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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반역자(The Traitor)

2006.09.18 14:0209.18

반역자(The Traitor)

- Master of seven sins -

  술집의 마스터 줄리앙은 그 남자가 가난한 여행자들의 벗인 낡은 클록을 걸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록 겉모양새는 볼품없었지만 체구는 당당했다.

  훌륭한 칼을 늘어뜨리듯 오른손에 들고 있었는데, 끝이 바닥에 질질 끌려서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뒤집어쓴 두건 밑으로 언뜻 보였던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기라도 할 듯이 날카로웠고, 묵직하게 떼어놓는 -힘겹게도 보였지만- 발걸음도 범상치 않았다.

  그날은 비가 몹시 내리던 날 밤이었다. 술집은 유달리 북적거렸다.

  마을 사내들이 여기에 모두 모여 회의라도 여는 양,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거칠어 보이는 전사들도 다수 섞여있었다. 술집에는 다양각색의 인간 군상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어떤 손님은 한껏 뽐내면서 자신이 겪었다는 모험담을 침을 튀겨가며 자랑하고 있었다.

  어떤 손님은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탁자에 늘어져서 코를 골고 있었다.

  어떤 손님은 맥주잔을 나르는 여급의 엉덩이에 손을 뻗으면서 음담패설로 희롱하고 있었다.

  어떤 손님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기 말만하고 있다. 상대가 입을 열려고 하면 술잔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자신의 주장만 한다.

  어떤 손님은 혼자 앉아서 궁시렁 거리는데, 말을 들어보니 자신보다 먼저 승직한 동료 때문에 배알이 꼴리는 모양이다.

  어떤 손님은 술에 취해 사소한 일로 옆 테이블의 남자에게 시비를 걸어 주먹을 휘두른다.

  어떤 손님은 앞에 앉은 사람에게 돈을 꾸는데,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돋고 있다. 남자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사기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밀어닥치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술집의 마스터와 그의 부인은 위층에서 아기가 칭얼대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밤이 깊어서 문을 닫을 생각을 했을 때에 미닫이문을 밀며, 그 남자가 들어왔다.

  줄리앙은 맥주 짜던 손을 멈추었다. 8년째 이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접해왔다. 문을 밀며 들어온 손님은 예사 손님이 아니었다. 유독 자신만이 남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도 남자에 신경을 쏟지 않는다. 자신들의 술과 쾌락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다.

  칼을 바닥에 끌면서 걷자 그제야 몇몇 손님이 남자를 돌아본다.

  술집 안을 한 번 죽 둘러본 로브의 남자는 손을 들어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사람들을 가리키고 말했다.

  “명하노니. 일곱 죄를 지은 자들은 모두 죽어라.”

   저주스런 대사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의 목이 돌아갔다.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이가 있었다. 아무 상처도 없는데 풀썩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한 순간에 열이 죽었다. 최초로 동요가 일었고,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살인죄를 지은 자, 명하노니. 죽어라.”

  구석에 앉아서 불안한 표정으로 술을 홀짝이던 두 사내가 그 자리에서 얼굴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고꾸라져 죽었다.

  “도둑질을 한 자, 명하노니. 죽어라.”

  세 사내의 손이 꺾이고, 목이 부러지면서 일순간에 절명했다.

  단지 말만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세 마디를 하는 동안에 술집에 남은 이는 단 세 명이었다. 로브의 남자와 마스터, 그리고 그의 부인, 아니 네 명이었다. 위층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을 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여인은 벌벌 떨면서도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머리를 숙인 채, 계단을 잽싸게 올라갔다. 마스터는 아내를 잡지 못했고, 바 아래에 숨어서 벌벌 떨었다. 이제까지 평화롭게 술집을 경영하며 살아왔다.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사흘 전에 은화를 주고 간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잘못 주었으면서 나머지 액수를 돌려주지 않은 것이나, 가끔 술이 바닥났을 때, 맥주나 와인에 물을 많이 타서 손님에게 내놓은 걸 빼면 이 자리에서 죽어 마땅한 죄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기의 울음이 멈추었다. 적막에 싸인 자신의 술집이 이렇게 두려운 적은 없었다. 한참 후에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무언가 시커먼 것이 바에 앉아있었다.

   “교만함에도, 태만함에도, 음란함에도, 아집에도, 질투함에도, 포학함에도, 거짓을 자네는 저지르지 않는가? 그토록 깨끗한 인물인가?”

  작은 술집 주인 신분에 교만을 부릴 것이 뭐 있겠는가? 넉 달 전에 태어난 아기 때문에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도 아버지 된 책임감에 그럴 수 없다.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자기 신분에 그건 꿈도 못 꿀 소리다. 아내가 자신과 살아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이다.

  아집? 말수가 적은 탓에 자기주장도 잘 못한다. 포악함? 원체 순한 성격이다. 거짓말은 자신도 모르게 가끔 나오지만 낮에 하면 그날 밤에 후회하며 신에게 용서받기를 기도했다.

   그는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않는 자들이 벌을 받는 것이지. 자네처럼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자비로우신 신은 모두 용서해 주신다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 이름은 아무렇게나 부르게. 하지만 'E'라고 불러도 되고. 발음하기 좋게 줄이고 줄인 이름이지. 자네 이름은?”

   줄리앙은 떨면서 맥주잔을 탁자 위에 놓고 간신히 입을 열어 자기 이름을 말했다.

  “줄리앙? 자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단숨에 들이마신 그 E는 맥주 값으로 금화 하나를 던져주었다. 맥주 맛이 좋다면서 나중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올 때처럼 묵직한 발걸음으로 술집을 나섰다. 줄리앙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꿈인가 하고 볼을 잡아 당겼다. 아내가 2층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서 얼굴을 내밀었다. 품에 아기를 안고 있었다. 줄리앙은 아내를 돌아보고 말했다.

  “가버렸어. 경비단에 연락할까?”

   아내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밤길을 홀로 걷다보면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쇳조각을 들고 덤벼오는 이가 있다.

  그들은 대개 비슷한 말을 지껄이며 군데군데 녹이 슨 쇳조각을 가슴에 겨눈다. 후줄근한 로브 차림에 힘없는 걸음을 떼어놓고 있는 자에게 접근해 오는 이유는 아마도 오른손에 질질 끌고 있는 칼 때문이리라.

  오른손에 든 칼은 끝이 땅에 질질 끌리고 있음에도 막 대장간에서 빼내서 사흘 동안 비단으로 잘 닦은 칼처럼 흠집하나 없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칼집과 손잡이는 백금으로 세공되어 있었고, 다이아몬드며 루비 같은 보석조각들이 표면에 박혀서 화려함과 품격을 더한다.

   E는 손가락으로 대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말한다.

   “그러면 죽어라.”

   가리켜진 대상은 눈을 까뒤집거나 가슴을 부여잡은 채 쓰러진다. 잠시 경련한 다음에 죽어버리는 것이다.

   E는 칼을 끌면서 느린 걸음으로 골목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
  ―나는 그들을 심판하고자 한다.

   위대하신 분은 이렇게 말하셨다.

   ―그런 까닭에 나의 분신인 너를 내려 보내고자 하노라.

   내게는 ‘절대적 살해의 권한’이 주어졌다. 원하면 상대는 누구든지 말 한마디로 죽일 수가 있다.

   ―그 능력으로 그들을 심판하여라.

   나는 물었다.

   ―제가 그들을 심판해야 하는 까닭이 있습니까?

   위대하신 분은 이렇게 말하셨다.

   ―내가 원해서이다. 내가 행하고자 한다. 내가 보고자 한다.

   다시 그분에게 물었다.

   ―만일 실수로 잘못 죽이게 된다면 저를, 그들을 어찌하겠습니까.

   위대하신 분은 잠시 생각하신 뒤에 약조하였다.

   ―네게 돌아가는 해(害)는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보상을 얻는다. 그들은 내가 사는 곳에서 부족함 없이 지내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당신도 실수하는 일이 있으십니까?

   대답은 이러했다.

   ―분신인 너는 불완전하다.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은 운명과 내가 원하고 예정하던 바이요. 너의 실수도, 성공도 운명과 내가 예정했던 것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올린 후에 위대하신 분의 전당(殿堂)을 빠져나왔다.
===
  이 일곱 가지 대죄(大罪)를 비롯한 여러 죄(罪)를 E는 단지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스스로의 의지로 심판을 늦추고 오히려 부추기도 했다.

   E는 어떤 부호를 찾아가서 죄를 짓도록 유도했다.

   ―나는 멀리서 오는 길입니다. 당신의 경쟁자인 자작의 행동을 알려드리지요. 지금 즉시 북쪽으로 30마일 지역에 정찰대를 파견하십시오. 당신의 영지를 침공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지을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선발대를 보냈을 겁니다.

   부호는 평소에 눈엣가시 같고 자신보다 부자인 그를 미워한 까닭에 즉시 정찰대를 파견했다. E는 그 길로 자작을 찾아가서 부호의 행동을 알려줬다.

  ―즉시 군대를 부호의 영지로 파견하십시오. 그들은 머지않아 당신에게 도전해 올 것입니다.

   부추김을 받은 부호와 자작의 군대가 자신들의 영지가 맞닿는 지점에서 격돌했다.

   그들은 죄를 지었다. 그러니 죽어 마땅했다. 먼 언덕 위에서 유유히 상황을 바라보다가 전장에 나와 있는 두 사람을 가리키고 ―죽어라. 라고 명령하니 두 사람은 낙마해서 머리를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부호와 자작의 군대는 갑작스럽게 주인이 사망하자 싸울 의욕을 잃고 스스로 해산했다.

   부추기기만 한 게 아니라 때로는 말리기도 했다.

   벌써 5년째 싸우던 두 나라의 군주를 찾아가서 중간에서 화해를 중재했다.

   ―양국이 서로 눈 흘기며 싸운 지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두 분께서는 눈을 감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 양국의 관계를 말입니다. 그리고 5년 전 싸움이 시작되었던 원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군주들이 잠시 눈을 감은 중에 E는 아무도 모르게 손을 그들의 머리 위에 돌렸다. 이내 두 군주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들은 서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형제 같은 양국이 피를 흘리며 싸웠다면서 서로 용서를 빌었고 화해하며 그날로 종전문서를 교환하고 영채를 뽑아 평화를 다짐하며 되돌아갔다.

   가끔은 장난을 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남쪽에서 성실하게 상권 확장에 힘쓰고 있는 부지런한 대상(大商)을 찾아가서 달콤한 말로 설득했다. 그는 눈빛이 맑고, 선을 사랑하며 악을 배제하는 중년 상인이었다.

   ―당신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利)를 얻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몇 년 안에 전 세계의 부를 손에 넣게 됩니다. 권력은 옵션이지요.

   즉시 그의 눈이 혼탁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탐욕으로 물들고 악으로 기울고 있었다.

  대상은 즉시 상생하며 공존하고 있던 중소상인들을 온갖 계략을 써서 박해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자객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기를 몇 년 여, 대상은 화난 중소상인들과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불타죽고 말았다. 거기에는 이득을 노린 라이벌 상회의 용병들도 달려왔다.

   일대를 주름잡던 대상이 사라지자 그 지역에는 작은 중소상회가 난립하여 한동안 상업 질서에 혼란이 있었다.
=====
  ―너는 나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위대하신 분이 말을 걸어오셨다.

   ―어째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지 않고 부추기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는가?

   그분의 음성은 크게 노한 듯 했다.

   ―너는 나를 거역하려는 것이냐?

  나는 우러러보며 대답했다.

   ―이 모든 것은 운명과 당신께서 의도하신 바입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어두운 골목 안을 한참 걸어 들어가다 보니 붉게 빛나는 등이 내걸린 지역까지 온 걸 깨달았다. 등의 의미를 얼른 이해했지만 되돌아가기는 멋쩍어서 그대로 걸어 나갔다.

   발길에 고양이의 시체가 채였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지만 몇 마리의 파리가 꾀기 시작했다. 발밑은 비도 내리지 않았는데 질퍽했다. 어두운 후드 밑 E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갔다.

  한밤중에 E가 홍등가 한 복판을 그대로 직진하자 거리에 늘어선 창녀들의 표정이 신기하게 변하다가 이내 호객행위에 들어갔다.

  E의 팔을 붙들고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낡은 클록과 후드, 무거운 발걸음은 그녀들의 흥미 대상 밖이었으나 오른손에 든 호화스런 칼은 뭇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E는 일절 대꾸하지 않고 걸어 나가려다가 여자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거리 한쪽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30대 후반 정도의 나이든 창녀가 홑옷만 걸치고 파이프 담배를 뻑뻑 피우며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희망 없는 표정에 죽은 눈빛의 창녀는 E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었다. "날 사시려고요?” 하고 그녀는 묻는다.

   여자는 집도 없이 동료의 거처에 얹어 살고 있다. 매달 일정 액수의 동화(銅貨)를 지불하는데, 넉 달째 밀려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간곡하게 하소연했지만 동료는 딱 잘라서 지불을 요구했다. 그녀의 매정함에 치를 떨면서 한 대에 동화 2닢 하는 싸구려 담배를 뭉텅이로 사서 신경질적으로 피워 물고 있었는데 마침 E가 다가온 것이었다.

   창녀의 시선이 E가 차고 있는 칼에 향했다. 초라한 모양새에 비해 훌륭한 칼을 지닌 것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은화 한 닢이라도 준다면 한 달 치는 지불할 수 있기에 그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E는 그녀에게 안내하라고 말했다. 창녀는 기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거처로 데려갔다.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오세요. 당신은 참 고마우신 분이세요.”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서 째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쏘다니다 오는 거야. 이년아! 밀린 방세는 언제 낼 거야?!”

  안쪽에서 뒤룩뒤룩 살찐 여자가 늘어진 뱃살과 엉덩이를 흔들며 나타났다. 너무 찐 까닭에 몸이 흔들려서 움직일 때마다 손을 주위에 짚어야 한다. 창녀도 지지 앉고 마주보고 소리 지른다.

   “돼지 같은 년! 내일이면 은화 하나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살찐 여자는 창녀를 보며 어이없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뒤에 있는 사내를 보고 가증스럽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쩌다 운 좋게 호구 하나 물어왔나 보네? 내 방세 탕감에 걸겠어. 저 놈은 동이 트기 전에 도망갈 거야!”

창녀는 욕설을 퍼부어주려다가 E가 뒤에서 부르자 얼른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가리키며 2층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 살찐 여자는 오리궁둥이 같다며 한바탕 조소를 퍼부었다.

  창녀의 거처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자신도 그걸 알고 있는지 재빠른 솜씨로 대충 치우고 E를 방에 들어오게 했다.

   “우선 선불을 주실 수 있을까요?”

   여자는 돈을 받아 친구를 박대하는 살찐 여자의 얼굴에 던져야만 분이 풀릴 것 같다며 조금이라도 좋으니 돈을 요구했다. 그런데 E의 입에서 나온 말이 가관이었다.

   “나는 사실 돈이 별로 없다네.”

   창녀의 얼굴에 분노와 허망함에 가득 차다가 오른손에 든 칼로 시선이 향했다.

   “거기에 박힌 보석 작은 거 하나만 떼어주세요. 그거라면 충분한 지불이 될 거에요.”

   E는 칼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품에 손을 집어넣어 은화 두 개를 꺼내놓았다.

  창녀는 오랜만에 보는 은색의 타원체를 보고 거기에 연신 입을 맞추다가 얼굴에 비비며 촉감을 한참 느꼈다.

   E가 얼마나 이 일을 오래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별로 매너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손님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의무가 있다며,

   “20년 정도 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내려갔다 오겠다고 하면서 침대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에 쩔껑! 거리는 돈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두 여자의 고함소리가 가구가 흩어지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잠시 후에 창녀가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올라왔다. “오래 기다렸죠?”하며 문을 잠그고 옷을 벗으려고 하자 E가 손을 올려서 제지했다.

  검지로 창녀를 가리키면서 “죽어라.”라고 입 속으로 말했다. 여자의 몸이 뒤로 덜컥 넘어가려다가 잠시 비틀거리면서 다시 균형을 잡았다.

  머리가 흔들거리는 것이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뭐죠? 방금 전에 손가락 가리킨 게 뭐한 거죠?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놀랍게도 죽음의 심판을 내리기 전에 어떤 의도이건 간에 그게 멈춰졌다.

  심판이 멈춰지자 E는 문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몸을 웅크리고 칼을 꼭 끌어안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봐요. 그냥 여기서 잘 거예요? 설마 내가 늙어서 생각도 없다는 거예요? 젊은 애들처럼 탱탱한 맛은 없겠지만 20년 경력에서 온 테크닉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요. 이봐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새근새근 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걸로 E가 깊이 잠들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E가 가진 칼에 눈독을 들이고 빼앗으려고 했지만 마치 쇠줄로 감아놓은 것처럼 잘 빠지지 않았다. 한참 씨름한 끝에 창녀는 포기하고 침대에 제멋대로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돈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 그녀는 금방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E는 간데없었다. 마치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진 E는 간데없고, 잠들었던 의자 위에 E가 두고 간 모양인지 금화 스무 닢을 담은 주머니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 이걸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과 가축을 사서 잘 기르며 안락하게 살 꿈을 떠올렸다. 그녀는 짐을 꾸려 나와서 살찐 여자의 방으로 쳐들어가 남은 방값으로 금화 하나를 집어던지고 돈주머니를 자랑스럽게 눈앞에 흔들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여자가 떠난 직후에 살찐 여자는 급히 어디론 가로 달려갔다. 그것은 창녀에게는 재앙이 되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그대의 피조물은 어찌하여 화를 재촉한단 말입니까.

   E는 성 밖 20마일 밖에서 칼에 가슴을 베이고 살해당한 창녀의 시체 앞에서 깊이 한탄했다. 죽어가는 도중에도 손에 금화 주머니를 꼭 쥐고 있었다. 일곱 걸음 떨어진 곳에 불량배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지금쯤이라면 살찐 여자도 눈을 부릅뜬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끝가지 자신의 죄를 부인했다.

   불량배와 작당하여 창녀를 죽이고 금화를 뺏으려는 걸 그 자리에서 죽인 뒤였다.

   만일 입 꼭 다물고 몰래 홍등가를 빠져나갔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E는 창녀의 시신을 흙으로 되돌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금화주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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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동화에서 나이든 사자는 왕좌에 앉아서 힘없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마음은 젊을 적의 패기와 힘을 원하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법칙에 따라 젊고 기운찬 수사자가 자신의 자리에 도전해 주기를 원하나 아무도 오지 않는다.

  젊었을 적에 자기를 따르지 않는 모든 사자들을 물어죽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힘을 자랑하려다가 숱하게 상처를 입혔으며, 자신도 입었다.

  상처를 입은 늙은 사자는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왕좌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한 거리를 주름잡던 강력한 폭력 조직의 보스는 슬슬 뒤를 물려줄 후계자를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젊었을 적에 숱한 인물을 죽인 탓에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이 먹는 것은 어려지는 것이다. 라고 누가 말했던가. 늙은 보스는 어린애처럼 신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이름 높은 떠돌이 성직자가 있었다.

  “제가 당신을 신께 가까이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을 제게 맡기십시오.”

   성직자는 거금의 헌금을 요구했다. 소싯적에 모아둔 재산이 꽤 있어서 죽으면 이게 무슨 소용이냐며 물 붓듯 성직자 앞에 가져다 바쳤다.

  처음에는 은촛대, 금잔, 대리석 제단을 만들어놓고 기도를 하고, 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으나 날이 갈수록 괴상망측한 내용에 기도도 대충대충 넘기는 것이었다.

   “저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정한 신의 대리자입니다. 저에게 기대시면, 저를 믿으시면 신의 곁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축복받을 것입니다. 훗날 신의 곁에 서 계실 겁니다!”

   나중에는 마땅히 해야 할 주말 예배나 새벽 기도조차도 빼먹었다.

   뭔가 의혹을 주었지만 하는 말이 그럴듯해서 계속 돈을 부어주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칼을 질질 끄는 E가 나타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멋대로 신을 사칭하고 자기 자신을 신보다 믿는 오만함은 죽음에 해당하는 대죄인 것을 성직자라면 당연히 알겠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죽어라.”라고 말하니 성직자는 아홉 구멍에서 피를 쏟으면서 그 자리에서 죽어 나자빠졌다.

  말 한마디로 사람이 죽는 걸 본 보스는 벌벌 떨면서 E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바른 마음을 가지고 신을 믿으시오. 경건하게 기도한다면 굳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도 편히 여생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오.”

   보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문 한 구절을 외우니 그는 잠자듯 숨을 거두었다.

  껍데기만 남은 보스의 육체는 아지트를 찾아온 옛 부하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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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전당을 방문하여 청하니, 위대하신 분은 사랑하는 애인의 머릿결을 매만지듯 정성을 들여 점토로 빚던 새로운 생물에게 밀어를 속삭이다가 숨결을 불어넣는 마지막 작업을 멈추고 너그럽게 분신의 청을 들어주었다.

  E는 칼을 뽑아보이고는 이걸 주제로 이야기 하겠다고 했다.

   ―하루는 길을 걷다가 대장간 근처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벽에 걸려있던 칼과 집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집이 칼에게 말하길, ‘너는 번쩍이는 광택을 내지만 사실은 생명을 앗는 데 외에는 쓰이는 데가 없다. 보석으로 치장되고 세밀한 조각이 새겨진 내가 더욱 쓸모 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칼은 고까운지 한참 대답이 없다가 집에게, ‘가치로 보자면 나는 너를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나의 날은 널 부술 수 있다. 만일 너를 부순다면 돌아볼 이가 과연 있을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외의 반격에 당황한 모양이지만 지지 않고 집도 대꾸합니다. ‘네 몸은 가녀린 금속에 불과하다. 우리의 주인은 언제나 땅에 끌고 다니는 버릇이 있다. 내가 너를 보호하지 않으면 금방 상처 나고 날이 무뎌지다가 결국에는 깨어져서 부드러운 풀도 자르지 못하게 될 거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칼이 말합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칼과 집의 관계이지 않은가? 내가 들었는데, 주인은 세력가의 협박을 받아서 우릴 넘겨주느니 도로 용광로에 넣어버리려고 한다.’ 둘은 협력해서 집의 등을 타고 올라간 칼이 밖에서 자고 있는 주인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습니다. 지금 칼과 집은 그 자리에 조용히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E는 칼을 집에 도로 넣었다.

   ―저는 일을 마치면 용광로에 넣어질 칼이 되겠지요. 별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위대하신 분이시여. 당신은 이야기에서처럼 칼에게 죽은 주인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들려오는 위대하신 분의 목소리는 가소롭다는 듯 했다.

   ―어떤 이유로 날 죽이려 하는 것이냐. 네가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위대하신 분이시여. 당신은 여섯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첫째로, 분신을 만들어놓고도 감시를 게을리 하셨기에 저는 자유의지를 가져서 죄를 심판하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하고, 말리기도 했습니다. 둘째로,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셋째로, 조물주라 하여 평화롭게 사는 피조물들을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셨습니다. 넷째로, 당신은 새롭게 생명을 만들 뜻이 있으셨는데 자리가 없자 이 지구를 욕심내시어 그들에게 주실 생각을 하셨습니다. 다섯째로, 당신은 인간 세상에 마음 씀이 부족하여 심판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섯째로, 너무 얕잡아본 나머지 제게 부여한 살해의 권한을 잊으셨습니다.

   E는 “―이제 죽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허공에 빛이 몇 번 깜박이다가 사라졌다.

  ―제가 조물주를 죽이는 것도 운명과 당신이 주도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E는 아무 것도 없는 전당에 앉아서 잠들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전당과 인간들의 세상을 한 번 내려다보고 위대하신 분이 거처하던 자리에 올라가서 그대로 누워 몇 번 뒤척이다가 잠들었다.

― 단편 ‘반역자’ 끝 ―
나길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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