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기다림

2008.07.10 16:0607.10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확한 이유였다. 요슈아는 열일곱 살 때 자기가 태어난 고향집을 떠나야 했다.
집에는 늙으신 할아버지와 병든 어머니 그리고 꼬마 시엘이 있었다.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요슈아는 모든 것을 정리했다. 다니던 학교도 그만 두고, 여태까지 배우던 검술 연습도 하지 않은 채 짐을 꾸렸다. 떠나기로 한 당일 날,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배웅을 받고 밖으로 나오자, 꼬마 시엘이 자신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머리에는 장미로 만든 붉은 화관을 쓰고, 언젠가 산 것 같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뾰로통한 얼굴로 요슈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싫어.
시엘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가버리면 시엘은 심심해져 버릴 거라며 불평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언제나 요슈아는 시엘과 놀아주기로 했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다.
오 년 전 아직 보자기에 싸여 있는 시엘을 어머니가 안고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당 앞에서 버려져 있었다면서.
요슈아는 시엘에게 길고 긴 시간을 들여서 말했다.
자신이 가야 하는 이유를.
그리고는 계속 길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꼬마 시엘이 요슈아의 앞길을 막았다.

그래도 싫어.
그리고 계속 해서,
가지마.
그렇게 말했다.
나, 그림 그릴 때 파란색이 빨리 닳는다고 요슈아에게 불평하지도 않고, 샐러드 먹을 때도 양배추만 골라내지도 않고, 또 요슈아가 꼬마 시엘이라고 부른다고 화내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날아다니는 바퀴벌레나 커다란 쥐를 잡을 때도 무섭다고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가지 말아.

요슈아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꼬마 시엘의 곁을 요슈아는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멀리서 풍차가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꼬마 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돌아다본 뒤에는 꼬마 시엘이 울고 있었다. 자리에 주저 않은 그대로.
요슈아는 천천히 꼬마 시엘의 곁으로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었다.
꼬마 시엘은 계속해서 울었다. 시엘은 요슈아가 밉다고 말했다. 싫다고 말했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렇게 계속. 그렇게 계속 시엘은 울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졌다. 시엘은 울지 않겠다고 다짐 했지만 결국 요슈아가 보이지 않을 때쯤에는 또 다시 울었다. 몇 시간이고 계속.

요슈아는 떠나며 시엘에게 편지를 하겠다고 했다. 시엘은 아직은 글을 잘 모르지만, 요슈아가 편지를 쓴다고 했기 때문에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편지를 기다리며
헤어지던 날. 꼬마 시엘은 다섯 살, 그리고 요슈아는 열일곱 살.


요슈아가 도착한 마을은 매우 더운 곳이었다. 그곳에는 열병이 있었고, 뱀이 있었고 도박꾼이 있었다. 일은 힘들었고 사람들은 거칠었다. 낮에는 하루 종일 혹사당하고, 저녁에는 편지를 썼다.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꼬마 시엘이 좋아하는 파란 색깔 잉크로 적어서.
편지가 도착하려면 적어도 두 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배달원은 말했다.

시엘은 무척 심심했다. 시간이 느리다는 말의 의미를, 시간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주 어린 나이에 시엘은 체감했다. 똑같은 날의 반복이었다. 매일매일 할아버지를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채마밭으로 부축해 드리고, 요슈아의 어머니를 간병했다. 스스로 무거운 쟁기를 들고 밭도 갈았다. 야채도 심었고, 가끔은 시장에 나가서 달걀을 우유와 바꾸어 온다던가, 다른 필요한 물건들을 사오기도 했다.
저녁에는 언제나 글자를 공부했다.
요슈아의 편지는 요슈아가 떠난 지 세 달 만에 도착했다. 요슈아가 번 돈과 함께 날아온 파란 색깔의 잉크로 적힌 내용의 편지.
편지는 마치 마술이 걸려있는 마법의 편지 같았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그 날 저녁 시엘은 답장을 써 내려 갔다.
편지가 도착하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거야. 배달원은 그렇게 말했다.

요슈아가 떠난 지 삼 년이 흘렀다. 어느덧 시엘은 여덟 살이 되었다. 하지만 별다른 일상의 변화는 있지 않았다. 이전에 비해서 좀 더 많은 일을 할 뿐이었고, 삼 년 전에 비해서 키가 조금 자랐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채마밭에 앉아서, 이젠 하느님의 곁에 있는 할머니의 묘비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아직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직 어린 시엘은 그런 내용들을 구구절절 편지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병세와 할아버지의 상태, 그리고 자신의 현재를 모조리 써 내려 갔고, 그리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썼지만, 자신의 키가 컸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요슈아가 돌아와서 부쩍 자라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놀라길 원했기 때문에.
그것은 비밀로 하고 싶었다.

다시 삼 년 뒤.
나라에 전쟁이 일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신교와 구교 사이의 전쟁은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 지고 말았다. 요슈아는 짐을 챙겼다. 아직 어린, 시엘과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수도에서 시작된 전쟁은 어느새 주변의 도시로 번졌고, 어느새 나라가 분열되어 버렸다. 짐을 들고, 문 밖으로 나서자 배달원이 보였다. 배달원은 요슈아에게 편지를 건 내주었다. 분명 자신이 쓴 편지. 배달원은 그곳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함께, 이번에는 붉은 빛이 도는 편지를 건 내주었다. 불타고 있는 집 밖에서 쓰러져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끝까지 손에 쥐고 있던 거였다고 했다. 꼬마 시엘의 편지. 안에는 적다가 펜을 흘린 자국과 핏자국만이.

고향으로 가는 건 무리라고.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무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고. 배달원은 그렇게 말했다.
요슈아는 칼을 뽑았다. 사람을 모으고, 무기를 구하고. 조직을 결성했다. 그리고 싸웠다. 모든 것을 앗아간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다짐한 그 날부터 계속해서 싸웠다. 싸울 때마다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고, 얼굴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 신교든 구교든 가리지 않고 요슈아는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그들을 죽일 때마다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직 어린 시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기 있잖아 요슈아. 시엘은 공주라고 할아버지가 그랬잖아. 그런데 옛날 애기에 나오는 공주들은 전부 멋있는 기사들이 곁에 있는데, 시엘의 옆에는 아직 기사가 아무도 없어. 그리고 요슈아도 검술을 배우는데 아직 공주를 못 찾았잖아. 그러니까, 시엘은 요슈아로 선택해 줄게. 그러면 요슈아는 언제나 날 지켜 주는 거야. 커다란 바퀴벌레가 집안을 날아다니거나 새까만 쥐가 침대 밑에서 나오는 건 너무 무서우니까 말야. 가끔 밤에 울부짖는 늑대도 너무 무섭고. 기사로 선택되면 요슈아는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시엘과 함께 지내야 해. 그리고 나중이 되면 서로 결혼을 하는 거야. 예쁜 옷도 입고, 서로 반지도 바꾸고, 키스도 하면서 말야. 그래서 여기서 평생을 함께 같이 사는 거야.」

어린애가 못하는 말이 없다고. 그때는 그렇게 말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국 자신은 시엘의 기사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시엘과 있었을 때의 자신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엘과 함께 있었던 시간동안 자신은 항상 웃었던 것 같았고, 또 언제나 즐거워했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증오하며, 그리워하며, 그렇게 요슈아는 세월을 보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요슈아와 같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그 싸움의 구도가 옮겨졌다.
이익을 본 사람도, 피해를 본 사람도, 막대한 슬픔만을 남긴 채 그렇게 전쟁은 끝나버렸다.




요슈아는 정처 없이 걸었다. 얼굴에는 커다란 십자 흉터와 무수하게 많은 잔 상처가 나 있었다. 어릴 적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참을 걸었다. 여태까지 살아 온 시간보다도 더 오래 걸은 것 같았다. 어릴 때 살던 곳에 도착하자, 낯익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풍차와 사과나무 밭,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러 마을 사람들의 집. 채마밭과, 그리고 언덕 위에 있는 아담한 이층집.
요슈아는 정신없이 달렸다. 낯익은 집의 모습. 이층으로 올라가서 시엘의 방으로 들어가자 자신이 보내준 편지가 그대로 올려 져 있다.





어째서. 타버렸다고 들었는데. 모두 죽었다고 들었는데.
재빨리 집 뒤에 있는 동산 쪽을 향해서 달렸다. 잔잔한 바람이 부는 동산에 키가 작은 하얀머리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처다 보고 있던 소녀는 요슈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 서야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여행자 분이신가 보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십 칠년 전부터 계속 해서요. 다정한 사람이었거든요. 착하기도 했고. 어린 제가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다 들어 주는 그런 사람이었죠. 싫다고 하면서도. 하지만 십 일 년 전, 전쟁이 일어난 뒤부터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어요.』




그래도 아직까지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언제 까지나요. 왜냐면, 그 사람은 제 기사가 되어 준다고 했거든요. 웃으셔도 상관없어요. 키도 아직 작아요. 전 아직도 어린애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람결에 하얀 머리가 휘날리는 소녀의 모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어릴 적의 모습이 보였다.



십 일 년 전에 시력을 거의 대부분 잃어 버렸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거든요. 이 세상을 더 이상 못 본다는 것도 슬펐지만, 언젠가 그 사람이 나를 찾아오면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더 슬펐어요.
















아…. 죄송하지만, 일어나고 싶어서 그러는데. 손 좀 잡아 주시겠어요?



기다림



요슈아의 나이 서른 셋.

꼬마 시엘의 나이 스물 하나.




Fin.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137 단편 청소로봇 스아 2008.07.14 0
1136 단편 소설가의 사랑 땅콩샌드 2008.07.12 0
단편 기다림 2008.07.10 0
1134 단편 유시걸식 행운보존법에 대하여6 dcdc 2008.07.08 0
1133 단편 장마2 미루 2008.07.08 0
1132 단편 가면 dendea 2008.07.05 0
1131 단편 인형 야상곡1 유리나무 2008.06.29 0
1130 단편 사이코패스를 대하는 요령9 니그라토 2008.06.29 0
1129 단편 마더쉽 니그라토 2008.06.29 0
1128 단편 출산률 0% 니그라토 2008.06.29 0
1127 단편 인류의 멸망 니그라토 2008.06.29 0
1126 단편 새벽 3시 반 별가람 2008.06.28 0
1125 단편 안에 사람 있어요3 dcdc 2008.06.26 0
1124 단편 죽어라! 이 신데렐라야!5 DOSKHARAAS 2008.06.24 0
1123 단편 총통 가라사대1 湛燐 2008.06.22 0
1122 단편 날개를 가졌음에도 날아오르지 않는 이에게1 지호 2008.06.20 0
1121 단편 내 딸의 탄생설화에 관하여7 dcdc 2008.06.19 0
1120 단편 짝사랑1 스아 2008.06.17 0
1119 단편 # 죽은 나무 # Deep Seer 2008.06.15 0
1118 단편 2 세이지 2008.06.14 0
Prev 1 ...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