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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주마등

2010.12.06 23:4212.06

어른들은 사라진 아이를 집밖에서 찾지만, 사실 그들은 집안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로노움 엔데, 『놀이동산』 중에서―


  손아귀가 찢어질 듯이 아프다. 나는 지금 꿈틀대는 혈관이 느껴질 정도로 팔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럴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올라가.
  누구의 소리였을까. 왜, 라는 의문을 달면서도 나는 그 목소리를 따랐다. 그러나 내가 왜 올라가야 하는지는 전혀 납득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겨울 산, 칼바람이 살갗을 베어드는 절벽에서 나는 덩굴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그 순간, 이렇게 절박하게 붙잡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


  나는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분수대 광장이 눈에 들어오자, 더욱 속력을 가했다. 내가 멈춰선 곳은 한 여자의 앞이었다.
  “헉헉…미안, 좀 늦었지?”
  그놈의 산적들이 문제였다. 소도시 오윈의 경비병인 나는, 사실 그리 일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워낙 한적하고 조용한 도시라 여름축제시기를 제외한다면 경비병이란 그저 담당구역이나 돌아다니면 되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출몰한 산적들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는 도시의 경비병들이 전부 나서야 했다. 어리숙한 녀석들이라 큰 부상 없이 끝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바로 오늘이라는 데에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만나는 그녀와의 데이트 날이었던 것이다. 나랑은 달리 워낙 할 일이 많은 친구라 이렇게 만나기가 가뭄에 단비 내리듯 했었는데 지각을 해버렸다.
  “많이 늦었어.”
  그녀가 회전하는 시계탑을 올려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질책하는 말투도, 괜찮다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상황을 보고하듯 딱딱한 어조에도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산적들 때문에. 까먹은 건 아니었어. 자, 얼른 가자. 늦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내가 살게.”
  때마침 날 더운 여름이고 하니, 나는 그녀를 냉면가게로 이끌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과묵하다 못해 무심하다는 평가를 받는 나였지만, 이렇듯 그녀 앞에서는 여러 가지로 말이 많아진다. 아마 그녀가 나보다 더 과묵하기 때문일까. 내가 말하고 그녀는 들어주는,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상해.”
  “그럴지도. 칼질 몇 번 하니까 나가떨어지면서 산적질은 왜 했나 몰라. 잡힐 거 뻔히 알면서.”
  내 한숨에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놀린다. 누가 보면 혼자서 떠드는 멍청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상 그녀는 내 말에 성의껏 귀를 기울여준다. 그것이 말로 표현되진 않을지라도 눈빛이나 행동으로 동의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너, 귀걸이 달라졌네. 전에는 내가 사준 파란 것만 하고 다녔잖아.”
  커다란 그릇을 젓가락으로 휘젓던 손이 멈칫한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모습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나는 항상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기다린다.
  “이거 이상해?”
  “아니. 이건 이것 나름이지. 이것도 잘 어울려.”
  내가 사주었던 파란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은색 직사각형 테두리 안의 붉은 큐빅이 자리 잡은 귀걸이였다.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맛있네.”
  다시 뚝배기에 얼굴을 처박으며 내가 중얼거렸다. 어째서일까. 자꾸만 시선이 느껴졌다.

§


  숨소리가 느껴졌다. 내가 내쉬는 숨소리가 흐느낌 같은 바람 사이에서도 확연히 들렸다. 가만히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숨이 가빠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워낙 몸을 움직이는 체질이 아닌지라 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산을 올랐다. 무심코 다다른 절벽에서 경치를 감상하다 까마득한 높이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중심을 잃어버렸다. 답답한 마음에 산을 올랐을 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이게 다 칼바람 부는 주제에 경치만 좋은 산 때문이라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으윽…!”
  떨어질 뻔했다.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손이 미끄러진 것이다. 다리 사이로 붙잡고 있다고는 해도 한손으로 지탱하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들었다.
  -살아야한다.
  또다시 누군가가 귓가에 외친다. 마치 고막 안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의문이 들었다. 왜, 내가 살아야 하는 걸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내가 어째서 살아야 하는 걸까?
  -살아야한다.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까 굴러 떨어지면서 부러진 왼손의 도움이 절실했다. 얼마나 아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살자니 별 수 있을까. 나는 눈을 부릅뜨며 왼손을 끌어올렸다. 엄지를 타고 감전된 듯한 고통이 뇌리를 치고 올라왔다.

§


  “앗!”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정말 고민하던 끝에 그녀의 손을 잡아보려는 시도였는데 억울하게도 정전기가 생겨버렸다. 이런 눅눅한 한여름에 정전기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아, 거의 열흘 만에 봤는데.’
  다른 친구들은 내가 그녀와 포옹 이상 진도를 나간 적이 없다고 하면 전혀 믿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엄청난 놀림감이 되겠지.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소심해서 손도 열두 번 쯤 고민해서 내미는 나와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상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 최악의 조합이다.
  “미안, 정전기가…….”
  사과를 하려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내 손을 덥석 잡아버린 것이다. 의외의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선을 마주했다.
  “할 말이 있어.”
  따뜻한 손이었다. 그 온기가 너무도 아련해서 목이 메었다.
  “우리, 헤어지자.”
  붉은 귀걸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


  손에 점점 감각이 사라져간다. 계속해서 몰아치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많은 힘을 주어야 했다. 게다가 손이 왠지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꽉 잡아!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에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실밥이 뜯어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떨어지던 몸이 멈췄다. 손바닥이 지독하게 벗겨졌는지 피가 줄줄 배어나왔다. 손목을 타고 흐르는 간지럼보다도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서 더 많은 비린내가 풍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혹시나 덩굴이 찢어지지는 않았는지 위를 올려다보았다. 적어도 보이는 것에는 이상이 없었다.
  ‘정신차리자.’
  또 한 번 떨어졌다가는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내서 피 묻은 덩굴을 타고 올랐다. 내가 덩굴을 잡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손바닥에 못이 박혀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고통이 심해지는 바람에 갈수록 더 많은 힘을 주어야했다.
  -살아야한다.
  도대체 누구일까. 내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바람 같은 소리. 어린 애들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던 산의 유령일까? 왜 하필 모두 잃어버려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나를 향해서 그토록 절박하게 속삭이는 걸까.
  -살아야한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렇듯 끊임없이 올라가면서도 정작 올라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그 뒤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다. 어쩐 일인지 산적의 출몰이 끊이질 않았고, 도시의 분위기도 흉흉해졌다. 그날 헤어졌던 이후로 그녀를 만날 일은 없었다. 다만 왕립연금술학회의 견습교수로 파견되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아, 진짜. 이 자식들은 어차피 잡힐 거면서 뭐 이리 쳐들어오는 거야?”
  투구를 벗으며 짜증을 내는 동료를 무시한 채로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칼을 맞댔던지 이가 다 나가있었다. 아마 저들은 우리가 과로사할 순간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숨을 몰아쉬는 그는 두리번거리는 고개를 내게 고정했다.
  “대장님이 부르신다. 아마……고향으로 돌아가야 될거다.”
  사고가 났다. 내가 떠나온 고향에 산사태가 일어났고, 어마어마한 흙과 돌들이 부모님의 집을 뒤덮었다고 한다. 나는 곧장 고향으로 향했다.
  “형…….”
  흙무덤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어린 두 동생들뿐이었다. 나는 동생들을 위로하면서 멍석으로 덮어놓은 부모님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짓이겨져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시신. 이게 아니었다. 내가 고향을 떠났던 것은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저 두 애들만 살았다면서요? 벽 무너진 틈새에 끼어있었다던데. 하늘이 도우신거지.”
  “그러게요. 근데 저 애가 첫째인가 보죠?”
  “독하네. 지 부모가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려.”
  “나이도 어린데 동생 둘을 어찌 데리고 사려나 몰라.”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들 말처럼 이상하게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냥 자꾸만 목이 메었다.
  그 날로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가지고 있던 돈으로 부모님의 장례를 치러드리자마자 두 동생을 데려온 것이다. 내가 세 들어 살던 작은 방을 팔고 조금 더 큰 방을 얻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보태주었던 돈으로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학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여태 경비병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이라면 적어도 몇 년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동생들이 악몽을 꾸는 것 이외에는 모두들 잘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만 이라면 내가 산에 오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빠!”
  “형!”
  여느 때처럼 순찰을 마치고 귀가하던 나는 멀리 보이는 동생들의 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두 녀석들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를 향해서 달려왔다. 둘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보인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비, 비켜!”
  도시에는 귀족이 있다는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시커먼 말발굽이 번쩍 들어 올려지는 모습에 무작정 달려들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저 녀석들이 어떻게 살아왔는데.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자라면서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벌써 구구단도 외운 녀석들이다. 아니, 그보다 내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었다. 그러니까…….
  “으아아악!”
  순식간에 말과 나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검을 뽑을 틈도 없이 검집 채로 말머리를 후려쳤다. 피가 터져서 얼굴에 묻었지만, 그걸 볼 틈은 없었다.
  “이, 이런 미친 자식! 감히 어딜!”
  마부가 휘두른 채찍이 가슴을 내리쳤다. 나는 그것에 힘없이 떠밀려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다리에 힘 같은 건 들어있지 않았다. 내가 부숴버린 말머리처럼 피를 흘리는 동생들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하나씩 잃을 때마다 쌓여가던 응어리가 비로소 모두 사라진 뒤에야 터져나왔다.
  부모. 형제. 연인. 그래, 모두 사라져버렸다.

§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해본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게 아닐까. 누구든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남아있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이유는 가족에 있었다.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는 재능. 나의 경우에는 검술이었다. 남들보다 조금은 뛰어난 검술로 시골에서 오윈이라는 소도시에 왔고 경비병이 되었다. 월급을 받을 때마다 집으로 보내는 기쁨에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다. 타고난 천성인지 내게서 우정이란 감정은 그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늙어가는 부모님과 자라나는 동생들의 편지만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변화는 열아홉 즈음에야 찾아왔다. 여태껏 내가 갖고 있었던 가족이란 가치관이 변해버린 것이다. 아들로서 속해있는 가정이 아닌, 가장으로서 속해있는 새로운 가정. 그것 또한 내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오윈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없애버린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 피비린내를 느끼며 덩굴을 타고 오르고 있다. 이것은 살기 위한 발악이다. 그러나 이유가 없다. 이유가 있기에 이 땅 위에 남아있는 거라면, 이유를 잃어버린 내가 이렇듯 고통 속에서 덩굴을 타고 올라야할 필요가 있을까.
  -살아야한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절벽의 끄트머리가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어째서 그리 외치는가. 이유를 잃어버린 삶이 얼마나 건조한지 여태껏 느껴왔건만 소리치는 자는 그것을 모르는가.
  -살아야한다!
  지겨웠다. 이것은 낭비다. 나의 생 그 자체가 낭비다. 그런데도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하얗게 도드라진 뼈마디가 여전히 힘을 빼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떠오를 것도 같았다.

§


  그녀를 영영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 한 번, 나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많은 것이 달라진 이후였다. 두 어린 녀석들은 고향 부모님 곁에 묻어주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돈을 벌었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길가에서 군것질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오랜만이야.”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던 중이었다. 그날 이후로 근무일수도 줄인 나는 이렇듯 일이 없는 날이면 술에 빠져살았다. 그래도 적자는 아니니까. 그토록 힘들여 벌어둔 돈은 쓰라고 넘겨주었던 주인을 잃어버리고 내게로 돌아왔으니까.
  “많이 변했네.”
  아니, 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단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변해버렸을뿐.
  “여긴 왜……?”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였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더 이상 그녀는 이유가 아니니까. 시덥잖게 여겼던 우정, 그 비슷한 것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소식 들었어.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래도 죽지는 않네.”
  여전히 차가운 말이다. 지독히도 냉정해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래서였을까. 내가 그녀보다 항상 많은 말을 했던 것은, 그녀가 내뱉은 서릿발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죽는다라. 일단 사는 건 의미가 없어졌지.”
  잔을 내려놓고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잔을 뺏어들었다.
  “지금 너는 죽는 것도 의미가 없어.”
  술을 따라서 한 입에 들이킨 그녀는 화난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감정 담긴 표정을 이렇게 쉽게 드러낼 줄이야. 이미 헤어졌는데 말이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이유 없는 삶에 자꾸 끼어들지마.”
  시선을 피했다. 이 이상 그녀와 눈을 마주하다가는 열이 뻗칠 것 같았다. 그러자 그녀가 식탁을 거세게 내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 건 남에게서 찾는 게 아냐.”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남기고 그녀는 나가버렸다. 도대체 누가 화를 낼 상황인건지.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비로소 손에 얼어붙은 흙이 만져졌다. 길게 뻗은 오른팔로 절벽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다 올라와서가 아니라 답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드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살아야 한다는 속삭임을 따랐던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거의 다 왔어.”
  그대로 죽는 것을 택하지 않고 이렇듯 삶에 다가온 것은 내 무의식 속에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남에게서 찾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그녀가 옳았다. 사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표에는 나 자신이 있었다. 어째서 가족들을 사랑했던가. 연인의 이별 앞에 슬퍼하고, 부모의 죽음 앞에 좌절하고, 동생의 죽음 앞에 눈물 흘렸던가.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행복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였다. 이 간단한 구조를 왜 여태 몰랐을까.
  “살아야해.”
  이제는 나도 말할 수 있었다. 산의 유령이 속삭이던 그 한마디를 내 입으로 할 수 있었다. 어찌되든 좋다. 또다시 가족을 그리워하더라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저 주저앉던 예전의 나를 없애고 스스로 찾는 내가 될 것이다. 그때였다.
  “어?”
  -안돼!
  나와 힘의 평형을 유지하던 장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슴께까지 올라왔던 몸은 푹 꺼져버렸고,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눈앞에 보이던 얼어붙은 땅이 사라졌다.
  허무했다. 그토록 힘겹게 생을 갈구했건만, 더구나 이유까지 찾았건만 이렇게 떨어져버리는가. 끊어져버린 메마른 덩굴이 나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었는데.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불운은 산의 유령마저 꿰뚫고 비로소 나를 추락시켰다.
  주위를 뒤덮은 안개가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살아왔던 날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등 뒤를 덮어오는 딱딱한 바닥을 느끼기도 전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노드
댓글 2
  • No Profile
    노드 10.12.07 00:18 댓글 수정 삭제
    기껏 썼더니 분량미달이겠네요....(A4 5쪽이긴 한데)
    단편이란걸 처음 써본거라 평가를 들어봤으면 했는데 좀 아쉽네요.
  • No Profile
    Dominique 10.12.07 19:22 댓글 수정 삭제
    살 의미가 생겼으므로 죽을 의미도 생겼군요. 지나치게 요약적이고 부연설명없는 불친절한 글이지만 나름대로 괜찮았습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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