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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공부와 목숨과 꽃

2005.05.11 03:0705.11

공부와 목숨과 꽃



어느 강 상류 근처에 한 비구니가 작은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일찍이 불문에 귀의하여 눈빛이 맑고 낯이 고왔다. 신망이 높았으므로 비구니가 이따금 마을에 내려오면 백성들은 없는 살림에도 요량껏 보리쌀과 고구마, 감자로 바랑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몇 해째 가뭄이 심하여 마을에 먹을 것의 씨가 말랐다. 구휼곡을 풀며 애태우던 수령이 비구니에게 생각이 미쳐 암자를 찾아갔다. 비구니 역시 굶주림에 시달려 버짐 핀 얼굴에 눈이 움푹 패었다. 수령은 비구니를 가엾게 여겨 가져간 보리쌀을 내놓았다.

“마을의 아이들에게 주시지요. 너무 굶어 산에 오르지도 못하옵니다.”

비구니는 쇠약해진 목소리로 자루를 되밀며 거절하였다. 여염집 여인네를 대하듯 몸을 돌려 앉았던 젊은 수령은 자세를 바로하며 얼굴을 들었다. 굶주려 윤기를 잃은 비구니의 눈에 푸른 섬광이 흘렀다.

“이미 마을에는 풀었소. 그대 역시 전하의 성총을 받는 이 나라의 백성이시오. 보리쌀이 묵었으나 끓이면 먹을만 하리다. 두고 가겠소.”

“소승은 불도를 닦는 몸, 속세의 괴로움을 끊은 몸이옵니다. 생사병고(生死病苦)에 연연하지 않사오니 도로 거두옵소서.”

비구니는 완강하였다. 젊은 수령은 비구니의 무릎 앞까지 곡식자루를 밀어주었다.

“내가 온 것도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하시오. 그대의 인연이 사바세계에 아직 남았나 보오.”

수령은 더 말을 듣지 않고 재빨리 일어서서 산을 내려갔다. 비구니는 여윈 몸을 가누어 보리쌀을 끓여 먹었다.

몇해 뒤, 나라에 전란이 일어났다. 북에서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임금이 몽진(蒙塵)하신다는 소문이 흉흉하였다. 젊은 수령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장수로 출전하였고 마을의 장정들도 칼을 잡고 불려나갔다.

전란이 길어져 오랑캐의 군대가 마을 근처에까지 내려왔다. 아녀자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도망치는 사이, 비구니가 산을 내려왔다. 비구니는 강을 건너, 움직이지 않고 가져간 감자를 먹으며 기다렸다.

이튿날 오랑캐의 군대가 강가에 도착하여 도하를 준비하였다. 비구니는 일어서서 강을 건넜다. 오랑캐의 장수가 비구니를 보았다. 장삼자락을 걷어 드러낸 무릎이 희었다. 물이 무릎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오랑캐 장수는 한꺼번에 강을 건너기로 작심하였다. 군대가 횡으로 줄을 지어 강으로 들어갔다. 강이 뜻밖에 깊고 물살은 거세어 말까지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갔다. 사나운 물살에 군대가 반도 남지 않았다.

오랑캐 장수가 몹시 분노하여 말달려 비구니를 덮쳤다. 시퍼런 칼날 앞에서 비구니가 탄식했다.

“목숨빚에 무너지다니, 10년 공부가 부질없구나.”

탄식을 맞은 칼날에 녹이 슬었다. 오랑캐 장수는 녹슨 칼을 휘둘렀다. 잘린 목이 꽃이 지듯 떨어졌다. 피대신 꽃잎이 분분히 흩날렸다.

후에 마을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꽃잎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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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님이 강을 건너, 얕은 강인 척 하더니 사실 깊은 강이어서,
무지 노한 거란 장수가 스님의 목을 쳤는데 오히려 칼이 부딪쳐 나가더라,
정신을 차려보니 길가의 돌부처님이셨다,
는 이야기를 듣고 썼습니다.

시대는 뒤죽박죽... 고증도 없이... 그냥 써요;;;
그냥 막연하게 옛날이 배경이라 생각하시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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