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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엘리제를 위하여(PART. A)

2016.04.28 15:3304.28

 
 여자는 검은 방에 있었다. 목재 탁상 위에 놓인 것은 종이 한 뭉치와 잉크, 그리고 날카롭게 벼려진 펜 하나. 펜을 들기 전에 여자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늙은 마법사다. 그 마법사는 이 세상이 여러 차원으로 나뉘어있고 신도 한둘이 아니며, 그중에서도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은 단 하나라는 주장을 했었다. 언제 만났었는지도 모르는 그 마법사의 이름을 여자는 떠올릴 수도 없었다.
 여자는 펜을 쥐었다.
 당연하다. 이 세계는 그런 지나가는 조연에게 이름을 허락할 만큼 넓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 그런 조연을 창조한 것은 스스로 만든 세계에 대한 자랑이었을까? 세계 속 인물들에게 자신을 알리려던 알량한 공명심이었을까? 하긴 상관없는 이야기다.
 여자는 펜에 잉크를 묻혔다.
 해야 하는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해야 하는 일도 지금은 모두 확실해졌다. 그렇기에, 그래, 끝내자, 그렇게 결심할 수 있었다.
 여자는 종이에 글을 써내려갔다.
 '나는 분명 이 세상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것이다.'
 여자의 글은 그렇게 시작된다.
 
 A. 마녀의 수기
 
 "나는 분명 이 세상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세상이 정말 싫기에 마녀 테레제는 이 세상을 창조해 낸 무책임하고 불공평한 신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차원의 존재인 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신이 사랑하지도 않는 이 세계를 망가뜨려서, 미약하게나마 상실감을 안겨 주는 것. 그 정도뿐.
 그래서 나는, 테레제는 글을 쓰기로 했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테레제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면 무슨 헛소리냐고 비웃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나, 삿된 마녀의 소문을 일각이라도 들었다면 그런 유쾌한 웃음도 찝찝함에 일그러지겠지.
 안심하라.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나 적은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그렇게나 즐기면서 죽이지도 않았다. 파리를 때려죽일 때의 쾌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단언컨대, 나에게 쾌락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일절 없다.
 최초의 살인은 자기방어를 위해서였다. 물 위에 떠다니는 부표처럼 삶을 흘러가듯이 살아왔던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사람을 죽였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는다. 당시의 경험은 내가 부표가 아님을, 그러나 부표만큼이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사람이었던 것을 앞에 두고 느낀 것은 복합적인 감정.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건 공포. 나도…… 조금만 방심하면 저렇게 될 것이라는 공포. 나날이 공포에 잠식되어 극도로 예민해진 나는 약간의 위협만 느껴도 사람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여자가 되었다.
 피해자인 척하려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계기를 이야기했을 뿐.
 살인이라는 것은 어쨌든 화제성을 갖고 있다. 곧바로 내 이름은 인근 지역에서 유명해졌고, 내 이름 앞에는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마녀라는 것은 즉, 이단이다. 에프리스 교단이 소문을 들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왔을 테지만, 흥, 애초에 그 녀석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찾아온 구석진 마을이다. ……그렇게 당시에는 생각했었지만. 처음부터 에프리스는 나 같은 것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나의 공포는 이제 그들의 공포가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피해자인 척할 수 없는 가해자가 되었다. 쓸데없는 과잉대응은 사라졌지만, 사람을 죽였다. 나를 몰아내고자 찾아오는 이들만 죽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죽인 것도 아니다.
 차근차근.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는 것처럼 꾸준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 이제 이곳의 조갯살 수프는 못 먹겠네. 제철에 잡은 거북조개는 풍미가 독특해서 꽤 좋아했었는데.
 어떤 어촌이 그렇게 괴멸했다. 마녀의 손에 의해서.
 붉게 물든 두 손을 보았다. 무언가 어렴풋이 느낀 게 있었다. 당시에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설마 '운명'일 줄은.
 운명, 뜻하는 바는 이렇다. 초월적인 누군가의 의지로 결정되어 벗어날 수 없는 길. 신께서 안배하신 길.
 나는 신이 바라는 대로, 누군가를 죽이도록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이런, 또 변명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네.
 어쨌건, 죽일 그 누군가에 '신'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 게 애석할 따름이다.
 
 교단의 눈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만난 사람이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 깊지 않았기에, 그가 자신을 가리켜 무슨 왕인가 하는 실없는 소개를 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흉흉하게도 일련의 대화는 4구의 시체가 놓인 어떤 가정집이었던 폐허에서 이루어졌다. 말해두는데 내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눈앞, 순수한 웃음을 짓는 사내의 '실수'였다. 무심코, 라는 단어를 그의 입에서 들었을 때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세상 나만 이런 악마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이런 나라도 평범해질 수 있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를 이해해 주었다. 불쌍히 여겨주기도 했고 두려워해 주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의 테레제를 인정해주었다. 씩 웃으며 '그래, 너는 정말 마녀로구나.' 말했다. 문득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들었을 때 흘려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민망해하며 물어보자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이름이 없다. 대신 멋진 호칭을 가지고 있지. 마왕, 모든 삿된 것들의 왕이다.'
 듣고 나서 생각했다. 아, 그렇다면 이 사람은 분명 나의 왕이다. 나는 아주, 아주 삿된 여자, 마녀 테레제니까.
 
 세상에 홀로 버려졌을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미로를 헤쳐나갈 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게 당연한 걸까?
 그저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 그 끝에 통성명을 한 것만으로 마녀는 마왕을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버린 마녀는 마왕이 자신을 사랑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애를, 아니, 사람과의 거리감 자체를 모르는 마녀는 좋을 대로 생각해버리고 만 것이다. 정말이지, 멍청하고 어리석은 테레제. 결국은 신의 유희에 놀아났을 뿐인데.
 유희.
 발단은 마왕이 던진 질문이었다. 무심코, 라고 해도 좋겠지.
 '그 탈은 왜 쓰고 있지?'
 숨을 죽였다. 손을 들어 차가운 금속 재질의 탈을 만졌다. 탈의 눈구멍 너머로 마왕의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에 비추어진 탈은, 눈꼬리가 아래로 쳐진 울고 있는 표정의 데포르메. 내가 통곡의 마녀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한 그것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언젠가는 마주했을 질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금 기뻤다. 그 질문은 마왕이 마녀를 궁금해한다는 방증이었으니까. 관심의 표현이었으니까. 기쁘지 않을 리 없다. 그렇기에 망설였다. 이 탈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까 봐.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부정할까 봐. 그러한 불길한 예감 속에서도 나는 결국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신이 안배하신 나의 길이었으니까.
 결심했다. 나는 탈바가지 위에 손을 얹었다. 탈 아래에 숨겨진 표정과 탈 위의 표정이 다르길 빌면서, 나는 탈을 벗었다. 약간 넓어진 시야에 마왕의 놀란 얼굴이 자리 잡았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탈로 감추었던 그 얼굴은 아주 유명한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행운과 웃음의 여신, 엘리제의 얼굴이었으니까.
 
 엘리제. 에프리스 교단에 속한, 사람이면서 여신이라 추앙받는 여자. 그녀의 웃음을 보는 모든 이들이 행운의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 너도나도 그녀를 찾아 신전을 방문한다.
 '설마하니 그 유명한 여신이, 통곡의 마녀의 정체였을 줄이야.'
 마왕의 반응이었다. 재미없는 농담이다. 행운을 건네주는 여신과 절망을 보여주는 마녀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없다.
 마왕은 매우 흥미로워했다. 지식으로 알고 있고 관심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유명인사가 자신의 지인과 접점(그것도 꽤 밀접한)이 있다고 할 때의 호기심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하물며 행운의 여신과 통곡의 마녀라니.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한차례 폭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
 간단한 수수께끼다. 얼굴이 닮은 두 사람이 있다. 이 둘이 동일인물이 아닐 때, 둘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유추하라고 한다면?
 '여신과 마녀가 자매라니. 웃기지도 않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왕은 웃고 있었다. 순진하고 무구하고 순수하게.
 '대극의 자매라…… 고의성이 엿보이는걸.'
 직감일 뿐이지만.
 그렇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지만, 마왕의 추측은 사실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나는 모든 삿된 것들의 왕 앞에서, 삿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에프리스 교단 산하의 한 고아원에 특별한 능력을 지닌 원아 둘이 있었다. 항상 함께 행동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살아가는 둘은 교감능력이 극도로 발달하여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서로가 겪고 느끼는 감정을,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쌍방으로 한정된 교신 능력. 초능력이라고 불리는, 마법과는 다른 종류의 기적.
 한 보육사에 의해 능력의 존재가 드러난 둘은 본교에서 파견된 신학자에게 끌려갔다. 두려움과 공포로 둘은 위축되었지만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기에 울지 않았다.
 불안 속에 도착한 곳은 흰색 건물. 약간 빛바랜 색이 낡은 의료원 따위를 연상케 했다. 두 소녀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집이자, 감옥.
 1년이 지나갔다. 두 아이의 마음속에 안심을 심어놓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맛있는 것을 매일 먹고, 매일 푹 잘 수 있으며, 매일 같이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는 것만으로 두 소녀는 안도했다. 평화로운 나날 속에 실험을 위한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체.
 실험의 명칭은, 비실체물질전이실험. 실험체는 일영이체여아.
 당시에는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지만, 지금이라면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 실험은 일종의 '선인' 만들기 같은 거다. 두 실험체를 두고 한쪽에는 선한 것만, 다른 한쪽에는 악한 것만 몰아넣어 대극의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선인과 악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실험을 위한 실험체는, 그런 의식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극대화된 교감능력으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처럼 살아가는 쌍둥이. 하나의 영혼이 두 몸을 갖고 태어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두 명. 그렇기에 그들은 소녀들을 일영이체라 불렀다.
 두 사람을 따로 떨어뜨려 놓는 것 따위 매우 간단했다.
 공평하게 나오던 빵의 크기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차이가 났다.
 공평했던 수면 시간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차이가 났다.
 언제나 자유롭던 나날에, 누군가에게만 족쇄가 채워졌다.
 공평하게 대우받던 둘은, 차별을 받으며 자의식이 단단해져 갔다. 누군가에게는 안식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주어졌다. 늘 같은 것을 느껴오던 두 사람은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끼며 혼란에 빠졌고 정신이 급속도로 불안정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미쳐 버릴 거야. 어느 누군가가 생각하자, 어느 누군가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우리 잠시 떨어져 있자. 어느 누군가가 제안하자, 어느 누군가가 동의했다.
 나는 교감을 그만두었다.
 그 후로 다시 만나게 되는 건 1년 뒤다.
 그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은 엘리제와 그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테레제가 서로 마주했을 때, 둘은 교감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같은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 이제 우리는 그 시절로 달아갈 수 없겠네.
 두 번 다시 교감할 수 없겠네.
 너무나도 달라진 우리가 다시 달라붙는다면, 분명 그때 그러했듯 순식간에 미쳐버릴 거야.
 테레제는 너무 슬퍼져서 눈물이 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것을 닦아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흐릿해진 시야에 비친 것은 엘리제의 일그러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한때 나와 같았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다른 사람. 테레제는 울고 있었다.
 엘리제는 웃고 있었다.
 사고가 정지했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다가 이내 둑이 터지듯 비명처럼 생각이 메아리쳤다.
 먼저 미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건 누구였지?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먼저 교감을 그만두자고 한 건?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은 정말로 나였나? 일영이체. 하나이면서 둘, 둘이면서 하나. 본래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혼동 따위 할 리 없다. 하지만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교감을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는 정말로 …… 나인가?
 착각이라고 믿고 싶었다. 당장 교감이라도 해서 엘리제의 생각을 읽고 싶었다. 엘리제, 무슨 생각이니? 무엇을 떠올렸기에 그렇게 웃고 있는 거야? 우는 나를 보고 무엇이 그렇게 기뻐서 웃고 있는 거야? 너와 나는 늘 함께였어. 웃을 때도, 울 때도. 언제나 하나인 것처럼 함께 했지. 비록 지금은 너를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내가 울 때는, 너도 울 거라고 당연하게 믿고 있었어. 엘리제. 대답해 줘. 나는 지금까지 착각해 온 거야?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어?
 답은 알고 있었다. 신학자들. 그리고 그들의 신, 에프리스.
 나는 엘리제의 묘하게 비틀린 표정에서 비웃음과 안도의 감정을 읽어냈다.
 아아, 내가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런 감정을.
 비록 교감하지 않았더라도 테레제는 엘리제의 감정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둘의 교감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이제 와서 쓰는 말이지만, 이제는 그따위 사건 정도로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더 큰 절망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시의 나는 그때까지의 삶 중 가장 큰 절망의 벽에 부딪혀 있었기에 진실을 올바르게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을 사실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렇기에 나는 엘리제를 증오했고, 엘리제의 얼굴을 증오했다. 무심코 지나치는 거울 속에 비친 엘리제들이 너무 두렵고 증오스러워서 탈을 뒤집어썼다.
 깨진 거울의 마녀는 통곡의 마녀가 됐다.
 
 이야기를 다시 되돌리자. 이야기를 끝마친 내게 마왕은 이것저것 물었다. 에프리스교의 실험. 엘리제와 테레제의 교감 능력을 이용하여 한 육체에는 선을, 한 육체에는 악을 부여한다는 계획.
 '그리고 악을 제거하면 오롯이 선한 것만 남게 된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을 자처하는 종교가 악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 결국 그들의 실험은 절반만 성공해서, 나는 이렇게 살아있지만.
 '어떻게 성공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실험이네. 게다가 악질이고.'
 그것이 교단이 자랑하는 여신의 실체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마왕이 입꼬리를 치켜세우고 웃는 모습을 나는 봤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비집어 흘러나오는 것도.
 '재미있네.'
 
 마왕의 엘리제를 향한 집착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나와는 정 반대에 존재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삿된 여자. 라며, 엘리제에 대해 말하면서 애정 어린 표정을 보였다. 나와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표정.
 엘리제. 너는 어째서, 전혀 상관없는 타인이 되어서도 나를 괴롭히는 거니? 나는 너 때문에 힘든 일을 많이 겪고, 얼굴도 감추어 버렸는데. 너는 이미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잖아. 그 얼굴을 만인에게 보여주고 칭송받고 있잖아. 나에겐 이 사람밖에 없는데, 왜 그마저도 빼앗아 가는 거야? 나보다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네가 왜?
 질투는 분명 악한 감정이고, 테레제는 결국 악인이다.
 
 모두 배경 설명에 불과하다. 신이 유희를 시작하는 시점은 훨씬 뒤다. 마왕이 교단과 전쟁을 치르고자 삿된 존재를 그러모으고 마침내 교단의 상징인 여신을 납치하는 데에 성공했을 때다. 다시 말해, 몇 번이고 세계를 되돌려도 나는 언제나 수정 속에 갇힌 엘리제를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은, 말하자면, 세계의 시작.
 나는 엘리제를 보며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신 납치의 주역으로, 마왕은 나를 지목했다. 엘리제와 같은 얼굴을 한 나를 여신의 대역으로 내세워 교단의 대응을 늦춘다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하하. 나는 그의 계획을 듣고 메마르게 웃었다. 결국 나는 미끼 정도의 존재다. 이용할 수 있는 말. 왕의 말. 신의 말.
 달이 없는 밤. 엘리제와 오랜만에 마주했다. 오직 여신만이 홀로 사용하는 침실에 갑작스레 내가 등장했는데도 엘리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웃고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무엇을? 언제부터?
 동요한 쪽은 오히려 내 쪽이다.
 '나는 말이에요, 언니. 언니가 오지 않았으면 했어요.'
 당혹감에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요동쳤다.
 들켰나? 여신 납치 계획이 어디론가 새어나갔고, 교단 측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건가? 그래서 이렇게 여유로운 거고?
 '아니에요. 아무도 몰라요. 저만이 알고 있죠. 그 의미를 아시겠나요?'
 부정해준 것은 내 동생이었다.
 등 너머로 오싹함이 내달렸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혼탁한 오물이 되어버린 듯한 엘리제의 웃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떠올린 자신에게 경악했다. 저 미소의 어디가 행운과 웃음의 여신의 미소인가? 어떻게 저런 게 선인의 미소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머릿속에 부유했다. 아무리 가라앉히려 해도 가라앉지 않는.
 엘리제는 내가 이곳에 올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탈을 쓰고 있는 내 얼굴을, 어둠에 파묻혀 기척을 지운 나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지?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사람인 이상 그 상태를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부정하고 부정했지만, 사고는 멈추지 않고 확장해나갔다.
 먼저 미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건 누구였지? 먼저 교감을 그만두자고 한 건? 그리고 그걸 받아들인 사람은? 그 사람은 정말로 교감을 그만두었나? 머릿속에 떠오른 진실은 더욱 견고해져서 해답이 되었다.
 '엘리제는 교감을 그만둔 적이 없다', 라는 해답이.
 왜? 먼저 떠오른 건 의문. 왜 엘리제는 교감을 그만두지 않았지? 그다음에 떠오른 것도 의문. 미칠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은 모두 착각이었나? 그다음에 떠오른 것은 부정. 그럴 리 없다. 그런 가정은 이야기의 전제를 뿌리부터 부정해버리게 된다. 다음은 의심. 정말 그런가? 정말 그럴 리 없나? 다음은 확인. 마녀는 여신과 교감하려 한다.
 머리에 세차게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뭘까, 이 말도 안 되게 큰 소리는.
 착각인가? 착각이겠지.
 마녀는 머리를 붙잡고 엎드린 채로 생각했다.
 사람의 머리가 이런 소리를 낸다면 죽었다고 봐야 한다. 고통이 허용치를 아득히 넘어서서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여신의 얼굴을 본다.
 엘리제의 웃음이 슬픈 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만두세요.'
 찰나의 교감 끝에 알게 된 게 있다.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마녀가 멍청했다는 사실이다.
 선인 만들기. 악인의 존재는 부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에프리스 교단의 실험이 절반만 성공했다는 얼간이가 대체 누구지? 그들은 원하던 것을 얻었는데. 교단을 상징하는 여신과, 교단을 적대하는 마녀를 모두 완성시켰는데.
 둘은 대극이지만, 방향성은 같았다. 여신을 숭배하는 이들은 교단 아래에 뭉친다. 마녀를 적대하는 이들 또한 교단 아래에 뭉친다. 어느 종교든 상징물을 갖고 있듯이, 어느 종교든 적을 갖고 있다.
 아냐. 아냐아냐아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엘리제는 여신으로서의 삶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마녀로서의 삶도 알고 있다. 두 개의 상반된 삶. 그 고저 차를 매일 같이 견디고 있다. 비웃었다고? 안도했다고? 그 엘리제가 그럴 리 없었는데, 질투와 원망으로 얼룩진 악인은 멋대로 상상해버렸다. 상상을 진실이라 믿으며. 하지만 상상은 진실이 아니었다. 진실을 알게 된 마녀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신 분열이 일어날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엘리제. 그 정신이 깨지지 않고 있는 건 어째서일까? 그 가련한 웃음으로 무엇을 지키고 있는 걸까?
 왜 너는…… 울지 않지?
 말이 되지 못한 나의 질문에 엘리제가 대답했다.
 '울어서는 안 돼요.'
 웃으면서.
 '우는 것은 테레제 언니의 역할이에요. 저는 울 자격이 없답니다.'
 엘리제는 그 말을 끝으로 작별을 고했다. 나와 함께 왔던 마왕의 하수인에게 자신의 신병을 맡기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엘리제와 하수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교단의 눈을 피해 사람을 죽였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엘리제는 언제나 눈치채지 못하게 내 곁에 있었다. 교단은 나를 볼모로 엘리제에게 웃음을 강요했다. 교단은 마녀라는 악이 더 커질 때까지 방치했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고 자만하면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신의 방이라기엔 조금 살풍경한 방. 거울이 있길래 앞에 서 봤다. 비추어진 건 탈 쓴 마녀.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하는 건 여신의 대역. 여신이 되기 위해 마녀는 탈을 벗어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 탈을 벗을 수는 없었다. 눈꼬리가 아래로 쳐진 울고 있는 표정의 데포르메. 통곡의 마녀를 상징하는 유일한 물건이다.
 그러니 이 탈을 벗었을 때는, 웃을 수 있을 때뿐이다.
 이제부터 나는 엘리제의 대역이다. 결코 울어서는 안 된다. 우는 것은 테레제의 역할. 웃음 뒤에 울음을 가두는 것은…… 엘리제의 역할.
 나는 눈물 자국이 사라졌을 때쯤이 되어서야 마녀의 얼굴을 벗겨 내었다.
 웃음 속에 에프리스를 향한 증오를 가두고.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마왕을 향한 나의 사랑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머릿속을 그득 채운 건 오직 엘리제에 대한 것. 엘리제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에 대한 것.
 장애는 두 가지. 하나는 에프리스교. 동생을 이용하는, 협박하는 신의 종교. 또 다른 하나는 마왕. 절대적인 악 아래에 모인 왕의 수하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 두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나는 에프리스 교단에 머무르면서 점차 내가 해야하는 일에 대해 확신을 하게 됐다. 신을 증오하지만 '계시'라는 게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마녀 테레제는 전쟁의 불씨가 된다.
 자신과 동생에게 이런 슬픔을 안겨주는 세계 따위 정말 싫다. 세계를 만들었다고 자신의 세력을 불려 자랑질하는 에프리스라는 신 놈도 싫다. 그 신 밑에서 하인 노릇을 하겠답시고 선인 따위나 만들고 있는 교도 놈들도 정말 싫다!
 '엘리제, 웃으세요. 마녀가 쫓기는 걸 원치 않는다면.'
 아흐레 정도 되었을 때, 친근한 척하던 한 교도가 안면을 일그러뜨리더니 내뱉은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요즘 표정이 너무 굳어 보인다고 하는 말이란다. 아닌 게 아니라 웃는 게 너무 힘들었던 나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구역질 나고 추악한 교단에서의 생활이 도저히 웃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웃었던 건 모두 엘리제를 위해서였다.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웃을 수 있었던 건.
 엘리제는 역시 나를 위해서 웃고 있었구나. 그 웃음을 이제 와서 직시하기엔 너무 과분하다. 그리고.
 '옳지. 엘리제는 웃는 얼굴이 가장 아름다워요.'
 너희에게는 더욱 과분하다.
 그날 밤 그 교도를 으슥한 골목으로 불러내었다. 테레제는 통곡을 얼굴에 쓰고 가두어두었던 분노를 한가득 분출했다. 너무나도 화가 난 나머지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하나 더. 내가 아흐레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한 사내의 티 없는 웃음 덕분이기도 했다. 순진하고, 무구한 그 미소에 나는 무엇을 겹쳐보았던 걸까? 마왕……? 엘리제……? 신만이 아시겠지만, 둘 다 일지도 모른다. 둘 다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다음 날 테레제는 깜짝 놀랐다. 한 사내가 손에 검을 쥐고 자신에게 돌진해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한 여름밤의 무도회. 수많은 인사들이 있는. 많은 시선이 여신인 자신을 향하는.
 당연하게도 여신의 경호대는 사내를 용납하지 않았다. 붙잡힌 채로 사내는 외쳤다.
 '살인자!'
 '어제 왕자님을 죽이는 것을 똑똑히 봤어!'
 '탈을 쓰고 있었지!'
 '이 가짜!'
 '여신님의 얼굴을 훔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지?'
 '여신님을 돌려줘!'
 맹렬하게 외쳐대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제 일을 들켰나? 그보다 왕자라니?
 '수행교도로 입교했던 왕자가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혼란을 방지코자 잠시 발표를 미뤄뒀었는데…….'
 교내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다 알고 있다는 집행관이 슬며시 다가와 속삭였다. 설마 그 시체 자식이 왕자였을 줄은…….
 '여신님께 누를 끼치기 위해 외부에서 들어온 음해 세력일지도 모릅니다. 사건을 저지른 뒤 여신님께 뒤집어씌우는 거죠.'
 체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명령을 내리려는 집행관을 손짓으로 제지했다. 사내를 붙들고 있던 경호대에도 사내를 놓으라고 명했다. 사내는 예상치 못한 나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듯 아니면 경계라도 하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득달같이 달려들 때는 언제고.
 무도회장 내부의 모든 시선은 나와 저 사내에 쏠려 있었다.
 자, 어떻게 할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차피 내가 할 행동 같은 건 정해져 있었다. 신이 우악스럽게 이끌고 간 예정조화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걸 생각한 것 같다.
 아직 엘리제와 테레제가 교감하던 시절.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던 그 시절에, 같이 읽었던 어떤 그림책. 사악한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기 위해 용사가 모험을 하는 이야기.
 머릿속으로 남모르게 자매끼리 대화하는 걸 좋아했다.
 공주님이 너무 불쌍해. 용사님이 구해줬으니까 행복하지 않을까? 나쁜 용도 용사님이 이렇게 해치웠잖아. 있잖아, 있잖아. 왜 용사님은 공주님을 구한 걸까? 간단하지.
 '당신은 엘리제를 사랑하나요?'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내만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언니, 그렇다면 만약에 용사님이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구하러 오지 않았을까? 바보. 처음부터 용사였던 사람은 없어. 구하러 왔기 때문에 용사인 거야. 사랑했기 때문에 구하러 온 거고.
 모진 고문을 당해도, 친자매를 미워해 버리는 비극을 겪어도, 세상은 용사님을 보내주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림책과 현실이 같을 리 없다. 그림책의 작가를, 세상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른다. 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나요? 나를 사랑해서, 나를 구해주는 사람은 왜 없는 건가요?
 하지만 지금은 안다. 자신의 감정을 숨죽이면서, 타인의 고통스러운 감정마저 받아들이면서, 원하지도 않는 여신 행세를 하며, 언니가 쫓기지 않기 위해 언제나 웃어야 했던 누군가의 사랑을 안다. 그 사랑을 알아버렸으니, 더 이상 불평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구원 받았다.
 그렇다면 불쌍한 내 동생은 어떡하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내의 순수한 반응이, 사내의 올곧은 두 눈동자가, 정말 사랑스럽게 느껴 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 이 사람이 동생의 '용사'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사악한 용의 역할은 내가 하면 된다. 마왕도 있다. 그리고 끝에는 엘리제를 그렇게 만든 에프리스 교단도 있다.
 뭐야. 적이 이렇게 많으면 용사는 어떡하라고.
 그러고 보니 그림책의 용사도 참 많은 적을 두었었다. 수많은 적을 헤치고 나아가 공주를 구하는 건 용사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용사가 실패해버리면 내가 용사가 되면 되지, 뭐.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그때 머릿속의 대화는 어떻게 끝났더라. 아, 맞아. 엘리제가 이렇게 말했었지. 나도 멋진 용사님이 구하러 와줬으면 좋겠다.
 '루트비히.'
 그러면 나는 어이 없다는 듯이 생각하는 거다.
 '루트비히, 엘리제는 내가 데리고 있어요.'
 너는 납치되지도 않았잖아.
 '여신을 납치한 거에요.'
 그리고 말이야. 네가 납치되더라도.
 '나는 악인이에요. 그걸 증명하기 위해 당신을 제외한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일게요. 그러니까…….'
 내가 너를 구하러 갈 테니까.
 '어디 한 번 구해보시지.'
 텁, 하고 얼굴 위에 표정이 쓰였다.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울고 있는 표정의 데포르메.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나는 통곡의 마녀, 테레제다.'
 이제부터, 공포스러운 악역이다.
 
 '화려하게 일을 벌이셨던데.'
 수정 앞에서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자, 마왕이 말을 걸어왔다. 사랑은 이미 식어버렸다. 이때의 나는 마왕을 연인이 아닌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왕이 엘리제에게 관심을 두는 한, 엘리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마왕의 악은 엘리제의 선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 죽였던 것보다도 더 죽인 것 아냐? 나야 싫지 않지만 다른 놈들이 네가 뒤집어쓴 피 냄새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아직도 끈적거리는 것 같은 손바닥을 꽉 쥐었다. 이 손은 엘리제의 손과 어울릴 수 있을까. 너무나도 뻔한 질문에 작게 실소했다.
 원하던 바잖아? 그렇게 말하자 마왕은 기쁜 듯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본교로 쳐들어가라고 해도 내빼는 놈은 없겠지. 은연중에 너를 깔보던 놈들도 너를 한 수 위로 인정하는 분위기야. 덕분에 서열 정리 같은 귀찮은 짓도 필요 없게 됐어.'
 그런 말을 들어도 기쁘지 않다. 그래도 마왕 측과 교단 측의 전쟁은 원하던 바다. 악의 무리를 그 사내 한 명에게 모두 맡길 생각은 없다.
 악은 악으로 제압한다. 마왕과 교단을 맞붙게 해 양측의 전력을 소모시킨다. 그렇게 하려고 수많은 생명을 꺼뜨렸다. 필사적으로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왔다. 불씨를 터뜨리고 왔다.
 루트비히가 좌절하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그런 참사에서 홀로 살아남다니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도 이상할 것 없다. 어쩌면 홀로 살아남은 그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쪽이 좋겠다. 엘리제를 구했을 때 마왕과도 교단과도 관계가 옅은 편이 나을 테니.
 어쨌든 루트비히는 실낱같은 가능성에 걸어둔 보험 같은 존재다. 그런 것에 의지만 할 수는 없다. 엘리제를 구하는 건 테레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언젠가 각오가 무뎌질 거야.
 눈을 감고서 각오를 다졌다. 눈꺼풀 위로 떠오르는 것은 어떤 찰나의 기억.
 작은 소녀의 울음소리. 슬프고 춥고 배고픈 감각과 기쁘고 따듯하고 포만감에 가득 찬 감각이 동시에 피어올라 뇌를 흔드는 통에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울음소리만 내는 여자아이. 곁에 있던 흰색 정복을 입은 신관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울수록 너의 언니는 더욱 힘들어질 거야. 그 말에 엘리제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나약함을 내보여선 안 된다. 그저 웃어야 했다. 나약한 어린아이인 그녀가 그들의 악행을 멈추려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니가 괴로워할 수록 웃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고 그럴수록 언니의 처우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악순환이다. 그 악순환이 계속되던 중 한 신관이 약을 권했다. 기분을 고양시키는, 마약. 소녀는 언니를 위해서 그 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약을 한 모금 삼키자, 몸에는 곧바로 변화가 나타났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엘리제는 생각했다. 아, 언니가 교감을 그만둬서 다행이야.
 이렇게나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건 너무나도 이상했다. 머릿속의 감정과 뇌의 반응이 불일치하자 몸 곳곳에서 이상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예를 들어, 손을 쥐고 싶은데 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음식을 삼키려고 하면 뱉어낸다. 예를 들어 일어나려고 하면 주저앉는다. 예를 들어 비명을 지르려고 하면 웃는다. 예를 들어 고통스러우면 웃는다.
 예를 들어, 슬프면 웃는다.
 테레제를 오랜만에 만났다. 엘리제는 웃었다. 테레제가 울 듯이 가슴 속에 숨겨둔 눈물을 눈 너머로 들이붓고 싶었지만, 얼굴에 드러난 것은 행복하디 행복한 미소였다.
 이제 더 이상 약을 투여받지 않지만.
 몸은 망가져 버렸다.
 그때 엘리제는 깨달았다. 웃는 것이, 웃는 것만이 나의 역할이다.
 우는 것은 언니에게 맡기자. 그리고 마음속으로 나도 함께 울자. 언니가 마음 놓고 울 수 있게,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좀 더 웃을 수 있어.
 테레제는 감은 눈을 떴다. 무엇이 악인과 선인과 성인인지 조용히 고민해 보았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을 둘로 갈라버리고 둘에게 각기 다른 고통을 주입한 악마가 있을 뿐.
 그리고 그 악마가 만들어낸 건 악마와 다를 바 없다. 의미 따위 있을 리 없는 자가복제다. 만들어진 악마는 만들어낸 악마를 끝없이 증오하고 부정할 것이다. 옛날 이야기책에서 보았던 도플갱어처럼,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 역사적인 전쟁의 서막이다.'
 마왕이 말했고, 마녀는 자신의 마음을 얼굴에 걸쳤다.
 ……여기까지가 나의 세계관이다."
 
 
 
 <계속>
 초고 완성 2016/1/20
 최종 퇴고 201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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