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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

2005.12.16 19:2712.16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내 것이 아닌듯한 가라앉은 목소리. 강한 빗줄기가 내 뒤통수를 연신 두드렸다. 비와 함께 바람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 거대한 배 위에서도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데 하물며 썩어빠진 통나무 하나에 의지해 차디찬 바다에 떠있는 저 여자의 심정은 어떠할까.
  
“설마 정말로 나를 이대로 버려둘 생각은 아니겠죠?”
  
여자는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도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정말 강심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뭔가 말을 하려고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봐요. 그렇게 입만 뻥긋거리지 말고 빨리 좀 구해달라고요.”
  
잠시 거친 물살이 덮쳐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 좀 더 가까이 뱃전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뭐해요? 지금 파도가 덮친 것 봤잖아요! 날 죽일 셈이에요?”
  
나는 얼굴을 강타하는 빗줄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물결이 높아졌다. 멀리서 한층 커다란 파도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미쳤군요, 당신.”
  
여자의 싸늘한 한 마디가 나를 그 자리에 묶어놓았다.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퍼붓는 비속에서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뭔가 항변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연하다. 어떠한 뜻이 있다하더라도 내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운명이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도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눈 딱 감고 도망쳐 배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그만인 것을. 그렇게 쉬운 행동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물에 잠겼다가 다급해진 모습을 물 밖으로 드러냈다.
  
“이봐요!”
“저기,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때였다.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어깨에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손을 얹었다. 나는 한심하게 비명을 질렀다. 이 배에서 나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밖에 없었음에도, 겁쟁이처럼 처절한 비명을 지른 것이다. 내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리자 가녀린 체구의 젊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뭐…해? 걱정이 돼서.”

그녀의 새파란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아무 일도 아냐.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왜 나왔어. 빨리 들어가자.”
  
나는 성공적으로 바다에 눈길을 보내지 않고 그녀의 몸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우리의 발을 잡고 늘어졌다.
  
“이 미친 새꺄! 빨리 이 빌어먹을 바다에서 꺼내달라고!”
  
세상을 무너뜨릴 것 같은 번개소리가 그 절규를 덮어주기를 바랬지만 헛된 바램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바다로 눈을 돌렸다.
  
“방금… 무…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게서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곧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모든 걸 체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바다에, 사람이….”

그녀는 오싹할 정도로 창백한 얇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내심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배 안으로 뛰어가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곧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바다 속에 여전히 버려져있는 여자는 아직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거기 아가씨! 제발 나 좀 구해줘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녀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어떡하지? 어떡해, 응?”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온 힘을 짜내 여자를 구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힘껏 깨물어 입술을 적시는 피 맛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이 배는 방주야. 우리외의 인간은 태울 수 없어. 눈 딱 감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고 선실 방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발짝쯤 따라오다가 멈춰 섰다. 강한 비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몸이 약한 그녀를 더 이상 비에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다시 힘을 주어 그녀를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는 깜짝 놀라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한시도 바다에 있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말 왜 이래! 계속 비를 맞으면 또 병으로 쓰러진단 말야!”
  
오랫동안 비를 맞은 내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럴진대 그녀는 더 위태로운 상황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녀린 두 발을 힘주며 버티고 서있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부디 그녀가 빨리 마음을 바꿔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랄 뿐.
하늘이 무너질 듯한 천둥소리가 물에 잠긴 세상에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귀를 막아야할 만큼 큰 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분노에 가득 찬 신의 음성처럼 들렸다. 나는 재빨리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한층 거세진 비가 내 등을 때렸다. 그녀는 맹수 앞에 놓인 어린 토끼 마냥 몸을 떨었다. 하지만 빗속에 뿌리 내린 듯 절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천둥소리가 잦아들자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순간 하늘이 번쩍이는 것이 곧 번개가 칠 터였다. 새벽을 향해가는 밤보다도 더 어두운 구름이 하늘에 가득 차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늘 그 어디에서도 비가 그칠 실낱같은 희망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시커먼 구름엔 오직 절망만이 가득 찼다.
파도가 거세졌다. 여자는 이제 진정으로 두려움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공포에 휩싸인 모습이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에도 바다 속에 잠겼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가 비명을 지르는 입만을 남겨두고 여자의 얼굴 전체를 가렸다. 비명소리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들어본 소리 중 가장 참혹했다. 그것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절망의 소리였다.
그녀가 내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우리 저 사람을 구해주자.”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다. 굳게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그녀는 지금 차가운 눈빛으로 그저 내가 늪으로 가라앉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안 돼. 절대 안 돼.”  
  
나는 넋 나간 표정으로 말하고 또 말하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녀가 착각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의 말이라면 내가 무조건 들어줄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로서도 매정히 뿌리칠 수밖에 없다. 이건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의 의지였다. 그녀는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점차 그녀의 젖은 눈에선 서서히 단호한 의지가 사라져가고 대신 깊은 슬픔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더할 나위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누군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죽기 싫으면 바다에서 죽어가는 저 여자를 구해내라고 윽박질렀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칼에 찢겨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남겨진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신의 행동을 대변하고 있다. 폭우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켰을 때 나는 죽지도 못한 채 절망으로 살아남아 그가 시킨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의 단 하나의 위안이라면 바로 그녀의 존재. 그녀가 있음으로 해서 나는 부서지기 직전의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것이다.    
신도 그녀만은 인정해주었다. 그런 소중한 그녀의 말을 나는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나는 신의 의지에 정면으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빗속에 섞여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참을 수 없는 가혹한 시련에 갑판을 뒹굴었다. 나는 하마터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준 누군가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을 뻔 했다.  
그 순간 나를 보며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추스르고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몸이 너무나도 가녀려 힘을 세게 준다면 산산이 깨질 것만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울지마. 제발 울지마.”
  
나는 그녀를 안았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다시는 눈뜨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내 마음은 차가운 얼음조각에 서서히 심장을 꿰뚫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동시에 또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인해 따뜻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까마귀를 불러다오! 내 심장을 뜯어먹어 다오! 그 대신 제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사라지게 해다오!
나는 절규했다.
눈을 감은 채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번영했던 세계는 물에 잠겼고 세상에 남겨진 노래라고는 오직 빗소리뿐이었다. 음울한 빗소리가 절망으로 가득 찬 내 기분을 차분히 씻어 내렸다.
정신이 맑아지니 모든 게 뚜렷해졌다. 애초부터 내게는 정해진 대답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그걸 모르고 나는 병신같이 혼자 괴로워했다.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절대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신에게 선택받았듯이 그 사실 또한 절대적 운명이었다.
또다시 먼 바다에 번개가 내리쳤다.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알았어. 지금 당장 구해주자.”
  
내가 미소 짓자 그녀는 한참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울면서 웃기 시작했다. 마음이 놓였는지 맥이 풀린 모습이었다. 그녀의 미소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진작에 그녀를 웃게 만들지 못했던가.
나는 힘을 주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다리는 너무나도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미소 지으려 애썼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워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나는 서둘러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노로 얼룩진 잿빛 하늘을.
  
“서둘러야해. 지금도 충분히 그렇지만 조금 있으면 밤이 찾아올 거야. 그렇게 되면 그녀를 구하기가 힘들어져.”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려 노력하며 잡고 있던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순간 알 수 없는 고독감이 나를 덮쳤지만 재빨리 털어버리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말했던 대로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이 빌어먹을 비는 계속 되겠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약간의 빛이라도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절망감의 무게는 천지차이였다. 나는 여자의 상태를 파악했다. 여자는 이제 악 쓸 힘도 모두 소진한 채 통나무위에 간신히 걸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순간 여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까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그렇게 쉽사리 삶을 포기할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여자를 불렀다. 하지만 또다시 진노한 천둥번개가 온 세상에 울려 퍼졌고 하잘 것 없는 내 목소리 따위는 너무나 힘없이 묻혀버렸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하늘이 잠잠한 틈을 노려 다시 소리 질렀다. 내 목소리라 믿기 힘들 만큼 찢어지고 갈라지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꽥꽥거렸다. 어차피 이런 괴성 따위는 저 여자 한 명만 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이봐요! 살아있습니까! 대답 해봐요! 이봐요!”
  
헛수고였다. 여자는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생각했다. 어차피 여자를 구하려면 내가 가야했다. 여자를 빨리 배로 데려오는 게 급선무였다. 여자는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서둘러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시작했다.
내가 준비물들을 갖추고 다시 밖으로 뛰어 나왔을 때 동상처럼 멍하니 서있기만 하던 그녀가 짧은 탄성을 지르며 손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여자가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여자는 힘없이 손을 저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지껄였다.
  
“살려줘…, 살려줘….”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괜찮나요? 지금 구하러 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순간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너무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여자가 극도로 짧은 순간 나에게 증오로 가득 찬 눈길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나는 바로 웃음을 거뒀다. 아니, 알아서 그렇게 되었다. 여자의 눈빛은 세상을 뒤덮은 홍수보다도 무서운 존재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곧 이성을 되찾았지만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연 저 여자를 구해줘도 되는 것일까? 여자를 구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후에 온통 그 일에 정신을 쏟았던 나는, 다시 깊은 의문을 가지게 되어 망설였다. 과연 내가… 신이 행하는 일에… 과연 내가…. 지금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는지 나는 내 뒤에 서있던 그녀의 발을 밟고 말았다. 그녀가 신음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미안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별 것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떤 자신의 잘못이라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는 다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의혹의 잔재가 사라져가고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불꽃이 싹텄다.
  
“걱정하지마. 빨리 돌아올게.”
  
나는 젖은 그녀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키스했다. 그녀는 추위와 공포 탓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 안에 들어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말하려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을 게 뻔했다. 그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빨리 여자를 구해내는 일이었다.
다시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지 못할 강한 용기가 마음을 지배했다. 더 이상 여자의 섬뜩한 눈길이 두렵지 않았다. 나는 주먹의 힘을 주며 외쳤다.
  
“조금만 기다려요! 곧 구해줄 테니!”
  
비가 얼굴을 때려 시야를 방해하고 바람이 내 몸을 위태롭게 흔들었으나 두려움은 없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번갯불에 의해 세상이 갑자기 밝아진 그 순간 세상을 가진 자의 위대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눈을 깜빡인다.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은은한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계속 깜빡여본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방 안엔 노란 불빛으로 가득하다. 점차 기억이 선명해진다. 그래, 빌어먹을 현실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내 눈은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단지 계속해서 눈을 깜빡일 뿐이다.
나는 욕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내가 잠들어있을 때 옆에서 내 기력을 전부 빨아먹어 버린 듯 몸에는 약간의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본다. 아무런 감각도 없는 창백한 오른손이 다른 사람의 것 같이만 느껴진다.
일어나보려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힘을 쥐어짜내어 일어서서 방문을 열었다. 낡은 문이 열리는 불쾌한 소리가 어둠으로 가득한 복도로 울려 퍼진다. 복도는 고요했다. 잠시 귀를 쫑긋 세워 소리를 찾아보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향긋한 음식냄새가 어딘가 먼 곳에서부터 흘러 들어왔다. 문득 배가 고파져 배를 어루만졌다.
나는 음식냄새가 나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벽에 손을 기대며 어둠속을 걷고 있자니 점점 지옥으로 향하는 것만 같았다. 사실 그럴지도 몰랐다. 이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 내가 감히 뭐 길래 그 행렬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방주 따위는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의 계시도.
나는 잠시 멈춰 선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다. 이미 나는 신의 말씀 중 한 가지를 거역했다. 더 이상 그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내 발길이 멈춘 곳엔 오른 편으로 굳게 닫쳐진 문이 하나 있었다. 아직 음식냄새는 저 먼 곳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살며시 문을 열었다. 그곳은 내가 방금까지 있던 방과 마찬가지로 아늑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작은 방이었다. 자그마한 침대엔 사랑하는 그녀가 아닌 다른 낯선 이가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 잠들어있다. 그래, 낯설지만 누군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망망대해 한 복판에서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저주하던 존재가 지금은 아무런 표정 없이 편안한 꿈을 꾸며 잠들어있다.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아직도 선명히 뇌리에 박혀있다. 여자가 잠에서 깨어나 처음 얼굴을 맞대었을 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여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도 두려워졌다.
얇은 이불이 살며시 여자의 숨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문을 닫았다. 빛이 사라지고 다시 어둠 속에 홀로 내던져지자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여자가 이대로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둠에 삼켜진 인간은 이 얼마나 추악하고 가녀린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어머? 일어났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앞엔 방긋 웃음 짓는 그녀가 촛불을 들고 서있었다.
  
“음식이 다 돼서 깨우러가는 길이었는데.”
  
나는 말없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있을 가치는 충분했다. 그녀만이 어둠에 뒤덮인 이 세상에서 한 줄기 빛으로 나를 감싸 안아준다. 지금으로선 그녀만이 나의 전부였다.
그녀는 내가 말이 없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바라보았다.
  
“들어가 봤어? 그 사람은 일어났어?”
“아니, 아직.”
“그래? 그럼 어떡하지… 깨워야 하나?”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그녀의 따스한 빛 안에서도 께름칙한 무언가가 달라붙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마. 힘들었을 텐데 푹 자게 놔두고 우리끼리 먼저 먹자.”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식당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녀와 함께 함으로써 점차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어느덧 머릿속엔 걱정이 사라지고 허기로 가득 찼다. 나는 미소 지으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때였다. 등 뒤 어둠너머로 심연 깊숙한 곳에부터 울려 퍼지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낡은 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녀는 즉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한기가 내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내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뼛속 깊이 냉기가 박혀 고통을 자아냈다. 나는 얼어붙은 채로 서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방문에 기댄 채 여자가 힘없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탄식을 지르며 내게서 벗어나 여자에게 달려갔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는 여자의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일어났어요? 몸은 좀 어때요?”
  
여자는 그녀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를 쳐다보았다. 입은 아직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여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침내 여자가 내게 말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몸은 괜찮아요?”
  
나는 예상과는 다른 첫마디에 당황스러워 잠시 아무 말도 못했지만 이내 웅얼거리듯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와 여자를 바라보며 음식이 준비되었으니 어서 식사를 하자고 말했다. 여자는 매우 기뻐하며 빨리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식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저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발길을 재촉하고 대화를 나누며 앞서 나아가는 그녀와 여자를 보고 있자니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성적표를 손에 든 채 어쩔 수 없이 집으로 향하는 어린 아이처럼 무거운 마음이 되어 그들을 따라갔다.
식사 도중, 여러 가지 대화가 오갔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따뜻한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배도 몹시 고팠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식탁에 가득했지만 마치 코가 막힌 것처럼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접시가 비워지자 눈치를 살피며, 먼저 일어나도 어색하지 않을 타이밍을 재느라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그녀와 여자는 꺄르르 웃으며 지치지도 않고 대화에 몰입해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으니 이쯤에서는 일어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을 마치고 의자를 뒤로 밀며 말을 꺼냈다.
  
“자, 그럼 나는 몸이 피곤해서 먼저 일어날게. 얘기들 나눠.”

하지만 내가 허리를 피기도 전에 그녀가 일어나며 말했다.
  
“아, 잠깐만 기다려. 차 준비할게. 한 잔 마시고 가.”
  
차라니 맙소사. 세상 모든 이들이 물에 빠져 죽었건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재앙 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려하고 있다. 정말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차를 끓이러 가자 테이블엔 나와 여자만이 남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자의 시선을 피했다. 어떡해서든 눈만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정도는 굳이 보지 않더라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점점 침묵이 나를 옥죄어왔다.

“저기요.”
  
나는 속으로 욕을 뱉으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두려워했던 눈빛이 지금은 온화해보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자 이성을 되찾았기 때문일까.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여자가 말했다.
  
“이 배가 방주라고 했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중에 그녀가 그런 얘기도 여자에게 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나를 태우지 않으려 했군요? 방주엔 암수 한 쌍이면 족할 테니.”
  
여자는 두 손을 깍지 끼고 테이블 위에 턱을 받쳤다. 여자는 짓궂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자 여자가 자세를 바꿔 의자 뒤에 몸을 기댔다.
  
“좋아요. 기억하기 싫은 지난 일은 전부 잊자구요. 그런데… 그렇다면 이 배엔 다른 동물들도 타고 있나요?”
  
나는 다시 한 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차를 마시고 나서 동물들 구경시켜줘요. 괜찮죠?”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그녀가 향기로운 향이 나는 차를 쟁반에 담아왔다. 둘은 벌써 동물들에 대한 얘기로 다시 활기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좀 전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먼저 일어나려 않았던가.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차의 향을 음미했다.


  
동물들이 있는 곳은 이 커다란 배에서도 가장 깊숙하고도 먼 곳이었다. 아래로 향하는 기나긴 계단의 행렬의 지루한 시간을 견뎌내고 나면 은은한 푸른빛이 가득한 끝없는 복도가 펼쳐져 있다. 복도의 왼편과 오른편에는 수많은 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엔 방에 어떠한 동물이 들어가 있는지 큰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다.
내가 배에 관한 전반적인 일들을 담당하고 있다면 그녀는 요리를 제외하고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동물들에게 투자하고 있다. 그녀는 어떤 동물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모두 좋아하고 소중히 다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이래 그녀는 동물들 앞에서만 진실한 마음이 담긴 웃음을 띠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녀의 모든 걱정을 없애고 웃음 짓게 만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오직 말 못하는 동물들만이 그녀를 진정으로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자는 방문을 하나씩 열어나갈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뿌듯해하며 여자가 바라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설명에 열을 올렸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내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편치 않았다. 나는 어느새 부터 전체적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마음이 무거웠고 알지 못할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자극했다. 가벼운 두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한시바삐 침대에 눕고 싶었다. 아니, 단지 이 동물의 사원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위층인 초록 식물 가득한 정원으로 뛰어 올라가 신선함이 가득한 공기로 몸을 적시기를 절실히 바랬다.
여자가 비둘기에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문을 닫자 이윽고 긴 여정이 막을 내리고 황량한 복도의 끝만이 침묵을 동반한 채 우뚝 서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갈색으로 칠해진 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자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나와 그녀가 쳐다보자 고개를 들며 내게 말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던 모든 동물을 데려오지는 못했군요?”
“그렇죠. 한계가 있으니까요. 우선 덩치가 부담스러운 코끼리 같은 경우도 기회는 있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싣지 못했죠.”
“그리고 뱀도.”
  
여자가 차갑게 내뱉은 말에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뭔가 대꾸하려 했지만 입안에서 맴돌며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했다.
  
“비로 정화된 세상에서 당신들을 선악과로 유혹할 존재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거군요.”
  
여자는 혀를 내밀며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여자의 혀끝이 갈라져 있음을.
아니, 그것은 내가 상상한 결과일까.
나는 고개를 흔들며 여자를 밀치며 계단이 있는 복도 반대편으로 가려했다.
  
“비켜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일 뿐입니다.”
“그렇겠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빈정거림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지만 곧 다시 계단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거야?”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나가보려고. 혹시 비가 그쳤을지도 모르잖아.”
“아, 나도 같이 가요.”
  
여자가 태연스레 말했다.
빌어먹을. 제기랄. 염병할.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침묵은 내가 바라던 바였다. 나는 더 이상, 이 여자와 단 한 마디의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쁜 숨을 내쉴 정도의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라갔지만 여자는 뒤로 쳐지지 않고 내 뒤에 바싹 달라붙은 채 잘도 따라왔다. 놀라운 체력이었다.
  
“우비를 챙겨 입고 나옵시다. 아마도 비는 계속 오고 있을 테니까요.”
  
숨을 헐떡이며 내가 말하자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여자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정 눈동자에는 어느새 섬뜩한 기운은 사라졌지만 나를 깔보는 듯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빨간 입술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조소하는 빛이 역력한 모습이랄까.
우리가 갑판에 올랐을 때 비는 한층 더 거세져 있었다. 행여나 오늘쯤엔 비가 그쳐주지는 않았을까 하는 작은 바람은 빗줄기 속에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지 오늘로 13일째였다. 하지만 여전히 하늘은 검은 먹구름에 지배당하고 있었으며 차가운 빗줄기가 모든 희망을 앗아가 버린 상태였다.
나는 바다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갑판 끝으로 향했다. 바다는 신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분노로 넘실거렸다. 활기차고 기운 찬 그 모습 뒤엔 한 치의 자비도 있을 수 없다는 모습이 역력히 담겨있다. 내 마음은 바다 밑으로 사라진 전 세계의 도시들처럼 한없이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해요?”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바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아무 것도. 바다를 보고 있자니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네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순간 나는 움찔했지만 손을 빼는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이봐요. 당신과 그녀는 새로운 아담과 이브죠? 그리고 나는 불청객이고요.”
  
여자가 잠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멈췄다. 나는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어요. 신께서 허락하지 않은 생명이죠. 그렇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요?”
  
빗소리 외에는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분한 빗소리가 내 마음을 적셨다. 여자는 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바람 앞의 촛불보다도 가녀린 얼굴이 나를 쳐다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차가운 손에 내 반대편 손을 포갰다.
  
“우리를 지켜봐줘요. 그리고 지켜줘요. 우리가 선악과를 먹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창백해진 얼굴색을 지우진 못했다. 나는 새로운 시대를 견뎌낼 용기를 얻기 위해 바다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온 힘을 쥐어짜내 울고 싶은 마음, 포기하고 싶은 마음, 시련에 황폐해진 마음들을 떨쳐내려 소리 질렀다. 모든 걸 털어내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이윽고 고함지르는 것을 멈췄을 때 뺨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눈물과 함께 나는 거친 구름들 사이로 나타난 햇살에 두 눈을 감고 몸을 실었다.
  
그때였다. 상상이 아니라 내 몸은 실제로 급격히 흔들렸다. 의아한 마음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내 몸이 시커먼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곧 바다가 얼마나 차가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너무 놀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나는 지옥의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바둥거렸다. 어쩌다 바다로 떨어지는 실수를 한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팔을 휘저으며 도움을 요청하려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모든 걸 깨달았다. 나를 바다로 떠민 건 여자였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불장난을 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살려달라고 소리치자 여자는 더욱 큰 소리로 깔깔 거리며 웃었다. 내가 절망에 몸부림치며 거친 파도 속에서 조금이라도 배에 가까워지도록 발악하고 있을 때 여자가 몸을 한껏 숙이며 말했다.
  
“너도 바보가 아니라면 잘 알고 있겠지? 신이 바라는 건 셋이 아니라 둘이야. 단지 둘 뿐이라고. 걱정하지마. 내가 네 사랑스러운 그녀의 아담이 돼줄 테니까. 그녀는 한참동안 슬픔에 젖겠지만 곧 떨쳐내고 일어설 거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임무를 부여 받았으니까. …나와 함께.”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너무 눈부셔 여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배는 점점 멀어지는 중이고 나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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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도 없는 게 길기만 한 글입니다
넓은 아량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roland
댓글 2
  • No Profile
    배명훈 05.12.17 00:25 댓글 수정 삭제
    재미도 있고, 긴 분량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구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부분에서 더 높은 탑을 쌓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1층 2층이 꽤 튼튼해 보였거든요.
  • No Profile
    ^^ 06.01.22 02:16 댓글 수정 삭제
    뭐랄까, 강렬하네요. 다만 왜 주인공이 떠밀려 떨어져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네요. 암튼 생생한 글을 읽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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