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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피와 토스트

2013.04.30 23:5504.30

 

피와 토스트
- 시럽 추가

 

 


시작은 떡이었다.
그렇다, 떡. 품질 좋은 쌀을 정선하여 세척한 뒤 산도 ph 4.0 내지 ph 5.0로 조절한 물에 침지시켜 – 는 뭔소린지 모르겠으니까 쉽게 말하자면 담가서 불린 다음에 조분쇄하고 다시 분쇄 – 도 한국말로 하자면 두 번씩 가루로 팍팍 빻아서 물과 조미액을 첨가한 후 섭씨 약 102도의 증기로 쪄서 압출 성형하고 콩고물이나 팥고물을 묻힌 한국의 대표적인 명절음식, 떡.
떡이 뭐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대체로 떡은 온국민이 사랑하는 전통음식이며 나도 참 좋아한다. 내가 한 번 먹어보기 전에 말하고 싶은 사실은 이 떡을 커피전문점에서는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떡 파는 카페도 찾아보면 있긴 있는데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커피전문점에서는 팔지 않는다. 이유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카페 주인장이 환상문학 작가에다 전문 바리스타이며 떡-한과 조리 분야와는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인 듯)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게 뭐냐면 이 가게에서는 떡 안 판다고.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알아들으란 말이지. 안 파는 음식을 먹고 싶으면 그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면 되잖아. 사방에 널린 게 떡집에 제과점에 편의점인데 도대체 왜, 어째서, 뭘 위해서 굳이 남의 가게에 외부 음식을 가지고 들어와서 진상을 부리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작은 떡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진상 손님이었다는 얘기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구인도 아니었다. 알고보니 사람도 아니었다. 망할 것들.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커피 가게에 앉아서 넷북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로 개장한 커피 가게였고, 새로 산 넷북이었다. 이 넷북으로 말하자면 전에 쓰던 넷북은 운명을 달리하실 때가 되셨는데도 고롱고롱하면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 일단 켜면 전원은 들어오는데 이후로 부팅하는 데 삼십분, MS 워드 한 번 구동하는 데 이십분, 애초에 내 컴퓨터 창 여는 데 십오 분씩 걸리고 툭하면 이 운영체제로는 그 응용프로그램을 구동할 수 없다느니 헛소리만 하면서 그 와중에 쌈빡하게 맛이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키는 일을 하지도 않고 하염없이 질질질 끄는 모양새를 계속 들여다보다가는 내가 울화통이 터져서 먼저 맛이 갈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들고 다니면서 글 쓸 수 있는 기계를 새로 장만해야만 하겠다는 일생일대의 용단을 내렸는데 때마침 자주 가는 인터넷 시장에 보니까 신품 넷북 재고분이 쌓여서 떨이로 팔아치운다는 광고를 보고는 그 길로 주문하고 입금까지 해서 다음날 짠, 하고 배송을 받았던 것이다. 예상보다 상당히 무거워서 실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대면서 죽지도 않고 고롱고롱 버티는 악마의 고물넷북에 비하면 새 기계는 뭐든지 누르는 대로 휙휙 구동이 되는 게 너무나 신통방통해서 나는 신품 재고(?) 넷북과 한창 사랑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바로 며칠 전, 가게 자리 알아보러 다니던 ㄱ모 웹진의 필진 i님 (가명)께서 드디어 개장을 하셨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문제의 ㄱ 웹진 관련자이시면 필진이든 독자든 모두모두 와서 글도 쓰시고 커피도 한 잔씩 드시라는 공지를 보고 나는 게시판에서 글만 보던 분한테 공짜로 뭘 달랄 생각은 전혀 없고 글을 쓰라는 그 말씀은 몹시 땡겨서 사랑하는 신품재고떨이무겁기짝이없는넷북(이름 길다)을 이고지고 당장 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ㄱ 웹진 관련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손님으로 위장하여 몰래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어째서 위장까지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괜시리 쑥스러웠다), 넷북 전원도 연결할 수 있는 구석자리까지 득템하여 향이 몹시 좋고 목으로 살살 넘어가는 생애 최고의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매우 행복하게 – 여기까지는 행복했다 – 글을 쓰는 대신에 중간고사 채점과 점수 입력 작업에 한창 애쓰던 중이었다. (내 팔자.)
“1월에”라는 단어에 강세를 잘못 찍었다거나 “대학”을 말하자면 “다학”으로 잘못 썼다거나 이런 자잘하기 짝이 없는 실수를 일일이 잡아내서 하나에 1점도 아니고 소심하게 0.25점 혹은 0.5점씩 깎아서 대단히 복잡해진 최종점수 (예시: 82.75점)를 엑셀파일에 입력을 하면서 중간중간에 지겨울 때마다 둘러보니까 가게에는 나 말고도 (내 것보다 훨씬 좋아보이는) 글 쓰는 기계를 펼쳐놓고 뭔가 작업중인 사람이 꽤 많았다. 화면에 얼굴이 가려서 안 보이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거북목 증후군에 걸리기 딱 좋은 자세로 작업을 하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 모두 다 문제의 ㄱ 웹진 관계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잘 살펴보면 아는 관계자가 한 명쯤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곁눈질을 하다가 나는 주방 바로 옆 구석자리에 대단히 귀여운 고양이 브로치가 여러 개 붙어 있는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팍 찌푸린 표정으로 테이블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한 권씩 펼쳐서 들여다보다가는 탁 덮고 다른 책을 골라서 또 펼쳐서 몇 장 넘기다가는 다시 덮어서 밀어놓고 또 다른 책을 펼쳐서 몇 장 넘기다가 덮어버리고…를 반복하는 가릉작가님(가명)의 모습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갑기도 하고 뭐 하시는 건지 궁금하기도 해서 다가가서 어쩐 일이시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에 일어난 일이 바로 떡 사건이었다.


문제의 진상 손님들은 – 지금부터 떡 병(餠) 자를 써서 “병자(餠者 혹은 餠子)들”이라고 지칭하겠다 – 모두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은 검은 정장이라고 하면 자켓과 아랫도리만 검은 색이고 안에 받쳐입은 와이셔츠나 넥타이는 보통 다른 색이게 마련인데 (-이”기” 마련 X) 이 병자들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새까맸다. 처음 들어서자마자 그들 중에서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비썩 마르고 나이든 병자가 앞에 나서서 “점장 나오라고 해!”를 (이것보다는 약간 부드러운 말투로) 시전하였다. 그리고 주인장 i님이 나서자 이들이 다짜고짜 따지고 든 것은 예술인 복지법에 따른 문예창작 지원금 신청서에 어째서 가게 이름을 쓰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저 문예창작 지원금 신청 안 했는데요.”
라고 주인장 i님은 정중하지만 벙찐 표정으로 단호하게 답변하였다. ‘예술인 복지법’ 혹은 ‘문예창작 지원금 신청’이라는 길고 딱딱한 용어들이 언급될 때마다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 중 몇몇이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지만 아마 기분 탓이겠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가게에 쳐들어온 정체불명의 검은 옷 병자들 중에서 좀 젊어 보이는, 그러나 역시 비쩍 마른 병자 한 명이 주머니에서 길쭉하고 네모지고 모서리가 둥근 특허낸 디자인의 물건을 꺼내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선두에 나섰던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는 관료주의 반동분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전혀 사과나 해명을 하지 않은 채 드디어 i님에게 문제의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럼 떡은?”
이 뜬금없는 질문에 대하여 i님은 다시 한 번 더욱 벙찐 표정으로 상식적이지만 불분명한 반응을 보였다.
“에?”
“떡은 어디 있냐고.”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가 되풀이했다. 통화를 마친 젊은 병자가 뒤에서 덧붙였다.
“새로 개업을 했으면 개업 떡을 제공하는 것이 업계 상식 아닌가?”
떡을 돌리건 말건 기본적으로 주인 맘이며 돌리더라도 같은 건물에서 지내는 이웃 사람들한테 돌리는 게 상식이지 생전 처음보는 검은 옷의 건어물들에게 내가 무슨 떡을 왜 줘야 하냐, 라고 반박하고 싶은 표정이 i님의 씰룩이는 미간부터 인중을 거쳐 윗입술까지 살짝 스쳐 지나갔다는 것은 그냥 나의 추측이다. 실제로 i님은 어디까지나 평정을 잃지 않고 조용히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희 가게에서 떡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판매? 파안매애?”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가 몹시 불쾌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개업 떡을 파는 사람이 어딨어? 공짜로 주는 거지.”
내가 개업 떡을 톤 단위로 맞춰서 백두부터 한라까지 전국에 돌리고 남은 분량을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에 수출해서 동북유라시아 식량난을 해결하는 한이 있어도 기분 나빠서 너네한테는 안 준다, 라는 표정이 다시 한 번 i님의 양 볼과 미세하게 굳어진 턱에 스친 것 같다는 의견도 역시 나의 추측이다. i님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저희 가게에서 떡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래?”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가 곁에 서 있던, 역시 비쩍 마른 다른 병자에게 눈짓했다.
“안 주면 우리가 가져다 먹지 뭐.”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비쩍 마른 병자는 들고 있던 검은 서류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검은 서류가방의 딱딱하고 무감정한 모양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팥떡이었다.
팥고물을 듬뿍 얹고 김이 살살 피어오르는 그 모양새도 모양새이거니와 꺼낸 순간 퍼지는 탄수화물(100g 기준 약 47.5g 포함) 단백질 (100g 기준 약 5.5g 포함) 식이섬유 (100g 기준 약 4.4g 포함)와 베타카로틴(100g 기준 약 38.86mg 포함) 등이 혼합된 맛 좋은 냄새가 매장 안에 온통 퍼지면서 잠시 커피향을 덮어 버렸다. 이때까지는 남의 다툼에 끼어들이 귀찮아서, 혹은 마감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각자의 작업에만 몰두하거나 몰두하는 척하던 손님들도 시루팥떡의 냄새에 일제히 고개를 돌려 비쩍 마른 젊은 병자 쪽을 바라보았다. 꿀꺽, 하는 소리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 않았으나 눈에 띄게 목울대가 움직이는 손님들도 있었다.
“먹지 않겠는가?”
검은 옷의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가 은근한 말투로 제안했다.
눈앞에 나타난 시루팥떡의 위용에 아주 잠깐 정신줄을 놓았던 가게 주인장 i님은 이 말을 듣고 즉각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희 가게 방침상 외부 음식을 반입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미 가지고 들어와서 가게 내부에 있으니까 ‘외부’ 음식이 아니잖아?”
네모지고 모서리가 둥근 기계를 꺼내 전화통화를 했던 비쩍 마른 젊은 병자가 말했다. 시루팥떡을 둘러싼 검은 옷의 병자들이 이 말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 하고 웅성거렸다. 이에 대하여 i님의 미간이 다시 한 줄기 짜증이 스쳐 지나가는 듯 하였으나 주인장은 어디까지나 조용하고 평온하게 대답하였다.
“저희 가게에서 만들어 팔지 않는 음식은 외부 음식입니다. 여기서 드실 수 없으니….”
“없으니 뭐?”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가 말꼬리를 가로챘다.
“없으니 뭐?”
빈정거리는 말투에 i님은 끝까지 평온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답변하려 했다.
“가지고 나가 주시면….”
“떡도 안 주면서 손님을 내쫓네?”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가 이렇게 말하고 뒤에 서 있던 다른 비쩍 마른 병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야, 국물 가져와.”
i님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다시 한 번 검은 옷을 입은 병자들은 자기끼리 맞아 맞아, 떡은 국물 없이 못 먹지, 하고 웅성거렸다. 그리고 검은 서류가방에서 시루팥떡을 꺼냈던 병자는 시루팥떡을 옆에 서 있던 검은 옷의 다른 병자에게 넘겨주고 이번에는 서류 가방 안에서 김치왕뚜껑을 꺼냈다. 저 서류가방은 납작해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저런 음식물이 다 들어가는 걸까 신기해하기 전에 옆에 서 있던 비쩍 마른 젊은 병자가 자기 서류가방에 손을 넣더니 전기주전자를 꺼내 김치왕뚜껑에 끓는 물을 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라면 냄새가 온 가게 안에 퍼졌다. 이전의 시루팥떡까지는 넋놓고 바라보던 손님들도 이제는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i님이 다시 말했다.
“다른 손님들이 불쾌해 하십니다. 외부 음식은 가지고 나가….”
“아니 글쎄 못 가지고 나간다니까?”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는 물을 부은 김치왕뚜껑을 건네받으며 이죽거렸다. 비쩍 마른 젊은 병자는 서류 가방에서 이번에는 김치사발면을 꺼내서 또 끓는 물을 붓기 시작했다. (김치를 주제로 한 컵라면의 종류는 대단히 다양한 것 같다.) i님은 카페 주인으로서 이 사태를 두고 볼 수 없어 김치사발면을 든 병자들 일당에게 한 걸음 다가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이러시면 정말 곤란….”
그 뒤로 이어진 사태는 너무 빨리 일어난 일이라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우선 병자들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면서 들고 있던 검은 서류가방을 치켜들었고, 폭행을 직감한 i님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는데, 그 과정에서 옆에 서서 김치사발면을 넘겨받던 검은 옷의 병자 한 명이 i님의 팔꿈치를 피하려 했고, 그 서슬에 옆에 서서 보란듯이 시루팥떡을 먹으며 김치왕뚜껑 국물을 마시던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에게 김치사발면 국물을 쏟았고, 그러자 뜨거운 국물을 뒤집어쓴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도 괴성을 지르며 들고 있던 김치왕뚜껑과 시루팥떡을 내던졌고, 그 바람에 옆에 서서 이제는 김치신라면 큰사발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던 검은 옷의 병자 둘이 김치왕뚜껑 국물을 뒤집어썼고, 그러자 이 두 사람 역시 들고 있던 김치신라면 큰사발과 뜨거운 물이 든 전기주전자를 내던졌고, 결과적으로 i님을 위협적으로 둘러싸고 있던 정체불명의 떡집착증 진상들은 모두 자기들끼리 연쇄적으로 쏟아부은 뜨거운 국물을 차례차례 뒤집어쓰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던 것이며, 이건 좀 딴 얘기지만 본 문단은 단편과 장편을 통털어 내가 여태까지 소설에 썼던 것 중에서 가장 긴 한 문장으로서 비공식적인 기록을 세운 것 같은데 사실 문장이 길다고 좋은 건 절대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이 그런 일로 기뻐할 때도 아니니까 본론으로 돌아가야겠다.
뜨거운 라면국물을 뒤집어쓴 순간부터 검은 옷의 비쩍 마른 사람들은 변신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피부가 회갈색으로 변했으며 눈도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 없이 회갈색으로 흐려지고 초점이 사라졌다. 동시에 검은 정장을 찢고 회갈색의 비쩍 마른 팔다리가 두 개씩, 세 개씩 더 솟아나왔다.
- 끼아아아악!
비쩍 마른 나이든 병자(인 것으로 추정되는 회갈색 괴생명체)가 고막이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질렀다.
- 라면 다시 끓여와!
이 예상 외의 사태를 직면하여 손님들과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라기보다는 깜짝 놀라서 얼떨결에 라면을 다시 끓이려던 불쌍한 i님을 위하여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한 손님의 목소리가 매장 안에 울려퍼졌다.
“이런 잡것들!”
목소리의 주인공은 ㄱ웹진에서 토막처리 담당이자 원고독촉 전문이라는 무시무시한 직책을 맡아 뭇 필진의 두려움을 사고 있는 미로요정님(가명)이었다. (담당업무 세부표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음 – 작가 주)
“진상은 외계좀비로 변신해도 여전히 진상이구나! 토막당하고 싶나!”
미로요정님의 의분에 찬 일갈에 숨어 있던 손님과 손님을 가장한 ㄱ웹진의 필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니 손님(과 손님을 가장한 필진)들은 ‘외계좀비래’ ‘외계좀비?’ ‘저런 게 외계좀비구나’ ‘좀비인 건 알겠는데 외계는 뭐야?’ ‘외계인은 알겠는데 좀비는 뭐고?’ ‘이거 소설에 써도 되나?’ 이런 쓸데없는 대화를 소근소근 나누고 있었다. 이에 더욱 더 한심해져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된 미로요정님은 다음과 같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업데이트까지 겨우 사흘 남았는데 필진들의 원고마감을 위해서라도 카페에 평화를 유지하지는 못할 망정 음식료품 파는 영업점에 외부음식을 무단 반입하고 사방에 라면국물까지 뿌리면서 냄새나게 변신을 해?!”
그리고 미로요정님은 뒤에 숨어 외계좀비에 대해 수근거리던 필진들에게 독촉했다.
“여러분은 빨리 원고 주세요!”
이 한마디에 얌전히 소설 쓰고 있던 필진들은 마시던 커피를 벌컥벌컥 끝까지 들이켜고 모두 힘차게 일어나 외계좀비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라면국물 냄새를 풍기는 외계 떡좀비들이 공들여 신장개업한 커피전문점에 민폐를 끼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지구 시민으로서의 존엄성과 의협심 때문이라기보다 작가는 원래 마감일이 가까이 닥치면 닥칠수록, 원고 독촉을 받으면 받을수록 글쓰기가 말 그대로 죽기보다 싫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피와 광기로 가득한 걷잡을 수 없는 살육이 시작되었다. 외계좀비들은 좀비였기 때문에 시루팥떡과 컵라면 대신 커피점의 살아 있는 손님들을 뜯어먹기 위해 덤벼들었다. 글쓰기 싫은 필진들은 작업하던 원고를 저장한 뒤 (저장 중요하다) 노트북을 덮고, 혹은 타블렛을 가방 안에 소중히 집어넣고 외계좀비에게 덤벼들어 뜨거운 음료를 뿌리고 의자로 때리고 팔다리를 꺾고 머그컵과 쟁반으로 대가리를 내리치고 초점 없는 회갈색 눈에 숟가락이나 포크를 꽂는 등 할 수 있는 한 격렬하게 저항하면서도 속으로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소설로 써야겠다. 근데 마감 전까지 다 쓸 수 있을까?
속으로 딴생각을 하면 무슨 일이든지 죽도 밥도 안 되는 법이다. 그리고 목숨과 원고마감을 건 이 피와 살육의 전투에서 외계좀비 측에는 결정적인 이점이 있었으니 바로 지구 좀비가 아니라 ‘외계’ 좀비라는 사실이었다. ㄱ웹진은 환상문학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필진들은 대체로 이제까지의 환상문학이나 SF 작품에 묘사된 좀비를 대적하는 방법에는 꽤 익숙하여 각자 나름대로 목을 자른다든가 머리를 부순다든가 심장을 꿰뚫는다든가 등등의 처리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i님의 가게에 나타난 떡종자들은 외계좀비이다 보니까 이런 공격법이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외계좀비들은 심장을 꿰뚫려도 비쩍 마른 회갈색 팔다리를 휘두르면서 끈질기게 쫓아왔고 머리가 부서져도 몸의 나머지 부분은 으깨진 머리 잔해를 질질 흘리면서 계속해서 비틀비틀 돌아다녔으며, 심지어 목을 잘렸는데도 잘린 머리가 귀를 박쥐 날개처럼 펄럭이며 천장으로 날아오르더니 뾰족한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고 뛰어내려와 산 사람의 목을 물어뜯고 피를 빨려고 덤벼들었다. 팔다리가 분리되면 떨어져나온 사지가 각각 다시 공격을 해오는 데다가 처음에 변신하면서 솟아난 팔다리의 숫자가 벌써 보통 지구인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비틀거리고 꿈틀거리면서 괴성을 지르는 회갈색 외계좀비들과 떨어져나온 그 신체 부분들은 필진들을 점차 포위하고 수세에 몰았다. 필진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러다가는 원고 마감을 좀 미루는 게 아니라 아예 못 하게 되는 거 아냐?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나는 어디서 뭘 했냐고 물으신다면 처음부터 워낙 구석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살살 기어서 카운터 뒤로 돌아 주방으로 도망을 쳤다. 비겁하다고 욕해도 할 말은 없지만 쌈박질이나 외계좀비는 애저녁에 취향이 아니라서 소설로 쓸 일도 없고 원고는 지난 달에 두개 냈으니까 이번 달 마감은 살짝 포기해도 혼나진 않겠지 하는 심산에 중간고사 성적처리하던 일거리를 끌어안고 살그머니 빠져나가서 경찰이나 구급차나 소방서나 하여간 어딘가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과연 정확히 뭐라고 도움을 청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진상 손님이라면 모를까 외계좀비가 공격했다는 걸 누가 믿어주냔 말이다. 예전에 한 번 ‘그것이 알고싶다’에 방송됐던 내용을 생각하면 경찰차가 와서 카페 안의 필진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 길로 나를 실어다가 정신병원에 처넣을 가능성이 훨씬 커 보였다.
이런 걱정을 하면서 잔뜩 몸을 숙이고 기다시피 카운터 뒤로 돌아서 들어갔다가 나는 뭔가 작고 딱딱한 것에 얼굴을 맞았다. 외계좀비의 떨어져나온 팔다리인 줄 알고 기겁을 하면서 눈을 질끈 감고 양손을 막 휘둘렀는데 아무 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대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눈을 살짝 뜨고 동태를 살폈다. 얼굴을 내리친 것은 가릉작가님의 야구모자였고, 그 중에서도 딱딱하게 느껴진 것은 모자에 붙어 있던 고양이 브로치였다.
“안 다치셨어요? 저는 또 외계좀비인 줄 알고….”
가릉작가님이 미안해했다. 작가님은 주방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펄떡펄떡 뛰며 덤벼드는 외계좀비의 잘린 팔뚝과 발목 따위를 마치 바퀴벌레 때려잡듯이 모자로 탁탁 내리치는 중이었다.
“커피에 시럽 추가하려고 이쪽으로 왔는데 하필 그 때 외계좀비들이 갑자기 변신을 하잖아요. 저내일까지 낭독회 최종프로그램 짜서 기획서 내야 된단 말예요!”
이렇게 분노하면서 가릉작가님은 눈을 노리고 팔딱 튀어오른 외계좀비 손가락을 모기 잡듯 능숙하게 모자 챙으로 탁 쳐서 카운터 밖으로 날려 보냈다.
“무슨 낭독회요?”
나도 카운터 위에서 급한 대로 조그만 접시를 하나 집어들고 가릉작가님을 본받아 외계좀비의 팔다리 조각들이 덤벼들 때마다 탁탁 내리치면서 물었다. 접시는 모자보다 단단해서 좋았지만 무거워서 빨리 휘두를 수가 없었으므로 대체로 가릉작가님의 모자만큼 많은 좀비 조각들을 단시간에 때려잡지 못했다.
가릉작가님이 설명했다.
“문예창작 지원금 신청한 게 통과됐거든요.”
“아, 축하드려요!”
내가 입을 크게 벌리고 팔을 물어뜯으려는 외계좀비의 머리통을 접시로 밀어내며 기뻐했다. 그러나 가릉작가님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요…. 돈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문화예술 사업에 참여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사업요? 무슨 문화예술 사업인데요?”
나의 질문에 가릉작가님이 대답 대신 울분과 원한을 한껏 실어 다시 덤벼들려는 외계좀비의 머리통을 또 모자로 때려서 카운터 바깥으로 날려 보냈다. 모자에 붙은 딱딱한 고양이 브로치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외계좀비의 머리통은 ‘끽!’ 하고 비명 비슷한 소리를 지르며 매장으로 날아갔다. 가릉작가님이 말했다.
“몰라요. 일반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본인이 직접 짜서 장소 섭외도 직접 하고 기획서까지 다 써서 내래요. 아니, 작가가 그런 거 기획하는 사람이에요? 문예창작을 하라고 돈을 줬으면 창작에만 전념하게 내버려둬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나니 가릉작가님의 테이블에 쌓여 있던 책이 이해가 됐다. 가릉작가님은 계속 울분을 토로했다.
“지금 써야 되는 장편이 여덟 권이고 기획해둔 중단편이 열 세 갠데, ㄱ웹진 업데이트도 사흘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쥐꼬리만한 지원금에 목 매서 낭독회 최종 프로그램 따위를 짜고 앉았어야 되겠냐고요! 무슨 책을 읽어야 일반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런 거 알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독서 강의를 하지 내가 왜 글을 쓰겠냐고!!”
가릉작가님이 분노에 찬 열변을 토하는 사이에 외계좀비의 잘린 손 하나가 모자챙에 달라붙어 타고 올라왔다. 가릉작가님은 깜짝 놀라서 옆에 있던 주방 벽장 문짝에 대고 모자를 탁 쳤다. 외계좀비의 잘린 손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벽장 손잡이에 매달렸다. 가릉작가님이 다시 손목을 겨냥해서 모자를 날렸다. 외계좀비의 손이 버둥거리자 벽장 문이 열렸고, 외계좀비는 손가락을 뻗어서 안에 있던 커피 자루에 달라붙었다. 가릉작가님은 모자를 선풍기 날개처럼 움직여서 빠르게 타타타타 내리쳤고, 커피 자루에 질기게 달라붙었던 외계좀비의 손이 드디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 서슬에 외계좀비의 손가락이 끌어당긴 커피 자루도 함께 쓰러지면서 원두가 와르륵 쏟아지고 말았다.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은 진한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그 향을 맡았기 때문인지 가릉작가님은 다시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너 이거 얼마짜린지 알아!”
가릉작가님은 격분하여 모자를 내던지고 덤벼드는 외계좀비와 그 조각들을 향해서 바닥에 쏟아진 커피 원두를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새로 개업한 남의 가게에 와서 이게 무슨 민폐야! 이거 i님이 직접 로스팅한 원두인데! 바닥에 다 쏟아서 못 쓰게 됐잖아! 너네가 물어낼 거야? 물어낼 거냐고!”
가릉작가님도 알고 던진 건 아닌 듯한데 커피 원두는 예상 외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원두에 맞은 순간 외계좀비와 그 조각들은 ‘꺅!’ 하는 소리를 내며 터져버렸던 것이다. 터지는 순간에 검붉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반쯤 굳은 피와 썩은 살 조각이 사방에 튄 것만 빼면 상당히 고무적인 발견이었다.
그리하여 전세는 역전되었다. 혹시 폭발하는 좀비의 피나 살점이 닿을까봐 소심하게 냅킨으로 코와 입을 가린 뒤에 나도 가릉작가님과 합세하여 커피원두를 던졌다. 중간중간 짬이 날 때마다 가릉작가님의 모자에 원두를 한 움큼씩 담아서 매장 안의 다른 필진과 손님들에게도 전달했다. 뜨거운 커피를 뿌렸을 때는 꿈쩍도 안 하던 외계좀비들이 어째서 커피원두를 맞고 폭발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완벽한 맛과 향을 위해 직접 로스팅하면서 들인 i님의 시간과 정성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애초에 외계좀비들이 커피원두에 약했던 것일 수도 있다. 커피 원두에 맥을 못 추면 애초에 왜 커피집에 쳐들어와서 소란을 피웠는지 궁금해지지만 잘 따져보면 좀비란 지구 출신이든 외계 출신이든 반쯤 죽었으므로 대체로 아무 생각이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처음에 변신했으며 가장 많은 팔다리의 갯수와 가장 흉측한 외모를 자랑하던 대장 좀비도 가릉작가님의 모자에 하나 가득 담긴 커피 원두를 맞고 마침내 온 동네가 울릴 듯한 비명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터져버렸다.


카페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바닥에는 운 좋게 원두폭격을 피한 좀비 손가락이나 발목 같은 것들이 가끔 꾸물꾸물 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적들은 대체로 폭발해서 갈기갈기 분해되었고, 남은 조각들은 공격할 기운이나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한편 불쌍한 i님은 가게 주인이라는 죄로 매장 안에서 가장 선봉에 서서 커피원두를 던졌고 그 때문에 비린내나는 조각들도 가장 많이 뒤집어썼다. 그리하여 i님은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좀비들의 핏덩어리와 살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가게 안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때 가게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소리를 냈다. 긴 머리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난장판이 된 가게 안에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이게 뭐예요?”
아가씨가 눈이 둥그레져서 i님을 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 아, 음…. 왔어요?”
i님이 머뭇거리다가 전혀 답변이나 설명이 될 수 없는 대답을 웅얼거렸다.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한 필진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리뉴얼의 마술사이자 ㄱ웹진의 보물 치킨간증님(가명)이었다. 치킨간증님이 아가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얼떨결에 마주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누구예요?”
손님들 중에서 누군가 궁금해했다. 치킨간증님이 여전히 얼굴만 빼꼼 내민 채 팔을 내리고 대답했다.
“i님 여자친구요.”
좀비의 잔해를 잔뜩 뒤집어쓴 필진들이 다시 ‘여자친구래’ ‘여자친구?’ ‘여자친구가 있대!’ ‘예쁘잖아!’ 등등 쓸데없는 내용의 대화를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i님의 여자친구님과 i님은 더더욱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과 필진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i님 여자친구님의 지휘 하에 우리는 난장판이 된 카페의 뒷처리를 했다. 몇몇 손님들이 청소하기 싫어서 살금살금 도망치려다가 i님 여자친구님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 들어왔다. 우선 테이블과 의자 등 집기 중에서 쓸 수 있는 것은 한쪽에 모아놓고 부서진 것들은 밖으로 들어냈다. 그리고 바닥에 널린 잔해들 중에서 나무, 유리, 플라스틱 조각과 외계좀비 부스러기는 가능한 한 분리해서 따로 모았다. 청소가 끝난 뒤에 i님 여자친구님은 부엌 벽장을 열더니 안쪽에서 거대한 유리 단지를 몇 개 꺼냈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가져와서 i님에게 내밀었다.
“에?”
i님이 다시 벙찐 표정으로 불분명한 소리를 냈다.
“담으라구요.”
i님의 여자친구님이 명령했다. i님은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반쯤 옆으로 돌렸다. 지켜보던 필진과 손님들도 모두 함께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i님은 어쨌든 외계좀비의 부스러기들을 유리 단지에 담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있는 손가락 쪼가리 같은 것들이 가끔 도망을 쳤고 그 때마다 필진 중에서 누군가 쫓아가서 잡아왔다. 그래도 어쨌든 외계좀비 부스러기는 여러 정황을 생각할 때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유리 단지 다섯 개를 꽉꽉 채우고 최종적으로 뚜껑을 닫기 전에 i님의 여자친구님은 뚜껑 안쪽을 살펴보더니 단지를 전부 꽉꽉 닫고 나서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그럼 언제쯤 오실 수 있는데요? … 빨리 와 주세요. 예, 당연히 가게 안에 둘 수가 없죠. … 예.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i님의 여자친구님은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i님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디다 전화했어요?”
“은하계청이요.”
“그게 뭐예요?”
i님이 다시 물었다. i님의 여자친구님이 설명했다.
“외계좀비 시체는 일반 쓰레기처럼 버리면 안 되고 따로 모아서 분리수거해야 돼요. 지금 은하계청 청소관리과에 사정 다 설명해뒀으니까 스티커 안 붙여도 와서 수거해갈 거예요.”
i님의 벙찐 표정을 보고 여자친구님이 덧붙였다.
“환상문학 작가가 커피 가게를 열었으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외계좀비 쓰레기가 담긴 유리 단지는 i님 여자친구님의 지휘에 따라 가게 밖에 한 줄로 늘어놓았다. 잠시 후에 밖에서 갑자기 ‘펑!’하는 폭발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문가에 있던 손님과 필진들이 모두 놀라서 뛰어나갔다. 연이어 ‘펑!’ ‘펑!’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몇몇 필진들은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문가에서 고개만 내밀고 훔쳐보았다. 나도 그 뒤에 숨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엿보았다. 가게 밖에 한 줄로 늘어놓았던 외계좀비 쓰레기 단지들이 하나씩 ‘펑!’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아올라 사라졌다. 내가 고개를 내밀었을 때 마지막 단지가 폭발음을 내며 솟아올랐다.
i님 여자친구님이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원래 은하계청에선 시공간 이동방식으로 수거해 가요. 안 그러면 너무 오래 걸리고 귀찮으니까.”
그리고 i님 여자친구님은 주방을 마저 정리하기 위해 표표히 카운터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커피전문점은 평화를 되찾았다. 불타오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끝까지 남아 있었던 몇 안 되는 무모한 손님들과 원고마감을 기피하기 위해 외계좀비에 대항해 싸웠던 필진들은 부서지지 않은 테이블과 의자를 모아서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i님이 남은 원두로 끓여준 커피를 마시고 토스트를 먹었다.
토스트는 그냥 일반 식빵을 토스터로 구워서 딸기잼을 바른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외계좀비와의 사투 뒤에 먹는 커피와 토스트는 그 맛이 남달랐다. 외계좀비를 물리치는 신비한 힘이 담긴 원두로 끓인 커피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원고를 굉장히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마지막 토스트 조각이 손님들의 입 안으로 사라지고 다들 빈 커피잔을 들고 앉아 등 따시고 배 부르고 만족하여 각자의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 왔을 때 미로요정님이 말했다.
“자, 그럼 상황 마무리됐으니까 원고 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서 슬금슬금 흩어졌다.


i님의 카페에 다시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가릉작가님이 그다지도 골치를 썩이던 낭독회를 드디어 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페 안에 들어서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난장판이 되었던 카페는 고작 한 달 사이에 깔끔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밝고 포근한 분위기에, 그다지 넓지 않은 아늑한 매장 안에 테이블 수는 어쩐지 조금 더 많아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빽빽이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기는커녕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가릉작가님에게 가까운 앞쪽으로 나가려면 손님들의 머리나 어깨를 타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손님의 바다를 헤치고 간신히 주문을 받으러 온 i님에게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가릉작가님이 인기가 대단하시네요.”
“그게 말이죠…”
i님은 어째서인지 약간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사실 저희 가게가 외계좀비 사건 이후로 계속 이렇게 붐벼요. 외계인이 나타났던 카페라고 인터넷에 소문이 나고 외국 사이트에도 실리고 그래서 갑자기 관광 명소 같은 게 됐나봐요.”
“와, 정말요? 잘 됐네요!”
내가 기뻐했다. i님은 다시 겸연쩍게 웃었다.
“네, 그리고 환상문학 작가님들이 매번 여기서 낭독회나 강연회를 하시는 것도 손님들한테는 좀 특이해 보여서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구요…”
여기서 i님은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물론 저 손님들은 이게 우리 카페가 문화예술의 명소라서가 아니라 작가님들이 지원금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강제 낭독회인 걸 모르지만요.”
나는 기획서를 써야 한다고 분노하면서 모자로 외계좀비 머리통을 쳐서 카운터 너머로 날려보내던 가릉작가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i님은 심각한 얼굴로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가릉작가님이 서 있는 안쪽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기 앉아 있는 저 분이 담당 공무원이에요. 와서 감시까지 할 줄은 몰랐다니까요.”
나는 ‘공무원’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i님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가릉작가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검은 정장을 입은 비쩍 마른 병자가 아니라 수수하게 생긴 중년 여성으로, 평범한 블라우스에 요즘 유행하는 좀 화사한 색깔 치마 차림이었다. 그리고 가릉작가님이 뭔가 말할 때마다 마치 학생이 선생님 말씀을 받아쓰듯이 들고 있는 공책에다 열심히 받아적는 중이었다. 그것이 어떤 내용이며 어떤 용도일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평가 시스템에 반영되는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반영되어 계속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낭독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릉작가님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거는 건 애초에 포기했다. 같은 이유로 i님도 아르바이트 직원까지 동원하여 주문 받고 커피와 토스트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여서 리필이나 추가주문도 포기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진하고 환상적인 향을 풍기는 맛있는 커피를 끝까지 다 마신 후에 자리를 떴다.
밖에 나와 보니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카페 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특히 가게 문 앞에 세워둔 안내문이 잘 나오도록 찍는 것 같았다. 안내문에는 “외부음식 절대 반입 금지”라는 경고문이 12개 국어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UFO에서 막 내리려는, 눈이 크고 어쩐지 정감이 가는 외계인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구상에 단 한 곳! 진짜 외계인이 출현했던 대한민국의 명소!
그러나 조심하세요! 외부 음식을 반입하시면 이렇게 귀여운 외계인이 좀비로 변합니다!”


나는 웃었다. 사진의 호감형 외계인은 그 때의 비쩍 마른 검은 종자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데다가, 저렇게 써 놓으면 진짜 외계인이나 좀비가 나타나는지 궁금해서라도 외부음식을 시험적으로 반입해보는 손님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i님은 여전히 사방에서 쏟아지는 주문을 받고 커피와 토스트를 만드느라 무척 바빠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웃으면서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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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3
  • No Profile
    pena 13.05.01 00:27 댓글

    아름다워요. ...

  • No Profile
    미로냥 13.05.01 14:30 댓글

    요정 됐네요 *'ㅂ'* 만세!

  • No Profile
    김보영 13.05.01 16:21 댓글

    악 ㅋㅋㅋㅋㅋㅋ

  • No Profile
    정도경 13.05.01 23:14 댓글 수정 삭제

    필진들 모두 즐거워하셔서 다행입니다. 저도 만세 *^^*

  • 아이 13.05.04 22:42 댓글

    필진들이 대거 등장해서 그런지, 꼭 영화 '젠틀맨리그'를 보는 듯합니다. ^^ 아, 뭔지 모를 이 든든함...;;;;;;;;;;;;;

    소설 속 'i님'이 은근 부럽군요.

    전 요즘 가게 구하는 문제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일단 좋은 상권은 못 들어갑니다. 소위 B급 상권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야 하는데 말이죠, 그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곳은 장사는 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먹자골목이에요. 주위가 소란스럽죠. 아무리 매출이 잘 나온다고 해도 그런 데는 가기가 싫어요.

    어떤 곳은 동네가 참 조용합니다. 가게 크기도 아담해요. 사람 대여섯 명 들어오면 땡. 전 이런 곳이 마음에 들어요. 여자친구도 괜찮다고 하고요. 하지만 과연 안 망하고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 "망하면 어떡하지?" 하니까 여자친구가 그래요. "다른 거 하면 되지." "다른 거 뭐?" "....." 말을 해, 말을!! 

    장사가 될 곳 같은 데는 싫고, 또 조용한 데는 망할 것 같아서 걱정이고...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학원 선생은 저보고 장사하지 말라고 하는데... 백 프로 망한다고... 커피숍도 어디까지나 장산데, 그러니까 장사꾼이 돼야 하는데, 전 너무 낭만적으로 접근을 한다고... 전 조각케익, 브레드, 휘핑크림... 이런 거 다 싫거든요. 커피숍에서 파는 조각케익이나 브레드, 그러니까 디저트류는 다 인공적인 냄새가 나서 싫고, 휘핑크림은 몸에 그리 좋지 않아서 싫고... 이거 싫고 저거 싫고, 그리고 가게 넓은 것도 싫고...;;;;;;;;;; 그러면서 왜 망할 걱정까지 하는지... 아, 제가 생각해도 좀 답답합니다.

    아무튼 요즘 좀 삶이 어수선해요. 그래도 정도경님 글 보니까 좀 힘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만세!! 

  • 아이님께
    No Profile
    정도경 13.05.05 09:17 댓글 수정 삭제

    가게가 개업하자마자 난장판이 됐는데 왜 부러워하시는 거죠;;; 

    저야 가게 전혀 모르지만 시사인 보니까 자영업을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 오래 가고 잘 된다고 하더라구요.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057

    치킨만 보면 구역질을 하시게 된 사장님 지못미..

    뭐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되는 거 같아요. 조용하고 아담한 가게 차리시면 저도 몰래 가서 조용히 앉아서 케익도 브레드도 휘핑크림도 없이 커피만 열심히 마시겠습니다.

  • No Profile
    박애진 13.05.05 13:55 댓글 수정 삭제

    고양이 브로치가 다닥다닥 붙은 야구 모자 갖고 싶어요. 도경님, 사랑합니다. ♡

  • No Profile
    박애진 13.05.05 13:57 댓글 수정 삭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데 저도 찬성입니다. 휘핑 크림 저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작은 카페도 좋아요. 근데 작은 카페에서 작업한다고 오래 앉아있어도 되나요?

  • No Profile
    정도경 13.05.05 17:06 댓글 수정 삭제

    진아님/ 아 예 저도♡  *^^*;;;;;; 작은 카페에 오래 앉아있는 게 민폐가 되면 얼른 커피한잔완샷하고 토스트 입에 물고 뛰쳐나오겠습니다 (엄숙)


    고양이브로치 혹은 괜찮은 야구모자 발견하면 제보할게요!

  • 아이 13.05.05 23:28 댓글

    오래 앉아있어도 괜찮아요. 뛰쳐나가지 마세요. 저도 일이 손에 익으면 손님 없을 때 소설만 줄창 쓸 생각이거든요. 정도경님처럼 거울에 매달 한 편 이상씩 꾸준히 올려보는 게 목표입니다. ;;;; 그러니 글 쓰다 막히면 두 분 다 알아서 커피 뽑아드시고요. ;;;;;

  • 아이님께
    No Profile
    정도경 13.05.06 12:38 댓글 수정 삭제

    우왕 신난당. 알아서 커피 뽑아 마시다가 손님 오면 막 알아서 서빙도 하고 그러겠습니다 (읭?)

    빨리 개장하세용 ^^*

  • No Profile
    잠본이 13.05.30 21:54 댓글

    설마했더니 진짜로 써버리실줄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천재이십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잠본이님께
    No Profile
    정도경 13.05.30 21:57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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