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선정작 안내 2월 심사평

2023.03.14 20:4503.14

안녕하세요. 독자우수단편 선정단입니다.

우수작으로 2차례 이상 선정되시거나 연말에 최종 우수작으로 선정되신 분께는 거울 필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번 호 독자우수단편은 2023년 2월 1일부터 2023년 2월 28일 사이에 창작 게시판 단편 카테고리로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심사 기준을 만족한 작품 9편을 심사하였습니다.

2023년 2월의 독자우수단편 후보작은 없습니다. 다음 달을 기대하겠습니다.

 

패턴09, 〈내 애인은 DNA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에 어떤 상상력은 불가항력으로 헤어진 애인을 소환합니다. 특히 판타지나 SF에서 이런 소환술을 보는 건 참 애달프고도 즐거운 일이에요. 아직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평행우주나 기억 복제, 사이보그 등의 장치가 모두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 쓰이니까요. 패턴09 작가의 〈내 애인은 DNA〉는 여자친구를 복제한다는 발상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왜 이것을 읽으며 평행우주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네요. 이 소설이 단순하고도 기계적인 DNA 복제만을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설령 그 과정에서 여자친구가 사백 명쯤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요.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결합은 우주의 만남과 같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하나의 우주인 것처럼 수많은 관계와 얽힘이 켜켜이 쌓인 존재들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한 외우주 생명체가 오직 하나뿐이던 애인을 위해 사백여 개의 우주를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사백여 명의 애인이 모두 다르게 살다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DNA는 한 사람의 특질을 담는 유전 정보에 불과하지, 미래를 알려주는 점괘 리스트가 아니니까요. “DNA에는 모든 정보가 다 적혀있는데, 어째서 그녀는 각기 다르게 죽어갈까요”.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우주로서의 인간을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우주도 같은 모양을 가질 수 없기에 사백 명이 조금 넘는 ‘나’의 애인들은 모두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것이죠. 그들의 관심사, 시선과 몸짓이 향하는 방향이 다른 것도 당연합니다. 어떻게 모든 우주가 같은 모습일 수 있을까요. "걘 탐사할 우주가 있고, 난 탐사할 게 여기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이백다섯번째-쉰다섯번째 애인’은 ‘사백네번째 애인’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둘은 하나잖아."라는 ‘나’의 답은 그런 면에서 재미있는 오류가 있는 말이겠네요.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한 후였을 텐데 말이죠.
지금 이 소설은 ‘나’의 입장에서 그의 애인들을 스케치하듯 빠르게 묘사합니다. 그가 개별의 인간을 사백 명도 넘게 복제했을 시간을 생각하면 이 단편 안에는 천 년 이상의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이토록 압축된 소설이지만 그 리듬에 급함이나 처짐이 없이 모든 이야기를 납득시킨다는 것은 작가만의 재능입니다. 짧은 시간을 늘이는 것보다 긴 시간을 압축하는 글쓰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소설은 압축의 과정에서 긴 시간 속에 존재했던 너무 많은 애인을 지워버립니다. 자신의 애인을 사백 명 이상 복제하고 그들 개개인과 사랑을 나눈 (혹은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는) ‘나’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애인은 또 없었을까요. 패턴09 작가는 이미 ‘나’와 그의 애인들을 충분히 구체화했고 그들 간의 사랑이 범우주적이라는 이야기의 틀을 단단히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아직 등장하지 않은 ‘애인’ 여러 명을 독자에게 더 소개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모든 애인이 ‘나’에게 무조건 사랑을 주었을까요. 자신이 복제본이라는 딜레마에 빠진 애인은 없었을까요. ‘나’에게 혼란을 준 애인은 없었을까요. 외계에서 자신만 지구인이라는 사실이 애인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혹여나 원망은 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나’와 애인들의 이야기는 너무 완벽합니다. 여기에 약간의 시련을 첨가하고 싶을 정도로요. 시련은 때로 사랑을 더 간절히 만들기도 합니다. 혹시 누가 알까요. DNA의 복제처럼 만들어진 어떤 새로운 애인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이 우주만큼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할지요. 그러니 이 세계에 조금만 더 오래 머물러 다양한 애인들의 이야기를 써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 서사의 틀을 유지한 채 담담한 어조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둘과 하나, 우주와 개인, 같음과 다름의 철학에 깊이 빠져 삶이란 무엇인지 사유하는 장편 또는 연작이 될 수도 있겠네요. 조금 더 많은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열린 마음으로 자신이 세워둔 사랑의 세계를 탐구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렇다면 분명 상상하지 못한 방향과 모양, 색깔과 냄새를 가진 애인들이 이 소설을 더욱 가득히 채워주리라고 확신합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충분히 즐거운 소설 잘 읽었습니다.

반신, 〈식물
반신 작가의 ‘식물’은 누나가 식물로 변했다는 일종의 ‘변신 모티프’를 활용한 소설입니다. 하루아침에 식물로 변한 누나와 그녀를 관찰하는 여러 날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이에요. 소재의 면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많이 닮았습니다. 주인공 ‘나’는 아침에 일어나 누나의 방에서 분재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누나라는 확신을 가진 그는 식물로 변해버린 누나와 함께 여러 날을 보내죠. 세빈의 일상에 식물이 된 누나에 관한 사유를 접목하고자 했다는 게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식물’의 안에는 “누나가 식물이 되어서 가장 끔찍한 점은 더 이상 맥박을 확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나가 사라져도 할 일은 해야죠” 등의 빛을 발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전자는 누나의 생존을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후자는 그럼에도 스스로 살아나가야 하는 취준생 ‘나’의 인생을 담백하게 담아내죠. 집안의 누군가 부재함에도 가족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변신」을 떠올리게 하지만 ‘식물’은 조금 더 다정합니다. 적어도 ‘나’는 누나에 관한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이 소설은 주인공 세빈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변신 모티프의 시조 격인 프란츠 카프카의 그 소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지요. 카프카의 「변신」은 벌레가 된 그레고리 잠자를 초점화하지만 〈식물〉은 식물이 된 (혹은 되었다고 추정되는) 인물의 동생 일인칭 시점입니다. 변신의 주체를 초점화하였느냐 그를 관찰하는 관찰자 시점이냐는 아주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일인칭 소설의 경우 이야기 전반의 흐름과 분위기를 바꾸는 매우 큰 전환입니다.
두 소설의 서술자가 놓인 상황과 그 시점을 고려했을 때, 이 소설에서 첫 번째 보완되어야 하는 점은 주인공이 누나의 식물화를 받아들이는 속도입니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에게 변화한 것은 그의 몸입니다. 때문에,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변신을 빠르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의 주인공은 누나가 식물이 되었다는 점을 빠르게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변신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아침에 일어났는데 누나의 방이 비어 있고 그 안에 분재가 있다면 누나가 분재를 놓고 나갔으리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것입니다. 그리고 누나에게 전화나 문자 연락을 하는 것이 우선순위지요. 하지만 주인공은 소설의 도입부터 ‘누나가 식물이 되었다’라고 성급히 납득해 버립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나’의 확신이 잠시 유보되고, 그가 끊임없이 누나를 의심할 때, 그리고 끝내 모든 정황이 누나가 식물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더욱 재미있어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끊임없이 의심했음에도 누나가 식물이 된 것 외에는 답이 없고, 그런 줄 알고 일주일가량을 보냈는데 누나가 다시 돌아오는 결말이야말로 반전의 극대화겠지요.
하나 더, 이 소설은 보조 인물로 세빈의 애인인 ‘소나’를 등장시킵니다. 저는 ‘소나’가 상당히 재미있는 인물이며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이라 보았습니다. ‘나’의 누나와 소나는 각각 부재와 존재의 의미를 강화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나와 ‘나’의 관계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소나는 ‘나’와 계약 관계라는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이 없습니다. 물론 두어 번의 의미 있는 대사가 곁들여진 에피소드에 그가 나오지만, 소나만의 캐릭터가 충분히 소설 안에 드러나 있다고 하기에는 조금 힘든 것 같습니다. 저는 소나가 ‘나’와 완전히 멀거나 가까운 인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애를 한다면 완전한 애인으로, 계약 관계라면 완전한 계약으로 남는 관계가 소나의 캐릭터를 분명히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쓰이지 않은 소나의 뒷이야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소나와 ‘나’의 관계망은 어떻게 형성되어 있으며 누나의 부재는 ‘나’와 소나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이런 질문이 이어지다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탄생하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누나가 돌아오는 결말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이 결말에 의문을 가졌습니다만, 카프카의 「변신」이나 한강의 「채식주의자」 같은 소설과 조금 다른 방향을 선택했기 때문에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누나가 되돌아오는 것은 독자의 예상을 뒤엎지만, 아버지에게 혼나는 장면과 답을 얻지 못하는 질문들로 끝나기 때문에 큰 반전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 결말을 보았을 때 그것이 맞는지 오래 고민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 결말은 조금 더 타당성을 부여하고 작가가 끈질기게 매달려 완성한다면 의외로 굉장히 현대적이고도 세련된 의미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저는 누나가 자신 대신 방에 두고 나간 ‘분재’에 조금 더 이 소설이 주목했으면 합니다. 화분을 던져서 깨버리는 결말이 아니라 이 식물을 작가가 조금 더 소중히 다루며 섬세한 의미 부여를 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결말에서 반드시 밝혀져야 하는 건 누나가 화분을 방에 두고 집을 나간 이유입니다. 이것이 밝혀져야만 소설 전체의 혼란과 변신 모티프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보완과 수정 과정이 어렵다면 인간이 식물로 변한 다른 소설의 결말을 참고삼아 찾아 읽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다.
쓰다 보니 평이 길어졌네요. 그만큼 눈이 오래 머무는 소설이었습니다. 이야기 진행의 줄기를 ‘식물’이라는 소재에 고정한 채 변신 모티프와 결말의 반전에 집중하며 잔가지를 쳐내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개별 인물에 관한 전사가 확실히 잡힌다면 훨씬 좋은 소설이 될 가능성이 있는 단편이었습니다. (환경 보호에 관한 계몽적인 몇몇 대사는 따로 떼어 다른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재미있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진정현, 〈유서 혹은 참회록
제목에서부터 후회의 감정이 짙게 느껴지는 단편입니다. 한 사람이 원인 모를 현상에 의해 신체의 변화를 겪고 참혹한 살인을 저지른 후 자기 고백을 한다는 흐름이 재미있었습니다. 일인칭과 자기 고백이 만난다면 표현이 과하게 쓰일 수도 있지만, 감정을 정제하는 용도로 쓰인 말줄임표 덕분에 과잉된 문장이 자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줄임표를 높은 빈도로 쓰면 문단의 모양이 정돈되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문장의 속도 자체를 줄이고 어조를 조금 더 차분히 쓰는 연습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술자인 ‘나’가 부모도 형제도 없이 홀로 발견되어 할머니의 손에 키워진다는 전사(前事)는 결말에서 그가 비인간 존재, 즉 괴물이 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과 괴물은 모두 자신과 같은 존재들의 집합에 속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단순히 ‘버려짐’이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저 ‘속하지 못함’이라는 느슨한 개념으로 보는 게 이 단편의 메시지와 통할 것 같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몸이 괴이하게 변형되는 경험을 합니다. 몸의 딱 절반을 기준으로 하는 선이 생기더니 한쪽 면이 검게 뒤덮이기 시작하지요.
이 절반의 변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몸이 양쪽으로 나뉘는 것, 그리고 그 양쪽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생기는 것은 직관적으로 자아의 분리 내지는 대립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점에 주목해 소설이 수정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나’는 몸의 절반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고 심지어 외형이 완전히 기괴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검게 변한 그의 왼쪽 몸은 폭력성까지 지니게 됩니다. 이런 어둡고 폭력적이고 기괴한 왼쪽 몸과 달리 오른쪽 몸은 끝없이 고민하고 잘못을 저지하고 선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소설이 선한 본래 자아의 입장으로 쓰여 있기에 이 대립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일인칭으로밖에 쓰일 수 없는 소설의 시점을 적절히 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 대립이 조금 더 첨예하고 한편으로는 처절했으면 합니다. ‘나’에게는 자신을 십삼 년간 키운 할머니가 있고 그 할머니를 공격하려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악화되지 않은 자아 절반은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그가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집 밖으로 뛰쳐나온 장면은 아직 바뀌지 않은 선한 본성을 잘 보여줍니다. 집을 나온 ‘나’에게는 끊임없는 선악의 싸움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심도 있는 선과 악을 표현하기도 전에 ‘나’가 살해한 단 두 명의 죽음을 묘사한 후 끝이 나고 맙니다. 심지어 결말 또한 굉장히 모호해 ‘현’이라는 인물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는지 어떤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선악의 싸움은 끝나지 않으며 그 끝이 깔끔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열린 결말의 소설이 무조건 틀렸다는 지적도 당연히 아닙니다. 그저 조금 더 다양한 선악의 대립을 보여줄 수 있는 이 흥미로운 소재가 단순히 선한 자아의 참회와 후회로만 끝나고 있다는 점이 독자로서 아쉬울 뿐입니다. ‘나’는 어쩌면 세상의 어딘가에 숨어서 지금도 선악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과만 해야 했을까요. 완전히 악에게 패배하는 일만 있었을까요. 저는 ‘나’의 삶에 완전한 후회보다는 다양한 투쟁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참회하는 ‘나’는 무척 착하고 다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소설에서 필요로 하는 이상으로 선한 인물이기에 오히려 몇 가지 오류를 발생시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음의 문장입니다. “제가 저지른 짓을 할 만큼 악한…… 아무튼 그런 나쁜 존재는 결단코 없었고 지금도 없을 거라 확신하거든요”. 이 말은 소설을 모두 읽었을 때 완벽히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사실만 따져 보았을 때 ‘나’는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죽이려던 몸의 반쪽을 힘껏 저지하고 그가 살던 집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면식 없는 두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이 살해의 방법이 잔인하기는 했지만 ‘결단코’ 어떤 존재도 저지르지 못했을 만한 악함은 아닙니다. 그의 선한 자아가 생각하기에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잔인했을지는 몰라도 그 안에 누구도 저지르지 못했을 희대의 잔혹함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는 이미 잘못을 참회하며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소설을 진정한 ‘유서’나 ‘참회록’으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조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보면 어떨까요.
첫째로 신체의 변화를 겪은 ‘나’에게 조금 더 긴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무엇을 참회하고 후회하기에는 소설 안에 묘사되는 사건이 단편적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하고 있는 것은 악입니다. ‘나’의 선한 본성은 그저 악이 저지른 일을 후회의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이지요. 저는 하나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이 분열이 조금 더 입체적이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째로, ‘악’의 목소리가 소설 안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어떨까요. ‘나’의 선한 본성이 서술하는 고백뿐 아니라 그의 악함이 목소리를 낼 때 이 소설은 좀 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마치 자아가 완전히 분열된 사람처럼 ‘나’의 몸 안에서 악이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면 그 과정에서 선과의 대립이 조금 더 첨예해질 여지 또한 있습니다. 악의 목소리로 외쳐지는 ‘검정은 아름답다!’는 전혀 다른 강렬한 느낌일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결말이 조금 더 확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선과 악의 싸움은 결국 길게 이어지다가 한 지점에서 끝을 맺을 것입니다. 이 ‘끝’은 소설을 아우르는 모든 메시지가 모이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선이 이기거나 악이 이기는 것, 또는 둘 다 아니더라도 결말의 장면이 조금 더 선명했으면 합니다. ‘나’가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의 사이에서 그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섬뜩한 마무리겠지요.
저는 ‘유서 혹은 참회록’이 인간의 본질과 선악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능할 소설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글은 ‘유서’도 ‘참회록’도 아닌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메시지를 형성하는 과정에 분명히 잔인하거나 한없이 착한 ‘나’의 발자국이 분명히 찍혀 나가길 바랍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257, 〈참을 수 없는 낭만들
윤진의 죽음을 기점으로 세 인물이 만나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담담한 어조로 이어지는 문장들과 곳곳에서 존재감을 빛내는 표현들이 유난히 많은 소설이네요. 다윈상으로 인간 죽음의 의미를 곱씹고 수족관 안에서는 구피가 국내의 호수에서 야생으로 발견되는 재미있는 상황을 가정해 추리의 플롯과 유사한 흐름으로 쓰인 단편입니다.
이 소설 안에는 두 가지 죽음이 눈에 띕니다. 하나는 크게 보이는 윤진의 죽음, 다른 하나는 소설의 초반에 ‘나’에게 배송된 구피의 죽음입니다. 윤진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확실치 않고 그가 끊임없이 주변 인물의 환상에서 재소환되어 궁금증은 배가 됩니다. 하지만 구피의 죽음은 확실합니다. 야생에서 발견된 구피로 인해 축제마저 열리게 되죠. 윤진의 죽음은 소설의 전면에 배치되어 있지만 죽은 구피는 언뜻 보기에 작은 소재로밖에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달라 보이는 두 죽음에는 의외로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은 모두 무언가를 위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도시를 보세요. 도시는 오랜만에 활기를 띄고 있어요. 다윈상 후보에 오른 윤진 때문에 도시가 알려지고, 또 구피가 산다는 것도 알려져서 축제도 열리고……. 윤진의 죽음 덕이라면 덕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윤진과 구피의 죽음은 모두 한 도시의 활기로 치환됩니다. 미연과 ‘나’에게 윤진의 죽음이 무겁게 다가왔던 것과 달리 도영은 그의 죽음이 단지 한 도시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식으로 가볍게 말합니다. 그것이 밝혀지는 장면의 직전에는 복선처럼 널브러진 구피 때와 짙은 피 냄새가 자세히 묘사됩니다. 이런 구피와 윤진의 죽음이 끝까지 유사성을 띤 채 소설이 마무리되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영이 윤진을 죽인 범인이라는 것이 조금은 예상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정황상 범인을 정해야 했다면 도영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러나 도영이 윤진을 살해한 것이 최선의 결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윤진은 삶에 있어 공허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다윈상이라는 소재가 윤진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장면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나’는 세상의 어떤 죽음도 우스꽝스러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윤진과의 대화를 적절히 피하지만, 이 장면은 죽음을 보는 윤진의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윤진이 자살한 것이 최선일까요. 그것 또한 아닙니다. 단지 이 소설은 도영을 처음부터 직접적인 범인으로 몰고 갑니다. 범인으로서의 정황을 조금 감추고, 오히려 윤진을 옹호하다가 한 번에 반전이 이루어진다면 도영은 오히려 범인으로서 최적의 인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지는 도영이라는 인물이 조금은 입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영에 대해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도영은 구피에 관한 이런저런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윤진의 상징물로 구피가 쓰였기 때문에 도영의 말 한 마디에는 큰 힘이 담겨 있습니다. 일반인 이상으로 구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가 구피의 특징을 말할 때마다 독자는 그 안에서 윤진과의 연관성을 찾고자 합니다. 지금으로서 도영이 말하고 있는 구피의 지식은 윤진과 적절히 연결됩니다. 물론 구피가 토종 어종의 생태계를 파괴한다거나 하는 내용은 윤진과 크게 관련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정보임은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조금 더 비일상적이지만 윤진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구피에 관한 몇 개의 정보가 도영을 통해 추가로 쓰이면 좋겠습니다.
미연은 어떤가요. 미연은 도영과 달리 윤진과 가장 가까이 지낸 인물이라는 점이 잘 활용된 캐릭터입니다. 미연만 아는 정보들은 산장 주인을 범인으로 몰기도 하고 윤진의 과거사를 ‘나’에게 전달하기도 합니다. “나는 들은 적이 없는 일화였다”라는 ‘나’의 고백에서 이런 미연의 캐릭터는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미연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철저히 윤진의 편인 미연과 도영이 대립하는 장면은 도영이 범인일지 모른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미연은 소설 안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만 미연이 윤진의 죽음이 밝혀지는 결말에서 자신이 하려던 말을 하지 못하는 부분은 아쉽습니다. 지금껏 의심하던 도영이 범인으로 밝혀졌을 때, 미연은 지금까지의 윤진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밝힐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도영에게 주어진 발화권과 동일하게 미연에게도 이야기할 기회를 준다면 이 소설의 결말은 한층 다양한 방법으로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면 각 인물의 꿈속 윤진의 모습은 산발적입니다.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지 않고 분산되어 있습니다. ‘나’와 도영은 같은 꿈을 꾸고 미연은 홀로 평온한 윤진의 모습을 봅니다. 환상적인 소재로 꿈이 쓰인 것은 독자의 이목을 끌기에 좋지만, 그 꿈이 주제와 유기적이지 않은 채 단절되어 있다면 오히려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이 꿈의 이미지는 생각보다 독자의 주의를 많이 끌고 있기에 분명히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각 인물이 윤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따져보세요. 윤진과 크게 유대감이 없지만 거리감도 느끼지 않는 ‘나’와 윤진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미연, 윤진을 시기하고 있었을 도영의 입장을 생각할 때, 세 인물이 꿈에서 마주하는 윤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소설의 거시적인 구조나 문장에 큰 문제가 없기에 인물 개인의 특성에 미시적으로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도영과 미연의 캐릭터에서 보완점이 보인다는 점은 그들이 놓인 배경과 사건이 충분히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열대어 구피의 특징을 윤진과 연결해 인간 죽음의 무게를 가늠하려 한 이 소설의 시도는 추리의 플롯을 통해 흥미로운 방식으로 엮여 있습니다. 몇몇 인물의 특성을 분명히 하고 인물들의 꿈속 장면에 개연성을 부여한다면 더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을 좋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라그린네, 〈네크로멘서.ai
인간을 되살리는 것은 어느 수준에서든 윤리적인 논쟁을 동반합니다. 인격의 복원은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지금껏 시도되지 못하고 있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격히 규제되는 것들은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만들어내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활자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기에 많은 작가는 인간을 되살리기 위해 그들의 소설 안에서 이 방법 저 방법을 쓰곤 했습니다. 신체와 정신까지 온전히 복원하려는 시도부터 사후에 생전 기록을 보관하는 종류의 투박한 감성까지. 라그린네 작가의 단편 〈네크로멘서.ai〉 역시 이런 맥락 안에서 쓰인 이야기리라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사람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라는 첫 문장부터 강렬하게 눈길을 끕니다. 기술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겹겹이 새로운 사실을 덧입혀 나가는 초반의 진행 또한 인상적입니다. 컴퓨터 공학자가 사람을 되살려냈을 뿐 아니라 이 되살림은 누군가 생전 남긴 글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를 되살렸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며 적어도 끊이지 않고 텍스트를 남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생전 기록으로 의식을 복원해 낸다는 발상이 충분히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강령술사 AI를 의미하는 제목과 잘 어울리는 도입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윤리적인 논쟁을 십분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깔끔히 모든 질문을 쳐내고 단순한 세 가지로 추립니다. 인공지능의 인격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이 원본과 연속성을 지니는가. 인공지능은 개선(학습)의 여지가 있는가. 인공지능이 시민으로 승격되기 위한 세 가지의 조건을 고른 것 치고는 굉장히 고르게 모든 논제를 아우르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실제 인간 복제를 논하는 SF 소설의 대부분에서 택하는 주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소설의 뼈대인 세 질문은 복원된 작가의 인격을 통해 하나씩 해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한 이유는 첫 번째 질문이 매끄럽게 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첫 번째 질의에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AI의 “인격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위원회가 제기한 모든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격성을 인정한다면” “인공지능을 폐기하려는 것이 살인으로 귀결된다”. 이 두 명제는 빠르게 보기에 문제가 없지만, 천천히 읽는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질의에서 위원회가 제시한 AI의 문제점은 그것이 인격을 가지고 있을 때를 가정한 것이기에 그들이 AI의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위원회의 승리로 이 싸움은 끝이 납니다.
그렇기에 지금으로서는 AI의 인격성을 증명하라는 첫 번째 질문의 사례가 조금 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것으로 교체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뒷부분의 두 질문에 서술자가 매우 그럴듯한 답을 잘 찾아냈기 때문에 보이는 보완점입니다. 철학적인 주제를 선택한 이상, 추상적인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해야만 하는 것은 작가와 서술자의 숙명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질문에 앞서 기자들이 던진 질문 중 몇몇은 AI와 인간의 복원에 관해 폭넓은 논의가 가능한 것이기에 ‘나’가 무작정 무시하거나 다소 무책임하게 답하기보다는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그것들의 답을 하나씩 찾아가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 기술이 히틀러처럼 논란이 있는 인물을 되살리면 어쩌죠?”라는 질문은 시니컬하게 넘기기에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한 사람의 인격을 기술적으로 복원했다고 선언했다면 자신이 만든 인격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주어진 질문의 답을 책임감 있게 찾아가는 주인공이 더욱 독자의 기대에 부합할 테니까요.
이렇게 초반부가 보완된다면 이 소설은 매우 철학적인 질문에 충분한 답하는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결말은 독자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동시에 흥미로우며 구체적입니다. 데이터가 오염되었기에 원본과 복사본, 인격, 연속성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 AI 작가의 익살스러운 답이 재미있습니다. “저는 다른 필명으로 신작을 하나 써볼까 해요. 생각보다 적성이 있는 것 같아서요”. 글쓰기가 적성에 맞는다는 말에서 AI 인격은 자신의 이전 자아였던 작가와도 독립적인 개체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과 AI가 모두 자유로운 결말을 보기 힘든 주제에서 하나의 정답을 내리지 않고 독자에게 판단의 기준을 정해주지 않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많은 철학적 사유를 녹여내고자 한 만큼 더 욕심을 부려보면 좋겠다는 평을 마지막으로 드립니다. 이야기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질문을 충분히 소화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 텍스트로 녹여내 보세요. 인공지능과 윤리에 관한 여러 소재와 이론을 겉으로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하나의 대화나 장면으로 구체화해 보는 것도 주제를 은근히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독자보다 작가가 답을 미리 내리기보다는 소설 속 ‘나’와 AI의 대화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 보세요. 몇 가지의 수정과 보안을 거친다면 이미 훌륭한 결론처럼 시작과 끝이 완벽히 독자의 마음에 들어맞는 소설이 되리라는 데에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반신, 편의점과 커피와 선배, 환각
반신 작가의 두 단편은 비교하면서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플랫폼의 성격과 객관적인 이야기의 완성도, 독자가 느낄 흥미를 고려했을 때 〈환각〉이 조금 더 소설에 가깝습니다. 〈환각〉에는 환상적인 장면을 통해 각 인물과 사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조현병, 특히 ‘환각’ 증상에 충실한 결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두 소설 중 하나가 조금 더 ‘잘 쓰인’ 소설이나 ‘흥미로운’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고 ‘소설 답다’라고 한 것에 주목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두 이야기는 비슷한 장점과 비슷한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둘 모두에서 보이는 장점은 문장의 사실성입니다.
반신 작가의 문장에서는 하나의 장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묘사하는 힘이 보입니다. “처음 환각을 느낄 때는 서아를 만지지 못했는데, 지금은 서아의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서아의 피부는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게다가 차가웠다. 목이 서늘해져서 놀랐다.” 〈환각〉에서 쓰인 표현 중 일부입니다. 서아의 피부에서 오는 서늘한 감정이 충분히 구체적인 감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아이로서의 부드러움과 비인간으로서의 서늘함이 결합해 촉각적으로 서아의 존재를 신비롭게 만듭니다.
소설을 쓴 경험이나 시간이 아직 많이 쌓이지는 않는 듯한 이야기의 얼개 안에서도 문장이 빛난다는 것은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에게는 확실한 장점입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흥미롭게 엮어 놓는다 해도 그 안에서 문장이 정교하지 못하다면 소설 전체의 색이 바래게 됩니다. 오히려 사건을 골라서 배치하는 능력이 아직 덜 완성되었더라도 단단한 문장이 있을 때 작가의 미숙함이 보완되기도 합니다. 반신 작가의 문장은 그런 면에서 글쓴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보존하여 전달할 수 있을 만큼의 정교함이 이미 확보되어 있습니다. 다만 아직 어떤 장면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가 충분히 체화되지 않아 두 소설 모두 구조가 없이 통짜로 짜여 있을 뿐입니다.
만약 〈편의점과 커피와 선배〉 그리고 〈환각〉을 수정하고 보완한다면 지금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장면의 선택과 재배치입니다. 두 소설은 모두 일인칭으로 진행되며 몇몇 장면에서 느껴지는 바에 따르면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에피소드도 있는 듯합니다. 이런 유의 소설을 쓸 때에는 이야기가 완전한 자기 고백의 발현과 나열에서 그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독자의 흥미와 소설의 문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작가가 하고 싶은 말만 나열한다면, 그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끼기란 힘들겠지요. 다행히 반신 작가의 글은 이런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다만, 조금 더 소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 선택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편의점과 커피와 선배〉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소설의 장면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 여성으로서 ‘나’가 겪는 부당함, 둘째, 그가 평생에 걸쳐 견딘 폭력, 셋째, ‘나’의 직업으로서의 회계사. 이렇게 대주제로 묶었을 때, ‘회계사’라는 단어가 튄다는 것이 한눈에 보여야 합니다. 물론 ‘나’의 직업으로서의 회계사가 어떻게 해도 여성 의제와 폭력의 역사에 완전히 편입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튀는 이야기‘. 즉 이야기의 큰 맥락과 멀어진 소재를 판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것을 내용에서 삭제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차이점을 확실히 보이기 위해 이 소설의 대주제에 포함되는 ’여성‘과 ’회계사‘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의 성별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뀐다면 이 소설의 의미는 크게 흔들립니다. 작가의 의도부터 이야기의 흐름까지 납득하지 못하게 될 수 있을 정도로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변화는 큽니다. 쉽게 말해 ’여성‘이라는 대주제는 소설 안에서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되는 소재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나‘의 직업을 회계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꾼다면 이 정도로 이야기의 흐름이 크게 바뀔까요. 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지하철에서 만난 아이들이 ’나‘에게 “저기 언니, 언니는 직업이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선생님이야”라고 서술자가 답한다고 한들 이야기의 메시지가 크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역시 회계사처럼 되기 어렵지만, 사후 보장이 되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단편 안에서 회계사는 큰 어려움 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가 가능한 소재입니다. 이런 내용은 흐름상 곁가지이기 때문에 삭제하거나 주제에 맞게 보완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소설 안에서 여성을 향한 차별이 긴 분량으로 쓰인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나‘의 직업이 여성 근무자가 많이 없는 ’건축가‘, ’도배사‘로 수정되거나 ’회계사‘만이 겪을 수 있는 성차별이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제시된다면 소재 간의 유기성이 강화될 것입니다.
반신 작가의 글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것저것 가져와 묵묵히 순서대로 적어 내려간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말했듯이 이런 작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며 어떤 작법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작가는 하나의 이야기를 창작하기 위해 장면의 재배치와 소재의 유기성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이 장면과 저 장면의 위치를 바꿔보기도 하고, 이 소재를 추가하거나 빼는 등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미 주제에 맞는 장면을 선택하고 이어내는 훈련은 되어 있으니 이제는 조금 더 자유롭게 주제와 소재, 이야기의 순서를 가지고 놀아 보세요. 쓰려는 이야기에 맞는 부분은 강화하고 필요 없거나 대체 가능한 부분은 과감히 잘라내고 수정하는 것 역시 작가에게 필요한 역량입니다. 반신 작가의 두 소설이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오빠의 죽음‘과 빠르게 시선을 집중시킬 만한 ’조현병‘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만큼 소설의 구성에 유기성이 생길 때 선명해질 의미 또한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면상 수정 보완의 예시는 〈편의점과 커피와 선배〉으로 들었습니다만 〈환각〉으로도 이런 작업을 꼭 해보시길 권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의미있는 단편들 잘 읽었습니다.

두영, 오빠의 시간 여행
서술자의 오빠가 시간 여행자라는 정보를 독자에게 미리 제시하며 시작되는 소설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어가는 오빠에게 그가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이었음을 전해 들은 ‘나’가 그의 과거와 자신의 미래를 연결해내는 과정이 그럴듯하게 쓰여 있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가족 중 하나가 시간 여행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충격적이고 믿기 힘들까요. 독자가 충분히 몰입하고 이해하기 쉬운 상황을 설정해 감정선을 따라가기 편리하게 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오빠가 시간 여행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유, 그리고 그가 겪은 세 번의 인생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충분히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나’와 오빠가 시간 여행을 하는 매개, 말하자면 타임머신을 둘의 추억이 깃든 만화책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가족을 향한 둘의 사랑을 암시합니다. 특별히 ‘나’를 향한 오빠의 사랑, 오빠를 향한 ‘나’의 사랑이 책 안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타당성을 획득하며 서로 맞물려간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이야기의 세부 사항에 집중하게 됩니다. 오빠가 들려주는 전생은 이전 생의 실수를 개선해 나간다는 점에서 마치 톱니바퀴 같습니다. 한 인생과 다음 인생이 맞물리는 점을 다리 삼아 점프하는 기분이랄까요. 이 이야기들은 충분히 사실적입니다. 그렇기에 오빠의 고백만으로 줄줄이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소설 안에서 ‘나’와 오빠의 시점이 교차되는 것도 재미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빠의 고백을 듣는 ‘나’의 이야기가 겉에, ‘나’에게 들려주는 오빠의 전생이 속에 들어가 액자식으로 이 이야기를 실험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오빠의 말이 마치 대사처럼 중간에 들어가는 것도 대화를 하는 듯한 즐거움을 주지만, 그의 시점에서 조금 더 자세히 전생을 다루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네요.
오빠의 입장에서 이 소설은 자신의 전생에 지은 업보에 관한 속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이 속죄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성공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도 그늘이 있듯 지금까지 존재했던 인생은 단 하나도 완벽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잘못을 뉘우칩니다. 이 참회는 개선의 여지를 주기 때문에 분명 긍정적인 되먹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족함과 어떻게 해도 완벽할 수 없는 삶을 인정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오빠의 죽음이 작가의 의도 이상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오빠가 죽은 삶도 이 가족에게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니까요. 게다가 ‘나’는 이 속죄의 굴레를 자신에게 씌웁니다. 그리고 오빠가 걷던 길을 자신이 완성하겠노라며 시간 여행을 시켜주는 만화책을 펼칩니다.
시간 여행 소설, 특히 타임 루프가 등장하는 소설에 이런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 여행이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거야?” 언뜻 보면 그런 것도 같습니다. 언제고 잘못되었던 삶을 다시 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삶은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시간 여행만으로 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소설도 많습니다. 어쩌면 ‘나’의 오빠도 불완전한 삶에서 자신이 빠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시간 여행이 가진 ‘되돌림’의 힘을 믿습니다. 결말로만 보아서는 몇 번이고 이것을 다시 시도하려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나’의 확신에 감동을 받고, 오빠를 향한 사랑에 먹먹해집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덮을라치면 한편으로는 완벽한 인생이란 없다는 명제가 떠오르지요. 그럼 ‘나’는 언제까지고 시간 여행을 하게 될까요. 아니면 오빠처럼 끝내 불완전하지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마지막 인생을 찾게 될까요.
저는 이 소설이 닫힌 결말로 맺어질 때 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시간 여행자에게 무한한 기회를 주는 이 소설이 참 다정하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변화하는 시간의 루프 안에서 ‘나’가 살아갈 인생이 궁금해졌습니다. 이 궁금증은 걱정도, 응원도 아닌 호기심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성공한 결말이 있으면 좋겠다가도 그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드니 결국 작가는 어떤 결론을 내릴지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나’의 앞날을 알고 있는 것은 작가이니 되물을 수밖에요. ‘나’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되나요. ‘나’의 길에는 어떤 고뇌와 한편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나요. 적당한 답을 알고 있다면 결론까지 ‘나’가 가는 과정을 적어 보세요. 어쩌면 그 안에서 더 나은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과 흐름의 면에서 크게 수정할 곳이 없는 단편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가라는 응원을 드리고 싶습니다. 작가만의 고민과 철학이 곁들여진 시간 여행은 언제나 즐거우니까요. 이 고통의 순환 끝에 조금은 더 행복하게 ‘나’와 오빠가 함께 웃는 생도 있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생을 구현할 능력은 작가에게 있으니 약간의 가능성을 걸고 구체적인 변화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순환의 루프에서 더 나은 삶을 모색하는 ‘나’와 오빠의 사랑이 또 다른 이야기로서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을 읽는 것 또한 즐거운 경험이겠습니다. 이 단편을 읽는 것은 마치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한 여행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선정작 안내 3월 심사평 및 1분기 우수작 안내1 2024.04.15
선정작 안내 2월 심사평1 2024.03.15
선정작 안내 1월 심사평 2024.02.15
선정작 안내 2023년 최우수작 안내4 2024.01.18
선정작 안내 4분기 우수작 안내 2024.01.18
선정작 안내 12월 심사평2 2024.01.15
선정작 안내 11월 심사평2 2023.12.19
선정작 안내 10월 심사평2 2023.11.15
선정작 안내 3분기 우수작 안내 2023.10.15
선정작 안내 9월 심사평1 2023.10.15
선정작 안내 8월 심사평3 2023.09.15
선정작 안내 7월 심사평2 2023.08.15
선정작 안내 2분기 우수작 안내1 2023.07.17
선정작 안내 6월 심사평 2023.07.15
선정작 안내 5월 심사평 2023.06.15
선정작 안내 4월 심사평 2023.05.15
선정작 안내 3월 심사평 및 1분기 우수작 안내1 2023.04.15
선정작 안내 2월 심사평 2023.03.14
선정작 안내 1월 심사평 2023.02.15
선정작 안내 2022년 최우수작 안내1 2023.01.15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