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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내 이름을 불러 줘

2009.05.29 22:3605.29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일곱 살이었다. 혁명이 끝났을 때 그녀는 스물 두 살이었다.
  가장 먼저 아버지가 사라졌다. 얼마 후에 어머니가 끌려갔고, 그녀와 오빠와 여동생은 따로 수용되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오빠는 남자 보육소로, 그녀와 여동생은 여자 보육소로 또다시 나누어서 수용되었다. 그러고 나서 일 년이 지나 그녀만 다른 지방의 보육소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처음에는 성을, 그 뒤에는 이름을 잃었다. 혁명이 끝났을 때 그녀는 손목 안쪽에 박힌 작은 칩과 그 옆에 새겨진 초록색 여섯 자리 숫자가 되었다. 출신 성분을 나타내는 그 초록색은 열 여덟 살에 처음 숫자를 받았을 때 그녀의 살갗 위에서 이질적으로 빛났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빛이 바래어 피부의 일부로 자리잡아 갔다. 그러면서 그녀도 조금씩 새로운 정체성에 익숙해졌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그만큼 무감각해졌다. 다만 녹색 숫자 옆, 살가죽 바로 아래 박힌 조그만 칩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볼록하게 솟은 채 좀처럼 그녀의 일부가 되어 가라앉지 않았다.
  숫자와 칩을 받던 해에 그녀는 보육소를 졸업하고 국방 경비대로 소속이 옮겨졌다. 1년 후에 그녀는 수도 경비대로 차출되었다. 피바람과 혼란이 정점에 이르렀던 혁명의 마지막 3년을 그녀는 혁명의 중심지에서 지냈고, 살아 남았다.
  그 3년 동안은 숙청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길거리에서 공개 처형은 일상 다반사였다. 성인은 총살했고, 미성년자는 목을 매달았다. 처형 후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의례적으로 부근의 시민들을 집결하여 차례로 시체에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게 했다. 그녀는 수도 경비대 대원으로서 형을 집행하기도 했고 집행을 감독하기도 했으며 시민들을 동원하거나 해산시키기도 했고 형이 집행된 후 시체를 감시하기도 했다.
  그날 밤도 그녀는 공개 처형 후 시체 옆에서 야간 경비를 서고 있었다. 처형된 것은 성인 두 명, 청소년 두 명, 아동 한 명, 이렇게 다섯 명으로, 부모와 세 자녀였다. 다른 모든 가족들처럼 이들도 성별과 나이에 따라 분류되어 부모는 각각 동원 소집되고 자녀들은 보육소로 옮겨졌다. 그러나 혁명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이들은 국가 조직의 원칙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부부가 만났고, 그 뒤에는 맏이에게 연락을 했다고 그녀는 들었다. 나머지 두 자녀는 처음에는 신원이 파악되지 않았으나 고문을 못 이긴 맏이가 자백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다른 지방에서 수도로 긴급 이송되어 영문도 모른 채 도착하자마자 처형되었다.
  밤이 깊었고, 교대 근무자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렬로 매달린 시체 옆에 서서 소총에 기대어 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 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이미 야간 소등과 통행 금지가 실시된 거리는 조용했다. 곁에 서 있는 것은 죽은 사람들이었고, 머리 위에는 밤 하늘만이 깊은 침묵 속에 흘러갔다.
  그녀는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교대 근무자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러 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 살아 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 … 불러 줘….
  그녀는 일렬로 매달린 시체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손전등을 켰다. 짙은 어둠 속에서 조그맣고 연약한 불빛이 간신히 눈 앞을 밝혔다. 그녀는 옆에 있는 시체부터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신은 처형되었을 때 모습 그대로 눈을 뜨고 고개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 시신도 움직이지 않았다.
  세 번째 시신 앞으로 가서 손전등을 비추었을 때, 시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하얀 얼굴이 손전등 불빛을 받아 생기 없이 누르스름하게 빛났다. 눈두덩과 뺨은 얻어맞아 보라색과 푸른색으로 얼룩덜룩하게 부어 올랐고, 이마는 길게 찢어져 코를 따라 흘러내린 핏줄기가 그대로 말라붙었으며, 입술은 터져 있었다.
  - 내 이름을 불러 줘.
  시신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 내 이름을 불러 줘.
  그녀는 손전등을 떨어뜨렸다. 손전등은 땅에 떨어져 그대로 꺼졌다. 세상은 순식간에 다시 어둠에 휩싸였고, 그 막막한 암흑 속에서, 되살아난 시체 앞에 그녀는 혼자 서 있었다.
  손전등을 다시 집어들어 전원을 넣기까지의 몇 초가 영원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신의 얼굴에 다시 불빛을 비추었을 때, 시신은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신의 목에 손을 대 보았다. 맥박은 뛰지 않았다. 코 아래 손가락을 대 보았다. 숨도 쉬지 않았다. 손가락에 닿는 시신의 피부는 꺼칠꺼칠하고 싸늘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쓸데없이 소란을 일으켰다가는 그대로 사살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비대에서 2년을 지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 시신의 머리에 대고 쏘았다.
  나머지 시신 두 구도 점검한 후 그녀는 교대 근무자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규정대로 인수 인계를 마치고 본부로 돌아왔다.
  세 번째 시신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른 여자의 얼굴과 나지막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짧은 문장을 잊지 못했다.
  
  그녀가 그 문장을 다시 들은 것은 5년이 지난 후였다.
  스물 세 살에 그녀는 수도 경비대에서 건설 장비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일 년 후에 다시 소속이 변경되어 그녀는 개인 식별 칩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배정된 동료 노동자와 첫 관계를 가졌고, 첫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다. 아이는 법규대로 출생 직후 국가에 귀속되어, 그녀가 얼굴을 보기 전에 보육 요원들이 데리고 갔다. 그녀는 태어난 아기가 남자아이라는 말만 전해 들었다.
  먹일 아기가 없었으므로 젖이 불었다. 그녀는 통증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 온통 젖은 야간복 가슴을 부여잡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기숙사 침실 경비는 그녀를 화장실로 보내 주었다. 젖을 짜서 변기에 버리면서 그녀는 울었다.
  “아가….”
  그녀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소리 죽여 흐느꼈다.
  “우리 아기….”
  뭔가 어깨에 가볍게 와 닿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변기의 물을 내렸다. 나오기 전에 다시 한 번 좁은 칸막이 안쪽을 둘러보았다. 의심 갈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칸막이를 나와 세면대에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세수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 세면대 앞에 붙은 작은 조각 거울을 무심코 들여다봤을 때, 형광등의 쏘는 듯한 거친 불빛 아래 그녀는 자신의 한 쪽 어깨 뒤로 하얀 얼굴이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코 아래부터는 어깨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이마에는 길게 찢어진 상처가 있었고, 눈두덩은 보라색과 푸른색으로 부어 있었다.
  - … 이름을 불러 줘.
  언젠가 들었던 나지막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 … 이름….
  그녀는 한동안 그대로 얼어붙은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어깨와 그 뒤로 반만 떠오른 하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얼굴은 거울 속에서 끈질기게 그녀의 눈을 마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 그 애 이름은 몰라.”
  마침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속삭였다.
  “남자애라는 것만 들었어…. 이름은 커녕, 얼굴도 몰라.”
  하얀 얼굴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눈두덩이 부어오른 두 눈을 부드럽게 감았다 뜨는 것이 보였다.
  - … 불러 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얀 얼굴이 고개를 가볍게 한 쪽으로 기울이며 다시 말했다.
  - … 이름….
  그리고 얼굴은 사라졌다.
  그녀는 그 후에도 한참 더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뒤에도 젖이 불어 밤에 혼자 화장실에 가야 할 때면 그녀는 거울 속에서 때때로 하얀 얼굴과 마주쳤다. 얼굴이 하는 말은 언제나 같았다.
  - … 이름…, 불러 줘….
  그래서 그녀는 하얀 얼굴에게 아들의 이름을 말했다. 얼굴을 알지 못하는 아들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몸에서 생겨난, 가깝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몸 속에서 발로 차며 움직이던 행복하고 신비롭고 충만한 경험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하얀 얼굴은 부드럽게 두 눈을 감았다 뜬 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대답 없이 사라지곤 했다.
  
  2년 뒤에 그녀는 딸을 낳았다. 이번에도 얼굴을 보기 전에 보육 요원들이 와서 데리고 갔다. 다시 젖몸살을 앓으면서, 밤에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손도 댈 수 없이 고통스럽게 부어오른 젖을 이를 악물고 억지로 짜서 버리면서 그녀는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어깨 너머로 소리 없이 떠오르는 하얀 얼굴에게 그녀는 자신이 지어준 딸의 이름을 말했다. 아들은 지금쯤 걸음마를 시작했을지, 여동생과 함께 있었다면 어떻게 놀아줬을지, 자신이 두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어떻게 돌봐주었을지를 그녀는 하얀 얼굴에게 속삭였다. 새벽에 일어나 공장으로 출근하여 하루 종일 기계 소음 속에서 일한 후 저녁이면 국가에서 배정해준 상대와 의무적으로 몸을 섞고 아이가 생기면 피할 도리 없이 몸 속에서 키우며 사랑한 후 낳아서 빼앗기는 삶 속에서 그녀에게는 하얀 얼굴에게 이야기하는 상상 속의 가족만이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런 희망은 누군가 자신이 아닌 존재가 잠자코 귀 기울여 들어 준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 더 현실적으로, 어떤 때는 정말로 손에 닿을 듯이 가깝게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여자 기숙사 침실에서 혼자 잠드는 밤이면 귓가나 어깨에 싸늘하고 꺼칠꺼칠한 피부가 닿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낮에 공장에서 기계 앞에 서 있을 때도 가끔씩 어깨나 목덜미에 코나 입술이 닿는 감촉을 느꼈다. 그 감촉은 오래 전, 아주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발목에 몸을 비비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얀 얼굴의 존재를 느낄 때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혼자 미소 지었다.
  
  두 번째 출산 후에 그녀에게 배정된 남자는 가끔 같은 조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낯익은 사람이었다. 성격이 무뚝뚝한 편인지 남자는 일하는 동안 규정대로 기계만 쳐다볼 뿐 잡담은 하지 않았고, 몇 번 그렇게 같이 일한 후에도 마주치면 인사도 없이 그대로 무표정하게 지나갔다.
  어차피 그녀도, 자신에게 배정된 기계를 돌리는 것과 비슷한 태도로 자신에게 배정되는 남자들을 대했다. 한 남자와는 한 번만 관계를 가질 수 있었으며,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기간은 최대 일 년이었다. 그 전이라도 임신이 확인되면 관계는 끝났다. 그래서 그녀는 기계적으로 옷을 벗고 의무적으로 침대에 누웠다.
  남자는 옷을 벗지 않았다. 그대로 침대 옆에 서서 누워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건조하게 말했다.
  “뭐예요?”
  남자는 천천히 몸을 숙여 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입맞추었다.
  그녀는 눈쌀을 찌푸렸다.
  “… 뭐 하자는 거예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침대 옆에 웅크린 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녀가 세 번째로 물었다.
   “왜 이래요? 안 할 거예요?”
  특별한 이유 없이 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위법이다.
  남자는 일어나서 그녀 위로 몸을 숙이고 대답 대신 그녀에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맞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가볍게 비볐다.
  “… 미안해요.”
  그리고 남자는 일어서서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왔다.
  
  남자는 내내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남자는 온몸으로 그녀를 으스러뜨릴 듯이 껴안고 다친 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관계가 끝난 후 그녀가 일어서서 옷을 입으려 하자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요.”
  남자가 속삭였다.
  “잠깐만 이대로 있으면 안 돼요?”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남자 옆에 누웠다.
  남자는 그녀의 손목 안쪽에 새겨진 초록색 여섯 자리 숫자와 그 옆에 볼록하게 솟은 작은 칩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만졌다. 그녀는 자신의 왼손 손목을 만지는 남자의 왼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칩이 볼록하게 솟은 옆에 붉은색으로 일곱 자리 숫자와 글자 두 개가 새겨져 있었다. 빨간색도, 이렇게 긴 번호도, 글자가 들어간 것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유심히 들여다보았으나 묻지는 않았다.
  남자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빨간 번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서서 바닥에 놓인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남자는 언제나, 침대에 눕기 전에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관계가 끝난 후에는 잠시만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녀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관계가 끝나면 곧바로 몸을 일으켰고, 남자가 먼저 부탁하지 않으면 스스로 곁에 누워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관계가 끝난 후 무심코 몸을 돌려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절정에 이른 남자가 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내는 대신 하아, 하고 깊이 한숨을 쉰 후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살짝 비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팔을 두르자 남자는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그대로 있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남자가 당기는 대로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남자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 댔다.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처럼, 이마를 살짝 비볐다. 그리고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그래서 그녀도 남자에게 입맞추었다.
  
  다음날 공장에서 마주쳤을 때, 남자는 이전처럼 인사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녀를 지나쳐 갔다. 그녀도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남자를 지나쳐 갔다.
  
  남자가 손목 안쪽의 빨간 번호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는 그녀에게 말했다.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요.”
  “뭐를요?”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하고 아이가 생기면, 그 애 손목에도 빨간 번호가 새겨질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가 현실적으로 ‘조심’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남자가 물었다.
  “왜 빨간색인지, 안 물어봐요?”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떤 종류의 질문이 위험한지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이 남자 지금, 떠 보는 건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남자가 사과했다.
  “… 미안해요.”
  그러나 잠시 망설인 후에 남자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다시 속삭였다.
  “난, 내 이름을 기억하거든요.”
  그리고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일곱 자리 숫자도, 그 뒤에 새겨진 붉은 글자도 아닌, 이름.
  남자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고하고 싶으면, 신고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자를 신고하지 않았다.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지도 않았다. 그 뒤로 남은 1년이 끝날 때까지 남자와 그녀는 낮이면 공장에서 배치해주는 대로 따로 혹은 두 세 번쯤은 함께 일을 하고 저녁이면 규정된 시각에 침대 하나와 베개 두 개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좁은 방에서 관계를 가졌다. 낮에 공장에서 마주칠 때면 남자도 그녀도 무표정하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지나쳤고, 저녁에 관계를 가진 후에는 나란히 누워 말없이 서로 팔목 안쪽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마지막 관계를 갖던 날 그녀는 남자의 귓가에 아들과 딸의 이름을 속삭였다.
  “누구예요, 그게?”
  남자가 물었다.
  “내 아이들이에요.”
  그녀가, 입가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웃음이 희미하게 번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렇구나…. 여자는 그런 걸 알겠구나….”
  그리고 남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중얼거렸다.
  “… 좋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뭐가요?”
  남자가 속삭였다.
  “내가 가진 건, 내 이름 뿐이거든요.”
  그리고 남자는, 일어서서 옷을 입기 전에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가볍게 비볐다.
  “잘 가요….”
  
  임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곧 다른 사람에게 배정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빨간 번호의 남자와 공장에서 가끔 마주칠 때면 그녀는 전처럼 무표정하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두 달이 지난 후에 그녀는 남자가 공동 욕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기숙사 침실에 누워서 그녀는 귓가에 가볍게 차가운 입술이 닿는 것을 느꼈다.
  - 불러 줘…. 이름….
  언제나처럼 하얀 얼굴이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 남자가 늘 입맞추었던 자리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소리 없이 남자의 이름을 속삭였다.
  
  이후로 십 오 년간 그녀는 계속 공장에서 일하면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마지막 출산은 심한 난산이었고, 제왕절개로 간신히 아이를 꺼낸 후 그녀는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아이를 데려간 후 국가 출산 및 보육 위원회 이름으로 된 훈장이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훈장에는 아이들의 이름도 그녀의 이름도 없었다. 단지 한가운데에 그녀의 여섯 자리 번호만이 조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왼쪽 유방에서 멍울이 만져지기 시작했다. 매번 출산 후마다 젖몸살을 특히 심하게 앓고 유선이 곪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는 의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의사가 명령하는 대로 수술을 받고 왼쪽 유방을 절제했다.
  이미 임신을 할 수 없게 된 이후로 그녀에게는 남자가 배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공장에서 일이 끝나면 기숙사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침실에 혼자 앉아 있곤 했다. 그럴 때면 등 뒤에서, 혹은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하얀 얼굴의 조그만 목소리는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 … 이름을…, 불러 줘.
  그녀는 세 딸과 두 아들의 이름을, 오래 전에 자살한 남자의 이름을, 그리고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와 오빠와 여동생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속삭였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은 주간 경비원이 밀고했기 때문에, 그녀는 반국가적 의도를 가지고 금지된 정보를 유출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고문실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을 때도, 독방의 깜깜한 암흑 속에 혼자 웅크리고 있을 때도, 그녀는 어깨에 닿는 차가운 입술을 느꼈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 … 이름을…, 불러 줘.
  그래서 그녀는 마음 속에 담아둔 이름들을 하얀 얼굴에게만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러나 이미 나이 들어 약해진 몸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녀는 목을 매고 죽은 남자의 이름을 가장 먼저 말했다. 남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둘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를 고문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몽둥이로 얻어맞거나 얼음장 같은 물 속에 얼굴부터 처박히거나 몸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전류가 통과하는 일을 몇 번 겪고 나서 그녀는 부모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오빠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여동생의 이름을 말했다.
  세 딸과 두 아들의 이름만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 이름은 아이들 본인조차 모르는 그녀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국가가 손댈 수 없이 온전한 그녀만의 아이들로 남았다.
  
  사형이 확정되었을 때, 드디어 고문이 끝났다는 생각에 그녀는 기뻤다. 독방으로 찾아와 선고문을 읽은 간수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간수가 나가고 나서 등 뒤의 하얀 얼굴이 말했다.
  - … 이름을…, 불러 줘.
  그녀가 대답했다.
  “이젠, 안 불러도 돼.”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아이들의 이름만은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는 자랑스러웠다.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얀 얼굴은 언제나 그녀의 등 뒤에 남아 있어 주리라고 그녀는 믿었다.
  하얀 얼굴이 말했다.
  - 내 이름을 불러 줘.
  그녀가 되물었다.
  “… 무슨 소리야?”
  하얀 얼굴이 조용하지만 똑똑하게 들리는 소리로 다시 말했다.
  - 내 이름을 불러 줘.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아주 오래 전, 아직 혁명이 끝나지 않았던 시절 야간 경비를 섰을 때 되살아났던 시체를 떠올렸다. 그 때도 시체의 하얀 얼굴은 분명하게, ‘내 이름을 불러 줘’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대답했다.
  “넌 이미 죽었잖아.”
  하얀 얼굴이 다시 말했다.
  - 내 이름을 불러 줘.
  그녀가 다시 대답했다.
  “내가 봤을 때 넌, 이미 죽어 있었잖아.”
  시체가 입었던 죄수복 가슴에는 이름이 아닌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그나마 낡고 더러워진 데다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얀 얼굴이 다시 요구했다.
  - 내 이름을 불러 줘.
  “몰라.”
  그녀가 처음으로 하얀 얼굴의 말에 직접 대답했다.
  - 내 이름을 불러 줘.
  “난 네 이름을 몰라. 처음부터 그런 건 몰랐어.”
  그러자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사라졌다.
  “잠깐만! 어디 있어?”
  그녀가 독방의 어둠 속에서 홀로 외쳤다.
  “어디로 간 거야?”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마구 팔을 휘둘러 등 뒤와 어깨 너머를 더듬었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하얀 얼굴을 도로 불러오고 싶었다. 절박하게, 그녀는 하얀 얼굴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부를 수 없었다.
  
  사형 집행인이 데리러 왔을 때, 그녀는 선고를 듣던 때와는 달리 온 힘을 다 해 저항했다.
  “안 돼…. 난 아직 그 이름을 모른단 말이야…. 혼자 죽고 싶진 않아…. 그럴 수는 없단 말이야….”
  간수들이 달려들었다. 몸부림치는 그녀의 팔을 비틀어 뒤에서 묶고 얼굴에 가리개를 씌웠다. 감옥 뒤의 공터로 데리고 나가 교수대로 끌고 올라갔다.
  “안 돼…. 아직 이름을 모른단 말이야…. 안 돼….”
  그녀는 목에 밧줄이 걸리는 것을 느끼면서 외쳤다.
  목에 걸린 밧줄이 조여들었을 때 그녀는 혼자였다. 죽음의 순간 그녀가 어깨와 등 뒤에서 느낀 것은 캄캄한 허공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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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그라토 09.05.30 07:58 댓글 수정 삭제
    폴 포트의 킬링필드 정책이군요... 하긴 폴 포트야말로 공산주의 이론을 제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인간이었죠.... 모든 자본가와 지식인을 다 죽이는 걸로도 모자라, 남자와 여자와 아이를 분해해서 수용하여 가족 체제의 전복을 꿈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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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09.05.30 14:00 댓글 수정 삭제
    아 전 사실 몇 년 전에 어느 탈북자 분께 들었던 이야기를 참고해서 썼는데요. 디스토피아라는 면에서는 뭐 다 비슷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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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토 09.06.25 23:48 댓글 수정 삭제
    한 순간 소름이 뻗친 것은 제가 너무 몰입해 버렸기 때문일까요? 왠지 거울을 보기가 무서울거 같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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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09.06.26 02:46 댓글 수정 삭제
    앗 몰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납량특집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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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너무 불쌍하네요 뭐 저런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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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10.02.06 08:13 댓글 수정 삭제
    무서운 세상이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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