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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달 거울바라기

2013.06.01 00:3406.01



거울바라기 



 "십년 동안 거울을 봐야한다!" 
 황씨 할매가 소리를 지르고 쓰러졌다. 경호가 황씨 할매를 업어다 눕히고 용녀 아줌마가 물을 떠온다 손발을 주무른다 난리인 동안 미라는 텃밭에 나가있던 구복 할배를 불렀다. 구복 할배는 눈꺼풀이 늘어진 눈을 끔뻑끔뻑 하다가 허허, 하고는 잰 걸음으로 미라를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경호가 황씨 할매 옆을 지키고 앉았고 용녀 아줌마가 찢어진 중국집 전단지 가장자리에 볼펜에 침을 발라 무언가 쓰고 있었다.  
 "한시 십구분이에요." 
 "뭐가?" 
 "할매 쓰러진 시간이요." 
 "허허, 것 참." 
 구복 할배는 어기적 어기적 용녀 아줌마 맞은편에 앉았다. 
 "할매가 뭐라 했다고?" 
 "거울을 봐야 한대요. 십년 동안." 
 "할매가 노망이 났나. 사람이 어찌 십년 동안 거울만 보누." 
 "그러게 말이에요." 
 미라는 경호 옆에 가서 앉았다. 얼마 전 제대한 경호는 제법 의젓했다. 용녀 아줌마와 구복 할배는 전단지를 가운데 놓고 머리를 맞댔다.  
 "거울을 누가 보긴 해야 하는데..." 
 "에그, 나는 빼줘요. 내가 얼마나 바쁜데." 
 "나도 밭을 가꿔야..." 
 "그 놈의 풀은 씨만 뿌려두면 저 알아서 쑥쑥 크는 걸 뭐하러 맨날 나가서 만지작 거려요." 
 "풀 아니라 먹는 건데..." 
 구복 할배는 고개를 쭉 내밀어 전단지에 코를 박고 중얼거렸다. 그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용녀 아줌마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혼자 보기 싫으면 시간 나눠서 보시든가. 낮에는 내가 보구, 밤에는 밤잠 없는 할배가 봐요. 중간 중간 경호나 미라가 도와주면 되겠죠." 
 "그건 또 부정타지 않을까..." 
  용녀 아줌마의 바짝 마른 턱이 굳는 것이 보였다. 미라는 한판 하겠군, 싶어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황씨 할매가 눈을 번쩍 떴다. 경호가 물었다.  
 "할매, 정신 드세요?" 
  황씨 할매가 경호의 얼굴을 보더니 끄응, 신음했다. 
 "할매?" 
 경호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황씨 할매가 웅얼거렸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구나." 
 경호의 꺼먼 얼굴이 심각해졌다. 황씨 할매의 시선이 옆에 있는 미라에게 옮겨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구나." 
 "할매? 무슨 뜻이에요?" 
 미라가 물었지만 할매는 그르렁, 크게 숨을 내쉬더니 눈을 감았다. 구복 할배가 가볍게 무릎을 쳤다.  
 "허, 필시 경호나 미라가 보아야 한다는 뜻이렸다." 
 "나 중학교도 다니고, 고등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미라는 불퉁하게 입을 내밀고 단벌 교복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럼 어쩌누. 경호도 이제 갓 사회 나와서 하고 싶은 것도 많을텐데..."  
 "제가 볼게요." 
 결국 경호가 나섰다. 구복 할배가 허허, 웃었다. 용녀 아줌마가 츳, 혀를 찼다. 경호는 대신 거울을 보는데 방해가 없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구복 할배가 오냐 오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로 안방에 커다란 거울이 놓였다. 구복 할배가 어디선가 좌식 의자를 하나 주워왔다. 경호는 거기에 방석을 놓고 틀어앉았다.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거울로 볼 수 있도록 경호의 등 뒤에 텔레비전이 놓였다. 경호는 먹여주는 밥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잠은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 조금씩 끊어잤다.  미라는 학교에 다녀와서 경호의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주고 텔레비전 채널도 돌려주었다.    
  
 십년이 끝나가는 지금, 미라는 그때 경호에게 고마워했던 제 자신이 눈 앞에 있다면 정신 차리라고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학교 다닐 때는 괜찮았다. 구복 할배와 용녀 아줌마, 지금은 죽고 없는 황씨 할매까지 나서서 경호의 수발을 들었기에 미라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황씨 할매가 죽자 구복 할배와 용녀 아줌마가 대판 싸웠고, 용녀 아줌마가 집을 나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구복 할배는 밭을 가꾸어야 한다며 나가있기 일쑤여서 경호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미라 차지였다. 불평할라치면 구복 할배는 슬그머니 나가 밭에서 고추며 호박이며 상추를 따오거나, 어딘가에서 돈을 빌려 쌀을 사왔다. 먹을 것과 돈 만드는 재주가 없는 미라는 나날이 허옇게 살쪄가는 경호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십년동안 거울 속에서 예전 모습을 잃고 둥글넓적해지는 자기 얼굴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싶은 날이면 경호가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휴대용 버너로 라면을 끓이고 고기를 구워 넙죽넙죽 벌리는 경호의 입 속에 젓가락으로 밀어넣을 때는 젓가락으로 목구멍을 확 쑤셔버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호는 엉덩이 밑으로 방석을 밀어 넣을 때마다 방귀를 뀌거나 코 후빈 손가락으로 미라의 다리를 찰싹 때리며 킬킬 웃었다. 그나마 구복 할배가 거름으로 쓰겠다며 경호가 쓰는 요강을 그때 그때 비워주지 않았으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진즉에 저질렀을 것이다.  
 미라는 눈을 뜨고 코만 가늘게 고는 경호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열두시야." 
 경호는 끄윽, 하품도 아니고 트림을 하며 잠에서 깼다. 흐린 눈이 거울 속의 미라를 올려다봤다.  
 "할배는?" 
 "들어올거야." 
 미라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츄리닝 반바지를 입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다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만 지나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가씨들처럼 예쁘게 화장도 하고 새옷을 사입어야지. 미라는 입안이 쓴지 입맛을 쩝쩝 다시는 경호에게 물었다.  
 "이제 거울 안봐도 되면 뭐할거야?" 
 "어? 일단 무슨 일이 벌어지나 보고."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건에 물을 묻혀 눈꼽만 뗀 경호는 다시 거울을 눈 빠지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을 켤까,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구복 할배는 소주 한병과 마른 오징어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십년째 들여다봐서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한 중국집 전단지 앞에 잔을 세 개 갖다 놓고 오징어를 찢기 시작했다.  
 "아, 할배. 냄새나요." 
 미라가 투덜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뭐가 일어나도 날텐데 좋은 일이면 축하주로, 나쁜 일이면 위로주로 한잔 해얄 거 아니냐." 
 구복 할배는 다시 더듬더듬 오징어를 가늘게 찢었다. 경호는 말을 걸어도 심각하게 대답이 없고, 구복 할배는 찢어놓은 오징어를 다시 반으로 나누며 소일하는 동안 미라는 벽에 기대 거울 속의 경호와 구복 할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십년이 끝난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초조하기도 했다.  
 마침내, 찢다 찢다 더 이상 찢을 구석이 없어진 오징어 가닥을 반으로 끊으며 구복할배가 물었다. 
 "지금 몇시냐?" 
 미라는 시계를 보았다.  
 "한시 십칠분이요." 
 "허, 그래? 그럼 술을 따야지." 
 구복 할배는 잔에 소주를 채웠다. 술 냄새가 알싸했다. 미라는 시계 초침을 노려보았다. 일분 일초가 숨막혔다. 경호는 혹 눈이라도 깜빡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은지 눈이 시뻘개지도록 치켜떴다. 구복할배가 다시 물었다.  
 "이제 몇시냐?" 
 미라는 초침이 숫자 12에 머물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한시 십구분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여 1로 향해갔다. 경호도, 구복 할배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여전히 거울에 시선을 박은 채로 경호가 물었다. 
 "진짜야? 한시 십구분?" 
 "응. 이제 이십분." 
 구복 할배가 허, 헛숨을 내쉬며 소주잔을 들었다.  
 "그래, 한시 십구분이 지났단 말이지..." 
 미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제 어째요, 할배?" 
 "음..." 
 구복 할배는 소주를 마시고는 쳐진 눈을 더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있다 느리적하게 말문을 텄다.  
 "용녀, 그 애가 시간을 잘못 썼나보다. 십구분이 아니라 이십오분, 아니면 삼십분, 뭐 이랬던 거 아니냐." 
 경호가 말했다. 
 "제가 옆에 있었어요. 한시 십구분, 정확합니다." 
 "그럼, 혹시 날짜가 잘못된 거 아니냐. 십년 전에라서 가물가물해서 유월 둘째날인 걸 첫째날로 착각했거나..." 
 "아, 할배!" 
 미라가 짜증을 내자 구복 할배가 목을 움츠렸다. 
 "왜 화를 내누. 오분만 더 기다려보자." 
  아까의 일분 일초보다 더 숨막히는 침묵 속에 오분이 지나갔다. 시계를 보던 미라가 선언했다. 
 "오분 지났어요." 
 구복 할배가 물었다.  
 "벌써?" 
 경허의 목이 벌개졌다. 
 "일어날래요." 
  구복 할배가 눈을 끔뻑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말구 좀만 더 기다려보자." 
 "눕고 싶어요." 
 거울 속의 경허가 두꺼운 손가락을 꾸욱 말아쥐었다.  
 "십년 참았는데 좀만 더 참아보지 그러냐." 
 "맘껏 방바닥 좀 구르고 싶다구요!" 
 경호의 목소리가 커지자 구복 할배가 허허,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그러니까 십분, 아니, 몇시간, 아니, 하루만 참아보지 그러냐. 십년 참았는데 그깟 하루가 대수겠느냐." 
 경호가 폭발했다. 십년 동안 앉아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구복 할배에게 달려들었다.  
 "그깟 하루? 그깟 하루우?" 
 구복 할배가 놀라 어구구구, 소리를 내며 경호의 손에 끌려 엉거주춤 일어섰다.  
 "지금, 그깟 하루라고?!" 
 경호는 성이 안차는지 한 손으로 멱을 틀어쥐고 반대편 손으로 구복 할배의 손에 매달려있던 소주잔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 어찌나 힘껏 던졌는지, 유리잔이 공 튀듯 튀어 거울로 날아갔다. 미라가 비명을 질렀다. 거울이 산산조각나서 방바닥에 흩어졌다. 모든 것이 멈춘듯 했다. 구복 할배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경호가 구복 할배를 팽개치고 거울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빈 거울틀에 닿는 찰나, 바닥에 흩어진 거울 조각에서 한꺼번에 빛 같은 것이 떠올랐다. 미라는 저것 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이 입에 닿기도 전에 그것이 미라를 덮쳤다.  

 눈 앞이 캄캄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미라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빛이었다. 빛이 아니었다. 얼핏 새 같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부리가 눈으로 날아들었다. 눈이 먼 것은 아닌지 더럭 겁이 났다. 일단 시험삼아 손가락을 까딱여보았다. 움직였다. 발가락도 꼼지락거려 보았다. 움직였다. 미라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눈을 떴다. 쭈글쭈글한 얼굴과 투실투실한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에는 이상이 없었다. 미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거...?" 
 누운 채 묻자 경호가 말했다.  
 "거울에서 호랑이가 나왔어." 
 구복 할배가 우물거렸다. 
 "거북이였대두." 
 "아니라니까요! 호랑이가 아니면 사자라구요! 그도 아니면, 표범이거나, 살쾡이거나, 고양이, 뭐 그런거!" 
 "으음, 다시 생각해보니 자라였던 거 같기도 하고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미라가 자기가 보았던 것은 새였다고 주장해보았자 도움될 일이 없어보였다. 미라는 고개만 돌려 거울을 보았다. 그 사이 치웠는지 거울틀도 거울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미라는 방바닥을 짚는 대신, 일으켜달라 양손을 뻗었다. 구복 할배와 경호가 한쪽씩 잡고 일으켜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생각 안나?" 
 "거울조각에서 빛이 나왔는데... 그 다음은...." 
 미라가 머뭇거리자 경호가 말했다. 
 "그게 네 눈 속으로 들어갔어." 
 "뭐?" 
 미라가 되물었다. 덮쳤다고 생각했는데 눈 속으로 들어갔다니, 마지막으로 본 것이 부리였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래서 말인데, 어떠냐?" 
 구복 할배가 물었다. 멍해진 미라가 답했다.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뭐 달라진 거 없냐는 말이다." 
 "없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가 미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없다니! 네가 모르는 거겠지!" 
 미라는 깜짝 놀랐다. 구복 할배에게 달려들 때는 어딘가 현실감이 없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무서웠다.   
 "자, 그러지 말고 한번 살펴나 보자." 
 구복 할배는 끼어들어 미라를 벽에 기대앉히고 맥을 쥐었다. 눈꺼풀도 들어올려 기웃기웃 들여다보고 입도 벌려보라하고 이곳저곳 움직여보라 하기도 했다. 경호가 입을 눌러 닫고 무서운 눈으로 지켜보는 동안 정확하게 무엇을 보았느냐, 정신 잃은 사이 꿈 같은 것은 꾸지 않았느냐, 평소와 느낌이 다른 것은 없느냐, 물어보던 구복 할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내가 보아도 별다른 것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우리 다 같이 그게 저 눈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경호가 말했다. 
 "황씨 할매가 역시 헛소리를 했던가... 어쩌면 셋이 술 먹고 꿈이라도 꾸었거나 헛걸 본 건 아닌가 모르겠다. 허허허." 
 "술 마신 건 할배 뿐이잖아!" 
 경호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구복 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나는 그냥... 그냥 해본 소리다..." 
 경호는 누그러질 기미가 없었다. 그는 이번엔 미라를 쏘아보며 세살박이가 해야 어울릴 듯한 말을 당당하게 외쳤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내꺼야. 네가 아니라 내꺼라구. 호랑이든, 자라든, 뭐든간에 내꺼야!" 
 그러나 이어진 말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니까 네 눈을 뽑아서 가져야겠다!" 
 미라가 눈을 흡뜨며 소리쳤다. 
 "미쳤어?!" 
 경호의 눈에서 인광이 번쩍이는데 입이 웃고 있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미라야, 도망쳐라! 저놈 진심이다!" 
 구복 할배가 소리치며 미라를 향해 한발 내딛는 경호의 허리를 껴안았다. 정신이 번쩍 난 미라는 허둥지둥 경호의 팔을 피해 마루로 구르듯 뛰쳐나갔다. 방을 돌아보자 열린 문 너머로 경호가 한 손으로 구복 할배의 뒷덜미를 잡아 훌쩍 들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할배!" 
 미라가 소리지르자 경호가 돌아보았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구복 할배를 방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구복 할배가 아이고 데고 비명을 지르며 처박혔다. 경호의 몸이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미라는 직감했다. 지금 도망칠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었다. 미라의 맨발이 마루를 박찼다. 신발을 꿰어 신을 틈 따위는 없었다. 미라의 발이 마당에 닿기 전에 허공을 딛고 떠올랐다. 어느새 쫓아온 경호의 투실투실한 손이 발목을 노렸다. 경호의 손끝이 스치자 하얀 발목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미라가 비명을 지르며 휘청였다. 경호는 핏방울 맺힌 손을 움켜쥐고 몸을 낮췄다. 도약할 참이었다. 잡거나, 놓치거나. 잡히거나, 도망치거나.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쐐애액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경호의 뒤통수를 노리고 쏘아져왔다. 경호가 본능적으로 멈칫거리는 순간, 미라는 더 높이 날아올랐다. 경호를 방해한 그것은 정확히 미라의 손으로 날아들어왔다.  
 "도망쳐라! 미라야!" 
 구복 할배가 마루 끝에 서서 방금 품에서 떨쳐낸 손을 훠어이 저었다. 잡을 수 없는 높이까지 날아오른 미라를 보며 발을 구르던 경호가 구복 할배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할배...!" 
 구복 할배가 마루 끝에서 뒤로 한발짝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경호가 손끝을 핥으며 마루에 발을 올렸다. 미라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지붕이 둘을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훌쩍 날아올랐다. 손에 쥐인 것을 놓치지 않는데만 신경 쓰며 머리 꼭대기에 솟은 해를 향해 날았다.  

 경호의 손톱이 독했는지 발목에서 피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낸 동안 동네는 너무 많이 달라져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키 작은 집들과 커다란 나무가 있던 동네는 사람이 없어 휑한 공원과 높디 높은 아파트 단지가 차지하고 있었다. 미라는 아파트 단지 가장 그늘진 구석에 있는 놀이터에 숨어들었다. 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술병을 보면 이곳도 딱히 아이들이 와서 노는 것 같지 않았다. 미라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유아용 미끄럼틀 아래 기어들어가 훌쩍거렸다. 머리끈은 언제 날아갔는지 산발이었고 신발도 없었다. 돈도 없었다. 있는 건 구복 할배가 던져준 그것 뿐이었다. 검고 딱딱하고 미라가 만져볼 일이 있을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바로 그것. 스마트폰.  미라는 스마트폰을 켜보려 애썼지만 잠금 해제를 위한 패턴 그리기, 라는 난관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점으로 된 것을 이어서 무슨 모양을 만들면 될 것 같은데, 그나마도 네번을 틀리자 기회가 한번 남았다는 메시지가 떴다. 미라는 무릎을 접어 껴안고 발치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을 보며 닭똥같은 눈물을 후둑후둑 떨궜다. 황씨 할매가 원망스러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기는 커녕 마냥 나쁘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구복 할배가 무슨 돈이 있어 스마트폰을 갖고 있던 것일까. 미라는 학교에 다닐 때도 애들이 슬라이드나 플립이라고 부르던 핸드폰 한번 가져본 적이 없었다. 경호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자신이 구복 할배도 쓰는 스마트폰을 쓸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미라는 더더욱 서러워졌다.  
 드르르륵. 
 갑자기 스마트폰의 화면이 들어오며 요동쳤다. 미라는 허겁지겁 스마트폰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초록색 통화 그림을 옆으로 밀었다.  
 "여, 여보세요?" 
 -미라냐? 
 늘 태평하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분명, 구복 할배였다. 
 "할배! 괜찮아요?" 
 -내 걱정은 하지 말구, 내 말 잘 들어라. 
 "응, 얘기해요." 
  미라는 손목으로 눈물을 훔치며 허리를 똑바로 폈다. 전화 너머로 덜크럭,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야?" 
 -동전 떨어지는 소리다, 신경쓰지 말구... 
 "공중전화구나." 
 -아무튼 그게 중요한게 아니구... 
 구복 할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너 지하철 탈줄 알지? 
 "돈 없어요." 
 -어떻게든 지하철을 타야한다. 지하철 2호선을 타면 용녀 아줌마가 있을 거야. 용녀 아줌마를 만나서... 
 구복 할배가 말이 없었다. 동전이 모자라서 찾고 있나? 갑자기 쿵, 하고 뭔가 끼이이익,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미라는 스마트폰을 쥐고 울먹였다. 
 "할배, 할배! 만나서요? 할배? 만나서 어쩌라는 거에요...."  
 -뭘 만나?  
 경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미라가 와악, 소리쳤다.  
 "야, 할배 바꿔! 너랑 말 안 할 거야!" 
 -어쩌냐. 할배는 바빠서 너랑 통화못할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집에 들어와. 
 "너, 내 눈 뽑겠다며." 
 -응. 지금 오면 눈만 뽑고 끝낼게. 
 "이 미친 놈아! 내가 이 창창한 나이에 애꾸 되겠다고 거길 기어들어가겠냐?" 
 -오해하고 있구나. 
 경호가 웃었다. 
 -내가 언제 한쪽 눈만 뽑는댔니? 어느 눈으로 들어갔는지 모르니까 양쪽을 다 뽑아야지. 
 눈물이 멎었다. 대답이 없자 경호가 말했다. 
 -네 눈 말고 구복 할배 걱정도 해야지.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그때, 다시 덜크럭 소리가 나더니 전화가 끊어졌다. 미라는 통화시간이 깜박거리는 스마트폰을 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 진즉에 끊지 않고 미친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는지 싶었다. 발목의 피가 얼추 멈춘 것 같았다. 구복 할배가 지하철을 타고 용녀 아줌마를 찾으라고 했다. 고민할 것 없었다. 미라는, 이번에는 지하철 역을 찾아 날아올랐다.  

 미라는 지하철 역 입구에 가까운 건물 뒤쪽으로 내려앉았다. 일수라거나 좋은 만남이라는 글자가 쓰인 알록달록한 종이를 밟으며 조심스럽게 역 건물로 향했다. 해가 쨍 하니 내려앉은 보도블록이 뜨거웠다. 오가는 사람이 많아 발에 닿는 뜨거움이 더욱 부끄러웠다. 다리의 상처도 신경쓰였다. 얼굴도 엉망일 것이 뻔했다. 십년이 끝나면 외출을 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막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미라를 피해갔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욱 잰 걸음으로 스쳐지나갔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이렇게 되자 거칠 것이 없었다. 미라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퉁퉁 부은 눈을 찬물로 적셨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넘겼다. 거울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지만 눈으로 쫓는 순간 사라졌다.   
 지하철 매표기 앞에 선 미라는 빈 주머니에 손을 뒤적였다. 그런다고 없는 돈이 생길 리 없었다. 약 십초간 고민하고, 그만하면 인간의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개찰구에 지하철 직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훌쩍, 개표기를 뛰어넘어갔다. 흘끔흘끔 시선이 뒤따랐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마침내 지하철 2호선 좌석에 앉아 미라는 다리를 길게 뻗었다. 옆자리에 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녀 아줌마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최소한 놀이터에 숨어 있을 때보다 안전한 것 같았다. 미라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잤을까. 고개가 뒤로 꺾이며 유리창에 텅,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잠이 확 달아난 미라는 아픈 뒤통수를 매만졌다. 입 안에 괸 침이 달달했다.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는 바깥이 보였는데 이젠 지하구간인 듯 했다. 눈을 부비며 정신을 차리려는데 내내 비어있던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미라를 쳐다보고 있기까지 했다. 여자였다. 미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흰 스틱을 세워잡고 무릎에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올린 여자를 마주보았다.  
 "이제 깼구나." 
 "용녀 아줌마?" 
 "잘 됐네. 안그래도 다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해서 깨우려고 했어." 
 용녀 아줌마는 몸을 일으켰다. 바구니에 든 동전이 짤랑거렸다.  
 "다다음 정거장이라면서 왜 벌써 일어나요?" 
 "일이나 좀 더 하고 갈까해서. 천천히 따라와." 
 용녀 아줌마는 작은 카세트의 전원을 켰다.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용녀 아줌마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앞으로 내밀고  다른 손에 든 스틱으로 전방 좌우를 툭툭 치며 익숙하게 지하철 칸을 이동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미라는 용녀 아줌마를 놓칠세라 잽싸게 따라붙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용녀 아줌마는 군데 군데 창문이 부서진 빌라촌으로 들어갔다. 어느 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청룡보살이라는 깃발이 걸린 반지하방이 용녀 아줌마의 집이었다.  
 "아줌마, 청룡보살이 누구에요?" 
 "나야." 
 "하지만 청룡에 보살이라니 이상하잖아요." 
 미라가 갸웃거리자 용녀 아줌마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청룡선녀도 이상하잖니." 
 "그거야 그렇지만..." 
 문을 따고 들어간 용녀 아줌마는 현관 신발장 옆에 스틱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미라는 더러워진 발을 어떻게 해야하나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용녀 아줌마가 화장실 문을 열어주었다.  
 "수건은 장에 있다. 일단 씻으렴." 
 미라는 까치발로 화장실에 갔다. 미라가 씻는 사이 용녀 아줌마는 김치찌개와 멸치볶음으로 밥상을 차렸다. 다리를 치료받고 용녀 아줌마의 호피 상의와 꽃무늬 냉장고 바지로 갈아입은 미라는 밥상 구석에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허겁지겁 따뜻한 밥에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용녀 아줌마는 선글라스 너머로 바라보았다. 원래도 입을 열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으니 더욱 아리송 했다. 미라는 어느정도 배가 차자 수저 놀리는 속도를 줄이고 물었다. 
 "집안에서도 선글라스 껴요?" 
 용녀 아줌마의 입술이 비죽이 위로 올라갔다. 용녀 아줌마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아줌마의 왼쪽 눈에 하얀 막이 덮여 있었다. 밥숟가락이 멎었다. 
 "아줌마, 눈이..." 
 "이쪽은 이제 안보여. 다른 쪽도 시력이 떨어지는 중이야." 
 "진짜로 안보이는 거에요?" 
 용녀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는 말을 잃었다. 용녀 아줌마가 집을 나간 이후, 원망은 많이 해보았지만 어떻게 살고 있을지에 대해서 궁금해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한참을 버벅거리던 미라가 간신히 물었다. 
 "그럼 지하철에서 진짜...?" 
 용녀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청룡보살은..." 
 "일 하나만 해서 어떻게 먹고 사니. 두세가지 해야 풀칠 하나 못하나 그러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말투였다. 미라는 숟가락을 밥에 꽂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혼자 먹고 사는 것도 그렇게 힘들어요?" 
 "누가 혼자래니." 
 "네?" 
 "구복 할배가 말 안해?" 
 눈 얘기할 때도 담담하던 용녀 아줌마의 말투가 확 싸늘해졌다.   
 "무슨 말이요?" 
 "집세, 전기세, 수도세, 보험료, 하다못해 쌀이랑 부식비까지, 누구 돈으로 내고 있는지 얘기 안하더란 말이야." 
 목소리에서 얼음덩이가 뚝뚝 떨어졌다. 미라는 구복 할배가 돈을 뀌어 오는 아는 사람이 누군지, 그제야 눈치챘다.  
 "아줌마가...?" 
 "그래. 하다못해 지금 저 스마트폰도 해줬다. 내가 등신이지." 
 "아." 
  스마트폰의 출처가 밝혀진데 대한 감탄인지, 용녀 아줌마가 등신이라는데 동의한다는 추임새인지 애매한 감탄사를 흘리고 미라는 숟가락을 깨물었다. 말을 들어보니 구복 할배는 하루가 멀다 않고 용녀 아줌마에게 전화로 쌀이 떨어졌다, 경호가 먹을 고기가 떨어졌다,  시시콜콜 귀찮게 한 모양이었다. 그때마다 전화 좀 그만하라고 타박을 놓으면서도 용녀 아줌마는 사달라는대로 사다준 모양이다. 안해주면 그 할배가 또 어떻게 귀찮게 할 지 몰라서, 라고 덧붙였다. 이쯤 되면 구복 할배와 용녀 아줌마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존경심이 들 지경이었다. 보살이라는 말이 영 안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용녀 아줌마는 생보살이 맞았다.  
 용녀 아줌마는 배불리 먹은 미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는 경호로부터 지켜줄테니 안심하라며 방 구석에 이불을 깔아주었다. 지하철에서 까무룩 잠들었던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지만 미라는 시키는대로 자리에 누웠다. 용녀 아줌마가 미라의 팔을 다독이며 흥얼흥얼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밥의 따뜻함이 뱃속에서 후욱 풀어지며 몸의 근육도 함께 늘어졌다. 용녀 아줌마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톡, 토그르르르르. 

 가볍고 딱딱한 것이 가볍고 딱딱한 것에 부딪혀 구르는 소리가 났다. 미라는 그 소리를 알고 있었다. 용녀 아줌마가 쌀점 치는 소리였다. 용녀 아줌마는 궁금한 일이 있을 때면 손끝에 쌀을 쥐고 작은 목탁 위에 흩뿌렸다. 용녀 아줌마는 엎드리듯 몸을 굽혀 목탁에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하얀 눈이 치켜올라갔다. 쌀알에 닿을 듯이 가까이 간 눈동자에 경련이 일었다. 숨결이 닿을 새라 입술이 가늘게 벌어졌다.  
 "큰 물에 가기 전에 막아야겠구나." 
 희미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궁금했지만 몸이 나른해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용녀 아줌마의 손가락이 확인하듯, 목탁 위를 움직여 쌀알을 더듬었다.  
 "여의, 여의, 여의." 
 목소리에 의구심이 섞였다.  
 "가게 두어야 하나. 막아야 하나." 
 무슨 뜻인지 말해줘요. 미라는 고개를 간신히 돌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대신 목까지 덮인 이불이 바스락 거렸다. 용녀 아줌마가 휙, 고개만 돌려 미라를 쳐다보았다. 한손으로 쌀알을 흩어버리고는 목탁을 한쪽으로 치웠다. 
 "벌써 일어났니?" 
 방바닥을 짚고 미라를 향해 기어왔다. 한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가웠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돌봐줄게." 
 차가운 손끝이 미라의 이마에서 코로, 코에서 뺨으로, 뺨에서 목으로 흘러내렸다. 무언가에 꽁꽁 묶인 듯 옴쭉달싹 할 수 없었다. 가위에 눌렸나 싶어 미라는 손 끝에 힘을 주었다. 용녀 아줌마가 혀를 날름이며 웃었다.  
 "애쓰지 마라. 내가 돌봐준대두." 
 미라가 끙끙대며 뒤척이자 용녀 아줌마가 속삭였다. 
 "넌 그게 깃든 네 눈만 다오." 
 미라는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은 완전히 돌아왔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용녀 아줌마의 긴 몸통이 숨쉴때마다 부풀었다 줄었다 하며 미라의 몸을 중심으로 반 지하방을 가득 사려 채우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스르르르륵, 푸른 비늘끼리 마찰하며 몸통이 죄어들었다. 미라는 버둥거렸다.  
 "아줌마? 왜 이러는 거에요?" 
 용녀 아줌마가 비늘을 떨며 웃더니 끝이 갈라진 혀로 쉭쉭거렸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황씨 할매가 네게 그랬지. 하지만 내게는 나쁘다, 고 했단다. 그 놈의 집구석을 나오자 눈도 멀어가고, 망할 할배에게 등골은 등골대로 빨리고, 내 살 수가 없어 생각했지. 이래서 나쁘다 했나? 하지만 오늘 일을 듣고나니 알 듯 하더구나. 내 그 집을 나오는 바람에 거울에서 나온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이 나쁜 일이로구나, 하고 말이야." 
 "그래도 우린 가족이잖아요! 이러면 안되요!" 
 미라가 애원했다. 용녀 아줌마의 몸이 슬쩍 풀어진 듯 했다. 하지만 곧 다시 단단히 죄고는 답했다.  
 "애초에 근본이 다른 것들을 황씨 할매가 억지로 한 집에 밀어 넣고 가족이라고 부른 것 뿐이다. 괜찮다." 
 "그, 그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아는 사이에 해치면 안되요!" 
 "아가, 원래 해코지는 아는 사이에 하는 거란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생판 모르는 남을 해코지 하면 얼마나 어이 없고 무섭겠니."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용녀 아줌마가 몸을 더욱 죄어왔다. 미라는 숨이 막혀 컥컥거렸다.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용녀 아줌마는 고통으로 찡그린 미라의 눈을 황홀하게 들여다보았다.  
 "보여, 보이는구나. 네 눈 속에 구름을 타고 노니는 용이 있구나...!" 
 하지만 미라는 눈 앞의 우윳빛 구슬같은 눈동자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발톱이 달린 손이  미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말아라. 앞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익숙해지면 지낼만 하단다." 
 용녀 아줌마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송곳니가 눈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미라는 다가올 통증을 상상하며 무력하게 비명을 질렀다.  

 와장창, 반지하 창문을 부수며 커다란 무언가가 들이닥쳤다. 갑자기 등장한 훼방꾼에게 용녀 아줌마는 목을 세우며 캬악, 위협했다.  
 "결국 도망쳐서 이 꼴이냐? 그러게 전화했을 때 들어오지." 
 경호가 이죽였다. 미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긴 비명의 후유증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여길 어떻게... 설마 구복이 알려줬나?" 
 용녀 아줌마의 말에 경호가 붕대 감은 미라의 다리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할배가 입을 안 열길래 피냄새를 따라왔지." 
  용녀 아줌마는 허연 눈을 치뜨며 경고했다.   
 "그 동안 해준 것에 네가 조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경호가 덤벼들었다. 
 "다 팽개치고 도망간 주제에 고맙긴!" 
 구복 할배는 경호에게도 언질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경호의 팔뚝이 팽팽해지며 굵은 손가락이 용녀 아줌마의 목을 움켜쥐었다. 비늘 달린 몸통이 퍼덕이며 미라를 팽개쳤다. 미라는 비명을 지르며 헐떡였다. 온 몸의 근육과 뼈마디가 통증을 호소했다. 미라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버르적 버르적 기어 도망쳤다. 마음이 급해졌는지 용녀 아줌마는 긴 꼬리로 경호의 허리를 감고 경호를 떼어내려 했다. 경호는 한 손으로는 용녀 아줌마의 목을 쥔 채로, 다른 손으로 꼬리를 움켰다. 용녀 아줌마가 입을 벌려 경호의 목을 노렸지만 경호는 피하는 대신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허연 손가락이 푸른 비늘 틈을 뚫고 들어가며 피가 튀었다. 크아아아악! 용녀 아줌마의 커다란 몸통이 들썩이며 분노에 찬 절규가 터져나왔다. 
 "네 이놈...! 구보오오오옥!" 
 경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엉뚱한 구복의 이름을 부르는 용녀 아줌마가 이상했는지 피식 웃었다.  미라는 흐으윽, 울며 기어서 신발장을 빠져나갔다. 절규의 꼬리를 먹어치우며 우드드득,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현관을 나와 계단을 오르던 미라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하는 사이 퍽, 하고 피에 물든 푸른 머리통이 날아와 미라의 다리를 때렸다. 경호가 얼굴에 묻은 피를 훔치며 따라나왔다. 미라는 하얀 눈을 흡뜨고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을 보다가 마지막 힘을 짜내 도망쳤다. 잡히면 죽는다. 눈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미라는 차갑고 푸른 밤 공기 속을 날아올랐다.  
  
 숨을 쉴때마다 오른쪽 가슴이 아파왔다. 쿨럭, 미라는 기침을 뱉고 다시 기운을 쥐어짰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경호가 따라오고 있었다. 지치고 방심하여 땅에 내려오면 그때 붙잡을 심산이리라. 어디까지 쫓아왔는지 돌아볼 기운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휘청이다 떨어질 것 같았다. 피범벅이 된 용녀 아줌마의 머리가 떠올랐다. 제 눈을 뽑겠다 할 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돌보아줄테니 눈을 내놓으라던 용녀 아줌마가 다정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결국, 경호가 용녀 아줌마의 말을 끝까지 들을 정도의 인내심이 없다는 것이 아줌마에게 나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경호도, 그 동안 자기가 먹어치웠던 고기가 전부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줄도 모르고 미친 짓을 저질렀다. 나쁜 일이었다. 기운이 점점 떨어져갔다. 그 때 미라는 용녀 아줌마가 쌀점 치던 소리를 떠올렸다. 

 큰 물에 가기 전에 막아야겠구나. 

 큰 물로 가자. 미라는 멀리 색색의 불빛을 가득 품고 어른거리는 강으로 향했다. 새벽의 축축한 공기가 강 바람에 실려 얼굴을 때렸다. 강 위로 날아오르자 첨벙,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헤엄도 칠 수 있었나. 지방이 많으니 물에 잘 뜨겠지. 웃음도 나오지 않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미라는 한강 위를 날았다. 누가 볼까 염려할 틈도 없었다. 지쳐서 추락하기 전에 경호가 먼저 지치거나 포기하길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저 멀리 강 한가운데 높이 솟은 무언가가 보였다. 미라는 마지막으로 저걸 목표 삼아 도망치자, 정신을 다잡았다. 저 높은 건물 위에 올라 앉으면 경호가 아무리 빨리 쫓아온다 해도 얼마간 쉴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미라는 건물만 보고 힘껏 기류를 탔다. 바람에 올라 앉은 잠깐 사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강물을 가르며 움직이고 있는 허옇고 둥그런 것이 보였다. 경호였다. 이젠 징글징글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목표로 삼은 곳으로 가서 쉬겠다는 목적만이 미라를 날게 했다.  
 점점 건물이 커졌다. 황혼빛 유리창으로 가득 덮인 몸체가 길게 하늘로 뻗어 있었다. 목표를 확인한 미라의 입가에 웃음이 한조각 걸렸다. 63빌딩이었다. 여의도구나. 여의, 여의, 여의 중얼거리던 용녀 아줌마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웃음이 커졌다. 미라는 홰를 치며 숨을 골랐다.  물에서 튀어나온 경호가 그 뒤를 쫓았다. 지친 미라의 발이 땅에 닿을 듯,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미라는 마지막 힘을 다해 빌딩의 벽을 타고 위로 위로 날았다. 해가 떴다. 빌딩의 금빛 벽에 날아오르는 미라의 몸이 비추어졌다. 처음으로 미라는 자신이 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눈 속에 어린 빛이 터져나와 거대한 거울에 비꼈다. 

 그것은 거대한 새였고, 뱀이었고, 용이었고, 범이었다가, 거북이이며 사람이었다. 미라였고, 경호였고, 구복이었고, 용녀였고, 황씨 할매였다. 모두이기도 하고 누구도 아니었다. 그것은 형상을 바꾸며 거울 속에 잠겼다가 아침 햇빛과 함께 구름처럼 흐려져 하늘로 녹아버렸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미라는 왈칵 울며 웃으며 정신의 끈을 놓았다.  

 아프고 불편한 곳도 있었지만 뜨끈뜨끈하고 푹신한 데다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미라는 늘어져있던 팔을 뻗어 저를 받치고 있는 무언가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흔들림이 딱 멈췄다.  
 "깼냐?" 
 미라의 몸이 굳었다. 눈을 떠보니 경호의 등에 업혀 있었고 끌어 안은 것은 세번 접힌 경호의 목이었다. 어쩔줄 몰라하다 슬그머니 팔을 푸는데 경호가 말했다. 
 "됐다. 업기 편하게 다시 둘러." 
 "어떻게 된거야?" 
 "너 63빌딩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 했어." 
 "어디 가는 거야?" 
 "집에 가야지."  
 "구복 할배는? 가만 안둔다며?" 
 "너한테 전화하다가 도망쳐서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기다리면 집에 오겠지." 
 최소한 구복 할배에게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라는 경호의 둥그런 어깨에 머리를 묻고 물었다.  
 "그거 봤어?" 
 경호가 다시 멈췄다. 
 "봤어. 그게 그거지?" 
 "아마도." 
 "그럼,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던 거지?" 
  경호가 이를 사려 물고 다시 물었다. 미라가 중얼거렸다. 
 "응,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어." 
 갑자기 경호의 몸이 흔들리며 받치고 있던 손을 빼는 바람에 미라는 주욱, 미끄러져 내렸다. 당황한 미라가 경호의 목을 꽉 붙드는 사이, 잽싸게 얼굴을 훑은 경호의 손이 미라의 다리를 받쳤다. 경호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다리를 받친 손이 축축하고 뜨겁고 미끌미끌하기까지 했지만, 미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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