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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거울 18호 단편 단평

2004.12.29 23:3012.29

이리스 ( earth_sea @ hanmail.net )



0. 들어가며

18호는 새로운 작가들이 많이 눈에 띈 호였다. 독자 단편란에는 뚜렷한 신인들이 눈에 띄지는 않고 있으나 필자로 새로운 분들이 영입 되신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동일한 필진들이 치열하게 글을 써 나가는 것도 각자의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잘못하면 기존의 분위기에 젖어 퇴보할 위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필진들이 들어오고, 오랜만의 글들이 눈에 띄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물론 기존의 필진들도 날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기쁜 호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1. 문근영 대통령 – 로비

첫 작품이 새로운 필진이 되신 로비 님의 글이었다. 제목부터가 현재의 아이콘인 문근영이라는 소녀의 이름에 대통령이라는 안 어울리는 호칭을 붙여 놓아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조금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던 이 제목은 무척이나 강렬해서, 자칫하면 글 전체가 제목만으로 끝나 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여는 조금 불안한 심정으로 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

하늘에 대한 묘사와 함께 이어진 것은 문어 의사의 이야기다. 간호사는 카나리아였고 운전사는 두더쥐였다. 이러한 당혹감이 글 전체를 흐른다. 나중에 문근영 대통령의 입을 빌어 어떤 시점을 경계로 해서 동물들도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그러한 설명이 없었다면 이러한 동물 이름이 직업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쓰인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글 전체에 대해서 여가 가진 감정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러한 혼란이었다. 풍자의 형식을 빈 듯 하면서 가볍게 농담의 어투로 이야기를 하다가, 또 심각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글의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계 소환물의 형태다. 수업 시간을 지겨워 하는 평범한 고교생이 어느 순간 다른 세계로 소환되어 가보니 거기에서는 자신이 영웅이더라는 이야기. 이렇게 여러 가지 형식을 뒤섞어 놓은 글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것은, 여가 작가의 전작을 모르기 때문일까.

각 국가의 우두머리는 모두 20세 미만의 '소녀'들이다. 그리고 '현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스타들이다. 그들이 평행 세계인 이 곳에서 어째서 각 국가의 수반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세계에서의 스타성을 잃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엠마 왓슨은 영국 총리이지만 켈빈 클라인 티셔츠에 디젤 청바지를 입고 있으며 이시하라 사토미는 현실의 아이돌인 영국의 대니얼 레드클리프에게 연예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소녀적인 특성과 각 국가의 수반으로서의 진지함을 뒤섞은 듯한 개성의 소유자이며, 미국의 타코타 패닝은 미국의 쥬라기 공원을 기억한다. 이들이 존재하는 평행 세계란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다. 다만 다른 것이라면 그들의 세계에 성인이 없다는 것뿐이다.

그들의 세계는, 마리아의 말에 의하면, 어른들에게서 착취당하는 소녀들의 세계이다. 그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했던 현재라는 고3 남학생 뿐이다. 그는 마리아의 아들-즉 예수-이지만 그는 순교해서는 안 된다. 그는 문근영 대통령이 만들고 싶어하는 서울에 살고 있는, 그들이 만들고 싶어하는 현재다.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더러운 어른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부터 시작한다고?

그런 의도였다면, 어째서 작가는 하필이면 이 세계의 아이돌들을 저쪽 세계의 대통령과 총리로 만든 것일까. 그러한 스타들 역시 더러운 어른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것 뿐이라는 의도일까. 그러나 그들이, 학대 받고 죽어간 스너프 필름의 미성년자들이나, 더 멀리 보면 먼 나라에서 여성의 할례 의식 중에 죽은 소녀들의 대표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스너프 필름도 없고 소녀들이 성적으로 학대 받고 있지도 않지만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는, 그런 세계가 지금의 세계보다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여는 여성이지만 성인이고, 분류하자면 기성세대쪽에 더 가까울 사람이라서인지, 그 단언에 동조할 수가 없다. 이웃 나라의 아이돌의 안부를 국가 원수의 회동 전에 물어보는 사람들이 한 국가의 대표인 세상이 지금 이 세상보다 낫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이다.

여는 이 글을 몇 번이나 읽었으나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 글은 장난스럽게 쓰여진 풍자글일까. 아니면 글의 후반 이후에 등장하는 사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일까. 만약 후자였다면, 꼬박꼬박 대통령을 '문근영 대통령'이라 지칭하는 것이나 글의 초반에 등장하는 '그렇...근영' 같은 표현이 글의 몰입도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말씀 드려 두고 싶다.

여가 작가분의 장편 에비터전의 유령을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단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도 모른다. 계속 거울에 좋은 글들을 내어 주시기를 부탁 드린다.


2.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 – fool

두번째 읽은 글도 새 필진이 되신 작가분의 글이었다. 글을 먼저 읽고 나서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탄탄한 필력도 그렇지만 마지막의 반전도 인상적이어서, 편집장님께 필진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기까지 했었다. 제1회 과학문예에서 단편부분 수상작을 쓰신 분이라는 걸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는 sf를 무척 좋아히기 때문에 이번 과학문예의 수상작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가 수상작이 무엇인지 읽으려 했었다. 중편 부분의 글도 인상적이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는 단편 부분의 수상작에 더욱 매료되었다. 그래서 작가분이 바로 그 글을 쓰신 분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제야 이 글을 읽으며 느꼈던 강렬함을 이해했다. 오래 동안 글을 읽어 왔고, 글을 써 오신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디어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SF에서 인간을 컴퓨터(또는 로봇)이 키운다는 발상은 새롭지 않다. 새로운 행성으로 인간들이 뻗어나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수정란을 냉동시켜 우주로 보낸다는 것 역시 그렇다. 심지어 우리 나라 만화인 '푸른 포에닉스'에서도 그 아이디어가 사용되었던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 글의 매력은 이런 평이한 소재에서 끌어내는 결말과, 결말까지 이끌어 내는 서술 구조다. 컴퓨터에게 양육된 인간이 탐사선에서 탈출을 결심하고 컴퓨터에게 반기를 든다는 구조 역시도 처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인간이 어머니를 배신한다는 신화적인 구조를 차용한다. 컴퓨터가 인간을 탐사선 안에 묶어두려 했던 것은 컴퓨터의 회로가 뭔가 어긋난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어머니가 자식에 대해서 느끼는 독점욕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남자가 컴퓨터를 해킹 해 들어가 모든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은 인간이 기계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인 동시에 아들이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는 구조다. 그래서 이 글은 이런 제목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글의 중반 중반에 삽입되는 과거의 기억은 짧지만 강렬하다. 그것은 어린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부수적인 개체가 아니라 스스로 독립된 감정을 가지고 그 품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이다. 그는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참담한 죄책감을 느끼며, 그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스피커를 끄는 것이다.

처음으로 탐사선 밖으로 발을 내디딘 남자가 발견하는 것은 어머니가 보여 주었던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그가 자궁 밖으로 나가서 보는 현실은 구역질이 날 만큼 낯설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죄책감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녹슨 선체를 마지막으로 돌아볼 수는 있지만 선체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자궁 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만약 그가, 컴퓨터가 자신을 보살펴 주던 그 때를 그리워 하더라도 말이다.

여는 이 글을 읽으면서 단편을 쓰는 많은 작가들이 종종 글의 구성에 대해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강렬한 아이디어로 써 내려가는 글도 나쁘지 않고, 선명한 이미지로 승부하는 글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글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십분 발휘하여 독자를 사로잡을 때 글의 완성도를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을 쓰기 전에 이 글의 가장 효과적인 구성이 무엇인지 많은 작가들이 숙고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러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할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과연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서 시간 순서로 진행되는 평면적인 구조를 많은 작가들이 택하고 있는 것인지.

여는 지난 호에서 단편 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긴 스토리가 있더라도 그것을 다 서술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다른 부분을 압축시키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한 좋은 예를 이번 호에서 찾을 수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작가분이 다음 호에도 좋은 글을 보여 주시기를 기대한다.


3. 하늘 아래 – 미로냥

전에도 여가 이야기한 듯 싶지만, 작가를 모르더라도 읽다 보면 작가를 짐작할 수 있는 글들이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로냥 님의 글도 그런 경우다. 특히 이렇게 동양적인(꼭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여 동양이라는 표현을 썼다) 글을 쓰실 때, 미로냥님의 색채가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지난 호에 실었던 '이 뭍' 이 좀 더 한국적인 정서에 가깝다면 이번 글은 동양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이름은 한자 이름이나 읽는 방법은 우리 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꼭 이 글이 우리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다. 거문고가 등장하고 과거가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 주된 인물은 연서이지만, 가장 강렬한 것은 연서보다는 악후다. 재주를 갖고 태어났으나 부모 복이 없어서 얼굴이 얽고 한 눈과 두 다리를 잃은 기구한 학자인 연서는, 총명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싸늘하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곱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 제자를 자청하고 들어온 악후가 꾸짖듯이 반박하는 내용이 오히려 반갑다.

연서는 세상을 등져 시를 쓰는 사람이었을지 모르나 악후는 그 밑에서 배웠어도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인물이었다. 그것을 악후의 시선도 아니고 연서의 시선도 아닌, 먼 거리에서 담담히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글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악후는 세상에 부딪혀 깨어졌을 뿐 겉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조용히 시를 쓰던 스승이 가지고 있던 손까지도 망가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서에게는 해답이 되었던 것일까. 악후의 거문고를 묻고 꽃이 피기를 기원하는 그는, 모든 가진 것을 버리고 홀몸으로 바퀴단 나무판을 타고 운경을 떠나는 연서의 모습은 패배로만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전작인 '이 뭍'에서 삶이란 살아지게 마련이라고 하던 그 끝말이 떠오르는 결말이 아닌가. 작가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는 데도 독자들은, 그 거문고에 분명 붉은 꽃이 피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미로냥 님의 글을 읽으며 여는 종종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다른 서구 판타지에서보다는 이러한 동양적인 글에서 더욱 나타나곤 한다. 여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여가 혹시 박진감 넘치는 혁명적인 판타지에 너무 길들여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의 핏속에서 전해지는 전통적인 '환상문학'의 분위기란, 서구에 비하면 조금 맥 빠진 것이 아닌가 말이다. 버림받았으면서도 어머니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떠나는 바리공주의 이야기는 그래도 역동적인 편에 속하지만, 어린 새와 알들을 노리는 구렁이를 쏘아준 대신에 은혜갚음을 받은 선비의 이야기나,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한양까지 갔다가 임금은 될 수 없다며 돌아온 각설이의 이야기, 우리가 예전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은 그런 소박한 것들이 아니었던가.

여는 미로냥 님의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자신에게 되묻곤 한다. 내가 동양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이런 것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무협 영화는 즐겨 보지만 무협 소설은 즐기지 않고, 한국 순문학 소설을 즐겨 보고 비천무와 불의 검과 바람의 나라에 열광하지만 옛 민화와 전설을 찾아 읽는 것에 그렇게 부지런하지는 않다. sf영화나 단편선은 거의 빼놓지 않고 수집하지만 번역되지 않은 고전들을 읽는 데는 인색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는, 동양적인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4. 기만과 협잡의 혼례 – 추선비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여는 이 글을 처음으로 다 읽고 나서 이번 단평에는 반드시 이 말로 시작하리라 결심했다. 그럴 정도로 이 글은, 여태까지 여가 작가에 대해서 갖고 있던 판단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남자의 1인칭이라는 형식 때문이 아니다. 작가분에 대해서 여가 지금까지 판단한 단점과 장점을 분명 추선비 님은 잘 아셨던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뒤집으실 줄은 정말 몰랐다. 강렬한 문장에 압축된 서술, 그러나 난해한 사건 전개, 아낀다 싶을 정도로 나오던 대사, 선명하던 색채감. 그런 개성들은 어디로 가고 이런 글을 쓰신단 말인가.

미리 말하지만 이 글을 여는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추선비님이 이렇게나 사건에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이렇게 스토리가 선명하게 잡힌다는 것도 놀랐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들어간 복선이 말미에 풀어지는 방식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계속해서 어째서 내가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을까 의문스러워 하던 주인공에게, 여주인공은 약을 탔다는 말에 긍정해 보이면서 해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여는, 이 글이 추선비님의 글이라는 것에 적잖이 실망하기도 했다. 분명 독자에게 친절해지신 것도 좋고, 두 세 번 읽어야 이야기가 이해되는 것도 아니어서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만화를 떠올릴 정도로 늘어난 대사라니. 전반적으로는 설명이 상세한 듯 싶으면서도 인물의 대화가 나오면 배경은 생략되고 인물의 얼굴과 대사칸만 가득한 만화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1인칭의 소설이라서 일까. 인물의 감정 흐름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대화가 많은 부분의 상황은 흐릿해져 버린다.

글의 중 후반, 주인공이 이림의 집에 잠입하면서부터는 서술도 비교적 상세해진다. 함잡이 장면은 압권이다. 선명하고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다시 시영이 이림의 방으로 들어가면 다시 서술은 생략되고 대사만이 이어진다. 글이 안정적이 되는 것은 후반, 신랑 신부의 검무 장면이 되어서다. 시영의 눈에 비친 이림의 모습, 그 감정이 선명하게 와 닿을 정도로 이 장면은 확실히 나타나는데, 그러다 보니 앞부분의 이림과 명조의 대화가 더욱 빈약해 보이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글이 초반의 선명함, 중반에 있는 함지기 장면, 후반의 검무장면이 강렬한 대신 그 외의 부분이 가늘어 보인다. 분명 강조할 부분과 간단히 넘겨야 할 부분이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글에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저 셋인 것도 맞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이 강조되지 않는다고 해도 대화만으로 이어지는 것은 글의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린다. 1인칭의 구조를 하고 있더라도 강조된 부분들을 이어주는 고리 부분이 가느다란 실이어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추선비 님의 글에서 가장 독자를 애먹이던 부분이 해결되었던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작가가 독자를 그만큼 배려해서 쓰셨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쓰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셨을지도 상상할 수 있다. 바라는 것은 부디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장점을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다. 여가 몇 번이나 여러 작가들께 부탁 드린 내용이다. 추선비 님의 새로운 시도는 분명 성공적이었으나, 여가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은 것은 작가가 그럴 역량이 충분히 되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5. Shepherd's Moon – crazyjam

crazyjam님의 신작을 기대하고 있던 여는 이번에도 옛 작품이 올라와서 무척 아쉬웠다. 작가께서는 SF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재들을 자주 활용하는 편인데, 이 작품도 그렇다. 몇 개의 작품(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같은)을 제외하면 crazyjam님의 단편들이 거의 이러한 분위기로 흐른다. 그러면서도 SF로 분류하기보다는 판타지로 분류하는 쪽이 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미래 배경의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것은 무척 모호한 경계다. 그래서 어슐라 K. 르귄이 SF작가와 판타지 작가로 동시에 불려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여가 분류하기에 SF가 미래의 소재를 중심으로 미래적인 정서를 주로 다루고 있다면 판타지는 어떠한 소재를 가지고 오던 간에 환상적인 분위기나 정서를 주로 다루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미래적인 정서이고 어떤 것이 환상적인 정서이냐고 물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질문일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좀 돌아왔지만, 그러한 이유로 여는 crazyjam님의 글을 미래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라고 분류한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램이라는 존재들의 설정이나 우주를 개척하는 시대의 치열함이라기보다는 그 모습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흐린 도시 속에서 짙게 깔린 안개, 또는 담배 연기 자욱한 실내에서 바라보는 비 내리는 창가 같은 분위기가 작가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라고 생각하면 무리일까.

대화는 간결하고 서술도 그렇다. 사건의 전개는 격렬하기보다는 오히려 건조하다. 램의 폭주와 그 이후의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작가는 ‘나’의 시선에서, 계속해서 달을 바라보며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풍경을 묘사하다가는, ‘나’의 손으로 자신이 사랑한다고 여겼던 홀리의 머리를 쏘게 만들어 그러한 분위기의 절정에 다다른다. 짧은 순간에 사건은 종지부를 찍고 나는 자신이 쏘아버린 램에 대해서, 죽어버린 램들에 대해서, 그들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눈물을 흘린다. 그가 꿈에서 보는 것은 자신이 홀리의 머리를 쏘는 장면이 아니라, 모닥불 가에서 홀리의 눈동자에 달이 맺혔던 장면이다.

작가는 이 글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극단적인 모습인 램이 얼마나 비참한가에 대해서? 그렇다면 램의 폭주 장면과 그 살해 장면은 너무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단지 그 풍경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잃고 극단에 내몰려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래도 남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풍경들 말이다. 하지만 램들은 모닥불 가에서 잠들지만 ‘나’는 기사를 쓴다. 살아남은 램은 다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히스테리를 속에 안고서 극한의 상황까지 몰리겠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은 그대로가 아니다. 여는 그런 것을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는가 감히 추측해 본다.

혹 작가께서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다시 부탁 드린다. 혹 직장 생활로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쓰신다거나 하면 무척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부디 신작을 볼 수 있기를 기다리는 독자가 있음을 알아 주셨으면 한다.


6. 찬란한 눈동자들의 강림 – 赤魚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압축시켜 놓은 듯한 글이었다. 1인칭이라서인지 등장인물의 감정이 다른 글보다도 훨씬 선명히 드러나며, 모든 묘사는 전작들에 비해 습기를 머금고 있다. 서술의 상당 부분에 포함되는 비유와 대구(對句), 전작에 비해 긴 문장 길이 때문인지 글은 전체적으로 완만하고 느리게 느껴진다. 건조한 서술을 주로 사용하던 작가의 문장에 비교해보면 상당한 변화다. 짧은 문장들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화자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상기되어 있어서 짧은 문장도 격한 감정 표현을 나타내는 듯이 여겨질 정도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이 글의 스토리는 커다란 줄기로 압축될 수 있었다. 미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셀라를 그리워하면서 회상하고, 결국은 셀라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다. 판타지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식대로 그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이지만 인간 세계에서 섞여서 살아가고, 결국 그들의 현실로 돌아간다. 붉은 단풍잎 또는 푸른 단풍잎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힘도 스토리에서는 ‘나’ 미켈이 스스로에 대해서 확인해 가는 한 수단에 불과하다.

여는 문득 두려워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던 미켈이 셀라리오를 완전하게 지우고 종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결국 영원한 사랑에 대한 부정은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해도 오직 신념만으로 그 존재를 영원하게 하던 감정이, 글의 말미에서는 덧없이 사라진다. 미켈이 자신의 종족에 대한 의무와 사랑을 깨닫고 세계에 다시 종족을 번성하게 하리라는 결심을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의 감정의 전이라기보다는 셀라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지. 그렇게 헌신적이었던 존재가 사실은 자신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고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스토리를 읽고 나면, 마음 한 구석에서 안타까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정말 작가의 의지라면, 가장 믿고 신뢰했던 애정의 대상이 사실은 자신이 부정해야 할 무엇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거라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많이 안타까울 뿐이다.

판타지에서 항상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실상 많은 판타지에서 다루는 것은 한 영웅이 세계에 부딪혀 나가거나 혹은 많은 배신과 아픔을 딛고 세계를 구원하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인공이 그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인간’으로 명명되건 혹은 ‘동료’라는 것으로 지칭되든,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들이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을 신뢰하기를 기대하지 않는가. TLorR에서 엘프 레골라스와 드워프 김리의 우정을 기억하듯이.

여기까지는 스토리에 대한 불만이었고, 전체적인 짜임으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다만 후반부에 들어가 셀라의 실체가 드러나면서부터는 조금 내달린 느낌인데, 실제로 작가가 조금 서두르셨던 것은 아닌지? 많은 작가들이 글의 중반을 넘어서 초반의 개성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글에서도 조금 그러한 면이 보여서 아쉽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단순한 주제를 이러한 스토리로 풀어 나가, 또 이런 플롯으로 재구성해 낸 작가의 솜씨에는 경탄하고 있다.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7. 맺으며

매번 작가들께 한 가지씩 부탁을 드리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마침 글의 구성이 스토리를 빛나게 만드는 글들이 눈에 띄었으므로 그 말을 드릴까 한다. 단편은 짧은 글이다. 하지만 짧은 글이라고 해서 긴 글의 일부분을 싣는 것으로 되는 글은 아니다. 많은 장편 작가들이 써내는 단편이 범하는 실수다. 장편에 익숙한 작가들은 단편에 맞는 호흡이나 구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늘 자신이 써오던 장편의 방만한 서술을 그대로 사용해서, 장편의 일부분인 듯한 단편을 만들어내곤 하는 것이다. 단편은 길지 않은 내용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압축적으로 (그러나 부족한 것이 없이) 드러내면서 가장 적절한 스토리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단행본 한 권 이상 분량의 장편에서는 사건의 기 승 전 결을 모두 서술해도 좋지만 단편은 그렇지 않다. 긴 사건의 줄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에 중심을 두고, 다른 것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시간 순서를 바꾸는 것도 좋다. 적어 님의 이번 글이나 fool님의 글처럼 말이다.

단편에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분위기를 보여주려는 글이 아니라면, 즉 어떠한 주제를 나타내려고 단편의 형식을 택했다면 단일한 주제를 가장 선명히 드러낼 수 있는 스토리를 짜 내는 것도 필요하다. 모든 설정이나 배경들이 그 주제를 위해 긴밀히 짜여질 것, 인물들의 대사들도 장편처럼 방만해지지 않고 적재 적소에 적량으로 삽입될 것. 그렇기 때문에 단편을 쓰는 것은 어렵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여는 잘 된 단편을 찾기는 잘 된 장편을 찾기보다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단편을 잘 쓰는 작가가 오히려 장편에서 힘을 못 쓰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두 형식은 개성이 뚜렷해서, 어떤 형식을 자신이 사용하는가는 그만큼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숙고하셨으면 한다. 좀 더 퇴고하셨으면 한다. 글 전체를 모두 새로 바꿀 결심을 하고 글을 다시 들여다 보는 노력을 해 주셨으면 한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풀어내는 것만으로 소설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단편은, 그것 이상이길 바란다. 앞으로도 거울 필진 여러분들의 건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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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6 - 헤임스크링라 18 2005.03.25
거울 거울 20호 단편 단평2 2005.02.26
그림이 있는 벽 보라빛 매혹3 2005.02.26
거울 거울 19호 단편 단평6 2005.01.28
그림이 있는 벽 노래하는 늪 2005.01.28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5 - 헤임스크링라 17 2005.01.28
장르 판타지 랜드4 2004.12.29
거울 거울 18호 단편 단평 2004.12.29
그림이 있는 벽 신체의 조합1 2004.12.29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4 - 헤임스크링라 16 2004.12.29
그림이 있는 벽 시작 2004.11.26
장르 과학소설 읽는 행복한 세상 만들기 2 2004.11.26
거울 거울 17호 단편 단평3 2004.11.26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3 - 헤임스크링라 15 2004.11.26
거울 거울 16호 단편 단평6 2004.10.30
그림이 있는 벽 배웅1 2004.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