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인시아는 방금 전부터 친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애하는 엘프는 한참동안 자기 자신과 들고있는 책을 제외한 모든 것에 관심을 잃은 것 같았다. '재밌는데.' 그녀는 생각했다. (엘프의 기준에서)아직은 젊은 '엘렌'디야드 라니안샤는 감정을 적게 드러낼수록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속설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얼굴을 살짝 찡그린 체(결과적으로 나이를 20년쯤 더 먹은 것처럼 보였다)점잖고 위엄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 그녀의 집에 인사차 방문한 그는 조금 달랐다. 어느 책을 보더니 '언미독이라…'하고 작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책을 빼들었는데, 책에 신경을 쏟은 시간과 정비례해서 얼굴이 계속 일그러지고 있었다. 처음엔 '엘프의 얼굴이 일그러질 수 있는 한계'에 대해 흥미롭게 관찰하던 인시아도 슬슬 '저러다가 평생 안 펴지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을 무렵(실제로 그 후 몇 시간 동안 그의 얼굴에선 주름이 가시지 않았다.)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엘렌은 혀를 한 번 차더니, 점잖지만(책의 입장에서 보면)꽤 모욕적인 태도로 책을 '탁' 소리가 날만큼 세게 닫았다.  




"뭐가 문제인거죠?"

인시아가 책의 겉표지를 슬쩍 보며 물었다. '환상, Fantasy'. 언미독의 수많은 괴작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악평을 많이 듣는 작품이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사실 끝까지 제대로 읽은 사람도 드물었다). 묻기는 했지만 인시아는 그의 대답을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그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하여간 인간 놈들이란! 이런 한심한 얘길 소설이라고 쓰고 앉아있다니!"

언미독이 세상의 모든 인간 중 제일 괴팍하다고 주장해도 반론을 얻기 힘든 실정이었지만 엘렌은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며 여전히 흥분한 체로 계속 말을 이었다.

"인시아양은 아직 이걸 안 읽어보았죠?"
"네. 언미독의 작품들은 인간 문학에 좀 더 익숙해진 다음에 읽으려고요. 워낙 평가가 엇갈리는데다가 난해하단 얘길 많이 들어서…"
"다행이군요. 엘프 문학과 달리 인간 문학 중 어떤 책들은 충분히 문학적 지식을 쌓은 후 비판적 시각을 가졌을 때나 읽을 만합니다. 속된말로 하자면 '씹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말씀해보세요."
"...네?"
"'씹고 싶어서' 안달이 나신 것 아닌가요?(인시아는 살포시 웃었다)어서 해보세요."




평소 같으면 속내를 들켰다는 것에 대해 당황했을 엘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책을 보면 말입니다, 온갖 허황하고 말도 안 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 딴에는 환상 소설을 쓴다고 하는데요, 환상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원래 일체 문학성을 갖기 힘든 천박한 장르란 말입니다. 게다가 현실에 극도로 떨어진 이 내용들 좀 보십시오! 뭐? 번개를 저장해서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고? 심지어 이 에너지는 사용이 워낙 쉬워서 대중들도 간편하게 다룰 수 있답니다. 거참, 아무나 그렇게 잘난 힘을 휘두르면 도대체 사회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돌아간답니까? 게다가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이랑 의사소통이 가능해져 편지 같은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라 합니다.  가축의 힘 대신 열기로 움직이는 수레가 나타나 역시 마법 없이 스스로 움직일 거랍니다.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는 청소년들에게 읽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뭘 배우겠습니까? 이런 것은 현실도피에 불과합니다! 아직 정신이 미숙한 청소년들은 이런 쓰레기를 읽고 현실과 환상을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같은 내용의 반복에 불과한 엘프의 강연이 계속 이어졌다. 작고 귀엽게 생긴 하플링 아가씨는 흥분한 엘프가 침착할 때라면 절대로 저지르지 않을 각종 어색한 표현들과 문학적·논리적 오류를 들으며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문질렀다. '하플링을 문학도로 인정했다는 것만 빼면 이양반도 꽤 보수적이란 말이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엘렌. 미안하지만, 밖을 좀 보세요."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엘렌은 당황한 듯 인시아를 바라보았다.

"앗, 늦었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다음에 뵙죠."
"네, 또 오세요."





그녀는 창문을 통해 여전히 뭔가 투덜거리고 있는 엘프가 자신의 집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미소를 흘리며 집 안 쪽으로 들어갔다. 사실 엘렌이 떠났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의 집에 올때 귀가 살짝 안 좋은 그녀를 위해 쿵쾅거리며 들어오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엘렌을 지켜 봐준 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을 충분히 존중해주는 친구에 대한 예의였다. 인시아는 탁자에 앉아 인간이 달기에도 좀 커 보이는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그녀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계속 브로치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쓰다듬고, 문지르고 했다. 딸깍. 작은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야? 새로운 발견이라도?」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하지만, 재미있는 얘길 들어서 말이지.」
「어, 그래. 그럼 '개인' 상태로 바꿀 게.」
틱.
「애시당초 나한테 새로운 발견이니 뭐니 기대하진 마. 난 얘들 사회가 아니라 개인적인 면에 흥미를 갖고 그냥 즐기는 중이니까.」
「잘났어, 심리학자양반. 그래. 하플링으로 엘프사회에서 살아가는 건 여전히 편해?」
「말했잖아. 괜찮다고. 걱정 안 해도 되.」
「으이그, 누가 너 따위 놈 걱정한 댔냐?」
「어휴, 이게.」
「그나저나, 재미있는 일이 뭐야?」
「언미독이 누군지 알아?」
「아, 그 괴팍한 인간 문학가. 알아. 왜?」
「그 양반이 새 소설을 냈는데…이거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위험해.'」
「오, 좋은 거네. 그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뭐,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개소리 취급받고 있어. 뻔하잖아?」
「그건 그렇지.」
「기대하고 있어. 내가 그 책을 다 읽고 그 멋진 내용을 가르쳐줄게.」
「응. 아 맞다, 오늘 신부님이 너한테 미사 내용 좀 전달해달라고 했어. 잠시만 기다려.」
「알았어.」

  인시아는 애인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슬슬 고향이랑 날 난쟁이라고 불러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워지는데. 여행 다녀온다고 하고 갔다 와볼까. 여기서 사는 건 재밌긴 하지만, 물건 하나 살 때마다 긴장하는 것도 좀 지겨워. 그녀는 자신의 한 쪽 팔을 쓸어 내렸다. 아마 조금만 신경 쓰면 엘프들은 보통 그냥 '보드라운 하플링의 팔이구나'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피부병을 핑계로 되도록 맨살을 드러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안전이 제일이니까.




  어느덧 생각이 다시 언미독의 책으로 옮겨갔다. 힘내요, 괴짜씨. 당신도 아마 알고 있겠지요. 그 책 한 권으로 세상이 바뀌진 않겠지만, 최소한 언젠가 세상이 바뀐 후엔 당신을 무덤에서 파내고 싶어할 지도 몰라요. 우리들도 날 때부터 이 지경은 아니었었기에, 아저씨 같은 분들이 좀 있었답니다. 오직 사람만이 갖고 있는 자유인,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즐긴 이들이었지요.




  미사 내용을 다 들은 후, 인시아는 서재로 돌아왔다. 문제의 책은 엘렌이 허둥지둥 두고 간 위치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책을 집어 들어 겉표지를 넘기고, 으래 한 장 씩 끼워져 있는 아무 내용도 없는 짙은 색 쪽도 넘겼다. 괴발개발로 날려 쓴 것 같은 공용어와 엘프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대로 활자를 깎아만드느라 누군가(작가 본인일 수도 있지만)고생을 좀 했을 것이다.




'환상, 그것은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것. Fantasy, It is the dream of romatists.

그러므로 생각을 하기에 존재하는 것. And, the worst world is romanceles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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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firewine.co.kr에 가시면 이 도무지 주제를 알 수가 없는 엉망진창인 소설의 후속편 몇개와 설정을 보실 수 있습니다...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소짓는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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