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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김박사의 시간 여행

2013.05.01 00:0605.01

김박사의 시간 여행
by pilza2

 

 


시간 여행에 대한 이론적 완성은 2012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발표가 십 년 넘게 늦어진 이유는 연구 책임자인 김민승 박사의 완벽주의와 신중함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게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김박사는 발표 당시부터 타임머신의 이론적 발명자라며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노벨상을 시작해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은 다 얻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국민 과학자’니 ‘한국 과학의 대들보’니 하는 낯 뜨거운 수사가 호처럼 이름 앞에 늘 달라붙곤 했다.
논문의 발표를 미룬 진짜 이유는 김박사가 실용화에 목을 매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증명한 것과 타임머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김박사는 논문보다 처음부터 기기 자체를 만들어서 온 세상에 공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전자 하나를 1분 전으로 보내기 위해 연구소 건물 한 채를 차지하는 거대한 공간과 주위 일대 도시가 정전이 될 정도의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했다. 타임머신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UFO나 자동차처럼 생겼다든지, 시계나 휴대폰처럼 몸에 지닌다든지 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자를 보내는 데에도 공간과 에너지 소모가 이토록 막대하니 사람을 보내는 데에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김박사 스스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연구가 실패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에게는 학계의 인정이나 상이나 명예보다 타임머신을 직접 만드는 게 목표요 연구의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론의 정립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발표했다가 다른 나라의 과학자나 기업가 혹은 야심에 찬 정부에서 먼저 타임머신을 만들 게 분명하니까. 돈도 땅도 전기도 넉넉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는 힘든 일이 될 것임을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각종 위인전이나 과학의 역사에 대해 다룬 책 대부분은 김박사가 오랜 시간 신중하게 이론을 가다듬고 검토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 그 시간동안 김박사는 비밀리에 시간 여행 장치를 만들고 실험할 수 있는 장소와 자금을 찾아다녔다. 결과적으로 그는 실패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다 보면 소문이 조금씩 새는 법, 마침내 더는 스폰서를 찾기도 비밀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지자 김박사는 논문을 학회에 발표했다.
실패의 원인은 역시 투자자를 설득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탓이다. 물리학자들조차 고개를 저을 시간 여행 이론을 이해시키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실물이나 견본을 보여주기도 힘든 연구의 특성상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김박사가 이론을 발표한 후에도 순수과학계의 절찬은 받을지언정 실용화의 가능성은 없는 상태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국민 과학자 김민승 박사는 세상과 떨어져 숨어서 살다시피 하다가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인기 스타의 자살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부와 명예를 얻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왜 고독과 우울함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택하는 건지.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김박사의 자살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박사의 목표가 그런 뜬구름 같은 인기가 아니었음은 남겨놓은 짧은 유서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평생을 바친 결과 시간 여행을 하는 방법은 알아냈으나 실행을 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절망감은 타인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새들을 관찰하다 불현듯 비행의 원리를 알았으나 비행기를 만들 재료와 기술이 없어 비행을 포기한 고대의 원시인을 떠올려보라. 비행에 대한 꿈과 그리움을 품은 그에게 땅에 발붙이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비루하게 느껴질지를. 그는 결국 나뭇가지와 잎사귀로 만든 조악한 날개를 들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비행과 함께 삶을 마감했으리라. 김박사도 아마 그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시간은 흘러 이제 2112년이 되었다. 김민승 박사의 증손자이며 역시 국민 과학자 칭호를 얻은 젊은 김박사인 김준선 박사가 마침내 사람을 전송할 수 있는 타임머신을 만들어냈다. 30대 초반에 이룩한 쾌거였다.
첫 시간 이동은 증조부가 처음으로 원리를 확립한지 100년이 되는 해로 맞췄다. 그의 유지를 받들려는 의지인지, 한을 풀어주려는 소망 때문인지 김민승 박사의 아들도 손자도 증손자까지 대대로 같은 연구에 매달렸다. 사실 손자만은 유일하게 과학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투자자를 찾아내어 타임머신 개발을 실현시켰으니 그의 공적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타임머신이 포함된 연구시설은 카타르의 해안에 건설되었다. 과학 연구의 중요성을 이해함과 동시에 자국의 위상 제고를 노린 군주 무하마드 빈 라자르 알사니의 파격적 배려 덕분이었다. 손자인 김태섭 씨는 할아버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실용화 기술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사업수단을 발휘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명성과 사업가인 자신의 신용을 최대한 이용하여 투자자를 모았고 그 결과 카타르의 국왕을 비롯한 아랍의 석유왕들을 든든한 스폰서로 모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이돌과 여배우를 포함한 한류 스타를 대거 이끌고 그가 만든 화려한 공연장에서 펼친 행사도 한국 드라마와 한류 스타를 좋아하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카타르는 즉시 9㎢의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전력 공급을 위한 전용 원자력 발전소를 바로 옆 해안에 건설했다. 이는 국왕의 강력한 권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연구시설 건설을 50년 넘게 검토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않았잖은가. 개발 및 유지비용이 막대한데 비해 얻어지는 건 불확실한 과학적 성과뿐인 사업이니까 그럴 만도 했다.
김준선 박사는 연구소 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국민 과학자라지만 정작 그가 한국에서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연구시설 밖으로 나간 경험 자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소년기는 이른바 신동이나 아역 스타라 불리는 아이들과 유사했다. 수많은 이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는 대신 자유와 여유로움이 없는 힘든 생활이 이어졌다. 마치 증조할아버지의 연구와 업적을 이어받아야만 하는 숙명을 부여받고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그는 부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로부터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암묵적인 강요와 기대 속에서 살아왔다.
개인의 불행과 고통, 그리고 노력을 제물로 바친 것처럼 시간 여행기는 완성되었다. 최초의 모델은 2㎏의 물체를 과거로 보낼 수 있었다. 한 번 성공을 거두자 탄력을 받은 것처럼 초기부터 존재하던 숱한 난점을 하나씩 극복해갔다. 크기와 중량의 제한은 조금씩 늘어났고 체류 시간 역시 점점 늘어났다. 시간 탄성 작용으로 인해 제한 시간이 되면 저절로 돌아오게 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과거든 미래든 오히려 멀리 갈수록 성공 확률이 높고 안전했다. 거듭된 실험과 시뮬레이션 결과 적어도 100년은 되어야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 이하 시간으로의 이동은 현재 타임머신 재질과 전력 공급량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김박사는 증조부부터 대대로 불가능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언론 발표나 인터뷰 등에서도 늘 현재 기술로는 어렵지만 앞으로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왔다. 현재 할 수 있는 일보다 앞으로 할 수 있을 일을 더 강조하는 건 대중의 호응을 얻어내기에 좋은 정치적 수사가 아닌가. 비록 대륙 너머 멀리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국민 과학자의 활약은 올림픽 금메달에 못지않은 나라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동물 실험, 촬영용 로봇 실험 등이 차례로 성공하며 드디어 사람이 직접 시간 이동을 시도할 때가 왔다. 그렇다면 이 역사적인 최초의 여행을 떠날 사람은 누구냐, 라는 문제가 생기는데 사실상 우문이었다.
김박사는 벌써 오래 전부터 체중 감량을 하며 자신의 몸무게를 46~48㎏ 사이로 유지하고 있었다. 옷과 기록 장치 등의 설비를 덧붙이고도 50㎏을 넘기지 않으려면 45㎏까지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174㎝인 김박사에게는 제법 혹독한 다이어트였다. 이런 고행을 자처하는 이유는 바로 현재 기술로 이동 가능한 최대 무게가 50㎏이기 때문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물려받은 시간 여행 연구에 몰두했다. 신기하게도 거부감이나 반항심은 생기지 않았다. 스스로는 이를 일종의 가업처럼 여겼던 것이다. 물론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연구를 완성하고자 하는 야심도 없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김박사는 자신이 최초의 시간 여행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시간 여행에 관련된 책과 영화를 많이 보여주던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고,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증조부에 대한 애석한 마음도 한몫을 했을 터.
마침내 이렇게 눈앞에 타임머신이 실현되는 모습을 보니 자기가 직접 가겠다는 욕심은 점점 커졌다. 체중이 가벼운 여성 연구자나 머리가 좋은 어린이를 잘 교육시켜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고, 사람은 위험하니 앞으로도 시험 이동 때 썼던 로봇만을 보내야 한다는 신중론도 있었으나 김박사는 전부 묵살하다시피 하며 다이어트에 매진했다.

 


* * * * *

 


마침내 최초로 사람이 직접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 날, 출발 준비를 모두 마친 김박사가 대국민 발표 및 언론 인터뷰를 위해 연단에 올랐다. 말은 국민이지만 사실상 전세계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보안 등의 이유로 발표는 연구소 내부 로비에서 이루어졌고 참석한 기자나 카메라맨은 없다. 오직 여러 대의 카메라만이 연단에 선 김박사의 모습을 촬영하여 위성을 통해 세계로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과는 달리 김박사는 이러한 발표 자체를 어색해 하는 눈치였다. 부끄러운 듯 연단에 고개를 숙인 채 사전에 적어놓은 짧은 발표문을 읽고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기자들이 사전에 보낸 질문지에 대한 응답도 생략하고는 그야말로 도망치듯 퇴장했다.
지켜보던 많은 이들 특히 기자들은 김박사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할 사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저 100년 전 대한민국에 갔다 올 것이라는 정도뿐이었다. 실험의 위험성과 패러독스의 문제 때문에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나? 이 역시 시간 여행 이론에 무지한 평범한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변명이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이제 와서 좀 더 안다고 해서 무엇이 바뀔까? 그렇게 많은 의문을 남긴 채로 김박사는 과거로 떠났다.
연구시설은 기자의 출입이 통제되어 역사적 순간의 촬영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대신 폐쇄회로 카메라로 먼 거리에서 찍은 녹화 영상이 출발 이후 공개되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타임머신은 레일이 깔린 거대한 원형 터널 안에 놓인 금속제 구(球)였다. 전신 수영복을 닮은 보호복을 입은 김박사가 공 모양의 기계 안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앉았다. 이 모습은 터널에 달린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CCTV가 설치된 터널 바깥쪽 연구동에서는 여러 연구원들이 복잡한 계기판을 살펴보고 조작하며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가 내려오자 유리창이 금속제 셔터로 차단되었다. 이제 김박사가 들어간 금속구의 모습은 육안으로 볼 수 없었다. 육중한 소음과 함께 공은 터널 안을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레일 위를 달렸으나 점점 빨라지면서 구체는 공중으로 뜨게 된다. 속이 텅 빈 도넛처럼 생긴 터널 안을 3시간 넘게 고속 회전하던 금속구는 어느 순간부터 속도가 느려지더니 30분 후에 완전히 정지했다. 셔터가 열리자 걱정과 호기심을 못 이긴 연구원들이 문을 열고 터널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외부 관찰자 시점에서 보기에 김박사는 아무데도 가지 않은 것 같았다. 금속구는 출발할 때와 같은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그저 터널 안에서 고속 회전을 하면서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더니 도로 잠잠해지며 회전을 멈춘 것에 불과해 보였다. 타고 내리는 시간까지 합쳐도 너덧 시간 정도. 문외한들이 이 장면을 지켜보며 정말 시간 여행을 한 걸까? 실험이 실패한 건가? 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모든 수치가 정상이며 시간 여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김박사의 무사 여부. 생체 반응 수치가 약간 불안정한 게 신경 쓰였던 것이다.
조종석에서 내리는 김박사는 격렬한 운동을 한 것처럼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축 처진 어깨, 수그린 허리, 절룩대는 걸음. 가장 빨리 달려온 연구원이 그를 부축했다.
이어서 김박사와 오랫동안 함께 연구를 해온 강박사가 다가와 얇지만 머리 전체를 감싼 헬멧을 벗겨냈다. 다음 순간 그는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그마나도 거의 다 빠지고 훤히 드러난 매끈한 머리, 이마와 눈빛과 코와 입술 주위에 깊게 패인 주름, 쭈글쭈글해진 피부, 한층 더 앙상해진 팔다리.
30대의 김박사가 삽시간에 30년 이상의 나이를 먹고 돌아온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연구원은 비명을 질렀고 다른 과학자는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려 하기도 했다.
강박사는 재빨리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보았다. 이건 우라시마 효과일까? 과거로 갔다가 다시 미래로 돌아오는 왕복의 시간이 김박사의 육체를 노화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100년 전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육체가 100년의 시간을 겪게 된다는 식으로.
물론 지금껏 실험과 시뮬레이션에서 한 번도 지적되지 않은 문제였다. 로봇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고양이, 침팬지를 보냈던 실험에서도 그들에겐 별 이상이 없었다.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작용일까? 아니면 시간 여행 과정에 어떤 사고나 실수가 있었던 걸까? 강박사는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일단 구체적인 검토나 조사는 뒤로 미뤄야만 했다. 무척 지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김박사를 자기 연구를 위해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박사를 즉시 연구 시설내 병원으로 옮겨서 정밀 검사와 치료를 받도록 했다.
이어서 열린 긴급회의에서 김박사를 대신한 연구소 소장 대리 자격으로 회의를 주재한 강박사는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자는 의견에 대해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사람들에게 시간 여행에 대한 공포 및 거부감을 줄 수 있으니 명확한 원인을 밝혀낼 때까지는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외부에는 시간 여행은 성공했으나 김박사의 심신 안정을 위해 인터뷰는 사양한다는 식으로 발표했다. 구체적인 성과나 시간 여행의 증거에 대해서도 추후 따로 발표하겠다며 유보했다.


다음날 강박사는 검사 결과를 전해 듣고 충격에 빠졌다. 의사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강박사를 몰래 불러 이 같은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DNA 단계에서 손상 및 변이가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 매우 유사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신체 상태가 바뀐 상태라는 것이다.
“베르너 증후군과 같은 일반적인 조로증과는 달랐습니다.”
의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일반적인 조로증은 모발, 피부, 근육 같은 외부조직에서 나타나거든요. 반면 두뇌나 신경계 등 노화가 일어나지 않는 부분도 많죠. 간단하게 말해서 겉만 늙어 보인다고 할까요.”
“지금은 다르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두뇌, 심장, 생식기, 혈관 등 무엇 하나 노화되지 않은 부분이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려서…… 한 30년 정도의 세월이 단숨에 지나간 것과 같습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길은 시간 여행밖에 없을 것 같군요.”
의사는 연구원들의 건강만 책임질 뿐 시간 여행에 관련한 사항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생각은 순수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참고할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조급한 마음이 앞선 강박사는 김박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아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손을 놓고 있을 순 없기에 즉시 다른 연구실로 가서 김박사가 입었던 보호복과 가져갔던 물품의 조사를 담당한 연구원을 만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헬멧, 보호복 등에는 이상이 없었다. 방사능 피폭 수치도 시뮬레이션에서 예상했던 수준인지라 대부분 차단에 성공했고 신체에 입힌 피해는 경미할 터였다. 소지품은 소형 컴퓨터, 그리고 비상용 예비 전지 두 개뿐이었다. 중량을 최대한 줄이려면 이 정도가 한계일지 모른다. 하지만 강박사는 한 가지가 빠졌음을 깨달았다. 영상을 기록할 소형 캠코더. 출발 당시 감량을 거듭하며 추가했던 고성능 캠코더가 보이질 않는다. 자신은 안경이나 단추 크기의 작은 녹화 장치를 권했는데도 화질과 성능이 성에 안 찬다며 고집을 부려 한 손에 쥐는 정도 크기의 고급 캠코더를 선택했던 김박사다. 그런데도 그걸 빠뜨리고 안 갖고 왔을 리가 없다. 강박사는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 *

 


며칠 후 강박사는 김박사가 정신을 차리고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의사의 연락을 받고 누구보다 먼저 면회를 하기 위해 병실로 향했다. 여태껏 소장 역할을 도맡은 그는 언론의 접근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김박사를 실제로 본 연구원들의 입막음을 하는 등 김박사의 노화에 대한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진실이 알려지고 있지 않은 대신 시간 여행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박사가 입원을 이유로 종적을 감춘 것과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실은 실패했는데도 감추고 있는 게 아니냐는 억측과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강박사는 수세에 몰렸다. 스폰서인 카타르 국왕까지 나서서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터라 이제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박사는 의사의 연락을 받은 즉시 전세계 언론에 내일 정오에 상세한 시간 여행 결과 보고를 할 거라는 보도 자료를 보냈다. 물론 발표는 김박사의 면회가 끝난 다음이어야만 했다. 모든 진실을 자신이 먼저 알고 난 다음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안에는 침대에 누운 김박사만 있었다. 이미 절대적 안정을 위해 간호진의 접근도 제한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김박사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문소리와 인기척을 알아들었는지 눈을 떴다.
“박사님, 괜찮으신가요? 이야기할 수 있으세요?”
김박사는 멍한 얼굴로 강박사를 쳐다보았다.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힘겹게 대답을 했다.
“아직 몸이 무겁고 피곤하지만, 그럭저럭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박사는 침대 옆 버튼을 눌러 상체부분을 기울여 일어나 앉도록 한 다음 김박사가 물을 마시도록 도와준 후 다시 물었다.
“박사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난 30년 전, 내가 태어난 날로 가서 나의 탄생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죠. 그런데 미래로 돌아오는 짧은 순간 내 몸에 30년분의 노화가 급격하게 일어난 겁니다.”
강박사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해결책도 다 생각해놓고 있고요. 내 몸만 허락한다면 당장 내일부터라도 연구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박사님, 가져가신 물건 중에서 캠코더가 보이질 않네요. 어떻게 된 거죠?”
“아, 그렇지. 그 캠코더를 사용하다가 그만 실수로 잃어버렸습니다. 가지고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당시 누군가가 저를 발견하고 수상하다 싶어서 쫓아오고 있었거든요. 보호복을 입고 있었으니 이상하게 보였겠지요. 외계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닙니까. 따돌리긴 했지만 대신 급히 도망가다가 개천에 떨어뜨리고 말았죠.”
강박사는 그의 말에 별다른 의견이나 감상을 내놓지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출발하시기 전에 언론 발표하신 거는 생각나십니까?”
“예? 아, 예. 했지요.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요.”
“그때 박사님은 사전에 준비한 연설문을 읽기만 하고 인터뷰를 마쳤죠. 너무 짧고 질의응답도 없는 무성의한 기자회견이라 많은 언론이 불만을 터뜨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박사님이야 시간 여행을 갔다 온 후 병상에 누워 계셔서 오래 전 일 같겠지만 불과 며칠 전의 일입니다.”
“아, 그랬던가요. 언론이야 시체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처럼 몰려들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박사님이 왜 그런 식으로 무성의한 기자회견을 했는지 아시겠죠?”
김박사는 잠시 말을 못 이었다. 강박사가 직접 대답했다.
“박사님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얼굴이 벌게지고 말을 더듬는 등 원만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 한 명 앞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가 모인 곳에서 제대로 얼굴이라도 들고 있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사전에 연설문을 작성해서 연단에 올라서 읽고 내려오는 그 짧은 일도 상당한 고역이었다고, 박사님이 제게 말씀하셨던 걸 기억하고 있는 걸요.”
“아, 아아……!”
“생각난 척 해도 늦었습니다. 김박사, 그러니까 김준선 박사님은 제 앞에서도 곧잘 말을 더듬곤 했습니다. 비록 제가 연상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오랫동안 함께 연구를 하면서 가족 이상으로 정이 든 사람인 저에게조차 말이죠. 30년간 갖고 있던 버릇이 순간적으로 나이를 먹는다고 말끔히 고쳐질 리가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김민승 박사님?”
김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캠코더를 없앤다고 해서 기록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미래의 기술을 우습게 보시면 안 되죠. 캠코더에 녹화된 영상은 함께 가져간 소형 컴퓨터 안에 동시에 기록이 됩니다. 100년 전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나보죠?”
주름지고 짙은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우린 타임머신의 로그 기록을 조사하여 어느 시간대로 갔는지 알아보았습니다. 100년 전의 대한민국으로 이동했더군요. 이 역시 과거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100년간의 연구 개발 성과를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닌가요?
30년 전으로 갔다는 당신의 거짓말, 제 앞에서 전혀 말을 더듬지 않는 태도, 이것만으로도 당신이 제가 아는 김준선 박사가 아님은 분명하네요. 그럼 당신은 누굴까요? 또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담당의사 선생님께서 힌트를 주셨습니다. 출발 전과 후의 DNA 검사는 사람이 바뀐 듯하다는 결과를 내놓았죠. 하지만 유사점도 제법 있다고 하더군요.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 유사한 두 사람이라면 친족 관계밖에 더 있겠어요? 김준선 박사의 친족 중에 고령이면서도 타임머신을 빼앗아 타고 돌아올 정도로 지능이 높은 인물이라면, 저는 한 사람밖에는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바로 시간 여행 기술을 처음 만들어낸 김민승 박사 당신이죠.”

 


* * * * *

 


면회를 가기 전날 밤, 강박사는 김박사가 가져갔던 소형 컴퓨터를 대형 모니터에 접속하고 안에 저장된 영상을 재생했다. 캠코더가 기록한 영상은 모두 여기에 무사히 저장되어 있었다.
어떤 건물의 복도다. 발걸음 소리와 함께 캠코더를 들고 있을 김박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 나는 드디어 과거로 도착했다. 지금이 어, 언제인지 아는가. 2012년 12월이다. 정확한 날짜까지는 잘 모르겠다. 아, 아직 날짜와 시간까지 조절할 수는 없다. 이번 여행을 바탕으로 얻은 데이터를 토, 통해 가능해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푸, 품고 있다.”
혼잣말인데도 흥분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는 복도를 계속 걷다가 어느 문 앞에서 멈추었다.
“이 문 너머에 나, 나의 증조할아버지, 세계 최초로 타, 타임머신의 작동 원리를 정립한 김민승 박사님이 계신다. 나는 이 영광스러운 최초의 시간 여행을 그에게 바치기로 겨, 결심했다. 어릴 적부터 늘 푸, 품고 있던 장래희망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당신의 즈, 증손자가 이렇게 당신이 남긴 유산을 이어받아 후, 훌륭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당신의 노력은 허, 헛된 일이 아니었다고 자랑스레 말하, 말할 거다.”
그 순간 강박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래를 예언한다든지 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통한 유추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이어지는 장면인 놀라는 노박사와 젊은 증손자의 감동적인 만남을, 역사에 남을지 모를 명장면을 빨리 감기로 넘겼다. 마침내 강박사가 원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렇다면 그 타임머신은 내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
증조부 김박사가 말했다. 캠코더는 책상 위에 놓여 있어 보호복을 입은 김준선 박사의 뒷모습도 보였다. 보호복은 전신 수영복 이상으로 발가락부터 목까지 전신을 모두 감싸고 있고 머리를 보호한 헬멧만 벗은 상태였다.
“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그, 그런 셈이죠.”
증손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증조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내 말은. 실제적으로 그렇단 말이야. 그건 내가 만들어야 했어. 내 것이어야 했단 말이다!”
“하, 할아버지?”
김민승 박사는 찌푸린 얼굴로 증손자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이 나를 외면했어. 국민 과학자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지. 타임머신도 못 만들어주면서 무슨 국민 과학자 타령이야! 나의 위대한 성과를 돈이 든다느니 그걸로 일자리가 생기냐느니 하면서 무시하고 내팽개쳤어! 타임머신은 내가 만들어야 했어! 내가 세계 최초의 시간 여행자가 되었어야 마땅하단 말이다!”
“하라, 할아버지, 지, 진정하세요!”
다가오는 증손자를 거칠게 미는 증조부. 그리고 넘어진 증손자 위에 올라탄 노박사의 굽은 등이 보인다. 책상 아래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컥컥거리며 괴로워하는 증손자의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잘못된 과거와 미래를 바로잡겠어. 타임머신도 내가 만들 것이고, 시간 여행도 내가 할 거야! 증손자가 조상의 한을 풀어? 웃기고 자빠졌네! 네가 여기 들어왔을 때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기나 해? 유서를 쓰고 있었어! 오늘 밤에 자살을 할 나의 유서를 말이야! 난 죽으려고 했단 말이다! 타임머신을 못 만들고, 시간 여행을 못 하는 내게 살아갈 이유가 있기나 하겠냐? 응……!”
증조부의 목소리는 점점 쥐어짜는 울먹임에 가까워졌다. 책상 위로 버둥대는 손자의 손이 언뜻 보였으나, 이내 사라졌다.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도 없어졌다. 숨을 헐떡이며 늙은 김박사가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얼굴은 공포와 죄악감만 남기고 깎아낸 석고상 같았다.
그는 이내 캠코더 옆에 놓인 증손자의 소형 컴퓨터를 알아보고 집어 들었다. 작고 얇은 수첩 정도 크기였다.
“멍청한 녀석, 암호 같은 것도 안 걸어두고. 어디 보자…… 오호라, 미래에는 이런 게 다 된단 말이지?”
그는 잠시 미래의 컴퓨터를 만져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답게 곧 적응하여 안에 담긴 미래의 지식을 어느 정도는 습득했으리란 사실엔 의심할 바가 없었다.
“흐흐, 제한 무게가 50㎏ 이하라? 어쩐지 증손자라는 놈이 피골이 상접하고 허약하다 했더니, 시간 여행을 하려고 체중을 줄였던 거로군! 그렇다면 이 늙은 몸이 알맞지. 내가 더 가벼울 테고, 저 놈보다 키도 작으니 딱 좋아. 역시 내가 시간 여행자가 될 운명이었어. 이게 맞는 역사고 제대로 된 미래야! 그렇다면 가만, 일단 유서를 마저 작성하고……”
김박사는 책상으로 돌아가 유서를 다 쓴 후 자신의 옷을 벗고 손자의 옷도 벗겼다. 옷을 바꿔 입은 후 시신을 실험기재 운반용 트레이에 실었다. 양옆이 뚫려 있어 내부가 보이기 때문에 응접실 탁자의 테이블보로 덮어서 가렸다.
“화학 연구동의 소각장이 열려 있으려나?”
중얼거리며 화면에서 사라졌다. 강박사는 다시 빨리 감기로 넘겼다. 긴 시간동안 캠코더는 아무도 없는 교수의 방을 비추고 있었다.
한참 후에 김박사는 다시 돌아와 보호복을 입고 캠코더를 들었다.
“이건 갖고 가면 곤란하겠구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다 싶더니 화면이 급격히 흔들리며 순간적으로 바닥을 비춘 즉시 화면이 꺼졌다.
녹화된 분량은 거기까지였다. 바닥에 내리쳐 부숴버렸음에 분명하다. 그걸로 증거를 인멸했다고 생각하다니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무리 명석한 김박사라고 해도 동기화된 컴퓨터로 영상이 그대로 전송되어 저장되는 기술을 아직 몰랐던 모양이다. 강박사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학, 인간, 연구, 생명, 인과, 운명, 지식, 죄악, 과거 그리고 미래……. 수많은 낱말과 개념이 그의 머리에 폭죽처럼 점멸했다. 무엇이 정답이고 무엇이 옳은 건지 판단을 내리기엔 너무 벅찼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문제였던 것이다.

 


* * * * *

 


캠코더의 영상을 봤다고 한 이상 더는 거짓말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김박사는 체념했는지 몸의 기운을 빼고 침대에 등을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경찰에 신고한다든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증손자를 죽여서까지 미래로 온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정말로 최초의 시간 여행자 자리를 빼앗고 싶었던 건가요? 그게 전부입니까? 듣고 싶습니다.”
강박사의 질문에 김박사는 천천히 눈을 뜨고 시선을 천장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자신의 야심을 위해 영혼을 팔았다든지 하는 말로 나를 비난해도 상관없소이다. 신문이라면 그런 식으로 나오겠지. 자손의 성과를 빼앗으려는 비정한 조상이라든지, 헤드라인에 뽑혀 나올 글귀들이 눈에 성하군.”
김박사의 얼굴이 강박사를 향했다.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왜 시간 여행을 연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나?”
“어릴적 교통사고를 당한 게 계기가 아니었나요? 당신의 전기는 수없이 많이 출간되었고 교과서에도 당신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차에 치여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당신은 과거로 가서 사고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계기로 성인이 되어서도 시간 여행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였죠.”
“흐흐흐…… 그렇게 떠받들고 있단 말이지 흐흐흐……”
김박사는 웃으면서 사레들린 사람처럼 몇 번 기침을 뱉어내었다.
“그런 생각 안 해봤나? 의학을 연구해서 다리를 고친다든지 인공관절이나 의족을 연구해서 다리를 대체하겠다는 발상은 왜 없었냐고.”
“듣고 보니까 그렇군요.”
“난 말이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말야. 건강을 위해서도 뭘 해본 적이 없지. 심지어 이빨도 잘 안 닦은 바람에 이렇게 틀니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거야 뭐 이제 와서 해봐도 소용없는 소리고. 나는 어릴 적엔 수학이 좋았어. 노력하면 정답이 나오고 완전무결한 해결책이 존재하니까. 예술이나 사람 사는 세상처럼 답이 없는 건 싫었다네. 점점 자라면서는 물리학이 좋아져서 대학도 물리학과를 갔지. 남들이 모르는 해답을 찾아내고 싶어졌거든. 그래서 도전한 게 당시에 막 경쟁적으로 시작하던 시간 이동 분야였어.”
김박사는 시선을 피하려는 듯 커튼에 가려진 창문 쪽을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최초였고 최고였어.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물리 법칙을 만들어낸 경우가 얼마나 되겠나? 뉴튼, 아인슈타인, 호킹……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가는 거야. 노벨상이니 교과서에 실리느니 하는 건 부차적인 거지.”
그의 미소에서 어쩐지 체념이나 비웃음을 읽은 강박사는 격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래서 그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증손자를 죽였단 말이에요? 굳이 그의 목숨을 빼앗아야만 했을까요? 당신이 그 사람을 설득해서 여기로 왔다가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외에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먼 미래에는 두 사람 이상이 이동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그때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부탁해도 되죠. 왜 그렇게 서둘렀던 겁니까?”
김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증손자가 도착한 날, 난 유서를 쓰고 있었소. 녹화된 영상을 봤으니 알겠지. 뉴스를 찾아보시오. 그 애가 도착한 그 날이 바로 내가 자살한 날일 거요.”
“…….”
“내가 물어봤지. 난 언제 어느 때에 죽느냐고.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 애는 곧이곧대로 알려줬어. 바로 그 날 그 순간이더군. 내가 자살하기로 예정된 시간이. 그래서 난 필요했던 거야.”
“……당신이 필요했군요. 당신 대신 죽어야 할 당신 자신이.”
“타임 패러독스를 만들지 않고 시간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네. 만약 소설에서처럼 역사를 지키는 시간 경찰이 있다면 그 순간 나타나서 나를 체포하고 증손자의 목숨을 구해줄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보게, 그런 일이 일어났나? 더 먼 미래에서 우릴 데리러 온 후손들이 나타났나? 아니지 않나. 기회는 더 이상 없는 거야. 내가 죽기 직전에 나타난 최후의 기회였던 거지.”
강박사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과거의 뉴스는 김박사의 부고만을 짤막하게 알려줄 뿐이었다. 발견된 건 유서와 소각장에서 발견된 불에 탄 시신. 심하게 탄 시신에 남겨진 증거는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뿐이었다. 가족의 요청으로 부검은 생략했다. 아무 의문도 없이 자살로 끝난 사건이었다.
이빨을 다 뽑고 반지를 끼우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간단한 위장이었다. 그렇게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는 과거의 시신이 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강박사는 순간적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김준선 박사는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셈이었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뼛가루와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의 인생이 바뀌었을까?
“내 이 손으로 목을 졸랐지. 그러면서도 나는 속으로 생각했어. ‘시간 경찰이여, 시간의 인과관계를 수호하는 초월적 존재여, 이 순간을 보고 있다면 지금 당장 나를 막아봐라!’ 라고 말이야. 그 녀석이 허무하게 숨을 거둘 때 나는 깨달았네. 이 모든 일은 운명과 같이 결국 일어나야만 할 일이고, 난 이렇게 행동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음을 말이야.”
김박사는 말을 마친 후 피곤했던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강박사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 내가 죽은 김박사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도 예정된 일일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강박사는 조용히 말했다.
“어떤 기술이든, 어떤 성과든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고요. 핵폭탄의 발명은 과학의 성과이긴 하지만 인류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어쩌면 시간 여행도 그만큼의 비극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에 김박사가 다시 눈을 떴다. 얼굴을 찌푸리며 날선 목소리로 응수했다.
“무슨 그런 소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확고부동하게 존재하고 있네. 시간 경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변경도 불가능한 일이야. 우리가 앞으로 시간 여행을 더 많이 시도한다고 해도 마찬가질세. 설령 시간 여행으로 무언가를 일으켰더라도 그건 이미 일어난 과거, 기록된 역사로 남아 있는 일이란 말이지. 그러니 무엇을 더 걱정하겠는가. 마음껏 연구하고 시간 여행을 하면 되는 거야. 난 아직 더 일할 수 있어. 정신도 말짱하고! 그 녀석이 없어서 연구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내 힘을 보태면 더 발전시킬 수 있어. 어떤가? 나를 죽은 김박사로 인정해주지 않겠나? 시간 여행의 부작용으로 늙어버렸는데 그 문제는 앞으로 해결하겠다고 발표하면 되질 않나.”
“그럴지도 모르죠. 시간 여행으로 과거가 바뀌지 않을지도……. 하지만 그 말은 죽은 그이를 살릴 방법도 없다는 뜻이로군요.”
김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박사는 상의 주머니에서 양손을 빼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노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뭐, 뭐하려는 거요? 아가씨!”
수술용 비닐장갑을 낀 강박사의 손이 그의 목을 잡고 졸랐다. 놀라움과 고통에 버둥대던 김박사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다. 노쇠한 육체의 저항은 무척이나 약했다. 일이 끝나자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로 병실을 나갔다.
누구도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를 내리긴 했으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강박사는 병실 주위의 CCTV를 미리 꺼두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경찰이 개입하여 수사가 시작되면 문제가 커지겠지만 연구소 책임자로서 그렇게 되기 전에 이 일을 덮을 생각이었다. 김박사는 시간 여행으로 얻은 부작용인 급격한 육체의 노화 및 손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당분간 실제 여행은 금지시킬 작정이었다. 그의 시신은 연구를 위해 쓰일 계획이다. 평생 같은 연구를 해온 그의 부모님이라면 흔쾌히 동의해줄 터였다. 시간 여행에 대해 모르는 한국 정부가 수상하게 여길 리도 없거니와 외국에 있는 연구시설에까지 와서 부검을 하겠다며 나설 리도 없다고 판단했다. 유일하게 단단히 입막음을 해야 되는 대상은 신체검사를 진행했던 의료진뿐이다.
김박사의 증조부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은 께름칙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원수를 갚았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젊고 열정적이며 누구보다 총명하던 김박사. 시간 여행이 성공하면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었다. 과학의 천재지만 낯을 가리고 말을 더듬는 쑥맥인 그를 이끌어줄 수 있는 건 연구 동료인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결국 그 젊음과 열정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던 것이다.


강희연 박사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들키지 않도록 얼른 닦고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며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녹화된 김박사의 영상을 틀었다. 그 속에서 김준선 박사는 아직 살아 있었다.
화면이 흐려진 건 자신의 눈물 때문임을 알았다. 김박사는 시간 여행으로 일어난 변화는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자신이 그때로 돌아가 막으려 한다 해도, 혹은 훨씬 전으로 가서 경고를 한다고 해서 지금의 현실이 바뀔지 자신이 없어졌다. 어쩌면 미래에 자신이 실제로 시도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실패를 했음이 분명하다. 김박사는 시간을 밀푀유에 비유하곤 했다. 시간 여행은 촘촘하게 겹친 시간대를 뚫고 지나가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은 함께 흘러가지만 분기하거나 평행하여 복수의 시공간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미 일어났던 과거는 고정되어 있다. 시간 여행으로 개입한 결과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즉 미래에서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가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한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로써 남겨져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강박사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사실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시간 여행이 생겨난 이후에도 생겨나기 전과 시간에 대한 개념에서는 변한 게 없었다. 일어난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 단순한 사실이 유난히 그를 아프게 만들었다.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그의 마음속에 부질없는 미련과 아쉬움만 커져갔을 뿐이었다.
강희연 박사가 보고 있는 것은 그저 흘러간 시간의 잔상이었다. 과거가 변하지 않듯이 영상 속에 담긴 그의 모습도 변하지 않으리라. 늘어선 카메라의 세례를 받으며 벌게진 얼굴로 문서를 읽고 있는 젊은 과학자의 모습을, 시간 여행이 줄 과학적 성과와 밝은 미래에 대한 꿈과 포부를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청년의 모습을,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재생하면서 바라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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