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거울 거울 19호 단편 단평

2005.01.28 20:4701.28

이리스 ( earth_sea @ hanmail.net )



  0. 들어가며

  19호가 업데이트되었을 때 첫 느낌은, 여와 다른분들이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거울이라는 웹진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의 잔상' , 표제 단편으로 실린 글의 수가무려 11편. 여의 기억이 맞다면 거울이 생긴 이래 최다 작품수가 아닌가 싶다. 그 중에 한 작가가 두 글을 실은경우가 두 편이 있었으니 작가 수만으로도 9명에 달한다. 점점 더 발전해가는 거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고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작품을 하나하나 캡춰하여 인쇄하면서 기분좋은 비명도 외쳤다. 한글 2002에서 8pt 장평 90, 사방 여백 10mm이라는 여의 극악한 편집에도 불구하고 이번 글의 총 분량은 70매에 달했다.  읽을 거리가 잔뜩 쌓여있을 때 느껴지는 기분좋은 압박감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웹진이 1년 반도 넘어서서, 2주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바야흐로 거울이 안정에 접어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이번 글 중에는 작가의 전체 작품 중에서도 수작에 꼽힐 글들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다음 달에도 이러한 중압감을 부디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짧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1. 우수한 유전자 - ida

  이번 표제작들 가운데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이 가장 강렬했던 글이었다. 인류의 미래라고 짐작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여 탄탄한 문장과 적절한 묘사로 글을 풀어가는 솜씨가 돋보였다. 특히 이 글에서주목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구성의 탁월함이다. 전 호의 감상에서 fool님의 글에 대해이야기하면서 여는 비교적 평이한 소재나 이야기가 플롯의 배치에 따라서 얼마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그러한 좋은 본보기를 다시 이 글에서 보았다. 서로 다른폰트로 - 이것이 적절했는지는 일단 젖혀두고라도 - 동일한 사건을 서술해 나가는데, 하나는 3인칭 시점이며 하나는 1인칭이다. 3인칭은 사건의 진행을 따라가고 있으며 1인칭은 그 사건을 차후에 다시 언급하는 논조로 서술되고 있다.  3인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 '지훈'이 격렬한 감정을 드러낸 직후에 1인칭의 고백적인 단락이 나오거나 해서, 지훈이 1인칭의 화자일 것이라고 독자가 짐작하게 만든다.

  유전자학을 비롯한 첨단의 과학이 있는 공간 '스카이돔'과 낙후되어 있는 '키바'의 대립구조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독자는 글을 읽는 내내, 도대체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진부한 대립 구조를 제시하고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지훈의 시점에 동화되어 글을 읽어나간다. 그러다가 후반, 병든 아이의 치료 의례에서 지훈의 감정은 폭발하고, 역시 1인칭의 감정 역시 폭발한다. 그런데, 그 순간 1인칭의 주체가 드러난다. 그것이 지훈이 아니라 지훈이 <스카이돔의 조각같은 여자들만 보며 살아 온 지훈의 눈에는 끔찍하게 못생긴> 데다가, <귀머거리>인 촌장의 손녀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독자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줄곧 상대방을 가엾어하는 한편 미개한 종족으로 치부하는 저 시선이 지금껏 지훈의 눈을 통해 지독하게 뒤쳐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키바인의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키바인의 목소리로, 자신도 모르게 스카이돔과 같은 구조가 발전된 미래의 것이고, 현대적인교통수단조차 없는 키바를 미개하게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편견을 서늘하게 비판한다.

  사실 발전된 현대 문명이 정말 발전인가 하는 의문은 계속 있어왔다. 지금도 사람들은 첨단의 과학보다도 정신적인 면이 더욱 더 인류의 진정한 발전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목소리들을 듣고 있다. 어느 쪽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이미 가치관의 문제이지, 장르문학에서 다룰 신선한 주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선하지 않다고 해서 그 주제가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설사 주제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해도, 이 글은 장르의 단편을 쓰는 작가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좋은 예시가 되어주고 있다.

  이 글을 두 번째 읽으면서 독자는 이제 1인칭의 주체가 지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어디에 이런 힌트가 있었던가를 살핀다. 작가는 치밀하다. 글의 곳곳에, 이 글에서 핵심적인 설정들을 녹여 놓았다. 그것도 키바인의 시선이 아니라 스카이돔의 주민인 지훈의 시선을 통했기 때문에 그렇게 강렬해 보이지 않고, 독자 역시 간과해버릴 정도로 일상적이다. 키바인들의 '말'을 스카이돔의 주민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어릴 때 장기간에 걸쳐 배우는 말하기의 의미, 그 높은 차원을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지훈은 그래서 촌장의 집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뭔가 신호가 오간 것인지> 문 밖에서 손녀가 들어오는 것을 별스럽지 않게 여긴다. 촌장과 손녀 사이의 '말' 역시 지훈에게는 촌장이 <뭔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것>으로 여길 뿐이다. 지훈이 손녀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에 놀라고 미개함에 충격을 받았을 때, 손녀 역시 자신들의 '말'을 듣지 못하는 지훈을 '농아'라며 믿을 수 없어 한다. 200년의 수명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지훈에게 50년을 사는 영감은 껄껄 웃어버린다. 키바인에게 스카이돔은, 한 세대가 너무 길어 고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구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작가는 무척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 글의 대칭적인 구조가 단숨에 완성되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키바인의 결론이, 어쩌면 결국 처음 그가 선배를 비판했듯이 계급주의,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상일 수도 있다. 서로가 너무 다른 가치관을 추구해버려 결국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미래의 인류, 여는 서로 자신들이 행복하고 상대방이 불행하다고 믿고 살아갈 이 두 계층들을, 이대로 두어도 좋은가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은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래 어떻게해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 있지 않느냐고 탄식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는 이 글을 무척이나 좋아하면서도 이 글이 내린 결론에 대해서는 조금 씁쓸한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필진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반갑게 맞으며, 앞으로도 좋은 글을 읽게 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2. 입적 - 이수완

  현대 판타지. 여는 이런 글과 같은 것을 종종 그렇게 부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비틀어놓은 배경의 글들 말이다. 지구인들보다 몇 배나 늦게 성장하고-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긴 수명을가지게 되는 페이아인인 지윤의 시점으로 과거를 잠시 회상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큰 사건 배열은 시간 순서에 따른다. 지윤의 친구인 정희가 아이를 입양하고, 시간이 흐른 후 정희의부름에 아이를 다시 만나고, 그 아이가 페이아인임을 알고, 정희 부부가 지윤과 아이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것. 가장 기본이 되는 줄기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페이아인의 설정에 대한 시간의 흐름 가운데 놓여 있다.

  오래 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도 판타지에서는 종종 다루어지는 소재다. 멀리는 LotR 같은 정통 판타지에서의 엘프나 이수영 님의 '패리어드' 등에서 등장하는, 짐승과 인간의 경계 정도로 보이는 종족들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이종족과는 달리 이런 '장수 인간'은 인간과 다른 독특함을 통해 환상성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별로 목적을 두지 않는것같다. 이들은 오히려 인간과 같은 점을 부각시켜 그들이 본질적으로는 고독할 수 밖에 없음에 중심을 둔다. 인간과의 차이점이 좀 더 강조된 '불사 인간' 류에서도 그들이 죽지 않고 오래살아가는 것 때문에 계속 고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종종 이야기의 소재가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수 인간을 다루면서 단지 그들이 고독함을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이미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도 이수완님은 더욱 더 인간에 가까운 장수인간 페이아 인이라는 우주인을 등장시켰다. 총을 맞으면 죽고 굶어도 죽는, 단지 아주아주 느리게 성장할 뿐인 페이아인.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에 몸을 숨기고, 그러면서도 잊어버리지조차 못한다. 고독의 가장 극한으로 내몰기 위한 설정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지금껏 자신들을 대했던 모든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망각을 선물로 받은 인간으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단지,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 없는 아픈 기억을 생각하며 그것이 무척이나 끔찍할 것이라고 미루어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그 고독할 수 밖에 없는 페이아 인 지윤은, 자신을 두려워 하는 지구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그는 페이아 인을 이해시키려고도 하지 않고, 단지 살아남는 쪽을 택한다. 의사로서 벽지에서 바로 그 지구인들을 위해 의료행위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기 위해 페이아 인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래서 글의 말미, 페이아 인인 은이를 안아 들고 자신이 페이아 인임을 밝히는 지윤에게, 여는 놀랐다. 자신에게 삶의 방법을 가르쳐주고 쓸쓸히 죽어 갔던그 부상처럼, 지윤 역시도 평생 지구인들 사이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야 할 은이를 보호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데도. 그래서 지윤은 어쩌면 은이를 던지고 도망가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궁리하면서도 아이를 놓지 않는다. 총 앞에 떨면서도, 페이아 인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글은 구성이 독특하지도 않고, 전개가 매끈한 것도 아니다. 지윤이 은이를 만나는 순간부터 후반까지는 단숨에 휘몰아 친 듯한 급한 기운이 껄끄럽게 걸리고, 문장들도 매끄럽지 못한 것이 간간히 눈에 띈다.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문장들 중에 가끔 걸리는 이런 부분들은 분명 작가가 유심히 살폈다면 퇴고를 통해 고쳐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간간히 걸리는 껄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멋지다.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보여주는 인간애가 아름답고, 다른 종족에 대해 그렇게 총을 들이대며 피를 뿌렸던 인간이 보여주는 인간애 역시도 눈물겹다. 그래서, 어쩌면 이 두 종족이 이 지구라는 땅에서 언젠가는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름답다. 독자가 몰두하지 않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평이하게 만들어진 글솜씨가 미려하고, 지윤의 감정이 촉촉하게 젖어들어 감미롭기까지 하다.  

  간간히 판타지 단편 작가들 가운데에는, 장르적인 특수성 때문인지 몰라도, 소재의 중압감에 눌려 글의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소재가 곧 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도, 소재만이 떠 있을 뿐 그것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글을쓰는 작가들 말이다. 물론 장르라는 것은 소위 말하는 순문학에 비해 다룰 수 있는 소재가 무궁무진하고, 그런 점이 장르의 매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지금 문학에서 환상성이 순문학과 결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이상 소재만으로 승부할 때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것이 여의 생각이다. 이수완 님이 앞으로도 독자에게 이런 감동을 주실 수 있는 좋은 글들을 많이 써 내시기를 기원한다.


  3. 쾌도 난마 - 명비

  A4. 25페이지다. 그것도 여의 빡빡한 다단 편집에 8pt 글씨로. 인쇄를 하면서 아연해졌다. 아이구야.   좀 쉬시더니 그동안 이렇게 중편에 달하는 글을 쓰신 모양이다. 첫눈에 보니 무협이었다. 여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걸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여는무협을 잘 모른다. 무협지에서 다 읽은 것은 고전 한 두 편 정도고, 무협이라는 단어에 떠올리는 이미지도 영화쪽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무협에서의 문투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한자 식견이 높은 것도 아니니, 무협 용어들을 능숙하게 읽어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장편란에서 명비님의 글을 읽었을 때에 분명명비님이 이런 분위기쪽에서 더 매끄러운 글을 쓰셨던 것이 기억이 났다. 해서 큰 맘 먹고 무협에 도전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적으로 여의 식견이 부족한 탓이려니 믿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읽으니 그제야 이야기의 내용이 눈에 잡혔다.

  장생과 소십삼이 이 글의 중심 인물이다. 글의 후미에 이르기까지는 확실히 장생이 중심을 주도하고 있다. 장생과 소십삼이 만나면서 장생의 살인행각(혹은 복수행각)을 소십삼은 휘말리다시피 해서 지켜보고, 후미에 이르러서야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글이 끝난다. 사건의 주된 내용은 오래전부터의 묵은 원한들의 중첩이다. 등장인물도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얽히고 얽혀 이 사람들은 이 사람과 원한이 있고, 이 쪽은 이렇게 원한이 있으며, 이 사람은 이런 이유로 죽어야 하고 이 사람은 또 저런 이유로 죽어야 하여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는다.

  장생의 남성적인 면모에 비해서 소십삼은 다소 위축되어 보이고, 술도 마실줄 모르는 소위 풋내기다.  장생이 벌이는 사건 하나 하나를 고풍스러운 말투로 서술해 나가는 것이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대사 한 마디 한마디가 고풍스럽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짐짓 허풍스러운 말투도 섞이곤 하지만 고풍스러움에 압도되어서인지 각각의 인물들의 대사가 개성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후미에 등장하는 '언니'의 말투가 다소 개성적이지만, 그것은 성별의 개성이 강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전체적인 대사나 서술 모두가 고풍스러운 양념을 담뿍 뿌려 놓아서인지 원래의 재료가 묻혀 버린느낌이 강하다. 피자 토핑과 도우의 관계라면야 토핑이 맛깔스럽다는 것이 피자 전체로 해가 되지 않겠지만, 모밀의 장국에 양념을 잔뜩 해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들이 한자어인데다가, 한 사람이 이리도 불리고 저리도 불리기 때문에 처음 읽었을 때의 가장 문제는 인물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슷한 고유명사가 많기도 해서,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이 모호하다. 구성 자체가 복잡한 것도 아니고 시간 순서대로 평면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도 여는 세 번째 읽었을 때에야 사건을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 또한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한 한자어투가 걸린다. 분명 이 글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일조하고 있으나 독자들이 일상적으로 잘 접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많다 보니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내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무협의 독자들이라면 일상적으로 읽어낼 단어였을까.

  중심이 되는 스토리가 묻히다보니 처음 읽을 때 사건이 잘 잡히지 않고, 작가의 탁월한 묘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독자분이 댓글을 달았다시피 명비님의 묘사는 이 글에서 단연 돋보이는 부분인데, 이 묘사와 스토리가 함께 아우러졌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다. 또한글에서 소십삼의 정체가 반전으로서 기능을 하고자 했다면 그것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야 하거나 결론이 되어야 했던 것이 아닐지. 소십삼의 정체 이후의 강렬한 묘사 때문인지, 오히려 이 긴 글이 장편의 서두처럼 보이게 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소십삼과 장생이 중심이 되게 하려 했다면 전체적으로 소십삼에 조금 더 중심을주어줄 필요도 있을 것 같다. 현재로는 소십삼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은 분명 재미있었지만, 글의 전체적으로 무슨 의미였는지는 잘 잡히지 않는다.

  중언부언 말을 했지만 명비 님의 글 중에 개인적으로 무척 맘에 드는 글이었다. 무협이라는 장르적인 특징에 부합하는지는 여로서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 사변 위주의 전작들에 비해 확실히 이야기를 가지고 진행되고 인물이 보인다는 점은 높이 사야하겠다. 다만 각각의 인물들의 개성 부분에는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다. 장생이 일으키는 수많은 사건 속의 인물들이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많은 사건 중에 중심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잘라 보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건 하나 하나가 극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과감하게 잘라내고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은어땠을까. 마지막 사건의 집 사건에 중심을 두고 나머지는 장생이 소십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정도로 언급하는 등으로 말이다. 중편 정도의 분량을 가지고 있는 글이지만 중편으로 보기에도 다소 불균형한 느낌인 것이 유감이다.

  정체를 밝히고 단장한 소십삼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사실 초반의 미소년 분위기의 소십랑 쪽에도 점수를 많이 주었지만, '언니'의 말마따나 여인으로서 <남들이 무어라든 그런 활갯짓으로 자기들 인생을 부둥키>는 소십삼의 모습도 궁금하다. 후작에서는 쾌도낭자 소십삼랑의 이야기를 볼 수 있을지기대해본다.  

  건필을 기원하며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4. 귀가 - 추선비

  이 글은 지난 호의'기만과 협잡의 혼례'보다 전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추선비님의 글을 알고 싶으면 이 글을 읽어보라고 할 정도로, 추선비님의 대표적인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 글이기도 하다. 읽는 사람의 눈을 붙잡아버리는 강렬하고 감각적인 서술과 묘사, 압축되어 있는 대사. 군데 군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녹아있는 개인적인 독백. 여러 가지 사건들이 회상이나 환상을 통해 중첩적으로 나타나, 전체적으로 모호하게 뭉뚱그려진다. 이 글은 마치 엘루네드가 살고 있는 성의 일렁이는 촛불만큼이나 모호하고 또한 환상적이다.

  이 환상적인 면이 이 글의 장점인 동시에 또 단점이 되는데, 전체적으로 메릴의 회상과 환상을 통해 등장하는 두 개의 사건과 진행되는 사건 셋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져 버리는 것이다. 메릴이 윈슬로우를 떠나 성으로 돌아와서 엘루네드를 만나고, 캐롤라인의 말을 통해 기억 속의여인의 죽음을 떠올리고, 그리고 어머니가 흡혈귀가 되는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메릴 클레이턴이 된 사건을 회상한다. 이 세 개의 사건은 단편적이면서 또한 함축적이어서 언뜻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캐롤라인과 엘루네드의 대화를 통해 떠올리는 여인의 기억은, 너무나 흐릿해서 잘 잡히지 않는 것이다.

  이 사건은 어머니가 흡혈귀의 키스를 받아 성에 오게 된 사건, 그리고 그 이후 엘루네드가 메릴에게 클레이턴이라는 성을 내리는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메릴이 함께 여행하던 여자가 실상은 엘루네드를 닮았다는 것, 그 죽음의순간이 메릴에게는 계속 각인되어 있다는 점에서 메릴의 현재 심리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그 사건이 흐릿하다. 자신의 손에서 죽어가던 여자의 환상은, 흡혈귀의 성에서 공포에 질려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보다도 더 선명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글의 결말 부분에서 메릴이 엘루네드의 호박색 눈동자를 자신이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 죽은 여인이 엘루네드를 닮았음을 인정하면서 출발해야 한다.

  전작 <50년 전의 연인>에서 등장했던 남자가 이 글에서도 등장한다. 남자에게서 엘루네드가 보였던 감정적인 면들이 이 편에서는 엘루네드 내면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엘루네드는, 전작에서 절망하던 그 여인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엘루네드의 감정이 아니라 그 말에 절망할 메릴이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전작의 엘루네드보다 이번 글에서의 엘루네드가 더욱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비인간적일 정도의 아름다움, 독특한 개성. 이 글에서는 문장에 잡아먹힐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문장의 주인인 엘루네드를 사랑(혹은 동경)하는메릴이 주인공이지만, 그 메릴보다도 엘루네드가 더욱 강렬한 것은 그 캐릭터리티 때문이다.

  <기만과 협잡의 혼례>를 보았으니 작가분에게 압축을 풀어 보심이 어떻겠느냐고 말하지는 않겠다. 언제나 글을 쓸 때 중요한 것은 적당함과 균형 감각이다. 때로 조금균형이 어긋난 것 같은 글이 강렬한 매력을 주기도 하지만, 지나친 압축은 독자를 지치게 만든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장점을 가지고 계신 분이니 더욱 더 그 쪽을 강조해주시는 것도 길이 될 테지만, 역시 여러 개의사건이 중첩되는 플롯에서 각 사건별의 중요도를 생각해 균형을 이루는 것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한다. 압축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로 아우러지는 매끄러운 글, 추선비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시지 않으실지. 건필을 기원한다.


  5. 천 번의 밤 천 번의 낮 - 미로냥

  단편의 구성은 대체적으로 평면적이고 하나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라는것이 보통이다. 사건의 중첩이나 중의적인 느낌은 자칫 잘못하면 글을 산만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단편의 일관성을 해칠 수 있다는것이다. 하지만 단편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이러한 모호함이 효과적으로 글의 매력을 만들 수도 있는데, 바로 그런글이 이 <천 번의 밤 천 번의 낮>이었다. 작가분 특유의 장식이 많은 문장으로 동화적인(혹은 소녀적인)서술을 통해 진행해나가는 사건은 글의 후반에서 한 번 뒤엉켜, 글의 시작부분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 순간 이 글의 이야기는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이 인물들은 도대체 누구였는지 의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앞을 볼 수 없는 공주가 왕의 곁을 떠났다. 왕의 딸인가 싶었는데 아내였다. 악역의전담자나 마찬가지인 마녀를 협박해서 길을 떠나게 하는 왕이 서슬퍼렇게 마녀에게 사슬을 매어 공주를 찾아 떠나는 것이 글의 시작이다. 전형적인 동화적인 구조라면 왕이 공주를 다시 구해오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서두부터가 수상하다. 공주는왕과 행복하게 살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외롭게 탑 안에 살았다고 하는 것이다. 공주가 이 나라로 들어왔을 때조차 공주를 맞이하지 않고 손에 피를 묻히러 떠난 왕,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노래하기만 하는 공주에게 왕은 찾아가지조차 않는다. 이 불길함속에서 마녀와의 여행은 일순간 비틀려, 왕의 영지를 떠나 동쪽 나라로 들어가는 순간 왕은 권세를 잃고 마녀의 당나귀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는 동쪽 왕의 탑에갇힌다. 그가 공주의 심정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공주를 이해하고 자신이 공주에게 한 것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깨닫는 순간, 왕은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이발사로 오인받아 처형당한다. 다시 역전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마지막순간에 왕이 있었던 곳은 동쪽 나라의 탑이 아니라 공주가 갇혀 있었던 그 탑이 되고, 왕이 만나는 것은 공주의 시신이며, 공주가소망했던 대로 왕은 사랑을 깨닫지만 그만큼 절망한 채로 처형당하는 것이다.

  어쩌면 마녀는 공주였을 지도 모른다. 공주 자신이 왕을 용서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마녀는 공주와 왕을 이용했을 지도 모르며, 복수의 주체는 공주였을 지도 모르고 자신의 목에 사슬을 단 것을 용서하지 못했던 마녀였을지도 모른다. 울며 늪으로 돌아가 천일을 더 살고 동쪽으로 떠난 마녀는 어쩌면 다시 돌아와 탑에서 외로이 살다가 다시 마법 가위를 들고 온 이발사를 만나고 천일동안 모레를 걷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시간의 순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환상이다.

  이런 글은 기본적으로 독자 취향이 나누어지기 쉽다. 명확한 스토리와 완결된 플롯으로 기 승 전 결을 기대하고, 스토리 텔러로서의 작가를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이 글은 어쩌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이 가지는 순환적인 구조와, 모든 서술의 모호함에 매력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취향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결국 문제는 작가가 무엇을 의도하였나 하는 것이아닐까. 만약 작가가 그런 모호함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이 글은 미숙한 글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작가가 처음부터 꿈처럼 흐릿한 이런 구성을 의도했다면, 그래서 이런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면 이 글은 성공작이다.

  다만 작가분은 이것이 상당히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글은 미숙함이나 산만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글의 주제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6. 역천만담 - 미로냥

  작가분이 즐겁게 쓰신 기운이 독자에게까지 느껴져 여는 한참을 웃었다. 캔커피 님의 <누구를 구할 것인가> 이후로 그렇게 유쾌하게 읽은 글이 드물었기 때문에, 단숨에 이 글을 읽고 다시 읽었다. 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젊은 왕 선과, 그보다 일곱 살 위인 입 건 신하 유운이 중심 인물이고, 이 두 인물의 재미가 곧 이 글의 재미다. 갓 스물인 왕과, 젊은 신하 유운 두 사람은 임금과 신하의 사이이면서도 친구이고, 또 친형제같은 느낌이다. 서로 계속해서 말로 괴롭히면서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있는 사이라니. 남자들의 가장 이상적인 우정, 아니 여자들이 가장 동경하는 남자들의 우정이라고 해야 할까.

  정비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역모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이긴 하지만 왕도 유운도 그렇게 위기감이 없다. 분명 그런 무리들에 대해서 화가 나 있는 왕이지만, 그들을 강하게 벌할 생각도 없다. 사실 이 글에서 이런 상황 대처를 보고 신이 실은 성군이고, 그 성군 뒤에는 현명한 신하 유운이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지만, 여는 이 글을 그저 즐겁게 읽을 유쾌한 꽁트로 보고 싶다. 그래서 이글에 대한 설명도 구구절절 하지 않겠다. 만담을 보는 기분으로 즐겁게 읽었다. 예전 우리 나라에 이런 왕과 이런 신하가 있다면 그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생각하며 웃었다고 하는 말로 감상을 줄인다. 부디 작가분께서 <통촉하여 주시길>.


  7. Mr. Cluse 와 할아버지, 크리스마스의 꿈 - unica

  할아버지의 죽음에 접한 두 사람이 크리스마스에 겪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두 글은 공통적이다. 결론적으로 그 두 사람이 산타클로스를 만나게 된다는 것도, 이야기의 주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도 같다. 등장하는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 선전에서 유래했다는 펑퍼짐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엘프나 멀린 같은 비교적 부드럽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도.

  앞서 등장한 글이 할아버지가 산타클로스를 만난 일기장을 읽게 되는손녀의 시점이고, 뒤 이야기는 꿈 속에서 산타클로스를 만난 손녀의 이야기지만 둘 다 할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는 것은 같다. 쉽게 읽히고 두 글이 단숨에 읽히기까지 하는데, 작가분은 이 두 글들에서 무엇을 의도하신 걸까? 이 두 글을 모두 게재하신 이유가 뭘까? 다른 분들의 글들이 강렬해서인지 유니카님의 두 글은 평소의 작가분이 쓰시는 전형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

  어쩌면 여가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별반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유년 시절에 이미 산타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버린 여는 아마 옆에 산타클로스가 와서 서 있어도 모르는 보통 사람일지도. 동화같은 풋풋하고 경쾌한 이야기는 깔끔하고 좋았지만 단순한 사건 안에 담담한 정서를 담다 보니 심심해져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건필을 기대한다.


  8.  전직 흡혈귀의 회고 : 2097년부터 2202년까지 - fool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글은 흡혈귀 청년의 사랑 이야기다. SF로 보기보다 판타지로 보아야 할 글이다. 최근에 거울에 흡혈귀를 소재로 하고 있는 글들이 종종 보이는데, 작가분들이 단체로 공명을 일으키고 계신 것일까? 어쩌면 흡혈귀라는 같은 출발점을 가지는 글들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만들어지는 것을 읽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작가분이 잡담란에 올리셨던 짧은 패러디들을 본 적이 있다. 우연히 작가분의 블로그에서는 그 이전 년도의 동일한 주제의 패러디들도 읽었다. 작가들의 개성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계신데다가 그것을 희화해 내신 솜씨가 멋졌다. 그런 작가분이니, 흡혈귀의 이야기도 일반적인 흡혈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여태 여가 읽은 작가분의 단편은 수상작과 전번 거울에 실린 글 두 개 뿐이지만, 현대적이고 SF적인 글을 쓰시는 분이 쓰시는 흡혈귀가, 정통 판타지에 심취해 있는 작가가 다루는 흡혈귀와는 다르지 않겠는가.

  읽어 보니 전작에 비해 확연히 압축성은 떨어진다. 구성 역시도 평범하다. 회상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회상의 첫부분에서 글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서는 직선적이며, 특별한 반전이나 강렬한 사건도 보이지 않는다. 1인칭 소설인데다가 감정 흐름에 솔직하고 직접적이라 심리적인 면은 더욱 짙어졌지만 전작에서 보였던 주인공의 치열한 갈등에 비하면 다소 늘어지고 힘이 빠지는 느낌도 들 정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작가는 흡혈귀라는 소재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한 흡혈귀 청년이 첫사랑에 실패하고 두번째 사랑에 상처받고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가 온전히 새로 태어날 뻔 하고, 다시 운명적인 사랑의 입구에섯 돌아서서 마지막까지 고독했노라고 하는 이 이야기에서. 작가가 상대방에 대한 착취를 상징하는 것으로 흡혈을 사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타인의 피를 빠는 것을거부한 주인공은 마지막 순간에 왜 고독해 진 것인지.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사랑했을 지도 모르는 여인이 주인공을 잊지 않고 찾고 있더라는 것이, 주인공에 주어진 보상이라고 보기엔 좀 서글프다.

  차라리 여는 이 글에서 피를 주고 피를 얻는 그 행위를 인간관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기적인 이웃들 사이에 지쳐 있었던 나의 어머니가 나와만 피를 나누는 것이 나에 대한 집착으로 치환될 수 있다. 어머니의 인간적인 교류는 오직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불완전했다. 친구들에게 피를 주는 것을 거부한 나는 고독했고, 친구도, 진정한 연인도 만날 수 없었다. 글의 중반, 죽음 직전의 순간에 그가 흘러 들어간 집단은 완전하지 않았다. 피를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는 일시적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인간관계를 거부해 온 나에게 인간적인 유대감을 줄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들끼리도-, 피를 빤다는 행위 자체에서는 벗어났더라도, 그 집단을 뿌리부터 와해시킬 젊은이를 유능하다고 인정할 정도로, 서로를 몰랐다. 결국 주인공 나는, 빛의 열매를 동경하지만 그 집단에 속하지도 못하고, 흡혈이라는 교류를 할 수도 없는 고독한 상태에서 관 뚜껑을 덮게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흡혈귀라는 기존의 관념에 익숙한 여로서는 이러한 상징이 맞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부담감이 계속 느껴지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는 감정을 함뿍 담고 안정적인데도, 평이하게 이어지는 이 구성이 오히려 전작보다도 부담스럽다. 쉽게 읽히던 전작의 글보다도 문장에 장식이 늘어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흡혈귀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기존의 이미지와 이 글의 흡혈귀가 서로 완전히 융합하거나 완전히 새롭지 않고 삐그덕대기 때문이다. 새로운 느낌의 흡혈귀인 동시에 기존의 흡혈귀와 절반쯤 비슷한 무언가. 완전히 흡혈귀라는 개념에 대해서 선입관이 없는 독자들이라면 어떻게 읽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여는 작가분의 글을 더 읽어 보아야겠다고 느낀다. 다른 글에서 또신선한 고민을 여에게 안겨 주시기를 바란다.  

  9. 맺으며
  
  글이 풍성해지면서 각자 작가분들의 다양한 글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무척고무적인 현상이다. 필진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은나쁘지 않지만, 자칫 잘못하여 필진들의 글이 비슷하게 닮아간다면 그것은 독자로서 무척 아쉬운 일인 것이다. 19호에 이른 거울은 고정 필진들의 수가 상당한 때문인지 그런 점이 별반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웹진을 포함한 인터넷상의 게시물은, 자신의 글 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실리는 다른 글을 읽기에 손쉽다. 그것은 일반적인 출판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보다 손쉽게 자신의 글에 대한 반응과 타인의 글에 대한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겠다. 출판물에 대한 반응이 작가에게 닿는 것보다도 훨씬 간단한 방법으로 독자는 댓글이나 감상문의 형식으로 작가의 글에 피드백을 보낼 수 있다. 이것은 인터넷상의 글쓰기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된다. 글에 따라서는 강렬한 인상을 받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글도 있고, 가볍게 읽고 즐겁게 댓글을 달 수 있는 글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일직선상에 두고 비교해 버린다면, 전자가 후자에 비해 독자의 반응이 나쁜 글이라는 판단을 내릴 위험이 있다.

  여의 감상 역시도 마찬가지다. 자주 고백하다시피 여는 순문학과 장르를 모두 즐겨 읽지만, 장르 중에서도 무협의 식견은 부족하다. sf도 좋아하지만 과학적인 부분에서 그런 글들을 살피지는 못한다. 글에도 선호도가 있고, 물론 작가의 선호도도 있다. 여가 열광하는 글에 다른 사람들 모두가 열광했을 리는 없다. 작가분들의 글을 감상이랍시고 올리면서 늘 염려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래서 여는 종종, 작가분들을 위해서 이런 얕은 감상글은 올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개성과 자신의 단점을 구별하실 수 있는 작가분이 되셨으면 한다. 아마추어 작가들 중에는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 개성을 혼돈하는 분들이 상당히 눈에 띄어 아쉽다. 자신의 단점을 개성으로 오인하는 분들도 독자로서 아쉽지만, 자신의 장점을 얕게 평가하는 분들도 안타깝다. 겸허하게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도 필요하고, 침범당해선 안될 부분을 지키고 사수하는 것도 필요하다. 어느 것이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찾는 것은 쉽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다음 호에서도 좋은 글들을 많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작가분들의 건필을 바라며 이만 줄인다.  

댓글 6
  • No Profile
    이수완 05.01.30 15:00 댓글 수정 삭제
    졸문보다 훌륭한 평을 받아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고맙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No Profile
    이리스 05.01.31 10:27 댓글 수정 삭제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No Profile
    미로냥 05.02.01 01:43 댓글 수정 삭제
    와, 이번에도 신세를 진 기분입니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만은 계속계속 하고 있어요;_; (발전은 없지만;) 감사합니다.
  • No Profile
    ida 05.02.01 01:59 댓글 수정 삭제
    저도요... 감사드립니다.
  • No Profile
    추선비 05.02.01 22:20 댓글 수정 삭제
    저도 항상 두근두근 평을 기대하며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리고 있어요.
  • No Profile
    이리스 05.02.05 01:24 댓글 수정 삭제
    감평이랍시고 계속 작가분들께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슬슬 그만둘 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분류 제목 날짜
대담 赤魚 님과의 대담3 2005.03.26
거울 거울 21호 단편 필자 단평2 2005.03.26
거울 거울 21호 단편 단평 2005.03.26
거울 용이 잠드는 바다 - raile1 2005.03.25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6 - 헤임스크링라 18 2005.03.25
거울 거울 20호 단편 단평2 2005.02.26
그림이 있는 벽 보라빛 매혹3 2005.02.26
거울 거울 19호 단편 단평6 2005.01.28
그림이 있는 벽 노래하는 늪 2005.01.28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5 - 헤임스크링라 17 2005.01.28
장르 판타지 랜드4 2004.12.29
거울 거울 18호 단편 단평 2004.12.29
그림이 있는 벽 신체의 조합1 2004.12.29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4 - 헤임스크링라 16 2004.12.29
그림이 있는 벽 시작 2004.11.26
장르 과학소설 읽는 행복한 세상 만들기 2 2004.11.26
거울 거울 17호 단편 단평3 2004.11.26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3 - 헤임스크링라 15 2004.11.26
거울 거울 16호 단편 단평6 2004.10.30
그림이 있는 벽 배웅1 2004.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