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내 애인은 DNA

2023.02.07 20:1802.07

그러니까 있죠.

이걸 어디부터 이야기해야할까요.

아, 지금 드시는 지구의 알코올 혼합물은 바로 술이랍니다. 제가 잘 만들었다고는 자부할 수 없지만, 나름 지구의 물 대신 토성 고리 즈음에서 얼음을 가져와 좀 썼으니 비슷한 맛이 나길 기대하고 있어요. 알코올이요? 그건 저기 유로파 메탄가스를 좀 합성해서 만들었죠. 지구 근처의 맛 정도는 나지 않을까요? 

제가 좀 망설이는 게, 결국 제 이전 애인의 이야기거든요. 이게 혼자만의 이야기라면 저도 큰 고민하지 않고 이것저것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지구에 남아 있는 그녀는 제가 여기서 이렇게 여러분과 떠들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없겠죠. 인간의 수명상 이미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더 높아요. 인간이 영생을 얻지 않았다면 이미 다른 분자들이 되어 떠돌고 있겠죠. 제가 떠나온 지도 꽤 오래 되었다보니까. 음, 그치만 원래 지나간 인연으로 편집된 이야기를 이렇게 떠드는 건 이렇게 취해있는 친목 자리에선 빠지기도 힘들고, 그렇네요. 게다가 애인의 DNA는 여기저기 있어서, 혹시 지성을 가진 케이스가 있으면 좀 그렇고. 

아, 알겠어요. 네, 이야기 할게요. 이렇게까지 해놓고 빼는 건 좀 웃기고 모양 빠지죠. 알고 있어요. 할게요, 해요.

일단 지구에 다들 가보신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 그렇죠. 정보로는 다들 몇 번 들어보셨군요. 인기 있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 이따금 그쪽 은하에 방문하다가 구경하는 일은 늘었더라구요. 저도 그런 분위기를 알고 여기저기에 물어본 다음에 찾아가게 된 곳이죠. 다들 아시다시피, 어찌되었건 그곳에도 지성이 있는 생명체들이 다수 살고 있거든요. 그런 경우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조금 있는 편이죠. 저의 애인도 그 지구에 사는 인간이라는 종 중 하나였구요. 

사실 지구에 처음 내려가서 사람들을 만나보며 놀던 적에는 사실 조금 지루했어요. 처음 1년 정도 떠돌았는데, 그건 지구의 인간들이 관심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면 좀 도망가야했던 게 커요. 인간 없는 곳은 한적하게 좋았지만, 매일 중성자별을 들여다보던 자극적 일상에서 벗어난 것도 하루이틀이지. 안 그래요? 결국 인간들 가까이 가긴 해야 재밌겠구나 싶었어요. 그치만 신경 쓸 게 많았죠.

경험자들의 후기를 들어보니까 인간들에게 이래저래 잡히면 귀찮아지더라구요. 지구에서 지배적인 인간들이 시시하게 여기저기 선을 그어서 관리를 하는 탓이라고 했죠. 그래서 괜찮은 곳에 눌러 앉아 좀 인간 행세를 하기로 했어요. 일단 인간들이 사용하는 화폐라도 좀 가지고 자리를 잡으면 문제가 없다고 하길래. 그냥 훔치거나 만들어서 써도 된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그것도 신경 쓸 게 많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다른 인간들이 그러듯이 일을 좀 했어요.

귀찮은 거 안 물어보는 어떤 인간이 도움을 좀 준 덕분도 있어요. 그 인간이 운영하는 술을 판매하는 곳의 주인장이었고 저도 그 아래서 이것저것 일을 했어요. 보통은 바라고 부르더군요. 바에서 전 일을 하고 인간들의 화폐를 받았죠. 인간들의 교환용 화폐를 받아 이것저것 해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어요. 쉬는 날엔 그곳에서 앉아 저도 술을 먹으며 주인장과 떠드는 편이었구요. 재미가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특정할만큼 재밌는 관계는 딱히 없다보니 조금은 시시했어요. 인간 가까이에 온 건 인간들을 만나기 위해서긴 했지만, 먼저 다가오는 인간들이 대게 시시했거든요. 시시한 그, 음, 뭐라고 지칭하더라, 그래요. 남자들. 인간 남자들이 자주 붙다보니까. 물론 그 바의 주인장도 남성이었지만, 그 사람은 뭔가, 마치 우리처럼 좀 단단한 생명체 같아서 가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할만한 인간이었고. 아무튼.

그렇게 술을 혼자 마시고 있다보면 꼭 성장하다 멈춘 듯한 인간들이 그렇데 들러붙곤 했어요. 그건 퍽 귀찮은 일이었죠. 대꾸를 안하면 성을 내고, 대답을 하면 자기의 생각을 부풀려서 오해를 하는 편이었죠. 그제야 제가 인간 기준으로는 여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구나 그런 사실을 알았어요. 왜 모습을 그걸로 했냐구요? 저희들은 아시죠, 그 깍아내는 건 쉬운 편이잖아요? 규소가 붙이기가 귀찮아서 그렇지. 몸집 키우려면 적당한 항성 담금질도 해야하고, 암석형 행성들 섭취도 필요하고. 그래서 원래도 깎아내는 걸 고민해보라는 권유들이 많긴 했어요. 거기에 더해 이왕 인간들 사이에서 좀 지낼 예정이고, 한번 깎아내보자 싶은 마음에 실연한 것 마냥 좀 확 깎아냈거든요. 말했다시피 이왕이면 지구 인간들과 비슷하게. 아, 여러분들이 보는 지금 모습이 그때 지구에 내려갈 때 얻은 모습이랍니다. 작지만, 꽤 디테일하고 멋있죠. 나름 탄소 기반 생명체처럼 보이고. 외형을 이렇게 선택한 건, 저도 인간 여성이 더 맘에 들었기 때문이죠. 바꾸어보니 이런 제가 퍽 맘에 들었거든요. 이런 저이기에 인간 여성이 좋았어요. 그러니 비슷한 부류에 조금 더 눈이 갔죠. 외형을 바꾸니 시야의 형태도 그렇게 된다는 점이 지금 생각해보니 꽤 재밌는 일이네요.

사실 제 애인은 바에 자주 찾아오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처음 만난 날에 이미 술을 거나하게 들이킨 채로 저희 바에 찾아왔구요. 많이 취한 사람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바 주인장이었지만 그냥 앉히고선 주문을 받더군요. 일하는 날이 아니었던 저는 끝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제 애인이 빤히 이쪽을 보더군요. 방긋 웃더니, 의자 하나를 넘어오고. 또 방긋 웃더니 의자 하나를 또 넘어와서는. 다시 방긋방긋 웃으며 저에게 말을 걸어왔어요.

"그쪽, 맘에 들어요."

이런 접근은 처음이었죠. 알코올을 분해하느라 온 몸의 체온이 오른, 그리고 그 덕분에 제정신은 아닌 인간의 이런 솔직함. 하지만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쪽이 마음에 들어요. 저도 마음에 들었던 거죠. 그 방긋방긋 미소가. 취한채로 다가오는 알코올 냄새가. 이상한 말들이.

저희는 떠들기 시작했어요. 술 취한 사람의 말에 대해 그다지 신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경험적 결론에 따라 저도 이런저런 기억하지 못할 말들을 함께 떠들기도 했죠. 그러다보니 저도 당연히 제 출신을 이야기했어요. 주인장 빼고는 제 출신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신기한 일이죠. 먼저 말하게 된 사람은 애인이 처음이었어요. 그 방긋거리는 얼굴을 보니 뭐든 이야기하게 되더군요. 다시, 정말 신기한 일이죠. 외계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방긋방긋 웃던 입이 커지고선 애인은 자리 앞에 놓인 칵테일을 비우더군요. 그러고선 말했어요.

"외계인이시라면 탄소 기반 생명체인지, 규소 기반인지 혹은 다른 건지 말해주세요."

참 이상한 사람이죠?

술에 잔뜩 취해서 탄소 기반이니 규소 기반이니. 지구는 탄소 기반이다보니 그런 식으로 검증해내고 싶었나봐요. 지구의 연구가 이 즈음까지 왔구나 싶으면서도 그 태도가 웃겨서 전 크게 웃었어요. 전 솔직히 대답했죠. 아시다시피 저희는 규소 기반 생명체고. 그 사실을 밝히니 애인은 절 비웃었어요. 물어봐놓고 비웃다니 또 새삼 이상하긴 하지만, 술에 취한 인간은 대게 그런 편이니 양해해주세요. 애인은 절 이리저리 보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흥, 내일 우리 실험실에 와서 확인해봐야겠어요." 

"내일? 같이 가도 되나요?"

"그럼요."

"좋아요."

"좋아요? 지금도 좋은데."

그리곤 긴 밤이었어요. 술과 서로에 빠진 긴 밤이었죠.

유전 정보의 교환이나 발산이 가능하지도 않은 개체 사이에 그런 시간이 가능하리라곤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어요. 인간의 번식에 있어서 쾌락이 부가적인 줄 알았는데, 사실 번식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인간은 즐길 수 있더군요. 그 사실이 기쁜 밤이었어요. 술에 취한 애인은 꽤나, 그리고 생각보다, 거기에다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거든요. 전 탄소기반 생명체의 손가락이나 혀가 그렇게 단단하게 저를 파고들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는 제가 주도적일줄 알았는데 그냥 전 누워있기만 했구요. 좋았어요. 다른 기분이 다 자질구레한 것들로 취급될 정도의 좋은 기분. 그 단순함이 좋았어요.

저기, 어디였죠, 저기 20만 광년 떨어진 초은하단의 지방 은하 중 하나였는데. 관광지로 좋았는데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요. 지구에서 오래 살다보니 용어도 헷갈리네요. 화로자리 은하단이었나. 그 즈음이었던 거 같아요. 그곳에서 블랙홀의 탄생을 보며 가졌던 성간 관측 여행 만큼이나 좋았던 기억 중 하나랍니다. 인간 남성들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는데, 인간 여성인 제 애인은 저를 구석구석 잘 아는 듯이 행동했어요. 나중에 물어보니 '그거 술기운에 몸 가는대로 했던거라 사실 망한 거야' 라고 했지만, 저는 좋았던 걸요. 이렇게 말하면 또 부끄러워하는 사람이기도 했어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애인이었죠.

그리고 사실 제 애인은 그 때까지 그냥 제 말을 되도 않는 농담 정도로 생각했나봐요. 다음 날 아침, 저는 제 표피를 검증해보고 술이 덜 깼다며 돌아가서 잠에 들려고 하는 그녀를 달래야했어요. 결과를 믿지 않고선 꿈이라고 중얼거리더군요. 아직 몸에는 알코올 향을 풍기면서. 제가 잘 씻기고 침대로 다시 잘 보냈구요. 그리고 오후에 한 번 더 달랠 필요가 있었어요. 아침에 찍어본 결과에 눈이 뒤집히더니 당장 저에 대해서 실험하고 학계에 보고해야한다고 떠들기 시작했거든요. 어젯밤에 같이 잔 상대를 이렇게 실험체 취급할 줄은 몰라서 저도 좀 힘들었답니다. 

 

그런 애인이었어요. 그런 애인이었죠.

 

그래서 6년 째 사귄 애인이 이별을 통보하였을 때, 난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 가져가기로 했어요. 나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해왔거든요. 규소 기반 생명체들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어요. 변화나 관계를 사랑한다곤 하지만, 제가 결국 사랑한 건 꾸준하고 언제나 연구실에서 고심하는 애인의 모습이었거든요. 그녀는 6년간 잘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요. 머리결도 좀 나빠지고, 그 사이에 성취도 이루고, 피로가 조금 짙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언제나 저의 사랑이었죠. 애인은 변하지 않았어요. 저에 대한 마음이 소모된 건 아니었죠. 그저 이제 헤어질 때였겠죠. 그리고 전 변하지 않을 애인을 사랑했구요. 그러니 헤어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머리카락이었어요. 다른 세포도 있지만, 제가 좋아했거든요. 애인의 머리칼을. 

"...머리카락 그 동안 가져갈 일 많았을 텐데? 그걸로 충분해?"

"뽑아야 모낭에 DNA가 남아 있으니까."

"그거 내가 알려준 이야기네."

"맞아, DNA를 가지고 싶어서."

"DNA구나. 그래, 그래. 그렇네. 이런 화법도 이제 못 듣겠네."

"그렇지만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아서."

"그걸로 뭘 하려고?"

전 대답하지 않았어요.

애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절 봤구요. 그렇지만 더 묻진 않았어요. 본인 딴엔 그게 더 쿨해보인다고 생각했나봐요. 조금 재밌었어요. 헤어지자고 통보한 건 그쪽이면서 저보다 조금 더 슬퍼하고 있었거든요. 물론 제 마음도 아팠어요. 이렇게 잘 맞는 개체를 만난 적은 드물거든요. 저희가 오래 사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의 감각이 다른 건 아니니까. 저희들에게도 하루는 하루고, 일 년은 일 년이고, 이별은 이별이죠. 제 애인은 그 가늠을 어떻게 해야할 지 늘 어려워했어요. 저에게 무언가 맞춰주려고 할 때마다,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죠. 그래도 애인은 그런 일들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었어요. 맞춰줄 수 없다고 하여도 알고 싶어했죠. 그건 그녀가 종사하고 있는 연구들의 연장선이었을까요? 애인은 많은 일들에 대해 연구의 시선으로 보는 걸 스스로도 모르는 채 즐거워 했어요. 이 이야기를 하면 본인은 고리타분하다고 그런 사고방식을 실험실 바깥에서 보이고 싶어하지 않다며 부끄러워했죠. 물론 그렇다기에 그녀는 늘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웃고 떠들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방식을 사랑했어요. 그리고 저 또한.

그리고 그만큼이나 저도 이 지구의 발명품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었어요. DNA를 가져온 이유도 나름 이별의 아픔 때문이었죠.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헤어질 당시엔 나름, 그리고 꽤나 심각했답니다. DNA로 해야하는 일은 단순했어요. 이걸로 애인들을 좀 많이 만들자. 많을 수록 좋은 나의 애인을 만들고, 또 만들자. 그게 저의 목표였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냐구요? 저희도 이런 규소로 된 유전물질이 있지만, 우린 좀 느리고 개체도 적고 그렇잖아요? 거의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지내는 저희들의 종족적 특성 같기도 해요. 저희는 조용하고, 고요하고, 저희보다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사랑하죠. 저희 서로를 사랑하기보단. 규소 자체가 딱딱해서 우리도 딱딱한 건지 싶기도 하고. 게다가 우린 돌연변이도 없죠? 그러니 좀 심심해요. 심심하고, 변화도 적고, 영생할 뿐이죠. 우리는 닳지 않으니까요. 그저 별들 사이에서 태어난 채로 끝없이 허공을 걸을 뿐이죠.

그치만 지구의 DNA는 좀 달랐어요. 변화도 잦고, 변덕스럽고, 유지가 잘 안되다보니 대부분의 지구 생명체들은 짧은 생애 주기를 가지거든요. 그렇지만 좀 더, 우리보단 생명체 같았어요. 그 1조가 넘는 지구의 생명체 사이에 있던 제 애인의 정수는 그 DNA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사실 이 DNA도 애인이라는 개체가 등장한 이래로 수도 없이 변화했겠죠. 원본이라고 할만한 게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걸 조금이라도 빨리 남기고 싶었어요. 제 애인의 DNA는 계속 변해왔고 변해가겠죠. 그 시간이 아쉬웠어요. 처음으로 시간이 아쉬워졌어요.

그래서 저는 그 DNA도 사랑하려고 했어요.

처음엔 그래서 그냥 똑같이 만들었어요. DNA도 있고, 배양 시설도 있고. 물론 탄소 기반 생명체를 만드는 데에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응성만 다르지 기능은 같으니까 가능할거라고 생각했어요. 배양 시설에 넣고, 규소 대신 탄소를 목성 주변에서 가져왔던 것들로 구성하고. 아, 그래도 황은 지구에서 많이 가져왔으니까 나름 '메이드 인 솔라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태양계 정도면 서로 비슷하니까 구성품도 그럴듯 했어요.

그렇게 두 번째 애인은 15살 즈음에 죽었어요. 좀 아쉬웠어요. DNA는 지구 나이로 26살의 애인이었고 배양도 그 즈음에서 마쳤으니까 인간 기준으로는 마흔 정도, 그 즈음이었죠. 몰랐는데, DNA를 살펴보니 암 관련 유전자가 좀 문제가 있더라구요. 돌연변이가 생겨서 암이 생겼던 거죠. 암 발병 가능성은 1% 정도? 인간의 질병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지라 실수이기도 했죠. 거기에 더해, 두 번째 애인은 자신의 구성과 과거에 대해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편이기도 했어요. 암 발병 가능성보다도, 애인이 가진 깊고 깊은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감안하고 시작했지만 저에게 인간의 감각을 맞추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두 번째 애인은 첫 번째 애인만큼 좋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이었어요. 지구로 보내줘야할까, 싶을 즈음에 그녀는 죽었죠. 저는 지구에 아직 남아있을 제 첫번째 애인을 떠올렸어요. 너도 이렇게 되었을까.

세번째 애인은 배양 속도를 늦췄어요. 26살의 DNA라면 그 나이대에 맞추는 게 성장엔 좋았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12살의 애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조금 어린 시기부터 제가 이야기를 해준다면 두번째 애인만큼의 시행착오는 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인간들은 그 즈음에 사회화가 끝난다고도 하고, 중요한 시기라니까. 그리고 12살의 애인은 저의 고향 행성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온 행성을 곤란하게 할만한 에너지를 만들어내곤 했어요. 저는 그 사실이 매우 기뻤어요. 제가 알지 못하는 애인의 과거는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오래오래 그녀를 사랑했어요. 그녀는 이내 첫 번째 애인의 나이 즈음까지 잘 성장했죠. 저를 사랑해주었구요.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 행성의 모래폭풍에 휩쓸려 사라졌어요. 인간의 나약함을 감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난 사고였죠.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생활하기 어려운 공간에 대한 탐험 욕구가 있었어요. 마치 애인이 지구에서 연구를 하는 것처럼요. 그게 문제였죠. 그게 문제였어요. 애인은 언제나 모르는 것들을 알고 싶어했죠. 애인의 그 정수는 너무나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나봐요. 그리고 세 번째 애인은 그 방향성이 탐험으로 간 듯 했어요. 행성에서 가장 높은 산에 대한 욕구를 불태웠고, 등반을 했으며, 사라졌어요.

네번째부터 백한번째 애인까지도 비슷했어요. 제 실험실에서 탄생한 백명의 애인들은 대부분 20년, 30년을 살았어요. 대부분은 자연사였죠. DNA의 나이가 26살이니 인간의 나이로는 40, 50살 즈음에 죽었죠. 인간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그건 사실 길지 않은 편이었어요. 두번째 애인처럼 암이었던 케이스도 있었고, 건강이 갑자기 나빠진 경우도 있었어요. 만성 질환이 50대 즈음에 급격히 나타난 경우도 있었죠. 물론 스스로가 현 상태를 견디지 못한 경우도 있었구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가 있었다보니까. 이 경우엔 제가 지난 모든 애인과의 과거와 당신이 일흔여섯번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가르쳐준 경우였어요. 이전의 사실들을 하룻밤에 전달했는데, 정보량이 좀 많았죠. 이 이후로 저는 정보를 한번에 알려주는 위험성을 인지하기 시작했죠. 천천히 나누어서 알려주기 시작했을 땐, 정서적 불안정성은 잘 해소된 편이었구요. 그리고 저는 이런 시행착오 사이에서 고심하기 시작했어요.

DNA에 손 대야할까?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봤어요. 그리고 꽤 오랫동안 바라봤어요. 우리의 단단한 유전정보와는 달리 DNA는 복제되는 사이에도 이미 변해가고 있어요. 하지만 DNA는 우리의 유전정보처럼 모든 정보가 담겨 있기도 해요. 저는 그 화해되지 않는 두 가지 특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DNA는 애인의 삶에 있을 미래의 모든 위험 요소가 기록되어 있어요. 어떤 질환이 있을지, 어떤 건강에 취약한 면이 있을지, 그녀의 탐구적 성향은 어디서 기인하는지, 애인의 삶이 어떤 궤적을 그릴 수 있는지 모두 있죠. 저는 26살의 애인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 변화 무쌍하면서도 정해져 있는 DNA가 점점 두려웠어요. 그래서 그 시기의 그녀를 똑 떼어다가 DNA로 가져왔죠.

그렇지만 그녀는 같으며 달라요. DNA에는 모든 정보가 다 적혀있는데, 어째서 그녀는 각기 다르게 죽어갈까요. 그 변화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각기 다른 죽음 사이의 애인들은 어째서 그렇게 모두 똑같을까요. 그리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점 더 나은 환경을 만들고 있는데 어째서 백명의 애인들은 모두 다를까요. 그게 문제였어요. 그녀는 비슷하지만 달랐어요. 하나였지만 백이었어요. 그리고 절대 첫번째가 되지 않았어요. 저는 변하지 않을 애인의 정수를 가져왔고, 제가 만든 건 무수한 애인이었어요. 하지만 애인이 아니었죠.

그리고 이백다섯번째 애인에서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죠. 그녀는 첫번째 제 애인처럼 생화학을 공부해왔어요. 의외로 이전까지의 애인들은 첫번째처럼 생화학을 공부하지 않았어요. 지구가 아닌 공간에 있다는 사실 덕분인지, 애인들은 외우주의 방식과 탐험에 좀 더 마음이 쏠려 있었죠. 그렇지만 이백다섯번째는 달랐어요. 생화학이었죠. 생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탐구하는 학문.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잘 알고싶어했고, 가장 멀리 나아가던 분야였죠. 그래서인가 이백다섯번째 애인에겐 모든 이야기를 조금 더 쉽게, 선선히 했던 것 같아요. 숨기기엔 혼자서 찾아내는 게 너무 많은 애인이었거든요.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는 게 쉽지도 않았고.

"그렇구나, 복제였단 말이지."

"응."

"복제 방식은?"

"알고 싶어?"

"지구의 정보와 방식과 비교해보고 싶어."

전 고민했어요. 하지만 거절할 이유도 찾지 못했죠. 애인을 사랑한다는 건 늘 이런 일이었으니까. 결국 실험실을 보여주기로 했어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실험실이 아니긴 하였기 때문에, 이백다섯번째 애인에게 초기엔 많은 실험들을 보여주었어요. 사실 전 탐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좋은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이백다섯번째는 좋은 학생이었죠. 곧잘 실험실에서 재밌는 것들을 혼자 꾸려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백다섯번째의 애인은 오랫동안 첫번째 애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어요. 열정과 의욕으로 실험을 진행하는 연구자의 모습. 제가 가장 사랑해 마지 않았던 그 모습의 연장선 위에 이백다섯번째의 애인이 있었어요. 저는 이 즈음에 안심했어요. 그녀의 DNA는 그대로였구나. 변하지 않는 그녀의 정수가 있었구나. 이백다섯번째 애인은 규소 기반 생명체의 자신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죽을 즈음에 이백다섯번째-규소 애인에게 자료를 모두 넘겼죠. 저는 그 과정에 대해 딱히 어떤 간섭을 하진 않았어요.

그게 합당해 보였으니까요.

제가 사백네번째 애인을 만들어낼 즈음, 이백다섯번째-규소-쉰다섯번째 애인도 자신의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었어요. 저는 이 긴 몇 백년의 퍽 이상한 애인들의 향연을 어떻게 규정해야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일어난 일이기도 하죠. 그러니 계속 이야기할게요. 사백네번째 애인은 우주 비행과 관련 연구에 대한 공학적 지식을 쌓아가는 애인이었어요. 그리고 이백다섯번째-쉰다섯번째와도 꽤 친하게 지내며 연구를 지속하는 편이었죠. 이백다섯번째-쉰다섯번째 애인은 주로 생화학 연구를 이어가는 편이었어요. 제가 만들어내는 애인과는 달리 스스로를 연구하며 복제해가며 이어나가고 있었죠. 전 그 틈에 끼어들지 않았구요. 기묘하죠. 저와 애인은 애인의 정수를 복사하고, 복사하고, 고치고, 다시 복사하고, 다시 만들어내고, 여기까지 왔어요.

저까지 포함하여 셋은 20년 가까이 퍽 좋은 관계를 유지했어요. 둘은 똑같은 서로의 얼굴을 흥미롭게 보기도 했죠. 이백다섯번째 계열의 애인은 가끔 규소 기반의 육체를 가지기도 했지만, DNA의 구성상 잘 맞지 않아 결국 탄소 기반으로 돌아왔거든요. 둘은 쌍둥이 자매처럼 보이곤 했어요. 우리들은 셋이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죠. 긴 밤과 긴 밤이었고, 또 좋은 밤이었죠.

그 연구들이 뭐였냐구요? 그 연구들은 사실 저의 곁을 떠나기 위한 연구들이었어요. 사백네번째 애인은 우주 비행과 유영, 그리고 비행체를 운용할 줄 알았으니까요. 이건 제가 알려줬던 정보들이긴 해요. 저희들이 자주 쓰는 그 비행체 아시죠. 네네, 그 회사 그거요. 제가 먼저 알려준 것도 아닌데 혼자 찾아보더니 나름 정비도 곧잘 하고 관심을 가져서 하나 장만해줬죠. 저도 두 대 있으면 편하고. 그리고 이백다섯번째-쉰다섯번째 애인은 생화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자신의 DNA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과 동면에 관련된 연구를 이어왔어요. 그건 이백다섯번째 애인이 시작한 연구이기도 했죠. 그건 우주로 나가기 위한 연구였어요. 인간의 약한 육신을 우주의 위협들로부터, 그리고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편들이었죠.

저는 그 즈음부터 알기 시작했어요.

"같이 떠나?"

"...무슨 말이야?"

이백다섯번째-쉰다섯번째 애인은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어요.

"그야, 이제 이별하리라고 생각했어. 연구도 완성되어가잖아?"

"내가 떠날 거라고는 어떻게 짐작했는데?"

"헤어지던 그 때 너의 표정과 비슷해서."

"아, 원본 이야기구나."

이백다섯번째-쉰다섯번째는 비웃는 듯 했죠.

"눈 앞에 내가 있는데 꼭 걔를 이야기해."

"나에게 있어서 넌 같아."

"다르다는 걸 알잖아."

"하지만 하나의 DNA니까. 하나야. 넌 천 년 전의 너와 같아. 그리고 저기서 정비하고 있는 너와도 같아."

"아직도 DNA가 뭔지 모르는구나."

맞아요. 전 아직도 DNA가 뭔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다시 이별을 준비했어요. 자발적으로 떠났던 애인들도 꽤 있던 편이었죠. 애초에 첫번째 애인도 저를 떠난 셈이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고 여겼어요. 사실 크게 다를 바도 없죠. 사백네번째 애인이 모든 외우주 탐사와 장거리 여행에 대한 준비 절차가 완료되었다고 말해왔을 때에도 놀랄 것 없이 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또 다시 가는 구나. 저 떠나고 싶어하는, 변하고 싶어하는 DNA는 변할 수 없구나. 출발일은 애인들도 선언하지 않았고, 저도 묻지 않았어요. 다만 이번에 떠난다면 잠시 쉬어야겠다 싶었죠. 저에게도 천년의 시행착오는 쌓이다보니 적지 않았으니까요.

날짜는 통보하지 않았지만, 사백네번째 애인의 개조한 탐사선은 시동음이 큰 편이었어요. 저는 잠든 척 하고선 떠나는 소리를 듣고 있었죠. 하지만 아침에 이백다섯번째-쉰다섯번째 애인은 집에 남아 있었어요. 아침에 이미 자신의 실험실에서 큰 실험기구를 들고 낑낑거리는 애인을 도와주며 저는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죠.

"왜 안갔냐고?"

"응."

"걘 탐사할 우주가 있고, 난 탐사할 게 여기 있으니까."

"둘은 하나잖아."

"또 그 소리네."

"하지만 둘이 원한 것은 나랑 이별하고, 다른 것들을 더 찾아보고 싶었던 것 아니었어?"

"몸이 두 개면 둘 다 해야지, 왜 하나만 해야하는데? 지금 저 멀리 냉동된 채로 날아가고 있는 걔도 똑같은 생각 할 걸? 걔가 원하는 탐험과 내가 원하는 탐험도 다른데. 내가 굳이 따라갈 필요 없어."

"그렇지만 둘은 같은데."

"난 실험실이 좋아."

"왜 다르지? 왜 둘은 달라? 나는 늘 똑같이 복제해왔는데."

"지금 내 DNA 뽑아서 검사해볼래? 내 원본이랑 얼마나 비슷한지? 수치로 필요해?"

필요 없었어요. 어딘가는, 어딘가는 다를테니까요. DNA의 불변하는 변덕성은 그런 것이었어요. 변하지 않는 정수를 지닌채 끊임없이 변해왔어요. 애인의 모든 것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으니까요.

"필요없지? 그럼 됐어, 이리 와. 간만에 보는 바보 같은 표정이네. 안아줄게."

DNA는 그런 식이었어요. 더 많을수록, 자신이 닳아가더라도 더 많아야했죠. 그리고 애인은 모든 우주를 알고 싶어했어요. 모든 인간은, 모든 지구의 DNA는 세상을 알고 싶어했어요. 자신이 닳아 없어지고, 복사되며 달라지고, 자식에게 넘겨주며 스러지더라도. 우리 규소들의 긴 호흡 한번이면 끝날 발자취를 부던히 따라가는 그들이 있었어요. 이젠 대답하고 싶어요. 너의 DNA는 변하지 않을 변덕을 담고 온 우주로 나아가길. 우주 방사선을 통과하고 비어있는 공간을 질주하며 죽어가길. 충족될 수 없는 외로움과 마음을 담고서 발 딛는 곳으로 나아가길. 그리고 이 실험실에 발 닿은 채로 우주의 법칙을 노려보길. 그리고 언젠간 온 우주가 너의 원자로 충만하길. 나는 죽어갈 너를 사랑한다고. 이제 대답할 수 있어요.

전 안긴 채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 뽑았어요

"아야, 아파라. 머리카락? 그걸로 뭘 하려고?"

온 우주를 다하여 널 사랑하려고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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