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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선비님과의 인터뷰



10월 21일 토요일 오후 5시. 추선비님이 산사춘과 함께 찾아왔다. 합평회를 추선비님과 루나벨님에게 떠맡기고 참석하지 못한 지 오래라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뵌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최근 야근으로 인해 바쁜 선비님을 불러놓고도 피폐하게 지내는지라 대접한 건 라면. 그래도 양파와 청량고추, 대파와 참치, 계란까지 들어간 호화판(?) 라면이었다.
나는 불은 라면을 좋아하기에 (꼬들꼬들한 면은 밀가루 맛이 너무 강하게 나 싫다.) 절대 라면을 끓이기 전 같이 먹을 사람에게 꼬들꼬들한 면과 불은 면 중 어느 걸 좋아하는지 묻지 않는다. 열에 아홉은 불은 걸 싫어하니까. 덕분에 시작부터 약간 불어있던 라면은 점점 우동면이 되어갔고, 그에 비례해 선비님의 젓가락질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죄책감을 느껴 사과와 키위를 갈고 꿀을 섞어 만든 키위소스를 뿌린 야채샐러드를 후식으로 내놨다. 음...;;;

추선비님의 글을 처음 본 건 2001년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의 소모임인 데카메론 프로젝트에서이다. 데카메론 프로젝트는 워터가이드의 선장님이기도 했던 crazyjam님이 창시한 단편 창작 소모임으로 매달 일정한 소재 혹은 문장을 정해 참여자들이 단편을 올리는 모임이었다. 규칙은 하나. 참여한 달부터 계산해서 글을 올리지 않은 달이 올린 달을 넘어가는 순간 잘린다.

인터뷰를 위해 확인해보니 선비님이 처음 올린 글은 “사람들은 길들여지는 것을 좋아하는군.” 이라는 문장미션이 있었던 여섯 번째 달이었다.



진아 : 어, 그거 제가 제안한 문장이었는데.
추선비 : 어머, 그랬어요?


우린 오랜만에 하이텔에 접속했다. 명령어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버벅이며 데카메론에 올라간 글들을 확인했다. 추선비님이 데카메론에 처음 올린 단편의 제목은 “석영”이지만 내가 추선비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단편은 “거북이와 화해하는 방법”이다. 친구가 떠맡긴 멀더라는 이름의 나중에 알고 보니 암컷인 거북이에게 어쩌다 밉보여 화창한 봄날 파리를 잡아주는 자취생의 처량한 심정을 그린 엽편이었다. 소품이었지만 심통 난 거북이의 모습과 한숨 푹푹 쉬는 화자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고 재미있어서 그 뒤 매달 추선비님의 단편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었다. 추선비님은 게시판에는 글을 남겼지만 대화방에 들어오지는 않았었는데 그 글을 읽은 지 얼마 후 들어온 추선비님에게 대뜸 “팬이에요!” 해버린 것도 기억한다. 추선비님은 기억하지 못했다. 쳇.

추선비 :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진아 : .... 본인 단편 이름도 기억 못했는데 오죽하시겠어요. 이해해요. (라고 말하지만 삐침 모드)
추선비 : 아하하하하;;;


질문을 하려는데 갑자기 멀더와 스컬리라는 이름의 거북이가 등장하던 단편의 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아 추선비님에게 묻자 추선비님은 약 3분간 방황하셨고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새롬 데이타맨에 접속해서 문제의 단편 제목을 찾아봤던 것이다. 그리고 위에 적은대로 기억나지 않는 명령어의 홍수 속에서 버벅이며 게시판을 찾고 단편을 검색했더랬다.

askalai님도 추선비님의 팬이었다. askalai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팬레터를 보낸 사람이 추선비님이었고, 추선비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팬레터도 asakalai님이 보낸 팬레터라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하이텔 데카메론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그 소모임은 내가 거울을 만들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를 준 곳이다. 매달 정해진 소재로 글을 써야 한다는 건 보통 내공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고, 덕분에 숨어있던 멋진 단편 작가들을 알게 해 주었었다.



진아 : 그런데 원래는 나우누리에서 활동하셨다면서요?
추선비 : 예. 나우누리에서 중편을 연재했었는데 어떤 분이 제 글을 하이텔에 퍼가도 되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앗, 그러고 보니 추선비님은 askalai님에게 받은 팬레터가 처음이자 마지막 팬레터가 아닌 건가.;;;


추선비 : 출처를 밝히면 퍼가도 좋다고 했어요. 그래서 하이텔에 놀러왔다가 분위기가 나우누리보다 저한테 더 맞는 것 같아서 눌러앉게 되었지요. 제목이 아마 "파라미스가 사는 법“이었을 거예요.
진아 : 아마? ...
추선비 : 아하하하하;;;;

진아 : 추선비님의 단편은 난해해요. 갈원경님께 축전으로 보내드렸던 ‘귀가’말이에요. 갈원경님이 서른 번을 읽었다고 한 단편...
추선비 : 쪽팔렸어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게 쓰나...;;;
진아 : 압축과 생략을 많이 하시니까요.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만♡


거울 합평회 때 추선비님 글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온 평이 ‘난해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소리를 듣다듣다 못한 추선비님은 18호에 “기만과 협잡의 혼례”라는 단편을 주셨다. 추선비님 단편 중 그 때 까지 올라온 것 중에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단편이었다. 하지만 결국 쓰고 싶은 대로 안 쓰니까 재미가 없다면서 원래 스타일로 돌아갔다.


추선비 : “기만과 협잡의 혼례”는 단순하게 아무 생각 없이 썼었어요.
진아 : 다른 글에 비하면 쉬운 편이지만 사실 독자에게 친절한 글은 아니에요.
추선비 : 음......
진아 : 합평회 때 객원으로 참석하셨던 SH님이 독자들은 떠먹여 주는 걸 좋아한다, 고 하셨잖아요, 왜.
추선비 : 네. 밥상을 차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떠먹여 줘야한다, 고 하셨죠.
진아 : 그 때 꽤 열띤 토론이 벌어졌었는데 그런 건 싫다, 고 하셨더랬죠. (추선비님이 할 이야기를 기다리며 물끄러미)
추선비 : 제가 그랬나요?
진아 : ...... 저기요;;;;;;


심호흡을 하고. ...


진아 : 전 개인적으로 "Love affair"(21호)가 제일 난해했어요. 2005 중단편선에는 “사랑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셨죠.
추선비 : 그게 제일 난해했어요? 왜요?
진아 : 음... (잠시 고민)
추선비 : 기획란에 이리스님이 올리신 "사랑의 기쁨“에 대한 평에서 적어도 하나는 이해받았다고 생각했어요. ‘나’라는 화자가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걸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화자가 작가인거죠. 자기가 직접 하나의 이야기를 남기는 거요. 자기를 남기기 위한 방법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거죠.
진아 : 내용면에서 그래서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지 알기 어려웠어요.
추선비 : 억압적인 도시의 체제 안에서 순응하면서 살면서도 도시 밖 황무지의 일을 쓰고 싶어 하는 거죠.
진아 : 도시와 황무지에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가 명확하게 그려졌어야 여자의 방황과 선택에 대해 공감을 하든 이해를 하든 비판을 하든 할 수 있었을 텐데 글 속에서 그려진 게 너무 적었어요.
추선비 : 제 글을 좋아하는 분들은 머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코드가 맞거나 공감하는 분들인 것 같아요. 전 논리 순서대로 글을 쓰지 않거든요.

진아 : 영향 받은 작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나요?
추선비 : 보르헤스요.
진아 : 헤에? 의왼데요. 별로 안 닮았는데...
추선비 : 중학교 때 도서관에 박혀 살 때 발견해서 읽고 충격 받았었어요. 판타지를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때라.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이런 식으로도 가능하구나, 라는 면에서요.
진아 : “오래된 사람”이라거나 “수명의 끝”, “연장의 끝” 같은 단편들이 있었죠.
추선비 : “연장의 끝”과 “오래된 사람”은 시간의 잔상에는 안 올렸죠. 합평회에만 들고 갔었고. 음... 현실에 다른 설정을 끼워 넣는 걸 좋아해요.


추선비님은 내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술병은 반이 넘게 사라졌는데 추선비님은 여전히 한 잔을 가지고 버티고 있었다.


진아 : 처음엔 진짜 술 잘 드시는 줄 알았어요.
추선비 : 아하하;; 제가 그런 걸 좀 잘 해요.;;;
진아 : 이젠 안 속아요.
추선비 : 아직도 속으시면 안되죠!
진아 : .......... 쳇. 도대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속이신 거예요!


추선비님을 만나면 자주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추선비님은 늘 오늘은 몸이 안좋다, 라거나 어제 너무 많이 마셨다라거나 매번 다른 핑계로 교묘하게 한 잔으로 버티곤 했다.


추선비 : 회식을 워낙 자주하던 회사에 다니다보니 몸에 밴 습관이에요. ^^;;


잠시 술에 얽힌 잡담을 나누다가 본론으로 돌아갔다.


진아 : 음...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워낙 안 좋게도 많이 쓰이긴 하는데... 너무 전투적으로 보이거나 시끄러운 아줌마 취급하거나... 안타깝게도 달리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안나네요. 여성주의랄까 추선비님 글에서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기만과 협잡의 혼례”에서도 얼결에 하룻밤을 보낸 두 남녀가 양가에 걸리고 문제가 커지자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 고 나서는 쪽은 여자 캐릭터고요. “옛날옛날옛날에”에서도 여자 캐릭터가 구원자로 나오죠.
추선비 : 음... 그건 제 가치관이 글에 묻어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죠. 인간으로서의 저와 여자로서의 저를 명확히 구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25년간 개인이자 여자로 살아왔고, 제가 여자라는 게 제 삶에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거든요. 결혼, 직업, 글 모든 것에서요.


참고로 추선비님은 미혼입니다. ^_^


추선비 : 무언가를 선택할 때도 제가 여자라는 게 중요하게 작용해왔고, 그렇게 제 삶의 경험이 제 가치관에 반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게 글에서도 보이는 거겠죠. 직접 경험만이 아니라 간접경험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그래서 제 글은 남자들이 보기엔 껄끄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글 자체의 완성도 문제일 수도 있지만요. (웃음)

진아 : 추선비님 글 중에서 선비님이 제일 좋아하는 글은 뭐예요?
추선비 : 없어요. 다 쓰고 나면 잊어요.
진아 : 그러신 것 같아요(...)
추선비 : 아하하하하하;;;
추선비 : 대신 앞으로 써야 할 글이 머리를 꽉 채워요.
진아 : 말씀하신 김에 글 좀 쓰세욧! 요즘 시간의 잔상에 글 너무 없어욧!
추선비 : 아하하하하하;;;

진아 : 거울에 올라온 글 중 좋아하는 작가라면요?
추선비 : 역시 배명훈님이죠. 새로운 시도들이 너무 좋아요. askalai님이 신작 안 쓰시는 것도 슬프고요.
진아 : 좋아하는 작품은요?
추선비 : 배명훈님의 “다이어트”. 상황의 조화랄까,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뛰어가는 거라거나. 취향에도 맞고요♡ “이웃집 신화”도 재밌었어요♡♡ 번역 쪽에 올라온 코니 윌리스의 “여왕 조차도”도 멋졌고요.
진아 : 아... 그거 죽음이었죠...ㅠㅠ
추선비 : askalai님의 “쓰레기나라의 왕”, 은림님의 “낙오자”, jxk160님의 “밤 너머에” ida님의 “회색 도시”도 좋아요.


물론 추선비님이 저렇게 친절하게 작품 앞에 작가 이름을 다 나열하진 않았다. 인터뷰를 정리하는 와중에 본의 아니게 나나 추선비님이나 하지 않았던 설명적인 문장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 인터뷰 정리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다 넣을 수 없어 거르고,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 표현들을 정리했다. 정리되지 못한 이야기들, 선비님과 눈빛만으로 서로 아, 하며 공감한 이야기들은 모두 내 것. 인터뷰를 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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