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녀가 원했던 것

2006.07.22 00:5807.22

나는 거울앞에 섰다. 거울 속으로 미끈한 몸매가 나타났다. 아랫배가 약간 나오기는 했지만, 균형잡힌 골격에 탄력있는 근육은 40대인 나를 20대로 보이게 하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바로 결전의 날인 것이다. 나는 책상앞에 놓여있는 검은 007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8억. 자그만치 8억이라는 큰돈이 가방 안에 담겨있다. 나는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딸 아이를 그렇게 보낼 것이 아니었는데. 모든 일이 자기 잘못 같았다. 은성은 아이 엄마가 죽어버린 뒤로 그에게 남은 유일한 보물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온 것인지, 최근 들어 부쩍 말다툼을 한 횟수가 늘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19살이니, 한창 뛰어 놀 나이에 학교에 갇혀서 입시스트레스를 받으니 예민해지기도 하겠지, 내가 이해해야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은성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더욱 삐뚤어졌다. 은성과 다투는 날도 많아졌고, 그 정도도 심해졌다. 은성은 내가 잔소리를 심하게 한 날이면, 휑하니 집을 나가버리곤 했는데, 그러다 며칠이 지나 퇴근후에 방문을 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여겼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오면 집에 은성이가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설때마다 퀘퀘묵은 먼지냄새만이 나를 맞을 뿐이었다. 은성이 집을 나간지 3일째. 은성은 심한 경우 한 달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영원히 딸을 보지 못할수도 있을거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예감에서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나는 그냥 그걸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렇게 딸 아이를 보내서는 안됐다.

"아, 아빠. 팍팍하게 좀 굴지말고 몇 장만 더 얹어줘요.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은성이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은 안돼. 이번달에 나간 네 핸드폰비만 해도 얼만지 알기나 해? 이번 달 용돈을 제하고라도 네가 타간 돈이 벌써 40만원 돈이 다 되간다. 고등학생이 대체 돈 쓸 일이 어딨다고 또 돈을 달라는 거냐?"
"아 또 그놈의 잔소리. 그만 좀 딱딱거려요. 주기 싫으면 안 주면 그만이지. 잔소리는 왜 해?"
저게 내가 키운 딸 자식 입에서 나올 소리란 말인가.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부모가 돈 주는 기계냐? 아이고, 여기 돈 있습니다. 하고 갖다 바쳐야 되?"
"솔직히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기계? 아빠 말이 맞아. 아빠가 기계는 아니지. 하지만 자식을 키우는 건 부모로서의 의무 아니야? 내가 비행기를 사달랬어? 그깟 푼돈 몇푼 딸한테 주는 게 그렇게 아까워?"
나가 손이 은성의 왼쪽 뺨을 후렸다. 은성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 뺨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순간 나는 자신이 은성을 때렸다는 사실에 놀라 꼼짝할 수 없었다. 은성의 모멸감서린 눈빛을 보며 한 마디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은성에게 미안하다고 내가 심했다고, 뺨을 때린건 잠시 흥분한거였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자꾸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은성에게 말을 건네려는 순간, 은성이 고개를 돌리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한참을 서서 은성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성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은성이 집을 나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해야하나?온갖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나는 느닷없이 울린 전화벨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쩌면 은성의 전화일지도 몰랐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집에 다시 들어갈테니 화를 풀라고 은성이 전화를 한 것일지도 몰랐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가슴에 뭔가 걸린것처럼 숨을 내쉬기조차 힘든 묘한 긴장감. 나는 조심스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거기 중국관이죠? 여기 짜장 3그릇하고 짬뽕 2그릇이요. 여기 주소가...."
잘못걸린 전화였다. 나는 순간 맥이 풀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고, 아쉬움의 한숨이기도 했다.
"여기 중국집 아닙니다."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들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중국집 아니....."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수화기에서 은성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여지껏 들어본 어떤 비명소리보다도 끔찍했다. 이어지는 탁한 목소리.
"네 딸을 살리고싶다면 8억을 준비해서, 너희 딸 학교 앞에 짓다만 5층짜리 건물있지? 공사하다 건물주가 돈먹고 튀는 바람에 철근만 겨우 붙어있는 건물말이야. 거기로 나와. 허튼 짓 하면 여지없어. 3일 후 새벽 2시. 그 시간이 넘으면 네 딸은 여지없어."
전화가 끊겼다. 이런 제길. 이런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내 딸이 납치당하다니.

나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1시 35분. 약속시간까지 25분이 남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차 한 대 없이 거리는 한산했다. 적막함 속에 철골이 다 드러나있는 5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녹슨 철골의 음산한 붉은빛이 옅은 달빛에 비추어 묘한 빛깔을 만들어냈다. 이곳저곳 벗겨진 건물의 표면 또한 밤의 적막함과 어우러져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나는 건물앞에 서서 가방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건물안에 들어서는 것이 망설여졌다. 이 곳에서 내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 당장 들어가서 딸을 찾을수만 있다면 8억 그 이상을 주고서라도 찾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웬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다. 나는 깊은 심호흡을 하고서는 건물입구로 들어섰다. 나는 건물의 입구가 먹이를 찾은 상어의 입처럼 자신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불길했다. 무엇인가가 자신의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틀리기를 바랬다.

건물안에 들어서는 순간, 포켓속에서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텅 빈 건물속에서 메아리치는 핸드폰 소리에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물러설 수는 없다. 내 딸이 있다. 핸드폰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나약한 아버지가 어떻게 딸을 구할 수 있겠는가.
"여, 오셨구만. 우리는 4층에 있을테니 어서 올라오라고."
내가 오는지 5층에서 감시하고 있었구나, 이 잔인한 자식들.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타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딸 목소리를 들려줘. 8억은 준비해왔다."
"목소리만 들려주고 니 딸년 목을 그어버리기전에 개수작 하지말고 돈 들고 올라와. 여기까지 돈 가지고 왔으면 딸 데려가야지, 안 그래?"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점점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는 4층을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아주 서서히.

계단을 따라 4층에 거의 다다르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왔다. 적어도 한 명은 아니구나. 나는 더욱 긴장하며 가방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몸을 움츠리며 소리가 울리지 않게 천천히 계단을 걸어올랐다. 계단 곁으로 옅은 불빛이 보였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마지막 계단을 딛고 4층으로 올라섰다. 폐건물이지만 전선연결은 시켜놨었는지 작은 형광등 하나가 4층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형광등 하나만 가지고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난 내 딸을 납치해간 그들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폐자재 위로 두 명의 사내가 앉아서 날 우롱하듯 나에게 눈을 치켜떴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둘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은성의 학교 교복이었다. 그럼 그 염병할 자식들이 우리 딸 학교 학생이란 말인가? 담배를 태우고 있던 한 명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거기서 스톱, 거기다 가방 내려놔."
나는 가방을 더욱 꼭 가슴속에 묻으며 놈들에게 말했다.
"은성일 먼저 보여줘. 그 전에는 돈 못준다."
그 중 한 녀석이 피식 웃더니, 발을 질질끌며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놈은 한 쪽 걸쇠가 떨어져 나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는 문을 열었다. 그곳에 내 딸 은성이가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린 상태로, 팔과 다리가 결박당한 채. 은성의 긴 생머리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공포에 서린 눈두덩에는 멍자국과 눈물자국이 혼재해 있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끌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칼을 쥐고 있는 것은 녀석들이 아닌가.
"좋아, 내 딸을 먼저 보내줘. 여기에다 돈을 두고 가겠다."
한 놈이 고개를 까닥하자, 다른 한놈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사실 우리는 돈 말고도 원하는 게 하나 더 있거든."
나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아까부터 들어왔던 불길한 느낌의 정체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목숨이었다. 그들은 나를 원했다. 내가 가져온 돈만큼이나, 절실하게. 나는 그들의 살기로 가득찬 눈을 바라보며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던 녀석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빼냈다. 다른 한 녀석도 한 자루 칼을 뽑아 벽에 대고 스윽 한 번 긁어보더니, 은성에게 다가갔다.
"움직이지마, 그럼 네 딸년 얼굴에 흠집 좀 심하게 날테니까."
그 녀석이 은성에게 다가가다 말고 몸을 돌려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왜 교복을 입고 여기에 오겠어? 얼굴 다 보여주고? 경찰에 신고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방법이 없지, 당신 목을 따는 방법 외에는."
이렇게 쉽게 죽을 수는 없었다. 내가 죽으면 그 순간 은성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일 안닌가. 나는 그 어느 순간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지? 은성이 결박을 풀기 위해 발악하듯 몸부림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한 놈이 능숙한 솜씨로 내 어깨를 잡더니 배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나는 가방으로 그 칼을 재빠르게 막은 다음, 오른발로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의외의 기습에 놀랐는지 녀석이 순간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방을 양 손으로 잡아들어 높이 치켠든 후에 녀석의 머리를 강타했다. 녀석이 '헉'하는 비명을 내뱉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은성에게 다가가던 한 놈이 당황했는지 은성에게 달려가 은성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이 개새끼, 한 발짝만 더 와봐. 여지없어."
그 녀석은 정말로 은성을 죽일 지도 몰랐다. 나도 죽이려했는데, 은성이라고 못 죽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우선 쓰러져 있는 녀석의 손에서 칼을 빼내 건물 구석으로 던졌다. 언제 녀석이 일어나 뒤에서 날 찌를 지 알 수 없으니까. 나는 대범하게 굴기로 했다. 조금 더 놈을 궁지로 몰아넣어야 한다. 놈이 당황했을 때, 지금이 기회였다. 지금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나도 은성도 죽고 말 것이다.
"내 딸을 사랑하지만, 내 목숨까지 바칠 수는 없잖아? 네가 지금 그 칼을 버리지 않으면 난 바로 이 건물을 내려가면서 경찰에 신고할거야. 그럼 넌 8억도 못받고 콩밥먹는 신세가 되겠지. 은성이 목에 칼집 낼 자신 있으면 해봐. 콩밥만 더 오래 처먹어야할테니."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녀석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녀석이 은성의 목에 겨누고 있던 칼을 서서히 거두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잘 생각했어. 우리 타협하자. 내 딸을 보내줘. 가방은 여기두고 신고도 하지 않으마. 그러니까......"
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녀석이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악령이 웃는 목소리처럼 탁한 역겨움을 몰고 왔다. 미친 듯이 웃던 녀석이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날 노려봤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군 그래. 돈 가방을 두고 갈테니 딸은 놔달라, 이거군."
녀석이 다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알아? 난 당신 목을 반드시 따야 해. 그게 계약조건이거든."
계약조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계약조건이라니? 자기들이 꾸민 일이 아니란 말인가?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거지? 모든 것이 물음표 투성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물음표의 해답을 찾아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녀석이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오른손에 든 칼날이 더욱 매섭게 빛났다. 녀석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둘은 서로 뒤엉켜 세 바퀴 정도 굴렀다. 나의 위로 그 녀석이 올라탔다. 그 녀석은 미친 듯이 숨을 헐떡거리며 나를 칼로 찌르려했다. 나는 녀석의 손목을 붙잡고 한참을 버텼다. 나가 마지막 힘을 짜내 양발로 녀석의 목을 감았다. 나가 다리를 바닥을 있는힘껏 감아채자 녀석이 마침내 떨어져나갔다. 녀석의 손에 들려있던 칼도 건물바닥으로 떨어져 나가며 경쾌한 금속음이 텅 빈 건물안에 울려퍼졌다. 난 은성쪽을 바라보았다. 은성은 이제 더 이상 몸부림칠 힘도 없는지, 거의 실신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그 녀석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몸을 날리며 그 녀석의 얼굴을 걷어찼다. 녀석이 또 다시 맥없이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그 녀석의 얼굴을 발로 짓밟았다. 녀석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내 발길질을 피했다. 녀석이 내 발길질을 피해 일어나려는 것을 다시 한 번 짓밟으려는 찰나 허벅지에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이 떨어뜨린 칼이었다. 아까 내 가방에 맞아떨어진 녀석이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내 허벅지에 칼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악! 이 개자식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통에 찬 비명소리와 더불어 욕이 티어나왔다. 나는 허벅지를 찌른 녀석의 얼굴을 팔꿈치로 쳐낸 뒤 양손으로 허벅지를 감싸쥔 채 바닥을 굴렀다. 놈들은 이제 정신을 어느정도 차렸는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다시 2:1의 싸움이다. 수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나가 훨씬 불리했다. 두 녀석이 서로 몸을 일으키며 일어나더니,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허벅지에서 너무 많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녀석들이 넷으로, 다섯으로 보였다가 다시 두 놈으로 돌아오곤 했다. 녀석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발로 나를 짓밟기 시작했다. 나는 두 놈의 발길질에 무기력했다. 창이 서서히 닫히는 것처럼 점점 시야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눈이 계속해서 감겼다. 하지만 은성이는? 은성이 생각을 하면 이렇게 죽을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내 허벅지에 박힌 칼자루를 잡았다. 내 몸의 모든 신경세포가 칼자루 끝에 모여서 온 몸으로 전해지기라도 하듯 고통이 극에 달했다. 난 비명을 지르며 허벅지에 박힌 칼을 뽑았다. 칼이 빠지면서 허벅지에서 더욱 피가 심하게 뿜어져 나왔다. 칼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놈들이 순간 놀란 듯 발길질을 멈추었다. 놈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내 손에서 칼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나는 한 놈의 발뒤꿈치를 칼로 긁었다. 정확하게 아킬레스건을 겨냥했다. 놈이 힘없이 내 쪽으로 꼬꾸라졌다. 나는 얼굴을 돌린 채 쓰러지는 놈을 향해 칼을 들이댔다. 칼은 정확하게 녀석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며 내 얼굴을 적셨다. 나는 마치 피워 샤워를 한것처럼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다른 한 놈이 내 손목을 발로 걷어찼다. 칼이 손에서 떨어져나갔다. 제길. 이러면 승산이 반은 줄어든 셈이군. 나는 쓰러진 상태에서 남은 한놈의 오른발을 붙잡았다. 녀석이 왼발로 계속해서 내 허벅지를 걷어차고 밟았다. 그때마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이 온 몸에 느껴졌다. 난 있는 힘을 다해 놈의 종아리를 이로 물었다.
"으악, 이 씹할새끼 당장 놔, 이거 못 놔?"
녀석이 비명을 질렀지만, 난 놓아줄 수 없었다. 놓아주는 순간 내가 죽을 지도 모를 일이다. 놈이 내 허벅지를 연이어 걷어차며 오른발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끝까지 종아리를 문 채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녀석이 쓰러졌다. 놈이 양팔로 기어, 어디론가 손을 뻗었다. 칼이 떨어져 있었다. 놈의 손에 칼이 들어가면 그걸로 끝이다. 나는 더욱 강하게 놈의 종아리를 물었다. 녀석의 비명이 더욱 커졌다. 그 녀석이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녀석이 발버둥을 치더니 마침내 나에게서 벗어났다. 녀석의 손에 칼이 들어가고 말았다. 이제 죽는거구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나의 최후를 준비했다. 하지만 내 귓가로 녀석의 신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녀석의 종아리가 보기 흉하게 찢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입 속에 뭔가 가득히 들어차 있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오른손에 그것을 뱉어보았다. 녀석의 종아리가 한 점 가득 찢겨져 나와있었다. 이건 마지막 찬스다. 내가 놈을 먼저 죽여야 해. 내가 다가가자 녀석이 칼을 나에게 휘둘렀다. 나는 오른손으로 그의 팔목을 가볍게 막은 후에 왼팔로 녀석의 손목을 쳐 칼을 떨어뜨렸다. 녀석은 종아리가 뜯겨나가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맥없이 칼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양손을 찢겨진 녀석의 종아리속에 집어넣었다. 녀석이 인간의 목소리라고 느낄 수 없을만큼 고음의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왜 내 딸을 납치했어? 그리고 돈만 받아가면
감상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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