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샌드맨

2017.11.13 21:3411.13

부장이 급하게 퇴사했다. 요 몇 주간 표정이 아주 안 좋았고 병가도 자주 내긴 했다. 무슨 위독한 병에 걸렸나 싶어 인사과 선배에게 슬쩍 물어봤는데 제대로 된 답은 듣지 못했다. 이런 일엔 소문이 따라붙기 마련이지만 모두 의아해할 뿐이었다. 회사에서 제일 건강한 사람은 아니래도, 멀쩡하던 양반이 남에게 말도 안 하고 급작스럽게 퇴사할 정도라면 조만간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으나, 그렇게 가버리는 사람도 간혹 있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후임 문제로 내가 골치아파졌다. 신경심리학이나 동일 계통의 박사 학위 소지자이며 동시에 경력자인 인재를 채용해오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면접이다 뭐다 해서 한두 달 정도로 끝날 일도 아니고. 당장 부서 업무는 돌아가야 하니까 부장이 관리하던 자료를 내가 임시로 떠맡게 됐다. 내 일이나 줄여주고 시키던가. 어쨌든 전산에서 부장의 데이터베이스 접근 권한을 그대로 복사해주었다. 이래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객의 수면 중 뇌파를 측정한 데이터였다. 나로선 실제 업무에 필요한 기능만 파악하고 나면 그 이상은 이해 못해도 상관없는 숫자와 도표. 원래대로라면 내가 이 데이터에 직접 손을 댈 일은 없었다. 데이터를 입력하고 관리하는 게 부장의 업무에 포함되었는데, 그걸 누군가 나눠서 맡아야 했다. 데이터베이스 상에 새 항목을 생성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하는 일은 장비 운용하는 직원이 직접 하기로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선 고객의 꿈을 녹화해서 재생해줬다. 말이야 간단하지만 꿈을 녹화하는 것과 녹화한 꿈을 재생하는 건 두 가지 전혀 다른 분야의 혼합 상품이다. 부장이 하던 일은 엄연히 회사 기밀이기 때문에 당연히 더 상급자가 맡아서 처리하는 게 맞겠지만, 전직원이 스물아홉 명인 이 회사의 둘밖에 없는 이사는 아주 바쁘신 분들이었다. 나한테 부장이 하던 업무를 떠넘길 만큼 여유가 없다는 듯했다.

나는 고객 인적사항과 거래내역을 기록하고 기타 서류를 정리하는 게 일인데, 자격 없이 손댔다가 잘못되면 나만 독박 쓰는 거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있었다. 이 회사는 병원이 아니고, 회사에서 기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도 않으며, 또한 회사가 보유한 뇌파 측정기는 법적으로 의료기기가 아니었다. 자기력을 활용한 소형 뇌파 감지 장비는 우선 인체에 위해가 없고, 또 처음부터 의료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이걸로 생성한 뇌파기록도 의료 정보가 아니었다. 즉, 사내 데이터베이스의 자료를 열람하는 것만으로는 내가 잘못될 리 없다는 보장을 받았다. 사기업에서 작성한 뇌파기록의 경우, 개인정보로써 보호하는 법도 판례도 아직은 없다는 것. 뇌파 측정용 장비가 병원 밖 세상에 보급된 데엔 스마트 기기의 보안용으로 뇌파 잠금 기능이 널리 퍼진 덕이 컸다.

 

전산 부서에서 저지른 사소한 실수는, 부장에게 부여되었던 접근 권한을 고스란히 내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내가 알 필요 없는 부장의 개인 문서까지도 열람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장이 본인만 볼 수 있도록 쓴 내용을 볼 수 있었다. 구현팀에서 요청한 고객의 자료를 찾다가, 따로 표시가 된 항목들을 발견했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뇌파 기록에 동일한 내용의 주석이 붙어 있었다.

[측정치 손상 의심, 재측정 요청]

주석이 작성된 날짜는 부장이 퇴사하기 한달 전인 8월 24일이었다. 고객의 이름은 전연수와 방옥련. 그러나 그 이름으로 검색해봐도 재측정한 데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부장이 아팠던 탓에 일을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손상된 데이터만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관리하는 고객 장부에도 측정을 두 번 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당장 필요한 자료가 아니었으므로 일단은 요청받은 항목만 복사하여 구현팀에 넘겨주었다.

부장의 병세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모두들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가 보낸 안부 메시지도 전부 읽지 않은 상태였다. 후임을 아직 못 구해서 업무를 덤으로 떠맡은 나만이 부장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는 듯했다. 아니, 사장은 이대로 내버려둘 셈인가. 전문가도 아닌 나한테 직무 내용에 있지도 않은 일을 시키다가 무슨 변고가 생기려고.

 

하루는 사무실이 어수선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영업점을 직접 방문하여 불만을 접수한 고객이 있다고 했다. 이미 오래 전에 뇌파 측정을 마쳤는데 어째서 꿈 녹화본을 전달하지 않느냐고 찾아온 것이다. 알고 보니 이미 몇 차례나 전화와 메일로 불만을 표시했고, 그럼에도 제대로 된 대응이 없자 재방문까지 결심했다고. 내 부서에선 고객 응대를 하지도 않는 데다 부장에게 오는 메시지나 메일을 확인할 도리도 없으므로 나는 까맣게 몰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구현팀에선 내게 불만 고객의 자료를 요청했고, 나는 그들의 기록을 검색해보고 나서야 그게 방옥련 씨와 전연수 씨의 데이터, 부장이 주석을 달아둔 항목이었음을 깨달았다. 구현팀에 그렇게 말했다. 결과적으로 벌써 두 달 넘게 상품 준비가 지연된 꼴인데 재측정까지 해야 한다니까 난리가 났다. 부장이 퇴사하기 전에 시작된 일이고 내가 조금도 관련된 바는 없으므로 제발 나한테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빌었다.

규정상 뇌파기록의 적합성 검토를 시행할 수 있는 사람은 사규에 명시된 자격 중 하나인 학위 소지자, 즉, 부장 뿐. 부장이 작성한 주석은 지금으로썬 업무 지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구현팀장과 이사의 싸늘한 눈빛이 본질적으로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문제는 재측정한 데이터의 적합성 검토를 진행할 수 없었다는 거다. 이미 오류 표시가 된 데이터는 손상된 것이 확실하므로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새로 측정한 데이터에 오류가 있거나 사용불가능할 정도로 부정확하다면? 그걸 판단할 사람이 부장이었는데, 이제는 재측정 결과가 제대로 나오기만을 빌어야 했다. 이사가 측정팀과 구현팀에서 경험적으로 데이터의 이상 유무를 판단할 수 있으므로 문제없다고 우겼다. 될 대로 되라. 장비 담당자가 입력한 데이터를 그대로 구현팀에 보냈을 뿐이다. 이사에게 사내 메일로 지시받은 기록이 있으므로 나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후 식당에서 구현팀 직원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팀장은 굳이 나와 대화하는 상황에서 내 잘못도 아닌 일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성토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밥이 안 넘어갔다. 하지만 덕분에 의외의 정보도 얻게 되었는데, 그 두 고객의 첫 번째 측정 데이터와 재측정 데이터는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세히 물으니 재측정 때 첫 번째와 같이 이상한 결과값이 나왔다고. 그렇다면 이상한 데이터를 그대로 구현에 사용한 것이냐 물었더니 팀장은 표정을 실룩거리며 주변을 살피고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이 신생 업계의 기반은 두 가지였다. 먼저 일상에서 사용가능한 상용화된 뇌파 감지 기술. 즉, 거의 모든 조건에서 어떤 사람의 뇌파라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마다 하나씩 달아서 팔기 위해 테크 기업들이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한 결과였다. 또 하나는 전세계적인 연구 데이터의 축적. 사람 뇌의 뉴런이 어떤 자극에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 일종의 인간 표준이 수립된 것이다.

뉴런의 작동 방식에 대한 표준을 수립하였다 해도 실제 뇌파의 패턴은 사람마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애시당초 모든 사람의 뇌파가 다르기 때문에 뇌파 보안이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해도 어떤 시각적 자극에 뇌가 어떻게 반응한는지 일반화가 가능하다면, 반대로 뇌가 특정한 반응을 보였을 시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를 예측하는 것도 가능할 터.

당연히 처음엔 조악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방대한 양의 임상 데이터를 제공하자 예측의 정확도 역시 상승했다. 기계번역기의 번역 품질이 개선된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언어 실사용 데이터를 쏟아부었기 때문임과 같은 맥락이다. 뇌파의 패턴을 영상화하기 위해 인간 일반에게 적용될 수 있는 템플릿을 도출해낸다. 이 작업엔 상당한 수준의 창의력이 필요하다. 다만 깨어났을 때 대부분 잊혀지고,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것도 샤워 중에 사라져 버리는 게 꿈이다. 대부분의 고객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영상에도 만족하곤 했다. 흥미 목적으로 찾은 고객은 두 번 오지는 않았지만.

고객의 뇌파 측정은 자연스러운 꿈 기록을 위해 각자의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수면 측정 전 튜닝을 위해 영업점에 방문하여 서너 시간 정도를 보내며 상담을 병행한다. 그 후 측정장치를 받아 집에 돌아간 고객은 일종의 자기장 마이크를 머리맡에 두고, 전원을 켠 후 잠을 자면 된다. 스마트폰 등의 보안에 사용되는 소형 뇌파 감지기와 비슷한 기계다.

 

방옥련 씨와 전연수 씨는 배송된 상품을 시청한 후 곧 쓰러져 입원했다고 들었다. 아마 측정 장치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고객에게선 문제 없이 정상 결과값이 나왔기 때문이다. 회사가 발칵 뒤집어진 가운데 나는 두 차례 측정된 방옥련 씨와 전연수 씨의 뇌파기록을 살펴봤다.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지만, 부장의 업무 기록에 접근할 수 있었던 까닭에 왜 데이터가 이상하다고 판단했었는지는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쓰는 폴더에서 고객 기록을 찾아봤다. 방옥련 씨와 전연수 씨는 동거 관계로, 측정 장치 두 대를 대여하여 각자 측정을 시행했었다. 두 번째 측정은 당연히 무료였고. 뇌파기록은 두뇌의 뉴런이 발생시키는 전기 신호를 감지하여 주파수대와 강도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부장은 수면 중에 측정되었을 터인 두 사람의 뇌파에서 고주파 감마파와 감마프라임파, 심지어는 측정 장치의 검출 한계를 벗어나는 초고주파 대역의 신호가 지속적으로 강하게 측정되었다고 써놨다.

감마파는 뇌파 스펙트럼의 고주파 대역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흥분하거나 고도의 인지작용을 발휘할 때 강해지는 주파수라고 했다. 꿈을 꾸는 등의 이유로 시각 뉴런이 자극받거나 하지 않는다면 보통 자는 사람의 뇌에서 감지되는 종류의 뇌파가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모든 패턴이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수면 중임을 나타내는 조건에서 감마파가, 게다가 감마파보다 더 고주파인 감마프라임파와 그 이상의 주파수를 보이는 신호가 나왔다면 결과값은 당연히 비정상 판정이다. 이에 부장은 주석을 달아놓았고, 그래서 이 데이터가 구현팀에 전달되지 않고 남았던 것이다. 게다가 구현팀장의 얘기로는 두 번째 측정에서도 똑같이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고.

 

구현팀장은 그 다음 주에 입원했다. 병명은 아무도 몰랐다. 건장하던 팀장이 며칠만에 대단히 피폐한 모습이 되었다. 입원하기 전날엔 완전한 폐인의 몰골로 광대가 도드라지고 눈두덩이가 시커맸다. 팀장은 구부정하게 비척대며 출근하자마자 조퇴를 했다. 회사에 사람 잡는 전염병이라도 도는 것 아니냐는 농담 아닌 농담. 그 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방옥련 씨와 전연수 씨 사건으로 한순간에 실직자가 될 위기에 처한 팀장이 격한 스트레스로 맛이 간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는 팀장이 입원한 병원을 물어 찾아갔다. 병문안이 허용될지 알 수 없었는데 의외로 순순히 병실에 들여보내주었다. 병실도 평범한 6인실이었다. 팀장은 퀭한 눈빛에 피골이 상접했지만 말할 기력은 있는 듯했다. 인사를 나눈 후, 팀장은 한참동안 나를 보다가 커튼을 닫게 하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너네 부장님이 왜 퇴사했는지 알아.”

“질문인가요? 아니면 팀장님이 아신다고요?”

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질문에 끄덕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데이터, 그 이상한 데이터, 사실 원래 구현은 끝났던 거였어.”

난 눈쌀을 찌푸렸다. 엥?

“첫 번째 측정값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다 된 물건을 두고선 왜 말씀을 안 하시고 그 지경이 되도록......”

“새로 만들면 문제가 없을 줄 알았어. 하지만 두 번째 데이터값 보고선 될대로 되라는 생각이었지.”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팀장은 또 한참 뜸을 들였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의사들도 몰라.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을 것 같지는 않다니까 여기서 수액이나 맞고 있지. 아마 너희 부장님과 그 손님들도 나랑 똑같은 증상일 거야.”

난 지어보일 수 있는 최대한 의아한 표정으로 팀장을 바라봤다.

“처음에 나온 데이터로 구현한 걸 부장님이 보자고 했어. 아무래도 이상한데 이런 건 처음 보니까 결과물을 확인해야겠다면서.”

“두 분이서 데이터값이 비정상이니까 확인해봤다는 건가요? 그게 언제죠?”

“아마 9월 초에. 그러고선 다음 주에 난데없이 자기 수면 데이터를 구현해 달라대. 그래서 해드렸지. 그 후로 끙끙 앓더니 퇴사한 거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일까.

“그 때는 부장님이 왜 그러는지 나도 몰랐어. 그런데 그 손님들, 두 번째 데이터값으로 만든 꿈 영상을 보고는 입원을 했다고 하더라고.”

“설마 영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건가요?”

“내가 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냐.”

“제가 알 턱이 있습니까......”

“영상이 문제가 아니야. 꿈 안에 든 게 문제야. 그 꿈은 뭔가 씌었어.”

“예?”

“부장님이 한 게 마음에 걸려서 나도 내 꿈을 구현해봤지. 그 때 깨달았는데, 뭔지는 몰라도 손님들이랑 부장님 꿈에 있던 게 나한테도 옮았어.”

팀장이 아파서 제정신을 놓은 것이 분명했다. 영문모를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알겠다고, 주의하겠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사장과 임원들은 변호사들과 회의하느라 회사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동종 업체에선 비슷한 문제가 생긴 바 없었다. 때문에 고객 두 명의 입원 사건이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며 좁게는 우리 회사 제품의 결함 때문이 아님을 증명할 논리를 세워야 했다.

회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두 핵심 부서의 매니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 이미 측정이 진행된 고객의 데이터는 일정대로 구현팀에서 영상을 만들어 발송했지만, 새로운 측정은 시행되지 않았다. 영업직원들도 놀고 있었다. 결단이 빠른 몇몇은 이미 사직서를 내고 떠나버리기도 했다. 내 사표는 때를 기다리며 가방 안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부장은 이후 두 차례 더 보낸 안부 메시지를 모두 무시했다. 나는 원인을 조사한다는 핑계를 대며 부장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벽 세 면을 꽉 채운 책장엔 논문, 연구서, 학회 간행물 따위가 가득했다. 부장 본인이 쓴 책 세 권은 자리에서 가장 멀리, 눈이 닿지 않는 위쪽 구석 칸에 모여있었다. 해도 지금 독서를 통해 신경심리학 지식을 습득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부장의 컴퓨터에 저장된 로컬 파일을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서류함과 서랍을 열어봤다. 데이터베이스에는 기록되지 않은 메모 같은 게 있을지도 몰랐다. 역시나 책상 밑 서랍의 잘 정돈된 두 번째 칸에 혼자 비뚤게 놓인 폴더가 하나 있었다. 열어봤더니 부장 본인의 뇌파 기록이었다. 그러고보니 구현팀장이 부장의 데이터를 구현했었다고 했었지. 부장은 고객이 아니므로 이 기록은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지 않아서 내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인쇄된 기록을 넘겨서 파형 그래프 섹션을 들여다봤다. 설명을 읽어보니 부장에게서도 감마파 이상의 고주파수 뇌파가 과도하게 측정되어 있었다. 입원한 손님들과 동일한 이상이다. 부장의 뇌파 기록을 통해 구현한 꿈 영상은 어디에 있을까? 부장의 방에서는 찾지 못했고, 어쩌면 자기 집으로 가져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현팀에서 원본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내친김에 팀장의 기록과 영상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구현팀에 가서 들쑤시고 다니면 이상하게 보이겠지.

 

팀장의 개인 번호로 연락을 해봤다. 다음날 아침에서야 답신이 왔다. 팀장은 퇴원했고, 집에서 요양 중이며,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하댄다. 대단히 피곤하고 불안감이 심한 데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틈만 나면 잠에 빠져 자기도 기억나지 않는 장소에서 깨어난다고. 집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겠다고 해서, 혹시 팀장의 뇌파 기록과 꿈 영상을 따로 보관했는지 물어봤다. 팀장은 내 메시지를 읽고도 한참이나 조용하더니, 이내 답했다.

‘그거 볼 생각은 하지 마라. 너도 옮아.’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조심하겠다고 하고는 대화를 종료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이상 꼭 확인을 해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부장, 팀장, 그리고 손님 두 명이 이렇게 연이어 병이 난 까닭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일이 내게는 일어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꿈으로, 내지는 꿈을 구현한 영상을 통해 병이 옮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만약 실제로 전염병이었다면 그 외에도 환자가 더 생겼을 테고.

굳이 회사에 없는 팀장에게 연락하는 것보다 직접 구하는 편이 더 쉬울 줄은 몰랐다. 그저 절반 정도 자리를 비웠고 남은 인원도 놀고 있는 구현팀에 가서, 요양 중인 팀장이 퇴사한 부장과 자신의 꿈 영상을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쪽 과장은 왜 팀장이 내게 그런 연락을 했는지 궁금해 했지만, 나한테 퇴사한 부장의 자료가 있을 줄 알고 먼저 연락했다가 자신의 것까지 함께 부탁했다고 둘러댔다. 난 팀장과 부장의 꿈 영상 사본을 받을 수 있었다.

 

꿈 영상은 가상현실로 시청할 때 가장 실감났다. 4세대 가상현실 기기로는 별다른 조작장치 없이 가상현실 내에서의 상호작용이 가능했다. 물론 꿈 영상은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고 구현되지는 않았으나, 가상현실 기기의 사양에 따라 재생만 가능할 뿐인 영상에서도 상호작용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는 있었다.

남의 꿈을 시청하는 일은 그렇게 즐겁지는 않다. 회사 직원들은 교육용으로, 또는 심심풀이로 예시 삼아 구현된 직원의 꿈 영상이나 공개된 고객의 꿈 영상을 시청하기도 했다. 대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장면의 연속일 뿐이었다. 자기장의 발산 신호일 뿐인 뇌파 기록을 영상으로 변환할 때 사람이 알아보기는 해야 하기 때문에 다채로운 색깔과 형상, 현실과 상상의 사물 등을 따와서 영상에 배치하긴 한다. 그게 꿈의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를 지니거나 영감을 주기가 대단히 어려울 뿐이다. 때로는, 아니, 생각보다 자주 꿈을 꾼 당사자에게도 아리송하기만 한 게 꿈 영상이었다.

나도 집에 가상현실 기기쯤은 구비해 놓았기에, 부장과 팀장의 꿈 영상 사본을 들고 평소보다 삼십 분 정도 일찍 퇴근했다. 어차피 요즘 회사에서 이 정도면 늦게 나오는 편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탄 후 집에 도착했다. 외투를 걸어두고 손발과 얼굴만 대충 씻은 후 가상현실 기기를 꺼냈다. 우선 먼저 만들어졌을 부장의 꿈 영상부터 재생하기로 했다.

‘이게 대체 뭐냐.’

내가 본 걸 가장 흡사하게 표현하는 단어는 아마 주마등일 것이다. 아무 상관 없는 수많은 장면들이 아무 맥락도 없이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다르게 말하자면 엄청나게 밀도가 높은 꿈 영상이라고 해야 할까. 부장 본인의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여러 차례 나왔고, 부장의 사무실, 회사 직원들, 심지어 내 얼굴도 스쳐지나갔다. 그 외에도 길거리, 병원, 자가용 안, 화장실 등의 장소가 배경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다. 그 배경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들이 꿈 영상 치고는 명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러더니 툭 끝나버렸다.

‘부장은 무슨 꿈을 꾸는 거지, 대체?’

예상했어야 하는 걸까. 팀장의 꿈도 같았다. 내용 면에선 꽤 달랐으나, 꿈 영상의 구성이 똑같았다. 팀장의 꿈에는 아마도 가족인 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등장했다. 아이들과 배우자, 부모, 그리고 간간히 친척들이 보였다. 팀장의 집이나 차 안, 또는 음식점 등을 배경으로 가족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사라져갔다. 꿈에 가족이 나오는 거야 이상하지 않지만, 하룻밤 새에 이렇게 다양한 가족 꿈을 꿀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마치 가족과의 지난 날을 복습하듯.

 

꼬박 닷새가 지나서야 팀장의 말대로 내게도 이상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단서는 역시 꿈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기진맥진했고, 극장에서 시끄럽고 정신없는 영화를 보고 나온 양 머릿속이 복잡하면서도 멍했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꿈의 내용은 중구난방이었다. 며칠 전 보고 들은 장면이 그대로 꿈에 나오거나, 십수 년도 더 된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거나. 처음엔 잠을 늦게 자서, 내지는 맥주를 두 캔이나 마셔서 그런 줄 알았다. 한 주를 내리 잠자리를 망치고 나자 회사에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맨정신이어도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자마자 씻고 잠을 청해봤다. 신기하게도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고, 다음날 깨면 똑같은 상태였다. 제대로 못 잔 기분. 대학생 시절 시험기간에 대학생 된 기분 내느라 밤을 새서 공부를 했을 때의 기분. 보람은 전혀 없고 피로하기만 했다. 문득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게도 옮는다고.

아직 회사에 남아 빈둥대는 구현팀 직원에게 부장과 팀장의 데이터에 대해 물어봤다. 혹시 이 규격 외로 측정된 고주파 기록 부분도 영상으로 구현이 가능한지. 직원은 대충 훑어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했다. 감마프라임파의 주파수 대역을 초과하는 고주파수 뇌파에 대해서는 영상 구현에 필요한 템플릿 자체가 마련되어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틀 전 측정해본 내 뇌파 기록에서 초고주파수 뇌파 패턴을 확인한 이후로 조금 불안해졌음을 인정한다.

“내 말이 맞지. 옮는다니깐.”

전화 너머 들리는 팀장의 목소리는 맥아리가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 죽지는 않아. 다시 일해야지.”

나 역시 어딘가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는 동안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늘 기력이 없었다. 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이나 좀 먹어봐야겠다.

 

오랜만에 이사와 점심을 먹게 되어 방옥련 씨와 전연수 씨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슬쩍 물어봤다. 손님들은 퇴원했고, 병원에서 우리 기계와 관련된 증상임을 입증할 수 없어 그렇게 흐지부지되었다고 했다. 딱히 안 좋은 소문이 퍼지지도 않았으니 구현팀장 복직하고 부장의 후임을 구하면 회사도 멀쩡히 돌아갈 거라고. 방옥련 씨와 전연수 씨도 똑같은 증상을 겪는지 궁금했지만,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에 불만이 있을 텐데 법무팀이나 고객팀도 아닌 내가 별도로 연락을 취하면 긁어 부스럼 아니겠는가.

부장은 내 메시지를 읽었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예 회사 쪽과는 연락을 끊어버린 듯했다. 결국 이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팀장 뿐이었다. 구현팀에서 사용하는 장비나 기술에 대해 잘 아는 팀장이 돌아오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내 꿈으로 만든 꿈 영상을 보지는 않았다. 이제껏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증상이 심각해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꿈 영상을 보고 나서 그렇게 됐다.

 

하루는 잠에서 깬 후 꿈에서 들은 목소리를 비교적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굉장히 이질감이 들었고, 사실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적어도 내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그것이 한 말이 뇌리에 남아있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웠고,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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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349 단편 Punish limzak 2018.06.16 0
2348 단편 덜커덩 덜커덩 나뭇잎은 흐른다 보리와 2018.05.03 0
2347 단편 열차를 놓치다 Mori 2018.05.03 0
2346 단편 섬, 달빛2 목이긴기린그림 2018.04.30 0
2345 단편 세리와 시추기와 떠나간 사람 Quieraki 2018.04.28 0
2344 단편 암, 그렇고말고 보리와 2018.04.05 0
2343 단편 변종(變種) 오철 2018.03.31 0
2342 단편 위작 이야기 너구리맛우동 2018.03.30 0
2341 단편 네 번째 피해자 목이긴기린그림 2018.03.23 0
2340 단편 맞고 싶어 하는 사람들 Quieraki 2018.03.18 0
2339 단편 사랑의 묘약 MadHatter 2018.02.12 0
2338 단편 타임 패러독스 목이긴기린그림 2018.01.14 0
2337 단편 진정한 왕 니그라토 2017.12.14 0
2336 단편 비비 목이긴기린그림 2017.11.28 0
단편 샌드맨 의심주의자 2017.11.13 0
2334 단편 죽음의 지뢰찾기 MadHatter 2017.11.11 0
2333 단편 격리실의 얼굴들 오철 2017.10.26 0
2332 단편 좀비와 로봇의 행성 오감 2017.10.26 0
2331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인신족은 만마의 종주 니그라토 2017.10.17 0
2330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최종 악마의 승리 니그라토 2017.10.1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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