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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상상력, 늪의 안개, 독을 내뿜는 이야기, 동화는 잔혹하고 그 분위기는 영화 <판의 미로>와 유사하다. <판의 미로>에서는 잔인한 계부와 어머니 사이에서 판이 주는 미션을 해내기 위해 오필리아가 고군분투한다. 그 미션이란 것은 위태하고, 시종일관 어둡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녀가 치뤄야 하는 고난과 고심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영화가 끝나도 그 느낌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이 책의 주인공인 데이빗도 마찬가지 고난을 겪는다. 엄마를 잃고, 다른 세계에 빠져 길을 잃고 무시무시한 경험을 한다. 그런 경험은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밑바닥의 경험과 닮아있다. 
이야기 구조는 <네버엔딩 스토리>나 <오즈의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길을 찾는 것이고,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또는 그렇게 생각되는) 왕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만나러 가는 여정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보통의 동화나 판타지와는 다르게 아름다운 부분은 없고 철저히 냉혹하다.
예를들면, 사냥꾼의 삽화에서 사슴 몸을 하고 얼굴은 소녀인 키메라가 나타난다. 사냥꾼은 가차없이 그 소녀의 목을 뎅강 베고, 자신의 포획물을 전시한다. 묶어 놓은 데이빗을 앞에 두고 사냥꾼은 말한다. 짐승은 지능이 없고, 사람은 영리하지만 나약하다고, 그래서 자신이 키메라를 만들어 냈다고 하면서 다음 사냥감으로 데이빗의 목을 잘라 여우에게 붙이겠다고 한다. 

"하지만 왜 꼭 아이들이어야 하죠?"
"어른들은 쉽게 절망하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몸과 새로운 삶에 쉽게 적응하거든. 한번쯤 짐승이 되는 꿈을 꿔보지 않은 애들이 어디 있어? 게다가 난 아이들을 사냥하는 게 좋아. 아이들을 사냥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고 또 아이들을 걸어놓는 게 훨씬 더 예쁘잖아?"

공포작가 존 코널리는 동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지만, 그 내용은 그의 본업에 걸맞게 어둡고 잔혹하다. 이 책에서처럼 삶이란 때론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일 때가 있다. 조력자가 사라지고 희망이란 멀리서 반짝이는 별빛처럼 까마득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은 발버둥치고 한발씩 전진해야 한다. 자신의 공포와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나름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것이다. 그런 현실이 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부모는 아이가 오래도록 동화 속에 살기를 바라지만 어떤 상황이나 순간이 오면 아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목숨을 뺏어서라도 앞으로 나가야 한다. 

피 묻은 천 조각을 들고 서서 르로이는 소년에 대한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라고 르로이는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겁에 질린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소년은 무장한 기사들조차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거뜬히 해치웠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 다음번에 쓸 때를 대비하여 칼을 닦아두는 치밀함이라니. 그런 아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다른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길은 결국 주인공이 성장하고 깨닫는 길밖에 없다. 어리고 나약했던 데이빗이 가혹한 시련을 견뎌내고 성장할 것인지 아니면 무너질 것인지? 어쩌면, 성장해도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어떻게 전개되든간에 데이빗이 희망을 잃고 멈추면 이야기는 끝나리라는 것,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다섯 개를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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