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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터스텔라: 감상

2014.11.29 13:2511.29

0. 학생들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인터스텔라>를 보았다. 사이버 강의실에 감상문도 올렸는데 학생들 아무도 안 읽어준다. 그래서 슬퍼서 여기다가도 올린다.

(근데 여기도 독자분들이 많이 봐주시는 게시판은 아닌데 ㅠ)

 

<인터스텔라> 실망했다.

사실 실망할 것 같아서 안 보려고 했다 -_-

 

1.

인터스텔라_종합선물세트.jpg


무려 워너브러더스 공식 트위터에 올라온 홍보 이미지에 박힌 저 촌스러운 문구를 봤을 때부터 느낌이 쎄했다. 참고로 서울SF아카이브 박상준 대표님이 내가 알기로는 저런 진부하기 짝이 없는 평을 하실 분이 아니다. 트위터에 따르면 저 문제적 발언을 한 사람이 서울SF 아카이브 박상준 대표님이 아니고 포항공대 박상준 교수님(동명이인)이라는 주장도 떠돌던데, 공대 교수님이라고 해서 저런 진부한 발언을 자랑스럽게 하실 것이라는 판단 또한 편견이기는 하지만 어느 쪽이 됐든 두 박상준 선생님 중에서 한 분이 저 발언을 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니 언제 한 번 찾아뵙고 왜 그러셨냐고 차분히 긴 대화를 좀 해 봐야겠다.

 

2. 우리는 왜 융합을 해야 하는가. 과학을 하려면 과학을 하고 인문학을 하려면 인문학을 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원하면 감동적인 스토리를 쓰면 되지 왜, 어째서, 아무 거나 갖다가 아무 데서나 융합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융합'이 유행이라니까 개나 소나 융합 갖다붙여서 팔아먹으려 드는 데 신물이 난 건 둘째치고, 저 영화 어디에 인문학이 있다는 건지 나는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다. 민폐 여성 캐릭터가 뜬금없이 사랑의 힘을 외치면 그게 인문학인가. 인문학으로 박사학위 받고 인문학 해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내가 정말 진지하게 말하겠는데 나의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시나리오 쓰신 놀선생 형제가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도 공부하고 MIT에서 수업도 들으셨다던데, 아무리 그래도 '사랑 타령 쪼끔 해주면 되겠지' 정도로 인문학 깔보면 혼난다.

 

3. 나는 대학원 시절 6년을 미국 중서부의 옥수수밭으로 둘러싸인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옥수수밭이 몹시 반가웠다. 그 동네는 시내 중심가에 말을 태운 트럭이 흔하게 돌아다니고, 차 타고 십 분만 나가면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중학교 세계지리 시간에 교과서에서만 봤던 '사일로'가 점점이 지평선에 솟아 있는 곳이었다.

 

... 거기 살 때 말은 많이 봤는데 콤바인은 한 대도 못 봤다. 그나마 영화 속 동네보단 사정이 나았던 건가. 더 나빴던 건가.

어쨌든 옥수수밭은 다시 봐도 반갑다. 이거 하나만 좋았다. (아참 우주선 뽀사먹는 장면도 좋았다. 대규모로 뽀개는 거 좋아함.)

 

크리스토퍼 놀란이 옥수수밭 성애자로서 <맨 오브 스틸>에서 썼던 옥수수밭을 재활용했다는 루머를 본 적이 있는데 사실인지 모르겠다. 진짜로 옥수수밭을 그렇게 좋아하면 담번에는 내가 살던 동네 가서 옥수수밭 배경으로 찍어주면 좋겠다.

 

4.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아직 안 봤는데 앞으로 보실 예정이신 분들은 읽지 마시길.

 

 

 

 

(스포일러 방지를 위한 여백)

 

 

 

 

 

... 그러니까 딸한테 중요한 메세지를 전하려 했던 "유령"이 쿠퍼 자신이라는 사실을 블랙홀 진입하기 전에 이미 눈치채 버렸기 때문에, 이후의 스토리는 몹시 예측가능하게 전개되어 전혀 기대할 요소가 없었다. "그 놈이 그 놈이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찾는 그 놈이 바로 네놈 자신이었다"<메멘토> 때부터 놀란이 좋아하는 전개 방식인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주인공 본인이 돌아와서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는 수미쌍관식(?) 전개를 좋아해서 구상할 때 많이 생각해보기 때문에 눈치채기가 더 쉬웠던 면도 있다;;; 시간을 뒤튼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흥미롭고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에서 결국 주인공 자신이 원인이자 결과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다른 개인들과 그 개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이런 관점은 사실 위험하다.

 

너 자신이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주장이 먹히려면 창작자와 관객 양쪽에게 운명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혹은 그런 운명의 수렁이 작품의 주제이거나. <인터스텔라>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가 언제나 하던 방식, 편한 전개로 돌아왔을 뿐이다.

 

전혀 새로울 게 없는데, 항상 하던 걸 획기적이라고 생각하다니.

놀란 아저씨 늙었나.

 

4-1.

창작자가 같은 전개 방식이나 같은 주제에 '천착'하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천착은 한 가지 주제나 소재에 대한 여러 접근 방식과 여러 해석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며, 그 때문에 일관성 있지만 풍부한 작품 세계의 토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블랙홀 내부 장면은 특정한 전개방식에 대한 놀란의 천착 덕분인지 줄거리는 정확히 예측 가능하게 흘러갔으며, 그 예측가능성을 뒤덮어줄 만한 시각적 효과는 ... 실망스러웠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내가 생각하는 <인터스텔라> 최대의 패착이 이 블랙홀 내부 장면이다.

 

인간의 관념이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이해는커녕 인식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묘사하겠다는 야심은 존경할 만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각으로 인식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는 표현이 그 어떤 시각적 효과보다 더 무한히 풍성하고 다채로운 상상의 가능성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스텔라>는 영화이고, 영화는 시각예술이며, 그러므로 어찌 됐든 시각적 사실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놀란은 인간이 인식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무려 "사실적으로 묘사"하겠다는 모순된 시도를 한 것이다. 그리고 (조셉 브롯스키라는 이름의, 1987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시인의 주장에 따르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서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나오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새로운 것은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지각으로 인식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화면 위에 표현할 수도 없으며 사실적으로 묘사할 방법은 더더욱 없다. 그러므로 아예 시각적으로 혹은 감각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을 택했으면 좋았을 텐데, 놀란은 모든 장면들이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고 모든 떡밥이 설명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것 같다.

 

그래서 감독은 언제나 하던 대로 주인공 자신으로 돌아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즘 시대, 놀란 세대의 미국인들이 흔히 의존하는 기법인 주인공의 내면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주인공의 내면과 그가 세상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딸의 방에서 있었던 미스터리한 일들 등등은 관객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책장 이미지를 좀 왜곡시켜서 화면을 가득 채운 그 장면은 우주의 비밀, 인류를 구원할 수수께끼, "블랙홀 안의 진주"를 담은 장면으로서는...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이후는 더 실망스러웠다. 자고로 SF/판타지/무협영화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밝은 빛을 보거나 화면이 새하얗게 날아가버리면 그 순간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나는 이 부분 이야기 (혹은 화면 전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날려버리기로 했으니 각자 상상하시기 바랍니다"로 이해하면 된다. 물론 쿠퍼가 블랙홀에서 빠져 나온 이야기까지 일일이 채워 넣었으면 나는 지금 이 시간 이 감상문 못 쓰고 아직까지 극장에 앉아서 영화 언제 끝나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하얗게 날려주신 놀란 감독께 감사한다.

 

그러나 극중 브랜드 박사가 말했듯이, 시간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는 있어도 돌이킬 수는 없다.

잃어버린 나의 세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젠장 ㅠㅜ

 

5. 본의 아니게 하드SF’라는 것을 써야만 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여 양자역학에 대한 논문을 몇 편 읽은 적이 있다. 양자물리학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미천한 인문학 전공자의 관점에서도 논문에 묘사된 양자의 세계는 너무나 새롭고 그래서 찬란했다. 논문을 쓴 사람의 열정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어떤 시각적 효과도 글로 쓰인 언어가 불러 일으키는 상상의 가능성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그 어떤 다채롭고 화려한 상상이라도, 화면 위의 이미지로 굳어지는 순간 그 확정성의 한계 안에 고정된다. 머릿속의 상상은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모두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지만, 누군가 한 사람의 상상이 화면 위에 고정되면 그 백 명, 천 명의 관객이 다 똑같은 장면을 수동적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 6 5백만달러 들여 만들어서 전 세계적으로 2억달러 정도 벌어들인 영화보다,

"블랙홀 안에 있는 우주의 비밀, 그 어떤 인간도 본 적이 없으며 인간이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라는 한 줄의 문장이 내게는 훨씬 더 매혹적이다.

 

좀 더 오만하게 표현하자면, 놀선생이 1 6천달러 들여 만들어서 떠먹여주는 상상보다, 내가 내 머릿속으로 혼자서 하는 상상이 훨씬 더 즐겁다.

 

물론 인문학이 이래서 돈이 없다.

 

6. 옥수수를 심어서 식량난에 대비해야겠다.

 

7. 영화평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해서 학생들한테 미안하다.

 

8. <그래비티>가 최고다.

댓글 2
  • No Profile
    세뇰 14.12.03 23:25 댓글

    스티븐 킹의 <옥수수밭의 아이들> 좋습니다(뜬금 없다)

  • 세뇰님께
    글쓴이 정도경 14.12.04 13:14 댓글

    네 그래서 소설도 읽고 영화도 봤어요! (뜬금 없지만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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