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루에도 50번씩 여닫는 냉장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일일이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곳엔 검은색이 된 푸른 채소와 강철 같은 냉 고등어 한 마리 외에 수많은 식자재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 것이다. 이는 냉장고는 불가해한 요소로 가득한 또 하나의 세계라는 말로, 끝없는 혼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혼돈에 익숙해지기 위해 매번 새로운 물품을 사 냉장고 겉을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과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축구를 보는데 뱃속에서 고래가 애타게 권주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에 아버지의 고래도 꿈틀거렸는지, 나는 곧 소주 두 병을 사오게 되었다. 안주거리를 시키려다 몇달전 어머니가 사온 베이컨이 생각이 나서 냉장고를 뒤졌다, 보이지 않았다. 겉에는 최근 새로 장만한 반찬통과 새 반찬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치우자 곧장 오랫동안 자리잡은 채 움직임이 없는 낡은 반찬통 외 비닐봉지들이 눈에 띄었다. 이 사이 어딘가에 베이컨이 있을 게 뻔하기에 나는 덩어리 하나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 검은 비닐봉지는 어딘가에 단단히 깔려있었나 본지 내가 잡아당기자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 안의 잡곡들이 바닥에 솨아악 쏟아지고 괴물이 털푸덕하고 떨어졌다.
봉지에 얼마 남지 않은 잡곡들이 부스스 떨어지고,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괴물은 멍하니 몸을 일으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비명 지르면서 냉장고 안 깊숙한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뭐 쏟았냐고 물었고 나는 별 것 아니라면서 새 봉지를 가져와 잡곡을 담았다. 담을 수 있는 대로 남았지만 대부분은 청소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래도 엄마는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잡곡이 줄었는지는 지금껏 그 괴물을 보지 못한 것과 같이 눈치 채지 못할 터였다.
냉장고 안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그 괴물은 냉장고의 언더그라운드. 카오스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가 만들어낸 음지 속의 생명체인 것이다. 그 괴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만약 눈에 보였다면 그들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 깊은 곳의 망각 속에 살고 있는 이 괴물들은 그림자와 같다. 소리 없이 다가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