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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에러곤

2004.07.30 21:3307.30





lunaticsun@msn.com

   0. 언제부터인가 국내외에 출판되는 환상 소설 대부분에 ‘해리 포터를 능가하는……’ 비슷한 카피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실제로 [해리 포터] 시리즈 못지않을 정도의 작품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아류작 수준에 그쳐 실망을 안겨준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에러곤] 역시 해리 포터 뺨친다는 평을 들으며 출판된 작품 중 하나인데요, 저자인 크리스토퍼 파올리니가 이제 겨우 만 20세가 되는 청년이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유산]이라는 제목의 3부작 시리즈 중 첫 번째인 [에러곤]은 일단 그 기획 규모나 내용 면에서 [해리 포터]시리즈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아류작 정도의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해리 포터]시리즈와는 별개로 그 매력을 인정 받았으며, 이미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다지 끌렸던 작품이 아닌데도 이렇게 리뷰 대상으로 고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신작에 대해서 써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 모양입니다(웃음). 그럼, 시작할까요.

   1. 이야기는 알러게이지어라는 땅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이곳에는 인간, 요정, 난쟁이, 용 등의 종족들이 살았으나, 검은 야욕을 가진 갈버토릭스 왕과 제국의 출현으로 그 평화가 깨어지고 용과 다른 종족 사이를 중재하던 드래곤 라이더의 존재는 전설로만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를 모르고 자라난 시골 소년 에러곤이 우연히 푸른 용의 알을 발견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실 그 알은 새로운 드래곤 라이더의 출현을 십 수년간 기다려온 여러 종족들의 이해관계의 중심에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알을 깨고 나온 용 서피어러의 존재로 에러곤은 드래곤 라이더가 되지만, 제국에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한 갈버토릭스 왕은 그에게 마수를 뻗쳐옵니다. 스승 브롬과 동료 머태그의 도움으로 에러곤은 제국에 맞서는 반란군의 본거지에 도달하고, 그 곳에서 영웅으로서의 새로운 자각과 긍지를 갖게 됩니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환상 소설이며, 한 소년이 영웅으로 성장하는 내용을 다룬 성장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본 성격에 충실한 이 작품은 상당히 짜임새 있는 구성을 바탕으로 안정된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아챘음 직합니다. 이 이야기의 구성이 짜임새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도 이미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런 유형의 스토리 전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이 기존 환상물을 충실히 답습 혹은 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주인공 에러곤과 드래곤 라이더,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정은 [스타 워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많습니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숙부 집에서 자라나 우연히 발견한 용의 알 덕분에 스승 브롬을 만나고 드래곤 라이더가 되는 에러곤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나 요다에게 가르침을 받고 제다이 기사로 성장하는 루크 스카이워커는 서로 닮은꼴이지요. 게다가 전제적으로 군림하는 제국과 그에 맞서 투쟁하는 반란군 연합에 대한 내용에 이르면 이 작품이 [스타 워즈]의 환타지 판이라는 심증은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말 번역을 거쳤지만 확연하게 드러나는 고색창연한 톨킨 풍의 묘사,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발췌해온 듯한 느낌을 주는 설정들을 접하게 되면 새삼 후대 작가들이 얼마나 이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느끼게 됩니다.

   3. 읽어 나가면서 몇 가지 부족한 점들이 먼저 눈에 띕니다. 우선은 인물의 생동감이 부족하며 힘 있는 캐릭터가 별로 없다는 결점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힘 있는 캐릭터’라고 하는 것은, 독자를 사로잡을 매력을 가졌거나, 적어도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을 말합니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에러곤과 몇몇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개성을 지닌 인물이 없으며, 그런 인물의 묘사는 대부분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단순한 성격·외양 묘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주요 인물들은 비교적 성실하게 묘사되고 있으나, 문제는 우리가 영웅이 되는 십대 소년의 이야기를 귀에 익을 만큼 들어 왔다는 데 있겠지요. 따라서 주인공 에러곤과 그 조력자들, 그를 해하려는 갈버토릭스 왕 역시 수많은 영웅담 속에 등장하는 진부한 인물들로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친 설명 또한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는 계속해서 이 가상 세계에 대한 설정을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하는데, 그 정보 전달이 너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서술, 그리고 대화에 의한 정보 전달이 너무 빈번하게 이루어져 자칫하면 작품에의 몰입도를 떨어뜨리고 글 자체의 분위기를 경직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소설의 전개 상 반드시 독자가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전개를 흐릴 수도 있다는 거지요.
   여기에 아주 작은 아쉬움을 덧붙이자면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명확하다는 점입니다. 한 소년의 성장기라 해도 좋겠고 영웅적 삶에 대한 동경을 담았다고 해도 무방하겠지만, 삼촌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심각한 갈등이나 고민을 보여주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위치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물론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적응을 보여주는―――주인공 에러곤에게서는 별다른 의지, 신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4. 여기까지 살펴보면 [에러곤]은 분명 장르 문학으로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 주제 의식도 미약한 평작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선대 환상 문학들의 모방 정도로 치부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선 이 작품은 ‘대작’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지요. [에러곤]은 현재 작가가 계획하고 있는 [유산] 3부작 시리즈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직 완결된 작품도 아닐 뿐더러 작가도 주인공도 충분히 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더 흥미 있고 색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기회를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시작부터 뻔한 이야기라고 해서 그 가능성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요.
   또한 작가가 젊다는 것이 또 다른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 이제 막 성인이 된 작가라면 아직 소년인 주인공의 심리 상태와 욕구를 생생히 묘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그 이점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 못한 것 같지만, 앞에서 지적한 여러 단점들도 글 쓰는 경험의 축적과 개성의 확립으로 개선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은 비록 톨킨을 상당히 모방했다고는 해도 십대의 글쓰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성숙한 문체를 사용하며, 자신이 그리고 있는 이야기의 세계관이나 장르적 개념도 비교적 잘 정립되어 있는 듯 합니다. 잠시 [드래곤 라자]를 떠올리게 하는 ‘의식의 접근’이라는 개념도 마음에 드네요.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저자는 빈번한 소재인 고아 소년과 용 등을 적절히 이용해서 나름대로의 재미를 만들어 냈다는 점입니다. 안정된 스토리 전개는 기존 틀의 모방―――이 작품에서 아주 모범적으로 이루어진―――으로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독자의 눈길을 끌어 책 속의 이야기로 잡아놓는 일에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과 소질이 필요하니까요. 저자의 이러한 재능 덕분에 영웅의 길로 막 들어선 소년 에러곤의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된 클리셰의 차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으로 독자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5.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나니’라는 전도서의 구절이 있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것들은 모두 낡은 것을 모방한 클리셰일지도 모르지요. 장르 문학 속에서 이런 진부함은 오히려 친숙함이라는 매력으로 독자에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놀랍도록 진부한 이야기들은 동시에 놀랍도록 매력적일 수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진부함을 매력으로 바꿀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겠지요. 이런 면에서 파올로니의 역량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클리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유산] 시리즈가 단지 기존 틀의 모방 뿐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빛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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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bbath 04.07.30 23:25 댓글 수정 삭제
    역시. 누군가 이야기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매우 끌렸던 작품인데도 여전히 사질 못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두 권 짜리는 부담이 많이 되는 모양입니다(울음).
  • No Profile
    yunn 04.07.31 09:17 댓글 수정 삭제
    스타워즈라... 정진정명 영웅 이야기라는 거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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