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자신의 집필로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한 어느 사령술사 저술가분께 경의를 표하며 이 웃기지도 않은 패러디작품을 공개합니다. /-_-(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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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미라



  "좋아, 좋아! 이제 선반 위에 있는 바실리스크의 발톱을 가져오게."
  "예, 예."
  풍덩. 부글부글 끓는 솥 안으로 보기만 해도 흉흉한 살기가 느껴지는 굽은 발톱이 가라앉았다.
  "에, 그리고 또…."
  발레이크 핸드라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상쩍은 재료를 갖고 뭘 만드는 마법사처럼 보인 다기 보단 딱 '뭐 치울 거 어디 더 없나'라고 생각하는 주부 같았다. 그리고 코우플처는 그런 주인의 처사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 곳, 마나나의 탑에선 일의 인과관계 내지는 논리 따윌 따져선 머리만 아플 뿐이라는 걸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지금 발레이크는 그의 말마따나 '카이미라'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카이미라? 키메라 아니에요?"
  "그건 고대 엘프식 발음이지. 요즘 쓸데없이 글자를 비틀어 읽는 엘프어 발음으론 카이미라라고."



  엘프인 코우플처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말이기에 그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사제님, 이거 대청소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응? 아, 그래. 사실, 요즘 연구실이 좀 좁고 어수선하지 않았나? 이 시료들을 좀 소모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버리기는 아깝고, 뭐라도 해 봐야지. 뭐 해본다 해도 자네는 도울 게 형이하학적인 일 밖에 없으니, 그렇게 여겨도 좋네."
  발레이크는 시원스레 인정했고, 따라서 코우플처는 나중에 바닥을 깨끗하게 쓸어야한다는 그의 명령에도 한숨을 쉬지 않았다.



  "자, 거기 트롤의 꼬리털 좀 갖다주게. 서랍 안에 있을 거야."
  "네, 네."
  하지만 이 때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 꼬리털은 이 엘프가 직접 숲 속으로 가서 황당해하는 트롤에게 사정을 해서 얻어낸 것이었다. 온순한 트롤은 선선히 꼬리털을 내어주었지만, 당최 왜 그런 걸 원하는지 무척 궁금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코우플처도 궁금한 건 매한가지이기에 트롤의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주인은 이미 트롤의 꼬리털 따윈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실험에 매진하고 있었다. 엘프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이후로 이 꼬리털은 서랍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구만.



  "그리고 저기 마그네슘 한 병."
  "…죄송하지만 사제님, 화학 약품들은 그냥 두는 게 어때요?"
  "왜?"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흠흠, 그렇군."
  사실, 지천자의 방에 있는 물건을 몽땅 솥 하나 안에 때려 넣는다는 언뜻 보기엔 위험천만해 보이는 일에 코우플처가 얌전히 보조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발레이크가 말하는 '시료'라는 것들은 대부분 바실리스크의 발톱, 트롤의 꼬리털, 네 잎 토끼풀, 민들레 씨앗, 그리핀의 깃털, 북극의 얼음을 녹인 물, 산호 가루 등 점쟁이들이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진 몰라도 한꺼번에 같이 끓인다고 해서 별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물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화학 약품도 있긴 있었지만, 평범한 연구실이라면 대다수를 차지할 그런 물건들은 극소수였다. 그래서 괴상하게 생긴 생명체가 솥 안에서 튀어나왔을 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캬아아아악!"
  그것이 괴성을 지르며 솥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쳤다. 코우플처는 주인의 표정을 보고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동안 아연실색하던 사제와 조수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스키디르 사제님의 솜씨일까요?"
  "망할 할망구 같으니!"
  앞서 말했듯, 이 곳은 무슨 이유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신기하지 않은 마나나의 탑이다. 그들은 제일먼저 다른 지천자의 소행을 의심했다. 그 것이 갑자기 외쳤다.
  "너희들이 날 만들었는가!"
  "우와, 말도 하네요."
  "할망탱이, 뭔 생각인 거야."
  발레이크는 그 녀석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녀석은, 그러니까 뭐랄까, 안에 집어넣은 제법 소박한 내용물이랑은 별 상관이 없는 흉측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삐죽삐죽, 그러나 듬성듬성난 이빨, 커다란 입, 불거져나온 눈, 번들거리는 피부 등. 양서류와 아귀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어쨌거나 저게 바실리스크 발톱이나 뭐 그런 것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녀석이 아닌 건 확실했다. 발레이크는 부글부글 끓는 솥에게 공용어 강의를 한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머리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I ask AGAIN! You are the creators of ME?!"
  "저건 엘프어로 말하는구먼."
  "염소대가리가 엘프어라니, 기분 나빠요!"
  "그럼 아구대가리가 공용어 말하는 건 안 기분 나쁘냐?"
  새로 튀어나온 머리는 글자그대로 평범한 염소였다. 옆에 머리랑 똑같은 박자로 발버둥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한 몸에 두 머리인 것 같았다. 이거 너무 교과서적이잖아?
  "머리가 여러개…. 이거 완전 고대 엘프 전설에 나오는 거로군. 이런 짓을 할 놈은 역시 뻘겅 할멈이겠지."
  "아, 머리 하나는 염소, 하나는 드래곤, 하나는 사자라는 그거요? 그럼 머리 하나가 더…."



  라고 하자마자 애교라곤 털끝만큼도 없어 보이는 고양이 머리 하나가 솥 안에서 튀어나와 뭐라고 외쳤다. 굵직굵직하고 우렁찬 억양의 언어였다.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기에 코우플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건…음…북부어?"
  "얘끼 이 녀석, 드워프어다, 드워프어. 하긴 넌 들어본 적도 없을 테니…. 북부어랑 비슷하긴 하지."
  "드워프어라면…스키디르 사제님이 유일한 권위자잖아요."
  "그래, 이걸로 할망구가 확신범이구나. 나도 평생 드워프어를 그 마녀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서 들어본 적이 없어. 이제 저 머리 세 개가 합쳐지면서 할멈 대가리로 바뀌기만 기다리자고."
  시끄럽게 삼중창을 해대던 머리 세 개가 동시에 움찔했다. 아귀 모양 머리가 웅얼거렸다.
  "이런, 들켰네."
  발레이크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네 악취미는 다 알고 있어 이 마녀야! 그러니까 허튼 장난 그만 치고 썩 꺼져! 난 결말까지 다 예상하고 있으니까!"
  아귀 머리가 여유 있는 표정(그것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단 사실에 코우플처는 무척 놀랐다)을 지으며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진짜로 세 개의 머리가 합쳐져 스키디르의 얼굴 비슷한 것을 이루어냈다(그것을 본 코우플처는 오늘 꿈자리가 성하긴 글렀구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중년 여성의 얼굴 비슷한 것이 말했다.
  "뭔데? 말해봐."
  "소각."
  화염이 솥 위로 쏟아졌다. 엉터리 카이미라는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발레이크가 코방귀를 뀌었다.
  "날 좀더 갖고 놀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뭣 때문에 지 각본을 맞춰 줘? 코우플처, 창문 좀 열어라."
  "이미 열려있어요. 아유, 그을음 좀 봐. 이거 고기 탄 냄새가 장난이 아닌데요."
  마나나의 사제는 어깨를 으쓱 했다.
  "뭐 그을음이야, 벽난로에 그을음 좀 있음 어떠냐. 냄새는 빠져나갈 테고."



  코우플처는 솥 쪽으로 다가가 안쪽을 들여다봤다. 친절하게도 스키디르는 그 흉측한 단백질 덩어리를 무턱대고 창조하는 대신 안 쪽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그 것으로 전환하는 기적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 대신 코우플처는 그저 그런 시시껄렁한 찌꺼기 대신 타다 만 시체를 치우게 되었지만.
  "…사제님, 이거, 영 불쾌한데 그냥 사제님께서 '소멸'시켜버리시면…."
  "안 돼, 오늘은 그걸 '외우지' 않았네. 성가시겠지만 그냥 대충 치워버려. 뭐 불쾌한 거 한두 번 치워본 게 아니잖은가?"
  코우플처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나나의 사제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았다. 코우플처가 소사체를 '생물학적 위험'이라고 적힌 자루에 집어넣고 밖에 내 놓았을 때, 스키디르가 불쑥 나타났다. 중년의 여인은 건들거리며 말했다.
  "이봐, 젊은이. 아무리 그래도 생물학적 위험물이라니, 너무하잖아? 내 귀여운 새끼인데."
  "…사제님, 규정상 기적으로 탄생한 유기물질은 무조건 이걸로 처리해야하잖아요."
  "이 늙은 마귀가! 무슨 낯짝으로 이 몸의 연구실 근처에 그 흉측한 얼굴을 들이미는 거지?!"
  발레이크가 씩씩거리며 코우플처의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스키디르는 흐흥, 하고 작게 코방귀를 뀌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의 교훈은?"
  "네년이 내 연구실을 염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좀 더 투자해야된다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훌륭한 학생이네."
  "대꾸하는 것도 귀찮군. 썩 꺼져!"



  발레이크가 고함을 치는 것과 동시에 스키디르는 어두운 복도의 끝 쪽으로 글자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익숙한 듯 안전하게 착지하고,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코우플처가 침울하게 말했다.
  "사제님, 주제넘을 지도 모르지만 한 말씀 드릴게요."
  "뭔가?"
  "사실, 오늘의 교훈은, 그냥 트롤의 꼬리털이나 산호가루 같은 걸 섞어 봤자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 다는 거 아닐까요?"
  "뭐 어떠냐. 어차피 본 목적은 대 청소였잖느냐?"
  '본' 목적이었군. 코우플처는 아무 말 없이 청소도구함을 열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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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요번 글이 쉽게 씌여진 이유는, 누군가가 이미 훌륭하게 써놓은 글을 기반으로 패러디를 빙자해 소제만 차용해왔기 때문이지요(급박할 때 쓴 글이 늘 그렇듯이 무슨 3류코미디 같기도 하고). 게다가 짧기까지...!(퍽)


어쨌거나, 수능 한 달 남은 고3의 어지러운 잡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 _)
미소짓는독사
댓글 2
  • No Profile
    SYF 06.10.19 00:21 댓글 수정 삭제
    어쩐지(.....)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독사님의 시리즈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 같은데 맞나요?
  • No Profile
    그렇죠^^ 저기 나온 '스키디르'는 전작인 '수형'에서도 나온 인물이니까요. (...그 사이 설정이 약간 바뀌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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