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거울 거울 20호 단편 단평

2005.02.26 13:1202.26

이리스 ( e a r t h _ s e a @ h a n m a i l . n e t )



0. 들어가며

가장 먼저 어느 새 거울이 20호를 맞았다는 것을 축하 드리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환상단편웹진이라는, 대중의 추세와는 그리 맞지 않는 웹 사이트가 어느새 20회의 정기 업데이트를 마쳤다는 것, 일년 반을 넘긴 기간동안 많은 글을 쌓으며 내실을 갖추어나갔다는 것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대견스러운 일이다. 거울이 내실을 쌓아가는 만큼 단평이랍시고 올리는 이 졸고에도 실속이 있어야 할 터인데 하는 송구한 마음이다.

판타스틱 권총 – 댕!

판타스틱 시리즈는, 현실의 이야기다. 판타스틱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현실과 다른 무언가란 사실 이 글에서 그리 비중이 높지 않다. 단지 이 시리즈들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현실의 모든 사람들처럼 치열한 삶의 한 가운데에 있을 뿐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은 참 수더분하게 들려줄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 옆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이 현실의 이야기가 오히려 판타스틱이라는 제목에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만나는 현실과 아주 조금 다른 무언가에 가슴이 떨리기 때문일 것이다. ‘판타스틱 증후군’의 주인공이 일상에 찌들려 살아가다가, 무언가 감정적으로 극단에 몰리기 위해서 택하는 ‘이별’, 그리고 상대 남자의 담담한 ‘수용’도 그랬고, ‘판타스틱 조미료’의 주인공이 어느 순간 극도로 미워지는 언니의 히스테리에 대해, 음식을 만들면서 외치는 주문, 그리고 이 글의 ‘권총’. 모두다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상에 지쳐 선망하는 ‘환상’이라고 읽힌 것은 여의 지나친 추론일까.

충분히 아름답고, 싫어할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친구에 대한 동경이란, 여중 여고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 가져본 적이 있었을 감정이다. 여 역시도 선배를 동경해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애정이라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그러나 명확히 구별되지는 않는 애련한 감정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불러내서 나간 자리에서, 친구의 핸드백 안에 들어있는 권총을 발견한다. 우리 나라에서 권총을 어떻게 구하느냐 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반박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권총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나는 소리 높여 권총의 존재를 자각시키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않고, 그저 다음 주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자신의 약속만으로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자신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너 때문이었노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나의 독백처럼 거짓이었건, 혹은 반대로 진실이었건 간에 그 말은 분명 친구의 죽음을 막으려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딱히 스토리의 전개가 극적이진 않다. 전작이었던 다른 판타스틱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듯이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극적이고 격정적인 무언가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그래서 뭐라고? 하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격정적인 것이 없어서, 단숨에 읽어 내려 가고 나면 이 글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를 수 있다.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어가 종종 생략되는 문장이 많다 보니 때로 두 인물 중에 사건의 주체가 누구였는지 한 눈에 알 수 없는 면도 있다. 그렇다고 시점이 어느 인물에 집중되지도 않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으로 수필을 떠올리게 하는 담담함을 견지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판타스틱 시리즈에 비해서 조금 아쉬움이 남는 글이었다. 격월간으로 쓰신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인데, 더욱 건필하셔서 글을 자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형지에서 – fool

‘나무를 심은 사람’의 구절을 글의 서두에 놓아 두어서, 먼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유형지인 화성에서 씨앗을 심는 죄수. 이 설정이 폐허에 혼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어낸 ‘나무를 심은 사람’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서 일까. 이 글은 ‘나무를 심은 사람’의 SF적인 재해석인가. 그런 생각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화성이라는 황폐한 곳에서, 먹는 것과 자는 것, 배설하는 것을 제외한 시간에 오직 씨앗을 심는 일 외에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이다. 글은 전반부, 주인공의 일기와 중반부의 전환점, 그리고 후반부에 미래의 어떤 시점의 이야기로 3분 되어 있다. 번호는 1과 2로 나뉘어 져 있지만 1의 후반부는 1인칭 시점에서 3인칭 시점으로 전환되는 부분이라 독립된 한 부분으로 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전반부는 주인공의 일기 형식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정황 중에 주인공이 파악하는 것 외에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가 지은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이 화성에는 이런 죄인이 몇 명이나 더 있는지 (심지어 여는 화성에 있는 것이 주인공 혼자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곳의 설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처음에는 비꼬거나 화를 내던 주인공이 일기의 뒷부분에 가면서는 수동적인 체념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그려질 뿐이다. 냉동되어 화성으로 이송되는 이야기라든가 식물을 심는 것이 제대로 과학적으로 뒷받침 되어 있는 설정인지는 SF적인 식견이 부족한 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8926일의 시간이 흐른 후에 자유의 몸이 된 시점까지 읽으면서 어째서 작가가 이렇게까지 주인공의 심리 변화에 몰두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서두 부분을 다시 읽었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끊임없이 어떤 일을 행하여 성과를 이루어낸, 고결한 인격. 주인공은 도저히 고결한 인격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글을 계속 읽어 나가니 8926일째, 주인공의 석방 이야기가 나왔다. 24년 하고도 한참, 거의 25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감정적으로도 둔해져 버리고 시력도 거의 잃다시피 한 주인공이 맞이한 해방의 시점은 언어까지도 변화해 버릴 만큼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 전환기에서 자신보다 전의 사람이 심었을 듯한 씨앗의 흔적, 숲을 발견한다.

수분도 산소도 부족한 대기에서 살아온 주인공은 숲이 만들어내는 맑은 공기에 오히려 구토감을 느끼면서도, 그 곳에 남겠다고 결정한다. 그것이 고귀함의 발로는 아닐 것이다. 역전되었다고 말하면 좋을까. 숭고한 의식으로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추구해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잘 모른 채 해 나간 일의 숭고함을 깨닫고 꺼꾸로 그 일에 투신하는 것. 그런 생각이 들자 이 글의 서두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을 재해석했다는 것은 옳은 말이면서도 틀린 말이다. 전작의, 진실되고 숭고한 사람이 이루어낸 기적이 아니라-. 범죄자라고 하는, 진실되지 않은 사람이 이루어 낸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글의 후반부는 그래서 전혀 주인공과는 무관한 듯이 그려진다. 지극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화성이라는 말이 없다면 우리 지구의 먼 과거의 모습과도 같은, 평온한 일요일의 한 소년. 자연 속에서 그 대기와 숲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소년이 숲의 목소리를 한 순간 듣는다. 할아버지에게 감사한다-는.

모르겠다, 여가 너무 낙관론자인 것일까.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영혼만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우리들에게도 기적을 이룰 힘이 있다는 희망을 글에서 보았다고 한다면.

여는 2번, 이민촌에서의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댓글을 보니 아마 처음 원고는 이 모형과 달랐던 듯한데, 작가가 글을 고칠 때에는 무척 많이 고심하셨을 듯하다. 완전히 상반된 두 부분을 완전히 상반된 형식으로 써 나간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보여지는데, 전작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부디 다음 글에서도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를 기대한다.

3. 조용한 세상 – 미로냥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딘가. 동화처럼 깨끗하게 걸러져 상징화 된 이야기. 미로냥 님의 글이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글은 미로냥 님 글 중에는 무척 전형적인 형식에 속한다는 느낌이었다. 새파란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나라, 돌과 유리의 산. 아무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눈밭처럼 희고 포근한 털이 달린 모자를 쓴 아이. 미로냥 님 글에서 나올 법한 표현이다.

한 편의 동화 같은 글이지만 동화는 아니다. 어른 들이 보는 우화 같은 느낌으로, 간략하게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이 끝나고 혼자 남은 아이들이 스스로 도서관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 상징성을 풀어서 해석해보면 어쩌면 섬뜩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무도 남지 않은 세계를 걷고 걷고 걸어 혼자 남아있는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계속 걸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모든 것을 전쟁이라는 잔혹성으로 잃어버린 인류의 미래의 모습을 단순화 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아직 더럽혀지기 전인 아이들이 모여서, 세상을 새로 만들어간다. 해피엔딩으로 보기엔 이미 멸망된 세계의 모습이 밟힌다. 아무리 아름답게 여과해 두었더라도 이 안에 있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에 짓눌려 인류 전체의 멸망을 만들고 만다는 회의적인 결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압축된 글에서는 그 글이 담고 있는 주제가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건을 깊이 있게 접근하기 힘들기 때문에, 걸러진 내용 속에서 본질적인 주제를 얼마나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날 것으로 드러내면 독자가 물러서 버릴 것이고, 또 너무 깊이 감추면 밍숭밍숭한 글이 되어버릴 수 있다. 작가분이 그 균형을 맞추시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 보여진다.

작가 분의 건필을 기대한다. 아울러 작가분이 즐겁게 쓰신 글을 또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더한다.

4. 신데렐라의 칼 – 아르하

‘꿈의 신발’. 드림 워커 단편선에서 보았던 ‘고발자’를 서두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한 동화라서인지 다시 쓰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그만큼 신선하고 탁월한 해석이 필요할 거라는 이야기는 ‘고발자’의 단평에서도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신데렐라의 원문이 아니라 ‘고발자’를 실은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여는 그 점이 궁금했다. 고발자와 마찬가지로 신데렐라의 언니를 시점으로 하겠다는 뜻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이 글은 신데렐라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원작에 근거한, 그러나 원작과는 다른 노선을 걸은 것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여는 어릴 때부터 착하기만 한 신데렐라에게 뭔가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무리 신데렐라가 착하다곤 하지만 언니나 아버지나 새어머니에게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을 수 있나 하는 점이었다. 작가 역시 그 점을 비틀어낸다. 그저 착하기만 한 것 같은 엘라지만 가슴 속에 맺힌 원망은 있다. 마법을 쓰는 고양이는 엘라에게 환상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원망을 풀어내도록 부추긴다. 현실과 다른 꿈을 계속해서 꾸는 동안 엘라는 그 꿈을 이용해서 왕자와 결혼하는 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괴로워하던 엘라는 지금껏 쌓여 왔던 증오와 원망을 ‘칼’로 형상화 시켜 한 순간에 폭발시킨다.

어째서 칼로 지르는 것이 언니도 아니고 새어머니나 아버지도 아닌 왕자였을까? 현실에서 살 때는 몰랐던 환상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한 게 왕자여서? 아니면, 지배층인 왕자가 자신 같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보다 무도회에만 관심을 가지는 게 싫어서?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처음 엘라의 태도와 잘 이어지진 않아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시점이 이베트의 1인칭이라 어쩔 수 없겠지만 엘라의 심리 같은 것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점이 아쉽다. 화자를 엘라의 심리를 잘 알 수 있는 인물로 설정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엘라가 자신의 증오를 왕자에게 풀어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보다 환상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마법이 걸린 후의 엘라와 이베트는 외모까지도 바뀌어 버리는데, 그것은 작가의 두 가지 의도에 적절히 녹아 든 것으로 보인다. 엘라가 현실과 마법 사이의 괴리감을 더욱 더 느끼도록 부추긴 것, 그리고 이베트를 살인의 현장에서 완벽하게 빠져 나오도록 해 주는 것. 그래야만 이베트는 엘라의 살인 현장의 증인인 동시에 공범이 아닌 위치를 확립한다. 엘라의 몸에서 자라는 칼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늦긴 했지만 최소한 이베트는, 엘라보다 더 굳건해 보였던 그는 현실에 발을 디딘 채로 현실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믿게 된다. 적어도 여는 그랬다.

댓글을 보니 아르하 님이 남자분이신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도 글은 여성의 글이 아닐까 싶을 만큼 섬세하다. 화자가 여성인데도 위화감이 거의 없다. 이 글의 강점으로 꼽을 만한 부분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사건의 중심이 되는 엘라의 심리를 조금 더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신데렐라의 수많은 패러디 가운데 손꼽을 정도로 수작이었다. 신작을 읽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웠다는 말을 덧붙이며, 작가 분의 건필을 기대한다.

5. 홍성목 – unica

유니카님의 단편은 짧은 소품류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번의 홍성목도 그랬다. 신녀 유화가 나오는 것을 보면 몇 번 단편에서 언급되었던 그 세계관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글에서 세계관 자체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입심 좋게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가는 투가 재미있고 유쾌해 읽는 것이 즐거운 글이었다.

1인칭 시점이 종종 사건을 명확하지 않게 만드는 단점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아쉽게도 그 단점이 극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주인공이 가율현휘를 사실은 연모하고 있었으나 남장을 하고 자란 탓에 서로 감정을 전달할 수 없었고, 가율현휘는 정혼자를 만나게 되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삐뚤게 심술을 부리다가 결국은 정리한다. 여가 읽기로는 이런 이야기인 듯 하지만, 수식이 과도해지면서 비문이 되어버린 문장이 많아서 사건의 전개가 더욱 불명확하다.

작가분의 글에서 비문이 많다는 것을 자주 지적한 바가 있다. 글을 퇴고하시면서 유심히 살펴 주십사 부탁 드리기도 했었는데, 이번 글은 전체적으로 빨리 휘달린 느낌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퇴고의 과정이 부족하셨던 것은 아닌지. 고풍스러운 대사를 쓰려고 하는 의욕은 앞섰으나 말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다들 비슷한 말투로 말해서 인물의 개성이 부족해져 버린 것도 아쉽다.

거상이었던 아버지, 신녀 유화님, 서역의 신기한 것들, 글의 전개에서 그다지 필요 없는 것이라면 과감히 생략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글에서 필수적인 것에 좀 더 신경을 써 주시는 것이 어떨까. 주인공인 화자 1인칭에 몰입하는 것은 1인칭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사건이 잘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감정만이, 그것도 솔직하지 못하게 삐뚤어져서 표현되니 독자로서는 읽기 힘든 글이 된다. 글이 어렵지는 않지만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워지는 것이다. 여가 글을 읽는 능력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짧은 글에서 비문이 이렇게 많아서야 문제가 있지 않을까.

앞으로 더욱 좋은 글을 써 주십사 부탁 드린다.

6. 일곱 개의 작은 열쇠 – 명비

일곱 개의 작은 열쇠는 각각의 주제에 따라 서로 다른 일곱 가지의 이야기이다. 각각의 사건들이 뭔가 결합해서 하나의 주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듯. 각각의 이야기를 꼭 이렇게 한 글로 묶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글간의 문체도 심하게 다른 경우가 있어서, 글을 읽는 재미는 분명 있었지만 일곱 가지가 묶여 하나의 주제를 만들어 내었으면 더욱 빛나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명비 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종종,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독특하시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작가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순종적이며 사랑에 집요하리만큼 매달리는 여주인공, 그 여주인공에 무심한 남자들. 스노우화이트가 일곱 신을 협박하듯 하여 정복자로 변신하는 것은 독특했지만 그것 역시 남자들 눈에 비친 강한 여성의 모습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다. 종종 여류 작가들이 성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늘 묘한 느낌이다.

이번 글, 특히 ‘광포’와 ‘질투’에서 등장하는 남녀가 특히 그렇다. 광포에서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매춘으로 동거하는 남자를 부양하는, 전형적일 만큼의 평면적인 인물이고, ‘질투’에서 등장하는 소녀 역시 전에 본 듯한, 나대고 기 산 여학생 정도의 느낌이다. 스토리 역시도 평범해서, 광포의 여자는 결국 남자에게 버림받을 것 같고, 여학생과 소년은 결국 여왕의 질투를 일으켜내지 않는가.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7. 맺으며

글에 대한 애착이 없는 작가가 있을까. 조금 더하고 덜한 것은 혹 있을 지 모르겠지만 다들 애착이 없이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무언가를 풀어내는 일은 때로는 자신의 약점을 대중에게 노출시키는 것과도 비슷해서, 혹자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피학 심리가 있다고까지 말했던 게 아닌가.

그러니 글을 쓴 후에 그 글을 다시 읽으며 단점을 고쳐 나가고 부족한 점을 채워 나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고치기 전이 더 낫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고, 하나도 고칠 부분이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무언가 고쳐야 한다는 것은 알아도 이미 글에 대한 애착이 강해 고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 님이 ‘유형지에서’의 댓글에서 밝힌 것처럼,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주인공 포레스터는 말한다. 처음 글을 쓰는 것은 심장으로 할 것이며 두 번째 쓸 때에는 머리로 하라고. 그것은 처음에는 부족한 것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심장이 말하는 그대로 격정적으로 쓸 것이며, 퇴고 때는 격정을 걷고 냉철하게 하라는 뜻이 아닌가. 퇴고에 대해 여는 이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퇴고의 중요성과 함께 첫번째 글에서 더 이상 아쉽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우러나는 대로 쓰라는 것 역시, 여가 무척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 구절을 언급하며 이번 원고를 줄인다. 부디 작가분들 모두가 격정으로 초고를 원 없이 쓰시고, 냉철한 머리로 자신이 사랑하는 글을 퇴고해 주시기를. 그래서 마침내 완성된 글이 처음 작가가 상상했던 그 의도에 가깝고,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그런 글이 되기를 소망한다.

댓글 2
  • No Profile
    아르하 05.02.27 14:16 댓글 수정 삭제
    매번 글을 읽어주시고 날카로운 비평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감사하고 있는데.. 리플을 남긴것은 이번이 처음 같네요.
  • No Profile
    정대영 05.03.18 16:59 댓글 수정 삭제
    항상 읽어주시고, 거기다 비평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언젠가 대담을 나누어보고도 싶지만서도- 적어도 시리즈는 완결한 다음에, 무언가 짧게라도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D
    p.s ...라고 해봐야 요즘 정신위생상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고 있군요.orz
분류 제목 날짜
대담 赤魚 님과의 대담3 2005.03.26
거울 거울 21호 단편 필자 단평2 2005.03.26
거울 거울 21호 단편 단평 2005.03.26
거울 용이 잠드는 바다 - raile1 2005.03.25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6 - 헤임스크링라 18 2005.03.25
거울 거울 20호 단편 단평2 2005.02.26
그림이 있는 벽 보라빛 매혹3 2005.02.26
거울 거울 19호 단편 단평6 2005.01.28
그림이 있는 벽 노래하는 늪 2005.01.28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5 - 헤임스크링라 17 2005.01.28
장르 판타지 랜드4 2004.12.29
거울 거울 18호 단편 단평 2004.12.29
그림이 있는 벽 신체의 조합1 2004.12.29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4 - 헤임스크링라 16 2004.12.29
그림이 있는 벽 시작 2004.11.26
장르 과학소설 읽는 행복한 세상 만들기 2 2004.11.26
거울 거울 17호 단편 단평3 2004.11.26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3 - 헤임스크링라 15 2004.11.26
거울 거울 16호 단편 단평6 2004.10.30
그림이 있는 벽 배웅1 2004.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