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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에비터젠의 유령

2004.08.28 02:0608.28





latehong@unitel.co.kr 별로 답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는 물음이지만, 일단 이 글을 쓰겠다고 키보드를 두드리려 하자니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다음과 같은 물음이 떠오른다. 내가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에비터젠의 유령]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환상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인가,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인가? 이 물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환상'이 무엇이며 그것을  ‘소설 → fiction → 허구’의 영역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이 끝날 때까지 이 물음에 답하지 않을 것이며(어차피 이 질문에는 명확한 답은 없다. 시도는 많겠지만), 답을 얻기 위해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이 끝날 즈음에 이 물음을 상기시켜 줄만한 간단한 언급은 있을 터이고, 아마도 이것이 [에비터젠의 유령]을 읽은 뒤 독자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묵직한 물음이 될 테니까, 미리 말을 해두고 싶을 뿐이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자.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 이분법, 인식론, 뭐 이런 거 집어치우고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해서, 세계 인식의 기본은 경계 짓기, 구분 짓기, 대상과 대상 구별하기 등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래 집단에서 분리되어 '타인과 다른,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 청소년기 자아 실현의 출발점이다(그러니까,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그토록 많은―――지극히 주관적인 관찰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청소년들의 자아 형성과 인격 실현에 영향을 미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은 생각만큼 일찍 일어나는 건 아닌 듯 싶다. 그리스 철학을 봐도 '나’를 찾기 전에 먼저 '전체 세계’를 탐구하고 있었고, '질풍노도의 시기’는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친 뒤에야 온다.

 자, 여기까지는 범우주적인(푸핫) 일반론. 좀 더 줌-인을 해보자. 예술의 영역으로.

 예술은 욕망에서 나온다. 그리고 점점 그 욕망을 세련되게 표현해내면서 발전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욕망의 표출 덩어리―――작품이 점점 쌓여가다가 눈높이에 이르게 되면 새로운 욕망이 탄생한다. 그 전까지 해왔던 작업이 욕망의 배출이었다면, 그 배출물을 바라보고, 욕망을 토해내는 자신을 바라보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욕망의 형태가 왜 다른 사람의 것과 다른가 하는 문제에 주목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욕망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범우주적인 일반론에서 이야기를 전개하자니 뜬구름 잡는 기분도 들 법 하다. 그럼 좀 더 구체적인 지시어를 사용해서 다시 줌-인.

 소설 쓰는 이의 첫걸음은 그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한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것이 모든 작품 활동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이야기를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하기 위한 끝없는 노력. 그런데 종종 이 노력이 쌓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흥미거리가 생겨난다. 그것은 소설이 이야기를 담는 방식 자체에 관한 흥미다. 문체, 장르, 단락 구성, 기타 등등. 오늘날은 이런 요소들과 관련한 수많은 이론들이 널려있는지라, 처음 소설을 쓸 때부터 자신은 이런 것들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며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가지만 예를 들어볼까. 장르. 팬터지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팬터지는 무엇이다'라고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만 들어서는 절대로 팬터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장르는 관습과 경험이 만들어낸다. 아이에게 어휘를 가르치면서 정의부터 말하고 들어가는 부모는 없다. ‘가위’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위를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 인식,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에 대한 의식 역시 이런 경험의 축적을 통한 후에야 이뤄진다.

 말이 길었다. 그러니까, [에비터젠의 유령]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자기 인식’에서 출발한다. 의뭉스럽고 모호한 척 하지만, 그리고 어떤 면에선 분명히 그러하지만, 이 작품은 동시에 무척 분명하게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다. 의심하지 말고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설’에 대해 고찰하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설’을 쓴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차분히 말하고 있다. 소설을 쓰면서 뭘 해보고 싶은지, 그는 전혀 숨기지 않는다. 워낙에 노골적이라서 되려 독자는 심오한 의미를 찾으며 고민하겠지만(그리고 거기엔 정말 심오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는 말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면 작가의 욕망은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에비터젠의 유령]은 그 욕망을 기반으로 해서 쓰여진 소설이다.

 욕망의 세련화는 그 욕망을 꼭꼭 숨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뱉어버리면 그게 논설문이나 설명문과 다를 게 뭔가. 작가는 자신의 말을 이야기 뒤에 숨기고, 독자가 이야기에 홀려 그것을 다 먹어치우면 그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드러나게끔 해야 한다… 이것이 욕망의 세련화 과정이다. 그런데 [에비터젠의 유령]에서 작가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아주 노골적으로.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 욕망을 담아내는 소설이라는 이름의 그릇에 관한 놀이다. [에비터젠의 유령]이 선보이는 복합다잡한 구조에 관해 이야기할 때 '현실과 게임의 경계' 운운하는 겉치례, 혹은 [매트릭스] 류의 이야기 구조를 들먹이는 것으로는 부족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액자 구성에서 액자의 안과 바깥이 소통하는 류의 작품에서, 보통 그 구조는 이야기에 종속된다. 왜, 있잖나. (지겹고, 짜증나기까지 하는) 장주지몽. 아아,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현실인가 가상인가, 가상이라면 그것을 인식하는 나는 대체 뭔가 운운. 그러나 [에비터젠의 유령]이 가진 중층 구조는 그렇게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다른 주제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 실존 문제 따위의 거창한 의미부여는 필요 없다는 말이다. 구조를 이야기 하는 구조 자체가 [에비터젠의 유령]이 선보이는 이야기고, 주제가 된다. 작가는 단지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뒤에 그 욕망을 실현하려 하고, 그 욕망의 결과물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변형하려고 한다. 소설 쓰기를 통해 자신의 소설 쓰기를 탐구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보통의 세련된 소설들이 욕망 자체에 관심이 있다면 [에비터젠의 유령]은 소설 속에서 욕망이 드러나는 방식에 관심이 있는 셈이고, 그 방식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욕망이 변형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소설인 것이다.

 그리하여 [에비터젠의 유령]은 작가의 놀이터가 된다. 작가가 자신의 책과 이름을 그대로 드러내며 끊임없이 [에비터젠의 유령]을 바라보는 그 과정은 그야말로 즐겁다. 작가는 (그 자신의 말을 빌려서) SF, 판타지, 컴퓨터 게임, 낭만주의 시대 그림, 애니메이션, 영화, 로맨스, 신화, 유머, 독설, 패러디, 퀴어, 호러 등 많은 요소를 거리낌없이 버무려 이야기 속에 집어넣는다. 물론 이런 요소들을 모아놓는 것에 끝난다면 그건 잘해봐야 취향 모음표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미 누누이 말했듯이 [에비터젠의 유령]은 소설에 대해 검토하는 소설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요소들 역시 끊임없이 다시 검토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작가가 자신의 취향과 욕망을 돌이켜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결과적으로 그 모든 요소는 철부지의 난장판이 아니라 적당히 정제된 놀잇감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소설을 가지고 논다. 놀이의 즐거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야 많이 있겠지만, 특히 소설 속에서 독자와 작가가 대화하면서 [에비터젠의 유령]이라는 작품을 ‘해설’하고 있을 때(혹은 ‘메이킹 필름’을 제작하고 있을 때라고 해도 좋고), 이 놀이의 유쾌함은 전면에 드러난다. 이야기의 출발점, 앞으로의 전개, 이야기 속에 녹아든 자신의 취향, 이야기의 구성, 심지어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놀이ㄴ9라는 자기 고백까지, 작가는 스스럼없이 [에비터젠의 유령]에 관한 모든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백은 다시 구조 속으로 들어가서 전개의 일부가 되고.

 그런데 [에비터젠의 유령]이 독자를 즐겁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구조를 통한 재검토 놀이가 가져다주는 즐거움 뿐만이 아니다. 이 재검토 과정에서, 작가의 욕망은 변형된다. 자신의 글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욕망에 저항하며 성장하는 작품 속 인물과 만나게 되고, 욕망은 타협ㆍ변형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에비터젠의 유령]은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검토하면서 처음의 입장을 수정ㆍ발전시키는 성장 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은 끊임없이 구조를 반복하면서도 제자리 걸음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서사적 힘을 얻게 되었다. 그것도 (다시 작가의 말을 빌려서) 아름다운 여인과 끝없는 사랑과 화끈한 액션과 격렬한 섹스와 로봇과 고질라가 건물을 부숴대는 현란하고 자극적인 맛이 가득 담긴 형태로.

 [에비터젠의 유령]은 장르 팬터지는 아니다. ‘환상’이라는 문패를 내걸고 쓴 글도 아니다. 작가는 단지 소설을 가지고 놀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지극히 환상적이다. 소설 속과 소설 바깥이 만나는 구조만을 가지고 환상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 구조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모습이 하나같이 환상적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욕망이 ‘소설의 현실성’ 운운하는 것에 제약받지 않은 상태로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시사적인 일이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 자체를 바라보는 일만으로 압도적인 환상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환상'이라는 타이틀을 의식하기 이전에, 소설을 쓰는 자의 욕망과 그 욕망의 표현법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환상’은 생겨나게 된다. 결국 이는 ‘환상’이 고정된 규범과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이야기의 힘 자체에 들어있음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비터젠의 유령]은 그렇게, 소설을 탐구함으로써 환상을 말하는 소설이다. 이토록 소설을 가지고 잘 노는 작가를 만나게 돼서 몹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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