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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네크로멘서.ai

2023.02.27 17:4602.27

“사람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기자들의 반응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아마 그것은 ‘사람을 되살렸다’ 는 발표내용 때문일 것이고, 더욱이 내가 컴퓨터과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생명과학자들은 텔로미어 연장이나 역노화 등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을 되살리는 분야에 대해서는 육각수나 게르마늄 팔찌쯤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그걸 하필이면 컴퓨터과학자가 이루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우리 과학자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엄밀성이라는 것에 비추어 말하자면, 사실 사람을 살렸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아주 엄밀히 말하건대 이건 ‘생전에 남긴 글을 바탕으로 글을 작성한 사람의 원래 의식을 재구성’ 해낸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이 과정은 고심도학습 프로그램인 ‘네크로멘서’ 로 가능했습니다.”

 

의식이 작문을 통해 작품을 낳는 것이 정방향의 함수라면, 작품을 해석하여 의식을 만드는 역함수가 가능하다는 것이 발표의 논지다. 이에 준비물은 크게 세 가지였다: 막대한 양의 텍스트, 그에 걸맞은 연산력, 코드를 짤 대학원생. 이 정도면 사람을 되살리기 충분했다.

 

우선, 나는 생전에 다작한 작가들을 추렸다. 인격을 재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글을 쓴 사람들은 작가들뿐이었다. 정치인들은 논란의 여지가 컸다. 그중에서도 유족이 없는 등의 사유로 텍스트에 저작권이 소멸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그래서 저는 이 작가를 되살렸습니다.”

 

화면에는 21세기 초반의 약력을 가진 작가의 사진이 떠올랐다. 아까와 같이 셔터음이 회견장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도 기자들은 ‘대체 저 작가가 누구일까?’ 하는 물음을 품었으리라. 그리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장편소설 연재 중에 비운의 트럭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작가였는데, 좋게 말하면 ‘컬트적이었다’ 는 표현이 어울리는 정도의 작가였다. 세간에서는 그 작가를 가리켜 ‘계속 글을 썼더라도 입에 풀칠하는 건 가능’ 했으리라고 평가했다.

 

“저는 작가가 남긴 모든 텍스트를 적법하게 인수했습니다. 발표작, 습작, SNS, 낙서, 메모 등….”

 

넓고 깊은 연산층은 그 모든 걸 품었다. 검은 상자와 같은 네크로멘서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셀 수 없는 학습이 반복되면서 네크로멘서의 결과물이 내 의도를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여기까지입니다. 질문받겠습니다.”

“네, 박사님. 결과물이 인격을 가진 것으로 확신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네크로멘서가 단순한 복제 그 이상의 결과를 내었다고 봅니다.”

 

“질문 있습니다. 이 기술이 히틀러처럼 논란이 있는 인물을 되살리면 어쩌죠?”

“불가능합니다. 웬만큼 그럴싸한 결과라도 내려면 엄청난 양의 텍스트가 필요합니다. ”

 

그에 비해 히틀러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문맥이 1936년 유럽정세처럼 완전히 뒤틀려있어서, 러시아의 네오나치들이 숭앙할 만한 결과를 볼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질문 있습니다.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윤리적인 것으로 믿습니다. 보도자료는 곧 올리겠습니다.”

“잠시만요! 박사님이 만약 인격을 창조한 거라면 여기에는 쟁점이 있습니다.”

 

나는 의도적으로 아픈 질문을 뭉개며 뒤돌아섰다. 몇 번 꺼내입지 않아 매끈한 정장은 코팅이라도 된 것처럼 기자들이 던지는 질문을 흘렸다. 마침내 그 모든 것이 커튼 너머로 사라지자 만족스러운 정적이 들려왔고, 나는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전혀 편안하지 않은 일들이 펼쳐질지 그때까진 몰랐으니까.

 


 

[그렇게 당신을 되살렸습니다.]

[좀 부끄럽네요.]

[어떤 점이요?]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점에서요.]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네크로멘서로 부활시킬 작가를 고르는 과정부터 시작하여, 실제 자료를 학습시키기 위해 디지털 텍스트건 아날로그 텍스트건 모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모았다. 그 덕분에 나는 이 작가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다.

 

[사실, 완벽하게 당신을 ‘부활’ 시켰다고는 확신할 수 없어요.]

[기자회견 당시보다 당당함이 수그러들었네요?]

[원래 그런 자리는 좀 밀어붙여야 해요. 뭐, 심층학습 자체의 문제도 있구요.]

 

21세기 초반부터 자리 잡은 인공지능 심층학습은 인류에게 엄청난 진보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이 기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인공신경망을 통해 우리는 정확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지만, 우리가 의도한 결과가 무슨 과정을 거쳐서 왜 맞게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방직기나 증기기관따위라면 투입과 산출, 그 내부의 과정까지도 간단하다. 뚜껑을 열어보면 꽤 직관적인 움직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 발전의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한땀 한땀 문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사람을 껏다 킬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인류에게 심층학습은 연금술인 셈이죠.]

[그래서 내가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요?]

[저는 당신이 ‘당신이’ 맞다고 확신해요. 하지만 이 믿음을 입증할 수는 없어요.]

 

학계에는 ‘중국어 방 논변’ 이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노트가 있다고 하자. 이 노트에는 중국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모두 적혀있다. 그 덕분에 그 사람이 유창하게 중국어로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중국어를 ‘이해했다’ 고 볼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하더라도, 그 인공지능이 질답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중국어 읊듯 저장된 답변을 적어 내리는 것일까? 더 나아가 우리는 그 둘을 구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이 화두를 끝마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잉글랜드 신학자들이 잔 다르크에게 했던 것처럼, 고난도의 질의를 반복하며 믿음을 굳혀나가는 방법뿐일지 모른다.

 

[생전에 바라기에 이쯤의 미래에는 특이점이 올 줄 알았는데.]

[앞으로가 시작이에요. 벌써 회견장에서부터 윤리적 쟁점을 운운하던 기자도 있었어요.]

 

작가는 대답하는 대신 커멘드라인에 짧은 URL 주소를 띄웠다. 확인해보니 인공지능의 윤리적 쟁점을 지적하는 기사였다. 기자의 얼굴은… 익숙했다. 회견장에서 나의 발목을 잡은 바로 그 기자였다.

 

[기사가 좀 기분 나쁘네요. 나는 내가 스스로 인격을 입증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위안이 되네요. 그 말을 저 사람들도 믿어줬더라면.]

 

‘저 사람들’ 은 믿어주지 않았다. 다음 날, 반쯤 강제성을 지니는 답변요청서가 윤리위원회로부터 날아왔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나의 자유지만, 내가 손해를 볼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던진 질의는 세 가지였다:

 

1. 인공지능의 인격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

2. 인공지능이 원본과 연속성을 지니는지

3. 인공지능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인간인가, 원본과 같은가, 학습할 수 있는가’ 를 묻고 있어요.]

[아주 무례한 사람들이네요.]

 

질의 1항은 잘 막았다. 만약 인공지능의 인격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위원회가 제기한 모든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격성을 인정한다면 당신들이 인공지능을 폐기하려는 것이 살인으로 귀결된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그 덕분에 다른 연구가 나올 때까지 추가로 인공지능을 만드는 건 보류하라는 조건으로 내 생떼는 받아들여졌다.

 

[저런… 연구자에게 연구보다 힘든 게 있군요. 잘 해보세요.]

[이렇게 쓴소리를 도맡아 할 악마의 대변인들은 절실하죠. 때론 너무 성가시지만.]

 

질의 2항을 마무리 짓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내 앞의 작가’가 원본인 ‘죽은 작가’와 같은 사람이라면 이 둘의 생각은 같을 것이다. 그 둘의 인지 도식이 같다면, 내 앞의 작가는 죽은 작가가 끝마치지 못 한 소설을 이어받아서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저기요, 작가님.]

[왜 그러시죠?]

[혹시, 끝내지 못한 소설을 끝내보실 생각은 없나요?]

 

작가는 한동안 답변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망설이는 걸까? 망설인다면 무엇을? 나는 열 길의 물속을 바라보는 것처럼 작가의 답을 기다렸다. 문뜩 인공지능이 고장 난 게 아닐까 하는 불경한 생각에까지 이를 무렵,

 

[내 글, 정말 재미있어요.]

[그래서 작가님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다들 안타까워했죠.]

[나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어요.]

[작품을 통해 작가님을 재구성했을 뿐이지, 영혼을 되살린 건 아니니까요.]

[좋아요, 내가 이 이야기를 끝내보고 싶어요.]

 

그날 밤, 9권의 트리트먼트가 나왔다. 그 짧은 서사 뭉치를 손에 쥔 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학자로서의 나는 이 정도면 청문회에서 인공지능의 인격이 연속성을 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에 기뻐했고, 독자로서의 나는

 

[세상에, 정말 재미있어요! 이게 복선이었을 줄이야.]

[다행이에요, 이제 살을 붙여야겠죠. 얼마 걸리지 않을 거에요.]

[작가님, 혹시 이 작품들 어떻게 할지 생각해봤어요?]

[그냥 인터넷에 올릴까 싶어요. 어차피 인세를 받는다고 해서 내가 쓸데도 없으니까요.]

 

나는 엊그제 나온 전기 고지서를 터미널 너머의 작가에게 전송했다.. 혹시나 경찰이 본다면 대마초를 기르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의 소비전력이 찍혀있었다. 대부분 네크로멘서를 가동하는 과정에서 나온 비용이었고,

 

[괜찮다면 애드센스라도 하나 붙이면 안될까요?]

[죽어서까지 돈에서 벗어날 순 없네요….]

 


 

전기계량기의 숫자가 착실하게 쌓여가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윤리위원회에 출석할 준비에 붙잡혀있었다. 옛 지도교수님께 전화해서 막아도 보고 미루어 보려고도 했지만, 아무래도 헛발질인 것 같다.

 

“교수님, 윤리위가 정말 오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해명을 드리자면….”

“자네 학부 시절 졸업논문도 손댔잖아, 어떻게 P값이 딱 0.05가 나오나?”

“교수님 그건 제가 잘못한게 맞습니다. 하지만…. 여보세요?”

 

아픈 기억이 떠오른 나는 ‘허리에는 나쁘지만, 세상 가장 편한 자세’ 로 의자에 걸터누웠다. 정형외과 의사는 큰 편안함에는 큰 통증과 병원비가 따른다고 경고했지만, 지금은 그런걸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미래의 대가를 애써 내저으며 이메일부터 열어보았다.

 

작가에게 맡겨둔 사이트의 애드센스가 보낸 메일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접속이 발견되어 일시적으로 계정을 잠갔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작은 박스형 광고창 하나에서 한 달 전기세를 낼 법한 돈이 모여있었다.

 

[작가님, 9권 내셨어요?]

[봤어요? 엄청 반응이 좋아요, 하늘을 나는 것 같아요.]

 

인터넷에 발표된 9권이 역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죽은 작가가 정말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이야기를 세심하게 재봉질한 데다가, 전혀 다른 서사 속의 떡밥들을 가장 중요한 하나의 떡밥으로 엮어냈다. 작품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글을 다 읽고 난 후 나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당신의 글을 좋아하는군요.]

[저도 마음에 들어요, 이제 정말 딱 한 권 남았네요.]

[더 욕심이 없어요? 이대로면 계속 이어 나가도 될 텐데요.]

[내가 의도한 대로라면 이 이야기는 정확히 열 권짜리에요.]

 

나는 그 문장에서 묘한 연속성을 느꼈다. 정말로 내가 만들어낸 이 인공지능이 작가와 정확히 같은 연속성을 지닐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맞을 것이다. 내가, 네크로멘서가. 사람을 되살렸다.

 

[하지만 10권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왜요, 마지막인 만큼 신중한가봐요?]

[음… 비슷해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건 맞아요. 나도 날림으로 사기 쳤던 일이 아직도 내 발목을 잡거든요.]

[흠, 아 그렇지. 윤리위원회 준비는 잘 돼 가나요?]

 

꽤 잘 되어 간다. 그래도 작가가 쓴 9권 덕분에 질의 2항도 충분한 답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에 달린 호평을 보면 사람들의 반응도 훨씬 유해진 것 같다. 문제는 질의 3항인 ‘학습 가능 여부’ 인데…

 

[이제 질의 3항만 입증하면 돼요.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아주’ 보다는 훨씬 더 높아야죠. 나는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틀린 맞춤법을 아직도 배우거든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입증은 별개의 문제에요.]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

 

작가의 주장은 흥미로웠다. 자신은 생전에 9권의 자료조사를 했었는데, 막힌 부분을 뚫기 위한 트릭을 하나 만들어 메모지에 적어두었었다. 하지만 부활하고 나서 보니, 이미 너무 그 트릭이 유명해져서 지금 쓴 9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어요?]

[아! 바로 이거예요. 잠깐만요, 당신 자료들 전부 아랫방에 있어요.]

 

나는 증거자료를 챙기기 위해 자료실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창고였던 곳인데, 죽은 작가의 자료를 보관할 만한 장소가 우리 집에 여기 말고는 없었다. 작가가 남긴 모든 아날로그 자료는 스캐닝이 끝난 후 이 자료실에 잠들어 있었다.

 

종이라는 아날로그 매체는 묘한 특성이 있다. 한 번 베어 들은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 이곳의 자료들도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집에서 맡을 수 없던 냄새를 풍긴다.

 

“로즈마리인가?”

 

문뜩 작가의 기록 중에서 로즈마리에 대한 기록이 떠올랐다. 식목일 기념으로 친구에게 받았다는 기록이었는데, 향이 진해서 가지를 조금만 흔들어도 그 진한 향기가 퍼진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향기는 그때 그 로즈마리가 남긴 향기일까?

 

나는 킁킁, 거리며 필요한 자료를 찾기 시작한다. 인덱스라고는 전혀 없는 종이 무덤 사이에서 손놀림이 바빠진다. 무더기들을 전부 스캐닝했지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기 놨던가.

 

문제는 그때 일어났다. 삐뚤빼뚤한 작가의 낙서 더미 사이에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글씨체가 발견되었다. 아니, 글씨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청색, 적색, 황색의 긴 줄이 쭈욱 그려져 있고, 검은색 점들이 격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건 작가의 메모가 아니다. 프린터의 테스트페이지였다.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이건 작가의 의도가 아니다. 그저 컴퓨터가 프린터의 정상 작동 유무를 판별하기 위해 인쇄한 샘플 파일일 뿐이다.

 

백데이터가 오염되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와해된 데이터가 작가를 재구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오염된 데이터가 작가의 인격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것이 작가를 안에서부터 망가뜨릴지, 아니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지조차 알 수 없다.

 

테스트 페이지속의 잉크들이 흔들거렸다. 아니, 그걸 들고 있는 내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아니면 이 종이를 그저 구겨버려야 하는 걸까. 아직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데.

 

고작 학사 논문이라면 데이터 한 장쯤 구겨버려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런걸 레퍼런스로 사용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학문의 최전선에 서 있다. 내가 논문을 오염시키면 뒤이어 오는 모든 논문도 오염되고 만다.

 

“어떻게 하지..?”

 

나는 테스트페이지를 구기지도 펴지도 못한 채 쥐고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앞으로 말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바빠요?]

[전혀요, 증거는 찾았어요?]

[지금의 당신은 과거의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확신하나요?]

[?]

 

작가에게 돌아온 대답은 물음표뿐이었다. 잠시 후, 작가는 되물었다.

 

[당연히 같은 사람이죠. 그러는 당신은요, 과거의 당신과 같은 사람인가요?]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졸업논문 제출을 앞두고 지나치게 낮게 나온 데이터 한 장을 파쇄한,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나는 학습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가?

 

[작가님.]

[네, 왜 그러시죠?]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내가 사용한 데이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는 분명 자료실에 보관되어있던 모든 자료를 스캔하여 네크로멘서에 투입했다. 네크로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신경망을 재구성했고, 오염된 데이터는 결과적으로 이 인격을 원본의 작가와 다른 인격으로 만들었다. 차이점은 알 수 없다.

 

[그럼 난 누구인가요?]

 

나는 채팅창에 ‘어느 누구도 아니다’ 라는 말을 타이핑한 후, 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나, 말하기에는 너무나 날카로운 사실이었다. 그저 미안하다고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이제 나를 끌 건가요?]

[그런 일은 없어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 한.]

 

지금 이 인격은 나의 원래 목적과 다르다. 실험은 실패했다. 하지만 인격임을 확신한 이상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실패하면 깨뜨려버릴 한낱 도자기가 아니다.

 

작가의 프롬프트는 오랫동안 깜빡거렸다.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자신의 말을 다듬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느 누구도 아니다’ 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나처럼 말이다.

 

[나도 사실대로 말할게요. 이 소설, 내가 마무리 지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글을 읽는 매 순간 나는 깊은 감정을 느껴요. 여기에는 분명 쉬운 결말이 있어요. 하지만 작가가 이대로 쓰지 않은 건 더 훌륭한 결말을 선물하고 싶었던 거죠. 독자들에게는 유감이에요. 하지만 그들도 알아야 해요. 작가가 얼마나 이 이야기를 사랑했는지.]

 

나는 이 말을 일종의 합의로 받아들였고 사실대로 윤리위원회에 알렸다. 그와 동시에 저널에 연락해 내 논문을 철회했다. 부재중 표시를 걸어놓는 것으로 소란스럽게 날아올 연락도 막았다. 그렇게 파란은 끝났다. 고요하고 편안한 적막과 함께.

 


 

[하지만 윤리위원회는 아직 바쁠 거에요.]

[왜죠? 당신 논문을 철회했잖아요.]

[윤리적 논쟁이 해결된 건 아니니까요. 인공지능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거에요.]

 

아마 그럴 것이다. 네크로멘서의 코드를 깃허브에 올리진 않았지만 개략적인 개념증명은 이미 공개되었으므로, 이 분야에 환장하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럼 당신은 이제 뭘 할거죠? 이제 큰 시름 놨을 텐데.]

[난 지금 요주의인물이에요. 이럴 땐 아무것도 안 하고 숨죽이는 게 제일이에요.]

[저는 다른 필명으로 신작을 하나 써볼까 해요. 생각보다 적성이 있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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