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내 안의 산타클로스

2005.04.28 00:1904.28

산타클로스?

확실히...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하면, 이제 그 아이는 동심의 세계와 작별을 고하고 냉엄한 현실의 문으로 한발자국 다가갔다고 보면 되겠지.

궁금증을 못 이기고 졸린 눈을 부릅떠가며 자신의 머리맡에 선물 상자를 놓는 인물이 결국 자신의 부모님임을 알아버렸을 때,
혹은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말하는 친구와 멱살잡이를 하며 다투다가 결국엔 울음을 터뜨리며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 있는 선생님마저도 우물쭈물하게 만들어버리는 질문 - 산타클로스는 진짜로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아니면 전형적인 애늙은이의 견본마냥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있지만 선물을 받기 위해 일부러 속아준다는 유형에 이르기까지.

늦건 이르건간에 그 때는 반드시 찾아오고, 아이들은 결국 자신의 머리맡에, 혹은 커다란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주는 것이 빨간 모자의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아닌, 세계적 이벤트에 의무적으로 동참하기위한 사명감에 불타는 자신의 부모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야.

어쨌거나 그 순간을 기점으로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데, 불행히도 오늘날의 사회는 아이들이 빨리 어른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거든.
때문에 산타클로스를 믿는 사람들도 전반적으로 점차 줄어간다는 거지.
TV광고에서조차 아이들이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걸로 해주세요'라며 보내는 문자 메세지의 대상은 더 이상 '산타할아버지'가 아닌, '아빠'니까.

가끔 가다가, 정말 가끔씩 나같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특별한 케이스지. 가족 신앙은 불교인데, 범 세계적 이벤트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며 지금 이 나이까지 산타클로스를 믿고 있으니까.

어릴 때야 뭐, 다들 순진했으니... 굴뚝도 없는 아파트에서 산타할아버지가 못 들어올까봐 일부러 창문을 열어놓고 잠이 들었던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어. 혹시 창문이 열린 것을 못보고 지나칠까봐 '어서오세요'라는 글씨까지 삐뚤빼뚤 써서 올려놨었으니까.

아, 웃지 말라구. 나는 그 후로 일주일씩이나 지독한 감기에 걸렸어도 후회하지 않았을 정도로 진지했으니까.

그 뒤로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부모님이 '이제 크리스마스 선물을 그만 받을때도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시기 시작할때 쯤, 나도 남들처럼 내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가는 사람의 실체가 누구인지 서서히 알게된 거지.

하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몇몇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걸 인정하기가 싫었거든.
믿져야 본전 아니겠어?

그 후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도 모르게 몰래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사라지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난 꾸준히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어왔지.
나보다 더 착하고, 나보다 더 어린 아이의 선물을 주기 위해 이곳에는 바빠서 못 오는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반드시 준비하곤 했던 일.. 그러니까 산타클로스를 위한 우유 한잔과 크리스마스 쿠키를 따로 준비해서 창가에 올려놓는 일도 잊지 않았어. 바빠서 내 선물까지는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잠깐 쉬면서 이거라도 맛보고 가시라는 뜻에서 말이지.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쉬운 일은 아니었다구. 다 큰 녀석이 뭐하는 짓인지 한심스럽게 쳐다보는 가족들의 시선에도 당당해진다는 건 말이야.

하지만 아직도 후회는 안 해. 덕분에 정말로 산타클로스를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내가 입대하기 일년 전 크리스마스였나? 아니야, 2년 전이었겠군. 대학교 2학년 때였으니.

언제나처럼 창가에 과자와 우유 한컵을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에서 깨어났어.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한밤중이었을거야.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아파트들의 불빛은 거의 다 꺼져있었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으니까.

그리고 그 매연으로 얼룩진 어두운 하늘과, 사라진 별들을 대신하는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을 배경으로, 산타클로스를 볼 수 있었지.

첫 소감은 그다지 생각만큼 환상적이라거나 기쁘다고 볼 수는 없었어. 아마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거야. 한밤중에 아파트 11층 밖 창문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면, 그 얼굴이 세계 제일의 미녀라고 해도 반갑기보다는 무서움이 먼저 찾아왔을테니까.

다행히도 반쯤은 잠이 덜 깬 상태여서였는지, 곧바로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하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어. 단지 등 뒤에서부터 쭈뼛쭈뼛 올라오는 어떤 느낌이 목덜미를 타고 머리 끝까지 올라올 뿐이었지.
하지만 그 느낌. 그래, 소름끼친다는 표현이 딱 맞을거야. 그 기분이 가시고 나자 좀 더 냉정하게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볼 수 있더군.

모두가 갖고있는 이미지, 그대로였어. 약간은 뚱뚱한, 아니야, 산타클로스의 명예를 생각해서 통통하다는 표현을 써주기로 하지. 통통하고 불그스름한 얼굴, 하얀 수염. 빨간 모자와 빨간 옷.

나는 이미 그 당시에 산타클로스가 터키의 주교였던 '세인트 니콜라스'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도, 붉은 색 옷이 코카콜라 회사의 선전에 의해 널리 퍼진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떄문에,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와 계약을 맺고 그 옷을 입을리는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였을까, 내가 산타클로스에게 건넨 첫 말은, 유감스럽게도 이거였어.

"정말로 옷이 빨갛네요?"

하아... 한심스럽지. 초현실적 존재와의 첫 만남에서, 영적인 조언과 우주적인 진리 탐구의 질문 목록에 씌여져있던 그 수많은 질문들을 단번에 새치기하며 등장한 질문이 고작 그거라니.
뭐, 황당할 정도로 어이없는 질문이었지만, 산타클로스는 언제나의 이미지를 깨뜨리지 않고 친절한 미소와 함께 대답해주었어.

"아아... 원래는 이 옷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다른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못알아보거든."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지. 나라도 지금 창밖의 할아버지가 빨간색이 아닌, 파랑이나 노랑색 옷을 입었다면 산타클로스라고 생각하진 않았을테니까 말이야. 흰색 옷을 입었더라면 켄터키 치킨의 문 앞에 서있는 할아버지로 착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떄요? 산타클로스로 산다는 것은."
"글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좀 더 천천히 산타클로스를 바라보았어. 어느 새 열린 창문을 넘어, 창틀에 위태위태하게 걸터 앉아 쿠키를 먹고 있는 할아버지를 말이야.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곧 웃어버리고 말았지. 추락사한 산타클로스라니, 말도 안되잖아?

"흐음.. 왠지 힘들어보이는군요."

정말이었어. 하얀 수염은 왠지 약간 회색빛으로 더러워진 것도 같았고, 옷도 흔히들 생각하는 눈부신 빨간색이 아니라,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녹슬어가는 구세군 냄비와 비슷한 색깔이었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표정. 그래, 따뜻한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무기력함과 피곤함이 지배하고있는 그 표정. 한마디로 말해서 전반적으로 일에 찌든 샐러리맨과도 같은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할 일이 너무 많은건가요?"

그래.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거든. 만약 전세계 어린이들의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주기 위해서는 산타클로스가 광속 이상의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는 분석 결과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산타클로스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고 두번째 쿠키를 집어들었어.

"그 반대야. 이제는 내가 나설곳이 별로 없거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저곳 기웃거려보지만,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헤에?"
"캐롤을 부르는 어린아이들 조차도 이젠 내 존재를 믿지 않거든. 가끔씩, 정말로 아주 가끔씩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긴 하지만 갈수록 찾기가 어려워지니까. 이것 보라구. 애써 준비해온 선물도 거의 그대로 남았어."

하지만 그 꾸러미 안을 보니까, 선물을 주더라도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는 글렀더라구. 컴퓨터 게임과 만화영화가 지배하는 아이들에게 봉제인형이나 태엽을 이용한 장난감 병정이 그다지 인기있으리라고 봐주기는 힘들었으니까.

"루돌프가 힘들겠군요. 올때나 갈때나 무게가 똑같다니."
"허어.. 무슨 소릴 하는겐가? 루돌프라니. 안그래도 코가 번쩍번쩍 빛나는 것 때문에 따돌림 당하는 불쌍한 순록에게 '네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라'라면서 중노동을 시킬수야 없는 노릇이지."
"저런... 그렇다면 피곤할만도 하겠네요. 직접 그 커다란 자루를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확실히 힘들테니까요."
"아니야, 힘들지는 않아. 단지 내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보람이 없다는 것 자체가 실망감을 줄 뿐이지. 올해도 작년보다 나를 믿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줄었어. 앞으로 계속 돌아다녀도 몇명 만날 수 없겠지."
"그러면, 이제 이대로 돌아가실 건가요?"
"뭐, 그래도 끝까지 노력은 해 봐야겠지? 쿠키 잘 먹었네."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배어나오는 미소를 띄며 산타클로스가 손을 내밀었어. 약간은 낡은듯한 두툼한 장갑 위로 나도 손을 내밀면서 말했지.

"그래도 찾아와줘서 고맙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자네같은 사람 덕분에 내가 아직까지 돌아다닐 수 있는 거니까. 즐거운 성탄절 보내게. 아, 그리고 캐롤송은 언제 어디서 불러도 괜찮으니까 너무 풀이 죽지 말고."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릴수밖에 없었어. 그 전날, 절에 '징글벨'을 흥얼거리며 갔다가 어떤 할머니에게 혼났었거든. '절에서는 캐롤송을 부르지 말고 불경을 외우라'면서 말이야.

"별걸 다 보고 있었군요. 몰랐네요, 절에도 산타클로스가 찾아올 줄은."
"나는 어디에나 있는 존재니까."

아마 그때였을거야. 뭔가 내 가슴속에서 뭉클, 하고 솟아올랐던 것은.

"자, 그럼 이만! 메리 크리스마스!"

내게 살짝 윙크하고 창 밖으로 뛰어내린 산타클로스의 뒷모습을 쫒아가기 위해 황급히 일어나 밖을 내다봤지만, 아무도 없었어. 하지만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말. 나는 어디에나 있는 존재라는 그 말. 그 한마디가 왠지 모르게 가슴 속을 따뜻하게 해주더군.

그래서였을까, 곧바로 밖으로 달려나가 편의점에서 그럭저럭 쓸만한 물건들을 사서 카드와 함께 가족들의 머리맡에 놔뒀던 것은.
물론 핵가족 시대의 전형적인 인원 구성인 아버지, 어머니, 나, 남동생이라는 4인 가족의 틀 안에서 결백을 주장하는 건 쓸모가 없었고, 범인이 나라는 것은 단번에 밝혀졌지만, 그래도 모두에게 오래간만에 어릴적 크리스마스의 기분을 느끼게 해줄 수 있었지.
아마 머리맡에 놓인 선물을 처음 본 그 순간만큼은 다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었을거야.

그 뒤부터, 나도 내 안의 산타를 꺠우기 시작했지. 뭐, 그렇다고 해서 불우이웃 돕기에 발벗고 나섰다거나, 진짜 세인트 니콜라스처럼 담장을 넘어 선물을 뿌렸다는 건 아니야. 내 안의 산타클로스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단지 자신의 산타클로스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정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소원을 빌며 매달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일깨워주기 시작했을 뿐이지. 산타클로스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라도, 나 정도 나이먹은 녀석이 당당하고 줄기차게 '산타클로스는 있다'고 외치면 '혹시?'라고 생각할 정도의, 약간의 기대감이라도 갖기 마련이니까.

물론 나도 그 뒤로 꾸준히 하늘로 올라가는 편지를 썼지. "산타할아버지, 피곤하신 줄은 알겠지만, 제 소원좀 들어주세요~"라면서 말이야."
흔히들 생각하는 어른들의 소원 - 돈벼락을 맞게 해달라거나, 여자친구 한명만 만들어 달라거나.. 그런 소원은 절대 아니야. 단지 내 안의 산타가 할 수 없는 일, 내가 노력할수도 없을, 그런 일을 부탁하곤 했지. 아무래도 내 안의 산타클로스보다는 저 윗쪽 동네의 오리지널 산타 할아버지가 좀 더 낫지 않겠어?

그 뒤로 꾸준히...라고 해봤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입대를 했으니, 한두번 정도가 끝이었지만 말이야.

어때, 대답이 되었지?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초코파이와 바나나 우유를 창가에 놓아두는 거야. 아무래도 이번 부탁은 좀 더 뛰어난 산타 할아버지에게 부탁해야 할 것 같으니까.

부탁하려는 게 뭐냐구?

하핫. 지금까지 빌었던 것과 거의 비슷해. 작년까지는 계속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올해에는 제발 눈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는 것 뿐이지.

정 반대의 소원인가? 하지만 생각해봐, 너도 싫잖아? 크리스마스날 쌓인 눈이나 치우며 하루 종일을 보낸다는 건 말이야.

그러니까, 함께 편지를 쓰자구.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야. 아니면, 최소한 우리 부대만이라도 눈이 안 내리게 해달라고 쓰자구.

진짜야. 진짜로 효과가 있다니까? 산타클로스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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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서 200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부대 안에서 썼던 글인지라 왠지 계절과는 안맞습니다만.. 그래도 인사를 대신해서 올립니다.

이곳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란...

그야말로 피자헛 가득한 골목에서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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