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Velouria

2007.12.24 05:0112.24

 거리는 인파로 붐볐다. 별달리 약속도 없었기에 우두커니 창가에 앉아 넘쳐나는 사람들과 반짝이는 빛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음악이라도 틀어볼까, 선물 받은 와인이라도 따볼까 하다 괜히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 같아 그만두고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해보려 했다.
 아직 비공개지만, 우리가 최근에 잡은 이 전파의 대략적인 해독은 이렇다. 이 메시지는 우습게도 마침 베가성 쪽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의 소통을 원하는 것 같고, 다름 아닌 바로 오늘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해석이나 이 전파의 신빙성에 대해 큰 믿음을 가지지 않았기에 쉽게 흥분하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지켜보기로 했다. 오늘, 그들이 예고한데로 하늘에서 우리를 향한 파동이 보인다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뤄낸 성과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새로운 우주시대가 열릴 것이고, 아니면 뭐, 크리스마스 케익이나 자르지 뭐.
 수십광년 떨어진 곳에 사는 그들이 크리스마스의 존재를 알리는 없을테지만 그래도 뭔가 그럴듯한 일이 벌어지길 바라는 건 모두의 마음가짐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날이지만, 다들 어떤 기적을 기대하고는 있으니까. 어디 산타라도 나타나서 당선되서 기고만장한 그 영감이라도 데려갈지 모르지.
 열두시가 가까워지고, 난 의자를 창가에 바짝 붙여놓고 하늘을 주시했다. 특별할 것 없는 도시의 밤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고, 차가운 겨울날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별들이 더 밝아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 뭔가 우주적인 대역사가 벌어질 조짐은 없었다.
 눈이 아파져 살짝 눈주위를 어루만졌다. 그러고 있으려니 뭔가 외계의 존재와 교신하는 과학집단의 일원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일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하려는 궁상맞은 사람만 남아버렸다. 에휴. 나도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그래도 이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날만 되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분위기에 휩쓸려 즐겁게 지내곤 했으니까. 통속적이긴해도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이젠 무뎌져버린 그 시절의 감정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새삼스레 그 녀석이 다시 원망스러워졌다.
 그 애를 다시 못 보게 된 건 꼭 이년전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언제나처럼 도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건만,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에 약속시간에 철저한 아이는 아니였으니까, 그 날도 어느 정도 늦는 건 그러려니했다. 그러다가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고, 날도 추운데 사람 많은데서 혼자 처량하게 있으려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그러는 동안 이 녀석이 내 연락을 한번도 받지 않았다는 거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것보다 만나면 정말 제대로 화를 내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날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녀석한테 연락이 온 건 약속시간에서 세시간 반이 지났을 때였다. '외계인들이 날 데려가려고해. 미안, 어쩌면 난ㅇㅅ' 아니 이게 사람 바람 맞춰놓고 할 얘긴가? 내가 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직종에 있는 아이였지만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잖는가. 이런날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놓고 연락도 안 받아놓고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기껏 외계인 타령이야?
 그리하여 그 녀석에겐 신경끄고 잊어버리려 한 게 어언 이년이다. 근데 뭐 그게 사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하필 이런 때 또 스믈스믈 생각나서 복장을 뒤집어 놓는구나. 머릿 속을 비우려 애쓰며 다시 하늘에 집중했다. 여전히 대단한 변화는 없었다. 흘긋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이 사람들도 약속 시간을 안 지키긴 매 한가지구나. 아, 제발 에티켓, 에티켓!
 피곤해서 그런건지 눈이 침침했다. 자꾸 하늘이 흐려보였다. 뭔가 초점이 계속 안 맞는 것 같았다. 사실 몇십분 전부터 계속 그랬던 것 같은데 조금있으면 나아지려니 하고 참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갑자기 컴퓨터에 뭔가 신호가 왔다.
 관측소의 기계와 연결되어있는 프로그램이 갑자기 빠르게 작동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바짝 긴장한 채 모니터를 주시했다. 기분 탓인지 컨디션 탓인지 이젠 내 주변의 풍경들도 초점이 안 맞는 듯 어지럽게 보였다. 그리고 곧 프로그램이 잡아낸 전파를 그대로 송출해내기 시작했다. 조금씩 자리를 잡고 선명해지던 그 전파는, 그 전파는-.
 맙소사. 픽시스의 벨로리아였다. 정말 간만에 듣는 그 노래에 난 온몸의 힘이 탁 풀린채 주저 앉아 버렸다. 왜 이 노래가 지금 여기서 나오는 거지?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 이게 정말 베가성에서 오는 전파라면…….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전파가 오려면 무수한 세월이 걸린다. 설사 그들이 지구의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해도 이 전파는 픽시스의 멤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보내진 것이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해도… 굳이 그들이 이 노래를 지금 보내주어야할 이유가 뭐야?
 분명 어디선가 잡음이 섞여들었거나, 누군가 장난을 쳤거나……. 아니 잠깐. 장난이라는 생각에서 섬뜩해졌다. 온라인에서 벨로리아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 여기 있는 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다. 내게 이 노래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종종 불러주곤했던 그 사람은… 하지만.
 기분이 미친듯이 이상해졌고, 그에 따라 주변의 풍경들도 덩달아 초점을 잃어갔다. 투명한 액체들이 잔뜩 내 주변을 둘러싼 채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프로그램은 연산을 계속했고, 이 전파의 출발지가 베가성이란 사실을 확인해주고, 함께 온 다른 메시지를 해독해서 보여주었다.
 난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 모든 곳에서 초점을 잃은 요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 당신들도 보고 있나요. 우리를 둘러싼 기적을, 추억의 현현이라는, 잊혀진 감정의 실체와의 조우를.

 '이현아! 메리 크리스마스!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해.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지금은 꼭 너와 함께 있는 기분이야. 먼 미래에 우리가 함께 거리를 걷던 그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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