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거울숲

2012.03.05 10:4803.05

원래 공개합평회용으로 쓰고, 군대에서 개작했다가 원고를 잃어버린 글이었지요. 몇년만에 온전한 원고를 찾아내서 다시 고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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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숲

  달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는 밤입니다. 남자는 어두운 흙길을 걷고 있습니다. 밤하늘 아래 너른 밭이 달빛을 반사하며 펼쳐져 있고 밤바람에 수풀이 휘날리며 벌레소리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걸음 한 번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멀리 보이는 불빛에만 고정되어있고, 그의 발은 그 빛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점점이 모여 있는 불빛들은 어렴풋하게 자그마한 마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발을 옮기던 남자는 어느 덧 마을에 도달합니다. 마을 어귀에 마을의 이름이 새겨진 것 같은 커다란 바위가 놓여있지만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남자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불이 비교적 밝게 밝혀진 집 하나로 들어갑니다. 밝은 빛이 가까워지자 남자의 등에 걸려 있는 엽총이 번뜩입니다. 가게 문을 열자 텅텅 비어있는 자리들이 남자를 반깁니다. 구석에서 발을 끄는 소리가 납니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여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오는 것이 보입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어서 오세요. 묵고 가실 건가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여자는 급할 것 없다는 듯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옵니다. 남자는 여자가 아주 가까이 오고 난 다음에야 여자를 살펴봅니다. 여자는 이런 가게의 주인노릇을 하기엔 많이 젊어 보입니다만, 딱히 주인이라 할 만한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뭐 좀 드시겠어요?”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합니다.
  “끼니 될 만한 걸로 아무거나 주시오. 물 한 잔이랑.”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 쪽으로 사라집니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짐을 풀어 옆자리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총을 빼서 가만히 짐 밑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상을 봐온 여자가 느닷없이 묻습니다.
  “사냥꾼이세요?”
  남자가 흠칫합니다.
  “그렇게 안 숨겨놔도 되요. 여긴 워낙 평화로운 촌구석이라, 총 좀 갖고 있다고 누가 뭐라 그러진 않아요. 마을에 엽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엽니다.
  “난 떠돌이요. 총은 그냥 쓸모가 많아서 들고 다니는 거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총 숨기는 것이 버릇이 되었소. 뜨내기 생활이 가르쳐준 교훈이지.”
  여자가 고개를 갸웃합니다.
  “그런 분이 이 마을엔 왜 오셨어요? 여긴 완전히 벽촌이에요. 오셨던 길로 돌아가시는 거 말고는 딱히 갈 곳도 없는데.”
  남자가 잔을 들어 올리며 말합니다.
  “없기는 왜 없다는 거요? 이 마을 뒤 쪽으로 숲길이 나 있지 않소? 거기로 갈 생각이었는데.”
  여자가 눈을 크게 뜹니다.
  “숲이라면, 거울숲으로 가신다구요?”
  남자가 물을 마시다 말고 여자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묻습니다.
  “저 숲 이름이 거울숲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숲 이름도 모르면서 지나가려고 한 거예요, 아니면 우리 어머니처럼 뭐든지 잊어버리시는 거예요?”
  “아니 난 뭐 그냥 이 마을의 숲이란 말만 듣고….”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입니다.
  "아니, 이름도 모르는 숲을 뭣 때문에 가려고 한 거예요?"
  "지나서 가야 하는 곳이 있어서 그렇소."
  "보통 사람들은 숲 외곽을 따라 빙 돌아가요. 손님처럼 '그 숲으로 가겠다'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요. 마을의 총잡이들도 거기선 사냥 안 해요."
  "그렇게 위험하오? 뭐 어쨌거나, 이상한 이름이군."
  여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엽니다.
  “일단은 전설 때문이에요.”
  “전설?”
  한적한 가게 안에서 여자는 풀어진 자세로 남자의 옆자리에 걸터앉습니다.
  “저 숲에는 두걸음이가 나옵니다는 얘기가 있어요.”
  남자가 잠깐 침묵하다 되묻습니다.
  “뭐요?”
  “두걸음이.”
  “두걸음이? 무슨 도깨비요?”
  “비슷한 거예요.”
  “세상에.”
  남자가 얼굴을 조금 찌푸립니다.
  “어쨌든, 그게 대체 뭐요? 이름이 아주 이상하군.”
  여자가 먼 산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런 얘기예요. 숲 속을 혼자 걷고 있는 여행자가 있으며, 어느 순간 사위가 조용해져서 자기 발소리 밖에 안 들리는 때가 와요. 그 여행자는 그 때 자기가 혼자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사실은 두 개의 발소리가 나고 있는 거예요. 여행자의 발걸음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죠. 시간이 지나면 남자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여행자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봐요. 그리고 두 개 였던 발소리는 다시 하나로 돌아가요. 숲을 빠져나오는 여행자는 여전히 혼자예요. 그런데, 과연 이 사람은 아까 수에 들어갔던 그 사람일까요?”
  남자가 피식 웃습니다.
  “애들 귀신 이야기 수준이군.”
  여자는 웃지 않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글쎄요, 우리 어머니께서 저 어렸을 때 겁주는데 활용하시긴 했지만, 어쨌거나 동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숲에 들어가는 걸 금기 시 했어요.”
  “나 같은 외부인들이 있었을 텐데?”
  “그야 당신처럼 숲을 지나쳐간다고 하긴 하지만 사실상 마을을 빠져나와서 숲을 돌아갔죠. 별로 걸어가기 좋은 곳은 아니거든요. 가끔 시간을 단축한답시고 숲을 가로지르려고 했던 사람들은 기분 나쁘다고 도로 나온 경우가 많아요."
  “나 원. 어쨌거나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사람이 있는 거잖소?”
  여자가 입술을 핥습니다.
  “모습을 훔치는 도깨비잖아요. 돌아온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인 줄 누가 알겠어요.”
  남자는 참다못해 폭소합니다.
  “거 참 편리한 괴담이군. 고작 그런 이야기 때문에 거울숲이란 이상한 이름이 붙었단 말이오?”
  “또 있어요.”
  “응?”
  “숲의 나무에 종종 석영이나 양은 따위가 엉겨 붙어있어서 주변의 사물이 비쳐요.”
  “아니, 괴담 따위보다 훨씬 직접적인 이유잖소!”
  이번엔 여자가 피식 웃습니다.
  “그건 이미 거울숲이란 이름이 붙은 후에나 일어난 사건 때문이에요.”
  “누가 숲에다 석영을 마구 뿌리고 다닌 거요?”
  “비슷해요.”
  “세상에.”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자 여자가 자세를 고쳐 앉습니다.
  "서너 세대 정도 전 일이에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란 얘기처럼 들리는 군."
  "비슷하죠. 제 어머니께서도 무슨 옛날얘기 해주시듯 말씀하신 이야기예요. 어떤 요술쟁이가 이 마을에 왔어요."
  "세상에, 요술쟁이라니."
  남자가 빈정대든 말든 여자는 이야기를 계속 합니다.
  "요술쟁이는 갑자기 이 숲 속에서 살겠다고 말을 했대요. 이름이 맘에 들었다나? 그리고 그는 갑자기 석영, 은, 양은 따위를 잔뜩 긁어모으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이유를 아무도 몰랐죠."
  "거울의 재료잖소? 석영은 그렇다 치고 은에 양은이라, 돈이 많은 작자였나 보군."
  "사람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도 딱 거기까지였어요. 숲 한 가운데서 그런 것들을 갖고 무얼 하겠어요?"
  "요술쟁이라면서? 요술을 부리려 했나 보지."
  "마을에선 그를 두려워하긴 했어도, 진짜 요술쟁이인지는 몰랐어요. 나중에 병사들이 그를 체포하러 나타났을 때 알아차렸죠."
  남자가 혀를 찹니다.
  "뭔가 사고를 치고 도망친 양반이었나 보구먼. 그럼 그 전에 그는 아무 짓도 안 했소?"
  "그럴 리가요."
  여자가 천천히 말을 시작합니다.
  "숲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는데 모두가 궁금해 했어요. 저 숲은 원래부터 영 기분 나쁜 곳이었거든요. 자라는 나무들만 해도 배배 꼬인 것들이 대부분이라 목재로서 가치가 거의 없었어요. 사냥할만한 동물이 많이 사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는 가끔 먹을 것 따위를 사가는 것만 빼면 도통 나올 생각을 안 했지요. 그리고 숲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죠. 뭔가를 건축하고 있는 것 같은 소리가."
  남자가 또 피식 웃습니다.
  "꼭 자기가 겪어본 것처럼 얘기하시는 군."
  "직업병이죠. 저도 제 어머니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까요. 어머니는 할머니한테 들으셨고…뭐 그런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죠."
  "그래서, 요술쟁이가 요술을 부려서 숲에 자신의 요새라도 세웠소?"
  "비슷해요."
  "세상에."
  "요술쟁이를 따라 숲에 들어갔다 온 짐꾼들이 그걸 목격했어요. 무슨 공방 같은 것이 지어져 있더라고요. 문제는, 거기서 뭘 만드는 지는 아무도 몰랐다는 거예요. 짐꾼들은 짐만 내려놓고 후다닥 도망쳐 나오곤 했지요."
  "잠깐, 그 친구 혼자서 그걸…아, 요술쟁이라고 했지. 뭐, 계속하쇼."
  여자는 잠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잇습니다.
  "물론 동네에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긴 했어요. 요술쟁이가 가끔 흐느껴 운다느니, 그게 아니라 도깨비가 우짖는 소리가 나는 거라느니, 사실은 요술쟁이가 끔찍한 괴물을 만들고 있느니, 귀신을 불러내고 있는 거라니, 기타 등등."
  "…두걸음이를 부릴 거란 얘긴 안 나왔소?"
  "안 나왔을 리가요. 괴물이니 귀신이니 하는 건 전부 두걸음이를 돌려 부른 거라 봐도 되죠."
  "허."
  "그 때 까지만 해도 두걸음이를 언급하는 것이 놈을 부르는 것이라는 믿음이 퍼져있었나 봐요. 저희 어머니도 종종 그런 얘길 하셨으니 까요. 뭐, 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요."
  "당연하지 않소?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신 따위…호랑이도 제 말하면 옵니다, 뭐 이런 거나 마찬가지잖소."
  여자는 어깨를 으쓱 합니다.
  "어쨌거나, 요술쟁이가 숲에 들어앉은 지 시간이 좀 지나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일단 짐승들의 기척이 없어졌어요. 원래 동물이 많이 사는 숲은 아니었지만, 다람쥐 한 마리 안 보이게 되었죠. 그리고 숲에 들어간 짐꾼들이, 나무에 녹은 거울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게 엉겨 붙어있는 걸 발견한 거예요. 요술쟁이가 동물들을 내쫓으려고 숲에 그걸 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래서?"
  "얼마 후에 병사들이 들이닥쳤데요."
  "뭐요?! 그걸로 끝?"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인상을 씁니다.
  "체포해간 이유는 뭐였대요?"
  "병사들은 그저 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무당이라고만 말해줬어요. 그 이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고요. 다들 그저 요술쟁이인지 무당인지 어쨌든 그 자가 사라지는 걸 반기는 분위기였대요. 요술쟁이는 그렇게 사라졌어요. 숲 한가운데에 있는 기묘한 폐허와 반짝이는 나무들만 남기고."
  "허참, 허무하군."
  "아."
  여자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 말을 잇습니다.
  "요술쟁이의 폐허에는 음산한 것 하나가 더 남아있었어요."
  "그건 또 뭐요?"
  "작은 무덤이었어요. 아무 것도 안 적힌 나무 묘비 하나만 꽂혀있었데요."
  "세상에, 아이들을 잡아먹기라도 했나?“
  여자가 고개를 젓습니다.
  "마을에서 사라지거나 한 아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리고 요술쟁이는 분명히 혼자 왔었고…모르죠. 아무도 그 무덤은 건드리지 않았대요. 그리고 2세기가 지났으니, 지금쯤 풀만 무성하겠죠."
  "흐음."
  남자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냅니다.
  "얘기 잘 들었소, 주인장."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자가 한 마디 더 합니다.
  "조심해요. 전설이야 어찌되었든 저 숲은 좋은 얘기가 없는 곳이에요. 저희 어머니만 하시더라도 아직 조그마한 애였을 때 할아버지랑 싸운 다음 화가 나서 죽어버리겠다고 그 숲으로 들어 가셨었는데, 몇 걸음 들어가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서 도로 뛰어나오셨다니까요."
  숙소로 들어가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하지만 난 당신 어머니가 아니잖소."

*  *  *

  남자는 새벽같이 눈을 뜹니다. 그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뒤 빠르게 짐을 챙깁니다. 마치 그 자리에 묵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자리를 정리한 남자는 신속하게, 하지만 조용히 숙소를 나섭니다. 여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기척이 없습니다. 가게를 빠져나온 남자는 찬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새벽의 마을은 옅은 안개에 휩싸여 있으며, 아직 어둡습니다. 남자는 빠르게 걸어가면서 짐에서 말린 음식을 꺼내어 먹습니다. 아침을 때우고 있노라니 어느덧 마을을 벗어난 남자는 가방 끈을 질끈 동여 멥니다. 그리고 앞으로 걷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을 때마다 사람의 흔적은 점점 옅어지고 숲의 그림자가 짙어집니다.
  마침내 그는 반짝이는 개울에 이릅니다. 아무리 물에 햇빛이 비친다 해도 지나치게 반짝이는 개울이라고 남자는 들었습니다. 이 개울은 여름엔 애들이 와서 놀기도 하는, 숲과 마을을 가르는 마지막 경계라고 했습니다. 남자는 아무렇게나 놓인 징검다리를 한 발 한 발 건넙니다. 물 밑 자갈에 엉겨 붙은 뭔가가 반짝입니다. 개울을 건넌 그의 앞에는 보다 짙은 안개가 깔린 숲이 놓여있습니다. 남자는 가방 옆에 메고 있던 엽총을 손에 듭니다. 두걸음이든 뭐든 나와 보라지, 하고 남자는 생각합니다.
  남자는 숲에 대한 괴담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이 숲에 은(그리고 덤으로 양은)을 찾으러 들어왔던 바보들은 전부 중간에 겁에 질려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괴물이 존재한다고 입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 그 얼간이들이 늘어놓은 변명은 전부 음침하고 깊은 숲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만한 것이었습니다. 점점 어두워졌다느니, 뭔가가 보고 있는 것 같다느니, 이상한 기척이 들린다느니…남자는 달랐습니다. 최소한 스스로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온갖 야수와 보물, 그리고 이따금씩 사람을 사냥했던 그입니다. 멍청한 전설 따위와는 상관없이 그는 무엇이든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전설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숲이 자리한 산기슭에서 볼법한 착시현상에 대해선 지역주민들이 잘 아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안개가 끼었을 때 산길을 가다보면 신기루가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습니다.
  남자는 전설은 안 믿어도 은과 양은을 잔뜩 들고 숲에 잠적한 미치광이가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양은은 사방팔방에 뿌려져서 지금의 번쩍이는 숲을 만들었지만, 그 이른바 '요술쟁이'가 쌓아두었던 은의 행방은 묘연했습니다. 그저 성실했던 당시의 병사들은 요술쟁이의 신변을 확보하는 데 팔려 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습니다. 남자는 지나치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요술쟁이가 관련된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한 지 200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거의 잊혀 있던 이 숲이라면 2세기 전의 유물 같은 것이라도 건질 수 있으리란 게 그의 계산입니다. 또 양은이 잔뜩 엉겨 붙은 나무가 나왔지만 남자는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양은의 희소성은 2세기가 지나는 동안 크게 줄었습니다. 그는 나무보다는 바닥에 신경을 쏟습니다. 오랜 세월 버려지긴 했어도 요술쟁이가 은이 가득 실린 수레를 끌고 지나간 길, 왕의 병사들이 고집스레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꾹꾹 눌러 밟으며 지나간 길은 미묘한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풀과 낙엽만 가득한 곳이라고 여길만한 곳에서 남자는 길을 찾아 걷습니다. 남자는 이야기 속의 여행자처럼,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의 발소리만을 들으며 걷습니다. 어느 새 안개가 걷히고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나마 햇빛이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 나쁠 만큼 어둡습니다. 여자의 말 하나는 맞았습니다. 동물의 기척은커녕 흔적조차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 묘합니다. 남자가 낙엽을 밟아 바스락거리는 소리,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것은 나무 위에 가만히 있습니다. 이따금씩 온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는 합니다. 그것은 아까 숲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 남자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만약 그것이 있는 곳을 그가 본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주변의 사물들을 자신의 몸에 투영하여 완벽한 보호색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울처럼. 남자가 그것이 앉아있는 나무를 지나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것은 미끄러지듯 조용히 나무를 내려옵니다. 그것이 지나온 나무껍질이 조금씩 반짝입니다. 그리고 땅에 조심스레 몸을 맡깁니다. 바스락. 남자가 총을 뽑아 들고 뒤를 돌아봅니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있던 남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하지만 그저 '안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팔(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뻗습니다.

  이번만은 남자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뒤돌아서며 엽총을 갈깁니다. 귀청을 때리는 총성이 울려퍼집니다. 뭔가 확실한 움직임을 남자는 느낍니다. 낙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거칠어집니다. 남자는 뒤로 물러나다가 투명한 어떤 것의 움직임을 포착합니다. 총성이 한 번 더 울려 퍼집니다. 총알이 뭔가를 관통하면서 은빛이 번뜩입니다. 하지만 이 괴물인지 유령인지 하는 것은 개의치 않는 듯 끊임없이 남자에게 달려듭니다. 탕! 이번에 놈은 투명한 몸의 형태를 순간적으로 바꿔 피합니다. 탕! 탕! 철컥! 총알이 없습니다. 남자는 총을 내던지고 단검을 뽑습니다. 단검을 내질렀지만 놈은 피할 생각도 없는 듯 남자의 몸을 정면으로 덮칩니다. 단검으로 찔렀다고 생각한 부분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남자의 마지막 일격을 헛손질로 만듭니다. 남자는 단검을 놓치고 맙니다. 이젠 은빛으로 번뜩이는 본 모습을 드러낸 녀석이 덮쳐옵니다. 어쨌거나 은 덩어리는 찾았군, 하고 남자는 힘없이 생각합니다. 남자는 소용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놈을 막으려 애씁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지만, 남자는 죽음을 예감합니다. 남자의 주마등이 지나갑니다. 남자의 눈동자로 은빛 벽이 덮쳐옵니다.

  잠시 후, 눈을 뜬 남자는 자신이 어떤 좁은 공간 안에 갇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공간의 둥근 내벽은 마치 거울처럼 되어있습니다. 기괴하게 왜곡된 남자의 모습이 사방에 비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과 기억들이 남자의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갑니다. 거울숲. 두걸음이. 은을 찾으러 왔다가 은에게 먹힌 얼간이. 벽이 오그라들면서 남자를 조여 옵니다. 남자는 무기력하게 발버둥칩니다. 남자와 두걸음이의 구분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형상만이 남습니다.

  그는 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 숲의 아이입니다. 숲은 그의 안뜰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그리고 뭔가에 부딪혀서 멈춥니다. 동화책에서나 나올 것 같은 요술쟁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2세기 전에도 낡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옷을 입고 있으며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수염을 잔뜩 길렀습니다. 요술쟁이가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합니다. 2세기 전의 말은 가장 심한 사투리보다도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는 끊임없이 중얼중얼 거리며 다분히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이긴 하지만, 그가 뭔가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요술쟁이의 그의 멋진 사슴뿔을 붙잡고 뭐라고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사슴이 아닙니다. 요술쟁이는 그를 자신의 공방으로 다시 데려옵니다. 그는 묶여있진 않지만 도망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요술쟁이는 뭔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날 밤, 몸이 움츠러들 만큼 강력한 기운이 숲을 휩씁니다. 안 그래도 두걸음이들에게 쫓기던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공포감 속에 숲을 완전히 떠납니다. 나는 뒤쫓을 것들을 잃습니다. 그리고, 오직 사람의 형상을 한 것만을 좇을 것을 강하게 주입 받습니다.
  그는 나무위에 앉아있다 미끄러져 내려옵니다. 나무 여기저기에 반짝이는 것이 묻어납니다. 다른 두걸음이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봅니다. 누군가 다가옵니다. 본능적으로 풍경에 녹아들어 숨습니다. 요술쟁이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마을 사람 하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가오는 중입니다. 단순히 짐을 옮겼을 뿐인 짐꾼은 도대체 이 미친 늙은이가 왜 이러는 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반은 짜증, 반은 공포가 섞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걸음이 하나가 사라졌음을 깨닫습니다. 실험성공입니다. 그날 밤, 두걸음이 하나가 요술쟁이를 덮칩니다. 잠시 뒤, 멀쩡히 일어난 요술쟁이는 입에 일그러진 미소를 띠다가 느닷없이 폭소를 합니다. 모든 예비 실험이 성공했습니다. 요술쟁이는 왕의 병사들을 피해 이 숲에 숨어든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이제 실행만이 남았습니다.
  요술쟁이는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요술쟁이는 다른 두걸음이를 데리고 관 쪽으로 갑니다. 자그마한 관입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두걸음이가 손을 뻗어 관을 만집니다. 곧 그것은 관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아이와 닮은 모습으로 쌓여갑니다. 마침내 그것은 시체처럼 창백한 벌거벗은 남자아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쓰러집니다. 요술쟁이가 급히 다가가서 아이를 끌어안아 여기저기를 만져도 보고 흔들어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관에 넣습니다. 그 과정이 몇 번 반복되나, 결과는 똑같습니다. 그의 차례가 되기 직전, 요술쟁이는 끝내 울음을 터트립니다. 죽음을 거울에 비추면 죽음이 보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 요술쟁이는 통곡을 하며 죽은 두걸음이를 안고 있을 뿐입니다. 요술쟁이는 시신을 다시 관 속에 넣고, 주저앉고 맙니다. 병사들이 돌입하여 요술쟁이에게 포승을 씌우는 순간까지 그러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정중하게 요술쟁이를 포박하지만 요술쟁이는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않습니다. 병사들은 요술쟁이의 수레에 요술쟁이를 들어 올려 얹어놓습니다. 요술쟁이는 얌전하게 자신의 말과 수레로 실려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병사 한둘이 뭔가를 본 것처럼 이쪽을 황급히 돌아보지만, 곧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흐리더니, 요술쟁이를 체포하는 일로 신경을 돌렸습니다. 병사 하나가 관 쪽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요술쟁이와 묘하게 닮은 시신을 보고는 잠시 멈추더니 혀를 찹니다. 병사 한 둘이 그에게 다가와 간단한 흙 무덤을 만드는 것을 돕습니다. 적당한 나무판자 하나를 묘비 삼아 꽂는 것으로 작업은 끝납니다. 할 일을 마친 병사들이 사라집니다. 그러자 다른 두걸음이 몇이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제껏 이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이 들이닥치는 것은 처음 겪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곧 원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주변에 녹아 들어가며 사라집니다. 다른 '기억'이 떠오릅니다. 2세기 분량의 일상들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쩌다 사람이 숲에 들어올 때 마다 두걸음이가 하나씩 사라집니다. '그'는 마지막 두걸음이입니다. 오늘이 마침내 그의 순서입니다.

  몇 분 사이에 두 삶의 기억을 전부 훑은 남자는 혼란스럽습니다. 그는 근처 나무뿌리 위에 주저앉으려다 내팽개쳐진 총을 발견합니다. 탄창이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기괴한 피웅덩이가 있습니다. 남자는 요란하게 구토를 합니다. 꿈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죽었으되 살아있다는 현실과 맞닥뜨립니다. 남자는 죽음을 잊고 싶습니다. 그는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겪었으나, 정말로 ‘죽은’ 것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등짐에서 조그만 삽을 꺼내, 웅덩이를 흙과 낙엽으로 덮습니다. 본능은 죽음은 잊어버리고 삶을 계속 할 것을 그에게 권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살점 한 조각, 작은 핏자국조차 보이지 않고 피비린내가 거의 안 날 때 까지 흙을 뿌립니다. 이제 모든 것이 덮였다고 생각한 순간, 유치하고 진솔한 자아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저기 묻혀있는 거, 나잖아? 그냥 이렇게 묻어버리고, 없던 걸로 치는 거야? 남자는 망설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대로 모른 척하고 살면, 예전처럼 그냥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의 옛 몸이, 전에는 그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는 두걸음이에게 먹혔습니다. 두걸음이!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죽은 것을 잊어버리면, 옛 몸과 함께 두걸음이또한 사라집니다. 그가 바로 두걸음이인데도 말입니다. 두걸음이의 거울에 비춰져있는 그가 살아있었기에 지금도 살아있는 건데 말입니다. 비록 두걸음이가 그를 죽였지만, 그는 두걸음이를 잃는 다는 데서 상실감을 느낍니다. 2세기 동안 삶은 이제 그의 기억입니다. 그 삶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남자의 새 몸이 되는 것이었고, 이제 막 그 사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죽음을 잊어버리는 것은 두걸음이를 잊는 것이기에 이 기억, 이 삶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죽음과 기억은 두걸음이의 존재에 대한 마지막 증거이자, 원래의 ‘자신(自身)’에 대한 마지막 증거이기도 합니다. 온전한 하나의 삶과 하나로 이어진 두 삶. 둘 다 남자의 삶입니다.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덤을 마무리 짓습니다. 적당한 돌과 나무를 주워 묘비처럼 세워놓습니다. 남자는 입술을 깨뭅니다. 놓쳤던 단검을 주워, 임시변통 묘비에다가 글자를 새깁니다.

나.

  남자는 터덜터덜 개울가로 돌아왔습니다. 개울 너머에 여자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보고 미소 짓습니다.
  "돌아오셨네요?"
  남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접니다.
  "정말 고약한 숲이더군. 길도 안 보이고, 가도 가도 나무뿐인데다가 태양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기가 힘들고…내가 지금 어디쯤 왔는지도 알 수 없는 데 지치는 바람에 그냥 뒤돌아서 나와 버렸소. 그나저나, 당신은 내가 돌아올 줄 알고 여기서 기다린 거요?"
  여자가 피식 웃습니다.
  "무리도 아녜요.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으니 까요."
  남자는 발끈합니다.
  "난 뭔가에 겁먹은 건 아니오."
  퉁명스럽게 말을 뱉은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멈칫합니다. 그녀의 얼굴에 서글픈 표정이 드러납니다.
  "…저희 어머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남자는 잠자코 있습니다.
  "그런데 임종 직전에 하신 말씀이 있어요.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요. 마치, 마치 이미…한 번 겪어본 일처럼 말예요."
  잠시 먼 산을 바라보던 여자가 남자의 눈을 바로 쳐다봅니다.
  "다만 한 번 죽었던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얼마나 무서웠으면 스스로에게조차 그것을 숨기고 있었을까, 하시더라고요."
  남자는 그저 여자의 눈을 마주 바라봅니다.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옵니다.
  "그리고 은처럼 반짝이는 눈물 하나를 떨어뜨리셨답니다."



Doppelganger

Dop•pel•gäng•er, -gang-〔도펠갱어│도플갱어〕 n. [때로 ddoppelganger] 생령(生靈)(wraith) 《본인과 판박이인 분신령(分身靈)》어원 : Double-goe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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