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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드래곤 설계론

2012.03.15 21:5403.15



  “재밌네.”
  “뭐가?”
  머리를 단정하게 가다듬은 남성이 소파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잠자리 안경을 낀 여성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한 가닥 씩 하는 과학자들이 모여서 성명을 냈어. 저질 과학과 나쁜 종교로 대중을 호도하는 무리에게 고한다…. 이거 우리 얘기 같은데.”
  반대쪽 모니터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닌 거 같아요. 한두 번도 아니고.”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남자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사제복처럼 보이는 넉넉한 옷이 흘러내렸다. 그는 소파에 축 늘어진 채로 목을 뒤로 꺾어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흥, 불신자들의 발악 따위니까.”
  여자는 흐응 하고 가볍게 콧소리를 내더니 의자를 빙글 돌렸다. 여자가 향한 쪽엔 투명한 어항이 있었다.
  “어이구 우리 용가리 잘 잤어? 언니가 밥 줄까?”
  초록색을 띤 큼지막한 도마뱀은 여자를 흘끗 바라보더니 다시 웅크렸다. 잘 자고 자시고 간에 녀석은 도통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여자는 도마뱀이 신경을 쓰거나 말거나 녀석을 어르더니 모이를 한 줌 꺼내서 집어넣어 주었다. 도마뱀은 먹이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인상을 쓴 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문, 그 안경 좀 바꾸면 안 돼?”  “왜?”
  “왜냐니? 설계자께서 보우하사, 항상 흰 가운에 그 무지하게 큰 안경을 끼고 다니니까 영락없는 샌님 같잖아. 꼭, 과학자들처럼 말야. 랠도 안 그러고 다니잖아.”
  모니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눈이 안 나쁘니까 당연하잖아요.”
  “눈 좋아서 좋겠다. 머리에 있는 거라곤 눈 밖에 없는 녀석이.”
  “예~에?”
  문은 랠의 반문을 무시했다.
  “그리고 론, 나 과학자 맞아.”
  론이 픽 하고 웃었다.
  “내 말은 ‘주류’과학자 같아 보인단 말이지.”
  그는 주류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주었다.
  “론, 비록 우리가 비주류지만 그렇다고 꼭 탈권위적으로 보일 필요는 없어. 사람들은 반항아를 멋있다고 여길 진 몰라도 전문가라고 생각하진 않아. 사람들은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
  “맞아요. 자칭 비주류 운운하고 다니면 아마추어처럼 보인단 말예요.”
  흥, 하고 남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가 주류가 될 날도 머지않았어. 두고 보라지.”
  “그래, 언젠가는. 그리 되겠지 뭐.”
  여과학자가 컴퓨터 앞에 앉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남자가 인상을 썼다.
  “문, 어제 예배는 나갔어?”
  문이 가볍게 대답했다.
  “아니.”
  “왜?”
  (”휘유, 또 시작이군.“ 랠이 중얼거렸다.)
  “나 바빠.”
  “설계의 신비여 맙소사, 이봐, 바쁠 게-”
  “-따로 있지 대체 예배도 안 나오는 신도가 신도라고 할 수 있냐, 이 말씀이시지. 별 수 있어? 우린 아직 비주류야. 따라서 주류에 맞춰서 행동해야 돼. 어젠 중요한 학술회가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교단에서 내 역할은 그런 데 나가보는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남자가 으르렁 거렸다.
  “어쨌든 불신자들을 상대하느라고 성스러운 의식에 불참했다는 게 말이 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란 말야!”
  “했어. 예배가 나중이야.”
  “이게…자꾸 그러면 사제님께 보고하겠어.”
  여자는 남자를 흘끗 보더니 다시 모니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입술을 깨문 채 그녀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문이 입을 열었다.
  “사제님께서는 아마 이러실 거야. ‘문아, 아무리 바빠도 예배에는 되도록 참가하려무나. 그런데 학술회에서 불신자들을 상대하는 데 성과가 있었느냐?’.”
  “…넌 평생 평신도 계급에 머물 거야. 두고 보라고.”
  “어머, 아무렴 어때. 믿음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젠장. 그게 문제야! 그렇게 비꼬는 게 신성한 교단을 대하는 태도냐고!”
  “난 비꼰 거 없어. 네가 그렇게 듣는 것뿐이야. 마치 우리의 주장은 무조건 헛소리로 생각하는 그 뭐냐, 주류 과학자들처럼 말이야.”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신앙심은 의심스러웠지만 능력은 의심할 수 없었기에 몰아세워봤자 소용이 없었다. 물론 그녀는 교단 안에서 진급하긴 어려울 터였다. 무엇보다 문은 교단 내 지위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따라서 그녀는 괜찮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기부금은 짜게 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보증수표라는 사실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언젠가 론이 그 얘기를 본격적으로 꺼냈을 때(네 영혼을 위해 충고하는 거야!)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럼 나대신 누군가가 구원받겠지. 상위 계급자리는 한정되어 있잖아.” 그리고 농담조로 이런 게 교주의 의지를 받드는 희생정신 아니냐고 덧붙였다. 구원의 약속을 위해 애쓰는 모든 형제들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론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교단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교단의 세력이 커지고 구원의 후보들이 늘어날수록 구원받지 못할 자들의 공세도 덩달아 거세어졌다. 그들은 진화 같은 사악한 개념을 학교에서 가르치도록 정부를 조종하고, 교단의 일리 있는 항변 - 형평성을 위해 반대급부의 내용 또한 가르쳐야 한다 - 조차 로비를 통해 법정에서 무마시켜버렸다. 그런 외부의 공격에 맞서 적들의 주장을 논파하여 교단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은 몇 되지 않았다. 역사가 길지 않은 교단이(비록 인간 복제 등 최신 기술을 적극 지원함에도 불구하고)과학계의 인물을 포섭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리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을 복제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제 슬슬 인류는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는 것이 된다.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라도 과학자들은 꼭 필요했는데, 교단에 넙죽 들어오는 ‘과학자’들은 보통 나중에 알고 보면 제대로 된 졸업장이나 자격증조차 없는 사기꾼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달랐다. 문은 명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 또한 정상적으로 취득하였으며, 여러 연구소에서 실질적인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는 프로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름다웠다. 교단은 TV토론회를 여럿 거치면서 터득 것이 있다 - 늙은 악당처럼 보이는 고위사제나, 약장수처럼 보이는 중간계급 신도 대신, 매력적인 미녀를 내보내라! “예, 우리는 이제 인간을 설계할 수 있게 됨으로서 설계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어요. 당신들 말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인위적인 쌍둥이를 설계하는데 성공한 거지만, 그게 어딘가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카메라에다 대고 윙크를 했다).” 다른 열혈 신도와 달리 그녀는 불신자들의 무도한 공격과 과격한 주장에도 유연하고 여유롭게 대처하였는데, 그럼 상대방이 지적인 학자가 아니라 속 좁고 미성숙한 샌님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럴 때만은 그녀도 잠자리 안경을 벗고 나갔다. 아무튼 론은 늘 그녀에 대해 참고 견디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참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위치를 활용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잔소리를 하던 론이 그 점을 지적하자, 그녀는 진화론적으로 옳은 선택이라고 대답하여 그의 속을 또 뒤집었다.
  “그리고 좋은 소식.”
  “뜬금없이. 뭐야?”
  “제법 괜찮은 증거가 발견되었데. 가보자.”
  말하면서 동시에 그녀는 모니터를 끄고 의자에서 뛰어내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럴 때만 활력이 넘쳐가지고…어딘데?”
  이미 짐을 챙기고 있던 문을 대신해서 랠이 대답했다.
  “해타리아에서 거대한 파충류에 대한 전설, 이를 묘사한 회화 및 그리고 최근의 목격담과 불분명한 사진. 그리고 몇 가지 현장 흔적이예요. 이번엔 좀 그럴싸해 보이네요.”
  론이 투덜거렸다.
  “젠장. 이번에도 그 망할 놈의 확증은 아닌 거 같은데. 만날 그놈들이 노래를 부르는 그 확증 말이야. 확증 있소? 단단하고 탄탄한 확증 내놔보쇼! 뭐가 단단하다는 거야. 그 자식들 거시기나 단단하겠지.”
  “…아하, 하, 하하.”
  랠의 어색한 웃음과 달리 문은 쾌활하게 말했다.
  “왜, 지난번보단 났잖아. 그 뭐냐, 목격담만 믿고 갔었던 그 때 말야.”
  “이번에도 그 빌어먹을 미확인 동물학자 나부랭이의 장난질이면 가만있지 않겠어.”
  그가 그녀를 따라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투덜거렸다. 문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그렇게 해도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엿보였다. 여자가 말했다.
  “어머, 왜 그래? 이름답게 미심쩍은 친구들이긴 해도, 내 생각에는 한 배를 탄 동지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구원의 사명을 위해 탐구하는 거지만 그 작자들은 그냥 재미삼아 도시전설 따위나 후비는 놈들이잖아. 예티, 세스콰치, 큰발바닥, 그런 게 다 뭐냐고. 세상 그 어떤 종교의 성서에도 그런 걸 찾아보라고 되어있지 않은 걸.”
  “세스콰치가 큰발바닥이야. 예티도 비슷한 거고. 그리고 누가 안 시켜도 뭔가를 찾으러 다니는 게 과학이야.”
  “없는 걸 찾아다니잖아. 신을 찾으러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야.”
  론이 콧방귀를 뀌었다.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이란 존재. 하, 말이 안 되잖아. 설계된 것이 분명한 이 세상과 생명을 설계한 것은 그런 개념 따위가 아닌 훨씬 실제적이면서 우월한 존재가 분명….”
  “그래그래 론, 너 교리 시간에 안 졸았다는 거 인정할 게. 그런데 나도 그렇거든? 그러니까 얼른 차에나 타. 해타리아로 갈 시간이야. 비행기표는 이미 잡았고. 랠, 사무실 잘 지키고 있어. 기자들 오면 쫓아내고.”
  “진짜로요?”
  “농담이야. 적당히 차나 끓여내고 성과같은 거 물어보면 하면 용가리나 보여줘.”


  해타리아 국제공항은 생각보다는 컸지만 그게 다였다. 쓸데없이 화려한 광고판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 다른 나라에 안 가시고 해타리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가는 사람이 몇 안 되는 공항을 빠르게 빠져나온 그들은 택시를 불렀다. 문이 뭐라고 몇 마디 하자 택시기사가 되묻지도 않고 출발했다.
  “해타리아어는 언제 익힌 거야?”
  “나 과학자야.”
  “그게 대체…관두자.”
  택시는 꽤 오래 달렸다. 대도시처럼 보이는 곳을 지나치자 론이 당황했다.
  “어이, 숙소는?”
  “필요 없어. 그 작자 집에 잠깐 신세지면 되지.”
  구시렁대고 있던 론이 그녀의 말을 듣고 멈췄다.
  “목격자를 벌써 그 ‘작자’라고 단정 짓기엔 좀 이른 것 같던데.”
  “네 말대로 확증은 없는 거 같고, 그리고 여태까지 통계적으로 그랬잖아.”
  문이 가볍게 말했다. 론이 대꾸했다.
  “아까는 그 ‘작자’를 두둔하면서 오늘 바로 목표를 이룰 것처럼 굴더니…이제 와서 패배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거야?”
  차가 퉁, 퉁하고 튕겼다. 비포장도로로 접어든 것 같았다.
  “예, 예, 총통각하. 귀관은 이번 작전이 통계적으로 성공확률이 낮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지만 특별히 그게 불충을 의미하진 않습니다요.”
  “설계자께서 보우하사,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론이 투덜거렸다. 창밖으로 어두침침한 숲과 풀이 듬성듬성 난 평야가 섞여 보였다.
  “단순히 패배주의를 혐오한다고 우리가 파시스트가 되는 건 아니니까.”
  “어머, 열광적인 종교집단은 파시스트들하고 통하는 게 많아.”
  “거기까지. 말씀의 서를 걸고 말하는데, 난 해타리아까지 와서 너랑 네 부족한 신념 때문에 골치 아프고 싶지 않아. 그나저나 아깐 정말 신나서 달려오더니, 왜 여기 와서 갑자기 비관적이 된 거야?”
  “신난 거 맞아. 설령 못 찾아도 우린 소거법에 의해 해타리아를 제외할 수 있다고. 어쨌든 우리 연구가 한 발짝이나마 용에게 가까이 가는 거야.”
  “말도 안 나온다. 그리고 용이라는 말 쓰지 말라니까. 그 말은….”
  “드래곤이란 개념을 하등문화권에 끼워 맞춘 단어라 이거지. 어련하시겠어.”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하자 문이 말했다.
  “다 왔어.”


  “아, 당신들이시군요. 그 뭐냐…드래곤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요.”
  미확인 동물학자가 손을 내밀면서 씩 하고 웃었다. 그의 집은 택시가 데려다 준 시골 마을에서도 으슥한 구석에 들어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설계’한 거죠. 별 차이는 없지만. 우리말을 잘하시네요?”
  “원래 저는 이 나라 사람도 아녜요. 들어오시죠.”
  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악수했지만 론은 부루퉁하게 서서 그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버림받은 독자연구가의 냄새가 강하게 났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고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작게나마 ‘위대한 설계의 신비여’라며 꿍얼거렸다. 문이 말했다.
  “저희하고는 같은 배를 탄 동지라고 할 수 있죠.”
  “글쎄요, 전 과학자라서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과학자? 네놈이? 퍽이나. 라고 론의 얼굴에 줄줄이 적혀져있었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자칭 과학자는 전혀 알지 못했다. 론은 안 그래도 문의 태도 때문에 흐려져 있던 기대감이 더 희미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독자연구가가 물었다.
  “제가 말씀드린 회화와 조각은 확인해보셨나요?”
  문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서방대륙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니까 별로 볼 필요를 못 느꼈고요, 현장 증거나 보여주시죠.”
  “저는 먼저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가요?”
  은둔 과학자가 음흉하게 웃었다.
  “당신들 가방. 그 중에서도 저기 있는 저 검은 거.”
  “증거만 보여주시면 얼마든지 실컷 보여드리도록 하죠.”
  “안 돼요. 돈부터 넘기시지.”
  “수작 그만 부리고 증거나 보여줘요.”
  “이거 왜 이러시나. 댁들이 이럴 여유가 있어? 해타리아까지 와 놓고.”
  “누가 할 소리. 돈이 상당히 급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과학자씨. 그래요 그거. 당신이 일명 ‘동료’ 미확인 동물학자한테 떼먹힌 거요. 바보처럼 말이죠.”
  남자가 성난 눈길을 한 채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지만 론이 문제의 검은 가방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그를 비웃자 어쩔 수 없이 일행을 집 안 쪽으로 인도했다.
  “이게 사진입니다. 녀석이 날고 있죠.”
  아무리 봐도 구름이 겹치고 겹쳐서 구름 위에 그림자가 진 것처럼 밖에 안 보이는 사진이었다.
  “이게 제가 견본을 뜬 발자국이구요.”
  본을 뜬 솜씨가 너무 어설퍼서 어린아이가 주물럭거려 만든 거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그 밖에 몇 가지 증거들이 더 제시되었지만, 피차일반이었다.
  “이거 원래 얘기랑 너무 다른데? 전송한 사진은 상당히 그럴싸해보였는데 말이야.”  론이 의심의 눈초리를 가득 보내자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아아, 너무 급하게 굴지 마시고요. 가장 중요한 증거는 그야말로 ‘현장’증거입니다. 현장으로 가보시죠. 바로 이 집 뒤의 바위산입니다.”
  두 사람은 집 밖으로 나서는 남자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길도 없는 것 같은 어두운 숲 속을 제법 오래 걷고 나서야 그 바위산 밑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론이 문제의 검은 가방까지 쥐고 바위산을 기어 올라가느라 녹초가 되었을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깁니다. 드래곤의 둥지가 있던 흔적이죠.”
  바위산 중턱에 동굴이라기 보단 엄청나게 크게 움푹 파인 곳이 있었다. 어찌나 깊이 파였는지 제일 안쪽이라면 태풍도 몰아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안쪽에 마치 거대한 생물의 발톱자국처럼 보이는 자국하고 거대한 알껍데기가 널려있었다.
  “흔적을 보면 아시겠지만 별로 오래되지 않았어요. 당신들에겐 희망적인 소식이겠군요.”
  미확인 동물학자가 히죽거렸다. 론이 발톱자국을 자세히 살펴보며 살짝 그것을 긁었다. 그리고 말했다.
  “암질이 이지경일 경우, 대형 쇠지레만 있으면 이정도 자국은 혼자서도 거뜬히 만들지.”
  문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다.
  “이거 안 깨뜨리고 갖고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달걀보단 튼튼하긴 하지만.”
  커다란 알껍데기였다.
  “타조 알 견본이죠. 이게 얼마나 자주 유용하게 써먹혔는지 들어보시면….”
  갑자기 남자가 론의 가방을 낚아채고 바위산 밑으로 힘껏 내딛기 시작했다. 남자는 거의 구르다시피 하며 허겁지겁 뛰어 내려갔다. 두 사람은 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하긴 했지만 멀리 도망가는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미확인 동물학자는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가방이 생각보다 가볍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문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해타리아 국립 동물원에 가면 저 놈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걸.”
  론은 대답도 하지 않고 어두운 숲 속으로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멀리 달아난 뒤 안전한 장소에서 가방을 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가방의 내용물을 고려하면 전혀 그럴 필요 없는 일이다. 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가자’라고 말했지만, 론은 한 동안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   *


  “젠장, 이럴 줄 알았어.”
  론은 방문을 쾅하고 거칠게 닫으면서 가방을 집어 던졌다. 가방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지만 랠은 모른 척 했다.
  “지옥에나 떨어질 사기꾼 같으니. 아으으으으!”
  “뭐 그렇게 화를 내? 비행기에선 조용~하드만. 아참, 너 고소공포증 있었다고 했나?”
  “그런 거 아냐! 비행기 안에선 그냥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뿐이라고! 해타리아까지 다녀왔는데 완전 헛걸음했잖아!”
  “어머, 아주 헛걸음은 아니지. 해타리아 관광청은 우리의 방문을 반가워했을 걸. 택시비는 쓰고 왔잖아.”
  “…말도 안 나온다.”
  “잘 안 되었나 보죠?”
  랠이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하자, 문이 경쾌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 연구에도 진척이 있어.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 해타리아는 조사 지역에서 완전 제외야. 자 이제 가능성 있는 국가가 76개 밖에 안 남았어. 아 참, 이시무라를 포함하면 77개로군.”
  “설계자여, 제기랄! 이시무라는 그냥 세지 마! 거기 대부호가 신도가 되는 바람에 억지로 추가한 거라는 거 정도는 나도 알아.”
  “그것도 검은 대륙과 동방동토(東方凍土)에 있는 백여개의 국가들을 제외하면 말이지.”
  “젠장, 몇 번을 말해! 그 하등종족들은 구원받지 못해. 따라서 그 땅에 그들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어! 버림받은 이들을 뭘 위해 그들이 지켜본단 말야. ‘말씀’에서 그렇게 말했잖아!”
  흐응, 하고 잠시 딴 데를 바라보던 문이 툭하고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진화론자들이 발표한 얘기를 들어보면 모든 인류는 검은 대륙에서 기원했다던데.”
  순간 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하, 그게 사실이라도 그 건 그저 검은 대륙의 인간들은 일반적인 인류에 미달하는 원시 인류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 불과….”
  “어, 론, 그거 말이죠….”
  랠이 뜨끔한 얼굴로 론의 말을 잘랐지만, 이미 문이 입을 열고난 후였다.
  “어머, 론, 그 얘기 내가 지어낸 건데.”
  “뭐!?”
  “학술회에서 그런 얘기를 늘어놓는데 뭐라도 되받아쳐야할 거 아냐. 사실, 검은 대륙 기원설은 상당히 증거가 탄탄한 이론이야. 흥미롭기도 하고. 내 주장은 사실 그 자리에서 땜빵하려고 꺼낸 궤변에 불과해. 그리고 그 친구들이 내 논리를 논파하려고 해서 내가 논점을 좀 흐려줬지. 진화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검은 대륙의 인간들도 그 원시인류에서 출발하여 지금까지 진화한 거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더 진화가 잘 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야. 사실 진화는 누가 더 잘났네 못났네 하고 쉽게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참다못한 론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위대한 설계에 맹세코, 네가 만약 또 그 놈들의 헛소리에 현혹된 거라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아니, 내 말은,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거지. 그들이 그토록 전능한데, 검은 대륙으로 이사나 여행 한 번 못 하겠어?”
  론이 폭발했다.
  “바로 이게 문제야! 너도 그 미확인 동물학자들 나부랭이나 다를 바 없어! 이건 호기심이나 탐구의 문제가 아니야! 고귀한 사명이라고! ‘말씀의 서’ 조차 무시하는 너는 이 사명을 짊어질 자격이 없어!”
  “아이구, 진정해. 진정해. 기분 좀 돋아주려고 했더니.”
  론은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거 알아? 넌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 뭔지도 모르는 거 같아. 소시오패스 아냐?”
  “글쎄. 소시오패스라는 개념 자체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
  “젠장, 집어치워.”
  남자가 거칠게 말하며 의자를 빙글 하고 돌렸다. 문은 랠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은 슬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뻔 하지 뭐. 사기꾼이었어. 그게 다야.”
  “설마 또 타조 알껍데기는 아니었겠죠.”  “설마가 사람 잡는 단다.”
  “세상에. 사람들은 왜 좀 더 독창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죠?”
  “그러게.”
  랠은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아침이었다. 시차가 느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그다지 피곤해보이지 않았다. 한참만에 랠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배는 여기 왜 뛰어들었어요?”
  “넌?”
  “자격요건에 비해 보수가 좋아서요.”
  “그게 다가 아닐 텐데.”
  “우씨, 박사님 따라 왔어요. 선배 정도 사람이면 멀쩡한 연구소에서 일 할 수도 있고, 교수자리도 얻을 수 있고, 여차하면 잘난 남자 하나 낚아서 결혼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곳에 매진하는 걸 보면 뭐가 있는 거 같아서요. 됐어요?”
  문은 만족스럽게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선배님의 잘난 자아에 한껏 바람넣어드렸으니까 말씀 좀 해보세요. 왜요?”
  문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두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였어.”
  “첫 경험 얘기라면 고등학생 때일 테고 첫 사랑이라면 중학생 때일 테고….”
  문이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했다.
  “정말 어렸을 때였어. 일곱 살이었나.”
  “세상에, 그 때 일을 기억한 단 말이에요?”
  “나잖아. 영광스런 졸업장이 빛나는….”
  “저도 똑같은 대학에 석박사까지 고대로 밟았거든요?”
  문이 킥킥거렸다.
  “사실 나도 한 동안 잊고 있었어. 어느 날 문득 기억난 거야. 음, 애들이 흔히 그러듯이, 산에서 친구랑 놀다가 길을 잃었지. 반나절 정도 꼬맹이들끼리 산을 헤매다가 간신히 빠져나왔어. 어른들 사이에선 애들이 없어졌다고 완전 난리가 났었더라고. 뭐 어쨌든 산을 헤매다 지쳐서 잠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봤지. 그 날은 구름이 완전히 깔려있어서 약간 어두컴컴했어. 그렇다고 비가 올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뭐 그런 날 있잖아. 그 때 나랑 친구 하나가 봤어. 바로 우리 머리 위에, 구름이 좀 찢어져서 하늘이 듬성듬성 보이는 곳이 있었거든. 그 틈으로, 커다란 도마뱀 같은 게 날아가는 걸, 우리 둘이서 봤어. 그래서 산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내려가려 애 썼던 기억이 나. 결국 산을 내려와 어른들한테 발견됐을 땐 너무 안심하고 지친 나머지 바로 나가떨어졌었지. 나중에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그 친구랑 어쩌다 그 얘길 다시 했어. 그 때 우리 둘이 독수리나 뭐 그런 걸 봤는데 동화책에서 본 드래곤으로 착각했던 걸로 결론지었지. 나도 집에 그런 동화책이 있었거든.”
  “음, 외계인 목격담도 그런 식이긴 하죠.”
  “그래, 목격자들의 증언이라는 게 결국 영화같은 걸로 본 장면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 깨달은 거야.”
  “뭘요?”
  “나, 그 드래곤이 나오는, 그러니까 내 인생 처음으로 ‘드래곤’이란 개념을 알려준 그 책은,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거였어. 그런데 내가 그 괴물을 본 건 학교란 데서 뭐하는 지도 모를 때였고. 내가 혼자 봤으면 어렸을 때 기억이라 왜곡되었거니 했겠지만, 우리 둘의 기억이 정확히 일치했어.”
  “친구한테는 그 얘기 하셨어요?”
  “아니. 걔한테는 단순히 어릴 적의 추억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나는 세상 어딘가에 진짜 드래곤은 아니더라도 뭔가 비슷한 생명체는 있으리란 확신이 생겼지. 미지의 괴수에 대한 환상이 나를 사로잡았어. 동물을 전부터 좋아하긴 했지만, 진로를 이과로, 자연계로, 과학으로, 잡을수록 이게 내 길이란 생각이 들었어. 동물학, 고생물학, 진화 생물학, 고고학…전공이건 비전공이건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어 보이면 실마리를 찾아서 미친 듯이 파고들었어. 그런데 어디서도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어. 열심히 공부를 할수록 알게 되는 모든 증거는 미발견 거대 파충류의 존재확률을 낮추기만 했지, 높여주지 않았어. 이런 걸로 연구비를 요청했다간 미친 놈 취급받기 딱 좋았지. 나는 마침내 체념하고, 좀 더 실현가능성이 높은, 정상적인 연구에 몰두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어. 그런데 기회가 생긴 거야. 그런 ‘미친 짓’에 돈을 쏟아 붇겠다는 정신 나간 놈들이 진짜로 나타난 거지.”
  랠이 피식피식 웃었다.
  “결국 이 교단 놀이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너도 마찬가지잖아.”
  “네, 뭐.”
  둘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용이 지나갈 것 같진 않았다.



  론은 연구실 한 쪽에 놓여있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거기에 드러난 분노를 삭이고자 애쓰고 있었다. 이 분노만 사라지면 진정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짓궂은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분노하는 게 아니야. 네가 느끼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좌절이야.’
  닥쳐. 목소리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엔 그의 신념이 매우 강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문은 좌절하지 않아. 왜 그런지 알아? 그녀는 믿지 않기 때문이야.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깨져버릴 신념이 없기 때문이야. 그녀에게 있어 용은 용가리면 충분해. 그녀는 반론에 개의치 않아. 반론이 옳아도 상관없으니까.’
  제기랄! 그는 식식 대며 어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가리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분노에 찬 채 도마뱀을 바라보았지만, 그게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문이 기껏 받은 보너스를 낭비하면서 용가리를 사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런 게 대체 왜 필요하냐고 론이 핀잔을 주자, 문은 그 자리에서 도마뱀에게 용가리라는 이름을 붙여버렸다. 그가 어처구니 없어하자 그녀는 그 이름이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고 말했다.  
  ‘거짓말이야. 그녀는 알고 있어. 그녀는 행운 같은 것을 믿지 않아. 그녀는 행운이 자기 마음대로 되리라 믿지 않아. 너는 용가리보다 더 큰 용은 찾지 못 할 거야. 그런 행운이 과연 찾아올까? 언제? 한 몇 세기 후에?’
  어항 가장자리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 약속이 있었어. 약속을 했단 말이야. 드래곤들도, 교주님도, 그에게 약속을 했었다. 원하는 것을 찾으리라고, 구원을 받으리라고.
  ‘사실을 왜곡 하지 마. 넌 그 어떤 용들로부터도 약속을 받은 적이 없어. 너에게 그런 달콤한 약속을 해준 건 인간이야. 아무리 봐도 세상을 설계했을 것 같진 않은 한 인간이 말이야. 그 자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었지?’
  진정한 길을 알려주었지.
  ‘네 젊음과 시간을 가져간 대가로 무엇을 해주었지?’
  올바른 신념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지.
  ‘네가 너의 재산과 삶을 헌납한 대가로 무엇을 얻었지?’
  삶의 목적과 구원의 희망을….
  ‘말뿐이군. 전부 말로 <알려준>것들뿐이야. 그렇지?’
  론은 용가리를 붙잡아서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런 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래. 넌 어른이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야 하지 않을까? 꿈 대신에 현실을 쫓아야지.’
  마지막 한 마디에선 분명히 희극적인 빈정거림이 느껴졌다. 론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자신이 슬슬 미쳐가는 것 같았다. 만약 문이나 다른 사람이 론에게 저런 말을 했으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때 론은 강한 신념으로 스스로의 의구심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가 성인으로 지낸 삶의 대부분을 투신한 신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론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신념은 논리가 아니다. 신념은 논리로 깰 수 없다. 그리고 논리로 보호할 수도 없다. 론은 머리를 싸매 쥔 채 무릎을 꿇었다.



  “안녕. 일찍 왔네?”
  문이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먼저 와 있던 론에게 인사를 했다. 랠은 또 늦잠을 자는 지 아직 없었다. 무심히 지나치려던 문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론을 바라보았다. 론은 언제나처럼 무척 심각한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문, 조금 있으면 다른 견습사제가 여기 감독으로 올 거야. 난 이 임무에서 떠나.”
  “왜?”
  “…그럴 일이 있어.”
  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이 입을 열었다.
  “걱정되지 않아?”
  “뭔 소리래.”
  “떠나는 거.”
  “내가 너랑 아니면 할 일이….”
  “아니, 교단.”
  론이 잠시 입을 다물더니 말했다.
  “내가 교단을 왜 떠나냐?”
  “화를 안 내내.”
  “뭐?”
  “전 같으면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그러질 안잖아. 정말이구나, 너. 갑자기 왜?”
  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
  “믿음을 잃었니?”
  론은 그저 문의 시선을 피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 그런 거야, 론? 넌 아주 모범적인 성직자였잖아.”
  “…나는 네가 더 이해가 안 가.”
  “응?”
  “넌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넌 믿음이 애초에 없었잖아. 넌 교단의 교리를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어. 하지만 교단의 근본을 다지는 이 핵심적인 연구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헌신적이었지. 그리고 이 연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과학자들한테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넌 왜?”
  문이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너도 알 권리가 있지.”
  “뭘?”
  “얘가 미안하대.”
  “뭐?”
  “어제 너한테 말을 너무 짓궂게 한 거 같다고. 좀 더 조심했어야하는데. 그리고 마땅히 나한테도 미안해해야지. 나한테 그렇게 신신당부해놓고 자기가 먼저 약속을 어기면 어떡해?”
  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았다. 문의 얼굴에 언제나 서려있었던 장난기가 보이질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문이 몸을 돌려 어항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용가리를 들어올렸다. 그녀가 론 쪽으로 몸을 향하자, 용가리와 론의 눈이 마주쳤다. 그냥 도마뱀일 뿐이었다. 도마뱀의 눈이 깜빡였다.



  그들의 힘은 강대하였다. 그들은 수명이 길고 성장하는 데 오래 걸려 개체수는 많지 않았지으나, 먹이 사슬에서 최상위에 위치하였기에 종족보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들 스스로도 어떻게 가능한 지는 잘 몰랐지만, 그들은 인간이라면 ‘마법’이라고 부를만한 일을 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별들 사이를 여행할 줄 알았고, 정신으로만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집락이나 도시, 문자와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 소통을 통해 나름대로 문명이란 것을 일구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동안, 그들은 이 별에서 삶을 지속하였다. 삶과 죽음, 모든 것이 느렸고, 변하는 것은 없어 보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별의 환경이 조금씩 변화긴 했지만, 그들은 그 정도의 변화는 견뎌낼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살던 세상에 파멸이 닥쳐왔다. 쇄도하는 유성의 비는 그들조차 감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희망적인 예측과 헛된 시도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별을 떠나는 여정은 여느 때와 달리 여흥이 아니라 비탄에 잠긴 장례행렬이었다. 그들이 떠난 지 오래지 않아, 불꽃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들은 멀리서나마 타오르는 별을 지켜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들은 문득 자기들의 고향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몇 명의 동족을 시켜 죽은 별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놀랍게도 별은 살아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시간관념이 별과 별 사이를 전전하는 동안 심하게 왜곡되었음을 깨달았다.  고향 별의 시대는 하늘에서 불꽃이 비처럼 쏟아진 지 수천만 년이 흐른 후였다. 당시 별의 표면에는 스스로 인간이라 칭하는 재밌는 생물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문명을 일구고 있었다. 정찰대는 호기심 때문에 인간에게 접근하였다. 그러자 인간들의 첫번째 반응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을 타도하기 위한 군대가 조성될 즈음에야 정찰대는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는 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인간과의 조우가 별의 문화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인간과 적극적인 교류를 주장하는 부류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천성은 보통 관조적인 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태어난 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게 훨씬 흥미롭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 후로도 여행자들이 잃어버린 고향에 들르곤 했다. 그러한 방문자가 약간의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별에는 무수한 전설이 피어났다. 전설에는 납치당한 미녀와 용감한 기사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영험한 존재의 조언을 찾아 떠나는 영웅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인간들의 기술, 특히 군사·천문계열의 관측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여행자들은 예상치 못한 조우를 피하기 위해 조심스러워져야했다. 인간들의 문화생태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성이 줄어들었으나, 이에 따라 안정되기는커녕 오히려 극도로 민감해져갔다. 예전처럼 별 생각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간 돌이킬 수 없는 문화오염이나 심지어는 직접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런 ‘사고’는 인간 연구가들이 별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 한 여행자가 애완동물의 눈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밀착관찰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작은 착안은 곧 여흥에서 연구로 발전하였다. 용가리가 눈을 깜빡였다.



  론은 입을 벌린 채 서있었다. 문이 그를 한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
  “다 들었어?”
  론이 믿어지지가 않는 다는 듯 말했다.
  “어…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저 녀석 사올 때. 운이 좋았지.”
  “왜 말 안 해줬어?”
  문은 용가리를 내려다보면서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들이 거래를 제안 했어. 내가 그들을 연구하는 대신, 입을 다물 것. 그들도 해야 할 연구가 있으니까. 계약을 어기면 나랑 접촉을 끊기로 했고. 그래서 받아들였지. 내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질 판인데 학계에서 상 몇 개 좀 못 받으면 어때. 그래놓고, 너한테 얘가 먼저 말을 걸어 버렸지 뭐야, 이 말 안 듣는 못된….”
  문은 고개를 들어 론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그는 용가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용에 대한 신념을 용에게 빼앗긴 남자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거렸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위대한 설계는…설계는 누가….”
  론이 더듬거렸다. 그의 눈에는 희망과 절망이 뒤섞여있었다. 문이 용가리를 내려다보았다.
  

  글쎄, 모르지. 신이려나?



  교단은 론의 예상보다는 오래 존속하였다. 그러나 교주의 갑작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죽음과 더불어 급격히 기울어갔다. 문은 마지막으로 연구비를 챙긴 채 미련 없이 교단을 빠져나왔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과학의 창녀라는 상당히 불공정한 꼬리표가 붙어있었다. 학계로 복귀하기 어렵게 된 그녀는 은둔하여 독자 연구가가 되었다. 문이 도마뱀하고만 얘기하는 실성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랠은 문과 달리 교단을 도운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어느 중소기업의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누군가 과거를 물어보면 돈이 급해서 아무 일이나 했다고 둘러댔다. 론은 일찌감치 교단에서 손을 떼고 주류 종교의 사제로 귀의하였다. 그가 새로운 신념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신의 발톱이나 알껍데기 따위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하였다. 용가리는 일반적인 애완 도마뱀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끝



뱀발
이하 내용은 작품의 줄거리와 무관합니다.

1)제목은 유사과학(pseudo-science)이론인 지적설계론(intellectual design theory)에서 따왔습니다.
2)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실재 종교 창시자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문-문선명, 통일교
론-로날드 허버드(Ronald Hubbard), 사이언톨로지
랠-클로드 보리롱 라엘(Claude Vonlhon Rael), 라엘리안 무브먼트
3)미확인 동물학(Crypto Zoology)이란 실존하는 명칭이며, 스스로 이를 연구하는 학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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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작년 공개합평회용으로 쓰기 시작한건데...이제서야 완결을 지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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