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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 New Order

2012.03.26 02:5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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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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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꿈이다.
그럴 수밖에 없. 현실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이 없다.
'제희'도 알고 있다.
몇 층인지 모를, 끝없이 이어지는 많은 층위로 이루어진 누각이 은은한 푸른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누각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것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고 있다.
이것은 꿈이다. 몸이 자유롭다.
천천히 누각에 다가간다. 누각의 모습이 눈 앞에서 일렁인다. 순간 흐트러지
다가 다시 모였다가를 반복하며 누각은 점점 더 크게 보인다. 점점 다가갈
수록 은은한 푸른 광채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빛이 선명해질 수록 마음은 편해져 간다.
어디서 둔탁한 타악기 소리 같은 것이 느린 박자로 크게 울리며 들려온다.
점점 더 마음이 편해진다.
이것은 꿈이다.

핸드폰 소리에 깨어져 흩어지는 나약한 꿈이다.
손을 머리 맡에 뻗어 벨소리를 크게 지르고 있는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네...과장님.」
「제희씨, 어딘가?」
「...죄송합니다.」
「젊은 친구가, 이 바쁜 철에 정신 바짝 차려야지.
   됐고, 받아적어.」
「네...뭘요?」
「나 시간 없다. 오늘 처리하기로 한 일 말야.
  주소를 알아야 갈 거 아냐. 받아적어.」
「잠시만요....」

제희는 슬슬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새로 처방받은 수면제는 잠들 때
효과는 좋은 것 같은데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지고 꿈은 여전히 꾼다.
몸에 안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일단 성질 급한 장 과장이 소리 지르기
전에 펜을 찾으려 했다.

「야, 됐다 됐어.
  문자로 보낼 게.」

장 과장의 길게 뿜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출근하지 말고 바로 거기로 가.」
「...저 혼자 갑니까?」
「어쩌겠냐. 체면 안 서는 일이라 다들 몸 사리고
   나는 바쁜데. 욕봐라.」

이런 잡일이나 하려고 신당 창당新黨 創黨의 기치를
올린 게 아닌데...자신이 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제희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시간은 일주일 전으로 올라간다.
제희이 속한 '새생각통합당'의 김영준 대표와 참모진은 전국 15지역의 후보
공천하기로 정하고 언론 발표를 준비 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연락이 왔다. 서울 서남부를 지역 기반으로 새로 출범하려는
정당인데 선거 연대하자는 것이었다. 굉장히 긴 이름의 정당이었다.  
한 3일 전까지는 새상각통합당 참모진 내부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그들이 어떤 사이비 종교와 연관
된 것 같다는 것이다. 총리 출신 김영준 대표의 '건전한 보수'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참모들은 만류했다. 게다가 같은 신생 정당이면서 공천
이나 선거 운동에 무리한 요구가 많았다. 결국 연대를 거절하기로 했다.
그래서 거절의 뜻을 정중히 전해야겠는데, 언론 발표를 하기 전에 누군가가
직접 가서 구두로 먼저 뜻을 전달하는 것이 도의상 옳다고 방침이 정해졌다.
김영준 대표의 젠틀맨 정치 방침을 위해서도 그 편이 좋다.
거기까지는
제희도 수긍했다.
물론 대표급도 아니고, 수행비서급도 아니고, 정책위원급도 아니고, 최소한
행정과장급도 아닌 제희이 방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은 수긍할 수 없었다.
2명도 아니고 1명 딸랑 가서 통보하는 게 어딜 봐서 젠틀맨. 하지만 가야지
어쩌겠는가. 까마득한 대학교 선배 장 과장님이 부탁하는데.
문자로 온 주소를 읽었다. 이 주소면 아마 근처에 괜찮은 칼국수집 있을 거
다. 얼굴 붉힐 이야기는 빨리 끝내고 나와서 점심이나 먹자고 생각했다.

제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꿈을 꾸는 날은 몸이
더 무겁고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점점 더 꿈을 자주 꾼다.

*

4층 건물이었다.
제희는 문자로 온 주소를 확인하고 다시 건물을 올려보았다. 4층부터 2층
까지 내려온 파란 현수막이 건물 한 켠의 창문을 다 가리고 있었다.
건물 1층의 중국집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제희는 건물이 정말 낡았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비릿한 냄새도 났다. 생선비린내 같기도 하고
장마철에 나는 비린내 같기도 한, 어쩌면 그 두 가지가 섞인 그런 냄새였다.
3층의 문이 열리자 한의원 간판이 먼저 보였다. 유리로 된 현관에는 임대
문의라고 적힌 흰 종이가 쓸쓸히 붙어 있었다. 핸드폰을 켜 주소를 다시
확인한 제희는 왼쪽으로 꺾었다.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는 형광등을 따라
복도 끝에 걸어가니 굳게 닫힌 철문이 보였다.
철문에는 투박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신자유미래전진연대'.
제희는 생각했다. 당명만 봐서는 보수인지 진보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철문 옆에 놓인 화환에 적힌 문구를 힐끗 보았다.
'창당을 축하합니다. 새생각통합당 대표 김영준'.
제희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화환을 소심하게 두어번 걷어찼다.
구당舊黨시절부터 보조관에 행정에 뒤치닥만 했는데
뒷번호 비례대표 공천 한 자리 안 해주고 심부름꾼으로만 쓰는 그 심보가
쓰다. 제희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철문 옆 초인종을 눌렀다.

이제 들어가서
새생각통합당에서 왔습니다. 전해드릴 말이 있어서요.
이미 들은 말이 있으셔서 아시겠지만 우리 당하고 귀중하고는 이념이나 방향
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선거 연대를 하거나 통합
선(거)대(책)위(원회)는 못 이룰 것 같습니다. 우리 대표님이 이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은데 일정 때문에 직접 못 오신다고 부득이한 결례에 대해
양해 부탁드린다고....

어떻게 말해도 가오는 안 잡힌다. 대충 슬슬 중언부언 늘어놓고 나와야겠다.
분명 간단한 일이다.

...간단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무실 안 소파에 앉은 지금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사무실 안은 넓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소파가 놓인
자리와 작은 탕비실, 사무실 한 구석에 열을 정확히 맞춰 놓인 화환들. 창문
이 현수막에 가려져서 그런지 약간 어둡다는 걸 빼면 나쁘지 않은 사무실
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습해서 눅눅한 기분이 들었다. 건물 아래에서 부터
느꼈던 비릿한 냄새는 이 사무실이 진원지였던 것 같다. 마치 생선 가게처럼
진한 물비린내를 계속 맡다보니 이제는 후각이 마비됐는지 약하게 느껴졌다.

녹색 곰팡이로 절반은 뒤덮인 소파는 너무도 푹신해서 몸이 반쯤 잠겨드는
기분이 느껴졌다. 바로 앞에 놓인 탁자에는 깨끗하게 닦인 재떨이와 각종
일간지, 주간지, 맥심이 차곡차곡 열을 맞춰 놓여 있었다. 너무 정돈된 모습
이 마치 한 번도 안 본, 데코레이션 같았다.
제희는 탁상을 두고 마주 앉은 두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
이제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가만 보자...바로 앞에 앉은 이 분 성함이
'고라논'씨. 옆에 앉은 분이 '안돌부'씨랬지. 제희가 이렇게 두 사람의 이름
을 다시 곱씹는 이유는 둘이 너무 닮아서 쌍동이 같았기 때문이다.
제희는 왼쪽을 보았다. 상석 소파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
꽤 높은 책상 위에는 명패가 제희의 시선에 딱 맞게 놓여 있었다.
눈높이가 맞는 명패에 적힌 초서체 한자를 어떻게 읽으면 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책상 너머에서 얼굴이 하나 불쑥 제희를 내려보아서 무의식적으로
놀랐다. 아까 방에 들어오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준 '오란수'씨였다.

「서제희씨....
  담배 피시겠소?」

의자에 앉은 채 상체만 숙여서 내려보는 건가? 어떻게 저런 자세로 사람을
보지? 50대에 저렇게 숙이면 허리 아플 것 같은데? 등등 의문이 드는 가운데
제희는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혹시 우리 전에 본 적이 있던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얼굴, 낯이 익어서 말이오.
  ...아, 이제 찾았네. 여ㄱㅣㅆ소. 내 명함.」

책상에 앉은 남자는 팔만 길게 뻗어 명함을 주었다. 책상 아래에서 명함을
받아들고 있으니 조선 시대 임금에게 교지라도 내려받는 신하처럼 뭔가 하대
받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명함을 받을 때 살짝 닿은 손가락 끝의 촉감이 기분 나빴다. 사람
피부가 아닌 것 같은 어떤 이질감. 무엇인지 단번에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디
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불쾌한 느낌이다. 뭐였지....
제희는 회색 바탕에 흰 글씨로 써진 명함을 힐끔 보았다.
'신자유미래전진연대 당대표 겸 서울시당 창당위원장 오란수'

「여기 담배.
  가족이 어떻게 되시오?」

오란수는 다시 손을 뻗어 담배를 내밀었다. 방금 담배 안 피겠다고 말한 건
듣지 않은 건가? 이 사람들 정말...제희는 자기 딴에 최대한 정중하게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맞은 편에 앉아서, 눈도 한 번 안 깜빡이고 자신을 보고 있던 남자가 처음
으로 말했다. 저 분 성함이...그래, '고라논'씨. 고라논은 제희가 뭐라 말하
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여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걸까? 제희는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탕비실 쪽을 곁눈질했다.

「특별히 좋은 커피를 내려드리죠.」
「하하, 그러실 필요는.」
「아, 물이....」

정수기 위에 놓인 빈 물통을 흔들어본 고라논은 옆에 있는 창고 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 제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뻔 했다. 고라논이 팔을
늘어뜨려 네 발로 걷는 것이다. 기괴하면서도, 또한 굉장히 자연스럽게
네 발로 걸은 고라논은 새 물통을 집더니 다시 두 발로 걸어서 정수기로
돌아갔다.
잠시 당황한 채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던 제희는 오란수가 아직 책상 너머
에서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자세를 고쳐 앉고 헛기침하는 제희를 보며 오란수는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다고요?」
「네...그러니까....」

제희는 이제 아까 준비한대로 말하려고 했다. 침착하고 정중하게. 나는 지금
한 당의 대표 자격으로 와 있다. 비록 신당이지만 15석 확보를 목표로 하는
야당의 대표를 대리하는 자격이다. 품위가 있게.... 하지만 오란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생각이 뒤엉켜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 저희 당에서는...서로 연합 못 한다고 전하라셨습니다.」

말을 겨우 토해놓고 제희는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집에서 부터 준비
한 미사여구들은 송두리째 날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무례함이라니.
무슨 도전장이라도 던지듯이 말한 자신에게 속으로 '자네 왜 그랬나?'라고
물으며 오란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 말을 듣고 오란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어떤 점 때문에 연합을 못한다는 겁니까?」

오란수는 약간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란수의 지나치게 넓은 미간과 미묘
하게 연초록빛 광택이 나는 얼굴을 보며 제희는 어서 지금이라도 미사여구를
동원해 정중하게 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가 가진 이념이나 사상의 차이가....」
「우리 당의 이념이 김영준 대표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보기에 함께 하자고
  한 것입니다만. 우리도 면밀히 검토했니다. 우리에게는 행정전문가도
  많고 원로정치인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있는 정당 가운데 가장 우리와
  생각이 맞고 미래 가능성이 있는 귀당에 손을 내민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잘못된 부분은 있을 수 없어요.」

오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는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도 정치 활동 중이오.
  뉴질랜드나 네덜란드, 볼리비아에서는 이미 국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고
  곧 미국에서도 창당 승인이 날 것이오.」

말을 듣고보니 기독교당이나 국제공산당처럼 어떤 연맹의 지부같은 곳인가
보다. 하지만 그래봤자 한국에서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정당이다. 이 당하고
협력하지 않는다고 제희가 속한 새생각통합당과 김영준 대표로서는 아무 문제
없다.

「커피 드시죠.」

탁자 위에 커피가 놓였다. 서둘러 건성으로 고라논에게 인사했다. 고라논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깜빡임은 커녕 눈주름조차 움직임이 없었다.
그제야 제희는 오란수도 고라논도 안돌부도, 모두 지금까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것에 놀란 제희는 순간적으로 또 오란수에게 할 말을 잃었다.

「우리 당 조직이 작아보여서 무시하는 거요?」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약간 모욕적이군요. 몇 년 안에 우리가 여당이 될 것이오.
   김영준 대표가 우리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될 텐데.
   제희씨, 가족이 어떻게 되시오? 아버지는 계시오?」

흥분한 상태로 말하다가 갑자기 가족 사항을 물어보는 오란수의 목소리는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협조하지 않으면 가족을 어떻게 하겠다는 듯한.
질 나쁜 사람들과 얽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면서 제희는 대답했다.

「아버지는 고향에 잘 계십니다.」
「어머니는?」
「...잘 계십니다.」

오란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책상 너머 의자에 앉았다. 제희는 7살 때
가출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초면의 사람 앞에서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제희씨.」
  「네?」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슨 말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 말이오.
   언제나 평화롭게, 다툼없이.
   평온한 곳에서, 온 가족이 말이오.」

역시 사이비 종교 단체와 연관된 것 같다...제희는 직감으로 느끼며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쎄요. 저는 지금처럼 사는 편이 좋습니다.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뭔가...열정?
  그렇게? 평화랑은 약간 멀죠.」

제희의 대답에 오란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 평화롭지 못한 정치를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나선 것이오.
  그리고 그 미래를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었소.」
「커피 드시죠.」

고라논이 말했다. 왜 하필 꼭 이 순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제희로서는
이게 의도된 행동인지 아닌지 당황스러웠다.

「식으면 그 향취를 느낄 수 없죠.」
  정수기 물을 쓰기는 했지만 핸드드립입니다.
  울타르에서 재배되는 원두를 썼습니다.」

고라논의 이어지는 말에 제희는 다시 커피를 내려보았다. 자판기 커피든
스○벅스 커피든 맛의 차이를 모르는 제희로서는 별 상관없는 문제였지만
왠지 지금 고라논과 안돌부의 표정을 보니 한 모금 마셔야 할 것 같은 의무
감이 느껴졌다.
꽤 고풍스러운 무늬가 있는 커피 잔과 받침이었다. 커피 잔을 들고 보니
커피는 칠흑처럼 검으면서도 왠지 보라빛이 감돌았다. 그런데 울타르는 어디
있는 동네지...제희는 생각하며 한 모금을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제희는 약간 어조를 높여
말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우리 당 내부에서도 많은 고심과 토의 끝에
   결정한 입장입니다. 제가 결례 되게 말씀드렸지만 그 본의는
   알아주시고 부디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제희 씨, 결혼했소?」
「...아직입니다.」
「다음에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군. 연락드리겠소.」

오란수의 말에 제희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어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
했다.

「커피 드시죠.」

커피! 젠장맞을 커피! 제희는 어서 잔에 들어있는 커피를 다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커피가 뜨거워서 빨리 마실 수 없었다.

「제희 씨는 어떤 종교를 믿으시오?」
「안 믿습니다. 아무 것도.」
「무신론자요? 아니면 믿을 만한 신이 그 동안 없었던 거요?」

오란수의 질문에 잠깐 입술을 구기고 생각하던 제희는 말했다.

「혹시...이...신자유미래전진연대는...
   뭔가 종교와 연관 같은 게 있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당원 가입 요건에 특정 종교만 받는다거나
   특정 종교 단체와 관련되어 있다거나. 지원을 받는다거나.」
「특별히 그런 것은 없소.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정당에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오.」

오란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당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설마 그런 것 때문에 연대를 못하겠다는 것이오?」

오란수의 질문을 들은 제희는 정곡을 찔린 듯해서 짐짓 능청을 떨었다.

「글쎄요. 제 개인 호기심으로 여쭤본 것 뿐입니다.」
「여기 와서 어떤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차별을 한다는
   뉘앙스를 느꼈소?」
「그건 아닙니다.」

오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당원 대부분이 가입하고 나면
   일정한 하나의 대상을 따르기는 하오.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근원을 알게 되면 당연한 일이지.
   마치 바닷거북이 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가진...숭배심은 종교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소.
   그것은 상징적인 신념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구체화하여 믿는 것 뿐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것은 근원 그 자체.
   그 자체로 우리의 역사이자 세상의 모든 것이오.
   여길 보시오. 일어나서요. 어서.」

오란수의 재촉에 제희는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오란수는
몸을 뒤로 슬쩍 눕히며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현수막으로 가려서 어두운 줄 알았던 창문 앞에 검은 현무암으로 된 어떤
조각상 같은 것이 놓여 있다는 걸 제희는 이제야 알았다. 아까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있었겠지만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고기의 머리에 근육질의 인간을 닮은 몸, 그리고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수 많은 촉수가 달린 형태가 부조된 그 조각상은 크기가 별로 크지 않았지만
볼수록 기괴했다.

「저게 말씀하신 그...근원입니까?」
「이왕이면 저게라고 부르기보다는 '다곤'이라고 지칭해주면 좋겠습니다만.」

종교 단체 맞잖아...라고 제희는 생각했다.

「다곤 신과, 얀스레이의 깊은 심연 속 우리의 역사에 대해
   말해드리려면 오늘 하루로 부족할 거요.
   인간 세상의 시계는 너무 빨리 돌아가서 아직 적응이
   잘 안 됩니다. 그래도 한 번 들어보면 제희씨도....」
「다음에 듣죠. 저도 사무실에 들어가야 되어서요.」

그 말에 지금까지 과묵하게 앉아있던 안돌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데 결코 아깝지 않은 시간일 겁니다.
   심연의 존재에 대해 이해하면 지금 그 혼란이 잊혀지고
   평정심을 찾을 것입니다.」

안돌부의 말에 답하려던 제희는 순간 조각상을 다시 보았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순간 제희는 소름이 돋았다.
조각상의 입 부분.
그것이 움직여 마치 조각상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속삭인 것 같았다.
눈 앞의 풍경이 갑자기 일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우리 정당에 오면 훌륭한 일원이 될 수 있소.
   나는 왠지 당신에게...친근감이 드는 군요.
   마치 연결된 것 같은...연대감 말이요....」

오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끈적이는 어조라서 평소라면 몸서리
쳤겠지만 지금 제희는 지금 그 말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눈 앞이 일렁
여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때 오란수의 손이 느껴졌다. 제희의 손을
억지로 잡고 악수했다.
  
「피곤해보이는 군요. 김 대표님의 입장은 들었으니
   이만 가셔도 됩니다.
   또 봅시다.」

철문이 등 뒤에서 닫히고 나서야 제희는 겨우 숨을 토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오란수의 손이 닿는 느낌이 무엇인지 기억
났다. 어린 시절 손으로 집어먹던 산낙지의 감촉이다.
7살 이후로 손도 대지 않은 그....

*

꿈이다.
몇 층인지 모를, 끝없이 이어지는 많은 층위로 이루어진 누각이 은은한 푸른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누각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것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고 있다.
천천히 누각에 다가간다. 누각의 모습이 일렁인다. 순간 흐트러지다가 다시
모였다가를 반복하며 누각은 점점 더 크게 보인다.
왜 누각의 모습이 이렇게 일렁이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여기는 지금 물 속이다.
염분을 머금은 물의 맛과 약간의 비릿한 내음이 이제는 느껴졌다.
그렇다고 누각에 다가가는 것을 늦추지는 않았다.
점점 다가갈 수록 은은한 푸른 광채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빛이 선명해질 수록 마음이 편해졌다.
그 빛에 휘감기고 싶었다.
다가가려 할 때, 전화 벨소리가 들려왔다.

「오란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잘 지냅니다.」
「그래요?」

오란수의 말에 제희는 한숨이 나왔다.
신자유미래전진연대에 선거 연대 거절 통보를 한 그 날 저녁,
새생각통합당의 김영준 대표의 총리 시절 비리가 폭로되었다. 그와 함께
예비 후보들이 줄줄이 탈당을 했다. 건강 문제, 갑작스러운 해외 연수,
당 이념과의 차이 등등 이유도 많았다.
그리고 그 중 절반은 신자유미래전진연대로 옮겨 갔다. 언론에서도 단신으로
처리되는 군소정당의 사건으로 잊혀지고 있는 가운데, 새생각통합당은
말 그대로 이름만 있는 당이 되었다. 어제 김영준 대표가 불출마 선언과
함께 탈당했으니 오늘 출근하면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수행비서가 한 명 필요한데,
  제희 씨와 함께 했으면 하오.」
「저는 새생각통합당 사람입니다.」
「거기는 곧 없어질 테니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이번 우리 전국당 창당 대회에 와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요.」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그리고...혹시 송모란씨를 아시오?」

제희는 순간 숨이 멎을 뻔 했다. 그 이름을 이 사람이 어떻게 아는 거지?

「...아니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창당 대회 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둘러 전화를 끊은 제희는 몸을 일으켰다.
그 이름을...오란수가 어떻게 알지?
컴퓨터를 켠 제희는 신자유미래전진연대의 홈페이지를 열었다. 메인으로
ㅊㅏㄷ당 대회 배너가 나왔다. 새생각통합당도 해보지 못한 전국당 창당대회
라니. 부러움과 약오른 기분이 들었다.
여의도 한강 고수부지, 토요일 오후 5시에 전국당 창당 대회라. 내일 모레다.
창당대회 페이지 아래 적힌 무수한 후원기업과 후원단체와 후원인사 이름은
이런 군소정당에 이 정도나 모일 수 있나 싶은 수준이었다. 제 1야당도
이 만큼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예비 후보는 새생각통합당에 있던 사람, 재야 진보 인사, 해외 유수 대학
교수 등 명사가 포진해 있었다.
그 명사들을 살펴보고 있던 제희는 다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前 E.A.P 조선 이사 오란수
E.A.P 조선 여성노조 대표 송모란
前 국토해양부 차관보 김무한
아캄 대학 경제학과 교수 동위지

송모란. 얼굴을 보니 또 다시 숨이 막혀 왔다.
7살 때 같이 바닷가에 가자고 한 뒤 구두 한 켤레 벗어놓고 사라진....

「어머니.」

제희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송모란의 사진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모니터를 끄고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오란수, 송모란, 김무한, 동위지.
이 네 사람은 아무리 봐도 서로 닮았다. 미간이 넓고 눈이 꿈벅이지 않는다.
쌍둥이처럼. 고라논과 안돌부도 그랬다.
제희는 왠지 떨림을 느꼈다. 갑자기 지끈거리는 두통에 참을 수 없어진 제희
는 모니터를 황급히 껐다.

*

누각에 거의 접근했다.
은은한 푸른 빛은 선명해질 수록 아름다웠다. 가까이 가니 바늘 모양의 산호
가 십자형으로 자라 있는 정원도 눈에 띄었다.
그 정원 옆, 계단의 난간을 잡고 서 있는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다가가자 반갑게 맞이했다.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은 알았다.
일렁거리는 물의 흐름에 따라 모습이 아주 약간씩 바뀌면서 그는 이야기했다.
칭찬하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를 찾기 위해 진실의 왕국으로 스스로 들어설 용기를 낸 것에
대해.
은은한 푸른 광채가 주위를 돌고 있었다.
제희의 마음이 편해졌다.
그 빛에 휘감기고 싶었다.

눈이 떠졌다.
지하철 안이다. 옆 자리에 앉은 아가씨가 흘끔 째려보았다.
제희는 짐짓 태연한 척 했다.
다음 역이 여의나루다.
역에서 내린 제희는 출구를 찾아 올라가다가 광고판 옆의 대형 거울 앞에
멈춰섰다. 햇빛을 한 동안 안 받아서 희멀건했다. 아버지는 제희의 얼굴이
어머니와 닮은 구석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고는 했다. 지금 거울을 보고
있으니 스스로도 그랬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재킷 속에 숨겨둔 물건이
드러나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여의나루 역을 나오자 벌써부터 들리는 첼로 소리는 처량했다.
얼마 전 복원된 첼리스트 겸 작곡가 에리히 짠느의 무반주 첼로 연주곡인 것
은 제희도 알고 있다. 너무 처량하고 시끄러워서 이런 행사에서 어울리는
곡이라고 전혀 생각해본 적 없기에 신선함마저 느껴졌다. 누군지 선곡하는
센스가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제희는 걸음을 옮겼다.

강변에서 당원 깃발을 흔들거나 정당 로고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만 명은
넘어보였다. 그 인파 뒤로 한강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이 인원을 여기에 모을 정도의 정당이 되었다. 자신이 있던 정당과 불과
한 달 차이로 역전되었다는 생각에 제희의 입맛이 썼다.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 연단에는 예전 9시 뉴스에서 자주 보던 앵커가 서 있었다. 도지사
선거에서 비리로 떨어진 뒤 유학 갔다더니 이 당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대변인이 말을 시작했다. 넓게 소리가 울리는 마이크를 사용해서
그런지 몰라도 말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옛날 기억하던 그 목소리
가 아니었다. 그 역시 미간이 전보다 넓어보였다. 눈주름 한 번 안 움직이고
아래 턱만 움직여 말하는 모습이 영 섬ㅉㅣㅅ했다.
제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물 위로 안개가 옅게 몰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도 저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왠지 의아했다.

"심연의 빛을 지상의 영원으로!"
"심연의 빛을 지상의 영원으로!"

대변인이 뭔가 말을 마치자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이런 정당 구호를 뻐금
대듯 아래 턱만 움직여 외치는 목소리 사이에서 제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강을 보았다. 강물 위로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개 속에...뭔가가...꿈틀댄다?
그때 연단 쪽에서 부터 함성이 퍼지고 주변 사람이 확 몰려서 제희는 억지로
연단을 바라보았다.

이번 선거에 나올 후보들이 나왔다. 선거법상 아직 연설을 하지 못하는 대신
연단 위에 일렬로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을 얼핏 돌려보고 다시
구름을 보려던 제희는 깜짝 놀라 단상을 다시 보았다.
후보들 옷 차림이 마치...무슨 종교 사제나 제사장 같았다.
황금빛으로 커다란 눈알같은 것이 새겨진 새까만 로브로 발끝까지 덮은 후보
들을 보고 있던 제희는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재킷 위로 손을 툭툭
쳐서 가져온 물건이 잘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단상의 제일 왼쪽 두 번째에 서 있는 사람.
신진청년자유전진연대 세종시 예비 후보 송모란.

「...어머니.」

중얼거린 제희는 수 백 명의 사람들을 어깨로 밀어내고 헤치며 앞으로 갔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도 많았다. 제희는 단상의 송모란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
지만 멀리서 허우적대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갑자기 열이 받았다. 제희는 단상 위로 올라서고 싶었다.

자신도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게 연단으로  뛰어올랐다. 스스로 놀라 뒤돌아
보았다. 연단 아래에 수천, 수만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자신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 아찔해졌다.
그 눈동자 중 절반 이상은 어안魚眼과 같았다.

「결국 여기로 왔군.」

연단으로 다가오는 행사 진행요원들을 손짓으로 제지한 오란수가 말했다.

「서제희씨. 아니, 나의 후예여.」

그 말을 듣자 제희는 당황했다.

「후예?」
「몇 대 손인지는 모른단다.
   네 어머니와 인사부터 하거라.」

송모란은 주름도 움직이지 않는 얼굴로 제희를 보며 말했다.

「훌륭하게 자랐구나.」
「아니.」

제희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죽었잖아요.」
「...표현이 잘못 되었구나.
   죽은 게 아니야.
   스스로를 깨닫고, 새로 태어난 거지.」
「새로 태어났다고요?」
「우리 모두는 심해로의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누군지 깨닫지.
   소중하고 고결한 존재의 후예로서의 자각 말이야.」
「그렇다면, 왜 돌아왔어요.」
「시간이 됐어. 여정을 시작할 시간이.」

송모란의 말에 이어 오란수가 대답했다.

「우리는 여정의 안내자가 필요해.
  심해에는 아직 우리와 함께 할 동족이 많아.
  심해의 도시에서만 살고 자란 소중하고 고결한 존재들이 상륙하려면
  안내자가 필요해.
  내가 맡아주렴.」
「그, 그렇다면 이 정당은?」
「그래. 우리 정당은....」

오란수는 말하더니 손을 뻗어 강을 가리켰다.

「새로운 역사를 위한 선봉이 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강에서 이상한 울림이 들렸다. 마치 타악기를 느린 박자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눈이 그 소리의 흐름에 맞춰
일제히 강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물 위로 솟구쳐 나왔다가 들어가는 것은 무수히 많은 촉수였다.
길고도 굵으면서 은은한 푸른 빛 광채를 옅게 뿜어내고 있었다.

"이야! 이야! 크툴후 프타군!"
"카르! 마가! 다곤! 이야! 이야!"

사람들은 촉수를 보며 비명처럼 외쳤다. 수 많은 사람의 함성 속에 다른
모든 소리가 묻히는 가운데 제희는 고개 저으며 말했다.

「당신들과...함께 하지 않겠다면?」
「무슨 소리냐?」
「내가 이 창당대회를 망쳐놓겠어.」

제희는 말하면서 재킷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잘 갈아놓은 칼날이 안개 속에서도 번뜩였다.

「너는 할 수 없단다.」

송모란이 말했다. 제희는 송모란을 보고 강하게 고개 저었다.

「너는 할 수 없어.
   다곤에게 선택 받았으니.」

오란수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아직 모르겠나?
   지금 너는 우리 종족의 새 역사를 목도하고 있는 게야.
   나는 태초의 세상을 보았지. 모든 별이 제 자리에 있고
   하늘 저 너머에서 뿔피리 소리처럼 맑은 울림만 들리던....
   다곤이 물 아래 신전에 거하고, 혼돈을 덮으려는 물결 위로
   단 한 척의 배가 육지의 동물을 모두 실은 채 표류하던
   그 시절이 지난 이후 우리는 땅 위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지만
   이제 세상의 흐름이 우리를 다시 부르고 있어.」
「새로운 시대야. 땅의 혼란을 우리의 정신으로 다스릴 때가 된 거야.
   불변의 평화를 이룩하고 불멸의 삶을 사는 거야.」
「우리 모두의 꿈 속에 계시가 있었지.
   너도 꿈으로 계시를 받았을 거야.
   다곤의 부름을.」
「아니! 아니야!」

제희는 고개를 완연하게 저었다. 모든 진실을 수긍하는 자의 모든 것에 대한
거부였다.
어깨를 짚으려는 송모란의 손길을 뿌리친 제희는 강에 일어나는 물보라를
보며 말했다.

「당신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 영생하느니,
   인간으로 죽겠어.」

제희는 다시 사람들을 헤치고 강을 향해 달려갔다.
계단을 내려간 제희는 칼을 손에 물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에 몸이 잠긴다. 생각보다 깊숙이 가라앉았다. 제희는 본능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코와 목으로 물이 삼켜지며 들어왔다.

호흡이 전혀 가쁘지 않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제희는 등 뒤에 움직이는 거대한 형체를 느꼈다.
뒤돌아보았다.

은은한 푸른 광채를 띈 무수히 많은 촉수들.
그 촉수 중 하나가 제희의 어깨를 감싸 안듯이 닿았다.
제희의 눈 앞 형체가 사라지고 꿈에 보던 누각이 일렁이듯이 펼쳐졌다.
그것은 단순한 누각이 아니다.
그 분의 침소다.
모든 별이 제자리에 닿기를 기다리며 깊은 휴식의 시간을 갖는 그 분의....
제희의 손에 쥐고 있던 칼이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야! 이야! 크툴후 프타군!"
"심연의 빛을 지상의 영원으로!"

모두의 외침 속에 촉수는 몇 번 더 물보라를 튀기고는 잠잠해졌다.
안개는 서서히 걷혔다.

*

5대 시도에서 발기인 24,515명을 모아 창당 대회를 성대하게 마친 '신자유미래전진연대'는,
그 해 총선에서 5.72%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하고 3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며
신규 정당으로는 매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제희의 아버지는 뒤늦게 제희를 실종 신고했다. 하지만 곧 경찰 쪽에서 폐기 되었다.
아버지는 TV에서 오란수 의원을 수행하는 제희의 모습을 봤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너무 미간이 넓어졌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고 있었다.

신자유미래전진연대가 여당이 되는 데는, 모두의 예측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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