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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아벨 티포주의 불길한 독백
   어느 날부터인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이 내게 말을 걸어오더라. 친절하게도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모종의 암호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더라. 나는 그 암호들 사이에서 강렬한 기시감과 함께 희열을 느꼈더랬다. 나를 수신자로 해서 계속 발송돼 오는 그 러브 레터는 나에게 은밀한 공모를 제의하는 듯 보였고, 나는 그런 세상과 마법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기쁨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1. 식인귀
   “당신은 식인귀야.” 난데없는 이 한 마디에 전혀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티포주는 당혹스러워한다. 그는 우연히 자신이 왼손으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불길한 예감에 빠지며, 일기를 통해 성 크리스토프 학원에서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네스토르라는 인물에 대해 회상한다. 네스토르는 우주적인 은밀한 공모, 즉 기호를 해석하는 마법적인 인물로, 티포주는 자신이 그의 힘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보이며 사진 찍기에 열을 올리다가 억울하게 소녀 강간범으로 몰린다. 그때 계시와도 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그는 풀려나와 비둘기 사육병으로 근무하다 포로로 독일에 가게 된다. 독일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원시적인 어떤 힘으로, 거기서 그는 자신의 식인귀적 본성을 공유하는 많은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비둘기와 사슴, 말을 거쳐 다시 아이들에게 집착하게 된 그는 나치를 위해 소년병을 양성하는 나폴라에서 일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그는 자신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약탈해 온다. 그러던 그의 앞에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한 유대인 소년 에프라임이 나타나고, 그는 소년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순수한 마음으로 행해온 일들이 전쟁 이면에서 얼마나 끔찍한 모습으로 전위되어 나타나는지를 알아차리고 좌절감을 느낀다. 소련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그 상징의 악의적 전위는 절정에 달한다.

   2. 마왕과 황금별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주인공 자신이 딱히 그 전쟁으로 인해서 고초를 겪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전쟁 자체의 상징적 의미에 주목한다. 주인공 티포주는 전쟁을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종의 기호로 파악하며, 내심 환희까지 느껴가며 그 안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무수한 기호 해독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는 ‘불길한 기록’에서 자신이 수만 년에 걸쳐 떠돌고 있던 어느 초월적 영혼이라고 진술하며, 기호를 통해 세상과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처음에 티포주의 이런 진술은 자의식 과잉으로 보일 뿐, 주인공이 실제로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인해 기호와 그 뒤에 숨은 악의적 전위가 드러나고 티포주의 불길한 기록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그는 작품 안에서 일종의 마법사와 같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기호를 읽어내는 신비한 능력이 아주 오랜 시간동안 존재해 왔으며, 그가 예언자적인 면모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기호들을 읽느냐이다.

   2-1. 티포주가 주변에서 읽어내는 기호들은 하나같이 궁극적으로는 ‘Portenfant’(porter: 짊어지다 + enfant: 아이)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가리키고 있다. 네스토르가 황홀경에 취해 외친 말―――“한 아이를 짊어진다는 것이 이처럼 아름다운 일인 줄은 몰랐어!”―――이나 성 크리스토프의 생애는 티포주의 뇌리에 남아 그의 모든 기호 해석 작업에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짊어진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티포주에게 그것은 궁극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한 방법이자,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짊어짐’으로써 그것을 소유하고 섬기는 일이다. 그러나 상징의 이면에는 그 악의적 전위가 존재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짊어진다’는 행위에는 소유함과 소유됨, 즉 섬김과 약탈의 의미가 병존하므로, 예수를 짊어지는 성 크리스토프의 이미지는 바로 소년을 유괴하는 ‘마왕’의 그것으로 전치된다. ‘마왕’의 이미지는 곧 ‘식인귀’의 이미지와 연결되고, 티포주의 모든 행동은 그러한 식인귀적 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그 또한 자신의 그러한 속성을 잘 알고 있으나,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악의적 전위인 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전위가 일어난다. 무시무시한 식인귀인 티포주는 자신의 약탈품인 여러 동물과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며, 실질적으로 그들의 다시없는 보호자가 된다.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나쁜 것이 좋은 것으로; 기호의 악의적 전위가 절정에 달하고 전쟁 뒤에 숨은 모든 무서운 진실이 밝혀졌을 때가 언젠가 티포주가 예견했던 세상의 종말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바로 그 자신, 마왕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2-2. 아마도 후자 쪽이 맞을 것이다. 언젠가 티포주는 자신의 신체 치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어느 이탄인(이탄지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화석인간)의 시체를 본 적이 있다. 수천 년 전으로부터 찾아온 이 방문자는 자줏빛 망토에 황금별 문양의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으며, 결국은 '마왕'이라 명명되었다. 시공을 뛰어넘은 이 강력한 메시지에 티포주는 전율한다. ‘언젠가 만나면 알아보기 위해서라는 듯’ 그가 뚫어지게 응시한 작은 이탄인의 누더기 모자가 언젠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고, 모자 주인인 소년을 짊어지고 마왕의 늪을 건너게 되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예고된 사명이 아니었던가? ‘마왕’은 죽었다. 늪에서 발견된 이탄인은 수만 년에 걸쳐 존재해 온 티포주의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때 식인귀였던 이 거인은 소년을 짊어지고 늪을 건넘으로써 예수를 짊어진 성 크리스토프이자 황금별을 짊어진 아틀라스가 된다. 그리고 끝이다.

   하지만 그 문제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늘을 짊어진 아틀라스, 별을 짊어진 아틀라스는 신화적인 영웅처럼 보인다. 나는 아틀라스를 지향해서 마침내 그의 성과와 영예를 발견할 것이다. 내가 미래에 축복 받은 두 어깨 위에 귀중하고 성스러운 어떤 짐을 짊어지게 될 지라도 신이 허락한다면 동방박사들의 별보다 더욱 눈부시고 더욱 찬란하게 금빛 도는 별을 목에 걸고 걸어가는 모습이 나의 자랑스러운 종말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이렇듯 작품 곳곳에서 기호적 해석이 가능한 실마리들을 제공하여 대립적 위치에 있는 상징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징들은 기민한 독자가 아니면 첫 읽기에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주인공과 얽혀있다. 이는 작품의 환상적 요소를 더욱 부각시키는데, 시공을 초월한 우주적 기호가 주인공 앞에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일종의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덧붙여 작품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독일의 마왕과 요정 전설, 아틀라스 신화나 성 크리스토프의 생애와 같은 신화적 요소들은 작품 전체에 신비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2-3. 사족 하나. 이쯤 되어서 사실 [마왕과 황금별]이라는 번역판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상당히 뜨악한 심정이었음을 고백하자. 원제가 [마왕(Le Roi des Aulnes)]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여기에 갑작스레 끼어든 ‘황금별’이라는 유치한 단어는 뭐란 말인가? 그러나 작품을 여러 번 읽고 난 지금은 그 점에 대해 수긍할 수 있다. ‘마왕’이 식인귀적인 모든 행위를 대표하는 상징이라면 ‘황금별’은 그 반대편에 선 신적 전위이자 티포주가 끝내 도달한 완전한 희열의 상징이다. 즉 이 두 단어는 ‘짊어짐’의 양 속성을 대표하는 상징어로서 충분히 병기 가능하고, 또 작품의 의미를 고려할 때 그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역자의 사려 깊음이 엿보이는 부분이다(역자 약력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투르니에 작품을 주로 연구해온 분이었다, 신뢰할 만한 역자가 작품 자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된 부분). 이 작품을 이렇듯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소한 부분에서 나타나는 역자의 이런 세심한 배려 덕분이 아닐까 한다.

   3. 이 환상적인 전쟁 소설에서 부인할 수 없는 점은 바로 헤르만 헤세의 영향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데미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 크리스토프 학원 시절에 티포주의 인도자였던 네스토르와 싱클레어의 데미안은 어딘지 모르게 서로 닮아있다. 양쪽 모두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는 인물로, 초현실적인 어떤 힘과 연관되어 있는 듯이 묘사된다. 이들은 무너져 가고 있는 주인공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자신의 초월적 힘을 드리우며, 결국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는 어떤 기호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인물들이다. 단, [데미안]은 데미안이 사라진 후 싱클레어가 그의 어떤 운명을 예감하는 것으로 끝맺는 반면, 이 작품은 네스토르의 죽음 이후 아벨 티포주가 그의 능력을 물려받아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 전개와 주제 의식 표출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작품을 헤세와 비교하며 읽을 때 특히 흥미로운 점은 ‘카인과 아벨’에 대한 해석의 경우, 그것을 정착민과 그들에게 핍박받는 유랑민으로 해석하여 헤세와는 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헤세의 작품에서 카인은 유달리 뛰어난 인물로, 그것을 시기하는 약한 아벨에게 악인이라는 표지를 받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오히려 아벨 편에 선다(주인공 티포주의 이름도 ‘아벨’이다). 그에 따르면 아벨은 땅에 묶여 사는 카인의 종족에게 시기와 멸시를 받는 족속이다. 시간의 밤 속에서 떠오르는 환상적인 괴물의 속성을 지닌 티포주가 이 사실을 간파하고 남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투르니에는 이렇게 다른 사람의 영향에 완전히 구애받지 않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자신만의 해석을 제기할 수 있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가다.

   4. 사족
   사실은 이 리뷰를 쓰기 전에 조금 망설였다. 이 작품에서 제시되는 환상성이 거울에서 요구하는 환상성에 부합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호 해독, 식인귀와 마왕 전설의 결합, 그 밖의 신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요소들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에, 굳이 환상 문학의 범주에서 또다시 이것저것을 나누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사실은 ‘환상적이면 되죠’라는 진아님 말씀에 용기를 얻은 거지만). 이 리뷰를 읽고 이 작품을 어떻게 미리 판단하고 읽든 간에, 독자는 가장 기묘하고 낯선 환상 소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점은 내가 보증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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