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일기장 A

2024.01.30 22:5001.30

-20XX32일 목요일

우선, 이 글은 일기지만 허구가 섞였다는 걸 밝힌다. 나는 정신질환자이기에 모든 글이 진실일 리 없다. 나는 분명 예술고등학교의 미술학과에 입학한 터. 담임선생님이자 미술 교사는 반 학생들에게 일기를 쓰라고 했다. 선생님은 1학기에 80매 이상만 쓰면 된다고 했지만, 일단은 자주 쓰려고 노력하겠다. 어차피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우선 이 공책을 어떻게 구했는지부터 말하겠다. 고등학생용 일기장 같은 건 팔지 않았다. 다이소에서 꽤 두꺼운 2,000원짜리 공책을 발견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이소 공책은 참 편리하다. 싸고 두껍고. 무언가를 찍찍 긋는데 기분이 좋아진다. 다행히 학교 근처에 다이소가 있었는데. 앞으로 학용품이 필요하면 그곳에서 살 예정이다. 다이소가 보이는 학교와는 별개로 입학식 이후 첫인상은 영 좋지 않았다. 예고라고 해서 공부를 덜 해도 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지겹고 짜증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게. 입학식은 2층에 있는 다리 너머로 가는 강당에서 열렸다. 1학년 교실은 모조리 4층에 있었다. 2학년 교실은 3, 3학년 교실은 2, 이런 식이었는데, 아마 고학년일수록 올라가고 내려가는 시간을 아끼라는 배려 아닐까. 나는 하 씨라는 이유로 한예지라는 여자애랑 짝꿍이 되었는데,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이 마비되어서 휠체어를 탔다. 입학식이 끝나고 그녀는 휠체어를 밀어주겠냐고 했다. 밀어주었다.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나는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그녀는 같이 타고 올라가자고 했다. 엘리베이터는 장애인과 부상자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가끔 연세가 있는 교직원이나 여자 선생님이 타시긴 했지만, 누군가가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예술고등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을 때, 내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긋났다는 표현이 잘못되었다던가 망가졌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밝힌다. 무언가, 남들이 앞으로 갈 때, 옆으로 가게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요새는 일반계 고등학교로 가도 미대에 가는 사람 있지 않나. 이건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미술반은 정원 서른 명 가운데 스물다섯 명이 여학생이었다. 남학생은 다섯뿐이었다. 내 앞자리는 최요나라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녀는 조현병 환자였다. 동시에 지독한 미인이었다. 내가 그녀를 미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순수한 호감이나 성적인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는 걸 밝혀두고 싶다. 그녀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묶었고 목에는 초커가 달렸으며 짙고 선명한 속눈썹을 가지고 있다. 그 속눈썹이 원래 있던 건지, 인공적으로 붙인 건지 궁금했다. 휠체어 사용자들은 누군가가 휠체어를 만지는 걸 싫어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지는 내가 휠체어를 밀어주는 게 좋다고 했다. 여자 화장실은 내가 따라가기 무엇해서 다른 여자애가 같이 갔다. 나는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예지는 휠체어를 몰며 내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말했다. 자기는 소변을 빼는 관이 따로 있다고. 안 물어봤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기는 임신과 월경, 성생활에도 큰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나는 내가 환청을 듣는 건가 고민했고 혹시 요나가 말하는 건가, 의심했다. 예지가 한 말이 맞았다. 나는 더러운 이야기는 자제하자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이가 선생님이라는 점이 아쉽다. 선생님에게 못 하는 이야기가 많다. 하물며 성적인 이야기라던가, 폭력적인 이야기라던가, 학생의 신분에 맞지 않는 이야기라던가, 자해나 자살과 관련된 이야기.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와도 선생님은 눈감아주길 바란다. 담임선생님은 보건 선생님을 통해 전해 들었겠지만, 나는 조울증을 앓고 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의사가 조울증이라고 했다. 우울증일 가능성도 있지만. 솔직히 인정하기 싫다. 선생님에게 하는 말이라서 존댓말로 이 일기를 작성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역시 일기는 문어체로 작성하는 게 맞다 생각한다. 선생님은 들었을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가정 조사를 하는가. 우리 부모님은 설렁탕집을 하나 운영하는데 매일 9시에 나가서 9시에 퇴근하는 기이한 구조다. 출퇴근하고 가게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8시에 나가서 10시에 돌아온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머니는 항상 밥을 고봉으로 퍼주었다. 특히 아침. 아침밥은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태도가 있으셨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는 항상 밥과 국물이 쌓여있다. 어머니 아버지가 식당을 하시니까 당연하다. 선생님은 우리의 심정을 알까. 할 게 없으니, 집에서 책을 읽는 순간이 늘었다. 무슨 책인지 안 써놓으면 선생님이 물을 테니까 써놓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라는 책이다. 선생님도 대학을 나오셨을 테니까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보셨을 것이다. 무언가 책을 읽으면 다른 사람과 다른 세상이 펼쳐진 느낌이 든다. 책 속에 다른 세상이 있는 느낌이 든다. 나는 원시가 없지만 책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 미세한 종이 결이 느껴진다. 그렇게 책을 읽고 감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전화를 받아 목소리를 들어보니 요나였다. 내 연락처를 어디서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입학식 때 나누어준 연락망을 확인한 게 확실했다. 무슨 일로 전화했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깐 보자고 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와 내가 초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와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복도에서 마주친 상대라는 걸 알았다. 나는 조울증인가 우울증인가 진단을 받고 꾸준히 약을 타러 의원에 갔었다. 그때 마주친 여자가 요나였다. 나는 요나의 부탁을 거절해도 되었지만, 나가기로 했다. 그녀와 나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8시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친구랑 잠깐 놀다가 오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그녀와 내가 만난 곳은 집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공원이었다. 말이 좋아서 공원이지 그냥 넓은 공간에 벽돌 같은 보도블록을 깔아놓은 것에 가까웠다. 공원 가운데 분수대가 하나 있었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물이 있지는 않았다. 근처에 사람들이 물놀이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놓았다. 그곳에 요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가죽으로 된 브래지어와 반투명한 망사옷을 입고 왔다. 그 선정적인 차림새 때문에 그녀가 다시 생각났다. 요나는 학교에서는 금지하는 귀걸이까지 차고 왔다. 그녀는 병원에서 볼 때부터 내게 말을 걸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병원이 아니라 의원이라고 했다. 그곳은 개인이 소규모로 운영하니까 의원이라고 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 요나는 별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했다.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10시가 넘으면 오락실이나 피시방을 들어가지 못하니까 12시까지 운영하는 카페에 가자고 했다. 그 카페는 노란색 간판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2,000원밖에 하지 않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나는 과거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얻은 용돈으로 그녀에게 커피를 사주었다. 남녀가 같이 커피숍에 가면 첫날은 남자가 사야 한다고 항상 어머니가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카페인이 잔뜩 들어있는 음료수를 택했다. 원래 요나는 내 음료를 반반씩 나누어 마시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카페에서는 1인당 음료 하나 이상이 원칙이라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그 음료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는가. 정신과 치료 힘들지 않냐. 그런 이야기였다. 나와 그녀는 뜻이 맞았다. 아빌리파이는 너무 힘들어. 아빌리파이를 먹으면 종일 졸린다. 그것 때문에 중학교 내내 선생님께 지적당했다. 아빌리파이는 조현병이나 조울증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약을 의미한다. 한 번만 먹어도 그날의 반나절은 쿨쿨 자게 된다. 그녀는 내 손을 붙잡으며 자주 만나서 놀자고 했다. 평소에도 말을 걸고 싶었지만, 소심해서 그러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커피를 빨고 또 빨았다. 그러고는 결심하고 말했다. 그 눈, 속눈썹 그거 붙인 거냐고. 그녀는 깔깔 웃으며 답했다. 붙인 건 아니지만 따로 마스카라로 화장한 거라고 했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카페를 나오고, 그녀는 내 팔뚝을 안은 채로 공원을 걸었다. 누가 보면 연인 사이로 보일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남녀가 붙어 다니는 걸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여기가 이슬람 국가도 아니고. 공항에서 키스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국가인데. 날이 어둡다는 이유로, 나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줘야 했다. 그녀는 한 빌라에 살고 있었다. 공동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요나가 현관문의 전자자물쇠 비밀번호를 누르자 곧 어떤 여자가 나왔다. 마르고 요나와 이목구비가 닮았다. 요나의 어머니로 보였다. 그녀는 내게 요나의 친구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요나를 데리고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나에게 요나를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했다. 용돈으로 5,000원을 주었다.

-20XX33일 금요일

조현병은 지능이나 기억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는 조발성 치매라고도 불렸지만, 현재는 다른 질병이라는 게 밝혀졌다. 따라서 요나가 완전 유치원생 수준의 행동을 보이는 건 순전히 그녀의 천성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니 믿어주길 바란다. 학교 건물의 1층에는 행정실, 직원 휴게실, 중앙 교무실 등이 모여 있고 가운데에 있는 공간에는 주황색, 초록색의 소파만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그곳에 요나가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멍을 때렸다. 조회 시작 전, 나는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캔을 사서 들고 갔다. 하나는 예지에게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나를 마주쳤으니, 그녀에게 주고 하나 따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캔을 건네며 여기서 뭘 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눈을 부라렸다. 크지만 치켜세워진 눈매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내 가슴 힐끗힐끗 쳐다보는 거 알아, 변태 새끼야. 나는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은 F컵은 되어 보였다. 가슴이 커지는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브래지어는 해외직구로 산 거겠지. 그 가죽으로 된 브래지어. 생각을 곰곰이 하는 중이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뽀뽀를 갈기었다. 나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얼굴 양쪽을 붙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1층에는 중앙 교무실이 있어서 우리의 키스는 금방 선생님의 눈에 들어왔다. 하필 재수 없게 학생주임 선생님께. 우리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교내 성 풍속 위반은 정학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고 그 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으라고 했다. 요나도 같이 적었지만, 그냥 같은 말을 문체만 바꾸어서 반복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솔직하게 일방적으로 뽀뽀를 당한 것이라고 적었다. 선생님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선생님은 공식적인 처분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스무 대를 맞을 것인지 요나랑 균등하게 열 대씩 맞을 것인지, 아니면 모든 벌을 요나에게 지게 할 것인지 정하라고 했다. 요나는 체벌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교무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날 당구봉으로 엉덩이를 스무 대나 맞았다. 억울했다. 분명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체벌을 당하다니. 그날 나는 조회 전 때까지 엎드려뻗쳤다. 요나는 내 옆에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었다. 나보다 가벼운 얼차려를 받는다는 게 억울했다. 교무실을 지나가는 학생마다 우리를 보고 비웃었다. 물론 진심으로 비웃은 건 아니겠지만. 아침 시간이 끝나갈 무렵, 학생주임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 일어서라고 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라고 했다. 나는 요나랑 함께 4층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 울렸다. 조회는 이미 끝나 있었다. 책상 밑에서 국어 교과서를 꺼냈다. 선생님이 오기 전까지, 예지는 어딜 갔다가 이제 왔냐고 물었다. 평소에 딴 곳으로 새지 않고 교실에 주로 있으니까, 이런 질문을 했다. 나는 정직하게 벌을 받고 왔다고 했다. 요나 저 정신병자가 갑자기 키스를 퍼부어서 음란행위로 오해받았다고 말했다. 예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성추행으로 신고하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성적 수치심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니까, 입술을 둥글게 오므리고 숨을 내쉬었다. 국어 선생님이 곧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운문의 뜻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모든 시는 화자가 있다고 했다. 온점 하나라도 찍혀 있다면 화자가 있다고 했다. 그 화자는 시인이 하기도 하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요나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까,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수업 자체는 무척이나 재미가 없었다. 재미가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안 그런가. 1, 2, 3,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침을 많이 먹었으니 당연하다. 아침마다 고봉밥을 먹고 오니 지겨울 만하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예지는 누군가가 급식 먹기를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복도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들은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했지만, 애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휠체어를 끌고 교실 바로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곧 엘리베이터는 4층에 도착했다. 나는 예지의 휠체어를 엘리베이터 안에 데려다 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휠체어를 탄 사람과 둘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리라는 생각이 든다. 예지는 내 손목 소매를 붙잡고 같이 내려가자고 고집을 피웠다.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 못했고 같이 내려갔다. 다리가 불편한 친구의 도우미니까, 선생님들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배가 고픈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줄이 굉장히 길었다. 우리는 그 학생들 사이에서 기다렸다. 예지에게 미리 자리에 기다리고 있을래 물었다.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식판 둘을 가져와서 음식을 떴고 예지 앞에 두었다. 언제 온 건지 요나가 옆에 있었다. 요나는 식사 예절을 전혀 지키지 못했다. 입을 벌린 채로 음식물을 씹었고 씹는 소리도 났으며 무엇보다 밥 담는 곳과 국 담는 곳이 반대였다. 조현병 환자니까 그런다. 나는 스스로 그런 암시를 걸었다.

5교시는 미술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림을 그렸다. 이 학교에 들어왔다는 건 실기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뜻인데. 요나가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현병 환자라서 장애인 전형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나는 받지 않았지만, 정신장애도 1급부터 3급까지 장애등급이 나오는 걸로 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요나에게 장애인등록증이 있으면 보여달라고 했다. 요나는 나를 째려보았다. 안 보여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지갑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녀의 지갑은 하트가 촘촘히 박혀 있는 반지갑이었다. ‘복지 카드라고 적혀 있는 곳에 정신장애 3이라고 짤막하게 적혀 있다. 나는 장애인등록증을 돌려주었다. 미술 시간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미술실로 갔다. 곧 새하얀 캔버스와 이젤이 보였다. 평소에도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서 캔버스를 실제로 보는 건 두 번째다. 고등학교 입시 실기 시험 때 한 번 보았다. 그날은 첫날이니까 간단한 정물화를 그릴 거라고 했다. 선생님은 사과 하나와 꽃병 하나를 가져왔다. 우리는 둥글게 앉아서 그것을 그렸다. 사과와 꽃병의 공통점은 어느 각도로 보아도 그 모습이 온전하다는 것이다. 입시 미술은 창의성이 중요하지 않다. 심사위원이 좋아하는 그림이 정해져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기초 수업이기 때문에 굳이 창의성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그냥 선생님들이 학생의 실력을 보는 것이다. 입학식 다음 날 첫 수업 아닌가. 팔레트에 빨간색 물감을 푸는 중이었다. 예지가 말했다. 너 팔레트가 꽤 특이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쓰는 접이식 철제 팔레트를 쓰지 않는다. 나무로 된 도마처럼 생긴 팔레트를 쓴다. 예지가 말했다. 보통 미술학도는 철제를 쓰지 않나. 내 마음이야, 그리고 이것만 쓰는 거 아니야, 헤지면 새로 사, 안 비싸거든. 나무 팔레트는 비싼 것도 5,000원밖에 하지 않는다. 내가 나무 팔레트를 쓰는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때 일이었다. 학교에서 준비물로 팔레트를 가져오라고 해서 나는 급하게 팔레트를 사러 문구점으로 갔다. 그런데, 나처럼 팔레트를 사려고 한 학생들이 많았고 학교 앞에 있는 팔레트는 다 떨어지고 없었다. 나는 문구점 주인에게 남은 팔레트가 정말 하나도 없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문구점 구석에 있는 마지막으로 남은 나무 팔레트를 꺼냈다. 나는 요나가 어떤 그림을 그릴지 내심 궁금해졌다. 조현병 환자의 그림이라고 하면 보통 궁금해진다. 요나는 꽃병과 사과가 아닌 사과가 올려진 꽃병을 그렸다. 그것도 무려 여섯이나. 마치 아파트처럼 여섯 개로 층을 나눠서 차곡차곡 그렸다. 그림 자체는 잘 그렸지만,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르네 마그리트나 마르셀 뒤샹이나 할 법한 개념미술인가. 아무튼 선생님도 그 그림에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그녀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했다. 그림을 하나 더 그려야겠다고 했다. 그녀는 미술실 구석에 쌓여있는 도화지 한 장을 꺼냈다. 다른 아이들은 이젤에 대고 그림을 그렸는데, 그녀는 이미 선생님이 그리라고 한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새 그림을 그렸다. 마침 선생님이 그림을 다 그리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도 된다고 하였다. 요나의 그림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그림 실력이 형편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림 자체는 잘 그렸다. 무얼까. 이것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하나. 확실히 조현병 환자가 그린 그림이 맞았다. 거대한 덩어리에 눈이 열댓 개 정도 달려 있고 그곳에 다리가 해파리처럼 달려 있다. 요나는 그 그림을 이젤 위에 올려놓았다. 그 그림을 본 애들은 요나가 정신이 이상한 거 같다고 욕을 한마디씩 덧붙였다. 요나는 아이들의 험담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선생님은 교실에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토를 달지 않았다. 화가 났다. 온몸에 있는 피와 근육과 신경이 위를 향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람을 쐬어야 한다는 이유로 요나를 끌고 갔다. 시계를 보았다. 50분이었다. 50분부터 정각은 쉬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내 행동을 방해하지 못했다.

-20XX34일 토요일

토요일은 무언가 생각하기 좋은 날이다. 토요일은 토요일만의 날씨가 있다. 뭔가 선선하면서도 따뜻하고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날씨. 왜 하필 토요일만 이런 날씨인 걸까. 기상학적인 무언가가 있나. 내 생각엔 토요일엔 항상 늦잠을 자니까 낮 날씨가 그렇게 느껴지는 거다. 이 글을 쓰면서도 생각하는 게 있다. 선생님이나 친구가 주말에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보통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책을 읽다가 알래스카의 풍경이 나왔다. 미국 화가 밥 로스가 생각났다. 나는 유화를 그리기로 했다. 학교 근처 다이소에서 캔버스를 팔길래 좀 사 왔다. B6 크기다. 이젤에 그걸 올려놓고 그림을 그렸다. 무엇을 그릴지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모작을 그리기로 했다. 토머스 킨케이드의 그림을 그렸다. 구글에 토머스 킨케이드라고 검색하고 그냥 눈에 띄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호박을 팔고 있는 축제장이었다. 토머스 킨케이드를 다뤘던 시사 교양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자기가 그린 그림을 팔려고 미술상을 찾아갔으나 그림이 깊이가 없고 싸구려 같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대중들이 보기에는 멋지고 아름답지만, 전문가가 보기에는 촌스럽고 빠르게, 어렵지 않게 그리며, 예술적인 가치가 없는 그림이었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아무튼 그 토머스 킨케이드는 크리스마스카드에 자기 그림을 싣는 방식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화가 가운데 상업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라는 수식도 붙었다. 저작권료라도 받았나. 그림을 완성할 때쯤은 12시였다. 2시에 예지랑 대형상가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곳은 영화관도 딸려 있었지만, 예지는 영화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넷플릭스나 라프텔을 보는 걸 더 좋아한다고. 물론 그녀가 휠체어를 탔으니 맨 앞자리만 예약할 수 있었다. 맨 앞자리는 자막 보기도 불편하고 눈도 아프며 고개를 들고 봐야 해서 목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나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금속으로 만든 손목시계를 찬 채로 밖으로 나갔다. 버스를 타고 가면 그럭저럭 시간이 맞았다. 대형상가 앞에는 벤치가 참 많았다. 아마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그녀는 장애인 택시를 타고 왔다. 어떤 사람이 나와서 휠체어를 내려놓고 예지가 그것에 타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많이 기다렸지, 늦어서 미안해. 아니야,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휠체어를 밀어줘야 하나 밀어주지 않을까 고민했다. 예지가 먼저 휠체어를 밀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에게 휠체어를 밀어주냐고 물었다. 그녀는 평소에 남이 휠체어를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니까 괜찮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친구로부터 받은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전해 받았다. 나는 휠체어를 밀고 대형상가 앞에 붙어있는 스타벅스 안으로 들어갔다. 휠체어를 밀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서 유리문 양쪽을 모두 열고 휠체어를 밀어 넣은 뒤, 닫았다. 한 둥그런 탁자에 휠체어를 두고 기프티콘을 직원에게 주었다. 곧 아메리카노 두 잔과 작은 초콜릿케이크 하나를 받았다. 나는 그것을 예지 앞에 놓았다. 예지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고 했다. 오줌이 마려우니까. 오줌이 마려우면 카테터로 빼야 하는데 그게 여간 귀찮다고 했다. 나는 아프지 않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뭐 먹는데 오줌 이야기하지 말자, 더럽게. 예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내가 더러운 이야기 했네. 나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모조리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이 일기도 내 메모장을 토대로 적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메모장도 여기다 똑같이 옮겨적고 싶지만, 워낙 악필이고 내 마음대로 써놓은 거라 선생님도 알아먹지 못할 것이다. 예지는 내 글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이야기할 때마다 글을 적는 사람은 뭔가 매력적이다. 그녀가 물었다. 왜 대화 때 글을 적는 거냐고. 나는 친구가 적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적는 것이다. 그녀는 내 말에 동의했다. 케이크를 먹고 나니 할 만한 게 따로 없었다. 학기 초에 갑자기 만난 사람이랑 무언가를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애초에 우리가 왜 만나기로 했었지. 정신질환은 이게 참 불편하다.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하려고 하면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 나는 케이크를 양보했지만, 예지는 초콜릿케이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3분의 1밖에 먹지 못했다. 나머지는 내가 먹었다. 그녀는 장애인 택시를 타고 돌아갈 거라고 했다. 나는 이제 가보아도 좋다고 했다. 가보려고 했는데, 발걸음이 트이지 않았다. 열 걸음 가고 돌아보고 열 걸음 가고 돌아보고를 반복했다. 남녀가 함께 있으면 정이 드는 게 당연하겠지.

집에 돌아와 보니 그림은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나는 분명 토머스 킨케이드의 그림을 따라 그렸는데 피에르 르누아르의 그림 같기도 했다. 따뜻한 색감이니 그럴지도. 저녁에는 비가 왔다. 그냥 비가 아니라 장대비였다. 하늘에서 대나무 토막이 떨어지는 듯싶었다. 나는 그 비를 보면서 잠깐이나마 공상에 잠겼다. 부모님이 차라리 설렁탕집이 아니라 전집을 했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사람들이 비가 와도 음식을 먹으러 왔겠지. 집에서는 할 일이 없다.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것뿐. 가끔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보기도 한다. 텔레비전에는 별로 재미있는 내용은 없다. 어쩌다가 선정적인 내용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나오긴 한다. 이런 애니메이션을 보면 죄책감이 들지만 괜찮다. 공식적으로는 15세 관람가이기 때문에 내가 봐도 상관은 없다. 그 애니메이션은 어머니의 재혼으로 새 여동생이 생긴 어떤 여고생의 이야기였다. 분명 15세 관람가라고 했지만, 재혼으로 맺어진 자매의 성적인 사랑이라니. 나는 그 애니메이션에 빠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성적으로 보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매혹적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는 전자자물쇠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채널을 돌리고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나는 거실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안방에서 같이 주무셨기에 내가 거실에서 자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일찍 주무신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일어났다. 지금 일기를 쓰다가 자정이 넘어가면 이것은 토요일의 일기인가, 일요일의 일기인가. 아마 토요일의 이야기를 담았으니, 토요일의 일기가 아닐까. 아무튼 나는 대충 체육복만 챙겨 입어서 밖으로 나갔다. 자정이나 새벽에 밖으로 나가서 뜀박질하는 건 매력적이다. 마음이 시원하고 뭔가 내 속 무언가가 변한 느낌이 든다. 나는 공원을 돌고 돌다가 내 눈앞에 누군가 있는 걸 확인했다. 요나가 있었다. 순간 내가 환각을 보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요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내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요나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마구 비볐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요나와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긴 기다림 끝에 요나가 말을 시작했다. 집 근처에서 담배를 태우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종아리를 스무 대 넘게 맞았다고 했다. 그녀는 골반을 약간 비틀어서 종아리를 보여주었다. 정말 피멍이 있었다. 아프지 않냐고 물었다. 아프다고 했다. 그녀는 족히 무릎 위 20cm는 되어 보이는 가죽 치마에 와이셔츠, 점퍼를 입었고 그 안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는 담배를 싫어하지만, 담배 이름은 안다. 카멜이다. 카멜 담배는 예전에 본 기억이 난다. 건강해지려면 카멜 담배를 피우세요. 담배의 해악성이 알려지기 전에 했던 광고였다. 그 광고 생각이 눈앞에 아롱거렸다. 그녀의 담배 연기는 공기 중에 흩날렸다. 담배가 빨간색으로 타들었다. 그녀는 내게 담배를 권했다. 거절했다. 나는 담배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쉽다고 했다. 담배 친구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반 애들 가운데 담배를 피우는 애들이 더 있냐고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대여섯 명쯤 있는 걸로 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딱히 대꾸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만약 이 일기를 선생님이 본다면 선생님이 본다면 요나의 흡연을 이유로 꾸짖을 테지만, 어차피 선생님도 요나의 흡연을 눈치챈 모양이니까 일단 적겠다. 반쯤 포기한 상태겠지, 선생님도. 요새 담배 안 피우는 학교가 어디 있냐. 다들 피우지. 집으로 돌아간 나는 요나가 피우던 담배의 포장지를 기억해 냈다. 그 담배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니코틴 함량이 0.5mg이라고 나왔다. 한국에서 파는 담배 가운데 가장 독한 담배인 말보로랑 얼추 비슷했다. 과거에는 담배를 태우는 게 멋있어 보였다. 철이 없었을 때니까 그렇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나는 담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담배를 혐오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XX36일 월요일

일요일에는 일기를 쓰지 못했다. 어제는 자정 넘어서 일기를 마저 썼으니 아마 토요일과 일요일 일기를 뭉뚱그려 한 번에 썼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일요일에 일기를 쓰지 않은 이유가 있다. 부모님의 설렁탕집 일을 도와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일요일마다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고 15만 원 정도의 돈을 받는다. 시급으로 치면 8만 원 정도가 맞지만, 용돈으로 쳐서 15만 원이다. 내가 만약 돈을 받으면 부모님은 아껴 써라.” 이런 식으로 말씀하곤 한다. 당연하다. 아들이 돈을 막 쓰는 걸 원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예지는 미리 와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물었더니 장애인 택시는 잘 안 잡혀서 잡힐 때 빨리 타야 한다고 답했다. 시계를 보았다. 840분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지금은 8시였고 학교에 도착한 사람은 나와 예지뿐이었다. 나는 책가방에서 소설책 한 권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예지는 당연히 무엇을 읽냐고 물었다. 나는 소설책이라고 답했다. 그건 아는데, 무슨 소설을 읽냐고. 나는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답했다. 예지는 자기도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재활센터의 책장에 놓여 있었는데, 잠깐 읽어보았다고 했다. 근데 자기는 멍청이라 글 같은 거 잘 못 읽는다고 답했다. 예지는 왜 자신이 글을 못 읽는다고 말하는 걸까. 나는 한번 읽어볼래.”라고 말했고 그녀는 내 책을 건네받았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원래 비틀스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며 노르웨이산 가구가 더 적절한 번역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구보다는 숲이 더 낭만적이고 넓은 의미라고 생각하여 일본어로 ノルウェイの이라고 번역했다. 이런 이야기다. 그녀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책에 집중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몰려들었다. 여학생들은 참 신기하다. 이미 무리를 만들었다. 남학생들은 열댓 명씩 무리를 만드는 것과 달리 그녀들은 두 명, 네 명씩 수를 맞춘다. 무조건 짝수로 맞춘다고 들었는데, 소외되는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우리 반에는 재건이라는 이름의 남학생이 있다. 그 남자는 얼굴이 갸름하고 바가지 머리이며 외꺼풀 눈이다. 그는 항상 나에게 귀엽다고 말해준다. 나는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변태 같으니까. 그는 자기는 귀엽다고 말한 것뿐인데, 왜 변태 같다는 소리가 나오냐고 되물었고, 나는 그냥 느낀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귀엽다는 말은 왜인지 듣고 싶지 않다. 그 어감이 좋지 않다. 귀엽다고. 솔직히 귀엽다는 말이 이상한 건 아니다. 일단은 칭찬이다. 나도 예지랑 요나에게 귀엽다는 표현을 쓰곤 했고. 요나는 줄도 무늬도 없는 연습장에 무언가를 빼곡하게 그리는 중이었다. 그 그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녀는 플러스펜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고딕풍의 성당 같기도 했고 로마풍의 건물 같기도 했다. 예지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설명을 시작했다. 자기는 평소에도 자유분방한 그림을 좋아한다고. 이 그림은 내가 살고 싶은 건물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물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가까운데. 왜 이런 걸 그린 거지. 무슨 의도로 그린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4교시까지 지루한 수업을 끝내고 나는 교내 방송으로 잠깐 1학년 교무실에 들르라는 스피커 소리를 들었다. 왜 하필 선생님이 내 이름까지 방송으로 불러가며 교무실로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지 않으면 일이 더 커질 거 같아서 그러지 않았다. 교무실의 공기는 항상 무겁다. 중앙 교무실이 아니라 1학년 교무실인데도. 그곳에서 담임선생님, 그러니까 미술 선생님이 컴퓨터를 바라보셨다. 그때 나를 부르며 이리 다가오라고 했다. 선생님이 말했다. , 정신질환 같은 거 있어. . 선생님은 계속해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았다. 선생님은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예지 잘 돌볼 수 있지. 잘 돌보라니요, 걔가 아기인가요.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선생님은 그만 돌아가 보라고 했다. 나는 그냥 돌아갔다. 나는 아직도 선생님이 무슨 의도로 나를 부른 건지 궁금하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5교시는 항상 미술 시간이다. 예술고등학교니까 그런다. 나는 조용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선생님은 이번에는 소묘를 그리라고 했다. 입시 미술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 학교마다 다르지만, 소묘로 시험을 보는 대학이 많다고 했다. 소묘라고 해서 별건 없었고 손잡이가 달린 주전자광택이 있는 유리병이라는 주제로 소묘를 그려보라고 했다. 광택이 있는 유리병이라. 나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 무언가 비친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유리를 그린다는 건 탈의실 벽을 유리로 만든다는 것이나 유리판을 가면으로 쓴다는 것과 같다.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주제로 유리병을 내세운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광택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굴절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미술 심사위원들은 알고 싶은 거지. 선생님도 마찬가지고.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백지에다가 흑연으로 투명함을 표현하지는 못하니 그냥 명암으로 어떻게 표현했다. 옆에서 예지가 뒷심이 약하다고 한마디 했다.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림에 집중하지 못했으니. 이런 그림이 나온 것도 기적이다. 요나는 이젤을 내 옆에 두고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해괴망측한 그림을 그릴까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의외로 멀쩡한 소묘를 그렸다. 내가 말했다. 너 괜찮냐, 이상한 그림 안 그려. 소묘는 멀쩡하게 그려. 평소에는 멀쩡하지 않다는 뜻이구나. 뭘 따져.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5교시가 끝나고 체육 시간이 되었다. 예지는 뭘 할까 궁금했는데, 일단 체육복으로 갈아입긴 했다. 농구 드리블을 연습했는데, 그녀도 다른 학생들과 다르지 않게 공을 튀겼다. 예지는 농구공을 놓쳤다. 나에게 주우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주워주었다.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재건은 그런 나를 보고 여자친구가 두 명인데 한 명은 다리 병신이고 한 명은 뇌 병신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놈의 멱살을 잡고 사람이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체육 선생님이 와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와 재건은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나는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다. 내 싸움이 아름다운 투쟁으로 포장되길 원하지 않는다. 철없는 고등학생의 객기일 뿐이다. 여자애 앞에서 잘 보이고 싶어서 한 유치한 쌈박질이다. 체육 시간이 끝날 때까지 얼차려를 받았더니 팔다리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7교시가 시작될 때쯤, 교실에 앉았는데, 마음만 같아선 예지를 의자에 앉혀놓고 내가 휠체어에 타고 싶었다. 고통은 금방 괜찮아졌다. 나는 육체적인 고통에 익숙하다. 우울증은 항상 신체를 망가뜨린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게 만들며 잠을 덜 자게 만들고 몸을 움직이기 싫게 만든다. 평소에 공원을 자주 다니는 이유가 있었다. 밖에 나가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거 같아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 거 같아서. 7교시는 영어였다. 영어 선생님은 간단한 것부터 시작했다. 과거완료 시제. 영어를 공부하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시제를 배우는 것은 간단하지만 힘들다. 사실 영어권 사람들은 저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본인에게 과거완료, 현재완료, 미래완료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잘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나도 한국인이지만 국문학자는 아니니까 한국의 문법을 설명하라고 하면 잘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영어 시간이 금방 끝났다.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였나. 예지는 날 보고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아프다고 했다. 우울증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뭐래. 몰라, 의사는 나한테 관심 없어. 의사는 정말 우울증 환자에게 관심이 없다. 얼마나 헛소리하느냐에 따라 약이 바뀌는 것뿐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요하지도 않다. 누군가에게 나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이 날 피하게 될까 무섭다. 그 사람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게 무섭다. 수업이 끝나고 요나는 내 팔뚝을 안은 채로 1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예지의 휠체어를 밀었다. 요나가 엘리베이터를 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봄인데도 날씨가 추웠다. 너무 쌀쌀했다. 나는 긴소매 와이셔츠를 입은 채였다. 옷감과 살갗 사이에 찬기가 느껴졌다. 봄은 몸을 싸매기도 내놓기도 힘든 날이다. 나는 예지의 휠체어를 밀면서 옆에는 예쁘고 관능적인 정신병자 하나를 두고 걷고 있다. 뒤에서 애들이 실실대는 소리가 들린다. 저 남자 좀 봐, 쟤 정신병자 아니니. 정신병자 둘이 잘 논다. 이런 이야기였다. 나는 그 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곧 학교 밖 정문으로 빠져나왔다. 예지는 장애인 택시를 불러놓았다고 말했다. 곧 자기를 태우러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고 했다. 나는 그냥 가고 싶지 않았지만, 요나가 내 손목을 붙잡고 끌고 갔기에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일단 늦게 올 것이다. 나는 요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누군가를 데려다준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다. 요나의 집은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다. 3, 집에 도착하자마자 요나가 좀만 쉬었다 가라고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퀴퀴한 냄새가 났다. 집이 지저분했다는 뜻이 아니다. 남의 집에서만 느끼는 특유의 체취가 있다. 요나의 방은 정말 유치찬란했다. 사방에 게임 포스터, 로커 포스터가 있었고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도 하나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았고 그것으로 산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하는 게임 가운데는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게 많았다. 그나마 이름을 들어본 건, ‘갓 오브 워’, ‘데빌 메이 크라이’, ‘다크 소울등등. 나는 그 게임팩을 들어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게임들을 무슨 돈으로 샀냐고. 어머니 아버지의 등골을 빼먹은 것이냐고 농담했다. 그녀는 아니라고 했다. 이것들도 공모전이나 대회에 나가서 얻은 상금으로 산 것이라고 했다. 둘이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집에 요나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분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그 집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20XX314일 화요일

한국의 학기제도는 부당하다. 보통 새 학기는 3월 초에 시작한다. 밸런타인데이 때 여학생들한테 초콜릿을 받지 못하는데, 남학생들은 여학생들한테 사탕을 줘야 한다. 나는 적당히 근처 편의점에서 파는 8,000원짜리 사탕 상자를 샀다. 하나만 사려고 했는데, 두 개 샀다. 예지랑 요나 줬다. 두 사람은 고맙다고 그것을 받았다. 요나가 말했다. 이 사탕 먹고 내 목에 걸리면 네가 하임리히법 해서 나를 살려달라고. 나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동의했다. 아니 애초에 화이트데이 때 사탕을 주는 게 맞는가. 화이트데이는 일본에서 유래되었다고 들었다. 보통은 흰 사탕, 흰 쿠키, 마시멜로 같은 걸 주는데, 한국은 왜 사탕을 주는 건지 의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반복하니 예지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요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준 사탕을 맛나게 먹었다. 사탕을 혓바닥으로 빠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내가 환각을 듣는 것일까. 선생님은 남학생들한테 사탕을 받은 모양이다. 물론 여학생들도 줬겠지만, 나는 여성이 여성에게 주는 사탕 같은 건 세지 않는다. 점심시간에 화이트데이 기념이라고 새하얀 마카롱이 급식 후식으로 나왔다. 나는 너무 단 음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요나가 그걸 맛있게 먹길래 그냥 요나 먹으라고 줬다. 점심을 빨리 먹고 나왔더니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다.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글을 쓰는 건 재미있다. 회화와 작문은 좋은 취미다. 생각을 비우기 좋다. 교실에는 예지도 요나도 없었다. 요나가 밥을 마저 먹고 예지랑 오겠다고 했다. 어떤 예쁘장한 여자애가 내게 시비를 걸었다. 너 글 쓰냐, 문예창작과로 오지 왜 미술학과로 왔냐. 나는 닥치라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비난을 쏟아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름이 소진이었다. 소진과 대화하다 보면 정신력이 소진되는 듯하다. 그녀가 하도 욕을 하길래 어떻게 하면 그냥 갈 거냐고 물었다. 자기 발가락을 핥으면 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책상에 걸터앉고 실내화를 벗었다. 얇은 팬티스타킹을 신은 채의 발이 드러났다. 바짓가랑이를 지나는 경험을 한 한신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스타킹 신은 발을 5초 정도 핥았다. 그것을 보던 여학생들은 경악과 야유를 퍼부었다. 더러워, 핥으라고 진짜 핥니. 웅성웅성 그런 소리가 들렸다. 교실로 돌아온 예지는 어디서 들은 건지 왜 그년의 발을 핥은 거냐고 따졌다. 나는 크게 될 사람은 시비가 붙었을 때, 사소한 감정으로 옥신각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지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아무튼 교실에는 내가 발과 스타킹에 성벽이 있다는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소진은 나를 굴복시킨 것으로 만족했나 보다. 이 이야기는 선생님들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잠깐 따라가서 보았는데, 소진은 1학년 교무실로 불려 갔고 수치스러운 행위를 강요한 죄로 발바닥 다섯 대를 맞았다. 교실로 돌아온 소진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여학생들은 잘 사과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사과 한 번을 받으려면 일주일이 족히 걸린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요나나 예지는 잘못한 게 확실하면 사과했다. 5교시 때,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대 기적이 일어났는데, 소진이 내 앞에 다가와서 사과했다. 사실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관심을 끌 방법이 없어서 그런 짓을 했다고 했다. 미술학과에 남학생이 셋뿐이라고 말했었지. 마지막 남학생, 은진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정말 그는 새 학기 자기소개 시간 때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듯했다. 푸근한 인상에 듬직한 체형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어리숙하고 덩치가 크다는 것이었다. 여학생들은 그를 돼지라고 놀렸다. 그는 자신이 돼지라고 불리는 걸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미술 실력과 별개로 만화를 잘 그렸다. 단편이지만 이야기를 짜내는 능력이 있었다. 은진은 소진에게 사탕 한 줌을 선물로 주었다. 소진은 고맙다라고 짧게 말했다. 얼핏 본 거지만 소진은 그 사탕을 핥지 않고 그냥 씹어서 먹었다. 은진과 소진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은진이 사탕을 주고 소진이 그걸 받아먹었다는 건 기적이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성이 이응으로 시작한다는 이유로 짝꿍이 되었는데, 소진은 자주 시비를 걸었다. 은진이 햄버거를 매점에서 사서 먹고 있으면 소진은 이렇게 물었다. 근데 넌 햄버거를 몇 개까지 먹어봤냐. , 나는 세 개까지 먹어봤어. 하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넌 돼지야.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니까. 이렇게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였다. 반 애들은 소진이 은진을 좋아하기에 관심을 끌기 위해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 얼레리꼴레리 놀려댔으나,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화이트데이를 맞이해 예지랑 요나랑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파스타를 파는 경양식 식당이었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휠체어를 미는 시간까지 합하면 한 20분 걸렸다. 거기까지 가는데, 예지가 말을 걸었다. 너 근데 평소에 파스타 좋아하냐. , 집이 설렁탕집을 해서, 평소에는 양식을 좋아해.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말한 거 같다. 요나는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노란색 나비에게 정신을 팔렸다. 그녀는 차도로 걸어가려고 했고,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야 했다. 다행히 요나는 내가 따르는 대로 저항하지 않고 움직였다. 휠체어는 예지가 스스로 밀겠다고 했다. 나는 왜 예지에게 평소에 혼자 밀지 않냐고 물었다. 그녀는 혼자 민다고 했다. 너 없을 때는 혼자 밀어, 그걸 눈치 못 챘니. , 미안. 미안한 건 아니고, 그냥 누군가에게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가 있어.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금세 우리는 양식집에 도착했다. 유리로 된 문 두 쪽을 열고 예지를 앞으로 보냈다. 다행히 우리가 먹을 만한 공간은 많이 있었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예지는 휠체어를 탄 채로 탁자 앞에 있기로 하고 우리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올리오 파스타를 주문했고 요나와 예지는 토마토 파스타를 먹겠다고 했다. 직원에게 주문한 뒤, 예지는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혼자 휠체어를 끌고 갔다. 요나는 물잔이 참 예쁘다고 한마디 했다. 마치 세공사가 일일이 만든 듯한 예쁜 물잔이었다. 요나는 그 물잔을 계속 보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지고 싶진 않아. . 이런 건 가지고 있어 봐야 설거지하기도 힘들고. 하긴, 여기서 보니까 예쁜 거지 집에서 보면 별로 안 예쁘겠다. 요나는 동의했다. 예지는 한 10분 뒤에 돌아왔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괜찮다고 했다. 양식집에서는 화이트데이 이벤트랍시고 연인이 오면 원하는 메뉴 하나를 준다고 했다. 요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와 연인 사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예지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요나는 큐브 스테이크를 달라고 했다. 마치 칼로 책을 꽂듯이 곱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메뉴판을 찍었다. 직원은 별말 없이 알겠다고 했다. 곧 큐브 스테이크가 나왔다. 요나와 예지는 그것이 맛있다면서 비속어까지 섞으며 온갖 찬양을 해대었다. 요나는 손이 멀쩡하게 달려 있으면서 자꾸 나에게 먹여달라고 떼를 썼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서 포크로 일일이 먹여주었다. 한 입 먹으면 두 번째로 달라고 하고 세 번째로 달라고 하고. 아주 우스운 광경이었다. 어차피 식당 직원들은 우리를 연인이라고 알고 있으니 별로 상관없으리라. 음식을 다 먹고 나오니까 예지가 짜증을 냈다. 왜 요나는 매일 데려다주면서 자기는 데려다주지 않냐고. 나는 오늘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요나는 그날 혼자서 가야 했고, 온갖 불평을 하면서 사라졌다. 나는 휠체어를 밀고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어야 했다. 현관문을 열어준 건 한 여성이었는데, 예지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녀는 고맙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예지에게 이렇게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을 줄 몰랐다고 했다. 그녀는 내게 용돈으로 30,000원을 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해야 했다. 그날 나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고 30,000원으로 편의점에서 콜라 한 병을 사 마셨다. 콜라병의 콜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질 때, 나는 마음속 무언가가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전화가 왔다. 예지에게서 온 전화였다. 전해줄 게 있는데, 실수로 깜빡하고 전해주지 못한 게 있다고 했다. 혹시 멀리 가지 않았으면 잠깐만 돌아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아파트까지 걸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도 있었지만, 13층까지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1층으로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3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현관문 초인종을 눌렀다. 곧 예지의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곧 예지가 나와서 내게 상자 하나를 건넸는데, 벨기에산 화이트초콜릿이었다. 장미 모양의 초콜릿은 꽤 예쁘게 생겼다. 원래 밸런타인데이 때 주는 게 맞는데, 그때는 봄방학이라서 지금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화이트데이니까 화이트초콜릿으로 준비해 보았다고 했다. 나는 킥 웃었고 그녀는 따라 웃었다. 예지의 어머니는 나를 태워다주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내 집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그냥 가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면서 나를 돌려보냈다.

-20XX315일 수요일

수요일 새벽,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인은 치매로 인한 폐렴 악화. 정확히 말하면 갑작스러운 호흡부전. 요양사와 의사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고 했다. 가족 가운데 누구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방에서 나왔을 때, 부고를 들은 어머니는 엉엉 울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그냥 혼자 슬퍼하게 놔두어야 했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슬프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수명이 다하면 죽으니까. 다만 어머니가 슬퍼하는 모습이 나는 두려웠다. 외할머니는 독실한 개신교인이었기 때문에 장례식은 교회에서 치러주기로 했다. 아무튼 오늘은 학교를 쉬기로 했다. 이야기해 보니 경조사로 인한 결석은 공결 처리가 된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평소에는 입지도 않는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입던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에게 정장이 있을 리 없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상복인지 뭔지 모를 다른 정장을 입었다. 어쩌면 내가 정장을 입는 건 정해진 순서였을지도. 이런 이야기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외할머니의 치매가 심해진 이후로 나를 외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두려웠다. 치매를 앓는 사람을 마주한다는 게 두려웠다. 외할머니는 자기가 치매인지도 모르고 계셨다. 아무튼 장례식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미리 누군가가 장례식을 준비한 것처럼. 개신교 장례식에서는 절을 해서는 안 되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같은 발언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개신교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했다. 그게 왜 금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장례식 시작 전, 어떤 목사가 나와서 외할머니가 천국으로 가길 빌어주었다. 무슨 진혼곡을 불렀는데, 정확히 어떤 노래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무신론자라서 찬송가고 진혼곡이고 뭔지 모른다. 원래 기독교 장례식에서는 관을 열어놓고 하는 것이 맞지만 왜인지 한국에서는 그러지 않는다고 했다. 외할머니의 임종도 시신도 지켜보지 못한 채 이렇게 떠나보낸다는 게 좀 씁쓸했다.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흘렀다. 나는 주변인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는 건강하고 멀쩡하게 살아계신다. 친척들 가운데도 죽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이 없다. 어쩌면 외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나도 고등학생이니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할 때가 되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관 앞에서 울었다. 나는 교회의 긴 의자 가운데 하나에 앉아서 기침했다. 갑자기 목에서 가래가 나오려고 했다. 언제 오신 건지 옆에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휴지 한 줌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고 마저 기침했다. 휴지에 노란 가래가 묻어나왔다. 나는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했다. 마침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하나 있었다. 오줌을 눈 뒤, 휴지통에 휴지를 버리고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대화하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렸다. 할아버지가 할머니께 말하셨다. 사돈께서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 몰랐네. 그러게. 폐렴이라지, 돌아가신 이유가. 아들놈이 그러던데. 우리도 조심해야겠어, 나이 먹으면 위험하다잖아, 폐렴이. 그래도 우리나 우리 아들 내외는 담배 안 피워서 다행이야. 장례식의 일정이 끝나고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할아버지가 말하셨다. 선재야,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건 유감이지만, 힘내렴.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장례식이라서 그런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오늘 학교 가는 날이지만 못 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학교를 나왔지만, 할머니는 집안이 어려워서 학교를 못 나오셨다고 했다. 그래서 공무원과 사회복지사가 운영하는 공부하셨다.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니까 세상 살기 편해졌다고 좋아하셨고 수학을 배우니까 요새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좋아하셨다. 미술이나 음악은 즐겁다고 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할머니의 말씀에 웃음으로 대답해야 했으나, 장례식장이라 그러지 못했다.

장례식 일정이 끝나고 나는 바깥에서 잠깐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어떤 나이 든 남자 둘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손짓하면서 내게 다가오라고 했다. 나는 그들 앞에 섰다. 그들 가운데 한 남자는 내게 말했다. 너 선규 아들이지, 볼 줄 몰랐다. 그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유감이라고 했다. 지갑에서 용돈이랍시고 50,000원을 꺼내 주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과거 어른들이 주는 용돈은 거절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들어서 그냥 받았다. 유교식이나 불교식 장례식과 달리 개신교식 장례식은 하루 만에 절차가 끝난다고 했다. 장례식장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성직자들은 여전히 남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나를 차로 태워다주셨다. 자기는 할 일이 있어서 장례식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내일 학교 갈 준비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집에 혼자 남았다. 나는 거실로 들어섰다. 그림을 그려야겠다.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그림을 그려야겠다.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써야겠다.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어야겠다. 이런 식으로 혼잣말하고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독백만 한다. 나는 백합을 그렸다. 백합은 참 신기하다. 죽음과 사랑을 동시에 상징하는 꽃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크릴화는 참 신기하다. 수채화 같기도 하고 유화 같기도 하다. 무언가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느낌이 있다. 그림을 그려나갔다. 백합의 꽃잎을 완성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렸다. 예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너 괜찮아, 누구 돌아가셨다면서. , 괜찮아, 외할머니, 난 괜찮아. 이렇게 문자를 나눴다. 잠깐 전화하자고 했고 예지랑 전화를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8시였다. 예지는 내가 없어서 오늘 학교가 쓸쓸했다고 했다. 휠체어 밀어주는 사람도 없고. 물론 예지는 다른 사람이 없어도 혼자서 휠체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밀었지만, 내가 밀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집에 있는 커피를 컵에 쏟았다. 뜨거운 물을 부었다. 티스푼으로 그것을 휘휘 저었다. 그것을 마시면서 여러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 그러기에 크게 슬프지는 않다. 요나에게서 잠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공원으로 향했다. 요나는 머리를 양쪽으로 묶었고 망사스타킹을 신었다. 핫팬츠에 가죽 재킷을 입었다. 나는 그녀의 허벅지에 선정성을 느꼈다. 요나는 그것을 눈치채고 작작 쳐다보라고 한마디 했다. 네가 평소에 내 가슴 힐끗힐끗 보는 거 다 안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는 변명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요나는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다.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이다. 나와 그녀는 카페로 갔다. 카페는 무언가를 정리하기 좋은 장소이다. 나는 노트에다 계속해서 글을 적었다. 요나는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쪽쪽 빨아 먹었다. 약간의 물기가 그녀의 입술을 만나 반짝였다. 요나는 내가 오지 않아서 아쉽고, 걱정되었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인 건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예지랑 문자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예지는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담배 피웠다가 아빠한테 처맞은 거 기억나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런 걸 감수하더라도 담배는 끊지 못한다고 했다. 그녀가 담배를 피우고 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글을 썼다. 마음만 같아선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카페에 종이와 물감을 가져와서 그림을 그리면 민폐니까. 나는 예지를 집까지 데려다줘야 했다. 날이 어두웠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 정신병자가 밤에 어떤 짓을 할까, 걱정되었다. 그녀의 집인 아파트를 향해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예지의 집에 갔을 때가 생각났다. 내가 말했다. 예지도 3층 살던데, 너도 3층 사네. 걔랑 뭐 했어. 무슨 말이야. 집에서 둘이 했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 뜸을 들였다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했다. 그녀는 철권을 꺼내더니 같이 하자고 했다.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다시 말했다. 이런 게임은 둘이 해야 재미있다. 나는 오락실에서 철권을 과거 자주 했다. 요나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자에게 져주는 남자이기 때문에 간발의 차로 져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자기가 이겼다고 좋아했다. 요나랑 종일 신나게 놀고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놀았다. 어머님 아버님은 안 계시냐고 했더니 오늘은 일이 있어서 두 분 다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집에 어머니 아버지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요나는 자고 가라고 했다. 거절했다. 그날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집에 가는 동안에도 요나의 집 쪽을 오래 바라보았다.

반신

반신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916 단편 Times Squar 2044 쵸이 2024.02.10 0
2915 단편 어떤 이별 김휴일 2024.01.31 0
단편 일기장 A 반신 2024.01.30 0
2913 단편 21세기 미운 오리 새끼 꿈꾸는작가 2024.01.29 0
2912 단편 미열 적사각 2024.01.23 1
2911 단편 노인과 바다와 인어 이연L 2024.01.16 0
2910 단편 심해어 레시피 김우보 2024.01.09 0
2909 단편 이 게시물은 커뮤니티 규정을 위반합니다 BB 2023.12.28 2
2908 단편 21세기 자린고비 시트콤 꿈꾸는작가 2023.12.28 0
2907 단편 부러진 칼날 차라리 2023.12.22 0
2906 단편 반신 2023.12.19 0
2905 단편 항정신병제 반신 2023.12.19 0
2904 단편 거미 반신 2023.12.16 0
2903 단편 너희는 그저 싶었던 사피엔스 2023.12.12 1
2902 단편 최종악마의 반성 니그라토 2023.12.10 0
2901 단편 이상한 나라의 아버지 임희진 2023.11.30 0
2900 단편 내 피는 하얀가요 홍대입구3번출구 2023.11.26 0
2899 단편 홍대입구3번출구 2023.11.26 0
2898 단편 너는 스노볼 속에 사피엔스 2023.11.25 1
2897 단편 2099년1 꿈꾸는작가 2023.11.25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