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후보작 궤도 위에서 - 임희진

2023.01.15 00:0001.15

궤도 위에서

임희진

 

<시작>

우리가 부부가 된 것은 사고 때문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속도위반이나 그런 사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사고’다. 그 사고 이전에 남편과 나는 그다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학교 선후배였고, 당시에는 직장 동료였을 뿐이다. 서로 얼굴도 알고, 인사도 주고받기는 했지만, 아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관계였다.

우리는 인간을 화성에 보내 거주시키는 첫 번째 프로젝트에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많은 시간을, 아마도 여생 모두를 화성에서 보내야 했으므로, 결혼했거나, 결혼할 커플들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모집했다. 나는 오랫동안 사귀면서 당연히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남자친구와 함께 지원했고, 우리는 당당히 예비 화성 거주민 1군 후보가 되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2군에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우리를 대신해 화성으로 출발할 것이었다.

훈련이 진행되던 중 그의 여자친구가 갑자기 팀에서 나갔다. 많은 사람이 그녀가 왜 떠났는지 궁금해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딱히 그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그에게 이유를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그는 혼자 남아 계속 훈련을 받았다. 커플로 우주선을 타는 것이 규칙이었는데, 그가 팀에 혼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납득할 만한 이유는 그동안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훈련을 시켰는데 혹시 모르니 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부가 될 것을 전제로 우주에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누가 자신과 별 상관도 없는 저 사람과 우주선을 타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발생했다. 내 남자친구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주말 술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다 계단에서 굴렀다. 전치 6주였나. 팔과 다리가 부러져 입원했다. 바보 같은 녀석이었다. 2주 후면 우리는 우주선에 올라야 했는데. 그 녀석 때문에 나의 화성행 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내 평생의 숙원을 그렇게 망쳐버린 남자친구가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우연한 사고로 내 인생에서 이런 멍청이가 빨리 사라진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 다행스러움은 그 뒤의 일들 때문에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지만 말이다.

우리 우주선이 출발할 무렵 세계정세는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주변국들의 눈치를 보면서 우리나라는 외우주로 우주선을 보내는 일정을 자꾸 미루고 있었다. 더 이상 일정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우습게도 예비 화성인 후보들은 짝짝이 신발처럼 1군에는 여자가 하나, 2군에는 남자가 하나 남아 있었다. 윗사람들은 그럼 둘이 보내면 되겠다는 간단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했지만, 당사자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항의를 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지구를 떠나 화성에서 거주하는 첫 인간이 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스스로가 이런 황당한 상황까지도 받아들이게 했다. 그와 함께 지내더라도 굳이 부부라는 상태로 지내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 모르지 않은가. 서로 같이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밀해질지. 우습게도 조선 시대에 얼굴도 모른 채 결혼하고 합방하던 어린 부부들 생각이 났다. 옛날에는 그러고도 잘 살았는데, 지금이라고 안 될 것은 무엇일까 싶었다. 내 평생의 꿈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 붙이며 우리의 출발을 정당화했다.

<1일>

화성행 우주인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 그와 내가 눈이 맞아서 상대의 예비 배우자들을 음해하여 쫓아냈다거나 하는 것부터, 원래 넷이 함께 섹스 파트너였다가 둘을 남기기 위해서 둘이 나가버렸다는 둥, 말이 되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것까지 다양한 헛소문이 난무했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의 여자친구가 나간 이유나 나의 남자친구가 입원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결국 "훈련하는 동안 서로 친밀해졌습니다."처럼 소문을 확인시켜주는 듯한 말도 안 되는 인터뷰와 공식 답변들로 우리 커플의 결합은 공식화되었다. 언론은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했지만, 결국 우리는 함께 우주선에 올랐고, 마침내 지구 공전 궤도로 들어섰다. 우주선은 그곳에서 지구를 도는 원심력을 추진력에 더해 방향을 잡고 가속하여 화성으로 향할 것이었다.

“3단계 성공했습니다. 궤도 확인 후 15분 뒤 최종 단계 점화합니다.”

관제사의 목소리 뒤로 우리가 지구 궤도에 무사히 올랐음을 알리는 환호성이 터졌다.

궤도에서 본 지구는 장관이었다. 해안선으로 이어진 육지와 바다는 모든 초록과 파랑을 동원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습관적으로 남자친구가 이 장관을 함께 하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일 초도 지나지 않아서 고개를 저으며 내가 미쳤나 했다. 그는 내 남자친구가 아니라 ‘전’ 남자친구였다. 그 멍청한 놈과 함께했다면 화성에서의 내 팔자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렇게라도 헤어진 것이 나에게는 분명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숙소가 아닌 우주선 안에서, 혹은 아무도 없을 화성에서 술을 먹고 전치 6주가 되었다면 그 뒷감당은 다 내 차지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남자친구 대신 내 옆에 있게 된 사람이 정말로 남편이 될지 그저 동료로 남을지는 몰랐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생각해 볼 때 모든 게 다 잘 될 것이었다.

4단계를 8분 6초 남기고 관제소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본부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는 안전한 건가요?"

"뉴스 보고 있는 사람 없어?"

우리 쪽으로 향한 통신은 켜져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없는 소음들에 이어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나는 황당해하면서 헬멧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통신에서는 지직거리는 잡음만이 계속되었다.

그가 먼저 안전띠를 풀고 지구가 보이는 쪽 창으로 다가갔다. 그의 헬멧에 가려 내 자리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도 자리에서 이탈하여 그의 반대편 창으로 이동했다. 우주선이 회전하면서 내 눈앞으로 지구가 나타났다. 시야에 들어온 지구는 아까 내가 본 환상적인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우주선이 있는 거리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거대한 버섯구름들이 육지의 많은 부분에서 곰팡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회색 구름은 모든 푸른색을 잡아먹을 듯이, 빠른 속도로 육지를 넘어 바다로 뻗어갔다.

우주에서도 보일 정도이니 지구 위의 상황은 뻔했다. 출발 전의 어수선한 상황이 결국 전면전이 된 것일까. 이렇게 갑작스러운 전 지구적인 파국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관제소와의 교신이 끊어진 상태에서 정확한 상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를 지구 궤도 밖으로, 화성으로 보내 줄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비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꿈의 한 장면처럼 변해가는 지구를 보면서,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라는 생각만을 되풀이했다. 화가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 전 남자친구 때문인 것 같았다. 자기가 화성에 가지 못하니 이렇게 나한테 복수하는 걸까.

황홀하게 빛나던 푸른 지구는 검은 먼지 뭉치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마지막 한 점의 푸르름이 사라져 버렸을 때, 지구 위의 많은 것들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제야 그 많은 것에 가족들과 내가 사랑하던 많은 것들이 모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가 똑똑하고 우수하다고 생각했지만, 바보였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도 바보였는데, 이 궤도 위, 좁아터진 우주선 안에 잘 모르는 어떤 남자와 둘만 덩그러니 남았다는 것도 한참 뒤에나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리 둘이 어떻게 될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의 꿈과 나의 사람들을 잃은 상실감만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2일>

산소와 기압이 기준 레벨로 올라온 것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우주복을 벗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관제소는 끝장난 건가…… 여기 계속 있어야 하나……"

내가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며 창밖의 회색 지구를 배경으로 둥둥 떠 있는 헬멧을 맥없이 돌아보고 있을 때, 그는 통신기에 쪽에 앉아 주파수를 바꾸기 시작했다. 딱히 할 일도 없던 나는 어깨 너머로 그의 시도를 지켜보았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지구상의 모든 통신을 잡을 기세로 한참 동안 주파수를 바꿔 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어떤 전파도 잡히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우주정거장에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쪽에 연결을 시도해 봐야겠어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말로만 듣던 우주정거장을 찾기 위해 그는 다시 조종석에 앉았다. 이런 일에 선발되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몇 시죠?"

내가 묻자 그는 당황하면서 계기판을 보았다.

"현지 시각으로 오전 3시 5분이요. 현지…… 관제실 기준이겠네요."

"밥시간이 한참 지났네요."

"아앗, 그렇네요. 뭐라도 먹을까요?"

어색함을 무마해 보려고 시작한 대화인데, 말을 꺼내고 보니 무척 배가 고팠다. 우주선을 발사할 때 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틀 전부터 굶은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우주선에는 화성으로의 여정에서 그곳에 도착한 이후까지 우리가 먹을 식량이 실려있었다. 짝짝이 커플을 화성으로 보낼 만큼 상식이 부족했던 윗분들도 한 쌍의 인간이 굶어 죽게 할 정도로 몰인정하지는 않았다. 엄청나게 배가 고팠던 우리는 그분들의 인간성이나 입맛에 대한 평가는 뒷전으로 던지고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꺼냈다. 때늦은 식사는 나의 기분만큼이나 맛이 없었다. 나는 배를 채우며 지구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아까 본 모습을 다시 확인하며 또다시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나의 선택은 창밖이 잘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였다.

"이제 어떻게 하죠?"

"글쎄요. 일단 굶어 죽지는 않겠죠. 여기서 평생을 보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평생'이라는 단어 하나에 잊고 있던 내 팔자 생각이 났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바람에 이 우주선이 나의 평생을 보내야 할 곳이 되다니. 돌아갈 곳도 나아갈 곳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직 중력이 형성되지 않은 우주선 안에서 눈물은 점점 커지더니 공중을 떠서 헤맸다. 자리를 잡지 못한 내 눈물은 마침내 작은 철썩 소리와 함께 그의 뺨에서 부서졌다. 그는 내 눈물에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 무중력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반동으로 그는 로켓포처럼 천정을 향해 날아갔다. 우주선이 뚫릴 듯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머리를 천정에 부딪친 그는 다시 그 반작용으로 다른 곳으로 튕겨갔다. 처음의 충돌이 엄청 아팠는지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인간 공이 되어 몇 번을 더 튕기다가 마침내 나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 나는 한 손으로 벽의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목덜미를 부여잡고는 낄낄거리기 시작했고, 그도 머리를 부여잡은 채 한참을 웃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이제 기분은 어때요?"

그도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는 숨을 돌리며 말했다. 자신보다 내 상태를 걱정해 주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좋았다. 어느 틈에 눈물이 마른 나도 그에게 미소를 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젠 괜찮아요."

"어휴. 이 무중력부터 해결해야겠어요."

그렇게 그는 미소와 함께 돌아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회색의 지구가 있었지만, 그와 함께라면 그런 지구라도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

"지구로 갈 수는 없을 것 같고, 화성으로 갈 수는 있을까요?"

"글쎄요. 필요한 계산은 모두 관제소에서 하는 것으로 했는데, 여기에서 가능할까요?"

"궤도에 갇힌 거네요."

"그래도 여기 있는 것들 덕에 살 수는 있겠죠."

"그렇긴 하죠."

그때 여전히 켜져 있던 통신기가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를 전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누구 있습니까?"

그는 엄청난 속도로 통신기 앞으로 이동했다.

"제네시스호입니다! 어디 신가요?"

"아, 사람이 있었어!"

상대편에서는 안도인지 기쁨인지 모를 웅성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여러 명이다.

"여기는 우주정거장 스테이션 나인입니다. 그쪽은요?"

"저희는 화성행 우주선 제네시스입니다. 관제소와 연락이 끊겨서 지구 공전 궤도에 남았어요."

우리는 반가움에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오래된 고향 친구들처럼 서로의 상황을 묻고 답하며 기쁜 목소리로 대화했다. 우주정거장에는 여자 둘에 남자가 넷, 모두 다른 국적을 가진 여섯 명이 타고 있다고 했다.

"보급품은 충분히 있으신가요? 그쪽 상황은 어떤가요?"

"저희는 충분합니다."

우주정거장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이 있나 봐.”

“보급품 여분이 있대?”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들이 계속 이쪽으로 들려오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갑자기 창피해졌다.

"저희는 식량이 4개월 치만 남아 있는 상황이라서요. 우주왕복선으로 올 보급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었네요."

"우리 쪽에는 충분한 식량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가네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우주선의 식량은 우리가 앞으로 60년을 더 산다는 가정하에 실려있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산수 계산을 해서, 사람 수가 여덟 명으로 늘면, 그 햇수는 사 분의 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15년만 살고 모두 같이 굶어 죽으려는 건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비이성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니. 황당하기가 그지없었다.

"우주정거장에 도킹 장치는 있지만 이동에 사용할만한 연료나 로켓이 없습니다. 그쪽에서 이쪽으로 와야 합니다."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네요."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지구를 돌고 있던 우주정거장이 지구 너머로 사라지면서 통신이 끊겼다. 통신기를 끈 후, 나는 계산 결과를 들이밀며 그에게 따졌다. 그는 같이 굶어 죽더라도 그쪽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지금 우리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동정하냐며 화를 냈다. 우리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을 좁히지 못했다. 그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무슨 방법이 생각나지 않겠냐며 밀어붙였지만, 결국 내 몫의 식량은 내놓지 않기로 결론을 지었다. 몇 시간 후 다시 우주정거장 클라우드나인과 통신이 가능해지자 그는 나를 흘끗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뭐라 혼자 중얼거리더니 통신기를 켰다.

식량을 나누는 일 때문에 다툰 후, 그는 가능하면 나와의 대화를 피했다. 대신 그는 우주정거장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서로 만날 방법을 고심했다. 그가 나를 쏙 빼놓고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상했다. 비현실적으로 좋은 사람인 척하는 그는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고, 화성행이라는 일생의 목표를 잃고 헤매는 와중에 나 자신의 인간성의 바닥을 드러낸 이 상황도 너무 싫었다. 이들의 계획이 잘 진행되어 정말로 저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면 이 식량 배분 상황에 대해 나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어쩌면 지난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돌리고 나도 사람 좋은 척을 하며 내 몫을 모두 내놓고는 뒤에서 그들 모두를 욕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머리가 아파져서 이쪽이나 저쪽이나 전부 지구로 떨어져 불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못되고 막된 내가 싫었고, 나에게 냉담한 그도 싫었으며,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 우주정거장도 싫었다. 양심상 모두 다 죽게 만들 수는 없으니, 나 하나만 없어지면 쉽게 해결이 날 것도 같았다. 우주복 없이 에어록에 들어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몇 초 안에 간단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홧김에 정말로 그 일을 저지를 것이 두려워져서 가능한 에어록에서 먼 곳에 자리를 잡았고, 일부러 그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7일>

그는 우주정거장의 일로 바빠서, 나는 스스로의 우울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둘 다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식사도 거르기 일쑤였다. 그때의 시간은 일 초가 일 년 같기도 하고, 하루가 일 초 같기도 했다. 마침내 그 시간의 끝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당혹스러운 좌절이었다. 우리 우주선과 그쪽 우주정거장이 가진 것으로는 서로가 만날 수 없었다. 지구를 기준으로 우리는 그들보다 더 먼 쪽 궤도에 있었기 때문에 도킹하려면 우리가 그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렇지만 우리를 먹여 살릴 식량을 실으면서 필요한 모든 계산을 수행할 머리를 관제소에 맡기고 떠나온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추락이나 충돌의 가능성이 더 큰 도킹은 시도할 수 없었다. 무모한 노력은 우리와 우리의 식량을 모두 별똥별로 만들어 지구로 던져버릴 테니까. 우습게도 갑자기 나보다 그들의 불행과 좌절이 더 크게 보이니 내 상황이 괜찮게 느껴졌다. 최소한 우리는 기아의 끝에서 누구를 먼저 잡아먹을까 고르는 비인간적인 고민 같은 것을 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16일>

그와의 어색한 시간이 길어졌다. 이미 우주정거장과 관련한 식량 분배 건은 없던 일이 되었지만, 내 인간성의 바닥을 보여준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가 받았던 '우주인을 위한 갈등 해결 방법' 같은 제목의 훈련 과정은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쨌든 계속 함께 지내야 하니 그 불편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버려야 했다.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한 것 같아요. 일이 이렇게 될지 몰랐어요."

마음속으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에 없는 사과라도 시작해야 했다.

"사과는 내가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때 너무 흥분하기도 했었고.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것을 그쪽 탓을 하고 있었거든요."

"네?"

"그렇게 생각해서 죄송해요. 뭐든 탓하고 싶었나 봐요. 아닌 걸 알지만 그렇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저 인간도 나와 비슷한 부류라는 생각에 조금 안도가 되면서도,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죠."

나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말보다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다.

"차 드실래요?"

차를 가지러 돌아서면서 억지 미소를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각자의 손에 따뜻한 차를 들고 따스한 김에 얼굴을 묻으며, 이 따스함이 우리의 냉랭했던 시간도 날려 보냈으면 하고 바랐다. 만날 수 없어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싸우고 난 아이들이 다시 친해지는 것처럼 조금은 가까워졌다.

<108일>

우리의 우주선과 그들의 우주정거장은 여섯 시간에 한 번씩 먼 반짝임으로 서로를 직접 볼 수 있었다, 통신상에서는 기쁨을 가장하며 하이톤으로 대화했다. 그 즐거움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 그렇게 상태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우리와의 통신을 완전히 끊어버렸고 이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때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리 궤도 위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우주정거장이 여섯 시간에 한 번씩 보인다. 그들의 연락 두절은 우리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통신이 끊길 때까지 우주정거장과의 연락은 그가 도맡아 했다. 그들은 우리의 다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괜히 미안한 기분 때문에 나는 그들이 나의 안부를 물을 때나 한 번씩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곤 했다. 그들은 언론에 나왔던 대로 그와 내가 부부가 될 커플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는 우리가 사실은 그저 직장 동료일 뿐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그는 우리 커플에 대한 그들의 수위 높은 얄궂은 농담들을 재치 있게 넘겨주었고, 내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잘 대처해 주었다. 그들과 식량을 나누자고 주장했던 그가 오지랖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그는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주정거장과의 연락이 끊긴 지 한 달이 되어갈 때쯤, 그는 우울한 분위기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회색 지구를 배경으로 우주정거장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를 위로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돌아봤고,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커피 마실래요?"

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살짝 미소를 띠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미소와는 다르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내 입이 원망스러웠다. 커피는 조금 전에 마셨는데. 우리가 기대하는 게 뭔지 자신도 알지 않니. 이제 슬슬 진도를 나가보라고.

"네, 고마워요."

좋은 사람이다. 왜 그의 여자친구는 이런 그를 떠났을까? 팀 내의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녀와 함께 나의 전 남자친구 생각도 났다. 그는 내가 자기에게 해 주는 일에 한 번도 고맙다고 인사한 적이 없었다. 지구는 멸망했지만 나에게 고맙다고 말할 줄 아는 남자라니.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출발했지만, 그라서 다행이었다.

그의 손에 커피를 쥐여주면서 두 손으로 살며시 그의 손을 같이 쥐었다. 그는 살짝 움찔했지만 내 뜻을 알았는지 다른 손을 들어 내 손을 덮었다. 여기까지는 용기를 냈지만 어색한 느낌을 덜어낼 수가 없어서 슬그머니 손을 빼고 그가 내다보던 창가에 함께 앉았다. 다리가 저려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을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다리가 아파 일어나려는 순간, 그가 창에 비친 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쥐가 날 때까지 앉아있었던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차분하고 기다릴 줄 아는 남자였다니. 멋졌다. 창을 통해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눈 둘 곳을 찾아 허둥거렸지만, 그는 내 뒤에서 두 손으로 나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이 들키고 싶지 않아 살며시 팔을 돌려 그의 허리에 감았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 우리는 어느새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그를 이렇게나 원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 궤도 위에 그와 나 둘뿐이라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러운 것도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첫 키스를 했다.

남녀상열지사는 결국 모두가 아는 그렇고 그런 일들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 궤도 위 우주선에는 우리 둘뿐이었고, 눈치를 보거나 질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칠 때까지 서로의 몸을 느꼈고, 모든 감정이 다 타버릴 때까지 서로를 사랑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배우자가 될 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여자친구가 왜 사라졌는지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는 내가 한심한 전 남자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그동안 우리가 왜 그렇게 서로에게 무관심했는지, 왜 지금까지 서로 알지 못했는지를 이상해했다. 그저 서로가 서로의 천생연분이라는 것에 만족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진짜 부부가 되었다.

<215일>

시스템 알람이 들어왔다. 우주선 외부의 통신 안테나에 문제가 생겼다는 빨간불이었다.

"어차피 연락 올 데도 없는데 꼭 나가서 고쳐야 할까요? 위험하잖아요."

지금 고쳐야겠다는 그의 생각에 대단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선외로 나가 본 적이 없으니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고쳐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주정거장 사람들이 연락을 끊은 후에도 여전히 통신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꼭 지금 안테나 수리를 해야겠다고 우겼다.

"작은 고장을 그냥 두면 큰 고장으로 바뀔 수도 있잖아요."

이건 맞는 말이다. 집도 계속 살아가려면 유지 보수를 해야 하듯 우주선도 우리가 평생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수리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첫 번째 선외 활동을 위해 에어록으로 향했다.

예전에 내가 식량 분배 건으로 그와 다투었을 때, 내가 홧김에 누를까 봐 두려워 피했던 바로 그 버튼을 누르고는 에어록 문을 열었다. 사실 에어록은 두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에어록 버튼을 누른다고 해서 바로 우주로 날아가지는 않는다. 당연히 몇 개의 안전장치가 더 있고, 최종적으로 확인을 한 후에야 외부로 나가는 해치가 열리게 되어 있다. 선내와 연결된 에어록 문은 선외활동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일종의 탈의실과 연결된다. 그다음 방은 선외로 나가기 전에 공기를 빼고 외부의 진공에 맞추어 압력을 낮추는 감압실이다. 탈의실에는 그와 나의 이름표 아래에 선외활동복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마침내 헬멧까지 모두 장착한 우리는 감압실로 향했다. 꼭 이렇게 비장하게 나가야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첫 선외 활동인 만큼 두근거리는 긴장감을 가지고 해치를 열었다.

해치 밖은 낭떠러지 같은 어둠이었다. 안전한 선내에서 작은 창으로 내다보던 것과는 또 다른 우주였다. 우리는 안전줄을 포함해 모든 것이 정상임을 확인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해치 옆의 손잡이를 하나씩 차례로 잡으면서 이동했다. 해치는 우주선의 머리 쪽에 있었고, 해치 근처에 통신 안테나가 있었다. 손잡이를 잡으며 이동할 때는 상당히 멀게 느껴졌지만, 안테나는 사실 거의 코앞에 있었다.

"여기 선이 빠져 있네요. 잔해나 운석에 맞았나 봐요."

"다시 들어가서 뭘 더 가져와야 하나요?"

"그냥 다시 끼우면 될 것 같아요."

선외활동복은 입은 사람의 생명 유지에는 최적인지 모르지만, 너무 둔하고 무식해서 이불을 둘러쓰고 수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선외활동복을 설계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그걸 입고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그 둔함에도 그는 빠진 전선 가닥을 어떻게든 찾아 잡고는 제 위치에 끼우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건 된 것 같아요. 근데 나온 김에 제트팩 시험해 볼래요?"

뭘 하겠다고? 할 일이 끝났으면 돌아가야지, 계획에도 없던 일을 왜 하겠다는 건지. 내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트팩을 켠 모양이다. 처음에 그는 바람을 제대로 타지 못한 연처럼 안전줄 끝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의 불안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하면 그를 다시 잡아 올 수라도 있을 것처럼 손잡이를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꽉 쥐었다.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제트팩의 사용법을 익혔다.

"이거 정말 신나는데요! 한 번 해봐요!"

"아뇨, 전 그냥 우주선에 붙어 있는 것에 만족할래요."

"하나도 안 무섭다고요. 놀이 기구 타는 것 같아요."

나는 놀이 기구 타는 것도 안 좋아한다. 무서운 것보다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내 몸이 뒤흔들리는 것이 싫어서이다.

"먼저 들어가서 경고등이 꺼졌나 확인할게요."

내 말에 그가 마지못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제트팩을 써서 순식간에 이동한 그는 나보다 먼저 해치 앞에 도착했다. 그의 말대로 나름 재미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만큼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이곳에 사는 동안 종종 나오게 되겠지만 재미로 우주 공간을 유영할 일은 없으니 내가 제트팩을 사용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는 밖에 나올 때면 재미 삼아 한 번씩 사용할 것 같지만 말이다.

<371일>

"렌치 좀 갖다줘요."

"지금요?"

그가 싫은 티를 냈다.

"지금 다른 일 없잖아요. 렌치 좀 갖다줘요. 여기가 좀 조여야 하겠어요."

그는 입을 꾹 다물며 렌치를 가지러 갔다. 그리고는 나에게 집어던지듯 렌치를 건네주었다. 오른손 집게손가락이 렌치에 부딪혔고, 꽤 아팠다.

"아야. 살살 해요."

"받는 사람이 잘해야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바쁘지도 않으면서 이런 건 왜 시키는 거야."

그가 앉아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왜 그렇게 예민한데요?"

"제가 뭐라고 했어요? 오히려 그쪽이 예민한 것 같은데요."

"바쁘지도 않은데 시켰다고 했잖아요."

"하, 생각도 못 합니까. 어쩌다 보니 생각이 밖으로 나왔나 보죠. 들었으면 미안합니다."

분명히 일은 내가 하고 있는데. 괜히 시비다.

"일은 제가 하고 있는데 바쁘지 않다뇨. 아무것도 안하고 멍하니 있는 사람한테 물건도 갖다 달라고 못 하나요?"

"제가 멍하니 있었다고요? 저야말로 바빴다고요. 직접 계산기로 계산해 보시죠."

"그럼 아까 바쁘다고 했으면 됐잖아요. 제가 일하는 데 다른 일을 시킨 적이 있던가요?"

"어차피 저보고 가까우니까 가져오라고 했을 거잖아요."

그랬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짜증을 낼 일인가 싶기는 하다.

"아 됐어요. 그만하죠."

자기 맘대로 시작하고는 나더러 그만두란다.

"되긴 뭐가 돼요. 그리고 뭘 그만 해요."

"이쯤에서 그만하자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돌아서던 그가 또 혼자 중얼거린다.

"이러나저러나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서."

"뭐라고요? 오늘 대체 왜 그래요?"

"내가 뭘 했다고 자꾸 시비예요!"

다중인격인가? 자꾸 혼잣말을 하며 내 화를 돋우는 그는 살짝 미친 것 같았다. 아니, 혼잣말을 하는 척하면서 나에게 화를 내는 건가? 어느 쪽이든 제정신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둘밖에 없는데 하나가 미쳐나가면 어쩌란 말인가. 나까지 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오늘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아픈 손가락으로 렌치를 돌리고 있자니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왔다. 아니 이런 걸 보면서 고칠 생각도 안 하면서 기껏 내가 일하는데 왜 시비람. 점심때가 되어 슬슬 배가 고파져서 더 짜증이 나는 것도 같았다. 기분 나쁜 자는 그냥 두고 나는 밥이나 먹지 싶어서 급식기에서 메뉴를 하나 골랐다. 식판을 들고 돌아서니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창가에 앉아있었다. 보통은 그의 자리에 함께 앉아 식사했지만, 오늘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별로 현명한 일 같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른 구석에 앉아 점심을 먹었고, 그는 굶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있는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밥도 먹지 않고 온종일 그 자리에 꼼짝 앉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오후를 지나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점심때처럼 나는 급식기에서 저녁 식사를 하나 받았고, 점심을 먹었던 곳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계산기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대단한 소리를 내며 아까운 계산기가 박살이 났다.

"대체 뭐예요?"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제가 뭘 무시했다고요?"

"여기 사람이 몇 명이나 더 있다고.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되는 겁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서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밥 안 줬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제가 여기에서 밥 주는 사람도 아니고, 계속 골을 내면서 있는 사람을 상대 해 봐야 제가 좋은 소리 듣는 거도 아니잖아요. 제가 애 달래듯 그쪽을 달래주고 밥을 먹여야 하나요?"

"그쪽이 먼저 화를 돋워 놓고는 무시로 일관하는 건 잘하는 겁니까? 사과를 하던 일을 돕던 성의를 보였어야죠."

"별것 아닌 걸로 그쪽이 성질을 부려서 다친 건 나라고요. 지금 화를 내야 하는 건 이쪽인 것 같은데요."

"아 됐어요. 본인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화를 내는 사람이 바보지."

그에게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자기 개인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씩씩대면서도 저녁을 마저 먹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적은 없었다. 저렇게 안하무인에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라니. 내가 앞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저 사람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몹시도 분했다. 대체 내가 뭘 했다는 말인가. 화를 내기에 그저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우주선 밖으로 날려버릴 인간은 내가 아니라 그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자기 집에 숨어버린 개를 끌어내 봐야 물리기밖에 더 하겠냐 싶은 생각이 들어 그의 방문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자러 들어가기 전에 그가 종일 앉아있던 자리에 가 보았다. 그렇게 불퉁거리며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테이블 위에는 궤도를 계산하던 흔적이 있었다. 그는 화성으로 가는 길을 계산하고 있었다. 제한된 정보로 여러 가지 가정하에 계산된 그의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이곳에서 출발하여 약 50일이면 화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여정에는 제약 조건이 많았다. 순수하게 우주선의 에너지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거리였기 때문에 지구의 궤도를 돌면서 얻은 각운동량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어느 정도의 힘으로 궤도를 빠져나가야 할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화성에 안전하게 안착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숫자는 전부 미지의 것들이었다. 순간 이 미지수들 때문에 그가 화가 나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아마도 오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어떻게든 우리가 이 궤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이 궤도에 처음 갇혔을 때 느꼈던 절망을 그는 인제 와서 느낀 것일까. 내일은 그를 보면 오늘보다 좀 더 참아줄 수 있을 것 같다.

<372일>

오전이 다 가고 점심이 될 때쯤 그가 자기 공간에서 나왔다.

"토스트 먹을래요?"

"네, 고마워요."

나는 급식기에서 그의 점심 메뉴를 꺼내며 그에게 말했다.

"어제 계산하던 걸 봤어요. 일부러 보려던 건 아니고, 치우다가 본 거예요."

"아, 네……"

"온종일 기분 나빴던 게 그것 때문이었어요?"

"......"

"요즘 지구 본 적 있어요?"

"매일 보긴 하죠. 대충이지만."

"구름이 좀 걷히는 것 같아요."

그 얘기를 듣고 그가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언제부터인지 지구의 회색 구름 사이로 흰색과 푸른색의 얼룩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폭발이 있은 지 거의 일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간을 견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도 조금씩 비쳐 드는 태양 빛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아래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우주선이 이 궤도에 오른 이래로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질문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 궤도 위의 나에게는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살아남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내게 닿을 수도 없는 사람들은 살아있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더 있다면 좋겠다. 클라우드나인처럼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회복되는 지구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그런 사람들이.

<728일>

그는 항상 통신기를 켜고, 나는 항상 끄곤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켜고 끄는 일로도 싸우곤 했는데, 최근에는 서로 그러려니 했다. 그는 어디에서든 살아있는 존재의 신호가 잡히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떤 신호라도 잡히기만 한다면, 그는 그게 인간이 아니더라도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빈 채로 지직거리기만 하는 노이즈 소리가 싫었다. 귀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소리에 홀려서 갑자기 우주선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통신기를 끄곤 했었지만, 그날 이후로 다시는 끄지 않았다.

그날도 지직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 전원을 끄기 위해 통신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전원 버튼에 손을 올렸을 때,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작동되는 건가?”

나는 깜짝 놀라 버튼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얼어붙었다. 몇 초인지 그렇게 있다가 마이크를 켰다.

“여, 여보세요? 누구세요?”

“우와! 이거 되네!”

문득 2년 전 우주정거장 클라우드나인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미 죽었을 텐데. 내가 마이크를 붙잡고 어리바리하게 있는 사이, 그가 소리를 듣고 잽싸게 다가와 나와 마이크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화성행 우주선 제네시스호입니다!”

처음에는 이 근처에 우주정거장이나 우주선이 또 있나 했다. 알고 보니 우리와 닿은 사람들은 지구 위에 있었다. 조금씩 걷혀가는 회색 구름 아래에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 우리는 다른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꽤 흥분했다. 그는 마이크를 먹어 치울 듯이 입에 대고는, 그곳이 어디인지, 지금 지구 표면의 상태는 어떤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아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우리와 대화하게 된 사람은 폴이라는 이름의 아마추어 무선통신가였고,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더 있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던 거리 밖에도 사람들이 사는지 궁금해서, 어쩌면 아직도 작동하고 있을 인공위성을 찾아 안테나를 세웠다고 했다. 그 사람의 끈기와 집착에 가까운 노력이 우리를 만나게 해 준 것이었다.

그 사람은 운 좋게 직격탄은 피했지만, 주변 환경은 많이 변했고, 당연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많은 것들, 특히 기술로 만들어진 수많은 것들이 사라졌고 운송 수단도 통신 수단도 없어서 사람들이 직접 오가면서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대폭발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적었지만, 요즘엔 하나둘씩 모이면서 작은 마을이 띄엄띄엄 생기고 있다고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다 보니, 그가 사는 지역이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가고 있는지 목소리가 지직거리면서 끊기기 시작했다.

“저희 우주선은 6시간에 한 바퀴씩 지구를 돕니다. 6시간 뒤에 다시 봅시다.”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폴의 목소리가 완전히 끊겼다.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었어!”

나도 기쁘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아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갈 수 없다.’

마음의 소리는 그 한 문장만을 외치고 있었다.

<812일>

그토록 원했던 지구 위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연락이 재개된 지 두어 달이 지났다. 그는 6시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그들과의 대화를 손꼽아 기다렸고, 1분 1초를 아까워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꼭 써야 하는 시간이 있다. 잠을 자야 했으며, 밥도 먹어야 했다. 여기에 우리가 절대로 게을리할 수 없는 우주선의 유지 보수라는 일이 있었고, 그들도 살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과 우리는 모두 24시간을 주기로 자고 깨는 인간들이었다. 그는 지상과의 대화만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기라고 하듯 이런 상황을 참지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한마디 했다.

“차라리 우리가 여기 있다고 방송을 하지 그래요.”

“그런 좋은 생각이 있었네! 역시 이래서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니까.”

이렇게 세상 낯간지러운 칭찬과 함께 그의 새로운 취미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말 할 수 있는 시간이라면 아무 때라도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실시간 방송을 시간이 날 때마다 했던 것인데, 일주일쯤 그렇게 방송을 하더니 힘이 들었는지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실시간 방송을 한 시간 한 후 몇 시간은 우주선에 실려있던 수많은 노래들을 틀었다. 가끔 폴이 연락해서 소식을 전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곡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렇게 하루에 몇 번 방송하는 것도 힘이 들었는지, 실시간 방공과 음악이 한 번 나갈 때 녹음을 하고, 하루의 남은 시간 내내 그것을 반복해서 틀었다. 이 방송에서도 그는 특유의 친절함과 오지랖을 보였는데, 1시간의 수다 방송에 3시간의 노래 방송을 붙임으로써 4시간에 한 번씩 방송이 나오게 했다. 우리로서는 하루에 방송이 여섯 번 나가는 것이지만, 조금씩 시차를 두고 재방송을 들을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 방송을 놓치는 안타까운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방송 시간표를 뿌듯하게 보여주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매일의 실시간 방송 시간을 폴과 접촉할 수 있는 시간으로 잡았다. 뭐든 혼자 하면 질리기 마련이지만, 폴과 그 마을 사람들이 함께하니 그는 지치지도 않고 방송을 내보냈다.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제네시스호의 셰브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궤도 방송은 그가 이곳에서 숨을 쉬는 동안 지구 위 사람들과 항상 같은 시간에 함께 했고, 그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 되었다.

<1,068일>

갑자기 시스템 전기가 일부 끊겼다. 알람을 보니 태양전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는 우주선이 지구 그림자로 들어간 후 전기가 끊어질까 봐 조바심을 쳤다.

"나가 봐야겠네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갔다 오죠."

레이더상으로는 우주선 주변에 특별한 것이 잡히지 않는 것으로 봐서 별로 크지 않은 잔해나 운석이 태양전지에 부딪힌 모양이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만 전기가 끊길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재수 없게 태양전지와 연결되는 부위 어딘가를 맞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선외활동복으로 갈아입고 안전줄을 확인한 후 해치를 열고 나갔다.

에어록은 우주선의 머리 부분에 있었고, 태양전지는 에어록 반대편, 말하자면 우주선의 꼬리 쪽 끝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줄을 최대 길이로 잡고 해치에서 나왔다. 그는 추진용 제트팩을 작동시키면서 빠른 속도로 태양전지로 향했다.

"천천히 가요!"

선내에서는 내가 더 빠른 편이지만, 밖에서는 그가 나보다 훨씬 빠르다. 그는 나보다 우주 유영에 더 익숙하고 잘하기도 하지만, 지금 저 속도는 너무 빠르다.

"좀 기다려요!"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나는 우주선의 옆면을 따라 사다리처럼 달린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이동했다. 그렇게 가는데 눈앞에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방향을 돌리고 있을 때 무언가가 퉁 하며 헬멧을 쳤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로 몸을 180도 돌렸을 때 저 멀리에서 반짝이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800미터? 정확한 거리도 정체도 모르겠지만 위험해 보였다.

"전방 약 800미터 정도에 미확인 잔해 무리 접근 중! 그쪽은 그냥 두고 빨리 돌아와요!"

"접근 속도는?"

"확인 불가! 에어록 방향에서 그쪽으로 빠른 속도로 접근 중! 귀환!"

태양전지 근처까지 갔던 그가 방향을 돌려서 갈 때만큼 빠르게 되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잡이를 하나 걸러 하나씩 잡아가며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해치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전방의 반짝이 무리는 내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다지 멀리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해치에 도착했다. 핸들을 돌려 해치를 열고, 발부터 에어록 쪽에 넣기 시작했을 때 열려있는 해치에 부딪히는 진동이 느껴졌다. 벌써 그 반짝이들이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고, 열려있는 해치가 방패처럼 그것들을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그가 도착하면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치를 열어 둔 채 머리를 빼꼼 내밀고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속도로 총알같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가 오는 속도에 맞추어 안전줄을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줄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그는 요요처럼 줄에 매달린 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셰브!”

대답이 없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고, 안전줄은 세이프티 록이 걸려버려서 더 이상 릴에 감기지도 풀어지지도 않았다. 이 상태에서 줄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그는 영영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내 안전줄을 확인한 후 해치 밖으로 다시 나왔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잔해들이 보였다. 우주선에 맞고 튕겨 나가는 것들도 있었다. 제트팩을 사용해서 우주 유영을 해 본 적은 별로 없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반대 방향으로 제트팩을 약하게 분사했다. 내 몸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분사 속도를 최대로 올렸다. 이제는 잔해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내 옆을 흘러갔지만, 그런 것을 구경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와 십여 미터 정도 남았을 때 제트팩의 출력을 줄이고 역방향으로 분사하기 시작했다. 그와 거의 닿았을 때 나는 제트팩을 던져버리고 그를 잡았다. 간신히 그의 손안에서 여전히 작동되고 있던 제트팩을 껐다. 그에게 도달하기까지의 몇 초가 몇 시간 같았다. 이제는 에어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안전줄을 내 옆구리의 고리에 연결했다. 그가 정신을 잃고도 손에 쥐고 있던 제트팩은 이제 내 손에 있었다. 눈앞에 아직도 드문드문 잔해들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모두 다 피할 수는 없겠지만, 에어록까지 도착하지 못한다면 저것들을 모두 다 피하는 것도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이판사판이었다.

‘어차피 죽으면 같이 죽는 거지.’

분사량을 최대로 올렸지만, 두 배로 늘어난 질량 때문인지 아까의 반 밖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에서 다가오는 잔해들은 우리의 속도만큼 빨라진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잔해들의 크기도 더 커 보였다.

작은 잔해들에 선외활동복이 조금 긁히긴 했지만, 다행히도 치명적인 문제 없이 해치에 도착했다. 나에게 매달린 그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를 다리부터 해치에 넣었다. 그의 몸도 내 손도 원하는 만큼 빨리 움직이질 않아 마음이 달았다. 마침내 에어록에 그를 성공적으로 욱여넣고, 나도 들어가 해치를 닫고 나서야 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대충 한구석으로 밀어 둔 후 나도 눕다시피 쓰러졌다. 실내압 경고 등이 꺼지자마자 헬멧을 벗어 던졌다. 잠시 그렇게 누워 있다가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급히 그의 헬멧을 벗겼다. 다행히 그는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인 그를 흔들면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셰브! 셰브!”

한참 만에 그가 신음하며 깨어났다.

“그만! 목 졸려서 진짜로 죽겠네요.”

그가 살아있다는 안도감에 나는 그의 목을 부여안고 한참을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3,525일>

이곳에 올라온 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폴과의 접촉으로 시작된 그의 방송도 꽤 오래되었다. 방송 시작 이후 무선 통신이 가능한 몇몇 사람들과 더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노래를 틀어주기도 하다가, 마치 생방송 청취자 참여처럼 우리와 연결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내보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여기에서 가지고 있는 수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요즈음 그가 읽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굴레'이다.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창밖의 지구는 여전히 회색빛이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예전의 색을 되찾아 가고 있다. 지구를 덮고 있는 구름은 처음에는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이었지만 점점 밝은 회색으로 바뀌고 있다. 얇아진 구름 사이로 바다로 추정되는 푸른색이 보일 때도 있다. 이곳을 떠나겠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버리긴 했지만, 지구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기쁘다.

<5,490일>

그가 갑자기 떠났다. 심장마비였을까. 그의 죽음을 직면하면서 뜬금없이 여기에는 왜 심전도기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끔 화가 날 때면 그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강제로 내 반려가 된 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죽고 나니 슬펐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지 간에, 그는 내 곁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숨 쉬고, 대화하고, 함께 밥을 먹을 사람. 이제 궤도 위에는 존재하는 살아있는 존재는 나 뿐이다.

그는 이곳에서 행복했을까? 그러고 보니 그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정말로 궁금한 것들을 묻지 못했다. 아마 그도 그랬을 것이다.

그가 떠난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갑자기 현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 시체는 어쩌지? 당장은 시체와 함께 같은 공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시체를 우주선 밖에 내놓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그도 나와 함께 이 궤도를 떠돌게 될 것이다. 평화롭게 차를 마시며 장엄한 지구의 장관을 감상하고 있으면 ‘짠!’하고 그가 창밖에 나타나고, 우리는 그렇게 하루 몇 번 씩 재회하겠지. 한 번 그렇게 만나고 나면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될 것이었다. 끔찍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는데 저 멀리 노랗게 빛나는 태양이 보였다. 그래, 화장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그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을 소각로 삼아 그를 화장하는 것은 꽤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멋지게도 그는 태양에서 화장된 최초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내가 우주선을 몰고 태양으로 돌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사람은 언제나 방법을 찾는다. 나는 우선 그에게 선외우주복을 입히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 우주복 따위 필요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우주복을 입히면서 우주복 속으로 그의 다리가 반도 들어가기도 전에 죽고 나서 바로 입힐 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사후 경직이 이미 시작되어 굳어버린 시체에 우주복을 입히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죽은 자의 팔다리를 몽땅 부러뜨려 구겨 넣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지성인이기에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낑낑대며 일을 마쳤을 때는 식사 시간도, 잘 시간도 훨씬 지났을 때였다. 내일의 계획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도 졸렸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했다. 결국 그렇게 시체를 선내에 둔 채로 하룻밤을 보냈다.

<5,491일>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가 아직 에어록에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제 정말로 그와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었다. 서둘러 나도 선외우주복을 입고 안전줄을 걸었다. 태양을 향해 가는 그는 안전줄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혼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둘이 같이 나가는 셈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살아있지 않으니 나 혼자인 셈이었다. 망망한 공간에 그렇게 홀로 있자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나와 연결한 줄을 떼어낸 후, 그의 발 쪽으로 분사구가 오도록 그의 가슴에 제트팩을 고정한 후 방향을 잡았다. 내가 제트팩을 작동시키면 그는 태양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고, 분사기의 연료가 바닥이 나더라도 관성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었다. 그런 현실적인 계산을 하면서 제트팩을 약하게 작동시킴과 동시에 그에게서 손을 뗐다. 그는 나와 우주선에서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어차피 지구 쪽으로 보냈어도 별똥별처럼 타버렸을 텐데, 내가 너무 힘든 방법을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벌써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가버렸다.

잠시 후 선내로 복귀했다. 문득 그를 위해 더 슬퍼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무엇을 위해? 그는 슬퍼하길 원했을지 몰라도 나를 위해서라면 잊고 이곳에서의 삶을 다시 꾸려가야 한다. 가끔 생각나고 가끔 외롭겠지만, 그가 계속 곁에 있었다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지냈지만, 심리적으로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으니까. 걱정되는 점이라면 혼자 오래 지내면 미쳐버린다는데 나도 그럴까 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미쳐버린다고 해도 아무도, 누구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신을 잃게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맞춰 놓은 방송 시간 알람이 울렸다. 비어있는 통신기 앞, 그의 자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가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켰다.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슬픈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어제 저는 반려를 잃었습니다. 심장마비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당연히 제가 죽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 둘이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진 않았어요. 다만 오랜 시간 서로만 바라보면서 지냈는데 이런 일이 닥치니 저도 너무 슬프… 으흑…"

말을 하다 보니 눈물이 차올라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마이크를 부여잡고 울고 있는데, 폴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운 내세요. 여기 우리도 있잖아요.”

방송을 듣던 폴의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는 그들의 하늘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위로를 받았다. 목소리만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내게는 그 사람들이 있었다. 지구 위의 불빛들을 보면서 저기에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지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존재감은 위로의 목소리를 타고 나의 존재를 압도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여러분 덕분에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어요. 남은 시간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일종의 추모식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다. 여기에는 우리 둘뿐이었으니, 서로 사랑하든 말든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둘이 함께 있었지만 완벽하게 충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의 공허를 각자 지니고 있었지만, 다만 서로에게 손은 뻗어 볼 수 있었다. 그게 우리의 사랑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는 내가 기억하겠지만, 나는 누가 기억할까? 내가 죽고 난 후, 어딘가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까지 기억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조금만, 일상에서 서서히 잊혀지는 정도로는 기억해 주면 좋겠다. 내 기억 속의 그처럼.

<7,305일>

가끔 나의 마지막을 생각해 본다. 언젠가 그때가 올 것이다. 그 순간은 괴로울까? 무서울까? 아니면 평화로울까? 나의 마지막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우주선 안에서 홀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아봐야 거대한 관 속에서 말라비틀어지는 시체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이 우주선을 발견하는 사람은 얼마나 놀랄까. 엄청난 식량과 함께 홀로 둥둥 떠 있는 시체라니. 공포 영화의 한 장면으로 써도 되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우주선을 지구 쪽으로 돌진시켜서 살아있는 별똥별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나에게도, 나를 알고 있는 지구상의 사람들에게도 너무 괴롭고 끔찍한 일이 될 테니까. 하긴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그렇게 마지막을 맞이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고, 어느 날 방송이 들리지 않으면 그저 이만큼 늙었으니 죽었거니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것이 마지막 방송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내가 자살했다며 되지도 않는 추측을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해댈 것이다. 아마도 우울증 환자로 몰아가겠지. 어느 쪽이든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이 궤도에서 살기로 한 날이, 내가 여기에 올라온 날이 생각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떻게 보면 생판 남이었던 그와 함께 궤도에 남겨진 날. 우리의 목적은 화성에서의 새로운 삶이었다. 어쩌다 보니 처음의 목적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리고 궤도에서 살아남는 것으로 삶을 다시 재구성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인제 와서 보니 정말 그때 우리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화성이 아니라 다른 곳이라도 갈 수는 없었을까? 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을까. 궤도 계산을 해 줄 컴퓨터가 없다는 것은 그저 오늘 같은 내일을 하루 더 연장하려는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제가 이곳에 온 지 20년이 되는 날입니다. 축하를 받아야 할지, 위로를 받아야 할지 애매하네요. 이날까지 건강하고 무사히 살아있으니 우선은 축하를 받는 쪽을 고르고 싶긴 합니다. 제가 한동안 생각을 해 보았는데요, 제가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을 한 번은 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바로 화성에 가는 것이죠! 제가 이 우주선에 오른 이유이기도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 궤도에서 너무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청취자’들이 그저 내 수다를 들어주는 누군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얘기를 하다 보니 오랜 친구와 이별하는 기분이 든다.

"화성이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네요. 그동안 저도 살아가기에 급급해서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이제 언제 어떻게 사라져도 사람들은 내가 화성으로 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군가 함께 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누구도 이 궤도에 올라올 수 없는 상황이죠. 원래는 제 반려와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는 데리고 갈 수 없게 된 지가 오래 됐잖아요? 어차피 인생은 혼자 가는 것이고, 오랜 시간 저도 혼자 지낸 셈이니, 홀로 출발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혹시 무사히 화성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지구로 또 방송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연락 드릴게요."

이제 이 궤도를 벗어날 수 있다. 화성이 아니라도 어디든 도달하겠지.

"그동안 제 수다를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이 있어서 행복했어요. 제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세요~"

마침내 마이크를 껐다. 20년 전 작동을 멈추었던 4단계 추진 로켓의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내 인생 마지막 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후보작 태풍 치는 밤과 정전기에 대하여 - 박낙타 2023.08.15
선정작 안내 7월 심사평2 2023.08.15
선정작 안내 2분기 우수작 안내1 2023.07.17
선정작 안내 6월 심사평 2023.07.15
최우수작 생산 2팀 황유석 대리의 퇴사 사유 - 박낙타 2023.06.15
선정작 안내 5월 심사평 2023.06.15
후보작 뱀파이어와 피 주머니 - 박낙타 2023.05.15
후보작 여 교사의 공중부양 - 김성호 2023.05.15
선정작 안내 4월 심사평 2023.05.15
우수작 사탄실직 - 지야(본문 삭제) 2023.04.15
선정작 안내 3월 심사평 및 1분기 우수작 안내1 2023.04.15
선정작 안내 2월 심사평 2023.03.14
후보작 하찮은 초능력자들의 모임 - 하찮은 초능력자들의 모임 - 천가연 2023.02.15
선정작 안내 1월 심사평 2023.02.15
후보작 궤도 위에서 - 임희진 2023.01.15
선정작 안내 2022년 최우수작 안내1 2023.01.15
선정작 안내 12월 심사평 및 4분기 우수작 안내 2023.01.15
선정작 안내 11월 심사평 2022.12.15
우수작 카페 플루이드 - 쟁뉴 2022.11.15
선정작 안내 10월 심사평 2022.11.15
Prev 1 2 3 4 5 6 7 8 9 10 ... 2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