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유서 혹은 참회록

2023.02.24 11:2202.24

유서 혹은 참회록

 

 

 

  얼마 전부터 그랬듯 어제보다 오늘이 숲이 더 우거져 있네요. 지금도 충분한데도 아직 한참이나 모자란다는 것처럼 날마다 계속, 또 계속 불어나고 있어요. 너무나도 우거진 숲에 의해서⋯⋯ 질식되어 죽어버릴 수도 있을까요?

 

  ⋯⋯어쨌든 만약 누군지 모를 당신이 이것을 발견해 읽고 있을 때쯤이면 저는 저세상 아니, 본래 제 세상으로 돌아간 뒤일 거예요. 사실 돌아가는 방법이 여전히 두렵고 무섭기는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어요.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그분들께⋯⋯ 그리고 할머니께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모든 게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이번만큼은⋯⋯ 돌아가기를 절대 실패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렇지만⋯⋯ 아니, 그게 그러니까⋯⋯ 무조건 제 잘못이에요. 제 일부분을 통제하고 있다고 완전히 착각했던 제 잘못이 맞아요. 분명히 그런데⋯⋯ 한편으론 제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뭐랄까, 불가항력적인 사고, 그런 종류의 사고였다고 할 수도 있는 듯해서⋯⋯.

  저는 제 몸에 생긴 변화로 인한 상실로 고통받고 있었고 마침 그때 그분들이 그곳에 나타났으며 명백히 저는 도와달라고, 그 말 한마디 하려고 했을 뿐인데⋯⋯.

  너무나도 괴로워요.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밝게 이글거려도 마음으로 느끼는 진짜 세상인 이런 암흑 같은 적막 속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는 무언의 외침이 저를 비틀고 또 옥죄고 있어요.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이번에는 직접 드리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가슴으로나마 꼭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이후에 혹시 제가 넋으로서 제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 도중에서 뵙게 된다면, 도착을 포기한 채로 그 자리에서 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려 영원토록⋯⋯ 빌 것을 약속드릴게요. 그리고 넋에도 마음이 있다면 마음 한편으로는 할머니께도 평생 사죄를⋯⋯.

  그럼, 안녕히⋯⋯.

 

  —현이라고 불렸었던 어떤 존재로부터

 

* * *

 

  그런데 혹시⋯⋯.

  제, 제 얘기를 조금만, 조금만 더 해도 될까요?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그러니까, 열세 살까지 저를 키워 주신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저는 혼자 사시는 할머니에게 화천 재안산의 정령이 준 선물이었어요. 할머니는 아무런 인적도 없는 재안산 기슭 어느 한 독채에 살고 계셨는데 어느 날 나물과 버섯 따위를 구하러 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다가 저를 발견하셨어요.

  갓난아이였던 저는 조금은 특별한 층층나무의 땅 위로 드러난 뿌리 사이에 있었어요. 어떤 까닭으로 그곳에 놓였는지는 알 수 없었죠. 아무튼 할머니는 층층나무의 뿌리 사이에서 저를 찾으셨어요.

  그 나무가 특별했던 점은,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어요. 그저 엄청나게 거대했다는 사실이에요. 층층나무는 보통 십에서 이십 미터까지 자라는데 제가 있었던 그 나무는 세 배는 더 컸었대요. 그러니까 땅 위로 드러난 뿌리 또한 줄기 못지않게 굵었죠. 다시 또 말하지만 저는 그런 뿌리 사이에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 왼쪽 가슴에⋯⋯ 그러니까, 예전 제 왼쪽 가슴에는 상처가 하나 있었는데 할머니는 끝까지 그게 언제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글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어쨌든 그렇게 저는 할머니의 손자가 되었어요.

  할머니의 품이 어땠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요. 장작을 때는 집처럼 굉장히 아늑했거든요. 그때나 지금이나 또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거예요. 하긴 어떻게 잊겠어요? 할머니는 제 전부였는데.

  집 근처엔 계곡까지 있어서 먹을 건 사방에 널려 있었어요. 게다가 할머니가 정말 가끔 읍내에 가서 빵이나 과자 같은 바깥 음식을 사다 주시기도 했죠. 제 입맛엔 안 맞았지만 그래도 감사했어요. 다만, 할머니가 읍내엔 무서운 사람들이 많아서 위험하다고 몇 번만 빼고는 혼자서만 갔다 오셨는데 제 불만은 여기 있었죠. 그래서 그 몇 번은 저도 할머니를 따라갔었는데 처음엔 이상하게 생겼거나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한번은 거기까지 가는 게 유독 멀게 느껴졌고 한번은 모두가 저를 무섭게 노려봤었어요. 마지막 때는 그냥 정말 괴로웠어요. 그 뒤로 다신 읍내에 가지 않았어요. 그때가 열 살쯤이었나⋯⋯ 잘 모르겠네요.

  그런 일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어요. 저는 열세 살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 곁에서 행복하게 보냈어요. 집 마당은 물론이고 근처 숲과 계곡은 저만을 위한 세계나 다름없었어요. 특히 숲에는 할머니는 모르고 저만 아는 공간이나 존재들이 아주 많았는데⋯⋯ 이것만큼은 따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것들이 어떤 경우든지 간에 저처럼 불행해지지는 않았으면 해서요. 무엇보다, 제가 저지른 짓을 할 만큼 악한⋯⋯ 아무튼 그런 나쁜 존재는 결단코 없었고 지금도 없을 거라 확신하거든요.

  어쨌든, 그에 못지않게 저는 집 창고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도 많았어요. 가끔 툇마루나 마당 평상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창고에서 나오지 않았죠. 거기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책들이 쌓여 있었거든요. 비문학과 문학 그리고 여러 종교 서적과 외국 서적까지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없는 게 없었어요. 다만, 외국 말로 된 책들만큼은 읽기가 굉장히 힘들었고 지금 생각나는 건 독일 사람 한 명밖에 없어요. 이름이⋯⋯ ‘Fritz Haber’. 한글로는 ‘프리츠 하버’. 큰 업적을 이룬 화학자였나 물리학자였나⋯⋯ 더 자세한 건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무튼 너무 멀고 위험해서 학교를 안 다녔지만 할머니와 책들이 있어서 말과 글을 익히는 데 문제가 없었죠.

  그러나⋯⋯ 여기까지였어요.

 

  모든 것은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열세 살이 된 그해 가을 어느 날, 저는 느끼고 또 보고야 말았어요. 악몽의 시작을요.

  그날 아침엔 평소와 다르게 잠에서 깼는데도 한참을 못 일어났어요. 몸이 매우 무겁게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했어요. 한창 자고 있었을 때도 가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에 따라 무거운 손을 들어 긁어 대기 시작했는데 그 부위가 정확히 얼굴과 몸통을 세로로 반을 나누는 선, 바로 거기였어요.

  조금 시간이 지나고 너무 긁었는지 이제는 따끔거리기 시작했어요. 온몸이 뻐근했지만 일어나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죠. 그런데⋯⋯ 정체 모를 초록 선이, 진녹색 선 한 줄이 제 몸을 세로지르고 있었어요. 저는 곧장 방에서 나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갔죠. 얼굴도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그 와중에도 계속 가려우면서 따가웠어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몸통의 선과 만나는 얼굴의 선이 있었어요. 순간 꿈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기엔 통증이 너무나도 사실적이었죠. 저는 할머니, 할머니, 하고 외쳐 부르면서 할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할머니는 그때 집에 안 계셨어요. 어쩔 수 없이 저 혼자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하루 종일 버텼죠.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어요.

  저녁 어스름이 깔릴 때쯤에야 집에 오신 할머니는 저를 보자마자 품에 꼭 안아 주셨어요. 진녹색으로 그어진 흉터를 이리저리 살피지도 않고, 마치 이 고통이 절 찾아오리란 사실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물론 이건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 몇 번 더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있어서요.

  할머니는 창고며 마당이며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시는 듯했어요. 그러고 나서 부엌에서도 한참 동안 부산스러운 소리가 났어요. 잠시 뒤 제 방으로 다시 들어오시는 할머니의 한 손에는 처음 보는 진노랑 액체가 담긴 컵이, 다른 한 손에는 작은 대야가 있었어요. 저는 그 독특한 냄새가 나는 노란 액체를 음료수라 생각하고 마실 수밖에 없었죠. 한 모금씩 먹을 때마다 통증이 미세하게나마 줄어들었거든요. 제가 노란 것을 다 마시자 할머니는 저를 눕히고 대야에 있는 풀 냄새 나는 뭔가를 흉터 위에 바르기 시작했어요. 이내 스르르 눈이 감겨 왔고 저는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아마도 저는 잠들면서 이제 다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기랄⋯⋯ 그게 아니었죠. 저는 왼쪽 팔이 너무 저려서 잠에서 깼는데 여전히 컴컴한 새벽이었어요. 몇 시간밖에 못 잤던 거예요. 아니 어쩌면, 아예 잠들지 못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처음엔 팔 전체가 저리다가 그 느낌이 뭉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왼손에 집중되기 시작했어요. 누군가가 집에 있는 책 모두를 왼손 위에 쌓고 그것도 모자라 맨 위에서 힘껏 짓누르는 것 같았어요.

  또 할머니, 할머니, 하고 부르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더라고요. 움직이려고 해도 손이 너무 아파서 몸을 거의 가눌 수가 없었어요. 그때 갑자기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제멋대로 몇 번이고 꺾였어요. 마치 제 손이 아닌 듯이⋯⋯.

  왼손은 그 뒤로도 계속 뒤틀어지다가 어느 순간 또 갑자기 꼿꼿이 펴졌고 손목까지 그대로 굳어 버렸어요. 엄지와 집게와 가운뎃손가락이 뭉쳐져서 붙고 새끼와 약손가락이 뭉쳐져서 붙은 채로⋯⋯. 그 역겨운 변화는 제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요. 저는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으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목소리가 안 나왔었지만 무의식적으로 할머니를 재차 불렀어요. 이제는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는 건지 안에서만 맴도는 건지 구분조차 안 되더라고요. 할머니가 들으셨다면 곧장 달려오셨을 텐데 제 방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죠.

  제가 할머니에게 가야 했어요. 몸에 힘을 주고 조금 움직이니까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비틀거리면서 오른 다리에 의지한 채 겨우 일어섰어요. 일단 할머니한테만 갈 수 있다면 늘 그랬듯이 어쨌든 괜찮아질 거야, 생각하면서⋯⋯.

  유독 힘이 실리지 않는 왼 다리를 앞으로 내딛자마자, 다리가 굽힘 없이 일자로 굳어지면서 천장을 향해 내뻗어졌어요. 저는 당연히 그 움직임에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이었는데 아니었어요. 곧은 왼손이 손가락 끝만으로 제 몸을 받쳤어요. 스스로⋯⋯ 움직인 거죠. 만약 쿵 하고 소리가 나서 할머니가 알아차리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아무런 의미 없는 생각 같아요. 오히려 할머니가 위험했을 수도.

  상황을 살필 틈도 없이 또 다르고 역한 변화가 시작됐어요. 왼 다리는 그대로 꼿꼿이 뻗어 있는 상태에서 발가락 사이의 간격이 이번에는 끝 모를 듯 벌어지고 있었어요. 발을 짓눌러서 펴는 것 같았죠. 저는 고통이 어떤 정도를 넘어서서 아예 느끼지도 못하는 정도에 다다른 줄 알았어요.

  잠시 뒤에 저는 바르게 일어설 수 있었어요. 제가 잠시나마 제 의지대로 왼팔과 왼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거든요. 통증도 갑자기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목소리도 진짜로 나올 것 같았는데, 그때 든 생각은 할머니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모르겠어요. 그냥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제 왼쪽을 통제할 수 있었을 때 서둘러 집에서 나오지 않은 건 큰 실수였어요. 할머니가 역겨운 저의 변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실 수도, 그런 혐오스러운 위협을 받지 않으실 수도 있었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아⋯⋯ 힘드네요. 왜, 왜, 무슨 이유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더 원론적으로 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이렇게 된 것인지⋯⋯.

  이내 제 오른쪽과 왼쪽을 나누는 그 진녹색 흉터가 다시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얼굴부터, 얼굴의 왼쪽이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오른쪽 눈으로는 어둠에 적응하긴 했어도 어쨌든 까만 형상들이 보였는데 왼쪽 눈으로는 아니었어요. 미칠 듯이 거북한 고통 가운데 앞이 점점 밝아졌어요. 그러다가 대낮에 태양 빛이 비칠 정도로 환해졌죠. 밝고 환했지만 불쾌했어요. 뛰놀던 숲속에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달랐어요.

  불쾌한 밝음과 검은 어둠 속에서 방문이 열리고 어떤 익숙한 형상이 나타났어요. 할머니였죠. 할머니가 가장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이었어요. 할머니가 저를 부르셨어요. 저는 그때 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잘 들리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래도 알 수 있었죠. 할머니의 눈을 통해서.

  현아, 할머니 여깄어. 걱정 마, 현아. 할머니가 왔어.

  가슴이 답답해져 왔어요. 속도 뒤틀렸고 몸 안의 내장이 모조리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몸통에 가스가 차올라 터져버릴 것만 같았어요. 겨우 고개를 숙여 몸통을 세로지르는 초록 선으로 시선을 옮겼어요. 더 이상 초록 흉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몸통 왼쪽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고⋯⋯ 살가죽이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할머니도 저처럼 제 눈을 통해서, 오른쪽 눈만을 통해서라도 알아차리실 거라 믿으면서 할머니, 할머니, 저리 가세요, 위험해요, 저한테서 떨어지세요, 얼른 도망치세요, 할머니, 하고 할머니의 심장을 향해 마음을 던졌어요. 제 생각에 그때⋯⋯ 할머니는 당연한 듯 알아들으셨음에도 저를 지켜보고 계셨던 것 같아요.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꿈틀대는 검은 살가죽이 팔과 다리를 향해 뻗어 갔어요. 마치⋯⋯ 검은 살이 원래 살색의 살을 뒤덮⋯⋯ 뒤덮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알 수 없는 제 안의 고통을 순간적으로나마 버텨내면서 오른손으로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뭔가를 집어 들고는 할머니 바로 옆을 향해 던졌어요.

  다행히도 할머니는 뒷걸음질 치면서 저한테서 떨어지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 속도보다 역한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빠른 듯했어요. 어느새 팔과 다리까지 그러니까, 제 왼쪽 모두는 암흑 같은 검은 껍질로 덮여 있었어요. 그러더니 또 갑자기 왼쪽은 꿈틀거림을 잠시 멈췄죠.

  조금 뒤 저는 찰나의 순간에 할머니가 흐느끼는 소리와 깨지는 그릇들의 소리를 분명히 들었어요. 흉터에 발랐던 그것의 풀 냄새도 나는 듯했어요. 아무리 순간이라도 귀와 코가 열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각각 붙어 두 부분으로 나뉜 왼 손가락의 검은 살가죽이 벗겨지기 시작했는데 벗겨지고 남은 그것은 마치⋯⋯ 카, 칼날 같은 뼈⋯⋯ 뼈 같은 칼날⋯⋯. 그러더니 거의 다섯 배는 더 돋아났어요. 동시에, 왼 발가락 모두와 뒤꿈치의 길이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 형태는⋯⋯ 식물의 뿌리 같으면서도 여러 마리의 뱀 같기도 했는데 역겨운 건 다를 바 없었어요.

  그러자마자 제 빌어먹을 왼쪽 몸뚱이는⋯⋯ 나머지 저를 통제해 끌고 그곳으로 갔어요. 이제는 발가락이라고 부를 수 없는 덩어리들이 엉키고 풀리기를 반복하면서, 팔에 돋아난 칼날이 여기저기를 마구 찍어 대면서, 할머니가 계신 부엌으로 갔어요. 할머니는 익숙함과 그리고 낯섦 앞에서 그저 부르르 떠시기만 했어요. 곧장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칼날 달린 왼팔이 백팔십도 회전하면서 위를 향해 치솟았어요.

  그때 어떻게 순간적으로 통제를 이겨 내고 오른손으로 칼을 잡아 왼팔을 관통시킬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왜 통증이 없었는지도요. 뭐⋯⋯ 그런데 굳이 어떻게 했었는지 왜 없었는지 따위를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어찌 됐든 관통당한 왼팔은 비틀거리면서 축 늘어졌고 바닥을 지탱하던 긴 덩어리들도 힘이 빠졌거든요.

  저는 바로 마지막 기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 오른쪽에 온 힘을 집중하고 왼쪽을 어느 정도 통제해 부엌에서, 집에서 도망쳐 나가기 시작했죠.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나갔을 때는 왼 다리에 그 힘이 다시 살짝 도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는 팔에 꽂힌 칼을 뽑아 다리에⋯⋯ 이번에는 아리는 통증이 조금씩 커지는 것만 같았고⋯⋯. 게다가 할머니한테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어요. 저는⋯⋯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을 잃고 말았어요.

 

  저는 그저 집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걷고 또 걸었어요. 멈추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본능적으로⋯⋯ 화천 깊은 산골에 아무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역겹게 변해 버린 제 모습을 절대로 들키지 않으려고 숲이 최대한 우거진 곳으로만 움직였어요.

  검은 살덩어리가 언제 또다시 저를 제압할지 알 수 없었으나 두 번의 관통상 때문인지 변함없이 숨죽이고 있었어요. 저는 그 틈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목표를 따라 계속 이동했죠. 할머니가 결코 찾지 못할 곳으로⋯⋯. 눈물이 맺히는 걸 중간중간 알았지만 우는 건 나중에 해야 했어요.

  비탈길 위로 도로 가드레일이 보였을 때는 정말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어요. 힘들게 온 곳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도로 근처였고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며 도로를 피해서 옆으로 가 봤자 결국 도로 근처를 맴도는 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산골에 다른 도로는 없을 것이고 만약 있어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겠지, 그렇다면 이 도로만 넘어서 더 들어가면 더 깊은 산골이 나올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할머니는 나를 진짜로 못 찾을 거야⋯⋯.

  울면서 비탈길을 기어 올라갔어요. 저는 스스로의 힘이 빠진 왼팔의 칼날을 어쩔 수 없이 쓰다가 헛구역질이 났어요. 그래도⋯⋯ 참았어요. 도로를 넘어 산 깊숙이 들어가기만 하면 할머니도 나도 괜찮을 거야, 재차 기대하면서요.

  폭이 좁고 아무런 왕래도 없는 이차선 도로를 건넌 뒤에 이제는 철조망을 넘어야 했어요. 그다지 높지 않아서 어떻게든 넘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죠. 하지만 아무리 잠시 왼쪽을 제압한 상황이어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몸을 가누기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저는 무심결에 왼쪽에 살짝 힘을 주었고 오른손으로 왼팔을 들어 철조망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어요. 철조망은, 철조망이⋯⋯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졌어요. 따로 놀랄 시간은 없었어요. 혹시라도 산골을 지나는 차가 다가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저는 한 번 더 왼팔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철조망을 넘어 아니, 지나서 또 다른 산속으로 향하는데 다시 눈물이 났어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어떤 기분이 들면서⋯⋯. 저는 쉬지 않고 움직였어요. 능선을 오르고 깊숙이, 더 깊숙이 들어갔어요. 하늘에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하늘이 밤의 어두움으로 완전히 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들어갔어요. 그러고 나서 제가 멈춘 곳은 하늘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로 가득 찬 숲속 한가운데였어요.

  그곳은 끝 모를 정도로 고요했어요. 한편으론 그 고요함 속에 온갖 생물체의 소리가 모두 들리는 것 같기도 했죠. 저는 그제야 다리에 꽂은 칼을 뺄 결심을 했어요. 언제까지나 일시적으로 왼쪽을 제압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끝이란 게 있다면, 아무튼 끝을 봐야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에게서 충분히 멀어진 곳이었으니까요.

  칼을 빼고 처음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자 관통된 두 부분뿐만 아니라 왼쪽 전체가 아려오면서 꿈틀거렸고 또 조금 지나자 이번에는 격렬하게, 마치 검은 용암이 들끓는 것처럼 꿈틀거렸어요.

  그러다 갑자기, 왼발에 달린 긴 덩어리들이 이제는 정말로 식물의 뿌리와 똑같이 변하면서 땅을 파고 마구 퍼져 나가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어떠한 감정을 가질 새도 없이 거의 동시에 왼 다리는 꼿꼿하게 굳어 갔어요. 그러면서 굳음은 점점 또 점점 배로 가슴으로 왼팔을 한 바퀴 돌아 얼굴로 올라왔어요. 왼눈으로 보이던 불쾌하게 밝은 시야도 어두워졌죠. 제 오른쪽은 왼쪽에 달려 있는 셈이었어요. 저는 그 기괴한 제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애써 막으려 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요.

 

  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요. 집 근처 숲에서 그랬던 것처럼 꾀꼬리였는데 유난히 소리가 크고 선명하게 들렸어요. 귀가 아플 정도로요. 그런데⋯⋯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으니까 귀가 아픈 이유가 꾀꼬리 소리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알게 됐어요. 정신을 잃기 전에 잠깐 경험했던 숲속 생물체들의 소리. 그것보다 훨씬 커진 소리가 함께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이내 그 사각사각, 스르륵스르륵, 휘리릭 하는 소리는 꾀꼬리 소리를 완전히 집어삼킬 만큼 커져 갔어요.

  저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무서웠어요. 본능적으로 제가, 무엇인가가, 저의 세상이 더욱더 달라졌음을 깨달았고 그것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었으니까요. 숲속에 가득 찬 나무들이 보였어요. 숲은 심하게 우거졌는데 환한 태양 빛이 내리쬐는 듯했죠. 실제로 빛이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요. 제 오른쪽 눈이 왼쪽 눈에 맞춰진 것이었어요. 하나의 시야로요. 밝지만 이글거리는 듯했던 그 형상들⋯⋯. 그러고 나서 저는 용기를 더 내서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제가, 제 몸이⋯⋯.

  저는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했어요. 그럴 수밖에⋯⋯. 제 왼쪽을 차지한 검은 살가죽이 여문 것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도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원래부터 그런 역겨운 모습으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낯선 자연스러움에 미칠 듯한 공포가 다가왔어요.

  이어 그 공포는 순간적으로 몸집을 부풀려 저를 집어삼켰어요. 고개를 돌려 하늘을 향한 왼팔에 달린 칼날을 보았고 왼발에 달려 땅속에 박힌 뿌리들을 느꼈기 때문에⋯⋯. 칼날은 더 이상 뼈 같지 않았고 그저 날카롭기만 한 그 어떤 ‘일부분’으로 변해 있었으며 땅 밑의 뿌리들은 크기와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더 넓고 깊게 박혀 있었어요.

  어떻게,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죠. 아니, 암흑 같은 왼쪽 살덩어리가 어쩔지 알 수 없었죠. 계속해서 두려움에 떠는데 이유 모르게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자 저는 왼발에 힘을 주어 봤어요.

  그때 그것은⋯⋯ 제 의지, 제 의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힘을 주자 검은 뿌리들이 땅속에서 돋아났어요. 움직여 봤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요. 왼발에 달린 살덩어리들은 서로 뒤엉키고 꿈틀대면서 저를 그 방향으로 이끌었어요. 중간중간 저도 모르게 오른발을 내디뎠는데 그때마다 뿌리들은 재빠르게 움직여 균형을 맞췄어요.

  그렇게 움직이다가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수풀을 맞닥뜨렸을 때 머리에서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저는 왼팔에 힘을 주었어요. 순식간에 수풀은⋯⋯ 칼날에 의해 원래 형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저는 우거진 숲을 마구 헤집고 다녀 보았어요. 원하는 대로 제 모두를 움직일 수 있었죠. 그러니까, 제가 제 왼쪽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거였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그 반대였는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 생각이 났죠. 집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마침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따라서 할머니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어요. 또, 그런 몰골은 이기적이게도 할머니가 감싸 주실 거라고 믿었죠. 아무리 제가 숲속 괴물⋯⋯ 같아도요. 우리 할머니니까.

  올 때와는 비교도 못 할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숨이 전혀 차지 않았어요. 속도를 더 올리면서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였어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서 잠시 멈추고 가만히 있어 봤죠. 그러고 보니 호흡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또 되짚어 보니 이런저런 숲 냄새는 계속 맡고 있었죠. 저는 당장에 불편한 게 없으니까 일단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다시 걸었⋯⋯ 아니, 다시 출발했어요.

  어느덧 저만치서 앞이 트인 공간이 나타났어요. 도로변 근처까지 도착한 셈이었죠. 그것은 곧 다시 한 번 철조망을 넘어야 한다는 의미였어요. 그런데 다가간 철조망은 바로 제가 지나온 반을 잘라내 버린 그 철조망이었어요.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니까 저는 집으로 가야겠다는 결심만 한 채 무작정 움직였는데 어떻게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온갖 모르는 것투성이라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저도 모르게 왼팔을⋯⋯ 제 느낌엔 그냥 몇 번 휘두른 것 같았는데 철조망이⋯⋯ 완전히 난도질돼 버렸어요. 순간 두려움에 떨었죠. 이것은 왼쪽이 한 짓인가, 내가 한 짓인가, 나는 지금 왼쪽을 통제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인가⋯⋯. 그때, 들리고 있는 수많은 소리에 차 소리가 더해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재빠르게 다시 뒤로 돌아가 나무들 뒤에 숨었어요. 한참 뒤에 트럭이 다가왔고 지나갈 듯하더니 갑자기 철조망 쪽에 최대한 차를 붙이더군요. 어떤 아주머니가 내려서 찢긴 철조망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고는 곧장 자리를 떴죠.

  전 그 사람이 사진을 찍어간 것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다시 돌아올 일도 없을뿐더러 그것보다, 왼쪽이 누군가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집중했어요. 그래서 비록 검게 변한 몸뚱이라도 다시는 칼로 찌를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까 왼팔을 휘두른 것은 순간적으로 예민했을 뿐이라고, 왼쪽은 내가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어 버렸죠.

  이차선 도로를 넘어 비탈길을 순식간에 내려갔어요. 할머니를 다시 본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거쳐 왔던 우거진 숲을 지나고 또 지나니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우리 집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비록 예전처럼 똑같이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땐 그게 그렇게 중요한 점은 아니었죠.

  사실 그 한참 전부터 인기척은 느끼지 못했었어요. 그렇지만 할머니가 읍내로 외출하셨을 수도 있고 근방에 약초나 나물을 캐러 가셨을 수도 있으니까 개의치 않았죠. 고요했어요. 마당엔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어요. 저는 혼자 그 몰골로 집 안에 들어가기가 뭐해서 마당에서 기다리려다가⋯⋯.

  할머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그저 갑작스럽게 불안함과 조바심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와서⋯⋯.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어요. 조심했는데도 미닫이문이 다 부서졌어요. 할머니는 안 계셨고⋯⋯ 그런데, 벽에 걸린 달력이⋯⋯.

  사, 자그마치, 사 년이 지난 때를 나타내고 있었어요.

  땅에 박히고 정신을 잃고 난 뒤 깨어난 지금이⋯⋯ 사 일도 아니고, 사 개월도 아니고, 뭐? 사 년이 지난 때라고? 저는 이상한 예감이 드는 것을 곧바로 무시하고 방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어요. 흥분해서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죠. 대신에 그제야 유독 방이 작아진 것을 느꼈고 그 이유가 제 몸집이 불어났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어요. 평소와는 다른 결의 답답함이 느껴졌기에 방에서 뛰쳐나가려는데⋯⋯. 왼발에 달린 어느 덩어리에 뭔가가 채였어요.

  조그만 라디오였어요. 한 번도 할머니가 쓰시는 걸 본 적 없는⋯⋯. 먼지는 거의 없었고 몇 번 만지작거리자 전원이 들어왔어요. 조금 뒤에 멈추지 않는 지직거림 속에서⋯⋯ 저는 들었어요. 달력의 날짜에서 여섯 날이 지난 날이었어요. 어쨌든 사 년이 지난 게, 그게 사실이었던 거예요.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라디오를 그대로 집어 던져 버렸어요. 파편이 온 사방으로 튀었지만 저는 제 빌어먹을 왼팔로 저에게 날아오는 파편을 쳐내어 버렸어요. 그때, 제 시선은 위를 향했고 천장에 쓰인 문구를 보았어요.

  “Schwarz ist schön! - 검정은 아름답다!”

  소름이 돋고 속이 울렁거렸어요. 제 왼쪽을 뒤덮은 이 검정. 하지만 천장의 그 문구는 ‘검정’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도대체 뭐지? 마당으로 뛰쳐나갔어요. 딱히 생각이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가만히 한참을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도 뒤죽박죽인 머릿속은 그대로였죠. 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 있나, 할머니는 살아 있나,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되었나, 할머니는 어디에, 할머니가 돌아오신들 같이 살 수 있나. 그리고⋯⋯ 저 문구는 무엇인가.

  이어서 감은 두 눈앞에⋯⋯ 그때 장면들이 펼쳐지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몸을 세로지르는 진녹색 선, 변하는 팔과 다리, 왼쪽을 뒤덮는 검은 살가죽, 할머니를 위협하는 그것, 두 번의 관통, 그리고 도망⋯⋯.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서둘러 마당에서 밖으로 나갔어요. 그렇게 멀지 않은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어요. 그러고는 몸을 숨길 수 있으면서 집 대문을 지켜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를 기다렸어요. 점점 다른 생물체의 소리가 들리고 몸 구석구석에서 한기를 느끼기 시작할 때까지⋯⋯. 하지만 끝내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으셨죠.

  그때 저는 조금은 비약일지 몰라도 그곳에서의 삶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렸다고 생각했어요. 머리보다는 마음이 저를 움직였던 것 같아요. 저는 다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그 우거진 숲속으로 되돌아가고 있었어요.

 

  빌어먹을⋯⋯ 사 년 전 정신을 잃었던 자리로 돌아와서 뿌리를 박았어요. 역겨우면서도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죠. 결코 아무 생각도 안 할 참이었는데 뭔가 또 떠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었어요. 여태껏 헐벗고 있었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왜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는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어째서 허기가 지지 않는지, 이런 신체 아니, 몸뚱이의 반응 따위에 관한 것들이 계속 또 계속⋯⋯ 생각났어요. 답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어요.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는 삶의 의미랄까⋯⋯ 어떤 살아가는 이유에 관해서 깊게 파고들어 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은 마찬가지였죠. 게다가 저는 철저히 혼자였어요. 설마 어릴 적 숲속의 그 존재들마저⋯⋯. 아니, 알 수 없죠. 어쨌든 전 혼자였어요.

  예전으로 돌아갈 아니, 예전으로 아주 조금 비슷하게나마 돌아갈 최후의 수단이라고 여긴 채,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혹시나 할머니가 늦게나마 돌아오시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러 간 적이 있어요. 정말 부질없는 짓이었죠. 제 스스로에 대해 혐오감까지 느낄 정도로 후회스러운 행동이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인연이었는지⋯⋯.

  그러던 어느 날, 시간 개념을 거의 잊은 채로 마치 진짜 한 그루의 나무처럼 꼿꼿이 그 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던 그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저 아래에서 차 소리가 나더니 사라지고 곧이어 사람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하나, 둘, 셋⋯⋯ 세 목소리였죠. 거리가 있어서인지 크게 들리진 않았어요. 둔탁한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목소리와 함께 없어졌어요.

  사각사각, 사각사각, 떨어진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커져 갔죠. 저는 이상하게 소리의 방향이 저를 향하는 것 같았어요. 두려웠어요. 아무리 자포자기한 상황이었어도 낯선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니까 겁이 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감정은 겁이나 두려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소리가 양옆으로 갈라지고 있었어요. 두 사람인가, 나머지 사람은 어디 있지, 생각했죠. 그러더니 각각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가, 안 났다가 했어요. 저는 그들과 한참 떨어진 산 위 숲속에 있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숨죽이고 그들을 소리로 계속 지켜봤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흐른 뒤 그들은 재차 거리를 좁힌 것 같았고, 나지막이 짧은 대화가 들렸죠.

  없어?

  없어, 아무것도.

  이 사람들은 나를 찾는 걸까, 나를 어떻게 알지,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내 왼쪽을 알고 있나, 내가 이렇게 변한 사실을 알고 있나, 어떻게 알고 있나, 안 그래도 내 스스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내 안에 스멀스멀 차오르던 참이었는데, 다만 지금은 용기가⋯⋯.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 이런 수많은 생각들이 저를 가득 메웠어요.

  그때였어요. 어디선가부터 묘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묘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분명 비리고 역겨운데 순간순간 살코기 냄새가 나, 났기에⋯⋯. 그리고 느닷없이 꾸웨엑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멧돼지였던 거죠. 저는 야생의 그것에게서 살코기 냄새를⋯⋯. 역겨워서 속이 뒤집히면서도 냄새는 계속 나고 있었고⋯⋯. 꾸웨엑 소리와 육중한 발 구르는 소리는 조금씩 작아졌어요.

  여기!

  다급히 외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났어요. 연달아 몇 번이나 났어요.

  죽었어? 괜찮아? 뭣 땜에 이렇게 흥분한 거야.

  순간, 똑같은 상황이 또 벌어졌어요. 냄새가 났고 소리가 들리다가 줄어들었고 그러고 총소리가 났죠. 꽤 여러 번이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멧돼지는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고 그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멧돼지를 포획하러 왔었다는 사실이었죠. 저는 본능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제 기억에서 무기력했던 저를 지워버리고 그들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어요. 나중에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단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검은 왼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 할머니를 찾을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두 사람은 잠시 뒤 잡은 멧돼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철조망이 찢긴 일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말하는 듯했는데 그때 저는 잔뜩 긴장한 채로 왼팔을 뒤로 숨기고, 어떻게 하면 왼발도 최대한 못 보게 할 수 있을까, 뭐라고 말을 건네 볼까,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근접한 거리까지 다가갔어요. 그들은 긴 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손전등 같은 것을 들어서 내려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았죠. 저는 제가 적당히 가려지는 수풀 뒤에 숨자마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어요. 너무나도 오랜만에 입을 연 탓인지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저는 제 모두를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말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죠. 최대한 그들이 놀라지 않게 말이에요. 재차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어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죄송해요. 저, 정말로⋯⋯ 죄송해요. 제가 그때 곧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어째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말했듯이 저는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목소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치부하고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 했어요. 제발 도와달라고 하고 싶어서⋯⋯. 수풀 뒤에서 약간만 옆으로 나와 오른쪽만 보이게 했어요. 그러고는 땅바닥에서 작은 돌을 집어서 살짝 던졌어요.

  그 돌멩이는 날아가서 나무에 한 번 튕기더니 둘 중에 한 명이 멘 총 끝부분을 때렸어요. 그들은 지체 없이 손전등을 끄면서 뒤로 돌아 사격 자세를 취했죠.

  저는 너무 무서웠지만 수풀 뒤로 다시 숨지 않고 그대로 서서 오른팔을 떨면서 흔들었어요. 잠깐만 여기 좀 봐달라고 한 것뿐이었는데⋯⋯. 그들이 조금만 기다렸다가 제 온전한 오른쪽을 알아봐 줄 것 같았는데⋯⋯.

  모든 게 제 잘못이에요. 그들은 당연히 멧돼지 포획으로 흥분한 상태였을 텐데, 왠지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았기에 조바심이 생겨서 무작정⋯⋯. 제 짧은 생각으로 인해 그들은 기다림 없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때⋯⋯ 모든 것이 제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검은 왼쪽이 어떻게 수풀 사이로 날아오는 탄알을 막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대신 그 즉시 칼날 달린 왼팔이 백팔십도 회전하면서 하늘을 향했고 왼발의 검은 뿌리들이 수풀을 헤집고 순식간에 그들 앞으로 저를 데리고 간 것은⋯⋯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그 장면만은 정말로 기억에서 지우고 싶지만⋯⋯. 염치없네요. 죄송해요, 저는 진짜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어요. 그 죽음 앞에서, 제 기억 따위를 논하다니⋯⋯.

  카, 칼날이⋯⋯ 그들의, 그분들의 그러니까⋯⋯ 머, 머리를⋯⋯ 날려⋯⋯ 버렸어요. 너무 빨랐고⋯⋯ 기필코, 정말 기필코, 제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요. 빌어먹을 왼쪽이 그때까지 숨죽이고만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결단코, 모르고 있었어요.

  일단 벗어나고 싶었어요. 도망치고 싶었어요.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는데 왼발은 뿌리를 땅에 박고 왼팔은 칼날로 머리를 툭툭⋯⋯. 눈물이, 끈적끈적해서 눈물이 아닌 것만 같은 그런 액체가 두 눈에서 흘러내렸어요.

  그때, 저 아래에서부터 헐떡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까워졌어요. 나머지 한 사람인 듯했죠. 저는 오른쪽에 할 수 있는 최대로 집중했어요. 오른발을 뻗어 바닥을 긁으면서 총을 가까이 끌어왔고 순간적으로 힘을 모아 허리를 굽히면서 뻗은 오른손으로 총 한 자루를 집었어요.

  소리가 더욱더 다가왔고⋯⋯. 처음엔, 분명히 처음엔⋯⋯ 제 심장을 향해 총을 거꾸로 겨누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용기가⋯⋯. 그 사이에 그 사람은 거리를 계속해서 좁혀 왔고⋯⋯. 저는 총을 바로 잡아서 왼팔과 왼 다리에 한 번씩 방아쇠를 당겼어요. 정말 억울하지만 제 몸뚱이가 한 짓이었고 그런 짓을 막지도 못했으면서 또 심장을, 그렇게 하자니 용기는 나질 않고⋯⋯. 도대체 왜,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먼 훗날에서나마 알 수 있을지⋯⋯.

  미친 듯이 달렸어요. 산 위 숲속으로, 깊은 숲속으로, 총을 든 채로. 순간순간 매섭게 반응하는 검은 왼쪽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달리고 또 달렸어요. 아까보다 더 끈적끈적한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어요.

 

* * *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정말로 오랜만에 꿈을 꾸었어요. 기억이 나요.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숲속의 존재들을 어젯밤 꿈속에서 다시 만났어요. 그 존재들은⋯⋯.

  초록의 것들이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제 자리만을 지키는 우둔한 녹색식물이 아니라 햇빛을 찾아다니고 서로를 인식하며 갖가지 동물들에게 호기심을 나타내는 바로 그것들이었어요.

  제가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자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저를 쳐서 깨웠어요. 그곳이 여전히 꿈속이었는지 실제인 이 숲속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거든요.

  저를 깨운 주체는 바로, 그 존재들이었어요. 자랄 만큼 다 자란 듯 큰 키로 서 있는 그것들은⋯⋯ 제 왼쪽의 모습과 닮아 아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어요.

  그 뒤부터, 제 머릿속 깊은 어디에선가부터 하나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Fritz Haber’.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 그 사람과 그 사람이나 타인들이 그에 관해서 책에서 했던 말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살았었던 집 천장에 쓰인 문구.

  “Schwarz ist schön! - 검정은 아름답다!” 이 문구의 의미.

  이 글을 쓰는 처음에만 해도 어떤 부분은 기억이 흐릿했고 확신할 수 없었으며 또 확신하기도 두렵고 싫은 그런 마음이었지만 옛날 일을, 제 일생을 되돌아보니 뭔가 기억이 났달까, 확신이 들었달까⋯⋯ 여하튼 지금은 그런 상태예요.

  ‘식물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요? 그것들이 제 왼쪽처럼 변해가면서 우리를 뒤덮어 버리려 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저는 도대체 뭘까요? 저는 비정상 아니, 어차피 비정상인데 그중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돌연변이’일까요?

  만약 이 모든 게 확연한 사실이라면 제 솔직한 심정은 당장에라도 읍내로 나가서 도망치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할뿐더러, 무슨 일이⋯⋯ 저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잖아요. ⋯⋯죄송해요.

  그래서 이렇게 기록으로나마⋯⋯. 비록 이제 이것이 ‘유언’인지 ‘참회록’인지 또는 ‘경고’인지 모를 것으로 변해버렸지만⋯⋯.

  그리고 솔직히, 그 일이 벌어진 곳 근처까지 다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도저히, 왜 그랬는지⋯⋯. 거기서 여러 가지와 이 펜과 노트가 든 가방을 주웠어요. 훔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순간 그때 이상한 소리가 나서 놀라는 바람에 그냥 손에 쥔 채로 올라오고 말았어요. 주인 허락 없이 뒤지고 아무리 그래도 노트와 펜을 마음대로 쓴 것도⋯⋯ 죄송해요. 만약에 당신이 이 가방을 주인에게 돌려주실 수만 있다면 저 대신 사과를 좀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음⋯⋯ 지금 같은 상황에 제가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는 거겠죠?

 

  제 선택, 이 방법이 옳지 않다는 사실은 정확히 알고 있어요. 무책임한 일이고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지도 않아요.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할 짓이 아닌 것도 잘 알아요. 그렇지만⋯⋯ 이렇게 변해 버린 제가 남들과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살기 적합한 정상적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요. 물론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르겠죠. 하지만 그것은 저와는 절대적으로 상관이 없는 부분이에요.

  다시 한번 그분들께, 할머니께 그리고 모두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젠장, 쓸데없이 계속 말만 길어지네요.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것처럼⋯⋯.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의 앞날이 검은색으로 뒤덮이더라도 부디 버티고 살아남으시길 바라요.

  혹시 저희 할머니를 알아채신다면 제발 그냥 지나치지 말아 달라고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려요.

  그럼, 진실로 안녕히⋯⋯.

 

  —이제는 어떤 이름도 필요 없는 존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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