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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7월 심사평

2023.08.15 00:0008.15

안녕하세요. 독자우수단편 선정단입니다.

우수작으로 2차례 이상 선정되시거나 연말에 최종 우수작으로 선정되신 분께는 거울 필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번 호 독자우수단편은 2023년 7월 1일부터 2023년 7월 31일 사이에 창작 게시판 단편 카테고리로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심사 기준을 만족한 작품 13편을 심사하였습니다.

 

2023년 7월의 독자우수단편 후보작은 박낙타님의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 scholasty님의 <흰 뼈와 베어링> 두 작품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박낙타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
이제 박낙타님의 작품은 읽기 전부터 기대감을 품게 됩니다. 통통 튀는 상상력과 재치 넘치는 입담, 거시 사회를 향한 예리한 문제의식은 모두 이전 작품에서 박낙타님이 보여주신 장기였습니다. 이번 작품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에는 무거운 현실 압력에 짓눌린 개인과 그 심리를 소묘하는 솜씨가 담겼고 저는 박낙타라는 작가의 다재다능함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개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몹시 문제적인 인물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이 인물의 선택에 설득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사회적 위치가 높은’ 누군가는 그 인물을 불가해한 눈초리로 바라볼지언정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뒤집어 본다면 상대적으로 빈곤한 가정에서 자란 청년들은 오직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이 기르는 개만도 못한 삶’의 위치를 강요받고 있다는 뜻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소설이 이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이 말하기가 아닌 보여주기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빼어나다고 칭찬드리고 싶습니다. 박낙타 작가님은 스스로 탐구한 사회적 진단을 섣불리,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밀하고 생생한 하나의 이야기로 변환하여 독자에게 가상의 한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자유롭게 사유해볼 여지를 갖게 되고 소설과 다양한 교감을 하며 인식의 영역을 확장해나갑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비문학과 구분되는, 문학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scholasty <흰 뼈와 베어링>
냉소적인 분위기의 파토스를 사용해 쉽지 않은 주제 의식을 다루고 만듦새는 끝까지 적정하게 유지한 기량 뛰어난 소설이었습니다. 인간을 점차 닮아가는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와, 그 소프트웨어를 받아들이는 데에 차이를 보이는 인간들,  나아가 미래 사회에서의 인간성까지, 모두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경량화되어간 한국 SF의 추세를 정면으로 역행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저는 <흰 뼈와 베어링>을 반갑게 읽었습니다.
다만 소설의 완성도 면에서 심각하지는 않으나 분명한 약점이 두루 있다는 점을 애정을 가지고 지적해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소설의 세계관을 떠받치는 설정이 너무 요약되어 서술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나나라는 인물의 배경, 레미-1의 설정,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2029년의 한국 상황 등이 축약적으로 전반부에 쏟아져나와 일종의 설정집이 소설 초반에 제시된 느낌이었습니다. 둘째로 인물들이 서사 연결고리의 부품처럼 행동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슬로우 조’와 ‘현동’은 소설에서 일종의 짝패로 이어져 있는데, 이것이 드러나는 절정 부분에서 나나가 약간 뜬금없게 슬로우 조를 호명하고 흉내를 냅니다. ‘어쩐지 옛 추억에 갑자기 빠지기라도 했는지’라는 문장으로 나나의 행위 동기를 화자가 설명하고는 있으나 저는 개연성 면에서 조금 의아했고 얼마간 작위성이 느껴졌습니다.

쟁뉴 <운우지정>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 관계 등의 소수성을 환생이라는 소재를 통해 탐구하고 또 옹호하는 소설입니다. 따뜻한 동기를 지닌 소설이라는 점에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상투성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서사가 마음에 걸립니다. 소설 내에서 언급된 것처럼 ‘서점에 가서 아무 책이나 펴면 나올 법한 이야기’를 긴 분량으로 나열하는 것보다는 작가만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제는 사회적 소수자를 말하는 주제 역시 많이 반복되어온 것에 속합니다. 소수자를 위한 문학의 노력이야 끝이 없어야겠지만, 비슷한 주제와 소재를 몰개성하게 반복하는 방식이 과연 현실의 소수자를 돕는 일일지는, 저는 회의적입니다. 작가만의 깊은 사유와 성찰, 혹은 현실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연구, 개인만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경험 등이 더 동원된다면 좋겠습니다.

가가 <농담의 지평선>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와 사건을 통해 독자를 매료시키는 실험적 장르 소설로 읽혔습니다. 어찌 보면 성인을 위한 기이한 동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흥미를 자아내는 ‘도시’라는 공간, 융과 앨리스의 묘하게 빠져드는 형이상학적인 대화 덕분에 소설이 자체적으로 독특한 재미 요소를 갖춥니다. 다만 전반부의 흐름은 이야기의 밀도가 낮아 흥미가 떨어졌습니다.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묘사를 줄여 서사의 속도감을 확보하시는 걸 권장드리겠습니다.

리소나 <사라진 시간>
우주적 존재에 대한 음모론과 정신질환 사이의 대립 구도로 이뤄진 서스펜스 장르 소설입니다. 이러한 소설이 독자의 마음을 성공적으로 사로잡기 위해선 서사 내내 독자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줄 강렬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제시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라진 시간>은 대부분의 이야기가 화자의 심리 묘사나 일상적인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어 팽팽한 긴장감을 기대한 독자라면 그것을 즐기기가 어렵습니다. 예컨대 <사라진 시간>에서 화자가 휴대전화 동영상 촬영을 통해 8:00pm-10:00pm의 시간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행동은 말미에서나 겨우 일어나는데, 이런 행동은 작품의 말미가 아닌 초반부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편이 개연성 면에서도 훨씬 설득력이 강하고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하기에도 알맞을 것입니다. 좀 더 과감히 장르의 재미를 더해보신다면 좋겠습니다.

성훈 <사육제>
성훈님의 소설은 전통적인 한국 소설의 특성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듯합니다. 주제 의식이나 서사의 완결성보다는, 미려한 문장에서 오는 언어의 마술성과 작품 전반에 스미는 파토스에 더 치중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탐미주의 문학을 제법 좋아합니다. 근래에는 계간지 ‘긋닛’ 1호에 실렸던 이상우 작가의 <졸려요 자기>를 무척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탐미주의를 옹호하는 시선으로 보더라도 <사육제>는 문제가 많은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화자와 ‘류’의 에로틱한 관계를 묘사한 뒤 관동대학살을 은유하는 듯한 화자의 환상으로 이어지는데, 이런 에로틱한 파토스와 비극적 역사는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결코 같이 붙여두어선 안 되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슬래셔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이 나오기 전에 야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목적이 뻔한 장치가 이 소설에서도 사용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클리셰만으로 이미 나쁜 상황에서 대체 왜 무게감 있는 역사 사건까지 집어넣으신 건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미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보완이 필요해 보입니다.

담장 <세상에서 가장 파란 파랑> <안녕, 디오라마> <스윙바이 온칼로>
세 작품 모두 과감한 상상력과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막힘없이 즐겁게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은 잘 쓰이지 못할 경우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제시한 방대한 세계관에 언제나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작가가 짜놓은 세계관이 엄밀한 법칙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면, 독자는 그것이 가상의 세계임을 알면서도 충분히 몰입하여 생생한 추체험을 겪으며 독서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를 ‘핍진성이 높다’고 표한합니다. 반대로 작가가 짜놓은 세계관이 엉성한 토대 위에 있다면 독자가 소설에 몰입하고자 해도 그 토대의 엉성함이 소설이 가상의 이야기임을 끝없이 반추시키는 탓에 독자는 번번이 현실 바깥으로 튕겨 나오게 됩니다.
담장님의 소설은 재미와 날카로운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겁게 다가오지 못하고 가볍게 휘발되고 맙니다. 이는 소설을 떠받치고 있어야 할 현실성, 핍진성, 고증 등의 정밀한 장치가 아쉽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부분을 개선하신다면 더 좋은 작가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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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훈 23.08.17 11:15 댓글

    좁다란 문학적 안경과 그에 대한 자기방어를 에둘러 포장하셨군요.

     

    나 역시 탐미주의를 옹호한다, 어느 작가의 무엇이 감명 깊었다, 하는 식의 구실을 미리 적느라 평의 절반을 할애하시면서요.

    그렇게 심사 방식에 얼마만큼의 객관성, 개방성이 확보되리라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 정도 군색한 행간의 부정적인 기류 정도는 느낄 줄 압니다.

     

    저는 평소에 제가 쓰는 글에 대한 그 어떤 악담도 감사히 잠자코 듣는 편입니다. 악평은 악평대로 배울 점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신의 억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문제가 많군요.

    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하여, 이런 소리를 구구절절 써내리는 지금의 제 구차한 형국을 감출 수 없는 것처럼요. 그러한 태도는 마치 자신을 향한 비판은 미리부터 회피하려 하고, 타인을 향한 비판은 필요 이상으로 대범한 듯이 보입니다.

     

    써주신 평, 곱씹어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무래도 그 안에 자기 불쾌의 표현 말고는 읽을 수 있는 다른 어떤 내용물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그 점에 진솔하셨더라면 저는 침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호오로서의 미와 추, 윤리와 비윤리를 명백히 가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주관을 마치 문학 세계의 보편적인 규범(그런 게 과연 존재한다면)인 양 겉치레하는 평을 읽자니 이렇게 군소리를 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었습니다.

     

    에로틱한 파토스와 비극적 역사는 '결코' 같이 붙여두어선 안 되는 종류의 것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만, 현대 소설의 영역에서 절대 불가의 판정을 그리 쉬이 내려도 괜찮은 것입니까?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궁금증입니다. 작자의 의도가 어떻든 개인적인, 사회적인 호오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러나 '이것'과 '저것'은 결코 같이 붙여두어선 안 된다. 평이 그렇게 끝나도 되는 것입니까?

     

    구질구질하게도 제 글에 대한 수다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말씀처럼, 저는 탐미주의적 쾌락과 역사적 비극을 함부로 갖대었습니다. 

    지금의 만연한 쾌락주의가 어느 피 구덩이 위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인지 그리 곱지 못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위안부, 강제징용, 수탈과 고문, 민간인 학살. 저는 그것을 부드럽고 상냥한 방식으로 정제하는 기술을 알지 못합니다. 믿기 힘는, 그러나 엄연한 총검의 살육과 그로 인한 선험적 공포는 안온한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로서는 비현실적이리만큼 야만적이기에,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외계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일상의 에로스와 역사의 잔학을 붙혀두었을 때 꺼림칙한 위화감이 드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학살이 오직 직업 시험과 자격증의 문제가 된 시대입니다. 역사의식과 피해의식은 점차 유의어가 되어가고, 경제의 성장을 위해 이제는 스스로 용서하고 잊어야 한다는 해괴한 주장들도 분분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지 피 칠갑한 죽음의 기억에 역사라는 근엄한 이름을 붙여 생활의 가장자리에 유골함처럼 치워둔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형식으로써 오직 비참한 역사를 소비하고 싶은 바람이지요. 그렇듯 고통의 기억은 적당히 둘러대며 외면하지 않고서는 신경쇠약에 빠져 짧은 여생을 탐미할 수 없게 됩니다. 역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곁에 두고서 여행지 호텔 방에서의 방탕한 섹스 같은 것, 도무지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소설 속 거북스러운 위화감은 그 비틀린 틈에서 작동합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스토리일 테지만요. 저는 적어도 포르노그래피적 흥밋거리를 위해 역사의 참혹을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에로틱한 현대의 낮과 역사 속 야만의 밤은 동시 현현할 수 있습니다. 미와 추, 옳고 그름과 일말의 관계도 없이. 그런 식으로 인간은 연명하고, 또 종의 위기를 자초하는 부조리한 국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현실이 그러한데 허구의 세계에서 어째서 예단의 손바닥을 섣불리 내미시는지요?

     

    그런데 이 심사평이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요즈음 역사 인식에 대한 가식과 도외시의 반영을 보여줍니다. 민족적 상흔은 성역, 현대의 에로스는 죄악. 어찌 죄악을 가져다 성역을 모독하느냐? 어쩌면 그런 훈계일까요? 슬래셔 무비의 클리셰로써 이미 나쁜데 대체 왜 역사 사건까지 집어넣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씁하셨습니다. 이 역시 다만 불편하다는 입장이겠지요. 그렇다면 불가해는 저의 책임입니까, 아니면 그쪽에 계신 분의 경향성에 달린 문제입니까? 말미에 미학과 윤리의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미학이야 따지고 싶지 없지만, 굳이 윤리를 언급하신 것에 대해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거기에서 어느 원론주의자가 이단자에게 느낄 법한 불경함이 비칩니다. 이편에 나의(혹은 집단의) 윤리가 있고, 저편에 그것에 반하는 소설이 있다. 그러한 거부 의지와 폐쇄성 같은 것이 전해집니다. 그것은 일면 사회 속의 도덕적인 구성원으로서 취할 수 있는 온당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다만 묻고 싶은 것은, 소설은 보편과 도덕에 더 가까이 하는가요?

     

    그저 제 기술과 방식이 미흡하고 생소하여 불쾌를 유발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점에 대한 지적은 사설이 필요 없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과 '저것'이 결코 함께 적혀서는 안 된다는 억설만큼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 동의 따위 아무런 상관 없다 해도, 닿지 않는다 해도 저는 말하겠습니다. 불쾌와 금지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불쾌는 마음의 일이지만 금지는 강제력입니다. 저의 무엇을 제한하시렵니까? 제 이야기가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전반적인 취지에 적합하지 않다면, 저는 아무 할 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심사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창작의 정체성 그 자체를 부정하려 든다면 그러한 심사는 어째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까?

     

    적고 나니 막상 허망하여 그냥 뒤로가기를 누를까 갈등이 됩니다.

    필시 더 깊은 의중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일이 상술할 만큼의 한가로움은 없으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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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holasty 23.08.18 21:43 댓글

    안녕하세요~ 부족한 소설 읽어주시고 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 달에 제 소설에 대한 평이 올라오지 않을까 두근두근거리면서 계속 거울 웹진 들락날락거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나, 정말 있네요. 저한텐 잊지 못할 선물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부분들 생각해 보면서 계속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시고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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