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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십이국기

2004.05.28 23:5905.28





essensia78@hotmail.com

[십이국기]는 일본 작가 오노 후유미의 동양 판타지 시리즈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조은세상에서 1부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2부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3부 동의 해신 서의 창해, 4부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5부 도남의 날개, 6부 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까지 6부 총 10권이 출간된 상태이다. 일본에서는 7부 단편집 [화서의 유몽]까지 출간되었다고 하며,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출판사를 달리해서 나온 [마성의 아이]도 이 시리즈에 넣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취향이 서구 편중적이며 한문을 대단히 못하고, 못하는 와중에도 신비감을 가지고 있어 한문을 문자라기보다는 암호나 그림으로 생각하고, 동양적인 것을 내국인의 입장이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적으로 해석하는 서양인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십이국기]가 일단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각 부의 제목이 더없이 예쁘다고 생각해서 오래전부터 읽고 싶어했지만 결정적으로 책 자체의 제본을 따지는 성격 때문에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일본 작가의 서술에 그다지 매력을 못 느끼는 편향성 또한 작용했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편견과 장애와 취향을 이기는 작품이 어딘가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필자는 [십이국기]를 그 자리에 놓는다.

   도(導)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
   판타지의 이세계는 단지 똑같은 물리법칙이 존재하지만 사람만 다른 동네가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마저도 우리의 세계와 다를 때가 많다. 십이국기의 세계 또한 그렇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이 나무에서 열린다는 것부터 무척 생소하다. 이러한 세계의 법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도(導)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천제와 서왕모가 있어 십이국마다 왕과 기린을 두었다. 먼저 기린이 있어 왕을 선택하고, 선택받은 왕은 신적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다. 왕이 천도에 어긋나는 일을 계속하면 기린이 실도(失導)라는 병에 걸려 앓는다. 도를 잃으면 세계를 잃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세계에서처럼 성교로 아이가 생기는 게 아니라 나무에 아이가 담긴 열매가 열리기 때문에, 부부들은 아이를 갖고 싶으면 리목에 가서 서왕모에게 빈다. 아이를 키울 만한 자격을 갖춘 부부에게만 열매가 열린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개인의 소유물로 여겨질 여지가 없다. 그저 하늘을 섬기듯이 아이를 기를 뿐이다. 게다가 유산으로 남는 것은 부부의 경우뿐이고 대를 이어 남는 것은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핏줄에 대한 집착도 있을 리 없다. 대신 왕이 도를 잃으면 요마가 날뛰고 병마가 할퀴고 땅이 황폐해진다. 사람이 고향을 떠나고 아이가 버려진다. 왕이 자리에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이 도에 따라 움직이며 도를 잃은 것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는 세계. 이것이 [십이국기]의 세계이다.

   인간은 추악하고 약하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십이국기]의 주 테마가 아니다. 매력적인 세계이며 이 세계가 모든 이야기를 감싸는 틀이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주로 인간에게 머문다. 사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인간을 집요하게 따라다닌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도 인간의 추악하고 약한 면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현대의 일본에 태어난 나카지마 요코가 경국의 기린 케이키에게 왕으로 선택받으면서 시작한다. 사실 요코는 원래 경국의 사람인데 아기를 담은 열매인 난과가 휩쓸려 가서 일본에서 태어난 ‘타이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낯선 세계로 오는 과정에서 안내자인 케이키는 누군가의 추격을 받고 사라지고 요코 혼자 남는다. 요코는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몇 번의 배신을 겪으면서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혼자 있을 때면 파란 원숭이가 나타나 요코의 가장 약하고 추악한 면을 들춰 낸다. 요코가 없어졌어도 고향에서 슬퍼하는 사람은 없고, 진실이야 어쨌든 다들 요코가 속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아이였다고 말한다. 유일하게 슬퍼하는 것은 요코의 어머니지만 그 광경을 보면 이 세계에서 벗어나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요코는 심지어 친절을 베푸는 사람조차 믿지 못하고 배신할까 봐, 자신을 밀고할까 봐 죽이려는 마음까지 먹게 된다.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에서 타이키는 난과일 때 일본으로 휩쓸려 간 기린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인간으로 살 때에는 인간 같지 않은 본질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고, 기린으로서 돌아왔을 때에는 인간으로 산 세월이 너무 길어서 제대로 된 기린이 되지 못한다. 타이키는 언제나 자신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상처받는다고 느끼면서 주눅이 든다.
   {동의 해신 서의 창해}에서 아츠유는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것, 실패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친절히 대하고 뭐든지 부지런히 하고 무슨 일이든 성실하지만 실패할 확률이 있는 일은 실패했을 때의 치욕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하지 않으며 혹시라도 자신의 잘못이 밝혀질 때에는 남에게 모든 것을 넘긴다.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에서 스즈는 일본에서 건너와서 말이 통하지 않는 해객이다. 그래서 누구와도 말을 할 수 없자 좌절하고 신선인 리요우에게 몸을 의탁하지만 언제나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바깥으로 내몰리느니 이렇게 계속 치욕을 당하면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서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심정을 몰라 주는 거라고 야속하게 여긴다. 천도를 잃어 왕위에서 폭력으로 왕이 끌어내려진 방의 전 공주 쇼우케이는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어째서 살아서 고생하고 치욕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다른 사람을 모두 원망한다. 그리고 경에 자신 또래인 여왕이 등극했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가졌어야 할 모든 것을 아무 고생 안 하고 몸에 두르고 있을, 얼굴도 모르는 여왕을 증오하기에 이른다.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짜증이 나고 답답해질 정도로 이러한 추악하고 나약한 심리에 대한 묘사가 짙다. 커다란 사건보다도 사소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에피소드가 잘 맞물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잘 드러낸다. 소름 끼치도록 극단적이거나 살기에 넘치거나 정신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약간 약한 것만으로도 인간은 한없이 추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은 사랑스럽다
   그럼에도 언제나 [십이국기]에서는 너무 억지스럽지 않게 인간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인간의 장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게 남을 못 믿고 이를 갈며 살아남으려 하는 요코가 어떻게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는지, 자신감이 없고 나약하기만 해 보이는 타이키가 무엇 때문에 강해질 수 있는지, 스스로를 비참하게만 여기는 스즈가 무슨 일을 계기로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는지,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쇼우케이가 어떻게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깨닫는지.
   그리고 그렇게 변한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약하고 추악한 심리 묘사를 짙게 했던 만큼, 이들이 변하고 상황에 대한 장악권을 되찾는 그 순간의 집중력 또한 탁월하다. 필자는 전에 ‘진짜 가수’란 ‘하이라이트’가 있는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글에 대해서도 돋보여야 할 곳을 돋보이게 하고 몰아쳐야 할 곳을 몰아치는 게 정말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오노 후유미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주제에서 나타나는 생각지 못한 깊이 외에 글이란 측면에서도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이다.

   오랜만에 쓰는 거의 찬사 일색의 리뷰이나, [십이국기]가 결점이 없는 시리즈인 것은 아니다. 단지, 빠진 사람에게는 콩깍지를 씌워 아무것도 안 보이게 할 만큼의 매력을 가진 시리즈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필자도 그 포로 중 하나가 되었다. 포로의 매우 주관적인 리뷰를 읽은 여러분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자신의 눈으로 직접 작품성을 확인하시길(결국은 광고가 되었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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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4.05.29 01:38 댓글 수정 삭제
    전부터 눈길이 가긴 했지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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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04.05.29 02:02 댓글 수정 삭제
    이것 정말 재미있지요;_; 개인적으로는 '마성의 아이' 쪽을 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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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 04.05.29 21:05 댓글 수정 삭제
    저도 마성의 아이 쪽이 좀더 집중력 있고 잘 썼고... 여러 가지로 낫다는 생각은 들지만 역시 현실 이야기보다 다른 세계 이야기가 더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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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lias 05.02.26 01:40 댓글 수정 삭제
    '마성의 아이'는 십이국기 본편보다 좀더 차가워서, 당황했었지요. 저는 본편 쪽에 좀 더 정감이 갔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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