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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발디엘

2005.05.09 00:5505.09


미갈이 떠나갈 때에 지었던 표정은 처음 그에게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슬픈 얼굴이었다고 발디엘은 생각했다. 베일 뒤에서 그녀가 짓고 있는 슬픈 표정을 보며 발디엘은 귀가 먹먹할 때까지 울었지만 뇌리에서는 미갈을 처음 보았을 때가 선명히 떠올랐다.

발디엘이 미갈을 처음 본 것은 기브아의 성문이었다. 갈림 주민들은 고작 오천 큐빗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수도 기브아에 직접 세금을 바치러 달마다 올라가곤 하였다. 가깝기는 하였지만 거친 산길이었기 때문에 발디엘은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따라온 종에게 잠시 쉬도록 하고 성문 그늘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그때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가는 어떤 귀부인의 행렬을 보았다. 그 여자는 여부스 산지의 뙤약볕과 거친 바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이 투명한 피부와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발디엘은 근처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 그녀가 사울 왕의 딸인 미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미갈은 준수한 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아름다웠다.

그 이후로 발디엘은 미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미갈이 이미 다윗과 결혼한 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다윗은 오래 전에 왕의 눈밖에 나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발디엘의 아버지 라이스는 근심하다 결국 왕을 찾아가 공주를 자신의 아들에게 달라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말렸지만 라이스는 자신의 아들이 자리에 누워 앓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라이스는 결국 공주를 며느리로 데려올 수 있었다. 왕이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자를 감싸고 돌았던 미갈을 두고두고 괘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기도 하였지만 더 큰 이유는 라이스가 갈림 지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는 점이었다. 사울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시작해서 지금껏 오랫동안 벌여왔던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인해 항상 군자금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미갈이 갈림으로 오던 날을 발디엘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혓뿌리까지 말려버리는 뜨거운 공기를 얇은 베일 한 장으로 막고 메마른 산길을 말을 타고 천천히 갈림으로 오던 아름다운 미갈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갈은 그 날에도 슬픈 표정으로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발디엘에게 있어서 미갈은 깊은 산 속에 숨겨진 슬프도록 아름다운 비밀의 샘이었다. 자신은 그 아름다운 샘에 거하는 한 마리 산양처럼 영원히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미갈은 발디엘과 살면서 전남편 다윗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발디엘 역시 다윗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고 일부러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렇게 함으로 미갈에게서 다윗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윗과 그의 무리들이 어느 광야에서 헤매고 있으며 왕으로부터 어떻게 도망치고 있는지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발디엘은 가슴을 졸이며 아내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에게 그 소문이 들리지 못하게 하려 노력했다.

세월은 흘러 사울은 전쟁에서 패해 전사했다. 왕자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다. 나머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은 이스보셋이었지만 사실 실권은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쥐고 있었다. 아브넬은 사울 왕의 삼촌이었다. 그는 사울 왕의 오른팔로써 활약했었고 사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도 아브넬이었다. 그토록 강력한 아브넬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왕위를 찬탈할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았지만 왕과 다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이스보셋은 그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워낙 강력한 아브넬의 힘에 눌려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브넬은 죽은 사울 왕의 후궁을 범했다. 원래 그 일은 왕위의 상속자에게만 허용되는 행위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그만 분을 참지 못하고 아브넬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아브넬은 화가 머리끝까지 미쳐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 왕에게 모든 군대를 이끌고 항복해 버렸다. 다윗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으니 그건 바로 자신의 옛 아내인 미갈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나안의 뜨거운 여름날에 아브넬은 병사들을 이끌고 발디엘의 집에 쳐들어왔다. 아브넬이 미갈을 단장시켜 데려가는 것을 보고도 발디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브넬의 발치에 엎드려 엉엉 울며 비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수십만 군대를 이끄는 자에게 자신 집안의 모든 종들을 끌고 덤벼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윗에게로 가는 군대의 행렬을 그저 엉엉 울며 따라갈 뿐이었다. 엉엉 울며 아내가 탄 말안장에 매달려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미갈은 슬픈 표정으로 그를 외면했다. 부부가 이별하는 마당에 남편처럼 대성통곡을 하지는 않더라도 서글픈 눈물 흘려야 마땅하건만 미갈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리고 슬픈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발디엘은 그저 헤브론으로 가는 미갈의 일행을 엉엉 울며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메마르고 뜨거운 공기가 혓뿌리까지 말려 버리고 목을 갈라지게 하여도 발디엘은 꺽꺽대며 미갈을 쫓아 걸었다.

아브넬은 차마 발디엘을 내치지는 못하고 모른척하며 다윗의 도시인 헤브론으로 일행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렇게 따라오다가도 지쳐서 포기하고 되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디엘은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통곡을 하며 그들을 따라왔다. 발디엘이 헤브론까지 쫓아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하다가 다윗이 보기라도 하면 다윗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브넬은 그에게 호통을 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발디엘은 들리지도 않는지 계속 울며 일행을 따라왔다. 일행이 바후림까지 왔을 때에 결국 아브넬은 병사들을 시켜 그를 쫓아내게 했다.

병사들은 발디엘에게 돌을 던졌다. 발디엘은 돌을 맞으면서도 미갈만을 바라보며 비틀거리며 쫓아왔다. 돌에 맞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미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절뚝거리며 쫓아오다 그만 주저앉고는 헤브론으로 멀어져가는 미갈의 등을 바라보며 애타게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멈추지 않는 눈물과 한 여름의 열기가 만들어내는 아지랑이가 멀어져가는 미갈을 뿌옇게 보이게 했다. 미갈은 뿌옇게 흔들리며 남쪽 땅 헤브론으로 천천히 천천히 멀어져 갔다.

(사무엘하 3:15,16)
꼬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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