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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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밤에 찾아온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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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데커'는 고개 돌리지 않았다.
이 밤중에, 눈으로 사방을 둘러싸여 고립되다시피한 이 한적한 집
을 찾아올 손님이 없기 때문이다. 근처에 인가가 몇개 있기는
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내성적이거나 폐쇄적인 성격으로
이 마을에 이사온 지 2년 밖에 안된 데커 부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시간을 더 필요로 하는 듯 했다.
또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데커는 움직였다.
현관문을 열고 사람이 보이자마자 데커는 마치 기계처럼 자동적
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누구요?

문 앞에 서 있는 자는 말없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을 때 데커는 자신에게 강심장을
물려준 부모에게 고마워 했다. 오른쪽 얼굴을 완전히 머리로 가린
이 의문의 방문자가 가진 위험해보이지는 않으면서도 섬뜩한
분위기는 데커가 호기좋게 다음 말을 꺼낼 여유를 잃게 했다.
데커가 발을 뒤로 한발짝 물리면서 입을 열었을 때는 1분 정도
흘러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제야 처음으로 방문자의 목소리를 들은 데커는 독특한 악센트에
담긴 차분함에 기분이 약간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되물었다.

-네?
-피를 좀..나눠주실 수 있습니까?
-..네?

데커는 다시 물었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억양
으로 추측 해볼 때- 어디 다른 지방의 방언이나 외국인의 잘못된
어휘 선택일 수도 있다. 배낭 여행을 많이 다녔던 데커에게 이
정도는 크게 황당한 질문은 아니었다.
문 앞에 선 자의, 머뭇거리는 하얀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유난히
말문 열기 힘들어 하던 방문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루카'라고 합니다.
-..루카씨.
  무슨 일이죠?
-이런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들리
  겠지만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단지..
  뱀파이어입니다.
  이 곳에 온지 얼마 안되었는데
  갈증은 심하고 피를 구하기는
  쉽지 않군요.
  다시 한번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그의 말이 데커의 귓바퀴를 지나 대뇌로 전달될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가까스로 말뜻을 이해한 데커는 친절하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자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급하게 문을 닫았다.

-세상에 별 미친 놈도..

데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문을 잠그고 체인을 걸었다. 그리고
문 옆에 세워둔 야구 배트를 다시 짚어 들었다.
야구 방망이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묻어서 방망이를 들자
점성으로 이어진 붉은 거미줄이 생겨났다. 데커는 찡그리면서
소파 뒤로 걸어갔다.
'애니'는 쓰러져 있었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으리라는 것은
배트를 세번째 휘둘렀을 때 애니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순간 알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가 마치 어릴 때 먹던 맛없는
쿠키처럼 변해버린 애니가 사지를 넓게 펼치고 누워 있었다.
우발적 사고 였다. 4년 전에 있었던, 캐캐묵은 일이 발단이었다.
그 일을 잊기 위해 여기로 떠나온 것 아닌가. 데커의 넥타이를
매주던 그 비서는 이제 이곳에 없다. 하지만 애니는 여전히 -마치
취미생활처럼- 과거를 들먹이며 욕을 했다.
부부 간의 예의가 있다면 그래서는 안된다. 데커는 그렇게 생각
해왔다. 계속 그러다보면 언젠가 크게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늘이었다. 양탄자를 축축히 적시는 붉은 피를 보며
데커는 자신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여기저기 피가 묻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양탄자 옆 바닥에도,
벽난로 모서리에도, 소파 뒷면에도..
이제 뒷처리를 어떻게 할 지가 고민이었다. 다른 것은 큰 문제가
안된다. 아내의 시체를 잘 포장하여 어디 산 속에 유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설 속에 산까지 사체를 운반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마을
에서 데커와 유일하게 친한 사람이 보안관이었다. 아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해 분명 의심을 받을 것이다.
데커는 한숨쉬며 야구방망이를 내려보았다. 피가 끈적한 배트를
보고 있던 데커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황급히 문으로 향했다.

*

무릎까지 눈에 잠긴다. 데커는 눈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에
초조한 듯 입에서 차가운 연기를 뿜었다.
아직 멀리 못갔을 것이다. 데커는 방향을 돌려 왼쪽을 보았다.
생각이 맞았다. 눈 속을 힘없이 걸어가는 자를 보며 데커의 입가
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봐요!

데커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 듯 그는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데커는 찬 입김을 한번 내쉬고 더 목청을 높여 불렀다.

-루카!

그가 돌아보았다. 멀리서 본 루카의 얼굴색은 달빛 아래 하얀 눈에
덮인 들판과 차이가 없어보인다.
데커는 손을 힘껏 저어 그에게 돌아오라는 표시를 했다. 방문자는
떠날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다섯걸음 쯤 간격이 남았을 때, 달빛 아래에서 더욱 섬뜩해보이는
자칭 뱀파이어에게 데커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굳이 내 피가 아니어도 됩니까?

데커의 질문에 루카는 응시로 대답했다.

-집에 지금..마침 처리해야 할 피가
  있는데..적격이실 것 같군요.

데커가 말하자 루카의 창백한 입술에 얇은 미소가 그려졌다.
찬 입김을 한번 더 뿜은 데커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자신의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낯선 자를 문으로 인도하며 데커는 어금니를 굳게 물었다.

*

현관에 들어선, 자칭 뱀파이어의 체격 조건을 어림으로 본 데커
는 자신의 계획에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계획이 성공해야 된다. 그래야만 보안관이 찾아왔을 때 꺼리낌
없이 슬픔에 싸여 있는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신문
은 데커를 이렇게 소개할 것이다. '아내의 피를 마시려 한 미치
광이 살인범을 살해한 남자의 가슴아픈 사연'. 같은 살인을 하더
라도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선함을 대비해줄 악역이 필요했다.
데커는 소파 뒤에 엎드려 있는 루카를 흘낏 보았다. 마치 이 때를
위해 예정되었다는 듯이 나타난 방문자에게 데커는 고마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데커는 자칭 뱀파이어가 애니의 시신을 어떻게
훼손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없었다. 다만 그 자신이 배트를 어느
정도의 힘으로 휘둘러야 되는가에 집중하며 소파 뒤로 다가갔다.
데커는 잠시 멈추어 있었다. 뱀파이어라는 것이 단순한 광인의
말은 아니었던 듯 하다. 코흘리개 시절 이후 잊고 있던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지금 나이에 되찾는 것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애니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탐식자를
보며 데커는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은 물러날 상황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강타자였던 데커가 상황을 다시 판단하고 수긍하는
것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데커가 휘두른 배트를 오른손
으로 가볍게 잡아낸 뱀파이어는 식사를 계속하고 있다. 데커는
풀스윙의 힘이 차단당한 배트를 다시 되물리기 위해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손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배트
에 데커의 당혹감은 점점 깊어졌다. 새하얘지는 머릿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양손과 거기 쥐어져 있는 배트 뿐이었고,
양발로 바닥을 짓누르듯 디디고 이를 물며 처량할 정도로 일그
러진 표정으로 배트를 당기고 있는 자신은 사라졌다.
그 모습 그대로 데커는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루카가 애니의 목에서 입술을 떼어내며 상체를 들 때에야 데커의
몸은 움직일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뱀파이어는 자신의 옷깃에
혈흔을 안묻혔다는 것을 확인하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를 닦았다. 꼼꼼하게 다 닦아낸 뒤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겁에 질린 건장한 남자를 보는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니다. 물론
이 집 주인은 특이한 면이 있었다. 접대와 위해를 동시에 가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다고 방금의 행동에 대해 깊게 알고 싶지
도 않았다. 개인 사정이란 것은 복잡하게 마련이고 막상 알고나면
생각보다 흥미롭지도 않다.
갈증을 채운 루카는 기분 좋게 데커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배트를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불편하게 들고
있는 주인에게 루카는 인사했다.
데커는 인사하는 루카의 입 모양은 보고 있었지만 소리는 듣지
못했다. 분명 루카의 인사에 대답까지 했지만 그의 기억에 남지
않는, 오랜 학습에 의한 반응일 뿐이었다. 다만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아래 슬쩍 보이는 흉칙한 상처만이 눈동자에 남았다.
문을 나서서 모든 것이 하얗게 물든 벌판을 다시금 걸어가기 시작
한 뱀파이어를 한참 동안 배웅하는 포즈로 보고 있던 데커는 문을
닫고 쇼파에 다가가 힘없이 기대었다.
손에서 놓인 야구 방망이는 소리없이 양탄자에 떨어졌다.

실웃음은 이를 드러낸 웃음이 되었고 곧 입을 벌린 웃음이 되고
소리낸 웃음이 된다. 타액까지 흘리며 미친 듯이 쏟아낸 웃음은
데커 이외에는 살아있는 것이 없는 집안 전체에 쓸쓸히 퍼졌다.
이틀이 지난 뒤 데커는 보안관에게 찾아가서 자수했다.
모든 정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애니를 살해한 과정과 사체를
훼손하게 된 과정, 특히 목에 상처를 낸 연유까지.
그의 현실적인 진술 내용에서 루카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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