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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실제가 환상이 되는 때

2006.10.18 20:3510.18



1. 소년 우루

'과거의 정령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전설의 요정과 괴물들은
다 용사들이 처치해 버렸을까? 신이란 그토록 명확하게 소원을 들
어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일까. 그런데 지금은 다들 어디로 가버
린 걸까?'

오늘도 환타지 영화를 보며 환타지 소설과 고대의 신화 전설 따위를
읽으며 우루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환타지 영화며 소설
이며 할 것 없이 팬이었고 세계 각국 민족들의 고대 신화나 전설에도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오늘도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친형 우테는 이렇게 면박을 주었던 것이다.

"야, 언제까지 말도 안되는 얘기에 목숨걸래? 현실에 좀 신경써라.
맨날 그런 거만 보고 읽으니까 니가 그 모양이지."

"우씨. 형이 내가 환타지 좋아하는데 보태준거라도 있어? 왜 맨날
신경질이야? 그리고 옛날엔 형이 우습게 아는 환타지같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고! 옛날 책들이나 이야기들을 봐. 하
다못해 역사책에도 나오잖아!"

"야 야 그거야 다 옛날 사람들이 미신이나 믿고 과학이 뭔지도 모르
고 그래서 그런거야. 드래곤 같은 건 옛날에 죽은 공룡화석 같은 것
보고 사람들이 상상해서 만들어 낸 걸거고 엘프나 드워프 같은 건
좀 희안하게 생긴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족같은 거가 있었는데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이상하게 변형되서 전해졌겠지. 마법? 마법이 어딨
냐? 고작해야 마술사들 마술하고 과학이 짬뽕된 것 같은 걸로 사람
들을 속였겠지."

"이씨, 그러는 형도 뭐 다 추측일 뿐이잖아!"

"그래, 나도 추측이긴 하지. 하지만 솔직히 그런 게 옛날에 있었다
면 지금은 왜 다 안 보이는 거야? 이상하잖아? 다 숨어버려서 그렇
지 어딘가에선 다 그대로 존재한다고? 만일 그렇다면 없는 셈 쳐도
상관없는 거겠네. 어차피 평생가야 내 눈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 걸
신경써서 뭐해? 그 시간에 나한테 실제로 영향을 줄 일이나 신경쓰
는 게 낫지. 안 그렇냐고. 너도 그냥 취미로 좋아하는 걸로 그치고
실생활에 더 신경쓰도록 하는 게 좋을거다. 아, 뭐, 그 길로 나가서
그런 소설같은 거 써서 너랑 비슷한 녀석들한테 팔아먹고 살 생각
이라면 말리진 않을께. 그건 나름대로 현실적인 거니까. 나 학원
갈 시간이니까 이만 간다."

거기까지 말한 형 우테는 학원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 버렸고
우루는 화를 못이겨 씩씩거리면서 우테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솔직히 형의 말에 감정적으론 절대 동의할 수는 없었고 우루
나름대로도 형이 나가지 않았다면 좀 더 오랜 시간동안 말싸움이라
도 해볼 수 있었겠지만 그런 이유는 형이 학원가려고 나가는 걸 막
을 수는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자신으로선 형을
완전히 말로 승복시키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우루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마치 우루 자신이 산타크로스가 존재한다고 우기면서
형과 싸움이 붙었을 때 형은 자신에게 잠을 자지 말라고 하면서
살그머니 밤중에 선물을 놓고가는 부모님의 모습을 나에게도 보게
해주어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산타크로스를
형의 눈 앞에 데려와 형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루는 자기가 좀 더 나이가 들어 많은 것을 알게 된다면 형에게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지금
자신은 나름 어른스럽고 아는 게 많은 듯 보여도 사실 너무 모르는
게 많은 12살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자
신이 틀렸다면? 내가 틀리고 말끝마다 현실, 현실해대는 15살 우테
형이 맞다면?  그래서 몇 년이 지나 우테 형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도 우테 형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러면 너무 끔찍한
일이 될 것 같아 우루는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나도 정말 우테 형 앞에 보란 듯이 내가 맞다는 걸 보여줄 수 있었
으면 좋겠어... 우테 형 앞에 용이며 선녀며 거인이며 요정같은 걸
보여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으시대던 형도 꼼짝 못할
텐데... 정말 다들 어디에 있는거야? 우테 형 눈에 안 보이는 건 그렇
다쳐도 이렇게 간절한 내 눈엔 왜 안 보이는 걸까... 믿는 사람한텐
보인다고 했잖아... 만화나 영화나 책 속엔 저렇게 많은데 왜 직접
보진 못하는 걸까... 그냥 다 꾸며낸 얘기일 뿐인걸까? 그치만 옛날
책에도 나오잖아. 그것도 다 꾸민건가?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
옛날로 돌아가서 확인해보고 싶다...'

우루의 머리속에선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간단히 해결이 날 일인
지도 몰랐다. 아마 형도 이렇게 말하면 꼼짝 못할지도 몰랐다.

"응, 형. 난 이게 다 환상이란 걸 알아. 하지만 그게 어때서? 난
형이 축구나 농구를 좋아하고 공부를 좋아하듯이 환타지를 좋아하
는 거 뿐이야. 그게 무슨 문제가 돼? 나만 아니고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 즐기고 있는 건데.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 현실은
내팽개치고 살진 않잖아? 나도 다른 거 다 하면서 취미로 좋아할
뿐이니까 간섭하지 마!"

  그러나 아쉽게도 우루는 전혀 그렇게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루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루는
언젠가 읽었던 슐리만의 위인전을 너무나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
었다. 모든 사람이 신화라 비웃었지만 끝까지 그것이 실제라 믿
고 결국 그것이 실제라는 것을 증명한 슐리만의 이야기는 우루에
게 그 어떤 위인의 이야기보다도 감동적으로 다가왔었던 것이다.
우루는 그런 식으로 환타지라는 것에, 신화와 전설이라는 것에
접근하는 아이였다. 우루는 그것이 정말이라는 것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입증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12살의 나이였지만 이미
우루는 요정을 찾으려고 집 근처 산을 온통 뒤지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자는 동안 왔다가지나 않을까 하여 3일을 밤잠을 자지 않고
지샌 적도 있었다. 그밖에도 들고양이들이나 비둘기들이 사는 곳
을 찾아 나선다든지(혹시 변신하지나 않을까 하여) 높은 빌딩과 아
파트의 옥상을 자주 찾는다든지(위쪽에 올라가면 혹시 뭔가 보일까
봐) 근처 시립도서관에 죽치고 않아 아동, 성인 도서 할 것 없이
모든 책을 다 뒤진다든지(마법이 적힌 책이나 이계로 향하는 문이
되는 책이 있을까봐) 하는 희안한 행동들을 많이 해댄 결과 부모님
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만일
학교 성적마저 나쁘게 나왔다면 크게 혼이 났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부모님들은 그냥 넘어가곤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생각해
보면 우테는 그런 점이 못마땅해서 더 우루에게 면박을 많이 주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인 우루는 우울하기만 했다. 그토록 간절히 찾았건만
자신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요정 비슷한 것, 하다못해 반 친구
들중 여러 명이 봤다고 말하는 귀신같은 것 조차도 우루의 눈 앞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루는 결국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녹화해 두었던 '네버 엔딩 스토리'  '오즈의 마법사' 같은 영화와
사 두었던 '세계의 전설과 신화' 나 '한국전래민화집' 같은 책들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 수 밖에 없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런 하루였다...



2. 10년 후

"우루야,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 이것 좀 먹고 해라."

"네, 어머니. 잘 먹을게요."

과일과 쥬스가 담긴 쟁반이 책상 위에 놓여졌고 우루의 엄마는
조심스레 소리가 날새라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책상
앞에는 정신없이 전공서적-아마도 경제관련 서적인 듯 보이는-
을 펴놓고 공부중인 우루가 있었다. 그렇다. 우루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다. 우루의 나이는 22살. 그는 이미 청년이라 불리워야 마땅
한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대학교에 2년 전 입학했고 무척 열
심히 공부했으며 장학금도 자주 받아 왔다. 그에겐 딱히 취미도 없
었고 오직 공부만이 취미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같은 학과생들
도 왠지 가까이 가기 어려운 느낌을 주는 그런 학생이었다.  너무
나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으며 공부 외엔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
고, 동시에 같은 학과의 학생과도 거의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아웃사이더 같은 학생이 되어 있었다, 우루는. 그리고 역시 훌쩍
커버린 그의 형 우테는 언제나처럼 우루의 방문 밖에서부터 시끄러
운 소리를 내며 엄마와 다투고 있었다.

"이놈의 자식아, 또 어딜 술쳐먹고 돌아다니다 온거니!"

"아 제발 냅둬요. 정말!"

"제발 동생 우루 좀 본받아라!  일류대에 턱하니 붙어서 장학금
받고 다니잖니! 넌 고작해야 삼류대나 다니면서  이게 뭐니?
그것도 휴학하고 있는 주제에!"

"아 진짜! 짜증나게 또 왜 그래요. 우루랑 그만 좀 비교하라구요!
그리고 저도 그냥 노는 거 아니라고요! 저도 작가라고요, 작가!"

"어디서 이상한 거나 끄적거리는 주제에 작가는 무슨 놈의 작가!
우루 공부하는 데 방해 되니까 얼른 씻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몇 번 더 시끄러운 문답이 이어지고 몇 번의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난 뒤 집안은 비로소 잠잠해졌다. 우루는 밖의 소리가 전혀 안들리기
라도 하는 듯 자세에 변함이 없었고 엄마가 갖다 놓은 과일이나 쥬스
에도 손을 대지 않은 채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1~2시간 쯤 더
흘렀을까. 비로소 우루가 공부를 멈추고 기지개를 펴며 포크를 들고
과일을 찔러 입안에 넣기 시작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불청객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 불청객은 바로 우테였다. 그저 조용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 왔으므로 들이닥쳤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
으나, 어쨌든 아무 예고 없이 들어온 것은 맞았다. 우테의 얼굴은
아직도 벌갰으나 술은 좀 깼는지 엄마랑 말다툼할 때보다 진정이
된 모습이었다.
우테는 소리없이 들어와 벽에 기대어 조용히 과일을 먹는 우루의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공부 잘 되냐?"

"응. 잘 돼."

"그래? ㅎㅎㅎ..."


잠시 침묵이 흘렀고 우루가 과일을 씹어 먹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우루는 더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우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야, 너 혹시 옛날에 너 어땠는지 기억나냐?"

"옛날이라니 언제 말하는 거야?"

"초등학교 다닐때 말이야."

"응. 기억나."

"야.. 너 그 때 생각하면 니가 너무 변했다고 생각 안하냐? 어떻게
맨날 환타지만 생각하고 요정이나 도깨비나 찾던 애가 이렇게 변할
수가 있냐?"

"그러는 형은 어떻고? 맨날 그런 나한테 현실적이 되라던 형은 왜
그렇게 사는데?"

"야, 그건...."

"요즘은 인터넷에서  환타지소설 연재한다며?"

"아, 그게... 연재한지 오래 되진 않았는데.. 뭐 반응이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라서 좀 기대해봐도 될 거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출판사에서 전화가 온 건 아니지만..."

"그럼 아직 아무 것도 아닌 거네?"

"....응."

"솔직히 나도 형 글 잠깐 한 번 읽어봤는데, 별로 잘 썼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어. 팔릴 것 같다는 생각도 안 들고."

"그랬니..."

"형은 그쪽엔 소질이 없는 거 같으니까 다른 쪽으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야, 너 아무리 그래도 말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이 어딨어! 난 이래봬도 진지해!"


"형. 진지한 게 밥 먹여줘? 사람은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고 결과가
중요한 거야. 형이 그런 말을 하려면 괜찮은 결과를 내놓고 난 뒤에
하란 말이야.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괜히 부모님 속썩이고 집안 시
끄럽게 하지 말고 아르바이트라도 하든가 학교 제대로 다니면서
짬짬이 하라고."

"너, 진짜 너무한다. 솔직히 옛날의 니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굴긴 했어도 그땐 니가 착하고 순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젠 너무 차가워졌어. 너 친구 한 명도 없지? 너처럼
사는 애한테 친구라도 한 명 있겠냐? ...지금 생각하면 나도 그때
어렸던 것 같다. 너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

"형이 그때 한 말들이 형도 다 알고 한 말이 아니란 건 나도 이젠
알아. 나보다 3살이 많았고 그래서 정말 나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했
지만 형도 결국 평범한 열다섯살일 뿐이었어. 현실을 강조했지만
형도 현실이 뭔진 사실 잘 몰랐지.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있었던 것
도 아니고 모르는 게 더 많았던 건 형도 마찬가지였어. 그리고 지금
은.. 과연 형이 나보다 현실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환타지
소설을 쓴다니까 환상이 뭔지는 나보다 잘 알지도 모르겠네."

"....."

"내가 아는 현실은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 앞에
떳떳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내 앞가림은 한다고 할 수 있다는 거야. 형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나는
그저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란 것에 맞춰주기로 했을 뿐이야.
어차피 일단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맞춰주기로 했다니..?"

"나중에. 나중에 그럴 기회가 온다면 말해줄게. 지금은 더이상 묻지
말아줘."

  그렇게 말하고 공부에 다시 열중하기 시작하는 우루를 보면서 우테
는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섬뜩한 기분이
었다. 기억속의 어린 우루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우테는 술이 확 깨고
있었다. 대체 그 산타크로스와 요정을 믿던 어리숙하고 순진해 보이
던 우루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3. 결론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
사람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 뿐더러
쉽사리 예측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고.

  내가 취한 상태로 우루와 나누었던 대화 이후 우루는 속내를 더
이상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우루가 그렇게 되리라고 조금이라
도 예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세상 사람 중 나 하나 뿐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대체복무로 병역을 마치고 과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한 우루는
유학을 갔고 그곳  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하고 나서 그 나라의
모 회사에  많은 연봉을 받고 입사하여 눌러 앉았다. 우루가 그 곳
에서 어떤 삶을 보내는지 자세한 소식은 알 수 없었지만 우루를 대견
해 하시는 부모님과 달리 나는 왠지 우루가 거기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느낌대로 우루는 몇년 되지 않아 그곳을 나와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고 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그 사이 학교를 겨우 졸업
했으며 군대를 힘들게 다녀 왔고 출판사에서 연락은 오지 않았으며
연재소설의 인기는 여전히 별로였다. 이제는 소설을 올리는 것도
시들해지고 그저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것만이 급급한 상태였다.
그리고 우루의 회사는 상당히 잘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금융
쪽엔 거의 문외한이었지만 우루가 영어로 된  경제잡지에 얼굴이 나
온 것을 보면서도 우루가 잘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래, 과거가 무슨 소용이냐. 현재가 제일이지. 내가 어릴 적 네게
했던 말은 정말 다 헛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당시 우루가 했던 알 수 없는 한
마디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직 나 혼자만
이 느낄 듯한 희미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우루가 뭔가
일을 터뜨릴 것만 같은 불안감을. 그리고 우루는 결국 정말 일을
터뜨렸다.  서른 초반에 불과한 나이에 우루는 회사 운영에서 물러나
전혀 생소해 보이는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 사실 생소한 일이
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20년 전 우루 자신이 했던 일이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우루가 그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울고불고 난리가 난 부모님과 달리 너무
나 담담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담담함
이었다. 스스로도 더 경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담담했다. 나는 우루가 예전에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형. 난 말이야, 내가 하려는 일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신기하지? 난 내가 페어리나 도깨비나 선녀나 용왕이나 드래곤이나
엘프나 라퓨타나 부뚜막신이나.... 어떤 거든 간에 정말 만날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아.  옛날이라면 정말로 만나든 못 만나든
존재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했을 거야. 근데 이젠 정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

"그런데 왜 또 그러려는 거야? 돈 쳐바른 장비들까지 동원해서?
이왕 하는 거 슐리만 같이 되고 말거라는  말이라도 해야 멋있는 거
아니야? 니가 지금 하는 행동도 슐리만이랑 비슷하잖아."

"그래 알아. 슐리만은 과거에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었고
지금도 다섯 손가락안엔 그가 꼭 들어가니까. 그리고 나는 그렇게
되려고 애썼어. 사람들이 다 환상이라고 말이 안된다고 해도 아니라
는 걸 밝혀내겠다고 말이야. 내가 더 많은 힘을 갖게 되고 더 많이
알게 되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무 것도 돌아
보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어. 그런데 말이야... 이제는 요정이
정말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상관이 없어졌어."

"무슨 뜻이야?"

"요정이 정말 존재하지 않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광고
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도, 마법이란 게 실제론 존재하지 않더라
도, 박혁거세나 주몽왕이나 수로왕이 알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단군
왕검이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이 변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해도 나는 이 일을 그만두지 않을 거란 얘기야. 혹시 모르지.
이렇게 찾다 보면 찾아내게 될지도 모르고 생각지도 못한 게 발견될
지도. 그렇지만 발견하냐 못하냐가 이젠 중요하지 않아졌어."

"너 예전엔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한 거라고 하지 않았었냐?"

"ㅎㅎ 그랬지. 하지만 이젠 다르게 말해야겠어. 내가 이제 말할 수
있는 건 슐리만은 트로이를 찾을 수 없었다면 행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어도 행복할 거라
는 거야."

"왜 그렇게 변했는데?"

"나도 모르겠어. 언제부턴가 그냥 그렇게 돼 버렸어. 굳이 설명하
자면.. 내가 막상 그런 것을 찾아낼 때가 오고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지금도 실존함을 밝히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 '새로운 현실'을 벗어
난 '새로운 환상'을 찾아 떠날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
이야."

"새로운 환상?"

"그래. 내가 만약 발견에 성공해서 사람들 앞에 환상이라 여겨지던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음을 밝히는 날이 온다고 하면 나에겐
그건 더이상 환상이 아닌 게 돼버리는 거야. 그건 마치 핵폭탄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은 거지. 어릴 때의 난 내가
신화와 전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서 사람들에게 의기양양해
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어. 하지만 만일 그게 실제라는 걸
입증하고 사람들 앞에 보인다면... 제우스 신의 번개도 핵폭탄이나
별 다를 게 없어지는 거야. 그리고 거기엔 아무런 흥분도 기대도
없겠지..."

"글쎄, 그건 좀 이상한데. 사람들은 실제 역사속의 인물들이나
사건들에도 충분히 열광하잖아?"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라는 게 과연 실제 그대로일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야. 왜냐면 '있는 그대로의
역사' 라는 건 전해지는 게 불가능하거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은 결국 '이야기'일 뿐이야. 그리고 그 이야기란 것은 환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역사' 라는 건 그 사람이 실제로 그
때를 살아봄으로써 개인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일 뿐이야.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가령, 삼국지의 시대를 정말 살게 된다면 거기엔
사람들이 아는 모든 이야기와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고 결코  이야
기에 열광하듯이 열광할 수도 없을걸? 어디까지나 떨어져서 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거야."

"음.. 솔직히 뭔말인지 알듯 말듯 하다."

"뭐, 상관 없어. 그저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알았다는
거야. 나는 그저 끝없이 환상을 찾아 헤메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
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  

"그럼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묻겠는데.. 그 일을 하느니 차라
리 거기 드는 돈을 사회봉사단체에 기부 할 생각은 없니?"

"응."

"알았다. 잘 다녀와라."


그 대화 후 우루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우루의 새로운 프로
젝트의 이름은 '울프(ULF)'. '환상을 갈망하는 우루<Uru Longing
for the Fantasy>'의 약칭이었다. 녀석은 그 후 유럽이며 시베
리아며 인도양이며 아라비아 반도며 남아메리카며 그린란드며
세계를 두루 돌아 다녔다고 하는데 거기서 뭘 했는진 모르겠다.
그리고 집에 들르지도 않았기에 나와 부모님은 그 녀석의 얼굴을
직접 볼 수도 없었다. 나는 별로 대단친 않지만 어느 직장에 취직
했고 여전히 평은 신통친 않지만 심심할 때면 소설을 계속 끄적거
렸다.

그리고 어느날인가 북극쪽에 갔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우루의
소식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실종되었다는 소식만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4. 실제가 환상이 되는 때


<<우테 형.   형이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까.
형이 이 편지를 읽을 수 있길 바라지만 읽지 못할지도 모르겠지.
뭐, 그래도 상관없어.

난 내가 형에게 못한 말이 더 많았다고 생각해. 그 중에
첫번째는 형을 좋아한다는 거야.

어릴 적 난 형을 많이 싫어하기도 했지만 자라면서 형을 이해할 수
있었어. 그리고 내가 속의 얘기를 털어 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결국 형이었어.

그렇지만... 형에게 끝까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말았네.
이제서야 말하게 되다니.. 좀 더 일찍 말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와.

   ...
  

   하하하!

이렇게 쓰니 꼭 유서 같지?
걱정마. 난 잘 살고 있으니까.

응? 어디서 살고 있다는 거냐고?  흠...  
형,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어.
  
실제와 환상이라는 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유럽에서 사람들이 천동설을 당연스레 믿고 있던 시대가 있었어.
어느날 누군가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것이
처음엔 박해를 받았어. 그러나 결국 그 주장이 여러 발견들로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고 지금은 사람들이 지동설을 당연스레
믿고 있어.

근데 말이야. 세상이 정말로 지동설이라고 쳐봐.
그러면 그 지동설인 세상에서 천동설이 맞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걸까?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그
사람들은 천동설을 실제라고 믿고 산 거야. 근데 그게 사실은
환상에 불과했단 말이야.

그렇지만 그들은 그 환상을 너무나 실제라고 여기고 잘 살았어..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결국 환타지세계에서 살았다고 해야 할까  
현실세계에서 살았다고 해야 할까.
  
천동설을 굳게 믿던 사람들이 처음 지동설을 만났을 때의 기분은
어땠을 것 같아.

그건 엄청난 충격이었을거야. 세계가 깨어지는 듯한 기분.
그들은 그게 설령 실제일지라도 거부하려 들게 돼.
그 사람들에겐 믿어온 바가 실제보다도 중요한 거야. 그래서 그게
설령 믿음일 뿐이라도 믿음을 위해 실제를 거부하게 되는 거야.

그 '믿어온 바'나 '믿음'을 '환상'이란 이름으로 대체해 부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형?
  
그리고 형.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진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바가, 사실은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나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
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미래에 태어난 사람들이 지금 우리 역시도 사실은 환타지세계에서
살았던 거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요정과 이야기하고 알에서 사람이 태어남을 진지하게
기록으로  남긴 그들보다 낫다고 자부할 수 있는 걸까?  
      
형. 실제가 환상이 되고 환상이 실제가 되는 것을 보면 너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난 이제 어느날인가 다시 천동설이 맞다고 알려진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거야.  

      
그리고 형. 사실 이미 난 그런 상황속에 있어.
실제가 환상으로 바뀌고 환상이 실제가 되는 상황속에.  
이게 실제라면 항상 이래왔던 거겠지...
그러나 과연 이게 실제라는 걸 지금 당장 몇 사람이나 받아들일까?
사람들은 실제보다 '납득이 가는 설명'을 더 선호하잖아?


아마 대부분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환상을 그대로 믿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이게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리고 또 이것마저도 실제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는 날도 올까?


난 이제 이런 생각마저 들어. 모든 사람은 항상 환상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생각, 사실 아무도 실제에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래, 형.
나는 마침내 내가 찾고 있던 것 이상의 '환상'을  발견했어.
그리고 막상 닥치니까, 기분은 전에 말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

전에 난 언제까지나 환상을 찾아 헤메는 것 자체를 즐긴다고
말했지.
그래서 막상 환상이 실재한다는 걸 입증하게 되면 싫증날
것 같다고.

그런데 나는 멍청했어.

사실 이미 난 환타지세계의 주민이었던 거야.
결국 내가 발견한 것은
내가 환타지세계의 주민이라는 '현실' 이었어.............  >>


  우루가 실종된지도 몇 년이 지났을 때,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병에 담긴 채로 대문 앞에 놓여져 나에게 전해진 우루의 편지는
이렇게 끝나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편지를 태우고 내용은 나의 마음속에만 간직하기로 했다.

난 아직 우루의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루
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여전히 알 수가 없다. 편지를 추적해 들어
가면 뭔가 대단히 음울하고 기괴한 사실과 마주치게 될 것만 같아
겁이 나기도 한다.

나는 이제 내가 처음 입사했던 회사에서 어느 정도 승진도 하고
책임있는 위치에 올라 있다. 환타지 소설은 읽지도 쓰지도 않은지
꽤 되었다.

부모님은 우루에 대해서 이젠 별로 얘기를 하시지 않고 오히려 내
걱정을 더 많이 하신다. '그래도 너밖에 없구나.'하는 말도 종종
하실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몇 년 전에 사내결혼을 해서 딸이
하나 있기도 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한 딸에게 아내와
나는 '루루'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휴일에 단둘이 집에 남아 TV를 보고 있던 어느날 루루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 요정은 정말 있는 거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금 내 옆
에도 있는 거야?"

나는 당황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루루야, 그건 아빠도 모르겠다."

"아빠, 난 요정이 눈에 보이진 않아도 우리랑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내가 이상한 거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는 루루의 눈을 보며 나는
갑자기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루의 눈 속엔 어린
시절 기억속의 우루를 너무나 닮은 눈빛이 빛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잠시 무섭기도 하고 말문이 막히기도 하여 쳐다 보고만 있던
내 머릿속에서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은 어처구니 없게도 이런 것
이었다.

'아, 정말 괜히 애 이름을 우루랑 비슷하게 지었나. 작명소라도
가서 애 이름을 바꿔야겠어.'  


<END>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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