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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괴물

2006.01.15 19:2601.15

괴물
 



내 속엔 괴물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는다.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들고 몇 걸음 걷다가 하늘을 쳐다본다. 시야의 가로 까만 것이 스친다. 그래, 오늘도 시작되었다.
아니, 시작되고 말았다.
정해진 일을 정해진 방식대로 한다. 정해진 표정을 웃고 정해진 틀로 말을 한다. 그러면 나도 그들도 안심을 한다. 그렇게 모두를 안심시킨 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본다. 차가운 물을 손을 흔들어 떨어내고 앞으로 쏠린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올렸다.
아직은 괜찮다.

“들었어요? 김 부장이 비서 임신 시켜서 부인이 와 한바탕 했던 거.”

“어제 장난도 아니었지.”

휴식 시간에 한 겹 얇은 종이컵에 아슬아슬 뜨거운 커피를 넣은 채 말을 주고받는다. 정말로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서 악의를 밝게 드러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럼 김 부장은......”

손으로 목을 그어 보인다. 모두들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일말의 웃음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삼십분 쯤 뒤면 그들은 김 부장이 사직권유를 당했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아주 작은 나사가 필요할 뿐이다. 그 뒤면 멍청한 기계는 제 의사도 없이 굴러가기 시작한다.
내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건 어리석다. 거대한 시스템에서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을 없앤 것뿐이다. 나를 죽이는 것 또한 바보이다. 그렇게 숨을 멈추는 것은 진짜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산산 조각나 각각 홀로 자멸하는 세상이 차라리 편할 것이다.
인간은 서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별개의 육체를 지니고 있는 만큼의 핸디캡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모습으로 말을 잃고 마음을 고독 속에 두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목을 조르고 있는 넥타이가 삐뚤어진 것 같아 자판을 치던 손으로 매끄러운 표면을 어루만졌다.

“아, 고마워.”

누구였더라.
따끈한 커피 한 모금에 왠지 머리가 맑아진 듯한 느낌이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자 맑고 해사한 얼굴이 홍조를 띠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름표를 보고 정진희라는 것을 알았다. 몇 개월 전 새로 들어온 사원이다.
남자로서의 본능이 살아있었던 걸까. 인간에 대해 무감각에 가까운 혐오를 풀어헤치는 욕정이라는 것에 난 새롭게 눈을 떴다. 꽉 짜여진 조직에 끼여 있어도 견딜 수 있는 건 이런 쾌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해요.”

진희가 내 품 속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은 채 말했다. 그 부드럽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말없이 만져주었다.

“에, 정말이요?”

또 쓸데없는 소문인가 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이리 신선해보일 줄은 몰랐다.

“쓰레기통에 버렸단 말이야? 중학생도 아니고......”

표정들이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대충 감을 잡고 말했다.

“그러고도 살 수 있을까요?”

모두들 놀란 듯 날 쳐다보았지만 아주 상쾌한 기분에 입이 조금 더 움직였다.

“인간으로서 최악 아닙니까?”

이상했다.
하지만 뭐가 이상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며칠이었다. 공백은 느껴졌지만 회사에서의 일도, 내 몸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또각, 또각, 또각......”

무섭도록 또렷한 구두소리에 불쾌해졌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리듬을 빼앗겨 버린다. 문득 멈추었다. 한기가 정수리에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뜨르륵 칼날을 올려 휘두르는 것이 눈앞을 스쳤다.
그 움직임이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내 시야를 서성거리고 있던 검은 것과 같다고 깨닫는 순간 숨이 멈췄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119를 부르는 듯한 다급한 외침도 귓속을 파고들었다.

“순진한 아이를 꼬드겨 그 지경까지 만들었어. 하지만 어떻게든 잘 추슬렀으면 했지. 하지만 회사를 나오고서 자살을 했어. 유서를 봤지. 딸이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다더군.”

골이 띵 울렸다.

“당신 같은 사람 하나 없어진다고 내 마음이 어떻게 풀어지는 게 아니야. 하지만 당신도 고통이란 것을 알았으면 했어.”

말과는 달리 이미 벌어진 내 목을 손톱을 세운 열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나는 그녀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입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내 속에 있던 괴물이 하하 웃는 걸 보았다.
하지만 나도 하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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