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탄생]봄맞이

2012.03.22 19:3103.22

1
봄맞이
: 앵초과에 속하는 한·두해살이풀
  이른 봄 양지바른 따뜻한 들이나 풀밭에 흔히 자라 봄을 맞이하는 꽃으로 불린다.

2
이가는 열심히 손을 녹이는 자신의 약혼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늘 말을 해야지, 하면서도 이 여자의 맑은 얼굴과 마주하면 말은 입에서 눌어붙은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이가는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 주네."
주네가 미소 지으며 이가를 보았다.
"응?"
"저……."
이가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입김이 옅게 나왔다. 주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요즘 왜 그래? 계속 표정이 안 좋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이가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말에 또다시 그냥 말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가?"
이가는 주네의 눈을 보았다, 역시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쓴 소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주네."
주네는 자신의 약혼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눈동자가 주네의 눈과 다시 마주했다.
"다음 도시에서……. 그곳에 남으세요."
주네는 눈만 깜빡였다. 이가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부모님들 간의…… 약속으로 약혼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부모님들도 안 계시고……."
말을 하는 것이 너무 힘겹다.
"그러니까…… 다음 도시에서…… 헤어지자는 말입니다."
주네는 계속 이가만 보고 있었다. 이가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변명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애초에 신분도 다르고……. 이 정략혼인이라는 것이 당사자들의 의사를 무시……. 게다가 우린 서로 좋아하는 사이도 아니고……."
"난 네가 좋아, 이가."
이가는 눈을 감아 버렸다.
"아마 사랑할 수도 있을 거야."
"전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가는 단숨에 내뱉어 버렸고, 그래서 주네는 그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뭐……?"
이가는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상대를 상처 주기에는 충분했다.
한참 침묵이 맴돌았다.
이가가 덧붙였다.
"게다가 다음 도시를 지나면 이제 더 위험해 질 겁니다. 그러면 저도 언제까지 당신을 지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주네는 이가를 계속 바라보았다. 이가는 그 시선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꽉 짓눌리는 것 같았다.
"이가."
주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내가 왜 여기까지 널 따라왔겠어? 위험한 걸 몰라서 따라온 것 같아?"
이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파혼할 것 같았으면 진작 네가 전쟁터에 갔을 때 했어. 내가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렸을까?"
이가는 자기 자신이 땅 속 깊이 꺼져버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보고 바보짓 한다고 손가락질하더라. 더러는 네가 그 '기적의 아이'라서 그 유명세 때문에 널 놓을 수 없어서 그런다고 욕하더라. 내가 정말 너의 유명세 때문에 그랬을까?"
"물론…… 아니겠지요."
"당연히 아니지. 난 유명세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아. 길거리를 지나갈 때, 남들이 알아본다는 데서 희열을 느끼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지요."
주네는 어두운 이가의 목소리에 울컥했다.
"너 왜 이렇게 된 거야? 전쟁터 갔다 오더니 사람이 음침해졌어! 잘 웃지도 않고!"
"죄송합니다."
이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네가 탄식했다.
"기적의 아이가 이렇게 어두운 사내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부터 삶은 삶이 아니고, 죽음은 죽음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아기들은 혼 없이 빈껍데기로 태어나고, 죽은 자들은 죽지 못해 몸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돌아다니게 되어 버렸다.
이가도 빈껍데기 아이 중 하나였다. 혼이 없으니 자신이 누구라는 것도 모르고, 감정도 없어 울거나 웃지 않으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생각이 없어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다른 빈껍데기 아이들처럼 태어났을 때 울지 않고 바로 숨을 쉬었다. 하지만 보통의 부부가 빈껍데기 아기를 낳으면 버리거나 죽이는 것과는 달리, 이가의 부모는 이가를 키웠다.
하지만 이가의 부모는 이가를 먹이고 재우며 길렀다. 빈껍데기일지라도 몸은 살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잘 먹고 잘 잤다. 그리고 움직이며, 때가 되어 걷기도 했다.
이가가 태어난 지 4년쯤 지났을 때, 이가는 마당을 걸어 다니다 어떤 구슬을 잡았다. 그는 그 작은 구슬을 손에 꽉 쥐고 절대 놓지 않았다고 이가의 부모는 시간이 더 지나 이가에게 말해 주었다. 이가의 부모는 이가가 그 뒤로 넘어졌을 때 울음을 터트리자 정말 놀라 기절할 뻔했다.
이가는 웃을 수도 있었다. 6살이 되자 말을 하기 시작했다. 2, 3살 아이들과 같았다. 동네에서는 '기적'이라며 사람들은 이가와 이가의 부모를 축복해 주었고 그 뒤로 많은 부부가 빈껍데기 아이가 태어나도 이가와 같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아기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이가는 그 뒤로 실제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4세 정도 낮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 또래의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고 울며 자랐다.
이가의 부모는 이가가 보통의 아이에 비해 모자람이 없도록 온 정성을 쏟았다. 도장에서 무예를 가르치던 이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엄하게 수련을 시켰고 어머니는 이가에게 책이란 책은 되는 대로 구해다 읽혔다. 여느 아이들 못지않게 튼튼하고 똑똑하게 자란 이가는 사람들에게 '기적의 아이', '희망의 아이'라고 널리 불리게 되었다.
"죄송…… 합니다."
"누가 사과하래?"
이가는 고개를 들고 주네를 보았다.
"사람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사람 마음이야.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린 것도 널 믿고, 또, 좋아하기 때문이었어."
주네는 확고했다.
"그러니까 난 계속 널 따라갈 거야. 말리지 마. 지금 만약에 내가 너와 떨어지잖아? 그러면 난 평생 후회할 거야. 그럴 것 같애."
이가는 별이 쪼개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책 없지? 아마 화도 날 걸. 하지만 내가 기다린 시간을 네가 조금이라도 생각 해 준다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주네는 다정하게 덧붙였다.
"피곤할 텐데. 그만 자."
이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포로 몸을 감싼 뒤 나무에 등을 기댔다. 주네도 모포를 덮으며 그의 맞은 편 나무에 자리를 잡았다.
이가는 주네의 말을 떠올렸다.
'너 왜 이렇게 된 거야?'
"변했다고……."
이가는 작게 중얼거렸다.
전쟁은 무시무시했다. 이가는 스물두 살 때 전쟁터에 끌려나갔다. 전쟁 중에 그는 꽤 높은 장군의 직속 수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가의 싸움실력이나 조금은 잘 돌아가는 머리도 한몫을 했겠지만, 이가 자신의 추측으로는 '희망의 아이'라는 그의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가보다 잘 싸우고 똑똑한 놈은 널렸으니까. 처음에 그 높은 장군 앞에 불려 갔을 때에도,  그 장군이 희망의 아이 어쩌고 하며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가는 그 장군 밑에서 일하며 이 전쟁이 자신이 가진 그 구슬 때문에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구슬에 관한 많은 사실도.
구슬은 오래전에 죽음을 두려워하던 한 사내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 젊은 사내는 죽음을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봉인하려고 했다. 그는 세상을 만든 용을 찾아갔다. 그가 그 유일무이한 존재 앞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일이 어리석고 대단히 위험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 일의 결과로 묘한 힘을 가진 구슬이 태어났고, 용은 죽었다. 그리고 그 사내는 구슬만을 남겨놓고 종적을 감췄다.
구슬을 만들 때, 그 남자는 죽음만을 봉인할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은 외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기에, 구슬에는 삶도 같이 봉인되어버렸다. 그것도 완전한 형태가 아닌, 삶과 죽음, 그 각각의 일부만.
그걸로 그냥 끝이 났더라면 좋았겠지만, 그 구슬은 사람들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지닌 자를 죽지 않게 해 주는 그것의 힘 때문에,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죽고 죽였다. 그 후 구슬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이가의 손에 우연히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구슬…….'
이가는 자신의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헝겊 천주머니가 만져졌다. 처음 주웠을 때부터 늘 가지고 다니는 구슬이었다. 어릴적에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는 구슬이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라는 걸 알았던 모양이었다. 부모에게까지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며 철저히 숨겨왔다. 얼마 전에야 겨우 주네에게 자신이 그 구슬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놓게되었다.
이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3
눈이 내린다.
이가는 주네가 휘청거리자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았다.
"고마워. 미끄럽다, 여기."
"조심하세요. 바위투성이라서 넘어지면 크게 다칩니다."
주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예."
"정말 그 구슬 없앨 거야?"
이가는 대답하지 않고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냥 네가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 되니? 안 죽게 해 준다며."
"……겨울이 점점 길어집니다."
주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그게 구슬이랑 상관있어? 오래전부터 겨울은 길어지고 있었어."
"있습니다."
이가는 구슬을 없애기 위해서 용이 죽은 '마지막 땅'으로 가는 중이었고, 그 여정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구슬이 만들어지면서 용이 죽었습니다. 용은 균형입니다. 중도이고요. 겨울은 계속 길어질 겁니다. 종래에는 겨울만 계속되는 세상이 올 겁니다."
"춥겠다."
"게다가 '마지막 땅' 말입니다."
"응."
주네는 또다시 휘청거리며 비틀거렸다. 이가는 주네의 팔을 단단히 붙잡은 뒤 기울어지려는 주네의 몸을 지탱해 주었다.
"조심하세요. 그 땅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가는 얼어붙은 계곡 바위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 뒤로 돌아 주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네는 그 손을 잡고 높은 바위 밑으로 내려왔다.
"그 메마른 황무지가 계속 넓어져서 세상을 다 덮는 게 먼저일까요, 일 년 내내 겨울인 세상이 오는 게 먼저일까요."
"음."
"그리고…… 이 구슬 때문에 부모님들께서……."
주네는 눈을 찌푸렸다.
"자책하지 마."
"……."
"네 잘못이 아니야. 자책하지 마, 이가. 나쁜 건 군사들이야."
이가는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 저는 구슬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진작에 이 구슬을 세상에 내놓았더라면……."
"덕분에 넌 전쟁터에서 안 죽었잖아. 그걸로 된 거야."
이가가 구슬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비단 그것이 지닌 자를 죽지 않게 해 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가는 구슬 덕택에 살아가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일부가 봉인된 구슬의 영향으로, 완전한 삶이 아닌 빈껍데기 아이들이 태어나고, 완전한 죽음이 아닌 걷는 시체가 생긴다는 것도 전쟁 중에 알게 되었다. 이가는 빈껍데기이던 자신이 그 구슬을 잡고 나서 '삶'이 부족하던 자신이 완전해졌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부 구슬 덕택이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구슬과 떨어지게 된다면…….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그 구슬과 떨어지게 된다면 자신은 삶의 일부분을 잃고 또다시 자아가 없는 빈껍데기가 되고 말 것이다.
이가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자신이 감추고 있는 구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향이 파괴되는 걸 알면서도 구슬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도착해서, 적군의 보복 때문에 남자들이 전부 죽임을 당하고, 그 와중에 도망을 치려던 이가와 주네의 부모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가는 그제서야 구슬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가는 자기 자신이 몸을 사리는 이기주의자라는 생각을 부모의 무덤 앞에서 수도 없이 했다.
구슬을 없앤다면 자신이 다시 빈껍데기가 되거나 새로운 자아를 가져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몰랐지만, 만약 구슬을 없애지 않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그건 죄다.
이가는 애써 주네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주네는 걱정스레 이가의 손을 다잡았다.
"무리하지 마."
"예."
둘은 눈 산에서 나와 눈이 깔린 벌판을 걸어갔다. 눈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그쳤다.

4
둘은 며칠 뒤 어느 번화한 마을에 도착했다.
주막에 방을 하나 잡고 하루를 푹 쉰 뒤, 이가는 이대로 여기 눌러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한 것이다. 그는 부모님의 무덤을 떠올리며 자신을 질책했다. 하지만 몸이 편하게 있으니 생각도 편한 것을 계속 따라갔다.
'구슬을 없애고 나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그건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구슬은 없어져야만 한다.
주네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이가를 보다가 말했다.
"이가. 나한테 다 이야기해 봐. 고민 같은 거."
이가는 주네의 말에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니요. 그런 것…… 없어요."
주네에게 구슬을 없애면 자신도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가는 주네가 극구 말릴 것이다. 그러면 구슬을 없애러 마지막 땅 근처에도 가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왜, 말해 봐."
이가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네. 역시 당신은 여기 남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이야긴 지난번에 끝냈잖아."
"죄송합니다."
이가는 고개를 돌렸다. 주네는 자신을 외면하는 이가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심각한 것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가는 계속 두렵고 무서웠다. 다시 빈껍데기가 되기 싫다.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가는 어쨌든 바뀌는 것이 싫었다. 구슬을 없애고 용이 다시 태어나면,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 올 것이다. 이가 자신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돌아온다면 이가는 빈껍데기가 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역시 뭔가가 변하고 말 것이다.
"이가, 잠깐 나가자."
주네가 어두운 표정의 이가를 붙잡고 말했다.
"바람 쐬면서 머리 좀 식혀."
이가는 순순히 주네를 따랐다. 둘은 주막 마루에 걸터앉았다.
이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찬 공기가 몸속 깊숙이 들어왔다.
자신의 자아가 구슬에 의한 것이니 자신은 이가가 아니라 구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네는 괴로워하는 이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이가야.'
구슬의 자아가 이제껏 '이가'의 탈을 쓰고 살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건 너무 가혹했다.
"주네."
이가가 입을 열었다.
"응?"
"은장도 지금 가지고 계십니까?"
주네는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 이가에게 내밀었다. 이가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칼집에서 뽑았다.
"뭐 하려고……."
이가는 주네를 마주했다.
"주네."
"응?"
"저는 이가입니다."
주네에게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이가는 은장도로 자신의 왼손을 찔러 버렸다. 비명을 지른 건 주네였다.
왼손이 불타는 것 같았다. 이가는 은장도를 뽑아내고는 그걸 떨어트렸다. 아프다는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이가는 기뻤다. 자신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러다 이런 자해 따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미쳤어?"
주네가 이가의 왼 손목을 낚아채며 소리 질렀다.
"왜 그러는 거야!"
피가 물 흐르듯 흘러나왔다. 피는 눈 위에 떨어져 새빨간 흔적을 남겼다.
이가는 물끄러미 바닥의 피를 보다가 옷자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뜯었다.
"이리 줘."
주네가 옷자락을 북 찢어서 이가의 왼손에 천을 댔다.
"왜 그런 거야."
주네가 이가의 왼손을 싸매 주면서 말했다.
"힘들면 얘기를 해."
이가는 그러겠노라, 중얼거렸다. 그는 구슬은 아픔 같은 걸 느끼지 못할 거야, 라고 스스로 위안 삼았다.
"이가."
주네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이가에게 말했다.
"예?"
"네게 무슨 문제가 있다면 그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응?"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가가 힘없이 웃었다. 탁한 웃음이었다.

5
이가가 스스로 손을 찔렀던 그 마을에서 사흘을 보내고 나서, 이가와 주네는 계속 북으로 향했다.
"말도 안 돼."
주네가 허리까지 쌓인 눈을 툭툭치며 경악했다.
"눈이 더 많이 왔어. 우수雨水랑 경칩驚蟄이 지난 지가 언젠데."
"올해는 유난히 겨울이 길군요."
이가가 나무줄기를 잡고 두꺼운 눈 위로 올라서려 했다. 발은 다시 푹 눈 아래로 빠졌다.
"걷기 힘들어."
주네가 투덜거렸다.
"설피를 장만할 걸 그랬습니다. 당연히 눈이 녹을 걸로 생각했는데……."
"으……. 신이랑 버선이랑 축축해."
이가가 걱정스럽게 주네를 돌아보았다.
"잠깐 쉬었다 갈까요?"
"응? 아니, 됐어."
"발이 동상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주네는 그 말에 멈칫했다.
"쉬고 가도 괜찮아?"
이가는 대답 대신 가까운 바위로 걸어가 바위 위의 눈을 털어 냈다. 그리고 주네가 그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앉도록 했다. 주네가 바위 위에 자리를 잡자, 이가는 그녀에게 발을 내밀어 보라 했다.
"발?"
주네가 발을 내밀자 이가는 주네의 신과 버선을 벗겼다. 오래 젖어 있어 하얗고 쭈글쭈글하게 변한 발이 드러났다. 이가는 가방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주네의 발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이가가 주네의 발을 천으로 감싸며 말했다.
"응?"
"발에 상처가……."
주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많이……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괜찮아."
이가는 고개를 들고 주네를 보았다. 주네가 씩 웃어 보였다.
"내가 막무가내로 따라간다고 한 거잖아. 괜히 아프다고 말해서 걸음이 늦어지면 안 되잖아?"
이가는 천으로 감싼 주네의 발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주네는 발이 따뜻해진다고 생각했다.
"궁금한 게 있어."
주네가 이가의 숙인 고개를 보다가 말했다.
"용은 세상을 만들었잖아. 그런 자도 죽을 수 있는 거야?"
"꼭 안 죽는다는 보장은 없지요."
주네의 눈길이 여전히 싸매져 있는 이가의 왼손에 머물렀다.
"손은 좀 괜찮아?"
"예. 구슬 덕인지 생각보다 빨리 낫는군요. 깊게는 안 찔렀나 봅니다."
"다행이다."
주네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에 당황스러워했다. 어색한 침묵이다. 이가가 원래 과묵했던가? 주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가는 주네의 발을 놓아 주더니, 바위 옆의 작은 나무로 걸어가 앙상한 가지들을 꺾기 시작했다.
"불 피우게?"
이가는 대답하지 않고 나뭇가지들을 한참 꺾고 나서 주네의 곁으로 돌아왔다. 주네는 이가가 바위 위로 올라오자 옆으로 조금씩 움직여 그가 앉을 곳을 내어주었다. 이가는 바위가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나뭇가지를 쌓은 뒤, 가방에서 기름통을 꺼내 기름을 나뭇가지에 부었다. 그리고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였다. 눈에 젖은 나뭇가지였지만, 기름 덕택에 불은 금방 붙었다.
"아직 해가 저물려면 한참 있어야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쉬어요."
"으응."
"해야 할 일도 있고요."
주네는 자신의 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피워진 불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야 할 일?"
이가는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기다려? 왜?"
이가는 가방을 벗어서 주네 곁에 놓은 뒤 모포를 꺼내 주네에게 둘러 주었다.
"어디 가?"
"시체들을 따돌리고 오겠습니다."
주네는 급히 두리번거렸다. 나무들 사이사이로 시체들이 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으아……."
주네가 인상을 썼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가는 바위 밑으로 내려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데?"
주네가 자기 옆으로 시체 한 구가 스윽 지나가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물었다.
"계곡에요."
이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들은 저만 따라올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거기 계세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냐!"
주네가 모포를 움켜쥐며 불안 속에서 모닥불 옆으로 다가갔다. 시체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며 지나갔다.
이가는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눈 때문에 걷기 힘들었다. 한참 그렇게 시체들을 이끌고 가자, 앞쪽에 굽이진 길이 나오며 그 길옆으로 계곡이 보였다.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완전히 얼진 않았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가는 서둘렀다. 시체들은 보기보다 빨라 벌써 이가의 바로 뒤에서 그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품에서 구슬이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그렇게 가지고 싶은 건가.'
그리고 정작 구슬이 그들에게 닿으면 그들은 완전히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갈망하면서도 가질 수는 없는 건가?'
이가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두어 명의 손을 떨쳐내고 계곡으로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시체들은 이가를 쫓아오다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 한꺼번에 굴러떨어져 이가를 덮쳤다. 이가는 황급히 구슬이 든 주머니를 손에 꽉 쥐고는 계곡물로 뛰어들었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다고, 계곡물은 겨우내 얼었던 것이 녹아서 팔팔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가는 끈덕지게 들러붙는 시체들을 매달고 물살이 빠른 곳으로 갔다. 시체들은 물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가 자신도 몰아치는 물살 때문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흐름이 느린 쪽으로 빠져나왔다. 시체들은 이가를 쫓아오다가 급류에 휩쓸려 계속 떠내려갔다.
이가는 손에 꽉 쥐고 있는 구슬이 담긴 주머니를 의식했다. 시체들을 구슬에 닿게 해 흙으로 돌려 버린다는 방법을 쓰고 싶긴 했으나, 그랬다가 자칫 구슬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자아가 사라질 수도 있으므로 그 방법은 쓰지 않기로 했다.
이가는 얕은 물 쪽으로 걸어 나와 뭍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다가오려 하는 시체들의 무리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체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이가는 그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편히 쉬고 싶은 건가?'
이가는 손에 쥐고 있는 주머니를 품속에 넣었다.
'안식을 갈망하고 있었나.'
이가는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시체들을 보았다. 흙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그의 발이 한 발짝 움직였다. 갑자기 오른쪽 종아리가 뜨거워지면서 따뜻한 것이 오른발을 적셨다. 불에 덴 듯 한 고통에 이가는 비명을 지르며 그만 뒤로 주저앉았다. 물가의 돌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이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퍼석, 바스러졌다.
이가는 '개' 같은 것이 다리를 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피가 개의 얼굴을 적셨다. 그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 개가 하반신이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피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섬뜩했다. 이가는 이를 악물고 양손으로 각각 개의 턱과 코를 잡고 힘을 줘 벌리기 시작했다.
개는 저항하는가 싶더니 이내 턱이 떨어져 나갔다. 이가는 그 끔찍한 모습에 진저리치며 개를 완전히 떼어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가는 개가 또 움직이자 얼른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픔을 참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이 깔아뭉갠 것이 개의 하반신인 것을 알아차렸다.
'개가 원래 이렇게 쉽게 부서지던가?'
개는 앞다리뿐인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일어나려 했다. 턱이 뜯겨나가 혀만 대롱거리는 모습에 이가는 기가 질렸다.
그 개는 시체였다. 죽은 지 좀 된 모양이다. 이가는 품에서 구슬이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구슬을 꺼낸 뒤 버둥거리는 개에게 한 발 다가섰다. 다리의 고통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가는 무너지듯 앞으로 주저앉았다. 개는 이가가 다가오자 크게 요동쳤다. 이가는 구슬을 쥔 손을 개에게 뻗었다. 개는 이가의 손이 닿자 요란하게 움직였다. 이가는 주먹을 펴고 구슬을 개에게 댔다. 개는 순식간에 부패해 버리더니 흙이 되어버렸고 뼈는 파삭 바스라 졌다.
'이제 편하니?'
이가는 자신이 개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차라리 개 같은 짐승이었더라면 자기가 누구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러면 자해를 할 필요도 없을 텐데.'
이가는 다리의 통증을 자각했다. 피가 생각보다 많이 난다. 어서 주네에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에 젖은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무리했나…….'
이가는 구슬을 다시 헝겊 주머니에 넣고 품속에 둔 뒤 피투성이가 된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아파서 비명이 또다시 나왔다. 이가는 손으로 다리의 상처를 지그시 내리눌러 압박했다.
찬바람이 불자 이빨이 저절로 부딪혔다. 구슬 덕택에 추운 날씨에 계곡물에 뛰어들어도 체온이 내려가 죽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서 감행한 입수였지만 막상 물에 젖으니 물속에 들어간 것이 후회되었다.
이가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조심스레 오른발을 디뎌보았다. 즉각적으로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흩어졌다. 이가는 어금니를 꽉 물고 절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6
"다리도 안 좋은데 정말 이렇게 하루만 쉬어도 괜찮겠어?"
주네가 마을을 나온 후 새하얀 벌판을 걸으며 물었다. 이가는 급조한 나무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구슬 덕분에 다리는 금방 나을 거예요. 시체들은 또다시 끈덕지게 따라올 겁니다. 그들은 밤에도 움직이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 땅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왜 마지막 땅이라고 불리는 걸까? 거기가 진짜 세상의 끝은 아니잖아."
주네가 물었다.
"그리고 왜 마지막 땅에 가야 해?"
"그곳에서 용이 죽었다는 말로 두 개의 질문에 전부 답이 됩니다. 용은 이 세상, 혹은 이 세상을 만든 자이잖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 지금 겨울이 길어지고, 땅이 점점 메말라 가는 거고요. 그가 죽었다는 그곳이 그래서 마지막 땅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이 세상의 종말과 비슷한 어감으로요.”
주네는 입술을 오므렸다.
“알 듯 말 듯해.”
“그리고 용이 죽은 그곳에서 용을 태어나게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마지막 땅에 가야 하는 겁니다."
이가는 모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구슬은 용의 일부이지 않습니까? 용을 태어나게 하려는 겁니다. 용은 '모든 것'이고, 이 세상의 이치 같은 것이지요. 원리이고, 이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런 용을 태어나게 하려는 거지요. 제 목적 말이에요. 그러니까, ‘마지막 땅’을 ‘첫 번째 땅’으로 만드는 겁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죽었지만, 모든 것이 시작될 겁니다."
주네는 걸음을 멈췄다. 이가는 조금 걷다가 주네를 돌아보았다.
"주네?"
주네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가. 왜 대단해지려고 하지?"
이가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예?"
"그러지 마. 너도 사람이야. 희망이니, 기적의 아이니 하는 수식어 때문에 그러니?"
이가는 아래턱을 움찔거렸다.
"왜…… 왜 그러는 거니? 그냥 잃어버린 물건을 돌려주러 가는 것뿐이잖아."
"제가 그러던가요."
"그랬어. 거대해지려고 했어! 대단한 일을 하는 것 마냥!"
이가는 멍하게 주네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 코, 입이 따로따로 분리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눈을 비빈 후 다시 주네를 보았다.
"넌 그냥 그대로 이가야. 일부러 네 크기를 키우려고 하지 마."
주네는 이가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가는 따뜻한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뭔가 혼란스러운 게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게 뭐든 무작정 너 자신의 무게만 늘리는 게 답은 아니야. 우린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그걸로도 충분해."
이가는 간신히 한 마디 내뱉었다.
"저는 이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주네는 이가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그것을 엄지로 닦아주었다.
"꼭 중요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네가 이가인 것은 아니야. 그런 존재가 되지 않아도 넌 이가이고, 그렇게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그러면 너만 피곤해져."
이가는 눈을 낮게 떴다.
"불확실합니다."
"모든 게 불확실하지. 단 몇 개의 사소한 진실들을 제외한다면 말이야."
이가는 눈을 들어 주네를 보았다.
"사소한 진실이요……?"
그가 미약하게 목소리를 냈다. 주네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그것들이 알고 싶어?"
이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주네는 와락 이가를 끌어안았다.
"첫 번째. 나는 주네이다. 두 번째. 넌 이가이다. 세 번째."
주네는 조금 간격을 두고 말했다.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데 앞의 두 가지 이상의 것은 필요 없다."
이가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두려웠다. 자신이 구슬의 자의식이라는 의심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진실로 밝혀질 때가 두려웠다. 미치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주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둘만 있으면 충분해."
이가는 주저하다가 주네의 등에 손을 얹었다.

7
"마지막 마을입니다."
이가가 언덕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불빛들을 가리켰다. 주네가 신이 나서 말했다.
"무사히 왔어! 구슬을 없애는 일만 남았어!"
그렇게 외치며 주네는 언덕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구슬을 없애고 나면 고향에 돌아가는 거야!"
주네는 이가가 따라오지 않아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주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조금 지나서였다.
"이가?"
주네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가는 비탈 위에 부실하게 서 있었다.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주네는 이가의 곁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가, 왜 그래?"
주네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가는 말없이 주네를 보았다. 생기 없는 눈이다.
구슬을 없애고 나면 구슬에 의해 형성된 자신의 자아도 사라진다. 물론 용의 탄생으로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겠지만, 이가는 그것이 싫고 두려웠다.
"이가!"
주네가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구슬에 집착하는 거야?"
이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뭘 망설이는 거니?"
"아닙니다."
이가는 아직 통증이 앙금처럼 남은 다리로 조심스레 언덕의 비탈을 디뎠다. 주네는 위태롭게 비탈을 내려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8
"이가?"
주네는 불안한 목소리를 내며 이가의 왼팔을 잡았다. 이가는 당황한 눈으로 주위에서 다가오는 마지막 마을의 사람들을 보았다.
젊은 부부부터 중년의 여인, 그리고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아기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가와 주네는 둘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물러나다가, 결국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 앞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빈껍데기."
이가가 내뱉었다.
"응?"
그의 손이 아기나 아이들을 가리켰다.
"저 애들, 빈껍데기예요."
아기들과 아이들은 모두 양손을 이가에게로 뻗고 있었다. 이가와 주네는 당산나무에 등이 닿자 그제서야 자신들이 포위된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만 하며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곧 중년의 사내가 급히 사람들을 밀어젖히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그 사내는 자신을 마을 촌장이라고 소개하며, 사람들을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 이가와 주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보셨다시피 이 마지막 마을의 아기들은 전부 빈껍데기입니다."
주네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가는 따뜻한 물만 홀짝였다.
"기적의 아이, 이가 맞으시죠?"
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사실이군요."
"소문이요?"
주네가 고개를 기울였다.
"예에. 이 분의 근처에 있으면 빈껍데기 아이들이 손을 뻗는다고……."
이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니라 구슬에게 손을 뻗는 거겠지.'
사내는 침울하게 말했다.
"몇 년 전부터 계속 혼이 없는 아이들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주네는 안타까운 눈으로 촌장의 얼굴을 보았다. 이가는 고개를 숙이고 물 잔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 땅의 '흙무덤'에 갈 겁니다."
"흙무덤?"
주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의 무덤 말이야? 그거 그냥 애들 이야기 아니었어?"
"아닙니다."
촌장이 주네에게 친절히 말했다.
"흙무덤은 실제로 있습니다."
"용의 피가 마르지 않고 있다는 것도요?"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에. 헌데…… 혹시…… 용을……?"
"예."
이가가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을 탄생시킬 겁니다."
촌장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구슬이……."
"……있습니다."
이가의 말에 촌장은 눈을 크게 떴다.
"있다고요?"
"예."
촌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더 늦기 전에 용이 돌아오셔야 해. 암……."
이가는 무겁게 말했다.
"이런 구슬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주네는 숙연해졌다.
"구슬을 없애고 나면 용은 태어날 겁니다. 이 구슬은 일종의 알과 같은 것이니까요. 물론 완전한 용인 것은 아니지만, 용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가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용은 태어나야 합니다."

9
이가와 주네는 저녁을 먹은 뒤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주네는 누운 채로 들떠서 말했다.
"구슬 없애고 나면 나랑 사는 거야!"
이가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이가?"
"주네."
"아……. 응?"
이가는 주네의 눈을 한참 응시하다가 일어나 앉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 말도 있습니다."
"뭔데?"
"아까 말했던 흙무덤 말입니다."
"어, 응."
"용의 피를 건너야만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이가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물렀다.
"그 마르지도, 증발하지도 않는 피는 떳떳한 자만이 건널 수 있습니다."
주네는 농담을 건넸다.
"난 도둑질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확실한 자만이 건널 수 있습니다."
이가 자신은 원래 빈껍데기인데다 끝없이 자아를 의심하고 있으니 건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르겠어. 그런 거."
주네는 호롱불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말했다.
"존재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있을까?"
이가는 괴로웠다.
"주네."
"응?"
"저를…… 도와주세요."
"나더러 지켜달라는 건 아니겠지."
이가는 주네의 농담에 결국 미소를 지었다.
"주네. 당신은 용의 피를 건널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은, 넌 못 건넌단 말로 들리는데."
"그럴 겁니다."
주네는 눈을 찌푸렸다.
"왜?"
"전…… 제자신이 의심스럽거든요. 게다가 빈껍데기이기도 하고."
"의심스러워?"
"예."
이가는 왼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전 구슬에 기대서 자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
주네는 이가의 왼손을 응시했다.
"저는 그래서 제가 구슬의 자아를 가진 건지, 저 자신의 자아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계속 방황했고, 또……. 이렇게 스스로 제 존재를 자해하는 걸로 확인했습니다."
주네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프니까……. 나 자신이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이가는 손을 내렸다.
"이렇게 자신을 의심하는 자는 용의 피를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못 건너게 될 때 도와주시겠습니까?"
"뭐? 아, 그래."
이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또 고백할 게 있습니다."
주네는 괜히 사랑 고백이라도 들을까 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정말 괜한 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 자아는 구슬이 준 겁니다."
"……그래."
이가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런데 구슬을 없애 보세요."
주네는 눈을 깜빡였다.
"넌 어떻게 되는 건데?"
이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뭐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용이 태어나면 저도 혼을 가지게 되겠지요."
"좋은 거잖아."
"새 자아가 자리 잡으면서, '이가'라는 지금의 제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주네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
"기억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뭐……어?"
이가는 쓸쓸하게 말했다.
"제가 이가라는 사실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럼, 나, 나도 잊어버리는 거야?"
이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
주네가 울먹거리자 이가는 곤혹스러워했다. 그녀의 반대는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지만 이렇게 눈물을 보일 줄은 모르고 있었다. 주네는 이가에게 무릎으로 걸어서 다가갔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 단지 가능성을……."
주네는 이가를 껴안았다. 온기가 전해져 왔다. 이가는 말을 멈췄다.
"싫어……."
주네는 흐느꼈다. 이가는 이번엔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10
다음 날 이가와 주네는 용이 태어나기만 하면 아이들은 혼을 가지게 될 거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아침 일찍 촌장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마을 뒤로 갈수록 풍경은 황량해져 갔다. 허허벌판에 눈이 겨우 덮여 있을 뿐이었다. 저 멀리 뭔가가 아른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둘은 오후가 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러다 이가가 오후의 한 시점에서 말을 꺼냈다.
"다리 상태가 괜찮습니다. 밤을 새워서 걸으면 새벽에는 이 일을 마칠 수 있을 것 같군요."
주네는 계속 입을 다물고 걸었다.
저녁이 되어서도 식사하는 내내 주네는 침통했다. 이가가 식사를 일찍 끝낸 뒤 횃불을 만들며 그녀를 달랬다.
"그래도 죽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주네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안 돼. 잊지 마. 넌 나랑 살아야 하는데, 기억을 잃어버리면 안 돼."
이가는 희미하게 웃었다. 주네는 원망스럽게 그를 보았다.
"너 내가 싫어?"
이가는 웃다 말고 주네의 얼굴을 보았다.
"싫구나?"
"아니에요."
"내가 좋지?"
이가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이가."
"네."
주네가 타오르는 불을 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움직였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이가는 횃불을 만들다 말고 주네를 쳐다보았다.
"왜 사람들이 머리를 다치면 기억을 다 잊어버리는 건데? 그건 기억이 머리에 있어서 그런 거야."
"주네."
"머리를 다치지 않는 이상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주네.“
이가가 주네를 저지하는 듯 단호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주네는 기운 없어 보이는 이가의 눈을 마주했다.
"두고 봐."
"그럴지도 모르지요."
주네는 심란한 표정으로 이가의 횃불 만드는 작업을 바라보았다.

11
둘은 완전히 어두워지자 횃불을 각자 하나씩 들고 일어났다.
"주네."
주네는 이가의 곁에서 걸으며 이가를 보았다.
"왜?"
"기억이 남아있다고 해서 그게 지금의 저 자신이겠어요? 용이 태어나면 새 자아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 자아가 자리 잡으면 지금의 저는 제가 아니게 되는 거 아닙니까?"
주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의 저도 참 괴로울 거예요. 다른 자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말이에요."
"어……. 너……."
주네는 뭔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최소한 성격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지금도 달라졌어."
이가는 어둡게 웃었다.
"전쟁을 겪었더니 웃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럼, 너 용이 태어나서 만약에, 성격이 달라지잖아?"
"그럴지도 모른다구요. 확실한 건 없습니다."
"달라질 거면 예전의 이가로 돌아와."
이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두 사람이 눈을 밟으며 걷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이가가 오랜 침묵 끝에 말했다.
"지금의 전 주네를 좋아하지만, 새로운 저는 당신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죠."
주네는 무심코 듣다가 놀라 이가를 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새 시대의 제가 지금과 같다고는 말을 못 한다는 겁니다."
주네는 이가의 팔에 매달렸다.
"다시 한 번 말해 보라니까?"
이가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다 온 것 같아요."
주네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달빛과 횃불에 비쳐 어슴푸레 흙무덤이 보였다.
"이……거야?"
흙 언덕 같았다. 눈으로 덮인 언덕. 주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흙무덤을 둘러싼 검은 연못 같은 것이 보였다.
"용의 피?"
이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다시 옮기려 했다. 주네가 이가의 앞을 양팔을 좍 벌리며 가로막았다.
"왜……?"
이가가 가만히 물었다. 주네는 젖은 목소리를 냈다.
"구슬…… 안 없애면 안 돼?"
대답이 없었다.
"우린 어차피 한 번밖에 못 살아. 그냥…… 그냥 죽을 때까지 나랑 같이 살자, 응? 우린 한 번 살다 가잖아!"
이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습니까?"
주네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대로 구슬을 없애지 않으면 세상은 겨울만 계속되게 되어 버리던가, 메말라 죽든가 할 거예요. 그러면 결국 우리도 다 죽겠지요."
"그럼…… 그럼! 살다가 죽기 전에 구슬을 없애면 되잖아! 그런 세상이 오는 건 우리가 죽고 난 후야!"
이가는 옅게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 구슬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겠어요? 그럼 편안히 살긴 힘들 겁니다."
주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구슬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계속 도망 다녀야겠지요. 게다가…… 내 아이가 빈껍데기로 태어난다면?"
이가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주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아마도 구슬을 내 아이에게 주게 되지 않을까요?"
이가는 주네를 계속 달랬다.
"기회가 왔을 때 이 구슬을 없애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을 겁니다."
주네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난 그래도 싫어!"
"……."
이가는 안쓰럽게 주네를 보았다. 어쩌면 그 자신이 안쓰러운지도 몰랐다.
"구슬을 가져다 놓으려면 네가 해! 난 안 도울 거야! 넌 저 물은 못 건넌다고 했지? 그렇지? 그러니까 가지 마!"
이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글쎄요. 지금은 우선 다른 게 급하게 되었습니다."
주네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주위를 급히 둘러보았다.
시체들이다. 시체들이 이가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구슬에 이끌려 따라왔네요."
이가가 가까이 다가온 시체 하나를 횃불로 밀어냈다.
"어쩌지? 열댓 명……. 그 정도인 것 같아."
"태워야겠습니다."
주네는 이가를 따라 횃불을 시체에게 내밀었다.
"잘 안 붙는데?"
이가는 급히 가방에서 기름통을 꺼내 시체들에게 기름을 끼얹고는 횃불을 휘둘렀다.
"뜨거라!"
주네의 외침과 함께 시체들이 활활 타올랐다. 이가는 주네를 붙잡고 불타는 시체들에게서 물러났다. 시체들은 불타는 손을 이가에게 뻗으며 불덩이가 되어서도 다가왔다.
"징그러……."
주네가 기어오다가 끝내 멈추게 된 불덩이를 보며 헛구역질을 했다. 두 사람은 시체들이 완전히 움직이지 않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가 적어서 다행이에요."
"이가."
주네가 주변을 밝게 비추는 불들을 보며 말했다.
"네."
"검은색의 연못이 용의 피라며? 용은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린다며?"
"그렇지요."
이가는 고개를 돌려 용의 검은 피를 바라보았다.
"그럼 넌 구슬을 들고 저 물, 저 피에 들어가면 정상적으로 혼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이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근거는 없지만 해 볼 가치는 있겠네요."
주네는 씩 웃었다.
"잘 될 거야. 그럼."
이가와 주네는 검은 연못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하지만…… 이 피는 제가 저 자신을 의심하는 이상 절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주네는 시무룩해졌다. 계속 '잘 될 거야'라는 생각이 자기 위안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가는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게 구슬이야?"
주네의 물음에 이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안에서 구슬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네."
이가는 구슬을 올린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가."
이가는 주네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검은 연못과 그 한가운데의 흙무덤만 응시했다.
"이가?"
주네의 목소리가 이상한 것을 안 이가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주네는 뒤돌아서서 뭔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왜 그러……."
이가는 뒤를 돌아보다가 말을 잃었다. 시체들이 또다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많아."
주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곧 새벽인데……."
이가가 중얼거렸다.
"어쩌지? 백은 넘을 것 같아! 아무리 불로 지진들 저렇게 몰려오면 수가 없어!"
주네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가야겠어요."
이가가 다시 돌아서서 연못을 보며 말했다.
"간다고?"
주네가 이가를 돌아보았다.
"주네, 당신 말대로 해볼 만해요."
"나, 난……. 그냥……."
'자기 위로를 한 것뿐이야.'
주네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그래, 가!"
시체들은 주네와 몇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이가는 횃불을 떨어트렸다.
"가!"
이가는 검은 물로 걸어나갔다. 주네는 횃불로 시체들에게 불을 붙여 최대한 막으려고 애썼다.
"뛰어!"
이가는 주네의 외침대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 피는 이가가 발을 옮길수록 이가의 다리를 옭아맸다. 발이 점점 무거워진다. 죽기 살기로 다리를 움직였다. 검은 피는 처음엔 발목까지 밖에 오지 않던 것이 이제는 허벅지를 적실 정도로 깊어졌다. 이가는 아직 흙무덤까지는 더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네가 혼자 시체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체들은 그녀를 피해서 검은 물로 들어갔다. 그들의 목표는 이가가 손에 쥐고 있는 구슬이었다.
"이가! 조심해!"
주네가 비명을 질렀다.
이가는 뒤를 힐끗 보았다. 시체들이 검은 연못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검은 피에 닿자마자 부패해 버려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망자들은 썩어 문드러져 쓰러진 그들의 동료 위로 걸어왔다.
이가는 쥐고 있던 구슬을 입 안에 넣고 걷기 시작했다. 검은 물은 이제 엉덩이 높이까지 찼고, 이가는 간신히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가! 힘내!"
이가는 주네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흙무덤은 이제 손만 힘껏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주네는 시체 한 구가 이가의 등 뒤까지 도달한 것을 보았다. 시체들은 너무 많아 용의 피의 부패작용도 소용이 없었다. 주네는 시체들로 검은 연못이 매워질 지경이라고 생각하며 소리 질렀다.
"이가! 조심해!"
주네의 외침과 동시에, 그 시체가 이가의 어깨를 잡고 늘어졌다. 이가는 놀라서 구슬을 거의 삼킬 뻔했다.
"이가!"
그것이 첫 신호였는지, 다른 시체들이 이가의 몸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이가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에 힘을 주며 시체들을 팔을 휘둘러 떼어내려 했다.
"너무 많아."
주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시체들은 더는 몰려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가의 발목을 잡기에는 차고도 넘쳤다. 그들은 검은 피에 닿아 관절 부위가 헐어 온몸이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지 끈질기게 이가에게 손을 뻗었다. 이가는 시체들의 손이 자신의 입과 턱을 잡자 몸서리쳤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그 손들을 떨쳐냈다.
이가의 머릿속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포기해.
이가 그 자신의 목소리였기에 이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 어차피 거짓된 자아다. 살아갈 필요가, 가치가 없어.
'아니야.'
이가는 자신의 굳게 다문 입술 틈으로 시체의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주먹을 휘둘러 그 시체를 후려쳤다. 시체는 팔꿈치가 분리되어 이가의 입을 잡은 손만 남기고 나머지는 떨어져 나가버렸다. 그가 시체의 손을 떼어 냄과 동시에 다른 손들이 그의 입과 턱, 머리를 잡았다.
- 어차피 구슬에 의한, 기생하는 자아라면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이가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다리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아……니야.'
이가는 양손에 용의 피를 묻혀 시체들에게 휘둘렀다. 시체들은 필사적으로 이가에게 달려들었다.
- 거짓된 자아를 가진 빈껍데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던 걸까?
부모님의 무덤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결정타였다. 이가는 죄책감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무릎을 꺾었다. 시체들은 이가와 한 덩어리처럼 겹겹으로 붙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체들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지, 이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 거짓된 자아니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야.
주네는 시체들에게 완전히 뒤덮여 물속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그 덩어리를 보다가 자신의 멍청함을 깨달았다.
"난 무사히 건널 수 있댔지……."
주네는 검은 연못으로 뛰어들어 이가의 곁으로 단박에 달려갔다.
이가는 무력해졌다. 시체들은 그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리누르며 입을 벌리게 하려 하고 있었다.
- 이가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나는 이가가 아니야.
이가의 입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시체들이 탐욕스러운 손으로 이가의 입을 완전히 열려고 했다.
"이가!"
반사적으로 이가는 반쯤 벌려지던 입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이빨들이 부딪혔다.
"이가!"
주네의 목소리다. 이가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시야가 맑아졌다. 자꾸만 어긋나던 것들이 제자리를 딱딱 들어맞게 찾은 것 같았다.
"이가! 대답 좀 해 봐!"
- 나는 이가가…….
"나는…… 이가야!"
이가가 입에 구슬을 문 채로 악을 썼다.
주네는 시체들을 한 구씩 떼어내다가 갑자기 그 덩어리가 급하게 물속으로 쑥 들어가자 놀라서 한 발 물러섰다.
"이가!"
주네가 비명을 질렀다. 곧 검은 물 위로 뭔가가 다시 올라오자 그녀는 놀라 휘청거렸다.
"……주네."
이가였다. 잠수한 덕분에 썩어버린 시체들을 한 번의 몸부림으로 모두 떨쳐내고 나서, 그는 주네에게 다가갔다.
주네는 이가가 자신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자 놀라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고마워요. 저를 완전하게 해 줘서."
이가는 구슬을 입에 물고 있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주네의 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잘 들렸다.
"저는 이가예요."
주네는 미소 지으며 이가를 힘껏 포옹했다. 이가는 주네를 더 안고 있고 싶었지만, 그녀가 다급하게 외치는 바람에 떨어져야 했다.
"저기 멀리 또 와! 어서 가자!"
주네가 이가의 팔을 잡아끌고 흙무덤에 도착했다. 이가는 주네와 함께 흙무덤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옷이 젖어 몸에 들러붙는다고 생각하며 뒤를 힐끗 보았다. 시체들이 사방에서 검은 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가! 서둘러!"
주네가 뒤를 보고 있는 이가의 옷을 잡아당겼다. 이가는 급히 고개를 앞으로 하고 달음박질쳤다.
"곧 동이 트겠어요."
이가가 어슴푸레한 하늘을 힐끗 살피며 크게 말했다.
동쪽 하늘이 산언저리에서부터 어스름한 장막을 걷어내며 밝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가는 몇 번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는 흙무덤의 정상으로 올라왔다. 주네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시체들이 올라와."
이가는 구슬을 입에서 꺼내 급히 젖은 옷자락에 대고 문질렀다.
부풀어 오르던 동쪽 하늘의 빛이 터지며 밝은 물결이 융단처럼 깔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어.’
이가는 심호흡을 한 뒤 구슬을 잡은 오른손을 흙무덤의 정상 한가운데에 찔러 넣었다. 흙은 부드럽게 이가의 주먹을 삼켰다.
조용한 파동이 이가의 오른팔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세찬 바람 한 줄기가 이가와 주네의 머리칼을 날렸다. 그 바람은 흙무덤을 뒤덮던 시체들을 모두 흙으로 되돌렸다.
해는 온 누리를 비추며 두둥실 떠올랐다.
이가의 손이 묻힌 자리를 중심으로 새싹이 돋아났다. 이름 모를 풀꽃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피어나갔다.
"이건……."
주네가 입을 벌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두껍고 차가운 눈을 뚫고 생명들이 움텄다. 마지막 땅에 녹색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푸르게 물든 흙무덤, 그 주위의 검은 피가 흙무덤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가와 주네의 발밑의 땅이 치솟아 올라갔다.
이가는 잡고 있던 구슬의 감촉이 사라진 것을 깨달으며 땅이 휘청거리는 대로 뒤로 떨어졌다. 주네는 이가에게로 뛰어들었다.
이가는 쏟아져 내리는 흙비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긁었다. 빛 무리가 이가와 주네를 환하게 보듬었다.
그리고 포근한 어둠이 찾아왔다.

12
이가는 눈을 떴다.
온몸이 기분 좋게 뻐근했다. 그러다 주네가 자신을 꼭 안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미소 지었다. 자신의 가슴께에 올려져 있는 주네의 손을 잡아 내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풀들이 살랑거렸다.
이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넓은 녹색 벌판이 펼쳐져 있었고 온 산들은 자신들의 푸름으로 으스대고 있었다. 그러다 이가의 시선이 연녹색 들판 한가운데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에 머물렀다. 나무는 바람이 불자 그 거대한 몸을 부드럽게 뒤틀며 우거진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그리고 용이 거기 있었다.
커다란 나무 곁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어났어.'
이가는 눈을 비비며 용을 다시 자세히 보려고 했다.
용은 삶과 죽음 그 자체였다. 용은 보였지만 보이지 않았다. 용은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지만 칠흑과 같은 밤하늘이었다. 용은 빛이 났지만, 어둠을 가지고 있었다. 용은 용이었지만 용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용은 거기 있었다.
용이 고개를 돌렸다.
이가는 용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은 움직였다. 물 흐르듯 뒤로 돌아서는가 싶더니, 사라져갔다.
이가는 다시 쓰러지듯 주네의 곁에 드러누웠다. 풀 내음이 달콤했다. 봄바람이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이가가 소리 내어 웃으며 생각했다.
'몇 개의 사소한 진실들은 변하지 않네요. 주네, 당신의 말이 맞아요.'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아 땅에 닿은 옷은 마를 줄 몰랐지만, 그런 건 이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봄이니까.'
봄맞이가 이가의 머리맡에서 하늘거리고 있었다.



hagayoenno@naver.com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817 단편 [탄생] 목소리1 딜레탕트 2012.03.28 0
1816 단편 자객행(刺客行) 이니 군 2012.03.28 0
1815 단편 [탄생] 가치의 탄생 징고 2012.03.28 0
1814 단편 [탄생] New Order 湛燐 2012.03.26 0
1813 단편 음모가 자란다1 dcdc 2012.03.24 0
단편 [탄생]봄맞이 정하린 2012.03.22 0
1811 단편 드래곤 설계론 미소짓는독사 2012.03.15 0
1810 단편 영희 찾았다! 오버쿨 2012.03.12 0
1809 단편 우주의 푸른 색 summer 2012.03.12 0
1808 단편 12광년의 고독 솔리테어 2012.03.12 0
1807 단편 거울숲 미소짓는독사 2012.03.05 0
1806 단편 [탄생] 6시간 21분 32초 헤르만 2012.03.04 0
1805 단편 눈(目)속의 정원 Mauve 2012.02.29 0
1804 단편 키보드 워리어1 제퍼리 킴 2012.02.25 0
1803 단편 [탄생]탄생탄생 이서백 2012.02.24 0
1802 단편 무지개 제퍼리 킴 2012.02.21 0
1801 단편 무드셀라 증후군4 제퍼리 킴 2012.02.21 0
1800 단편 [탄생] en-human 2 채이은 2012.02.20 0
1799 단편 [탄생] en-human 1 채이은 2012.02.20 0
1798 단편 [탄생] 언더 그라운드 도토루 2012.02.18 0
Prev 1 ...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