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미열

2024.01.23 13:2101.23

 몇 시간째 냉장고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분명 여기다 뒀는데….”

 몇 번을 반복해도 달라질 것 없는 달걀 보관통 커버를 들었다 놓았다.

 음료칸에 두면 잠결에 열어버릴까 봐 걱정하고 다른 곳에 옮긴 것까지 메모리에 확실하게 남아있다. 카트리지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스스로 냉장고 문을 열고 뛰쳐나왔을 리도 없다. 누가 가져갔을 확률도 없고…. 나도 모르게 도둑이 들었나? 아니야, 그럴 리는 없다. 닭장 같이 빽빽한 공동주택에서 하필 우리 집을 골라서 하필 냉장고를 열고 하필 숨겨둔 카트리지를 가져갔다? 요 며칠은 집에만 있어서 가능성이 낮다. 혹시 세이가 말도 없이 옮겼을까?

 “세이! 냉장고 안에 넣어둔 카트리지 어디다 뒀어?”

 나는 세이의 이름을 입에 담고서야 세이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도 기억 못 하냐? 이 등신. 설사 세이가 있다고 해도 어디에 카트리지를 두었는지 모를 거다. 카트리지만큼은 세이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냉각수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세이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냉각수를 교체한 게 두 달 전이니 아마 그럴 거다. 그것도 재활용 냉각수로. 메모리가 버티는 것도 용하지. 나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나는 거실과 안방, 화장실을 둘러보다 창고로 들어갔다. 수십 번은 들락날락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창고를 둘러보다가 선반 가장 높은 곳에서 누렇게 바랜 아이스박스를 발견했다. 저런 게 있었나? 시각 센서가 번쩍 밝아졌다. 그제서야 비상용으로 아이스박스에 카트리지를 넣어둔 기억이 났다. 그것의 사용 유무까진 기억나지 않았지만 실낯같은 가능성을 흘려보낼 순 없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선반에서 아이스박스를 내렸다. 묵직한 게 딱 카트리지 무게였다. 나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었다. 위옹위옹. 후각 센서가 시뻘건 경고 창을 띄웠고 알람음이 머리를 조였다. 아이 씨…! 얼굴에 생체 피부가 남아있었다면 주름이 걱정될 만큼 오만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누가 썩은 고기를 여기다 뒀어!”

 시야가 경고창과 노이즈로 뒤엉켰다. 가뜩이나 몸 속 미열 때문에 메모리 처리가 원활하지 않은데 경고창을 띄우느라 시야가 뚝뚝 끊어졌다.

 재빨리 뚜껑을 닫았다. 그제서야(또!) 세 달 전 세이와 워터랜드에 놀러 갔을 때 캠핑 분위기를 내자며 먹지도 않을 인공육을 굽고 그대로 아이스박스에 처박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이가 치운다고 했었잖아. 나는 세이를 불러다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 싶었지만 정작 책임을 물을 세이가 집에 없었다.

 나는 아이스박스를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갔다. 후각 센서 감도를 최저로 줄이고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후각 센서 경고창과 체온 상승 경고창이 사정없이 시야를 덮쳤다. 나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샐러드 볼에 콧물과 가래를 넣고 믹서로 간 것 같은 인공육 덩어리를 생분해 수집통에 던졌다. 그것은 고약한 냄새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아이스박스 뚜껑을 꽉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아이스박스를 닦았다. 위옹위옹. 아직도 알람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골이 지끈거리는 게 열도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아까 튀어나온 경고창을 지우고 체온과 냉각수 온도를 확인했다. 체온 37.1 도. 냉각수 온도 33.4도. 쓸데없이 또 올라갔다.

 냉각수가 귀하다지만 올해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공랭식을 선택했어야지! 세이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냉각수를 쓰냐 안 쓰냐만 다를 뿐 공랙식이나 수랭식이나 거기서 거기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 조금의 차이가 크지만 세이에게 동의하고 싶지 않다. 뭐든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긴다니깐. 어제만 해도 그래. 아무리 급해도.

 [주의]

 체온 상승 경고창이 튀어나왔다. 릴랙스하자, 릴랙스. 나는 체내 보조 공조空調 시스템을 최대치로 올리고 세척한 아이스박스에 얼마 남지 않은 얼음을 담았다.

 미열 지옥은 알리스카 아이스버킷 팩토리(Alaska Icebucket Factory)의 냉각수 생산 및 공급 라인에 문제가 생긴 세 달 전—워터랜드를 다녀오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AIF는 냉각수 최대 생산 시설로 전세계 냉각수 67%를 공급한다. EU의 알프스 아이스 픽 팩토리(Alps Ice Peak Factory)나 러시아의 시베리아 자보트는 업계 1위가 휘청이는 틈을 노렸지만 전세계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고 오히려 AIF의 지위만 공고히 다져주었다.

 AIF는 원료 부족과 냉각수 처리 시설 문제를 이유로 정상화가 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람들은 AIF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공장 주변에 널린 게 빙하인데 원료가 부족하다는 AIF의 주장은 이상했다. 더욱이 지구온난화 때문에 빙하가 알아서 녹을텐데 적당히 퍼다 팔면 되지 않느냐는 게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사람들의 비아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후 변화 덕분에 빙하를 녹이는 비용은 줄었지만 녹은 빙하를 냉각수로 가공하는 추가 처리가 필요하다. AIF는 냉각수 원료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며 공급 차질과 가격 인상의 이해를 바랐지만 몇 년 전부터 분기마다 냉각수 가격을 올린 주범의 호소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성인군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AIF가 결코 좋은 기업은 아니지만 냉각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간혹 냉각수 탱크를 생수로 채우는 사람이 있는데 결단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생수는 균등하게 열전도를 하지 못해 전신 마비 증상을 일으킨다. 설명서를 읽지 않아 생기는 사건 사고를 볼 때마다 세이가 공랭식을 선택해서 다행이었다. 세이라면 열을 식힐 수 있다면 적당히 차가운 액체로 탱크를 채웠을 것이다. 언젠가 내게 포도 슬러시로 채우자고 달려든 적도 있었다. 손등 같이 피부가 얇은 부위에는 냉각수 색깔이 비쳐보이는데 보라색 이쁘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절대 안 될 일이다. 세이가 안구 렌즈를 반짝이며 다가올 때가 가장 무섭다. 어제 싸움도 그렇게 시작했다.

 “하디, 냉각수 필요하지? 우리 구하러 갈까?”

 세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목뒤에 끼워둔 쿨링 쿠션을 뺐다. 쿵. 뒤통수가 소파 팔걸이에 떨어졌다. 나는 얼얼한 뒤통수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냉각수가 약수물이야? 저절로 땅에서 솟아나게? 장난치지 말고 내 놔.”

 나는 짜증을 가득 담아 세이에게 손을 뻗었다. 세이는 쿠션을 양손에 번갈아 튕기더니 내게 던졌다. 쿠션이 가슴에 쿡 박혔다.

 “장난 아니야.”

 세이는 샐쭉해져선 내게 등을 돌려 앉았다. 양갈래 머리처럼 둘로 나눠진 정수리 방열放熱 모터가 팽팽 돌아갔다. 화가 단단히 났군. 나는 세이 옆으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소파가 푹 꺼지면서 세이가 내 쪽으로 기울었다.

 “쿠션 뺏어가지 말라고 한 거야. 나 냉각수 부족해서 예민한 거 알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경고창이 면상을 갈긴다니까? 이대로 가다간 메모리가 흐물흐물해지겠어.”

 “내가 뭐랬어. 공랭식으로 맞추자고 했잖아. 어디서….”

 “겉멋만 들어서 유지비를 배로 잡아먹는 수랭식으로 맞춰서 말이야.”

 “수랭식이 유지비 더 드는 거 알았잖아. 우리 처지에 분이 넘친다고 했잖아.”

 “알아, 알아.”

 “그거뿐이야? 공랭식은 볼품없다고 구리다고 투덜대더니. 하디, 나 봐 봐. 나 못 생겼어?”

 세이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옆구리에 손을 가져갔다. 매끈한 티타늄 보디에 네온 오렌지 네일이 겹쳐 영롱하게 반짝였다. 솜털이 보송보송 난 뽀얀 얼굴(세이는 나와 달리 얼굴에 생체 조직을 남겼다)에 가르마를 오대오로 탄 머리 양쪽으로 방열 모터가 고양이 귀처럼 돋아나있었다.

 세이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애교를 부리는 아기 고양이 같은 자태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세이를 끌어안았다.

 “세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수랭식 공랭식. 뭐가 중요하겠어.”

 세이의 정수리 방열 모터의 회전 속도라 느려졌다. 세이는 차가운 손으로 내 척추를 쓰다듬으며 왈츠를 추듯 맞닿은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끌어안고 있으려니 조금 더웠지만 나는 분위기를 아는 사람이다.

 “세이, 아까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나는 자연스럽게 세이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게 말이야, 하디. 구시가지에 가면 냉각수를 구할 수 있대.”

 “그래. 아까 말했잖아. 근데 거기서 냉각수가 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나마 남아있던 가게랑 아파트 전부 신시가지로 옮겼잖아. 지금은 완전 공사판일텐데.”

 “구시가지 뒤에….”

 “미관해친다고 시청에서 싹 밀었잖아.”

 “좀, 좀! 하디! 내 말 끝까지 들어봐.”

 세이가 내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나는 집게 손으로 입술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게 녹등가綠燈街까지는 아직 못 밀었나 봐. 신시가지에 거처를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정말. 서두르길 정말 잘했지?”

 세이가 내 손등 위로 손을 포갰다. 나는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삼 년 전, 광우시청은 IEBAM(국제 강화 인간 스포츠 대회) 유치를 위해 도시 미화에 나섰다. 해마다 광오시 인구가 줄어드니 주민들을 위한 복지 정책을 펼치는 것보다 과감한 투자로 일발 역전을 꿈꾸는 편이 장기적으로 시에 이득을 가져온다는 게 시장의 주장이었다. 멀쩡한 동네를 때려 부순다고 반대도 심했지만 시에서 찍어 누르는 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시청은 구시가지에 살던 사람들에게 신시가지 경계 지역에 공동 주택을 나눠주고 ‘미화’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기업에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등 시장은 그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이렇게 보면 시장은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시민들 피부에 와닿는 혜택은 없었다. 세이가 발 빠르게 나선 덕분에 닭장 한켠에 둥지를 튼 것과 도시 미화 덕분에 나 같은 인간이 일자리를 얻은 것이 그나마 시장에게 할 말을 만들어주었다.

 “녹등가가 냉각수랑 무슨 상관이야? 거기에 냉각수 창고라도 있대?”

 “그런 게 있었으면 시장이 먼저 털었을걸.”

 “하긴 그건 그래. 그러면 녹등가에 뭐가 있어?”

 세이는 러브레터를 들킨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세이의 빈자리로 몸이기울었다. 세이는 방으로 들어가선 등 뒤로 무언가를 숨기고 돌아왔다. 세이는 맹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나를 바싹 끌어당기며 야릇하게 속삭였다.

 “냉각수 수렵이야.”

 세이의 방열 모터에서 흘러나온 미적지근한 미풍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냉각수 수렵?”

 세이는 등 뒤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세이는 아무 말 없이 헤실헤실 웃었다.

 나는 세이의 손에 있는 것을 넘겨받았다. 탁하게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 새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세이 팔뚝만한 원통 끝에는 검지만한 바늘이 삐쭉 솟아있었다. 바늘 끝은 뾰족해서 티타늄 보디에도 어렵지 않게 구멍을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세이는 내 반응을 기다리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온 상승 경고창이 갑자기 뺨을 후들어깠다.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경고창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달 넘게 떨어질 줄 모르는 미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선 메모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고 갈 곳 잃은 열기는 가슴으로 밀고 내려왔다. 갑갑했다. 나는 이것을 어디론가 분출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힘껏 세이를 밀쳤다. 세이는 중심을 잃고 소파에서 떨어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디!”

 세이가 앙칼지게 나를 쏘아보았다. 정수리 방열 모터가 시끄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한테서 냉각수를 뽑으라는 거야?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생각을 해?”

 “전부 하디 생각해서 그런 거야. 하루 종일 쿠션 끼고 사는 게 안쓰러워서!”

 “그래도 사람이 할 짓이 있고 해선 안 되는 짓이 있는 거야. 내가 전환율이 높다고 인간같지 않아?”

 “내, 내가 언제 그렇다고 했어?”

 세이는 당황해선 말을 더듬거렸다.

 “세이, 내가 피부가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사람이 아닌 건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라고. 너무 끔찍해.”

 “끔찍해?”

 “역겨워.”

 세이는 한껏 서운해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아. 난 살인자가 아니야. 악마가 아니야.”

 “알았어. 그만해. 항상 이런 식이지. 하디만 착한 사람이고 나만 나쁜 년이지. 처음부터 공랭식이었으면 이런 걱정 자체를 할 필요가 없잖아. 이 주사기도 구하려면…! 됐어. 괜히 걱정했어. 하디는 깨끄읏한 사람이고 나는 타지도 못할 쓰레기야. 죽일 년이야!”

 세이는 주사기로 테이블을 내리찍고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 저러다가 밤이 되면 알아서 돌아올 거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경고창은 뜨지 않았지만. 내 반응이 거칠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서 심한 말이 나왔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하지만. 내가 잘못한 거야? 모르겠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든 오늘부턴 일을 나가야 한다. 연일 더워지는 날씨에 당겨쓴 휴가도 어제가 마지막이었다. 요즘은 밤에 출근한다. 열대야로 더운 건 마찬가지지만 땡볕보다 달빛이 훨씬 낫다. 출근하기 전에 세이 얼굴 봤으면 좋겠는데….

 나는 아이스박스에 머리를 집어넣고 절전 모드로 전환했다.

 

*

 

 “오랜만입니다.”

 나는 팀장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김 실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김 실장은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팀장들도 내게 눈인사를 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들의 얼굴을 보니 방열이 제대로 되는지 걱정이었다. 남일 같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기소로 향했다.

 대기소는 더웠다. 에어커튼은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 실력 발휘를 하지 못했다. 특대형 선풍기가 공간 구석구석 바람을 실어날랐지만 그마저도 그 앞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때문에 녹록치 않았다. 수랭식 보디를 가진 사람들은 프로펠러에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었고 공랭식 보디를 가진 사람들은 그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곁바람을 쐬었다.

 “하 동생, 오랜만이네. 휴가는 잘 보냈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는 동료들과 인사하는 척하며 바람이 직방으로 부는 노른자 땅으로 파고들었다가 금세 빠져나왔다. 바람이 시원하지 않았고 잠깐 앉아있었는데 체온 상승 알람음이 울렸다. 나는 멀찌감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선풍기와 방열 모터가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모기처럼 앵앵댔다.

 얼마간 미지근한 바람을 쐬고 있는데 김 실장이 태블릿으로 부채질을 하며 대기소로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활기찬 마음으로 준비 운동합시다. 성수 씨 기준으로 양팔 벌리세요.”

 인부 최고령인 성수 아저씨가 오른팔을 들었다. 기준. 인부들이 훈련된 개처럼 성수 아저씨를 기준으로 순식간에 운동 대열을 만들었다.

 “하나, 둘, 서이 너이!”

 김 실장의 우렁찬 구령에 맞춰 인부들은 목, 손목, 발목, 허리를 돌렸다. 준비 운동은 비전환자들의 사고 위험을 줄여주고 전환자들의 정신적인 긴장을 해소해 준다. 나는 미열 때문에 머리가 무끈했지만 한 동작도 빼먹지 않았다.

 마지막 구령이 끝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덜 풀린 관절을 스트레칭했다.

 “자 자, 다들 장비 챙깁시다!”

 김 실장의 호령에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작업 벨트를 보았다. 헬멧 같은 안전장치나 장갑 같은 소모품은 회사에서 제공하지만 손망치나 판금 드라이버 같은 개인 장비는 스스로 챙겨야 한다.

 “여러분, 작업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열에도 주의해주세요! 개인의 안전이 곧 현장의 안전입니다. 하나 더! 아무리 더워도 헬멧은 꼭 써주세요! 자 자, 배정된 구역으로 이동! 자세한 지시는 현장 팀장들에게 받으시면 됩니다.”

 짝짝. 김 실장이 손뼉을 치자 배열이 허물어졌다.

 내게 새로 배정된 구역은 13구역이었다. 13구역은 구시가지 중앙 지역으로 철거 작업도 중반이 지났다. 나는 터덜터덜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습관처럼 냉각수 온도를 확인했다. 33.6도. 집에서 나왔을 때보다 0.2도 올랐지만 예상 범위 안이었다. 냉각수는 20도보다 낮아야 제 기능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있지만 지금은 체온보다 낮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메모리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자. 어떻게 해서든 9월까지만 버티자. 9월에 AIF가 냉각수를 풀 예정이라는 월스트리트 저널 예측 보도가 있었다. 더도말고 딱 5주만 버티자.

 2주 만에 몸을 썼기 때문일까 아니면 몸에 갇힌 미열 때문일까. 나는 초짜도 하지 않을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자이언트 해머는 부스터 출력이 강해 휘두를 때 지반과 벽의 균열에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주의 사항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휘둘러버렸다. 아니, 생각이 너무 많았던 걸까? 무너지는 순간, 내가 소리친 덕분에 다행히 사람들은 다지지 않았지만 내가 문제였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콘크리트 덩어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충격에 시야가 지지직거렸고 노이즈 사이로 사람들이 내게 몰려들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다음… 그다음은….

 눈을 떴을 땐 집이었다. 나는 소파—오해할까 밝히지만 우리 집에는 침대가 없어 몸을 눕힐 수 있는 곳이 소파 뿐이다—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은 누가 열어주었고 누가 데려다주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도통 익숙해지질 않는 미열이 몸과 머리를 뚝 잘라놓았고 머리만 땅밑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목뒤가 축축했다. 식은땀을 많이 흘렸나 보다. 식은땀? 내가 전환하고 땀을 흘린 적이 있었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묻었다. 머리에 받혀 놓았던 쿨링 쿠션도 척척하게 젖어있었다. 물은 아니었다. 그보다 걸쭉하고 미끈거렸다. 위옹위옹. 경고창이 눈치없이 튀어나왔다. 아이 씨…!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무심코 경고창을 치우려다 멈추었다. 경고창에 쓰인 글자 배열이 낯설었다.

 [냉각수 누수. 체내 냉각수 89퍼센트. 보충 또는 교체가 필요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더 보기.]

 나는 굵은 글씨를 눌렀다.

 [냉각수가 60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경우 시스템이 정상 작동을 수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메모리 손상 위험이 존재하니 신속히 냉각수를 보충 또는 교체해 주십시오.]

 난생 처음 경고창에 나는 넋을 놓고 한 자 한 자 뜯어 읽었다. 60퍼센트… 정상… 못할 가능성… 위험… 보충… 교체…. 걸쭉한 액체가 목덜미를 따라 등줄기로 미끄러졌다. 체내 냉각수 87퍼센트.

 일단 티슈로 냉각수가 새나오는 틈을 틀어막았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인력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야 했다.

 평소라면 금방 받았을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전화를 꺼놨다는 핑계는 댈 수 없다. 위험과 사고가 도사리는 현장에서 신속한 연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다. 그럴 것인데 한 시간이나 통화 연결음을 듣고 나서야 김 실장과 연락이 닿았다.

 “김 실장님, 저 피하십니까?”

 “피하긴 누가 누굴 피해.”

 “그런데 전화가 왜 이리 안돼요?”

 “후……. 자기 때문에 못 받은 거지.”

 “제가 뭘요?”

 “이 사람아. 사고가 났으니까 뒷수습해야 할 거 아니야! 그나저나 머리는 괜찮아? 띵하거나 어지럽거나 그러진 않아? 엑스레이 찍었는데 괜찮다고 하던데.”

 “괜찮다고요? 누가요. 제대로 검사한 거 맞아요?”

 “내가 거짓말해서 득이 될 게 뭐가 있다고. 생사람 잡지마.”

 “정말 몰라요?”

 김 실장이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냉각수 보충해달라고 자꾸 경고창이 뜨는데 그게 괜찮은 거예요?”

 “난 또 뭐라고.”

 “실장님, 대충 넘길 일이 아니에요. 저 냉각수 없어요.”

 84퍼센트. 81퍼센트. 79퍼센트… 통화하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냉각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알림창을 껐다.

 “엑스레이 찍었는데 냉각수 탱크 깨졌다더라. 그거만 교체하면 돼. 우리가 바꿔주려고 하니까 개인 동의 없이 함부로 꺼내면 메모리 고장난다고 해서 그냥 왔어. 소파 옆에 여분 탱크 두고 왔는데 못 봤어?”

 나는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자세를 유지한 채 소파로 돌아갔다. 소파 옆에 원통형 플라스틱 탱크가 있었다.

 “찾았어요.”

 나는 상체는 그대로 세우고 무릎을 굽혀 플라스틱 탱크를 들었다. 실기스가 많은 게 누군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 같았다.

 “우선 그거로 바꿔. 급한 불부터 꺼야지.”

 이딴 걸 내 몸에 넣으라고? 절대 사양하고 싶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자기가 전화 줬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번 달은 나오지 말고 그냥 쉬어. 어차피 그 몸으로 힘도 못 쓸 거 아냐.”

 “실장님, 머리 터진 것도 억울한데 일까지 하지 말라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 냉각수 사야 돼요.”

 “그 몸으로 나오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민폐야. 자기 이만하길 다행이야. 머리에 직격이었어. 헬멧 썼길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 했다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 조상님이 도왔어.”

 “실장님 저 벌어야….”

 “알았어. 자기 지금 냉각수 몇 퍼센트 남았어?”

 때마침 잔여 냉각수 알림창이 떴다. 77퍼센트. 76퍼센트. 시시각각 냉각수 잔량이 줄어들었다. 얼마 정도여야 현장에 나갈 수 있을까. 대충 80퍼센트면 될까? 그래, 80퍼센트라고 둘러대자.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데이터 요구하게 하지마.”

 아이 씨…. 이럴 때만 사람이 좀스러워진다니까.

 “86퍼센트요.”

 “95퍼센트까지 채워 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거 아니야. 노동법에 적혀 있어. 냉각수 95퍼센트까지 채워오면 확인하고 현장 투입할게.”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요.”

 “그건 그때고. 냉각수 보충할 때까지 나올 생각 꿈에도 말아. 다 자기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고깝게 듣지마. 한 두 푼 더 벌려다가 훅 간다. 알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푹 쉬어. 어차피 체온 때문에 몸 쓰는 거 부담이었잖아. 다 알아.”

 김 실장은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남의 속도 모르고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쉬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돈이 없는데 어떻게 푹 쉬고 어떻게 냉각수를 사라는 거야. 세이와의 3주년 선물로 통장을 비운 터라 돈이 더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알고 푹 쉬어.”

 김 실장은 대답을 듣지 않고 수화기 너머로 사라졌다. 끓어오르는 배신감과 실망은 미루고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혼자서 냉각수 탱크를 교체하는 건 처음이지만—카트리지를 바꿀 때마다 세이가 도와주었었다— 까짓것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집게 손을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핀셋 손으로 바꿔 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냉각수 집약을 실행하고 거울을 등진 채 세면대에 걸터앉았다. 세이가 있었더라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없는 사람을 찾아도 소용없다.

 체내에 남은 냉각수가 없는 걸 확인하고 경추 보호 커버를 열었다. 복잡하게 엉킨 신경선神經線 때문에 냉각수 탱크가 보이지 않았다. 신경선을 한데 묶어 가외로 제치니 공간 뒤로 냉각수 탱크가 드러났다. 탱크 옆면을 길게 흐르는 냉각수가 전등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한손으로 탱크를 빼내려고 했지만 공연히 움직일수록 흐르는 액체의 폭이 넓어졌다. 아이 씨… 나는 신경선을 놓고 공조 시스템을 10초 돌렸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여야 해. 공조 시스템을 끄고 구멍으로 아담한 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탱크에 손이 닿지 않았다. 나는 다시 손을 빼고 거울 가까이 구멍을 가져갔다. 탱크는 생각보다 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앉고 숨을 골랐다. 눈을 질끈 감고 전보다 훨씬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신경선에 스칠 때마다 손끝이 저렸다. 주춤거리면 고통의 시간만 더 길어진다. 나는 과감하게 손을 밀어넣었고 간신히 탱크에 닿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한 손으로 탱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더듬어서 고정 장치를 풀었다. 딸깍, 소리와 동시에 냉각수 탱크 분리 경고창이 시야를 가렸다. 지금 튀어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손끝으로 탱크를 아슬아슬하게 들어 올렸다. 냉각수가 탱크와 신경선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옷 사이로 새똥이 들어간 것 같이 찝찝했다.

 나는 냉각수 탱크를 세면대에 올려두었다. 탱크 옆면 길게 난 균열 사이로 샛노란 냉각수가 새어나왔다. 아깝게시리. 나는 김 실장이 두고 간 플라스틱 탱크에 냉각수를 옮겨 담았다. 집중하는데도 자꾸만 손이 떨려 냉각수가 주둥이 옆으로 흘렀다. 그나마도 체온을 잡아주던 냉각수가 없어지니 컨트롤이 더욱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정도 냉각수를 옮겨 담았을 때 파손된 냉각수 탱크를 탈탈 털어 플라스틱 탱크를 채웠다. 절반이나 될까. 체온 상승 경고창과 냉각수 탱크 분리 경고창이 차례대로 튀어나왔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일련의 행동을 거꾸로 되짚었다. 냉각수 탱크 고정 장치를 잠그고 신경선을 대충 정리하고 경추 커버를 닫았다. 한 번 해봤다고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시야를 답답하게 가로막았던 냉각수 탱크 분리 경고창이 사라지고 새로운 알림창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냉각수 부족. 잔량 57퍼센트.

 쿨링 쿠션 커버를 빨아 바지랑대에 걸어놓고 소파에 앉았다. 냉각수가 더 줄어들 걱정은 없었지만 그 절대적인 양이 부족했다. 온도도 문제였다. 현재 냉각수 온도 35.7도.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9월까지 꾸역꾸역 버틸 수야 있겠지만 이래서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나는 넷에 접속해 현재 냉각수 공급 상황을 검색했다. 내가 사선의 고비를 넘나드는 동안 AIF가 정상 가동하고 원활한 공급이 가능해졌다는 뉴스가 나왔을지 모르긴 뭘 몰라. 기적 같은 바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냉각수 공급에 차질이 있었고 9월이면 정상 공급을 내다보았던 월스트리트 저널을 빠르면 10월 늦으면 내년 1월에야 정상 공급이 가능해 보인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부정적인 전망에 힘입어 중고 시세는 정상 가격의 열 배까지 뛰었다. 가장 저렴한 금액이! 그 돈이면 공랭식 보디로 재전환하는 비용이 훨씬 싸다.

 나는 넷 접속을 끊고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휴가동안 먹은 인스턴트 도시락과 캔으로 너저분했다. 휴가 마지막날 모아서 치우려고 했는데 세이와 싸우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럴 때 세이가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불운을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사람. 왜 인간은 항상 잃고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걸까. 세이가 돌아올 때까지 문은 활짝 열려 있겠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세이의 마음이 풀리길 바랄 뿐이다.

 나는 소파에 길게 누워 몇 시간이고 잡동사니로 지저분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석양이 공간을 시뻘겋게 물들였고 한 물체가 유난히 검붉고 둔탁하게 반짝였다.

 나는 스르르 소파에서 일어나 그것을 쥐었다. 세이가 나를 위해 남기고 간 주사기였다.

 

*

 

 호환성 문제가 있는 건지 내가 잘못 쑤셔 넣은 건지 수시로 냉각수 탱크 분리 경고창이 떴다. 시도때도 없이 경고음이 울려대는 통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열대야도 심각했다. 입추도 지났는데 더위는 꺾일 줄을 몰랐다. 입추라니. 약하디 약한 생체를 메탈 보디로 전환하는 시대인데도 절기를 믿냐며 언제적 사람이냐고 세이를 놀렸었는데 이제는 내가 절기 타령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세이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세이가 엉뚱해도 곰곰이 따져보면 핵심을 관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랭식 보디도 그렇고 냉각수 수렵도 그렇고. 세이가 말한대로 냉각수 수렵을 했다면 냉각수 탱크가 깨졌어도 냉각수 여분이 있었을 거고 혼자서 찔찔거리며 탱크를 교체하지도 않았을 거다. 오늘밤에도 일을 나갈 수 있었을 거고 일급을 차곡차곡 모아 AIF가 정상 공급한 냉각수도 살 수 있었을 거다. 처음부터 세이가 옳았다. 전부.

 어젯밤 세이가 나타났다. 미열에 짓눌려 얄포름한 잠속을 헤매는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녹등가에 사는 사람들은 사라져도 사회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족속들이야. 쓰레기를 치운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어.

 당신이 맞다, 고 동조하면서 세이를 껴안으려 했지만 전신을 둔중하게 누르는 미열을 걷어낼 수 없었다.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 간신히 눈을 떴지만 세이의 얼굴은 노이즈에 파묻혀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세이였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뺨에 닿은 미풍은 확실히 세이의 그것이었다. 끝끝내 나는 세이에게 닿지 못했고 세이는 노이즈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가까스로 미열에서 벗어난 나는 세이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주사기와 2리터짜리 플라스틱 빈 우유통 두 개를 더플백에 집어넣었다. 세이는 화가 덜 풀렸나 보다. 내가 너무했어. 이제라도 세이의 말을 들으면 돌아올지 모른다.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데 고새 움직였다고 체온 상승 경고창이 튀어나왔다. 알았어. 알았다고. 늦장 부릴 시간은 없다.

 나는 구시가지 ‘미화’ 작업에 처음부터 참여해서 인부들이 없는 시간을 잘 알고 있다. 8시면 조간朝間 작업팀도 칼같이 철수한다. 다음날 노동에 차질을 주지 않기 위한 프로페셔널 정신이라고 둘러대지만 일급을 받는 인부들에겐 1분 더 망치질한다고 득이 되는 건 없다. 제일 먼저 미화가 끝난 1번 구역부터 미화가 반절 끝난 11번 구역까지는 황무지나 다름없어 찾아올 사람도 없고 있다 해도 내가 먼저 숨으면 된다.

 녹등가로 통하는 지름길도 훤히 안다. 이건 처음부터 미화에 투입한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나는 구시가지 토박이라서 실전 잡지식에 빠삭하다. 5번 구역에서 6번 구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맨홀 하나가 있다. 그 아래 하수도를 쭉 따라가면 녹등가로 갈 수 있다. 냄새가 좀 나지만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이다.

 한달음에 지름길 입구에 도착한 나는 작업 벨트에서 판금 드라이버를 떼내 맨홀 손잡이에 쑤셔 넣었다. 힘을 준 순간 체온 상승 경고창이 얼굴을 때렸다. 알아. 나도 안다고. 나는 맨홀 뚜껑을 들어 힘겹게 돌바닥으로 밀어냈다.

 막상 녹등가로 가려니 저항감이 들었다. 세이에게 ‘냉각수 수렵’에 대해 들었을 때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팔짝 뛰었고 지금도 인간이 못할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주사기고 우유통이고 바리바리 싸들고 쪽문까지 열어젖힌 마당에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멍청한 짓이다. 냉각수를 보충할 생각에 신이 나선 냉각수 온도를 37.8도까지 올리고서 말이다. 40도를 넘긴 냉각수에게 제 기능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이와중에 냉각수 부족 경고창과 체온 상승 경고창, 냉각수 온도 상승 경고 창이 삼박자로 갈마가며 경고음을 울려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디, 뭘 고민해?

 세이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뭘 주저해. 시끄러운 알림과 불쾌한 미열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나는 흘러내리는 더플백을 추스르고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사다리를 한 칸씩 내려갈수록 한꺼풀씩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 위로 겹쳐졌다.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공기마저 이끼가 낀 것처럼 희푸르스름했다. 시각 센서는 멀쩡했다. 나는 시각 센서를 야간 모드로 바꾸고 후각 센서 감도를 낮췄다. 하수도를 따라 녹등가로 향했다.

 녹등가는 대기근이 휩쓸었을 때 빈자들을 구하기 위해 세워진 자원 병동 구역이었다. 병동은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초록색 네온등으로 만든 십자가를 내걸었다. 초록빛은 어둠을 푸르게 몰아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움을 받은 이들은 구원의 빛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초록색 네온등을 골목 곳곳에 달았다. 기나긴 대기근이 끝나고 소명을 다한 자원자들은 녹등가를 떠났고 주인 없는 녹등가를 몇몇 빈자들이 차지했다. 그 소문은 시궁쥐가 번식하는 것마냥 빠르게 퍼졌고 더 많은 빈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인 빈자들이 이룬 마을이 지금의 녹등가이다.

 녹등가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에 돌멩이가 콱 박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너무 오래 걸었나? 나는 체온과 냉각수 온도를 확인했다. 체온 37.9도. 냉각수 온도 38.1도. 냉각수 온도가 체온을 앞지르고 말았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녹등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녹등가는 고요했다. 세이에 따르면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고 했었는데…. 어둠 속에서 쓸쓸하게 삶의 꼬랑지를 부여잡느니 태양빛이 비치는 곳에서 눈을 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물러터진 생각으로는 고열에 시달릴 거라며 체온 상승 경고창이 뺨을 후려쳤다.

 나는 가장 처음 보이는 집 문을 두드렸다. 가벼운 노크에 문이 스르르 열렸다. 나는 20초간 공조 시스템을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생활감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살림살이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냉각수 탱크 분리 경고창을 끄고 다음 집으로 움직였다.

 다음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다음 집도. 그 다다다음 집도.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집은 비어 있었다. 살림살이는 포탄에 맞은 것처럼 파탄 나있었고 때때로 불에 녹은 잔해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어차피 버릴 집이니까 정리하지 않은 걸까. 처음부터 황폐했는지도 모른다. 개미굴처럼 암벽에 구멍을 뚫고 그것을 집이라며 애지중지 여기는 녹등가 사람들의 삶을 어찌 감히 짐작할 수 있겠어. 소문과 달리 사람들은 진작 녹등가를 떠난 걸지도 모른다. 도시 미화 때문에 시에서 돈도 뿌렸으니 녹등가를 떠날 기반도 생긴 셈이었다. 알고 있었잖아. 녹등가는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거. 나는 등받이가 녹아내린 플라스틱 의자를 똑바로 세우고 앉았다. 뒷수습이 무의미한 냉각수 온도 상승 경고창을 진정시켜야 했다.

 결심이 무색하게 수확은 없었다. 사람이 있어야 수렵을 하냐 마냐 할 터인데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평생 후회할 짓을 하는 것보다 고통을 감내하는 편이 훨씬 낫다. 시도 때도 없이 경고창이 튀어나오고 경고음이 울려대고 결국 고열에 메모리가 녹아버리겠지만 그 편이 낫다. 집으로 돌아가서 냉장고에 머리나 처박자. 나는 플라스틱 의자에서 일어나 그것을 한쪽에 반듯이 세워두고 폐허를 빠져나왔다.

 희푸르스름한 어둠 가운데 서서 골목을 두리번거렸다. 남은 거리를 보아하니 돌아가는 것보다 그대로 나가는 편이 시간이 절약된다. 집을 뒤지는 것도 아니니 금방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골목은 고요했고 터벅터벅 내 발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와주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간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잘못 들었나? 나는 체온을 확인했다. 38.1도. 아이 씨…. 체온이 38도를 넘으면 센서가 오작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0.2도 차이인데 오작동이 바로 생길까 하는 마음에 청각 센서 감도를 올리고 숨을 죽였다.

 “…와주소서….”

 쇠를 긁는 녹슨 목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했다. 나는 빵조각을 따라가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 소리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공연히 문을 열세 번 두드린 후 소리와 만났다.

 “도와…주소서….”

 목소리는 안방에서 메트로놈처럼 반복되었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른팔과 왼다리가 찢어진 노인이 엎드려 있었다. 뜯겨나간 생체 조직은 부패하고 있었고 뒤통수에 달린 방열 모터는 한 바퀴도 온전히 돌지 못하고 크게 스윙할 뿐이었다.

 노인에게 다가가자 기름 냄새와 살 썩는 냄새가 콧속을 헤집었다. 후각 센서가 참지 못하고 경고창을 띄웠다.

 “괜찮으세요?”

 나는 경고를 무시하고 노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었다. 노인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요?”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제가 안 보이세요?”

 “오, 하늘이시여. 제게 천사를 보내셨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구가 있었을 공동空洞에서 녹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노인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그를 벽으로 질질 끌었다. 그를 앉힐 만한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노인을 벽에 기대 두고 놓으려 하자 노인은 어미의 손을 놓친 아이처럼 필사적으로 더플백 끈을 잡았다.

 “버리지 말아주시오. 나를 놓지 마시오.”

 “어르신, 저 어디 안 가요.”

 내가 노인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이고 손등 위에 손을 포개자 노인은 더플백을 놓고 벽에 등을 기댔다.

 힘을 썼더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사실을 친히 확인시키듯 체온 상승 경고창과 냉각수 온도 상승 경고창이 튀어나왔다. 체온 38.0도. 냉각수 38.7도. 나는 경고창을 껐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악마가 나를 때리고 옷을 벗겼소. 그리고는 내 팔과 다리를 뜯어갔소.”

 노인의 뒤통수에 영지버섯처럼 돋아난 방열 모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지만 한 바퀴를 온전히 돌진 못했다.

 “악마요?”

 “그렇소. 메뚜기떼처럼 갑자기 들이닥쳐 보금자리를 휩쓸었소. 사람들을 때려눕히고 머리에 말뚝을 박았소. 악마는 생명수를 빼앗았고 생명수가 없는 사람들은 팔과 다리를 뜯어갔소. 사람들은 뜨겁다고 제발 죽여달라고 절망을 울부짖었지만 악마들은 낄낄거리며 지켜만 보았소.”

 이건 냉각수 수렵이다. 나는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죄스러웠다.

 “나를 지옥에서 꺼내주시오.”

 “네, 걱정마세요.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요.”

 노인의 얼굴에 얼마 남지 않은 생체 피부가 이완했다. 나까지 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말과 다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경고창은 종류를 달리하며 계속 헛소리 말라며 나를 꾸짖었다.

 “그런데 어르신. 제가 지금 어르신을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올게요. 약속해요.”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마시오. 부탁하오. 나 혼자 힘으로는 나갈 수가 없소.”

 노인은 끝이 찢긴 오른팔을 덜덜 떨었다. 나도 노인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현실을 무시할 순 없다. 노인을 녹등가에서 데리고 나갈 수는 있다. 그 뒤는? 힘을 쓰면 체온이 올라갈 것이고 체온을 식히려다 냉각수는 40도를 넘길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냉각수를 보충할 때까지 나는 고열에 시달릴 것이다. 그뿐이면 다행이다. 고열은 메모리를 망가뜨린다.

 노인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무언가 결심한듯 내 멱살을 잡았다.

 “이 지옥에서 나를 꺼내준다면 생명수를 주겠소.”

 노인은 뭉뚝한 오른팔로 방 한 구석을 가리켰다.

 “악마에겐 절대 내줄 수 없었지만 천사 님에게는 드리겠소.”

 노인이 미친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나는 두 손을 바닥에 딱 붙이고 칠흑을 향해 기어갔다. 그곳은 어둠이 조금 더 고여있는 듯 끝을 헤어릴 수 없는 우물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벽을 세 번 두드리시오.”

 노인은 내가 보이는 것처럼 타이밍 좋게 지시를 내렸다. 나는 노인이 시키는 대로 벽을 세 번 두드렸다. 그러자 벽에서 또 다른 벽이 떨어졌다. 틈을 벌리자 비밀 공간이 드러났고 그 안에는 냉각수 카트리지 하나가 반듯하게 서있었다. 그것은 에메랄드 색으로 빛났는데 품질 인증서가 없어도 최소 2등급은 되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상급 카트리지에 체온 상승 경고창이 튀어나왔다. 이거면 10월까지는 거뜬하게 버틸 수 있다. 나는 카트리지를 더플백에 쑤셔 넣었다.

 “도와드릴게요.”

 “고맙소. 정말 고맙소.”

 나는 더플백을 앞으로 둘러메고 노인을 업었다. 노인은 몸집에 비해 무거웠는데 아마 초기 전환자인 모양이다. 전환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강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비효율적이지만 견고하고 안정적인 설계를 채용했다. 방열도 공랭식과 수랭식 모두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환 초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녹등가에 사는 노인이 어떻게 전환했을까?

 호기심은 감당해야 할 현실에 쉽게 날아가 버렸다. 갈 길은 먼데 노인은 무겁고 뜨거웠다. 나는 힘겹게 한발 한발 발을 떼었다. 가뜩이나 어두워서 시청각 센서 감도를 올린 탓에 신경은 곤두 서있는데 각종 경고창은 바통 터치하듯 끄면 튀어나오고 끄면 튀어나왔다. 거기에 등에 업힌 노인은 방언처럼 감사인사를 쉼없이 쏟아냈다. 당신은 하늘이 내린 천사라며 조금만 늦었어도 자신도 생명수가 다해 타버렸을 거라고 두려웠다고 하늘을 배신하는 중죄를 저지를 뻔했다고 흐느꼈다. 나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나는 끙끙대며 골목길을 거슬러올랐다. 혼자였다면 지름길로 갔겠지만 노인을 업고 사다리를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중추 시스템은 내가 쓰러질까봐 소수점 단위가 변할 때마다 친절하게 체온을 알려주었다. 39.4도. 39.7도. 40도가 넘으면 정말로 움직이기 힘들어질 텐데 큰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젖혀 남은 거리를 보았다. 집 스무 개는 더 지나가야 녹등가를 벗어날 수 있다.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시야는 흐물거렸다. 나는 우뚝 서서 10초 동안 공조 시스템을 돌렸다. 이만하면 괜찮겠지. 한 발짝 뗀 순간 무릎이 크게 꺾였다. 재빨리 균형을 잡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고꾸라졌을 것이었다. 마음만 급해서 이대로 녹등가 탈출을 강행하는 건 무모했다. 어렵게 구한 카트리지를 헛수고로 만들 순 없었다.

 “조금 쉬어야겠어요.”

 노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아무 집으로 향했다. 문은 열려있었다.

 나는 노인을 벽에 기대 두고 더플백을 발치에 두었다. 그리고 입구가 보이는 곳에 쭈그려 앉았다. 철거 작업 휴식 시간이었다면 아무데나 벌러덩 드러누웠겠지만 여기는 녹등가다. 아직까진 아무도 만나지 못했지만 긴장을 놓쳐선 안된다. 노인이 쫑알대던 악마도 신경 쓰였다. 한차례 수렵이 휩쓸고 지나갔다고 해도 누구처럼 뒤늦게 머리를 들이미는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노인은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말하는 것도 에너지를 꽤나 소모할 텐데 노인은 말할 때 필요한 에너지가 따로 있는 듯 숨 쉴 틈도 없이 떠들어댔다. 바쁘게 달싹이는 입술과 달린 뒤통수 방열 모터는 느리게 돌아갔다. 어쩌면 노인은 이미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저런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냉각수를 바꿔야 한다.

 “천사 님.”

 노인은 한 팔과 한 다리를 질질 끌며 내 옆으로 기어왔다.

 “저는 천사가 아니에요.”

 “천사 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아시오?”

 노인은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태클을 걸고 싶은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그냥 두었다. 냉각수 온도가 39.9도를 찍은 후로 눈앞이 흐렸고 귀도 먹먹했다. 그 탓에 기분이 나빴고 대꾸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악마를 곁에 둔 지 모르는 거라오. 악마는 언제나 달콤한 말로 약자를 현혹하고 방심한 틈을 타 목덜미를 비틀어버리오.”

 노인은 너덜너덜한 오른팔과 검지와 약지가 없는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천사 님도 조심하시오.”

 “알겠어요. 그러니 어르신도 좀 쉬세요. 제발.”

 노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지만 1초도 가지 않았다. 노인은 내게 머리를 기울인 채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노인의 조잘대는 입이 점점 거슬려졌다. 그래도 거기까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정수리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이 내 뺨에 달라붙은 순간, 기분이 확 더러워졌다.

 더러운 방열 기체조차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인간을 내가 왜 구해주어야 하지?

 냉각수도 구했겠다 녹등가에 내려온 목적은 진즉 달성했다. 노인을 여기까지 옮긴 게 아깝지만 구석에 박힌 쓰레기를 사람들이 찾기 쉬운 곳에 옮겼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수렵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노인에게는 행운일 터. 노인에게도 마냥 나쁘지 않은 게 여기부터 구시가지까지 400미터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조잘댈 기운이 있으면 한 팔과 한 다리만으로도 충분히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입을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아직 거기 계시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게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노인과 거리를 벌렸다.

 “천사 님. 어디 계시오?”

 노인은 팔을 허우적대며 애타게 나를 찾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드디어 문고리를 잡은 순간, 무언가 허전했다. 더플백이 없었다. 나는 당황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더플백은 노인 발치에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집게 손으로 머리통을 퍽퍽 소리나게 때렸다. 이 멍청한 놈! 나는 게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살금살금 더플백을 잡으려는데 노인의 왼손이 더플백을 가로챘다.

 “이 악마 놈. 나를 속일 수 있다고 믿었느냐!”

 노인은 뻥 뚫린 어둠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녹이 슨 치아 사이로 검붉은 녹물이 파편처럼 튀었다.

 “네놈은 나를 속였다 생각했겠지만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악마는 하나같이 음흉한 꿍꿍이를 품고 있지.”

 노인은 왼속으로 더플백을 내리쳤다.

 “어르신, 오해세요. 위험해서 망을 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어디서 거짓말을! 내 너를 이용해 지옥에서 나가려 했음을 정녕 몰랐더냐!”

 노인은 성치 않은 손으로 더플백을 열고 속을 헤집었다.

 “역시 말뚝을 가지고 있었군. 이것들은 무엇이냐!”

 “멈추세요. 제발….”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그는 주사기를 꺼내 살펴보는 척하고는 구석으로 멀리 던졌다. 플라스틱 우유통은 통통 소릴 내며 칠흑 속으로 사라졌다.

 “생명수가 그리도 탐이 났더냐! 내 불타죽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너에게 절대 줄 수 없다!”

 노인은 에메랄드빛 냉각수 카트리지를 하늘 높이 들었다.

 “어르신, 안돼요. 절대 안 돼!”

 나는 노인에게 달려들었지만 순신간에 좁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돌바닥에 부딪친 카트리지는 산산조각 났고 돌바닥은 푸른 액체로 젖어들었다.

 나는 허둥지둥 냉각수가 남긴 흔적까지 기어갔다. 한 방울이라도 건지려고 손으로 그러모았지만 냉각수는 이미 바닥으로 스며든 뒤였다. 흙먼지와 뭉쳐 떡이 된 냉각수가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끝났다. 전부 끝나버렸다.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멍청한 노인네!”

 체온 상승 경고창이 시야를 덮쳤다. 39.4도. 39.9도. 40.3도. 초를 거듭할수록 경고창이 두꺼워졌다. 중간에 냉각수 온도 상승 경고창도 끼어들었다. 40.5도. 40.9도….

 “당신이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한 줄 알아? 여기서 나갈 방법을 없앤 거야. 알아? 나는 당신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어!”

 “거짓말! 나를 두고 도망가려고 했으면서!”

 “그건… 그건! 악마가 오는지 살피려고 했던 거야….”

 노인은 골이 울리도록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하하. 악마를 어디서 찾으시오? 솔직해지시오. 악마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겠지만 처음부터 악마는 당신이었소. 음흉한 결심을 품고 지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말이오.”

 노인은 더플백을 돌바닥에 던졌다. 빈 껍데기만 남은 더플백이 죄인처럼 내 앞에 널부러졌다.

 노인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다만 나를 향한 찬양과 감사가 비난과 저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것들은 가시를 세워 나를 찌르고 할퀴었고 검푸른 늪에 나를 처박았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몸이 뜨거워졌다. 풍선을 삼킨 것처럼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터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어느 집에서 보았던 잔해처럼 녹아버릴 것이다.

 “그 입 닥쳐!”

 나는 노인에게 달려들어 집게 손으로 때려눕혔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이 악마. 사탄! 네놈도 곧 지옥으로 돌아갈 운명이다!”

 “시끄러워!”

 나는 노인의 턱을 잡았다.

 “네가 하려는 짓을 보아라. 이 악마야. 그만 가면을 벗어라!”

 “악마라고 하지 마!”

 나는 노인의 턱을 비틀어 뜯어냈다. 이젠 노인의 것이 아닌 신경선이 피자치즈처럼 턱에서 길게 늘어졌다. 노인은 반푼인 팔과 다리로 나를 밀어냈다. 하지만 내게 쌓인 열은 이정도로 해소되지 않는다. 나는 노인에게 피할 수 없는 폭력을 친히 하사하고 반푼인 오른팔과 왼다리를 마저 뜯어냈다.

 나는 절규를 토하는 노인을 내버려 두고 그가 내던진 주사기와 우유통을 찾았다. 그것들을 푹 꺼진 더플백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버둥거리는 노인을 앞으로 엎어뜨렸다. 그리고 무릎으로 노인의 등을 짓눌렀다. 노인의 방열 모터가 이전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돌아갔다. 선풍기 미풍보다 느린 회전이었다. 노인이 버둥거릴수록 나는 있는 대로 체중을 실었다. 눈앞에서 냉각수를 놓친 사실이 너무나 열이 받았다. 허튼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가 걸렸든 간에 우리는 안전하게 녹등가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랬을 것을 이 미친 노인네는…! 마침내 벼룩처럼 신경선을 기어 다니는 미열이 나를 태우기 시작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초기 전환자가 맞다면 노인에게도 냉각수 탱크가 있을 것이다. 나는 노인의 방열 모터가 튀어나온 틈으로 판금 드라이버를 끼워 넣고 힘껏 비틀었다. 체온 상승. 냉각수 온도 상승. 냉각수 부족. 냉각수 탱크 분리… 이외에도 낯선 경고창들이 앞을 막고 나를 물고 늘어졌지만 그것들을 뿌리쳤다. 노인의 절규가 커질수록 구멍도 커졌다. 나는 찌그러진 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탄력을 잃은 신경선을 거칠게 젖혔다. 냉각수 탱크가 보였다. 나는 깊숙이 집게 손을 집어넣고 냉각수 탱크를 잡았다. 뻑뻑했지만 뜯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강제로 뜯어낸 탓에 신경선 몇 가닥이 끊어졌다. 노인은 오줌을 지린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냉각수 탱크에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피스톤을 당기니 새빨간 냉각수가 빨려 들어왔다. 나를 구원할 생명수. 노인의 냉각수 탱크는 무식하게 커 플라스틱 탱크 두 개 분은 거뜬히 채울 수 있어 보였다. 나는 우유통 뚜껑을 열고 피스톤을 밀었다. 주로 공랭식을 사용했는지 노인에게 뽑은 냉각수는 적당히 시원했다. 몇 번에 걸쳐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노인의 냉각수 탱크에서 냉각수를 모조리 뽑았다. 노인의 욕지거리 섞인 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냉각수 탱크가 비었을 때 나는 그것을 어둠을 향해 던졌다. 노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노인은 어둠이 박힌 안와로 나를 보았다. 노인은 뭐라 나불대고 싶었겠지만 턱을 잃은 그는 쇳소리 섞인 신음을 뱉는 게 겨우였다. 나는 으그러진 방열 모터를 잡고 노인을 질질 끌었다. 노인은 버둥거렸지만 나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아무도 노인을 찾지 못하도록 어둠이 고인 구석에 처박았다.

 “내가 처음부터 악마였다고? 웃기지 마. 당신이 나를 악마로 만든 거야.”

 노인의 방열 모터가 대신 대답하듯 쉭쉭 소리를 냈다. 핑계 대지 마. 그리 말한 것 같았다. 퉤. 나는 노인에게 침을 뱉었다. 간수하지 못한 방열 기체의 앙갚음이었다. 41.2도. 체온 상승 경고창이 튀어나왔다. 나는 성가신 경고창을 치우고 주사기와 가득 채운 우유통을 더플백에 때려넣었다.

 정신없이 달렸다. 시야는 흐물거렸고 다리에 힘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몸은 날아갈듯 가벼웠다. 나는 녹등가에서 21번 구역으로 빠져나와 신시가지로 내달렸다. 체온 상승 경고창과 냉각수 온도 상승 경고창이 쉴 새 없이 시야를 덮쳤다. 41.2도. 41.7도. 42.1도…. 어느 것이 체온인지 냉각수 온도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그것들을 없앨 생각을 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경고창을 치울 시간에 한시라도 서둘러 집으로 가야 했다.

 품에 안은 냉각수를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상상이 나를 쪼았다. 우유통에 담긴 액체의 정체를 안다면 사람들이 나를 때려눕히고 빼앗아갈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걸어 잠글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행인들과 부딪쳤지만 그들은 나를 불쌍한 혹은 미친 사람 취급하며 손을 휘저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신발도 벗지 않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세면대에 걸터앉아 거울을 등졌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시야가 흐렸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숨이라도 돌릴 겸 공조 시스템을 돌렸지만 빵빵한 풍선이 가슴에 들이찬 것처럼 호흡이 어려웠다. 이미 온도가 오를 대로 올라버린 냉각수는 열을 배출하지 못하고 도로 체내에 쌓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메모리가 녹아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경추 보호 커버를 열고 손을 쑤셔 넣었다. 신경선을 건드릴 때마다 짜릿했지만 냉각수 탱크를 떼어내는 일에 집중했다. 겨우 밖으로 꺼낸 냉각수 탱크는 미끈하고 뜨끈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바닥에 냉각수 탱크를 세웠다. 샛노란 냉각수가 중력에 이끌려 바닥에 쌓였다. 냉각수 양이 줄어들었다. 저번에 냉각수를 옮겼을 때는 탱크 절반을 넘겼었는데 지금은 절반에 크게 못 미쳤다. 설마… 깨졌나? 나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냉각수 탱크를 살폈다. 안구를 녹여버릴 것 같은 어지러움이 집중력을 헤쳤지만 최대한 꼼꼼하게 살폈다. 냉각수를 채워 넣는다 해도 탱크에 구멍이 있으면 냉각수를 버리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옆면에 흐르는 샛노란 냉각수를 티셔츠로 대충 훔치며 살폈지만 내용물이 샐 만한 데미지는 모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냉각수 집약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거울로 경추 커버 안을 비춰보니 냉각수 탱크로 미처 돌아가지 못한 냉각수가 신경선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아이 씨…. 쓸데없이 흘린 냉각수가 아까웠지만 그걸 안타까워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더플백에서 빨간 우유통을 꺼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신중하게 주사기로 뽑아 냉각수 탱크에 옮겨 담았다. 머스터드 소스 위로 진득한 토마토케첩이 쌓였다. 등급이 다르지만 상관없겠지. 그보다 냉각수 보충이 우선이다. 나는 바텐더처럼 냉각수 탱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절대 입에 대고 싶지 않은 기괴한 색깔의 소스가 탄생했다.

 나는 가득 채운 냉각수 탱크를 들고 세면대에 걸터앉았다. 신경선을 타고 흐르는 냉각수를 손으로 대충 훔치고 신경선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구멍에 맞춰 신중하게 탱크를 꽂았다. 딸깍. 경추 커버까지 닫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쓰러져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뿌옇던 형광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초점도 맞았다. 몸이 식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끝났다.

 남은 냉각수를 냉장고에 넣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테이블은 잡동사니로 지저분했고 세이는 없었다. 나는 멍하니 석양으로 붉게 물든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 긴 하루였다. 오늘은 경고창도 알림음도 없이 깊은 잡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김 실장한테는 내일 전화하자. 냉각수도 가득 채웠고 체온도 냉각수 온도도 걱정할 필요 없으니 돈 벌 일만 남았다. 차곡차곡 모아 냉각수도 사고 세이에게 선물도 하자.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세이가 가지고 싶어했던 크롬 네일을 선물할까. 나중에 정하자. 조금만 쉬고. 조금만….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세이가 내 옆에 앉아있었다.

 “하디, 깼어?”

 “으응.”

 “이제 열은 없는 거 같네.”

 세이가 내 이마에서 손등을 떼었다.

 “으, 으응.”

 나는 잠꼬대 같은 대답을 했다.

 세이는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다짜고짜 달려들었겠지만 말도 없이 나간 게 미안했나 보다.

 나는 슬며시 세이에게 손을 뻗었다. 세이도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부드러운 온기. 틀림없는 세이다. 세이가 돌아왔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세이에게 내 몸에 돌고 있는 냉각수에 대해 말해야 할까?

 불현듯 그 생각이 들었다. 세이라도 내가 저지른 짓을 이해해 줄까? 세이라면 이해해 줄 것이다. 세이가 없는 동안 내가 겪은 일을 들으면 무조건. 돌덩이가 머리로 떨어져서 냉각수 탱크가 깨졌고 한시라도 빨리 냉각수를 채워야 했다고. 세이가 냉각수 수렵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었을 거라고. 역시 세이는 내 인생에서 뺄 수 없는 빛이자 은인이라고 꼭 껴안자. 착한 척해서 미안했다고 사과도 하자. 이참에 갖고 싶은 것도 물어보자.

 그와 동시에 정반대인 생각도 떠올랐다. 굳이 말해야 할까?

 내가 냉각수를 수렵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두 사람뿐이다. 나와 노인. 노인에 대해선 걱정 없다. 턱이 뜯겨져 도와달라 요청할 수 없고 냉각수도 없고 방열 모터도 고장 나서 펄펄 끓는 몸이 되었다. 그 지경이 되어서 살아남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네스 감이다. 칠흑 속에서 애지중지 섬기는 신에게 애타게 죽여달라고 애원이나 하겠지.

 세이가 나를 이해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망설여졌다. 만에 하나 세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손을 놓을까? 자신을 매도했으면서 결국 그 짓을 해버렸냐고 화를 낼까? 어쩌면 배신감에 영영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 일만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래, 말하지 말자. 알려서 좋을 거 없잖아. 더럽고 추잡한 일. 나만 알면 된다. 나는 옅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세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세이에게 착한 사람이고 싶다.

 눈을 떴을 때 세이는 내게 미소 지으며 손을 놓았다.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긴 채 돌아왔다.

 “곰곰이 생각했는데 하디 말이 전부 옳아. 어떻게 사람 해칠 생각을 했지…. 나야말로 열이 있었나봐. 그런데 하디. 내 마음 알지? 전부 하디를 위해서였다는 거?”

 나는 대답하려고 했지만 목이 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짜잔!”

 세이가 카트리지를 내밀었다. 북극해 빙하처럼 청아한 냉각수가 투명하게 빛을 냈다. AIF가 숱하게 광고하던 플래그십 모델이었다. 저절로 등받이에서 몸이 떨어졌다.

 “내 친구 제이 알지? 한 달 뒤에 걔가 결혼하는데 거기 세팅이고 행사 진행이고 부케고 자잘한 거 전부 내가 맡기로 했어. 나 쓰려면 거액을 안겨줘도 몇 달은 기다려야 하는 거 알지? 그런데 하디 생각해서 다른 예약 다 미루고 기본급에 도장 찍었어. 글쎄 제이 삼촌이 AIF 코리아 부지사장이라는 거 있지? 그거 듣고 고민할 것도 없이 콜 해버렸어. 더 좋은 소식은 뭔 줄 알아? 결혼식 무사히 끝나면 수고비로 두 개나 더 주겠대. 이거랑 똑같은 거로. 마음 같아서는 다섯 개는 더 받고 싶지만 두 개가 어디야. 그치? 내가 3일 동안 걔 요구 들어준다고 이리저리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하디는 평생 나한테 잘해야 해. 자, 엎드려 봐. 그동안 더워서 혼났지? 빨리 갈자.”

 세이는 자신의 무릎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거 진짜야?”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하디, 나 못 믿어? 자, 직접 봐 봐.”

 세이는 콧대를 세우며 카트리지를 건넸다. 의심할 여지 없는 최상급 냉각수였다.

 “아니… 아니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카트리지는 찬란한 빛을 내며 내게 도망치듯 어디론가 굴러갔다.

 “하디, 왜 그래? 설마 메모리가 망가진 거야? 내가 너무 늦었어? 그러니까 공랭식을….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이리 와. 더 늦기 전에 교체해.”

 세이가 바닥에 떨어진 카트리지를 주웠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내게 다가오는 세이를 두 손으로 밀어냈다. 어설프게 팔을 뻗은 채 세이와 거리를 벌렸다.

 세이가 냉각수를 구했을 리 없다. 피도 냉각수도 흘리지 않고.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리 없다. 그래, 이건 꿈이야. 꿈. 아직 미열 지옥에 갇혀있는 거라고.

 나는 허둥지둥 체온과 냉각수 온도를 확인했다. 36.1도. 18.7도. 안전 상태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무얼 해야 해? 세이에게 털어놓아야 하나? 아니, 노인부터 구해야 하나? 네 입으로 죽었을 거라며, 이제 와서? 내가 저지른 일과 해야 할 일이 갈피 없이 섞이고 뒤엉켰다.

 미열이 스멀스멀 목덜미에서 피어올랐다. 하지만 미열을 느낄 새도 없이 빨갛고 샛노란 냉각수가 꾸역꾸역 내 몸을 돌았다. 구역질이 났다. 나는 뭘 해야 해? 물음표만 커져갔다.

 이 멍청한 놈! 뭐라도 해! 생각을 하라고! 이젠 열도 없잖아!

 나는 턱이 떨어져라 얼굴을 세게 때렸다.

 “어머, 어쩜 좋아. 메모리가 녹았나 봐.”

 세이는 깜짝 놀라 내 팔을 잡아 당겼지만 나는 주먹질을 멈출 수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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