귀마저 가려진 채 들어오는 부서질 것처럼 가느다란 마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바로 뒤에 묶여서 낡은 치마가 반쯤 찢겨나간 채 겁먹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재성의 부인이 보였다. 등 뒤에서 무언가 후다닥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팀에서 재성이 누락되었다는 통지가 내려왔다.

앓아눕기 바로 전날, 재성과 나는 꼬막을 앞에 두고 막걸리를 토할 때까지 들이켰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나 나보다 튼튼했던 재성이 다리가 개개 풀려서도 어떻게든 나를 부축해 집 마루에 던져놓고 나서 허청허청 밤길을 되짚어갔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전해 들었다. 기억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재성의 마지막 얼굴이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날 부축하고 집까지 걸어왔다는 그 강인한 어깨의 온기도 기억나지 않았다. 재성의 집 주소는 빤히 알고 있었지만, 재성이 팀에서 빠진 이상 이제 찾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나는 재성과 가장 친밀했기에 당분간은 더욱 몸을 사려야 할 판이었다.

재성의 부인은 고문실까지는 끌려가지 않았다고 했다. 고문실을 가로지르다가 전면이 전부 거울 유리로 되어 있는 방 앞에서 걸음이 멈추었다. 마녀의 나신은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풀잎처럼 보였고, 그 사이 오른쪽 발목은 피고름이 배어 나와 까맣게 썩어 있었다. 마녀의 새하얀 허벅지 사이를 의식하자마자 나는 불안하게 바닥으로 눈을 떨궜다.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마녀의 목소리는 이제 더는 공격이 아니었고, 구해달라는 힘 없는 요청은 여기저기로 맥락 없이 떠다녔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눈이 갑자기 이쪽을 향해서, 나는 흠칫 물러섰지만, 자세히 보니 눈에는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거울 유리잖아.”

발이 아파요.

마녀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왔을 때, 마녀는 내 의식을 감지해냈다.

칼바람? 철구?

사람들이 동시에 내 쪽을 돌아보았다. 정신을 반쯤 놓친 듯한 마녀는 내게만 목소리를 전하고 있지 않았다.

철구, 어디에 있어? 나, 연주야. 어디야?

마녀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재성과 종범과 나는 늘 생각을 흘려보내는 명상을 하곤 했기에, 늘 연습했듯이 마녀에 대한 생각을 가능한 한 붙잡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잰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연습은 성공적이었다. 사건은 여러 번 싸움터에서 맞닥뜨렸던 마녀가 나와 종범이 대화하는 와중에 우리의 의식을 엿듣고 나서 내 이름을 알게 된 사건으로 보고되었다. 생각도 암호명으로 해야 했을 것 아니냐고, 우리는 한바탕 혼이 났다.

집에 있던 파업 홍보 전단을 발견한 건 그러고 나서도 한 달이나 지난 후였다. 전단을 앞에 두고 소리를 높이는 내게, 아내는 곧 돌입할 옥쇄 파업을 앞두고 혼자 앓아누운 나를 간호하기 위해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얘기해 주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아내를 때렸고, 바닥에 엎드러진 아내를 내려다보다 내가 벽에다 주먹을 꽂자, 아내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높여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앉아 있던 나는 벗어놓은 잠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방문을 열고 마루에 앉자, 방문 앞까지 왔다가 총총히 문밖으로 다시 나간, 틀림없는, 아들의 발자국을 눈송이가 천천히 다시 지워내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지만, 아내도 잠들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아들이 건넌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새벽 다섯 시쯤, 나는 장롱 아래 칸에 들어 있던, 재성의 부인이 아내에게 만들어 준 보자기를 꺼내 마당에서 불태웠다. 아내는 나오지 않았다. 재성의 부인은 수선스럽기는 해도 매사 명랑하고 잘 웃던 여자였다. 보자기를 아내에게 만들어 주던 날, 나와 재성 앞에서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빙그르르 돌고는 박장대소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출근하자마자 집무실 한쪽 구석에 있는 책꽂이에서 처음으로 책을 꺼냈다. <韓國學生建國運動史>라는 책을 꺼냈다. 끄트머리가 史인 걸 보니 역사책인 듯했다.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책을 읽으면 간첩들이 지금껏 뭐라고 사람들을 꼬드겼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 번째 장을 넘겼을 때 출동명령이 떨어졌고, 종범과 함께 서둘러 싸움터로 달려나가면서, 아내는 착한 여자이니 집에 좀 여유가 있다면 간첩들의 헛소리에 귀 기울이지는 않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요청을 하자 월급은 소폭 인상되었으나, 여유가 있다고 말할 만큼은 아니었다. 능력자는 눈에 띄어선 안 되기 때문이라는 상관의 말을 수긍했다.

세상을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힘이 필요했다. 힘은 가만히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떼를 쓰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서도 안 되었다. 당연히 잘못될 까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더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옳고 그른 것은 변하지 않고 올곧게 존재하고 있었다.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하자, 노인들은 종종 다가올 선거 이야기를 했다. 선거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말을 아꼈다. 내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은 가리켜야 할 방향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가끔 끼어드는 다른 손가락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빠르게 공원의 코어에서 퇴출당했다. 퇴출당한 놈들은 공원 입구에 몰려 앉아서 정치판은 다 똑같다며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해 댔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몇 번쯤 엿가락에게도 선거 이야기를 건넸고, 엿가락은 역겹게 손가락으로 키스를 날린다든가 코 내지는 귀를 후비는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웃어넘겼다. 엿가락은 손가락을 어느 쪽으로도 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글쎄, 누가 되든 비슷하지 않나?”

같은 소리를 하며 귀를 후비는 꼬락서니를 몇 번 보다가 보면, 아무리 열의를 가지고 말을 걸었던 사람이라도 금세 몸에 힘이 쭉 빠지게 마련이었다. 엿가락은 멀리 서 있는 나를 흘끗 건너다보며 웃음기 섞어 입을 열었다.

“선거가 뭐 그렇게까지 중요하겠어.”

등골이 선뜩했다. 세상이 통째로 멈추는 끔찍한 테러들, 엿가락 역시 그것을 결코 잊을 리가 없었다. 철도가 마비되었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날 누군가는 인생을 결정할 중요한 어느 순간을 앞두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누군가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을 수도 있었다. 엿가락 녀석에게 선거보다 중요할 만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철구는 차마 그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몸을 떨었다. 장기의 어느 한 부분이 작동하는 것을 멈추면 모든 몸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듯이 바로 이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모두가 최대한 열심히, 열심히,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엿가락 같은 정신 나간 놈들이 아니라면. 그리고 정신 나간 놈들은 아무리 온 힘을 다해 날려버려도 몇 번씩이고 나타났다. 철구는 인간들이 꿈틀거리며 가득 메우고 소리를 지르던 수많은 거리에서 인간이란 종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뼈저리게 배웠다.

“하기야, 전쟁 일어나거나 빨갱이들 쏟아져 나오지만 않으면 되지.”

익숙한 화제가 튀어나오자 노인들이 저마다 하나씩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전쟁 때 빨갱이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무엇을 털어갔는지, 짝사랑하던 동네 처녀가 어떻게 빨갱이 놈들에게 몸을 버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튀어나오는 동안 엿가락은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이야기들을 듣고만 있었고, 노인들은 흥이 나서 말을 덧붙이느라 엿가락을 설득하려던 애초의 목표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종범과 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한 방 안에 나란히 앉아 느린 속도로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었다. 트위터 전사 학교 선생님은 대학생 정도 나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총각이었다. 사실, 선생님의 손이 너무 빨라서 그렇지, 다른 노인들에 비하면 내가 컴퓨터를 다루는 속도가 그렇게 느린 것만도 아니었다. 내 왼쪽에 앉아있는 머리가 벗겨진 노인은 덥지도 않은 날씨에 연신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름은 본명으로 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계정을 여러 개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인터넷 밖에서 어르신들은 한 명이고, 표도 하나밖에 행사 못 하고, 한 번에 한 사람밖에 못 만나지만, 인터넷에서는 그렇지 않답니다. 어르신 한 분이 열 명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열 명이라니. 놀랍게도 분신술 정도야 아무나 쓸 수 있는 시대였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리트윗이라는 개념은 마녀의 정신성 공격에 비할 바가 없이 압도적이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단지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정신성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에 비해 내 능력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이름’이라고 흐리게 글자가 박혀 있는 공란에 ‘칼바람’이라고 써넣었다. 아이디는 영어로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선생님은 내 등 뒤에서 발을 멈췄다.

“멋진 이름이네요, 칼바람!”

아이디를 선택하세요 라는 굵은 글자 아래에 선생님은 knifewind라고 글씨를 쳐 넣었다. 빨간색 X 표시와 함께 ‘이미 사용 중인 아이디입니다!’ 라는 글자가 떴다. 내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걸 눈치챘는지, 선생님이 웃었다.

“어르신, 걱정 마세요. 아이디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답니다.”

선생님은 knife와 wind 사이에 _를 집어넣었다. 마음이 놓이는 초록색 글씨가 ‘사용 가능한 아이디입니다.’ 라고 안전을 알렸다. 나는 검지를 하나씩 펴고 천천히 k, n, i, f, e, 자판 왼쪽에 있는 Shift라는 자판을 누르면서, _, w, i, n, d를 다시 쳤다. 칼바람, 이름이 뭐야? 별거 아니지만, 칠십 년이 넘게 살아온 끝에 드디어 진짜 이름을 찾은 셈이었다. 프로필 사진에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눈 쌓인 덕유산 사진을 넣었다.

종범의 아이디를 물어 제일 처음으로 종범을 팔로잉했다. 종범의 이름은 노래꾼이었다.

지금부터는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글을 보내고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선생님은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팔로잉하면 좋을 몇 사람들을 골라주었다. 화면에 글들이 다닥다닥 올라오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이 사람들을 더 도덕적으로 만든다. 성장하는 사회에선 사람들이 너그러워지고, 평화적, 민주적으로 변하며 행복해진다. 성장은 자유에서 나온다.』

『한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자!』

『게으른 국민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대통령이 할 일이다.』

트위터 공부를 같이 한 사람들이 날 팔로잉 해 왔고, 나는 얼른 그들의 아이디 옆에 붙어 있는 십자모양 버튼을 눌러댔다. 빠른 속도로 팔로잉과 팔로어가 늘어갔고, 버튼을 누를 때마다 사람들이 내가 보여주는 글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라니, 인간을 텔레비전으로 만드는 초능력이었다. 선생님은 그 날 모두에게 ‘트위터 전사 학교 수료장’을 건네주었고, 아마도 높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배 나온 노인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료장을 받아가는 노인들을 격려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능력자 확인증이나 다름 없었고, 이 세상에 능력자가 이렇게도 많아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더욱이 다음 날 아침쯤 해서는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다섯 명이나 나를 팔로잉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에게는 메시지까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선팔했습니다 앞으로 잘부탁드립니다~』

점 하나를 찍어서 트윗하기 버튼을 눌러도, 이 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내가 누군가의 글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내게도 정신계 능력이 생겼다. 나는 들뜬 마음에 읽던 책을 꺼내서 다시 읽기 위해 접어놓은 페이지의 문구를 자판에 쳐 넣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글귀에는 줄까지 쳐 놓았었다. 언제나 싸움터에서 확인했던 바로 그것을, 이 글쓴이는 아름다울 정도로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해두었다.

『포퓰리스트의 이야기는 언제나 엄청난 희열과 함께 시작되어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증가, 임금하락으로 끝난다. 그 가장 큰 피해자는 포퓰리스트들이 구제하겠다고 약속했던 빈곤층이다.』

트윗하기 버튼을 누른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열다섯 명이 이 글을 리트윗했다. 그 중 열 명은 어제 함께 트위터 전사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리트윗은 리트윗을 물고 끝없이 퍼지기 시작했고, 세 시간이 지나자 열다섯 명이 나를 더 팔로잉했다. 오늘은 새로 등록한 트위터 전사 학교 학생들이 와 있었기에 나는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꾹 참아야 했다. 종범이 옆구리를 찔렀다.

“아까 그 글 형이 쓴 거야? 멋지던데?”

책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97년부터였다. 싸움터에 나갈 일이 줄어들면서 집무실에 앉아서 날마다 크게 상처 입은 사자처럼 숨소리조차 안 들리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 늘어날 무렵, 어떠한 징조도 없이 아내가 죽었다. 버스 사고였다. 아내가 대체 왜 원주에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있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경찰도 내게 불에 그슬리고 심하게 일그러진 아내의 시체를 보여주기를 망설였다. 까맣게 타서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아내의 시체를 앞에 두고 떠오른 건, 난데없이 그 추운 겨울밤, 내게 맞고 바닥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아내의 얼굴이었다. 아무도 내게 출동하라고 말하지 않던 장례식장 구석에서 나는 계속 못 읽고 있던 <韓國學生建國運動史>를 다시 꺼냈다. 아직은 괜찮았다. 글 속에서 여전히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살아 있었다.

누군가가 내 글에 『시대착오적이기가 이를 데가 없다』, 라고 덧붙여서 내 글을 인용한 것이 날아들어 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수많은 사람의 비아냥과 욕설이 눈앞에 현란하게 펼쳐졌다. 아까 올렸던 글의 리트윗 숫자는 끊기지도 않고 올라갔다. 포퓰리즘과 복지의 차이가 뭔지는 아느냐, 겪어보지도 않고 피해라고 말하는 뻔뻔스러움은 어디서 나온 거냐, 온갖 말들 속에서 나는 허둥대며 옆에 앉은 종범을 돌아보았다. 종범은 분노하며 제일 처음 비아냥거린 놈에게 글을 보내겠다고 했고, 나 역시 처음 글을 보낸 이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손이 떨려서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는 훨씬 느려졌다.

『자네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마 나보다 스무 살 이상 적을 것인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그게 무슨 망발인가.』

이만큼의 글을 쳐 넣는 사이에도 끝없이 욕설이 날아왔고, 그 사이 종범이 보낸 글귀가 날아갔다.

『넌얼마나시대전신이냐미친놈아,』

종범의 글은 인용되어서 수많은 ㅋ을 달고 건너다니기 시작했다. ㅋ이 무언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그것이 비웃는 행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 먹은 게 벼슬이지, 아주. 저렇게 악을 써도 결국에는 역사가 심판할 텐데.』

더위를 느낄 만큼 얼굴이 달아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오는 욕설들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 나갔다. 누가 욕설을 했고, 누가 뭐라고 말을 거들었는지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제 아주 잘하시네요.”

트위터 선생님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깨에 선생님의 손이 와 닿았다. 트위터 선생님이 난감한 표정으로 그렇게 하나하나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 목적은 더 많은 글을 인터넷상에 뿌리는 것이지 일일이 싸워서 웃음거리가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동안 나는 트위터 선생님의 팔자로 내려앉은 눈썹을 보면서 늘 저 얼굴로 날 바라보는 며느리를 떠올렸다. 며느리는 시아비가 어디에 가서 저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일까 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트위터 선생님의 조근조근한 이야기가 끝난 후, 눈치를 보던 종범이 내게 담배를 한 대 건넸다. 모욕감은 담배 연기처럼은 쉽게 날아가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후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트위터 선생님이 시킨 대로 가만히 리트윗 버튼만 누르다가 아까 날 빈정거렸던 그 사람의 계정에 슬쩍 들어가 보았다.

『케이블 TV에서 영화 <신시티>를 해 준다. 낸시의 첫 등장 장면은 언제 봐도 압도적인 틸트 업.』

‘틸트 업’을 검색하자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는 검색 결과가 나왔다. 이 능력자들은 조금 전에 내게 ‘늙었으면 죽으라’는 말까지 듣게 해 놓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속 화면의 구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전신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공원 안이 아주 작고 작은 세계라는 것쯤은 그전에도 모르지 않았다. 손병희 선생은 우주의 중심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작은 동상일 뿐이었다. 공원 밖에는 나를 정신 나간 노인네라고 놀리는 수많은 젊은이의 세계가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빨갱이들의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엿가락은 팔각정 한가운데 대자로 뻗어 하품하고 있었고,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한걸음에 엿가락 옆까지 다가서서 엿가락의 옆구리에 발길질했다.

“이 빨갱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뻗어있어.”

빨갱이라는 말에 주변 노인들이 흠칫 놀라 팔각정 가운데를 돌아보았다. 확연한 적대의 공기가 갑작스럽게 팔각정을 감싸고 돌았다.

“이 씨, 왜 이러누. 거 투이타가 너무 어려웠어?”

엿가락은 빙글빙글 웃으며 발로 차인 자리에서 그대로 몸을 돌려 우스꽝스럽게 앉아 보였고, 곧바로 몇몇 노인들이 실소를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엿가락은 사람들의 웃음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엿가락이 공격 당할 수밖에 없는 단어들의 조합을 알고 있었다.

“간첩 새끼가.”

약간 웃음을 짓던 노인들이 다른 노인들보다 먼저 얼굴을 굳혔다. 빨갱이와 간첩, 그 두 단어면 충분했다. 엿가락과 어울려 다니던 노인 한둘이 내게 무어라 말꼬리를 걸어왔다.

“아니, 을재가 뭘 어쨌다고 빨갱이라고 하는 거여.”

“되도 않게 오자마자 간첩이라고 말할 거면 증거를 대, 증거를.”

나는 엿가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네 입으로 말해 봐. 네가 빨갱이가 아니야?”

팔각정 안에 난데없는 침묵이 흘렀다. 일본인 관광객 몇 사람이 무어라고 조잘거리며 팔각정 옆을 스쳐 지나가다 팔각정 쪽을 힐끔거렸다. 갑자기 모두가 엿가락의 입술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엷은 입술 아래로 불거져 나온 턱의 가느다란 세로줄, 녀석은 눈썹마저도 양놈같이 엷은 갈색이었다. 종범이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내 팔을 붙들었다. 나는 종범이 무얼 불안해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녀석과 나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람 좀 다룰 줄 안다고 저 빨갱이 새끼와 동종이라니.

“빨갱이 놈들 중에도 대장이지. 저놈이 예전부터 지들 필요한 거 있으면 대로변에 드러누워서 남들이 손해 입는 건 신경도 안 쓰고 행패를 부리는 그런 놈들 부리고 다니던 놈이었다고.”

엷은 입술이 열리더니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뭘 알아.”

말을 꺼낸 엿가락의 얼굴에 평소와 다르게 기분 나쁜 웃음기가 싹 걷혀 있었고, 몇 달 동안 형님 형님 하며 쫓아다니던 천방지축 막내의 얼굴이 한순간에 바뀐 걸 보고 화단 쪽 노인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네놈이 빨갱이라는 거.”

“그 사람들이 왜 대로변에 드러눕는지, 왜 소리를 지르는지는 모르잖아.”

“지들 잘 살겠다고, 왜 그걸 모르겠냐.”

“……칼바람.”

“내 이름은 이철구다, 이 엿가락 새끼야.”

“열심히 살아도 잘 살 수 없는, 결코 살기 좋은 시절이라는 걸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절망이라는 걸 알아?”

주변의 노인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약간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어느새 싸움 한 판이 되어 있었고, 나도 녀석도 이 싸움에서 물러났다가는 이후 탑골공원에서 이야기를 들을 사람들을 모으는 데에 적지 않게 낭패를 볼 터였다. 말도 힘과 다르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을 때는 말을 아끼고 필요할 때는 적절하게 내질러야만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지금은 내질러야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약간 겁을 먹고 있던 종범이 결심한 듯 언성을 높였다. 공원 입구 쪽에 앉아 있던 노인들까지 우르르 몰려와서 우리 주변을 에워쌌다.

“빨갱이 새끼가, 평생 돌무식쟁이들 선동질이나 하고 산 주제에, 찔리지도 않나?”

“돌무식쟁이라니, 돈이 없어서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 등에 칼 꽂고 산 게 아주 자랑스러우신가 보지?”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 말로, 녀석은 자신이 빨갱이라는 걸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못 배워도 법도를 모르는 새끼들은 혼이 나야지. 북조선 인민공화국 법도는 그게 아닌가 본데, 대한민국의 올바른 법도는 이런 거거든.”

“그 법도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 등골을 쑤셔 파는데, 누가 그 법도를 지켜야 하나.”

종범이 몇 번 말을 거드는 것 말고는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웬만한 노인들은 빨갱이 같은 말들은 나오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훈계를 늘어놓곤 했었는데, 그러던 노인네들이 엿가락에게는 함부로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낭패였다. 이곳에만 살아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에, 결단코 여기에서까지 밀릴 수는 없었다. 이 순간을 위해 은퇴 후 20년 이상 책을 읽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자기 땀 흘려서 일한 걸로 살아. 게으른 새끼들이, 끝까지 빈둥거리면서 나라에다 뭐 내놓으란 소리만 하지.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지를 찾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 줄지를 찾으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너희같이 이기적인 놈들은 똥구멍으로도 들어 처먹지를 않지.”

“저 웃대가리들 빼고 누가 열심히 살지 않았길래, 살기 좋았던 기억이라는 게 없지?”

종범이 끼어들어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게 살기 좋아진 게 아니야? 이 빌딩들이, 이 아스팔트가, 이제는 아무도 굶어 죽지 않는 게, 이게 살기 좋아진 게 아니야?”

“그게 다 누구 덕분인데.”

“너희 같은 간첩 새끼들 선동에 안 휩쓸리게 노력해 온 사람들 덕분이지.”

간첩이라는 말과 빨갱이라는 말이 몇 번씩 등장했는데도 노인들은 선뜻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엿가락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정신계 기술이라도 훈련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기 시작했다.

“누가 그 빌딩을 짓고, 누가 그 휴대폰을 만들었냐.”

“그걸 열심히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일을 안 하겠다고 우기는 놈들은 아니겠지.”

엿가락은 입가를 뒤틀어 올렸지만, 평소처럼 실실대고 웃지는 않았다.

“열심히? 그런데 너희는 왜 지금 다 탑골공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냐?”

종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로 하는 싸움에서는 여유 없어 보이는 쪽이 언제나 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배와 목에 힘을 주고, 느릿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너는?”

엿가락은 입을 꾹 다문 채,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로 해서는 안 될 말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나도 그도 깨달았다. 모여있던 노인들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언제 피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나는 묵묵히 계속 엿가락의 눈빛을 받아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 바라다보고 있었다.

더는 설 자리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건 그날 이후였다. 공장들이 지겨울 정도로 문을 닫더니, 이제는 탄광들까지 문을 닫기 시작했던 그날. 탄광에서 석탄을 캐야 할 광부들이 뜬금없이 철로 위에 주저앉아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9월이었다. 아직은 날이 추워지지는 않았지만, 곧 석탄이 없이는 숨을 거두어야 할지도 모를 노인들이 서울의 낡은 집들에 살고 있었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매우 지쳐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 현대 중공업 한 쪽 공장 벽을 날려버리기 위해서 모든 정신력을 다 끌어모아야만 했다. 그에 비해 그 이 인조는 쉽게도 공장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둥실둥실, 하늘 위를 날아가는 청년들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56세였고, 내 몸은 이제 예전 같지 않았다.

철도에 드러누워 있는 광부들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엿가락이었다. 이렇게 지방까지 밀려 내려와서는, 철도 한가운데에 뻔뻔하게 드러누워 있다니. 나도 모르게 녀석이 '밀려 내려왔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도 중요한 곳이며 지금 같은 상황에는 어디서든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교육을 몇 번씩이나 받고 왔는데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사이 엿가락의 눈썹에 섞인 흰 털들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아마 엿가락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철도와 도로를 막는 건 저놈들 입장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겠지만, 가장 비열한 방법이기도 했다. 일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을 일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며, 심지어 위험에 빠뜨리는 끔찍한 행동이었다. 이곳은 분명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여기로 배속되어 온 엿가락은 지금껏 내가 알고 있다시피,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철도는 운행을 중단한 상태였고 탄광에는 며칠째 사람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광부들을 들어내기 위해 철도 앞으로 온 경찰들은 광부들보다는 훨씬 많은 숫자였다. 어쨌든 세상에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직 훨씬 더 많다는 증빙이었다. 철로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바람을 날려보냈다. 바람이 가볍게 휘돌면서 U자 형태로 철로 위에 있는 광부들을 내리찍었다. 빌어먹을 엿가락은 바닥에 있는 철로를 움켜쥐더니 광부들 위로 꺾어 얹어서 바람을 막아냈다. 나는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개자식, 같이 싸운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응용력은 끝내줬다. 최선의 방어는 늘 그렇듯 공격이었다. 엿가락은 들어낸 철로 쪽으로 손을 쑤셔 넣었고, 곧 경찰들을 한 바퀴 빙 둘러친 엿가락의 팔이 바닥에서 쑥 솟구쳐 올라왔다. 경찰들이 계집아이처럼 비명을 질렀다. 엿가락은 경찰들을 천천히 옥죄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엿가락의 팔을 향해 날카롭게 바람을 날렸고, 엿가락은 기다렸다는 듯이 땅 밑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엿가락이 어느 순간에 빠져나갈 거라는 걸 예상한 내 바람은, 엿가락의 팔이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순간에 어떤 경찰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고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엿가락 쪽을 돌아보았다. 엿가락 놈, 날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이 양쪽 진영 모두를 휘감았다. 긴장감이 고조될수록 양쪽의 사기가 모두 급격하게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파업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경찰 측의 사기가 오를 수 있다니, 나는 약간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는 아직 전장에서 의미가 있는 장수였고, 어쩌면 내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엿가락은 내 적수였던 걸 조금은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다. 우리의 공격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경찰과 파업 대오는 일기토를 하는 적장들을 둘러싼 사병부대처럼 묵묵히 이 화려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단검 같은 칼날들을 빠르게 피한 엿가락이 훅 팔을 뻗어 내 목을 코앞까지 당겼고, 녀석의 엷은 갈색 눈동자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일 초가 천 년 같이 길게 느껴지던 한순간, 나는 엿가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연주는…….”

엿가락의 동공이 팽창하였다. 눈가에 자글자글 흐트러진 주름들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엿가락은 느리고 슬픈 목소리로,

“그녀는…….”

그 순간 엿가락의 머리를 향해 묵직한 시멘트 통이 날아들었다. 엿가락은 급하게 몸을 휘게 해서 시멘트 통을 피했지만, 번개 같은 속도로 하늘을 나는 형제는 다시 시멘트 통을 집어 들어 엿가락에게 집어 던졌다. 엿가락은 반대쪽으로 몸을 구부리려고 했지만, 시멘트 통은 빠르게 엿가락의 관자놀이 옆쪽을 긁어냈다. 살점이 뜯겨 나가면서 핏방울이 튀었다. 엿가락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떨궜다.

다시 날아드는 시멘트 통을 막은 건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온몸이 커다란 화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팔을 뻗자 커다란 불덩어리가 녀석의 손바닥 위에서 소용돌이쳤고 그 불덩어리는 이 인조가 아닌 전경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엿가락에게 던져질 예정이었던 시멘트 통은 그 불덩어리 쪽으로 던져졌다. 전경 몇 사람이 시멘트 통에 깔려서 아우성을 쳤지만, 공중에 떠서 불덩어리를 바라보는 이 인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불덩어리를 막아낸 것에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며 파업 대오 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형제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대오 양쪽에서 철로를 뜯어내 가운데로 몰고 들어와서는, 누워 있는 사람들을 철로로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다.

엿가락은 땅으로 손을 쑤셔 넣기 시작했지만, 엿가락보다 불덩이가 조금 더 빨랐다. 불덩이가 철로에 닿자 철로가 녹기 시작했고, 이 인조는 화급하게 손을 떼었다. 몇몇 노조원들이 뜨겁게 달아오른 철로에 데어 몸부림을 쳤다. 대오를 사이에 두고 엿가락과 나는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이제 다시는 엿가락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눈이 마주친 것 외에 우리는 인사 한 번 주고받지 않은 채 몸을 돌려서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경찰 중 한 명은 시멘트 통에 맞아 즉사한 것처럼 보였고, 철 녹은 물에 데어 고통스러워하던 노조원의 표정이 계속 눈앞에 맴돌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웅크리고 앉았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고통은 오래도록, 오래도록 지속하였다. 엿가락을 다시 만나서 우리가 이런 말들을 주고받게 될 것이라고는 단 한 번 상상해보지도 않은 일이었다.

선거는 우리 쪽의 승리였다.

투표 결과에 ‘확정’이 뜨자, 나는 아들 부부를 거실에 놓아두고 슬그머니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인터넷 창을 열었다. 이제는 꽤 능숙하게 로그인을 할 수도 있었고, 멘션을 보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때 내게 시비를 걸었던 계정의 글을 내 멘션창에서 찾아내서는 화살표를 눌러 그에게 답을 보냈다.

『축하하오. 당신이 말 한대로 역사가 심판하였소.』

내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 사람은 역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을 옮겼다.

『절망의 의미도 모르는 인간들.』

그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또다시 수많은 난잡한 욕설들이 파란 불로 깜빡이며 내게 쏟아져 왔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놈은 패배한 셈이었고, 나는 욕설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전보다 훨씬 기분 좋게 화면을 응시할 수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그 계정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내 글을 가져가서 비꼬아댔다. 그놈의 발악을 지켜보다가, 나는 그의 아이디를 눌러서 그가 쓴 다른 글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뿐 아니라 책을 읽는 데에도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소설책이나 시집에서 인용한 글귀들이 상당히 있었고, 그중에는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법 무게를 잡고 써 놓은 글귀들도 있었다. 비꼬는 건 그의 천성인 모양으로, 나와 같은 트위터 전사 학교 출신 노인들을 찾아내 시비를 거는 게 일과 중의 취미인 듯했다. 그러다 나는 눈에 띄는 글을 하나 발견했다.

『신혼 초에는 밤에 남편이 내일 또 만나자면서 자기 집에 가면 좋겠는데, 안 가니까 당황스럽고, 거기에 적응하는 게 참 쉽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놈이 뻔히 남편까지 있는 낫살 먹은 여자라는 게 아닌가. 생애 살면서 이렇게 말을 험하게 하고 공격적인 여자는 단 한 번 보지를 못했다. 기가 막혀서 계속해서 글을 내렸다. 남편에게도 상당히 사랑받으며 사는 모양이었지만, 홀로 된 시아버지와의 갈등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권위 있는 척은 다 해야 하는 그 나이 먹은 노인의 아집.』

『남편은 시아버지가 예전부터 성격이 그랬다고 이해하라고만 한다. 하기야, 그 나이 먹을 동안 기껏해야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어디 바뀌겠는가.』

『결혼 전엔 퇴근 후 집에 가면 친정엄마가 차려준 밥상에 여유로웠는데, 지금은 임신 중에도 새벽에 제대로 시아버지 밥상 차려야 하고. 새로 한 반찬이 없으면 눈에 띄게 일그러지는 표정.』

『차라리 출근이라도 하고 싶은데, 임신한 여자가 그러는 거 아니라며, 자신은 돈 한 푼 벌어오지 못하면서 회사를 휴직하게 한 것도 결국 시아버지였다.』

『오늘은 내 화장대에서 돈을 뒤져가기까지. 따로 용돈 드렸다. 하지만 갖다 바쳐도 고마운 줄 모르겠지.』

『외롭다.』

외롭다는 글에는 남편과 함께 신혼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손이 떨렸다. 아들과 며느리가 신혼여행에서 찍어왔다고 언젠가 한 번 보여줬던 그 사진, 그 속에서 며느리가 또록또록한 미소로 환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며느리의 계정에 새 트윗 1개, 라는 글자가 떴다. 며느리는 내가 그에게 단 답글 중 『그 정도 절망도 못 이겨낼 거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라는 글을 인용했다.

『신고했다.』

며느리의 글을 시작으로 몇 명이 달려들어서 내 계정을 신고했고, 결국 삼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계정이 정지되었다. 계정이 정지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멘션은 며느리의 멘션이었다.

『빨갱이들이 보고 싶으면 컴퓨터 그만하고 탑골공원이나 가 있지그래? 내일 그 앞에서 집회 있다던데.』

새로 계정을 만들어 며느리와 싸우는 일도 가당치가 않아, 나는 컴퓨터를 끄고 거실로 나갔다. 며느리와 아들은 양 떼처럼 옹송그리고 붙어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말을 삼키고 흔들의자에 앉았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며느리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향했다.

“아버님, 내일도 공원 가셔야겠어요?”

나는 묵묵히 며느리 얼굴을 마주 보았다.

“뉴스에서 내일 공원 앞에서 집회한다는데, 위험하지 않으실까 싶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원이나 가 있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졌던 그런 아이는 암소처럼 순한 눈동자를 하고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뒷목으로 숨이 턱 막히는 알싸한 감각이 스쳐 지났고, 머리가 핑글 돌았다. 뿌예진 시야를 헤집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며느리의 얼굴로 무언가 천 같은 것을 세게 집어 던졌고 며느리의 비명에 이어 아들의 고함이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며느리의 발아래 방금 집어 던진 더러운 양말이 나뒹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버지 제정신이시냐, 평소에도 이 친구한테 함부로 대하신다는 얘기, 화장대에서 돈 훔쳐가신다는 얘기 내가 못 듣고 있는 줄 아느냐, 지금까지 입 다물어 드렸더니 우리가 만만하시냐, 는 말들이 빠르게 귓전을 스쳐 지나는데도, 나는 계속 머리가 어지러워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며느리는 착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아들의 팔을 잡고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들이 내가 던진 양말을 내 발치로 다시 던졌다.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정하는 걸 그날 밤에 포기했어요. 알아요?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물건 부서지는 소리, 어머니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덤비고 싶었지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대신에, 난 아버지를,”

“여보, 그만 해요.”

뿌옇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내 발치로 돌아온 뒤집어진 양말에 낀 내 허연 살 비듬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 양말을 다시 뒤집어서 발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에 가지런히 며느리가 정리해 둔 신발을 신었다. 그 사이 며느리는 아들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다 현관문 쪽을 돌아보았다.

“아버님, 이 밤에 어딜 가세요!”

등 뒤로 현관문이 약간 세게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예 영영 들어오지 마시라 그래!”

현관문 너머로 아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바람이 차가웠다. 떨어질 때마다 잊지 않고 며느리가 꼬박꼬박 챙겨주는 그 빌어먹을 용돈이 주머니 안에 또 구겨져 있었다. 아니, 빌어먹을 것은 용돈이 아니라 내 쪽이었고, 나는 분명 며느리에게 빌어먹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5천 원 한 장을 꺼냈다. 이것도 틀림없이 언젠가 며느리가 줬던 것이겠지만, 며느리가 돈을 건네 주던 얼굴과 손짓이 그렇게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는 돈이었다. 편의점 불빛이 환했다. 하얗고 밝은 조명 아래에 상품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적어도 오늘 밤에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무언가 사기만 한다면 이곳의 문은 내일 아침까지도 환하게 열려있을 터였다. 물만 부으면 되는 1천 원짜리 라면은 유난히 처량하여 보였기에 이것 역시 전자레인지에 몇 분 데우면 끝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굳이 3천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소시지 야채볶음을 집어들었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청년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고 있었다. 몇십 초가 지나고 나서야 계산대 앞에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바코드를 찍었다. 청년은 기계적인 손짓과 표정으로 5천 원을 가져가고 2천 원을 돌려준 후, 다시 앉아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저…… 이것 좀 데워 줄 수 없겠나?”

청년은 무심한 눈으로 내 얼굴을 치켜보았다.

“저기 뒤에 전자렌지 있는데요.”

“내가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워서……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는 건지 잘 보이지가 않네.”

청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계산대를 열고 나와 편의점 구석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능숙하게 소시지 야채볶음을 약간 뜯어서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노란 불빛 가운데 소시지 야채볶음을 담은 플라스틱 통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총각, 여기 소주도 있지?”

청년의 눈에 빠르게 경멸이 스쳐 지났고, 나는 그 시선을 어쩔 수 없이 잡아내고야 말았다. 청년이 턱짓으로 소주가 있는 위치를 가리키자, 나는 마치 그 턱짓에 복종하듯 기가 죽은 표정으로 소주병을 꺼냈다. 분명히 내가 돈을 내며 물건을 구매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어깨에 힘이 빠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남은 2천 원을 내고 소주를 계산하고 동전들을 돌려받는데, 청년이 한 마디 덧붙였다.

“여기서 술은 드시면 안 돼요. 드실 거면 바깥에 있는 파라솔에서 드세요.”

“아니, 날이 이렇게 추운데…….”

“그래도 여기서는 안 돼요. 들어오실 거면 술은 밖에서 다 드시고 들어오세요.”

늘 그렇듯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심지어 내 삶은 규칙을 지키게 하려고 평생 힘을 써 온 삶이 아니었던가. 나는 묵묵히 소주와 데워진 소시지 야채볶음을 들고 바깥 파라솔에 앉았다. 바람이 차가웠다. 이 추위에도 파라솔은 꿋꿋하게 두 개나 펼쳐져 있었다. 한쪽 파라솔에는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나이 어린 계집아이들이 깔깔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 아이는 서양인으로 보일 만큼 노랗게 머리를 물들이고 있었고, 하나같이 너구리로 오인될 만치 새까맣게 칠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 파라솔 아래에도 맥주 캔과 과자봉지가 널려 있었다. 들려오는 말들을 가만히 듣자하니 이들은 '오빠'라고 지칭하는 남자 하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오빠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동안에도 계집애들의 입에선 끊이지 않고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나는 소주를 따서 작은 종이컵에 따랐다. 소시지 냄새가 자극적으로 코를 찔렀고, 곧 입안에 들어올 음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는 조금 즐거워졌다.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 나무젓가락으로 소시지 하나를 집어들어 씹기 시작했다. 맥주 캔을 손에 든 계집애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년은 이 오빠한테 6백만 원 빌려서 날랐다던데.”

“헐. 대체 6백만 원이나 되는 돈이 어디서 났대?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라면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아이가 주먹을 쥐어 다른 쪽 손바닥에 내리쳤다.

“이거.”

두 번째 잔까지 들이키고, 나는 나직하게 계집애들에게 말을 붙였다.

“젊은 처자들이 이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상스러운 소리를 하고 그러면 쓰나. 그렇게 살다가는 시집을 못 가요. 집에서 부모님께서 걱정하시겠어.”

얼굴 주변으로 다시 빠르게 경멸들이 스쳐 지났다.

“미친놈 취급받기 싫으면 드시던 술이나 곱게 드시죠.”

술에 취한 게 분명한 계집애의 말투는 심지어 나긋나긋하기까지 했다.

“처자는 어른한테 말버릇이 그게 뭔가.”

다른 한 명이 삐죽 말을 받았다.

“이 시간에 여기 앉아서 소세지 데워서 소주 마시는 어른은 되기 싫은데, 그런 어른도 어른대접 해 줘야 하나?”

계집애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미친놈이 시비 걸 때까지 그 오빠는 안 오고 뭐 하는 거냐고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까 며느리에게 모욕당했을 때만큼 오싹했다. 나는 집에 아들이 있고, 내 아들은 돈도 잘 벌고, 내 며느리는 내게 용돈을 주고, 나는 젊었을 적에 말 그대로 영웅이었고, 지금도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이 수없이 떠올라서 목이 막혔다. 나는 계집애들에게 한 걸음 다가서서 주먹을 치켜들었다.

순간 실제로 목이 꽉 막혔다. 다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번에는 폭소가 터졌다. 내 뒷목을 잡은 놈을 보기 위해 나는 버둥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휘저었지만, 도무지 녀석의 얼굴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언뜻 내 목덜미를 잡지 않은 두터운 팔목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머리 계집애가 싱글거리며 떠들어댔다.

“오빠, 오빠 용역하니까 이런 할아버지들은 완전 전문 아니야?”

팔뚝에 어울리지 않게 얄팍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당연하지. 집 부수는 데나 가게 부수는 데는 가면 다 이런 할배들 밖에 없어.”

용역이라니. 틀림없이 반세기 전에는 이들도 애국청년이었다. 평생 반공을 위해 싸워 온 감찰부장님이 국회에 들어가서 똥물을 투척했던 걸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더러운 놈, 누가 자기 적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놈은 적보다 더 나빴다. 나는 손을 뻗어 아주 멀리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하나를 붙들었다. 내가 앞으로 손을 내뻗자 계집애들은 숨이 넘어갈 듯이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다른 계절과 비할 수가 없을 만큼 겨울바람은 매섭기에, 몇십 년간 나는 겨울에 싸울 때는 오히려 힘을 조절하는 데에 노력해 왔다. 애국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이 6백만 원을 계집애에게 쏟아붓기 위해 애국청년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정신 나간 놈. 자신이 대한민청이 닦아놓은 길 위에 있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온 곳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힘은 없느니만 못했다. 이 놈의 두꺼운 팔뚝을 반드시 끊어놓으리라, 바람은 내쳐 녀석을 향해 내달려왔다.

몸이 크게 흔들렸고, 녀석은 날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달려오던 바람의 방향이 꺾여서 난데없이 쓰레기통을 강타했다. 날카롭게 잘린 쓰레기통에서 빈 깡통들이 쏟아져 나왔고, 내 발 옆에는 며느리가 집어 던진 플라스틱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며느리는 쏟아져 나온 깡통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녀석을 향해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 못된 놈들아, 예의도 모르는 놈들아,”

“아이 씨발년이,”

녀석이 며느리를 향해 다가서는 순간 며느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너 아까 우리 아버님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봤어.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 나쁜 새끼.”

나는 인제야 녀석을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집채만한 어깨, 단단한 근육, 아주 오래전 재성이 그랬던 것처럼 무서울 게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녀석은 바닥에 침을 뱉고 뒤돌아섰다. 계집애들을 데리고 자리를 뜨는 녀석의 뒷목에 며느리가 던진 깡통에서 흘러나온 커피와 담배꽁초가 묻어 있었다. 며느리가 허둥지둥 내게 달려왔다.

“아버님, 아버님,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경찰에 신고할까요?”

녀석과 계집애들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허리가 굽은 노인 하나가 낡은 수레를 끌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와서 며느리가 던졌던 깡통들을 줍기 시작했다. 노인의 얼굴은 검었고, 주름은 당연하다는 듯이 깊었다. 며느리는 계속 무어라고 말을 건넸지만, 며느리의 목소리는 너무 멀게만 들려왔다. 노인이 차분하게 며느리가 던진 몇 개의 캔을 잘 찌부러뜨려서 수레에 싣고 사라지고 난 후 나는 왼쪽 주머니에서 4만 원을 꺼내 가만히 며느리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버님…….”

“됐다.”

“아니, 아버님…….”

“넣어둬라. 됐다.”

정신없이 말을 하던 며느리는 돈을 손에 쥐고는 황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나도 며느리에게 할 말은 별로 없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들이 여전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신발을 벗는 동안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광고의 해설이, 노인은 위대한 스토리텔러라고,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아침에는 혹여 며느리와 마주칠까 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책 한 권만 허리춤에 꽂은 채 서둘러 집을 나섰다. 바깥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곧 머리에 닿을 듯 낮은 하늘을 보니 괜히 씻지 못한 머리 안쪽이 근질거렸다. 별 생각 없이 주머니에 손을 꽂았지만, 어제의 사단을 치르고 나서 손에 돈이 잡힐 리가 만무했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결국, 돈은 필요했다. 다행히 통장 안에 30만 원 가량은 들어있을 터였다. 혹여 쓸 데가 있을까 싶어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절절맸던 30만 원 이었다. 많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딱 2만 원만 찾기로 마음먹고 지하철도 버스도 타지 못한 채 한참을 걸어가 수수료를 받지 않는 인출기에 카드를 밀어 넣었다. 비밀번호를 아직 잊지 않은 자신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2만 원 버튼을 꾹꾹 힘주어서 눌렀다. 돈이 나오자마자 냉큼 꺼내 들고는 차마 잔액을 불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돌리려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얼핏 눈앞을 스쳐 지나간 금액이 매우 어색한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기계의 화면을 확인했다. 자릿수는 6개가 아니라 7개였고, 심지어 맨 앞자리는 2였다. 서둘러 입금 내용을 찾아보았다. 국가정보원이었다. 그렇게도 밀리던 연금이 아주 오랜만에 들어와 있었다.

벌써 경찰들은 지하철역 출구 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슬쩍 신발을 흘끔거렸다. 기동성이 좋은 신발. 역시 오늘은 만만치 않을 모양이었다. 종로 3가 역 탑골공원 쪽 출구로 나와서 공원으로 향하는 대신 길 오른쪽에 있는 돈가스 집으로 들어갔다.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처자 하나가 두꺼운 메뉴판을 앞에 놓아주었다. 웬만해선 만 원이 넘는 돈가스들이 정갈한 모양새로 메뉴판 안에 실려 있었다. 나는 만 삼천 원이 넘는 등심 돈가스를 주문하고, 의자에 기분 좋게 기대어서 허리춤에서 책을 꺼냈다. 책 날개를 꽂아둔 자리가 조금 나달나달 해져 있었다.

『우파의 진실과 한계를 솔직히 말할 것이다. 왜 그들이 20세기 치열한 이념전쟁에서 승리하였는지, 왜 우파 남한이 좌파 북한보다 잘살 수밖에 없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왜 노동자, 농민의 천국을 만들겠다던 공산주의가 노동자, 농민을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주문하신 등심 돈가스 나왔습니다.”

옷도 얼굴도 하얀 처자가 생긋 웃으며 두터운 살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예쁘게 장식된 샐러드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나는 매우 빠른 속도로 돈가스를 먹어 치워 나갔다. 언제나 전장에 나갈 때는 배가 든든해야 하는 법이었다.

배를 두드리며 돈가스 집을 나서자마자 역 출구에서 종범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머리 위로 하얗게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종범의 통장에도 밀린 연금이 들어왔다는 것을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종범은 어처구니없게 내 얼굴을 보자마자, 형, 이라고 어릴 때처럼 웅얼대며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종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저 멀리에서 게을러터진 노가다 젊은 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행진 대열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눈보라가 더 거세졌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엿가락은 저 대열 어딘가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을 것이다. 굵은 눈송이 아래에서 노조원들은 모두 맞춘 것처럼 하얀 우비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대열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아스팔트는 하얀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나는 엿가락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엿가락이 나를 발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투쟁이니 파업이니 전진이니 하는 가사의 노래를 끊임없이 내보내면서 방송차가 한 대 지나갔고, 드디어 바로 코앞까지 파도가 밀려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노가다꾼의 본업은 흙을 이기고 벽돌을 쌓아서 집과 건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이 비를 피하게 하고 바람을 피하게 하며 잘 곳과 살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노가다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어야만 했다. 신 나게 아스팔트를 걸어온 녀석들의 손에 소주 팩이 보였고, 뒷목에 무언가 끊어지는 감각이 지나갔다. 타인의 통행을 방해하면서 소주를 빠는 본업을 가진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바닥에서부터 회오리바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눈과 얼음은 바람에 섞여서 날카로운 덩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정말 만만치 않은 창을 만들 수 있었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굴이 불콰해진 노조원들은 눈으로 만든 거대한 드릴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대열 가운데에서 낯익은 얼굴이 우비의 모자를 제쳤다. 회오리바람은 분명한 표적을 찾았다. 엿가락은 눈을 감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여기서 창을 뽑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서도 모르는 척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래야 내 맞수지. 자, 이제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겠지. 나는 손을 위로 쭉, 내뻗어서 앞으로 슬쩍 당겼다. 바람은 기분 좋게 으르렁거렸다. 만들어놓은 거친 물보라는 노조원들의 위로 날아들어서 엿가락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저대로 서 있었다가는 뾰족한 칼바람이 엿가락의 몸을 통과할 것이나, 엿가락은 저렇게 딴청을 부리다가도 피해야 할 순간에 제대로 몸을 피할 녀석이었다. 바람의 창이 내리꽂혔다. 이제 슬슬 몸을 움직여야 할 순간이지만 엿가락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 설마…….

창이 닿기 직전에 엿가락은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몸을 빼냈고, 결국 물과 바람으로 만든 창은 엿가락의 발등을 찍었다. 그럴 리가, 아무리 늙었다고 해도 이런 커다란 창을 그 엿가락이 맞을 리가 없었다. 발에서 피가 흘렀지만, 엿가락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멍한 눈동자로 계속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초점이 없는 흐린 눈동자.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얀 우비 가운데 새빨간 드레스. 종범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마녀였다.

빨간 드레스가 바람에 날리자, 무릎 아래부터 완전히 잘려나간 한쪽 다리가 드러났다. 곪아 들어가고 있던 마녀의 발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 와중에도 남은 한쪽 발에는 빨갛고 높은 힐이 어처구니없게 신겨져 있었다. 약간 굽은 허리, 빈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얼굴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주름. 하얗게 센 데다가 가운데부터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 분명히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녀는 내일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입가에 허옇게 침을 흘리며 엿가락의 몸을 조종하다가 목발을 휘두르며 쑤욱, 몸을 일으켰다. 저런 꽃은 눈보라 속에서 피는 게 아니야. 엿가락이 앞으로 몸을 훅 튕기고선 그제야 발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연주야!”

노조원들 앞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입가에 허연 거품을 물고 앞으로 걸어나가던 마녀는 한쪽 굽을 삐끗하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간 엿가락이 엎어진 그녀를 품에 안았다. 마녀는 두 손을 앞으로 뻗고 혀를 내민 뒤 히죽히죽 웃어댔다. 옆에 서 있던 종범이 중얼거렸다.

“형님, 저 여자 진짜로 마녀가 되어 삤네.”

엿가락이 마녀의 귓전에 무어라 속삭이자 마녀는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고 엿가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마녀가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는 걸 본 노조원들은 술에 취한 와중에도 슬금슬금 마녀를 피해 걸어나갔다. 한 쪽 굽이 부러진 하이힐 때문에 비틀거리는 마녀가 양손은 앞으로 든 채, 노조원들이 외치는 구호의 리듬과 아무 상관 없이 높은 소리로 비명에 가까운 구호를 외치면서, 경찰들을 향해 걸어나갔다.

“단결, 투쟁, 투쟁, 투쟁, 단결, 단결, 투쟁, 하나, 하나가! 여기 하나! 우리 다!”

나는 종범을 향해 대답했다.

“저게, 마녀냐. 미친년이지.”

진압을 위해 일렬로 서 있던 경찰 중 한 명이 갑자기 몸을 뒤틀더니 들고 있던 방패로 옆에 있는 전경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맞은 전경 역시 자신을 친 전경에게 군홧발로 발길질 했다. 그 옆에 있는 전경 역시 방패를 집어 던지고 주먹질을 시작했고, 삽시간에 전체 대열로 난투극이 번져갔다. 한 판 싸움을 해 보겠다고 결연하게 방송차 위에서 ‘평화 시위 보장하라’, ‘우리 파업 정당하다’ 따위의 구호를 외치던 사회자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아무런 충돌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전경들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몇 명은 머리통이 터져서 바닥에 쓰러져 있기까지 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든 피를 철철 흘리든 상관하지 않고 멍한 눈을 한 청년들은 동료를 넋이 나간 듯 짓밟아댔다. 처음엔 부하들을 말려보려던 상관들은 어느덧 그 사이에 끼어들어 함께 주먹질하다가 앞니가 날아가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노조원들은 그러다 죽겠어요, 그만 하세요, 몇 마디 말을 거들기 시작했지만 차마 그 사이로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러나 하얀 머리털에 어울리지 않게 골리앗을 연상시키는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키로 대열 맨 앞에서 한 남자가 양팔을 벌리고 노조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막고 있었다. 당황한 노조원들을 가로막는 등 근육이 울끈불끈 움직였다. 남자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움직이지 마십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반응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종범과 엿가락 모두 남자 쪽을 돌아보았다.

“조직부장님, 이건 무슨…….”

“가만히 있어. 이건, 마녀야. 여기 마녀가 있어.”

“마녀요?”

“우리 편이야.”

재성의 매서운 눈매가 사방을 훑더니, 이윽고 빨간 드레스를 발견했고, 이어서 까불거리는 날라리 엿가락을 발견했고, 이어서 바람을 모아오려고 준비를 하는 칼바람을 발견했다. 옷 솔기들이 뜯어지기 직전까지 몸을 불리고 있던 재성의 근육들에서 서서히 바람이 빠지기 시작했다. 내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방금 재성은 틀림없이 우리 편이라고 말했다. 재성과 함께 전선에 서 있던 어느 봄날이 몇 세기 전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노가다꾼들의 집회였다. 저 단단한 근육들로 벽돌을 져 나르는 모습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어울려서 나는 재성을 부를 수가 없었다. 경찰들의 난투극이 점점 격렬해졌고,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경찰 한 명이 내 발치로 날아와서 엎드러졌다. 멀찍이서 재성을 멍하니 바라보던 종범은 피투성이가 된 전경을 붙들었지만, 그는 어떤 고통도 호소하지 않은 채 다시 난투극의 현장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외다리로 서서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마녀는 시들어가는 동백처럼 보였다. 빨간 드레스는 꽃의 빛깔이었지만 피의 빛깔이기도 했다. 종범은 크게 눈을 홉뜨고 마녀를 향해 목청을 돋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녀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엿가락이 허겁지겁 마녀를 끌어안았다. 마녀는 게거품을 물고서도 언젠가 새처럼 날아드는 엿가락에게 입 맞추던 그때처럼 헤실거리며 미소 지었다.

“을재다.”

“그만해, 연주야. 돌아와.”

종범은 목청을 가다듬더니 맑은소리를 높게 뽑아냈다. 최근 들었던 소리 중에 가장 청아하고 불순물이 섞인 게 없는 그 소리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고 오직 마녀의 귓가만 노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한 톤씩 올라갈 때마다 마녀의 몸에 가볍게 경련이 일었다. 마녀의 몸이 떨릴 때마다 점점 격렬해지는 경찰들의 주먹질을 보아하니, 종범의 전략은 아무래도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 팔로 마녀를 그러안은 채, 엿가락은 종범을 향해 팔을 뻗었다. 나는 재빠르게 엿가락의 팔을 끊어낼 듯, 날카로운 바람을 보냈다. 재빠르게 팔이 휘어져 바람을 빠져나갔고, 종범은 다시 중심을 잡았다. 그 사이 마녀는 전경들의 의식과 혼재된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종범의 목소리가 마녀의 모든 혈관을 타고 저릿하게 흘러내렸다. 마녀가 울부짖을 때마다 전경들도 마녀와 함께 지옥처럼 울부짖었다.

“을재야, 죽고 싶어.”

그 와중에도 눈송이는 멈추지 않고, 깃털처럼 보드랍게 온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고이기 시작하는 전경들의 뜨거운 핏방울 속으로 떨어져서 녹아내렸고, 노래를 부르는 종범의 입 속으로 쏟아져 내렸고, 둥그렇게 잘려나간 마녀의 무릎뼈를 감쌌다. 함박눈을 뒤집어쓴 마녀는 종범의 목소리에 온몸을 뒤흔들면서 전경들을 향해 정신을 모으려고 하는 듯 보였다. 내가 마녀를 공격할 무기를 찾는 동안, 엿가락은 마녀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연주야,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그만 해. 왜 이러는 거야.”

엿가락은 다시 종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노래꾼, 너도 그만 해!”

또다시 모아놓은 바람은 엿가락의 팔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드는 하얀 눈의 창을 두터운 팔로 막아낸 것은, 다시 근육을 불릴 대로 불리는 바람에 옷이 모조리 찢어져, 하얀 눈밭 위에 상체를 완전히 탈의한 채 서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재성이었다. 재성의 단단한 팔뚝 앞에서 내 창은 힘을 잃고 산산이 부서졌다. 노조원들이 수군거리며 재성의 주변으로 다가오려던 순간, 재성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얼른 가, 계속 가라고!”

끝내 전경 하나가 마녀처럼 다리 한쪽이 끊어졌다. 그 역시 고통을 호소하지 않은 채 멍한 눈으로 다시 격전장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했다. 시위대 중 한 명이 들어가지 말라고 전경을 붙잡았지만, 전경은 매몰차게 그를 뿌리쳤다.

“이 상황을 두고 어떻게 계속 갑니까.”

“저러다 다 죽겠어요!”

재성이 이를 악물고 고함쳤다.

“너희가 말릴 수나 있어? 지금 상황이 안 보이냐?”

타워크레인 깃발 아래에 엄마 손을 붙잡고 온 어린아이가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온갖 소리가 토사물처럼 귓속으로 섞여 들어왔다. 방송차는 전경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고, 마녀가 두 손을 모세처럼 높이 들어 올리자, 싸우는 와중에도 마녀의 조종에 따라 전경들은 양쪽으로 길을 터 주었다. 두려움에 떨면서 노조원들의 하얀 파도는 다시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사회자가 구호를 선창했지만 따라 외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주춤거리며 어떻게든 다시 행진이 시작되고 있었다. 번뜩 정신이 났다. 막아야 할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저것이 아니었던가.

힘을 써서 노조원들을 막아선 안 되었다. 천재지변이 저들을 막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경찰들이 정신을 차리고 저들을 쫓아가야 했다. 나는 재성과 종범을 막는 데에 여념이 없는 엿가락의 손을 피해 탑골공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재성의 몸이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종범의 노래는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나는 낫을 그리며 바람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부드럽게 손 안으로 휘감겨 들어왔다. 손바닥 두 개 크기만 한, 하지만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낫이 마녀의 복부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들었다. 종범의 노래가 낮은 하늘을 올려쳤고, 마녀는 뻗었던 팔을 내려서 갑작스럽게 머리를 감싸 안았다. 종범의 노래를 막으려던 엿가락의 손은 조금 늦었다. 전경들이 싸움을 멈췄다. 잠깐의 침묵 후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람은 거침없이 마녀의 품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마녀는 보이지 않는 낫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번 날려보낸 바람은 결코 되돌릴 수 없었다.

아니, 바람을 건너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눈을 피하지 못했다.

안녕, 오랜만이네, 철구.

종범의 노랫소리가 내 머릿속에도 끈적하게 퍼져 나갔다.

안녕, 연주.

그녀의 웃음소리가 마치 소녀처럼 뇌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때 참 반가웠어.

언제.

고문실에서.

종범의 목소리가 머릿속 어딘가를 치열하게 파고들었고, 나는 필사적으로 종범 쪽을 돌아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엿가락이 내 쪽을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마녀는 이대로 종범의 목소리를 통해 내 의식까지 함께 무너뜨릴 요량이었다.

그만, 잠깐만, 나도 할 말이 있어,

마녀의 의식이 겹쳐지면서 시야가 통일되기 시작했다. 날 끌어안고 있는 엿가락의 얼굴이 보였다. 턱밑으로 늘어진 엿가락의 주름살. 놀랍게도 엿가락은 더는 푸른 새 같지 않았고, 내 생각이 마녀에게 전이된 건지 마녀의 생각이 나에게 전이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마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런 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아니 마녀가 생각했다. 엿가락이 마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 어떻게 눈이 부시게 찬란했는지, 마녀의 사라진 한쪽 다리가 엿가락의 손길에 어떻게 떨렸는지, 나는, 아니 마녀는 온몸으로 기억을 복기했다.

엿가락은 입을 무어라고 벙끗거렸다. 정신 차려, 그만 해, 어떤 말이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마녀가 생각했다. 나는 마녀와 함께 이 상황에서 그저 날아가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몸이 가루가 되어서 눈바람에 함께 날려갈 수 있다면, 이 생각은 마녀의 생각일지 나의 생각일지 알 수 없었다. 엿가락이 손을 뻗어 내, 아니 마녀의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귓전에 무어라고 속삭였다. 엿가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집중하는 순간, 이 목소리를 결코 들려줄 수 없다는 듯이 마녀의 의식은 무자비하게 내 의식을 끊어냈다. 마지막으로 마녀의 목소리가 머리로 깊이 전달되었다.

나란 년은, 정말,

갑자기 의식이 분리되어서 혼란스러웠지만, 마녀가 헐떡이고 있는 것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고, 그녀는 엿가락의 품 안에서 낮게 숨을 내뱉고는 결국 더 견디지 못했다.

마녀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축 늘어진 마녀의 시신은 다리 한쪽이 없는 데다가 주름지고 추해 보였지만, 저 빨간 드레스, 마녀의 시신을 향해 아직도 내가 보낸 바람이 날아들고 있었다. 한번 보낸 바람은 되돌릴 수 없었다. 엿가락은 품속의 마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팔을 길게 늘였다. 땅도 벽도 거치지 않은 채 길게 늘어난, 부드러운 팔 위로 낫 모양의 바람이 꽂혔다. 엿가락의 팔뚝에 살짝 핏방울이 맺히는가 싶더니.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엿가락의 팔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나면서, 결코 끊어지지는 않았다. 바람이 흩어질 때까지 팔을 늘리고서는 엿가락은 피투성이가 된 팔을 다시 원래 길이로 줄였다. 노조원들은 눈밭을 한참이나 더 걸어간 상태였고, 전경들의 싸움은 마녀의 죽음과 함께 깨끗하게 종료되었다. 엿가락은 마녀의 뺨에 눌어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떼어냈다.

마녀를 양손으로 안은 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사박사박 눈이 밟히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렸다.

다시 한 번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더구나 민망하게 눈시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리운 고통이었다. 경찰들을 데려갈 구급차가 왔고, 또 어떤 경찰들은 혼비백산 떨어진 명령에 따라 시위대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앞서나간 시위대의 깃발들이 뒤늦게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끝이군.”

온몸에 눈을 뒤덮고, 엿가락은 마치 눈을 처음 본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아닐지도 몰라.”

재성의 근육이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고, 종범은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종범이 놈, 노래만으로 사람을 죽인 건 처음일 터였다. 남은 한쪽 다리가 덜렁거리며, 하이힐 한 쪽이 바닥에 툭 떨어지자 마녀의 하얀 맨발이 덩그러니 드러났다.

“다음에는 같은 편으로 만날지도 모르잖아.”

엿가락의 팔에서 조금 힘이 빠지자 마녀의 목이 힘없이 덜렁거렸고, 마녀의 목에서 고개를 돌리려다 재성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재성은 아직도 하염없이 울고만 서 있었고, 나는 견딜 수가 없이 춥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빛나서, 그만 팔각정 한가운데 눈이 떨어지지 않은 그 작은 마루 위로 올라앉고 싶어졌다. 조금만 더 여기에 서 있다가는 곧 눈 떨어지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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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도망니 13.03.05 00:32 댓글

    아..... 탁월하네요.

    잘 봤습니다.

  • 도망니님께
    No Profile
    앤윈 13.03.05 21:50 댓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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