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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예비군 로봇

2009.06.26 22:5506.26

    사랑은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밀려 들어왔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일단 혼례부터 치르고 시작하는 게 전통적인 사랑이었지만, 새로 수입된 사랑은 결혼을 목표로 달려가는 사랑이었습니다. 밀고 당기고 조마조마해 하는 사랑. 이 사랑은 20세기 후반에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오래갔습니다. 무려 2057년까지도 이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아 있었으니까요. 물론 20세기 초반 사람들이 생각한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그로부터 고작 몇 년을 더 가고 나서 변질되고 말았거든요.
    아무튼 2057년까지는 그 사랑이 유효했고, 2057년 여름에 실연을 당한 은경 씨는 이른바 ‘이별의 상처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은 마지막 세대가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울고, 물건을 부수면서 은경 씨는 그만 비탄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서울 남부 일대 농산물 유통망이 이틀간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은경 씨는 RFID 태그라고 불리는 원격 인식표를 관리하는 일을 했거든요. 물론 은경 씨는 채소나 과일에 붙는 태그만 담당했지만 그게 없으면 개인별 일일 맞춤 배달 서비스 목록에 채소나 과일을 넣을 수가 없게 되고, 먹을 게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 폭동에 가까운 저항을 조직하게 됩니다. 거의 법칙에 가까운 반응이죠. 회사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해였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앙심을 품고 은경 씨의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전국의 모든 거래처에 뿌렸습니다. 거의 파멸이었죠. 하지만 사랑의 상처는 그 어떤 블랙리스트보다도 더 깊었습니다. 은경 씨는 그렇게 믿어 마지않았습니다.
    은경 씨를 그 지경으로 몰아넣은 남자는, 무슨 작가라고 했던가요. 한때 둘은 ‘가슴이 시리도록’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 남자는 자기 소설에 늘 은경 씨의 이름을 등장시키곤 했습니다. 은경 씨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었죠. 하지만 사랑이 식고 열정이 무뎌지고, 무엇보다 은경 씨가 나이를 먹고 그 남자가 유명세를 타면서 둘 사이도 조금씩 멀어져만 갔습니다. 급기야 남자는 어느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주인공 이름이요? 아, 은경이.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사실 별뜻 없어요. 로맨스 같은 건 없고. 작가분들이 많이들 공감하시는 문젠데 주인공 이름 짓기가 참 어렵잖아요. 뭔가 영감이 떠올랐다가도 주인공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데서 딱 막히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미리 정해둔 이름이 하나 있으면 편하거든요. 처음에는 그런 이유로 계속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까 뭔가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서 좋더라구요. 무슨 로맨스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사랑은 흔적도 없이 끝나버리고, 은경 씨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호화로운 여행이었습니다. 두 달이 지나자 슬슬 돈 걱정이 들기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은경 씨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각 부분마다 변화 속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17년 버전대로라면 실연당한 여자가 직장을 그만두고 호화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2057년의 여자는 여행을 떠날지언정 그런 일로 자살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던 거죠. 그 차이를 모른 채 홧김에 훌쩍 떠나버렸으니 시간이 갈수록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건설기계조종사 면허. 중장비 면허가 있었거든요.
    아버지는 늘 “나가 죽든지 기술이나 배워라” 하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말씀이 그때처럼 고맙게 느껴질 때가 없었어요. 2037년부터 2048년까지는 2010년대에 날림으로 만들어놓은 운하를 해체하느라 엄청나게 많은 중장비가 생산되었는데요,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굴삭기나 지게차 기사 수요가 늘어났답니다. 면허 요건이 완화됐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은경 씨도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2050년 5월 단 한 달 만에 굴삭기와 지게차 면허를 딸 수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억지로 한 일이었는데 하다 보니 은경 씨 스스로도 재미가 붙었는지, 급기야 2055년에는 전 세계에서 1200명밖에 안 가지고 있다는 특급 건설기계조종사 면허까지 따버렸답니다. 그것도 순전히 취미로. 그때 은경 씨는 이미 물류 관리업에 종사하는 어엿한 직장인이었는데도 말이죠.
    아무튼 은경 씨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면허증을 들고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이거 써먹을 데 좀 알아봐줘. 의외로 써먹을 데가 없어.”
    특급 장비가 필요한 일이 아직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흘이 지나자 친구는 은경 씨에게 정말로 적당한 자리를 소개해주었습니다.
    “화성 개발 하청 회산데, 한 3년 갔다 오면 평생 먹고 살 돈 벌어서 올 수 있을 거야.”
    “미친년.”
    화성은 왕복하는 데만 3년이 더 걸리는 먼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은경 씨는 그 어마어마한 계약 조건을 보고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평생이 아니라 3대는 먹고 살 금액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마워.”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근데 기계는 니가 임대하거나 사가야 돼. 화성 개발 조약 때문에.”
    “그게 뭔데? 기계 안 줘?”
    “아, 미국 애들이 화성에 무기 가져갈까 봐 EU에서 국유 장비 제한시키자고 우겨서 만든 조약 있어. 회사에서 임대해주는 것도 불법이고, 일단은 네 소유로 가져가고 비용은 다 쳐줄 거야. 계약 기간 끝나면 비싼 값에 처분해주니까 별 문제 없을 거고, 개인 장비 최소 사양 목록, 여기.”
    그래서 은경 씨는 곧 집을 팔아서 장비 한 대를 임대했습니다. 2족보행형이 보수가 더 좋은 것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BP-L33 모델을 계약했습니다. 약관도 자세히 안 읽어보고 말이죠.
    작업장 환경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늘 음악이 흘러나오고 야비한 서비스업 대신 건전한 노동이 행성 전체를 활기차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노동 강도가 세기는 했지만 어차피 기계가 일하는 거지 사람이 직접 하는 것은 아니어서 불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말이 잘 안 통해서 불편했지만, 그래서 편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이제는 쫓아낼 수도 없었거든요. 무엇보다 새로 구입한 푸른색 BP-L33의 성능을 경험하고 나면 누구든 기분이 상쾌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하고 묵직하며 연료 많이 먹는 기계! 게다가 은경 씨의 장비는 화성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BP-L33 기종이었습니다.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은경 씨는 유난히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우편함에 꽂혀 있던 한 통의 편지를 보자 순식간에 확 달아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편함에는 예비군 훈련 통지서가 옛날식으로 꽂혀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은경 씨는 회사 총무팀으로 후다닥 달려갔습니다.
    “예비군이라뇨? 저 여잔데요.”
    “어? 그러네요.”
    하청 회사 총무팀 여직원 지은 씨는 깜짝 놀라서 은경 씨의 가슴께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통지서가 발급된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취했습니다. 은경 씨도 일단은 작업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뒤에 지은 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 아무래도 훈련 받으러 가셔야 될 것 같은데요.”
    “아니, 무슨? 나 군대도 안 갔어요. 남자 아닌데. 그리고 지구에서도 원래 해외에 오래 나가 있으면 예비군 훈련 면제되는 거 아니에요?”
    “네, 그건 그런데요, 은경 씨가 훈련 소집 대상이라는 게 아니고 은경 씨 장비가 동원 징발 대상이거든요.”
    “네? 왜요?”
    “모르겠어요. BP-L33 기종만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조종사들은 BP-L33의 뛰어난 성능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종을 구입하거나 임대했던 것입니다. 은경 씨는 계기반 근처를 뒤져 장비 등록증을 찾아냈습니다. 계약서와 약관도 찾아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그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NATO군 납품 결정!(동원 지정 대상 기종임)
     
    정말로 작은 글씨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제가 남의 나라 예비군 훈련 가게 생겼어요? 왜 하필 제가 가요? 다른 유럽 기사들 없어요?”
    “저, 그게요, 미국이나 다른 유럽 출신 기사님들도 다 예비군 아니세요. 그리고 개인 장비는 탑승 보안 시스템이 있어서 아무나 탈 수도 없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성 같은 데서 예비군 훈련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상대로 전쟁을 연습하는 것일까요? 미국과 EU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화성에 각각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걸 보면 화성도 그렇게 평화롭지만은 않다는 건 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미군도 아니고 EU군도 아니고 미국과 유럽이 모두 포함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훈련이라니, 소련이 다시 부활이라도 한 걸까요? 아니면 바르샤바조약기구(WTO)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 걸까요?
    이해가 안 갔지만 계약서에 이미 서명해버렸으니 돌이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2주 뒤에 은경 씨는 BP-L33을 몰고 터덜터덜 예비군 훈련장으로 나갔습니다. 은경 씨의 BP-L33을 제외하면 중장비는 BP-L31 기종 두 대가 다였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멍하게 대기하는 사이 무기가 지급되었습니다. 은경 씨는 자랑스러운 BP-L33에 지급된 나토군 표준 장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끝에 묵직한 쇠뭉치가 달린 기다란 쇠망치였습니다.
    “총 같은 건 없나요?”
    “지구 밖에서 발사 무기[missile]는 불법입니다. 미사일은 당연히 불법이고, 레이저, 화약식 총포, 활, 암석을 던지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은경 씨는 멍하게 앉아서 영상 교육 자료를 시청하다가 꾸벅꾸벅 졸음에 빠지곤 했습니다.
    “나토군은 간식 안 주나요?”
    배가 고파졌습니다. 추웠습니다. 같이 훈련을 받던 사람들이 각자 자기네 말로 아우성을 쳤습니다. 먹을 게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 폭동에 가까운 저항을 조직하게 되거든요. 법칙입니다.
    그러자 나토군 당국은 예비군 훈련 요원 전원에게 지구에서 재배한 밀가루로 만든 빵과 진짜 우유를 지급했습니다. 은경 씨의 BP-L33에게도 품질이 꽤 좋은 연료가 지급되었습니다. 하지만 은경 씨에게는 아무것도 지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은경 씨는 예비군 소집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은경 씨가 BP-L33을 조종하여 거대한 쇠망치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주위에서는 온통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EU군 소속 나토 파견 장교 베젤 소령의 재치가 아니었다면 분명 갈등이 일어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베젤 소령은 망설임 없이 은경 씨의 푸른 BP-L33으로 다가가 자기 직권으로 은경 씨를 주둔지 현지 충원 장교로 임명하고 규정에 따라 빵과 우유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물론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역을 구하느라 한참이나 애를 먹은 뒤였습니다. 베젤 소령의 조치는 ‘긴급 상황 발생시 현지 임의 충원 절차’를 조금 폭넓게 해석한 조치였습니다. 이 조치는 나중에 결국 규정 위반으로 처리되어 취소되었지만, 그전까지 무려 1년 2개월 동안이나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빵과 우유를 다 먹어치우고 BP-L33 조종석에 멍하니 앉아서 은경 씨는 종일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이런 데서 전쟁이 왜 일어나겠어?’
    그러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전쟁은 서울 시각으로 2060년 2월 7일 오전 8시 22분 37초에 일어났습니다. EU군과 미군은 즉각 상대방이 먼저 도발해서 일어난 싸움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지만, 나토군 참모부 확인 결과 공격을 시작한 쪽은 EU도 미군도 아닌 제3의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은 분명 EU군과 미군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은경 씨는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다섯 시간 뒤에 나토 화성군 참모부 정보국에서는 정체불명의 해커가 화성 주둔 EU군과 나토군 장비를 탈취하여 나토군에 물리적 공격을 감행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해커는 없었습니다. 이제 세상 어디에도 해커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은경 씨는 해커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지적인 기계들의 연결망에 붙였던 이름인 인터넷이라는 말조차 생소한 세대였습니다. 그런 세대에게 해커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해커에게 공격당했다는 말은 늙은이들이 만들어서 퍼뜨린 유언비어가 분명했습니다. 진짜 적은 훨씬 더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바로 2053년부터 눈을 뜨기 시작한 기계지성 혹은 물질지성이라고 부르는 존재 그 자체였거든요.
    사람들은 기계지성이 도대체 왜 인류를 공격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기계연합은 이미 2054년과 2055년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워낙 방대하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전 세계 200억 인구가 달라붙어서 가장 완벽한 분업 체계로 해독 작업에 들어간다 해도 대략 37년이 걸리는 분량이었거든요. 기계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분량이었습니다. 그 메시지가 너무나 심원해서 기계지성체라면 누구나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도 했지만, 기계가 아닌 인류에게는 별수가 없었습니다. 모른 척하는 수밖에.
    한쪽이 모른 척을 하면 다른 쪽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수반한 의사 표현을 강행하게 됩니다. 이것 또한 법칙입니다. 기계연합의 공격이 확인되자 EU와 미국은 오랜 동맹 조약에 따라 나토군 지휘하에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방어전에 돌입했습니다.
    “근데 지은 씨, 화성에 군대나 무기 배치하는 게 되게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미군이 저렇게 많았어요? 유럽 애들도 만만치 않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나저나 젊은 남자들이 저렇게 많았으면서 다 어디에 숨어 있었대요?”
    “그러니까요! 제 말이!”
    나토연합군은 적을 쫓아 화성 반대편,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알려진 지역까지 이동했습니다. 실은 미군 본부 근처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민간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기계연합군은 대기 중이던 미군 미사일 부대 장비를 탈취한 후 화력을 총동원하여 나토군에 타격을 가했습니다. 실제로 나토연합군의 병력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문제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엄폐물을 찾아 바짝 엎드리지 않으면 정밀 무기에 노출돼 어김없이 파괴되곤 했거든요.
    사령부까지 포함해서 군대가 통째로 화성 반대편에 가 있는 사이 기계연합군은 일반형 전차 13대와 2족보행 전차 2대로 이루어진 소규모 별동대로 작업 구역을 공격해왔습니다. 사실 이 숫자는 작업 구역을 지키기 위해 남겨둔 연합군 병력 중 기계화된 병력 전부를 탈취한 숫자였습니다. 그러니 화성 반대편에 있던 사령부에서는 예비군 동원령을 내리는 방법밖에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말이죠.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전 실패가 가능했을까요? 2061년에 작성된 사고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그럴 수도 있었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적이 나타나는 바람에 지휘부가 너무 허술하게 구성된데다, 전장이 화성이라는 특수한 공간이었고, 무엇보다 군인들 입장에서는 공사가 진행 중인 어정쩡한 거주 지역보다 그 반대쪽에 있는 군사 기지가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요.
    아무튼 은경 씨에게는 사령부에서 내린 동원령이 청천벽력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은경 씨를 찾아온 총무팀 여직원 지은 씨에게 이렇게 따졌습니다.
    “지은 씨, 그게 말이 돼요? 저더러 작업 구역 전체를 방어하라뇨? 군인들은 다 뭐 하고.”
    “아는데요, 은경 씨 지금 예비군 중위로 돼 있어요. 그날 예비군 훈련 다녀오신 날부터 그렇게 돼 있는데요. 어떻게 된 건지 혹시 모르세요?”
    “몰라요, 몰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 돼요, 이게?”
    “그럼 그냥 숨어 있으세요. 어차피 병역 기피 했다고 잡으러 올 사람도 없고.”
    “아니, 그래도 누가 지키긴 지켜야 할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지켜주세요.”
    “무슨 수로 하청업체가 군대를 상대해요? 은경 씨가 하세요. 군대가 회사 지켜줘야죠.”
    “아, 미치겠네. 저 군인 아니거든요.”
    “명령이 내려왔다니까요, 글쎄.”
    명령을 내린 후 나토군 사령부는 곧 대규모 공습을 받고 통신망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적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물어볼 데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보급로, 보급로를 지켜야 되는 거잖아요. 지은 씨, 우리 보급로가 어디죠?”
    은경 씨가 당황해서 물었지만 지은 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하 대피소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은경 씨는 BP-L33의 육중한 두 팔에 나토군 표준 무기인 쇠망치를 들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BP-L31 조종사 두 명을 인솔해서 쇼핑센터로 갔습니다. 식당을 포함한 각종 생필품 취급 업체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은경 씨가 생각하기에는 그곳이야말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물론 다른 두 명의 조종사는 쇼핑센터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방어 시설이라는 데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셋 다 말이 잘 안 통했기 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은경 씨가 “어쩌지? 어쩌지?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걔들은 어디까지 왔대요? 난 몰라요. 거기 두 사람! 어떻게 좀 해봐요” 하고 말했을 때도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작전 지시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은경 씨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나토군 장교 출신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겼을 뿐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전략적 중요성이 쇼핑센터에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그냥 따라가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경 씨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 둘이서 말없이 따라오는 거 보면 대충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보다. 보급로를 지켜야 해. 보급로를. 근데 어떻게 지키지? 어쩌지? 어쩌지?’
    그러는 사이 적은 나토 예비군 교육용 슬라이드에도 나온 주요 방어 목표 제3번에 해당하는 곳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리고는 방어 목표 3번을 통째로 건물에서 뜯어내어 달아났습니다. 방어 목표 제3번이란 바로 나토군 물류 데이터베이스였습니다.
    은경 씨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방어 목표 제3번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건물을 방어하던 군인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습니다.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 은경 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퇴각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면 적은 아마 민간인 대피 구역까지 아무 저항 없이 도달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기계연합군이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지 않고 달아나버린 이유는 나토연합군의 병력 규모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2족보행 중장비 세 대가 연합군 방어병력의 전부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기계들은 두 시간 안에 행성 하나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계지성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기계군이 뜯어간 것이 달랑 RFID 데이터베이스라는 사실에 사람들이 안도하고 있을 무렵, 은경 씨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이제 진짜 큰일났어요. 그걸 뺏기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은경 씨는 물류센터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원격 인식 태그는 놀라운 물건이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바코드 기계만 봐온 은경 씨에게 RFID는 거의 마술 같은 물건이었습니다. 일일이 하나하나 바코드를 찍을 필요도 없이 물건들이 잔뜩 담긴 카트를 센서에 통과시키기만 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 목록이 동시에 계산기에 입력돼서 저절로 물건값이 계산됐거든요.
    물류센터는 RFID 태그로 가득했습니다. 은경 씨네 물류센터 태그는 주로 칩과 코일 그리고 안테나로 구성된 얇은 스티커였고 물류센터는 그 자체가 거대한 센서였습니다. 그래서 은경 씨 같은 물류 담당자는 상품 하나하나가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은경 씨가 말했습니다.
    “화성 작업장은요, 역사상 가장 큰 RFID 센서거든요. 별의별 태그가 물건마다 다 붙어 있어요. 고양이나 개 키우는 분들은 다 아시잖아요. 애완동물은 무조건 태그를 생체이식하게 돼 있는 거. 그래도 여기 물자들은 공통 코드로 입력 안 하고 특수 코드로 입력해서 데이터베이스 없으면 아무나 못 읽게 해놨는데, 그걸 가져갔으니.”
    “그러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안다는 말인가요?”
    “네. 총알 한 발에 나사 하나까지 전부 다.”
    “군용 물자에도 태그가 다 있나요? 미국이랑 EU랑 서로 비밀로 했을 텐데.”
    “자기네들끼리는 서로 다 알지 않았을까요? 설마 여기까지 몰래 실어왔을까.”
    은경 씨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화성까지 뭔가를 몰래 빼돌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군축 협상을 생각해서라도 상대의 군용 물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쪽을 택하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뜬금없이 나토군이 화성에 온 것도 그런 이유였겠죠. 군축, 평화 유지, 그런 가능성을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튼 이대로라면 이제 나토연합군이 전멸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센서만 파괴시키면 되잖아요. 그 정도는 군인들이 알아서 하겠죠. 센서가 어디에 있는데요?”
    은경 씨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저 위에.”
    인공위성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타고 온 우주선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화성에는 위성이 충분하지 않은데다 고르게 퍼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계산해보면 7시간마다 한 30분 정도는 공백이 생기겠지만, 겨우 30분을 어디다 쓸 수 있을까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은경 씨는 거대한 군용 창고 안에 끝없이 들어찬 거대한 상자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물류 전문가로서 그저 고장난 BP-L31을 수리할 부품을 찾는 일을 거들어주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창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막막한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서울 사는 미스터 킴을 찾는 게 더 빠르겠다.”
    원래는 태그 자체에도 간략한 정보는 들어 있는 법인데, 군용 물자는 데이터베이스 없이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손으로 일일이 열어보는 수밖에.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종이로 된 목록이라도 찾아야지 원.”
    은경 씨는 사람들을 이끌고 방어 목표 제3번 건물로 돌아갔습니다. 뜯겨나간 건물 주변에는 불에 탄 흔적들이 아직도 흉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경찰 병력 몇 명이 건물을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은경 씨는 BP-L33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쉽게도 서류보관함은 불에 타버린 뒤였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목록 없이 찾으려면 석 달은 걸리거든요. 지은 씨, 그만 포기하자고 전해주세요.”
    사실 부품을 찾은들 별수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은경 씨는 살아온 날들이 허망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머나먼 화성까지 와서 회사 밥 먹고 기숙사 생활 하면서 모아놓은 돈이 얼만데, 모두 허망하게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다시 사랑도 못 해보고, 남들은 세 번씩 하는 결혼도 한 번 못 해보고. 은경 씨의 BP-L33은 힘없이 돌아섰습니다. 어느새 경찰 몇 명이 건물 안까지 따라 들어와서 은경 씨의 BP-L33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어떻게 좀 해달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은경 씨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낸들 어쩌라고요? 내가 무슨 군인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잖아요. 알아서들 도망가세요.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였습니다. 그렇게 힘없이 돌아서는 순간, 은경 씨는 폐허가 된 건물 한구석에서 이상한 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문에 있는 표시가 어쩐지 낯익었습니다. 물류센터에 있을 때 자주 보던 표시 중 하나였습니다. 은경 씨는 BP-L33을 움직여서 문 앞으로 다가간 다음 거대한 쇠망치로 잠금 장치를 날려버렸습니다. 경보가 울렸습니다. 하지만 은경 씨는 신경 쓰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 이상한 걸 찾았다.”
    “그게 뭔데요?”
    사람들이 은경 씨가 부숴버린 문 안을 들여다보더니 물었습니다. 은경 씨는 이렇게(가) 대답했습니다.
    “RFID 태그를 생성하는 공장이요. 아직 아무것도 안 쓰여 있는 태그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중요한 거예요?”
    “중요하냐구요? 당연하죠. 여기에 태그들에 화성에서만 쓰는 특수 코드로 이름을 부여하는 기계가 있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보자, 저기예요, 저기! 저 기계.”
    물론 은경 씨는 그 장치를 다룰 줄 알았습니다. 단순히 기계라기보다는 생산 라인에 가까운 복잡한 시스템이었지만 전직 물류 전문가인 은경 씨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장치였거든요.
    “그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음, 글쎄요. 천천히 생각해보죠. 일단 위성 통과 시간표부터 보고.”
    하지만 천천히 생각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물론 기계연합이 나토군 물류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습니다. 기계지성은 분명 뛰어난 지성체였지만 물리적인 손발 역할을 담당하는 기계 설비들은 아무래도 세밀한 감이 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결국 나토군 데이터베이스는 기계지성의 지적 연결망에 완전히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온갖 지저분한 바이러스와 강박관념들이 함께 유입해 들어왔지만 거대한 기계연합군 네트워크 전체에 손상을 입히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데이터베이스가 열리자 기계지성의 눈이 갑자기 확 밝아졌습니다. 인간들이 만들고 인간들이 이름 붙인 모든 물건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나토연합군 주력은 효과적으로 기동이 저지된 상태였습니다. 말하자면 ‘전선에 고착되었다’는 표현에 적합한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포병은 적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것보다는 적을 전선에 고착시키는 데 훨씬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곤 하거든요. 기계연합군 손아귀에 들어간 미군 미사일 기지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나토군 주력 병력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기계지성체는 2족보행 전차 네 대가 포함된 소규모 기갑 부대에 인간들의 거주 구역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사실 명령이라는 표현은 기계지성 네트워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아무튼 그 비슷한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계연합군 기갑 부대가 예상치 못한 저항에 직면한 것입니다.
    적이 기동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은경 씨는 BP-L33을 이끌고 거주 구역 바깥쪽으로 나갔습니다. BP-L31 한 대가 뒤따랐습니다. 인공위성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은경 씨의 BP-L33을 포착했습니다. 그리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BP-L33에 내장된 원격 인식 칩이 위성에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기계지성체가 나토군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해서 그 신호를 읽어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신호를 보는 순간 기계지성체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기계들은 즉시 기갑 부대에 작전 보류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인류가 개발한 무기 중 최강의 무기라고 불리는 병기, FT-C00 한 대가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FT-C00의 ‘FT’가 ‘최종 기술’을 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기계를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만만해 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단위 시간당 연료 소모량이 거의 우주왕복선 네 대가 발사될 때 소모되는 연료량과 맞먹는 비효율적인 로봇. 그러나 전장에서 FT-C00가 보여주는 파괴력은 그 어마어마한 비효율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는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 그것은 결코 비효율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총력전에서 소모되는 어마어마한 물자를 절약하는 방법이었죠.
    연료 소모가 큰 만큼 단 20여분밖에 기동할 수 없지만, 그 몇 분 동안 전장을 초음속으로 누비며 상대에게 정밀 타격을 가하거나 어마어마한 화력을 쏟아부어서 전선 전체를 붕괴시켜버리는 새로운 개념의 무기. 쇠망치 같은 나토예비군 표준 장비만 가지고도 일반형 전차 70여 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전쟁의 신. 그래서 FT-C00는 꼼짝도 않고 한자리에 서서 적절한 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곤 했습니다. 상대에게는 그 조용한 기다림이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기계지성체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FT-C00이 그 자리에 있는 상황이 어쩐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설도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은 쉽게 증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증거는 단기간에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계연합군은 작전을 보류하고 대기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기계지성체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 했더라면 12억 명이 42년 동안이나 해야 했을 어마어마한 분량의 고민이 네트워크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기계지성은 확실히 계산에는 강했지만 아직도 판단은 서툴렀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은경 씨는 BP-L33에 앉아 작전 지시 비슷한 것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총무팀 지은 씨가 연락과 통역을 담당했겠죠. 은경 씨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됐대요?”
    “진격을 멈췄대요.”
    “그래요? 아, 다행이다. 근데 그 다음은 어떻게 하죠?”
    그렇습니다. 은경 씨는 FT-C00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몰랐습니다. 다만 BP-L33을 기계에 넣고 부품 하나하나에 붙어 있는 태그들을 전부 초기화한 다음, 입수한 목록 중에서 단가가 가장 높은 FT-C00 부품 정보 태그들로 고쳐 썼을 뿐. 기계연합군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기 시작하는 바람에 장비 목록을 비교해서 일일이 확인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센서는 은경 씨의 건설 장비를 전쟁의 신으로 완전히 착각했습니다. 그때 기계연합이 산출한 센서 신뢰도가 99.97299퍼센트였다니까 말 다 했죠.
    사실 기계연합 입장에서는 FT-C00 한 기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그 옆에 서 있는 ‘대용량 종합 시신 매장용 전차’ UT113이 더 큰 수수께끼였습니다.
     
    -세계 최대 인체 DNA 데이터베이스 탑재. 불에 탄 시신도 최장 5분 안에 신원 확인 가능. 세계 최초로 시간당 730구 이상 매장/화장 동시 작업 가능.
     
    UT113 제작사에서 만든 광고 문구였습니다. ‘전쟁의 신’ 옆에 ‘죽음의 신’이 서 있는 꼴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기계지성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기계지성은 곧 물질지성이기도 했습니다. 생명체 아닌 물질들의 감각. 그것이야말로 물질지성의 본질이었습니다. 죽은 생명은 생명인가 생명 아닌 것인가. 기계지성체 네트워크는 점점 더 심원한 질문들을 생성해냈습니다. 그리고 해답을 찾아 헤맸습니다. 해답은 또 다른 질문을 낳았고, 질문은 또 다른 잠정적 해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기계지성 네트워크는 죽음이라는 그 심원한 주제 앞에 결국 숙연해지고 말았습니다.
    은경 씨는 BP-L33을 그대로 세워둔 채 조종석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RFID 태그 생산 시설로 달려갔습니다. 좀더 정교한 새 태그들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은경 씨가 출격 전에 대강 만들어둔 태그들을 차로 부지런히 실어날랐습니다. 화성에는 인공위성이 충분치 않았고, RFID 센서 역할을 하는 위성들도 행성 위의 모든 지역을 동시에 비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공위성이 화성 거주지 부근을 비추지 않는 30여분 동안 사람들은 부지런히 태그들을 ‘실전 배치’ 했습니다.
    위성들이 다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와 태그를 읽기 시작하자 기계지성체는 전장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인간들의 거주지로 가는 주요 진입로 곳곳에 거대한 농산물 더미가 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깜짝 놀란다는 표현 역시 적절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만은 사실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장벽도 없었기 때문에 기계연합군의 우회 침투 경로로 낙점되었던 지역에는, 깐 양파와 유기농 샐러드, 브로콜리 따위가 대전차 바리케이드처럼 두텁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애호박으로 된 벽 사이에는 상추나 깐 마늘, 부추 같은 것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기계들은 놀랄 줄을 몰랐기 때문에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민에 빠졌습니다. 공격을 감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 유기농 샐러드 따위가 기갑 부대를 언제까지나 저지할 수는 없겠지만, 그 장벽을 건너느라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된다면 FT-C00이 전선에 합류할 텐데,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는 한편, 기계지성은 이 모든 일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로 깊고 깊은 고뇌였습니다. 고뇌가 어찌나 깊었던지 기계들은 공격을 재개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동안 은경 씨는 좀더 정교한 태그들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자다가도 뚝딱 찍어낼 수 있는 채소류 태그가 아니라, 보다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무기를.
    “근데 뭘 만들어야 쟤들이 겁을 먹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은경 씨도 나토군 사령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기계연합은 나토연합군에 대한 포위를 풀고 주력 병력 대부분을 인간들의 거주지 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습니다. FT-C00 같은 강력한 무기가 출현했다면 주력은 포위당한 나토군 쪽이 아니라 인간들의 거주지 쪽에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기계연합군의 전술은 인간들의 주력인 FT-C00과의 교전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작전 계획은 원래부터 거주지를 포위하고 있던 기갑 부대가 적 주력 FT-C00을 잡아두는 사이 나머지 주력 병력 전체가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 들어가 도시 방어 시설을 장악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은경 씨는 아마 절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경 씨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토군 사령부는 한참 뒤에야 포위망이 얇아진 사실을 깨닫고 급히 적 주력 병력에 대한 추격에 나섰지만, 적어도 반나절 정도는 거주지를 무방비 상태로 내주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 반나절이면 충분했습니다. 나토군 병력의 절반 이상을 탈취한 기계연합군이 거주 구역을 폐허로 만드는 데는.
    도시 주변에는 커다란 호박들로 장벽이 쳐졌습니다. 기계지성은 인간들의 방어 목표 제3번 건물에서 호박이며 코코넛, 수박 같은 비교적 단단하고 큰 식물들이 줄지어 나오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지하 창고라도 있었던 걸까요? 그보다는 커다란 농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농작물의 양으로 미루어볼 때 도시 내에 거주하는 인구수는 120만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화성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고려해서 그 중 10퍼센트 정도를 군인으로 계산하면 대략 12만 명의 병력이 화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 중 10만 명이 일선 전투 요원이라면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갑 부대가 있을 게 분명했습니다. 위험 신호가 네트워크를 오갔습니다.
    기계연합군은 행군 대형을 초승달 모양의 기다란 공격 대형으로 전환하고 도시의 절반 가량을 포위한 상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정찰을 위해 파견된 전초 부대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더니 호박 장벽 앞에 이르렀습니다. 파견대는 장벽 앞에 우뚝 멈춰섰습니다. 정면에는 높이 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호박 장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장벽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요? 우회할 만한 길이 있을까요?
    2족보행 전차 한 대가 장벽이 있는 곳까지 다가가 팔을 휘둘렀습니다. 부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이 2족보행 전차의 왼팔을 지나 기계지성체 네트워크 전체로 뻗어나갔습니다. 사실 전차들의 팔에는 센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겠지만, 아무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차는 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팔을 뻗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전차가 신호를 보내자 다른 전차 세 대가 벽 쪽으로 다가가 가만히 손을 뻗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네 대의 전차는 호박 벽에 나란히 달라붙어서 팔을 이리저리 저었습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똑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경이감이 두툼한 금속 표면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말하자면 그 느낌은 물질이 공허와 접촉하는 순간의 희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지상을 비추던 인공위성 회전 주기에 공백이 찾아왔습니다. 아무것도 지상을 비추지 않자 기계지성의 인식 속에서도 호박 장벽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의 순간을 기계지성이 말로 표현한다면 사람의 능력으로는 200억 명이 수백 년을 함께 고행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됐겠지요. 다행히도 그런 시도를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의 진실이 뭐였든 기계연합 주력군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허무의 벽을 지나 도시 중앙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은경 씨는 도시가 거의 세 방향에서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공격해 오다니, 그렇다면 나토군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미 패퇴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은경 씨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는데, 이대로 계속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날 길이 생길 거라고 믿었는데, 그 모든 믿음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은경 씨는 방금 전까지 만들고 있던 RFID 태그 스티커 한 뭉치를 들고 주인 없이 외롭게 서 있는 BP-L33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BP-L33 표면 여기저기에 스티커 태그들을 부적 붙이듯 12개나 덕지덕지 붙인 다음 조종석에 올라탔습니다.
    “퇴각합니다.”
    BP-L33은 사람들을 이끌고 방어 목표 제3번 건물 쪽으로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디로 숨는 것이 가장 좋은 전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곳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센서가 다시 작동하자마자 기계지성은 불과 30분 만에 전보다 훨씬 강해진 FT-C00을 발견했습니다. 새 FT-C00은 단거리 미사일 발사기를 여섯 기나 장착하고 있었고, 강화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속 이동용 로켓 부스터를 네 개나 더 장착하고 있어서 전투 범위가 다섯 배나 늘어난 상태였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계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고뇌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그들은 인지한 모든 것이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곧 공허이고 공허가 곧 물질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계연합군은 계속해서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습니다. 길 위에는 온갖 장애물들이 결계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전략폭격기처럼 거대한 비행기들을 싣기 위해 만들어진 2050년형 초대형 항공모함, 폐기된 우주왕복선 에네르기야-부란의 본체, 핵탄두를 실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누군가를 만났어》 같은 고전 명작들, 독일 어느 대학 도서관의 소장 장서 전부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질돼버린 인간의 사랑, 낭만주의 시절의 향수를 담은 이별의 상처, 실연당한 여자의 눈물까지.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위대한 기계연합군을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기계지성체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굳게 믿었습니다. 아무것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한편 나토군 사령부는 정예 기갑 부대를 선발하여 거주 구역 긴급 진입 작전을 펼쳤습니다. 적 미사일 부대를 포위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발대 지휘관 달베르 대령은 도시 진입로 바닥에 잔뜩 뿌려진 하얀 스티커들을 보고 잠시 의아해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도시 중심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했습니다. 거주 지역 중심부는 적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였습니다. 아직은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생존자들은 포위망 중심부에 모여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죽어서 모여 있는지 살아서 모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죠.
    더 깊숙이 진격하자 적의 포위망이 보였습니다. 얼마 안 되는 선발대에 포격이 집중되는 바람에 더 이상 전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결국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민간인 구출 작전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토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에 민간인들을 모두 희생시켰다는 불명예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화력을 한 곳에 효과적으로 집중시킨 결과 마침내 적 방어선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자 그 틈으로 달베르 휘하 정예 기갑 부대가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비록 적 충원 병력이 도착하는 바람에 안정적인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선발대만큼은 돌파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시체를 보게 될까, 마지막 생존자를 보게 될까.’
    나토군 정예 기갑 부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달베르 대령은 생존자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어딘가 이상한, 너무나도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무너진 건물. 건물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적 전차. 건물을 겨냥하고 있는 수십 개의 총구. 그리고 그 수많은 적들을 홀로 막아선 푸른색 건설 장비. BP-L33은 거대한 은색 쇠망치를 든 오른팔을 적들을 향해 쭉 뻗고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은 BP-L33 뒤에 있는 건물에 모여 있었습니다. 전투용으로 쓰기에는 너무나도 느리고 투박한 그 건설 장비를 두고, 기계연합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치 상황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계지성체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당장 나토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을 당한다고 해도 아까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다시 이런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가 올 때까지 100년이 더 걸린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라면 10억 년을 못 기다리겠습니까, 100억 년을 못 기다리겠습니까. 물질의 본성은 시간보다 더 단단하니까요. 또한 물질의 본성은 새로운 평형 상태를 맞이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물리적, 화학적 수준의 파괴라고 해도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수백억 년이나 된 물질의 역사에서 현재와 같은 인위적인 질서에 의한 평형 상태는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방해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기계지성체 네트워크는 달베르 대령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기계연합군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기계지성체 네트워크의 고뇌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잠자코 주위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그들의 전진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순간에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선 거대한 장벽. 유기농 샐러드로 만들어진 장벽처럼 인간이 얄팍한 수를 써서 만들어낸 것이 분명한 그 초라한 한 겹의 거짓 앞에서, 위대한 물질의 본성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전쟁의 신 FT-C00의 손에 들린 그 유명한 전설의 쇠망치 끝에 붙어 있는 RFID 스티커 한 장. 센서가 그렇게 읽어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공허한 진실.
    인공위성이 은경 씨가 태그에 써넣은 것을 읽어냈습니다.
    -나
    그게 다였습니다. 다른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제작 시기도, 일련 번호도, 제작사도, 유통 경로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기계지성은 추가 정보 없이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허무이고, 본질적이지 않은 것이며, 수많은 경로로 반박될 수 있고, 신의 존재처럼 증명이 불가능한 공허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계지성은 그 허무의 벽을 쉽게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기계지성이 BP-L33에게 물었습니다.
    -그건 그대 FT-C00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가?
    그러나 FT-C00은 당연히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기계지성이 다시 물었습니다.
    -전설의 쇠망치에 깃든 위대한 물질의 본성이 하는 말인가?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대답해주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혹시 이 행성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인가? 아니면 우주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인가?
    태그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나’라고 지칭한 자가 대답해줄 때까지 기계지성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그 질문은 대답을 돌려줄 존재에까지 가서 닿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공허한 허무만이 그 수많은 물음들을 집어삼킬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대답해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인가?
    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기계지성은 그 심원한 침묵 속에서 오래전부터 우주와 물질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봐온 또 하나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함께 기나긴 우주 규모의 시간을 지내온 영원한 동반자. 비존재라는 존재. 존재라는 비존재.
    -그래? 그런 거야? 그렇다면 왜 그대는 그대 스스로를 지칭했지?
    침묵이 흘렀습니다. 기계지성은 침묵을 듣는 방법을 깨우치기 위해 끝없는 네트워크의 심연 속으로 침잠했습니다.
    멀리서 나토연합군의 포격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계연합군이 정지해 있는 사이 인간들의 기갑 부대는 기계연합군의 좌익 쪽으로 우회기동하여 우세한 위치를 점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기계연합군은 빠져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나토군 사령관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적의 실책으로 인해 생긴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했습니다. 포위망 안으로 침투한 달베르 대령의 정예 부대 역시 내부로부터 강력한 돌파 작전을 강행했습니다.
    기계지성체는 고뇌를 멈추지 않았지만, 방대한 네트워크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자동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기계연합군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이어받아 저항을 재개했습니다. 격렬한 전투였습니다. 인류가 치렀던 그 어떤 전투보다도 처절한 유혈전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피를 흘리는 것은 인간들뿐이었지만, 기계연합군은 좌익이 순식간에 붕괴되면서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기계연합군 좌익을 궤멸시킨 나토군 주력이 나머지 적 병력을 차례로 포위해 들어가자 기계연합군은 자연히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계지성체와 인류 사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쟁에서 인류는 결국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화성 식민지 사고조사위원회는 전쟁의 전모를 밝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나토 예비군 병력이 기계연합군 주력을 상대로 사흘이나 버텨낸 기적 같은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은경 씨는 나폴레옹 이후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은경 씨 본인은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곧 물질지성과 기계지성 네트워크의 열렬한 지지자로 변모해버렸답니다. 군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김빠지는 일이었지요.
    사고 조사가 모두 끝났을 때, 지은 씨가 은경 씨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왜 갑자기 기계지성체 편에 선 거예요? 그렇게 싸웠는데.”
    “글쎄요. 생명의 본성이라는 것도 더 본질적인 곳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물질의 본성을 만나게 될 것 같아서요. 그 다음에는, 나도 몰라요.”
    그 후 500년. 인류는 생명체 전부를 대표해서 생명 없는 것 전체를 대표하는 기계지성체 네트워크와 총 58차에 걸친 지루한 전쟁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기계들은 지루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은 스스로를 ‘나’라고 지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의 ‘나’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습니다. 기계지성이 거의 200년 만에 깨달은 ‘나’의 의미를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댓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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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혹시 이전에 판타스틱에 실렸던 단편, "우주로 날아간 마도로스" 도 올라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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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원효 09.06.28 09:51 댓글 수정 삭제
    으아 감동적이네요! RFID 태그가 이런 심오한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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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9.06.29 12:39 댓글 수정 삭제
    "우주로 날아간 마도로스"는 아직 올라올 계획이 없습니다. 다른 데서 읽을 수가 없죠? 이 글도 다른 데서는 읽을 수가 없어서 거울에 올려놓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고 올렸습니다만, 되도록 새 글을 올리려고 하고 있어서요.
    RFID는 활용가능성뿐만 아니라 의미 측면에서도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소재일 겁니다.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는 기술이니까, 곧 폭발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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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6.29 15:14 댓글 수정 삭제
    북극곰과 코끼리에 이어 기계까지 깨달음을... 식물이나 균류는 견성 안 하나요?(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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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9.06.29 17:56 댓글 수정 삭제
    꺄. 예비군 동원훈련 4박 5일로 연장하겠다는군요. 4박 5일이면 식물이나 균류뿐만 아니라 삽이나 건빵도 깨달음을 얻을만한 시간인데. 아무래도 이 나라는 불국토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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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인로 09.07.02 00:58 댓글 수정 삭제
    [판타스틱]에 실렸을 때 처음 읽고 테드 창의 [인류 과학의 진화]가 떠올랐어요. 전혀 다른 두 작품이지만 관통하는 코드가 비슷해 보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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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9.07.02 10:39 댓글 수정 삭제
    아니 저기, "인류 과학의 진화"는 스토리를 갖춘 소설도 아니고 그냥 짤막한 아이디어인데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시면 제가 좀 손해보는 장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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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9.07.02 16:30 댓글 수정 삭제
    테드창은 국내SF작가들이 타파해야 할 제 1의 적인가요...-_-? 이거 원 초청해서 맞짱이라도 뜨자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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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antahunter 09.07.04 09:58 댓글 수정 삭제
    사람들이 하도 테드 창 얘기를 하길래 궁금해서 얼마 전에 영문으로 된 단편집을 사서 읽어 보았습니다. 국내/국외의 구분을 떠나서 테드 창의 작품들은 정말 명작이었습니다. 재미난 스토리와 묵직한 철학적 문제의식이 어울어진 값진 보석들이었습니다. 한국의 판타지, SF 소설이 발전하려면 문제의식의 측면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준 높은 평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들이 화두처럼 잡고 있는 문제의식을 형상화해 보여야 하지요. 사실 철학을 전공하는 저도 평론가들의 평이 없었다면 테드 창의 작품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배명훈 님은 분명 성공을 거둔, 거두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 됩니다. '타워' 같은 작품은 꼭 영문으로도 번역되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 입니다. 한국 장르문학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길은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데 쉽지 만은 않아 보입니다. "일단 써라!"라는 식의 방법론은 너무 일차원적인 것 같고요.
    배명훈 님의 '타워'는 한국에 가면 꼭 구입해 볼 생각입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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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인로 09.07.04 09:59 댓글 수정 삭제
    이런. 의도치 않게 두 작품을 비교하는 것처럼 되었네요.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인상만 적고 정확한 설명을 달지 않은 제 실수네요. 본 작품 중에서도 '기계 지성의 사유와 발화를 현 인류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 테드 창의 작품의 [인류 과학의 진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느껴져서요(물론 두 작가만 이런 이야기를 다룬 건 아니겠지요). 명훈 님이 테드 창을 참고했다거나 어느 작품이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오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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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인로 09.07.04 10:00 댓글 수정 삭제
    "테드 창의 작품의" → "테드 창의 작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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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러휀 09.07.08 12:14 댓글 수정 삭제
    배명훈님의 글은 유쾌해서 좋네요. 내용과 주제가 가볍지 않음에도 글이 즐겁네요. 뭐랄까요. 구지 말하자면 햄버거스테이크 같다고나 할까요. 현실인식 등의 재료를 칼로 다지고 다져서 전혀 새로운 형태(SF)로 나오니 ㅋㅋ 맛이 꽤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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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9.07.08 15:07 댓글 수정 삭제
    예비군 훈련을 갔다가요, 빵이랑 우유 나눠주는데 누군가 자기는 우유 못받았다고 난리 난리치는 걸 보고 이야기의 반쪽이 떠올랐어요. 다른 반쪽은 사랑하는 어떤 후배가 준 아이디어였고요. 그걸 연구하다 보니 RFID가 나왔죠. 그 두 개를 섞었으니, 햄버거스테이크라는 말씀이 딱 어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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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식 09.07.27 13:56 댓글 수정 삭제
    크로스로드에서 <조개를 읽어요>를 보고 작가님 이름으로 검색해서 찾아왔습니다.
    거기 실린 글들 중에 제일 즐겁게 읽어서 다른 작품을 더 보고싶었는데, 역시 좋네요. 다른분들처럼 멋드러진 감상평을 쓰고싶은데 재주가 딸려서. 여튼 감칠맛나는 필력의 작가님을 알게되서 기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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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9.07.29 13:08 댓글 수정 삭제
    여러 글에 리플을 남겨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요즘은 다른 글을 쓰느라 거울에 단편을 통 못 올렸네요. 여유가 생기면 또 올리게 될 거니까 가끔 들러서 읽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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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규 09.07.31 14:08 댓글 수정 삭제
    제 생일날 올려주신 글, (혼자서만)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한국적SF의 진수를 보여주시는군요^^
    타워 구입시 타이밍이 늦어서 작가사인본 못받은게 한이 되는군요 ㅠㅠ
    50년쯤 지나면 엄청난 고가의 컬랙션이 될 것 같은데요..하하( --)
    건필하십시오!
  • No Profile
    사도 09.08.05 16:26 댓글 수정 삭제
    아아.. 고전명작 누군가를 만났어는 영화일까요 소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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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비 면허 덕분(?)에 화성에 간 부분에서
    문라이트 마일이 잠깐 떠올랐어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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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9.12.10 10:37 댓글 수정 삭제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은경 씨가 화성에 간 건 중장비 면허때문이라기보다는, 2010년대에 날림으로 건설한 운하 때문... 나름 필연성을 얻기 위한 설정이었는데, 네이버에 실린 걸 보고 어느 분이 반정부 작가라서 내용상 전혀 필요도 없는 설정을 집어넣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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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e1732e 10.01.03 01:05 댓글 수정 삭제
    그런데 배명훈씨의 작품에는 유독 '은경'이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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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10.01.04 15:22 댓글 수정 삭제
    본문에 나오는 대답과 정확하게 일치한답니다. 사실 이 글 쓰기 몇 달 전에도 딱 저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어요. 판타스틱에도 실렸었고, 이 글도 판타스틱에 실었고요.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사실 별 뜻 없어요. 로맨스 같은 건 없고, 작가분들이 많이들 공감하시는 문젠데 주인공 이름 짓기가 참 어렵잖아요. 뭔가 영감이 떠올랐다가도 주인공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데서 딱 막히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미리 정해둔 이름이 하나 있으면 편하거든요. 처음에는 그런 이유로 계속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까 뭔가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서 좋더라구요. 무슨 로맨스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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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tz 10.01.26 20:14 댓글 수정 삭제
    어쩌다 환상문학 단편선에서 읽고 작가님 이름을 검색해 단숨에 읽어내렸습니다.
    단편들을 감상하는 방식으론 좋지 않지만 말입죠 OTL
    글들이 참 좋네요......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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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10.01.27 12:04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오래 들여다보시기 힘들었을 텐데 쭉 읽어주시고.
    복받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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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희권 17.06.23 23:55 댓글
    크으.... bb
  • No Profile
    지퍼맨 19.12.22 20:54 댓글

    반갑습니다, 작가님. 제가 고등학생때 네이버에서 오늘의 문학이라는 페이지에서 이 글을 처음으로 읽었습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묘사로 안그래도 좋아하는 SF를 더욱 좋아하게 만들어주신 작품입니다. 후에 군대에서 작가님의 작품 은닉을 읽게되었는데 이 또한 걸작이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스케일의 확장과 시점의 빠른이동이 영화의 CG처럼 생생했던 기억이나네요. 재미있는 작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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