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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지막 점프

2012.09.17 10:2709.17

동서남북과 상하좌우는 지표면에서만 판단 가능한 기준이다. 동서남북의 기준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지구자기장의 극성이고, 상하좌우의 기준은 관측자의 시선의 방향이다. 우주공간에서는 그러한 방위의 기준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런 난점은 최초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부터 존재했다. 지금까지도 그들처럼, 인류는 무한히 펼쳐진 공간을 관측자를 둘러싼 공의 안쪽면으로 설정하고 북극성과 황도 12궁의 별자리를 방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막상 막막한 우주의 허공 속으로 나와 보니 그들 기준점들은 너무도 멀리 있었다. 관측자의 정확한 위치를 3각 측정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가까운 기준점이 필요했다. 항성계 안에서는 행성들과 위성들의 위치를 그런대로 이용할 수 있었지만 항성계간 화물우주선들은 입장이 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3차원 격자형의 비콘을 통상 우주항로 주변에 규칙적으로 설치하고, 이들과 전파를 주고받는 시간차를 이용해서 정확한 위치를 산출했다. 관측자들은 대개 고속으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이에 따른 도플러 현상과 시공간의 변형 또한 계산에 포함해야 했다.

계산을 복잡하게 하는 또다른 문제는 이들 비콘들의 실체가 또한 아주 작은 인공위성으로서 제 자리에 붙박혀 있을 수 없으므로, 그들 역시 궤도비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움직이는 지도 위에서 움직이는 자로 움직이는 각도를 매순간 측정해 계산하는 작업과도 같다. 그래서 우주 공간에서 방위와 위치를 정확히 산출하는 것은 대단히 치밀하고 복잡한 작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관측자의 위치는 조금 전에 어디에서 어디 사이에 있었을 확률 얼마 하는 식으로 확률모형에 따른 구간 혹은 범위로 제시되었다. 위치가 부정확하니 목적지에 도달할 시간도 역시 확률값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역시 당연하게도, 어떤 화물들은 제 시간보다 훨씬 늦거나 빨리 도착하기도 했다. 그것도 비콘들이 깔려 있는 영역 안에서나 목적지에 도달이 “확률적으로” 가능할 뿐, 그 영역을 벗어나면 자기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글자 그대로 우주의 미아가 되고 마는 셈이다. 인간은 너무나 작고, 허공은 너무도 광대하다.

동물에게 있어서 감각기관이 생존의 절대조건이듯, 위치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송수신장치 또한 항성계간 화물왕복선에게 유사한 의미를 가졌다. 그래서 우주선의 장비는 20세기의 만화나 게임과는 달리, 우주해적과 싸우기 위한 레이저포나 미사일보다는 전파망원경과 연산장치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그 모습은 마치 백 개의 눈이 달린 뇌와도 같았다.

워프 드라이브가 실용화된 후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양자 컴퓨터는 명확한 도착점을 설정했겠지만 수백 광년 떨어진 맥동성의 예기치 않은 중력 폭발이나 마이크로 블랙홀의 명멸과도 같은, 시공간의 자그마한 오차 조차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워프 파일럿의 몸값은 상당히 높았다. 그들은 훈련받는다기 보다는 만들어졌다. 뇌의 후두엽에는 양자 컴퓨터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다운로드받는 인조뉴런이 심어졌고, 생각만으로 비행선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모션 콘트롤러가 두정엽에 장치되었다. 대뇌의 기능을 극대화한 대신 변연계의 발작적인 감정 변화를 제어하는 피이드백 회로 또한 필요했다. 이런 기능들은 평소에는 잠들어 있다가도 우주선의 메인 서킷과 연결되면 깨어나 파일럿을 우주선의 일부로 바꾸었다.

그들의 수명은 길지 않았다. 세심한 건강 관리와 명상, 컨디셔닝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그들의 피부가 노화의 첫 징후를 보이기 전에 뇌의 기능을 멈추었다. 사고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한 삶의 마지막을 맞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퇴직한 워프 파일럿들을 위한 요양원은 어떠한 기쁨, 두려움, 흥분 등을 야기하는 정서적 자극을 최소화하고 수용자들의 평온함을 해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마치 십자가 없는 수도원과도 같았다. 변연계의 정서를 억제당한 퇴직 항법사들은 정교하게 짜여진, 고정된 스케줄에 따라 하루 하루를 보내며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바깥 세상은 너무도 강렬한 자극의 회오리 속이었으므로, 가끔씩 외출을 나가는 사람들도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는 서둘러 볼일을 끝낸 채 요양원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첸은 요양원을 나간 후 귀환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첸은 제3 우주공항의 격납고들 중 한 군데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격납고에는 날렵해 보이는 기체 하나가 피곤한 늙은 사자처럼 조용히 앉아있었다. 아르고스 형 항성간 화물선의 컨트롤 모빌이었다. 지상에서 이륙한 컨트롤 모빌은 우주기지에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던 몇 백 톤 급의 컨테이너를 뒤에 매달고 초공간 항해에 돌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수십 번 반복된 대기권 돌입의 충격으로 몇 번이나 갈아붙인 방열판의 여기저기가 여전히 검게 그을려 있는 오래된 기체였다. 탑승구 옆에는 기체명이 멋 부린 글씨체로 찍혀 있었다. “주작 JUZAK” 동양의 신화에 등장한다는 불새의 이름이었다. 남쪽과 불을 다스리는 신수(神獸)라고 했다.

첸이 주작에 다가가서 날개에 손을 얹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좋은 기체야. 보잉사가 시제품으로 개발한 것으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 기능들까지도 갖추고 있지. 이 기체를 아는가?”

늙은 정비사였다. 낡아 헤어지기 직전인 정비복과 주름진 얼굴이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산전수전 다 겪고 볼 것 못 볼 것 다 본 노인임에 틀림없었다. 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비사는 피식 웃었다. 숨결에 술냄새가 풍겼다.

“워프 파일럿이군. 파킨슨 병에라도 걸린 듯 표정 없는 얼굴을 보면 알지.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 부모도 없이 시험관에서 태어나, 뇌에는 전자칩과 회로를 잔뜩 휘감고, 평생 기계처럼 일만 하고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족속들이야. 바로 자네들 말이야.”

첸은 여전히 말없이 정비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비사는 고개를 젖혀 주작을 올려다보았다.

“아르고스 컨트롤 모빌 2122형, 시그너스. 무려 20년 전에 만들어진 놈이고 조만간 폐기처분될 예정이라고 들었네. 직접 찾아온 걸 보니, 워프 파일럿들이 듣던 것 만큼 냉혈한들은 아닌가보군. 정이 들기도 했겠지.”

첸은 무표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비사는 잠시 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특수기능 3번을 써 보게. 재미있을 걸세.”

첸은 정비사를 따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정비사가 왠일이냐는 듯 첸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걸 .. 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첸의 손가락이 정비사의 손에 들린 위스키병을 가리켰다. 정비사는 말없이 술병을 첸에게 넘겨주었다. 첸이 술병을 받아들자, 정비사는 미소를 지으며 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몸을 돌려 격납고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그가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첸은 술병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증류된 알코올의 향기롭고도 독한 향이 입과 코를 채우고 뇌가 확 타오르는 듯 했다. 술병에서 입을 떼고 잠시 신체의 반응을 체크한 후 그는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병에 1/3가량 남아있던 술이 모두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잠시 후, 첸은 주작의 콘트롤 박스에 앉아 있었다. 스위치가 올려져, 콘솔의 불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비추었다. 메인 서킷과 연결하자 주작의 홀로그램 영상이 콘솔 한 가운데에 나타났다. 다행히 홀로그램은 예전 그대로였다. 요정처럼 자그마한, 그리고 날개처럼 펼쳐진 흰 옷을 입은, 붉고 긴 머리의 소녀 형상이었다.

“오랫만이야, 주작.”

익숙한 뇌파 동조 대신 입을 열어 말하자 주작은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움직임은 본 적이 없는데...라고 말하듯.

-첸, 좀 다른데요. 맥박이 빠르고 말초혈관이 수축되어 있어요. 피가 얼굴과 상체로 몰렸네요.-

“죽진 않았으니까 걱정마.”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아주 활기차 보이는걸요. 그런 모습은 처음이예요. 설마 비행할 건 아니겠지요?-

“아니"

-기체 점검을 원하시나요?-

“아니"

‘그냥, 네가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어'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두정엽의 모션 컨트롤 회로는 예전처럼 즉각 메세지를 주작에게 송신했다. 주작은 말없이 천천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고는 다시 첸을 마주보았다. 잠시 후 주작이 말을 걸었다.

-다음 과제는?-

‘너는 네가 얼마 뒤면 해체될 거라는 것을 아니?’

-예.-

‘괜찮아?’

-현재 특별한 결함은 없어요.-

그럴테지, 라고 첸은 생각했다. 이 아이는 주작의 양자 컴퓨터 인터페이스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폐기처분 역시 정해진 스케줄에 불과할 것이다. 감정의 무게는 임무 수행이 위협 당할 때에만 계산된 정도만큼 얹어진다. 그러기 위해서 파일럿 자신의 감정회로도 억제해 놓지 않았는가.

첸은 결심했다. 너와 나의 마지막 여행을 가자. 설령 그것이 영원한 저주를 부르는 코드일지라도, 후회할 시간조차 남지 않았다, 라고 첸은 생각했다.

“특수기능 3번”

잠시 후, 제 3 우주공항의 관제탑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격납고를 이륙하는 아르고스형 컨트롤 모빌을 발견했다.

-정지하라. 불응하면 격추하겠다.-

컨트롤 모빌의 흔적이 레이더에서 곧 사라졌다. 스텔스 모드가 된다는 것은 전투용 우주선이라는 뜻이다. 관제탑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길다란 안테나를 촉각처럼 늘어뜨린 거대한 바다가재 모양의 무인 요격기 배틀포드 3기가 최후 송신 지역을 향해 발사되었다. 배틀포드에게는 집게발 대신 커다란 개틀링 레일건 한 쌍이 달려 있었다. 배틀포드의 카메라에 주작이 잡혔다. 레일건이 조준되자, 주작의 노즐에서 푸른 화염이 뿜어져나왔다. 주작은 즉시 속도를 높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관제탑에서, 레이더와 스크린을 바라보던 캡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플라스마 추진. 오래된 기술이지만 급가속에는 효과적이지. 아직도 저걸 달고 있는 기체가 있었나.”

배틀포드는 주작의 뒤를 맹렬히 쫓았다.

“시공진의 밀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기권 내에서 워프하려는 거야. 미친 자식, 배틀포드를 회피시켜. 시공진에 말려들면 형체도 못 찾는다.”
운 나쁘면 우리도 마찬가지이고..라는 말을 캡틴은 씹어삼켰다. 시공진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 지 알 수 없었다. 주먹을 꽉 쥐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밤 하늘 한가운데가 보이지 않는 칼로 긋듯 주욱 찢어졌다. 마치 공간을 베어낸 것과 같았다. 그러나 곧 상처는 아물어졌다. 3기의 배틀포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포물선 궤도로 휘젓고는 멈추었다.

“피해는?”

“어.. 없습니다. 그냥 사라졌습니다.”

캡틴과 관제탑 요원들은 잠시 의아해 하다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몇 명은 그때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빛나는 은하수와 별무리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주작은 입실론-카이-3526 비콘 근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실론 시스템은 항성간 항로의 최외곽에 해당하며 그 중에서도 카이-3526은 말하자면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망망한 공간으로 나가기 두려워할 때의 이야기이다.

-왜 이리로 왔지요, 첸?-

주작이 물었다. 첸은 답할 수 없었다.

-특수기능 3번은 적성 지역에서의 긴급탈출을 위한 거예요. 왜 긴급탈출을 해야 했나요?-

‘왜냐면, 그들이 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너와 한 번 더 날고 싶으니까.’

-이해되지 않아요. 다시 답해줘요.-

‘다른 특수기능은 뭐가 있지?’

첸은 대답대신 반문했다. 그가 알기로 주작의 특수기능 1번은 우주해적의 추격을 받을 때를 대비해 컨테이너를 버리고 급가속해 달아나는 기능이었다. 2번은 자폭 기능이다. 그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 뿐이었다.

-특수기능 4번. 워프 엔진의 시공진 제어 능력을 노즐을 통해 외부로 투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워프하는 대신 상대를 워프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타겟은 재통합되지 못하고 시공간의 먼지가 될 겁니다.-

무섭군. 이건 공격용 무기야. 블랙홀을 만들어 상대에게 던지는 것과 같잖아.

-특수기능 5번. 여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특수기능은 이게 전부입니다.-

설명이 없는 특수기능?
그는 주작의 콘솔을 잠시 어루만졌다. 그래, 너는 역시 단순히 짐을 끄는 황소가 아니었어. 불을 다스리는 신이야. 비밀마저 간직한.

“주작, 가자.”

-어디로?-

“따라와.”

첸은 추진기에 아주 작은 점화신호를 보냈다. 무중력 공간에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주작은 천천히 비콘을 지나쳐서 알려지지 않은 광대한 우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비게이션 모드"

붉고 긴 머리칼의 소녀가 사라졌다. 콘솔과 기체 또한 첸의 주위에서 사라졌다. 주작의 외부를 향해 열린 120개의 카메라가 영상을 첸의 뇌로 직접 전달했다. 앞뒤 좌우 위 아래 모두 우주공간일 뿐, 이제 첸은 혼자서 고요히 우주를 떠돌고 있었다. 첸은 눈을 감았다. 그래도 영상은 눈을 뜬 것처럼 여전히 환했다.

먼 곳에서 붉고 푸른 항성들이 흔들림 없는 빛을 검은 허공에 뿌렸다. 가스 성운이 그 사이에 쏟아 놓은 물감처럼 아른거렸고, 머리 위에서 발밑까지 은하수의 거대한 팔이 찬란하고도 도도한 빛의 강물을 이루었다.

이제서야 둘이서만 날아보는구나. 보고할 필요도 없고 수행할 임무나 목표도 없는 비행을. 너와 나, 각자의 생명의 마지막을 앞두고서야. 가슴이 메어오면서 호흡이 빨라졌다. 난생 처음으로 눈물 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각기 사망과 폐기처분을 앞둔 첸과 주작이 함께 모습을 감춘 것은 그다지 흥미로운 뉴스가 아니었다. 다만 2115에서 2123년에 제작된, 몇 기 남지도 않은 구형 기체들에 대한 비행금지와 일제점검이 시행되었으나 그 또한 사고 위험이 있는 낡은 기체를 위한 통상적인 조치로 보였다. 한때 보잉사의 시스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사고로 퇴직한 늙은 정비사가 약물남용으로 강제입원 조치를 받은 것은 더더욱 언론의 시선을 끌 사건이 못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새로운 통상항로를 개척하던 탐사팀이 외계 문명의 것으로 보이는 인위적 전파 신호를 포착했다. 레일건과 빔포로 무장한 우주군이 해당 지역을 답사했고, 마침내 우주 공간을 무작위적으로 떠도는 소행성 무리 중에서 전파 발신원을 찾아냈다. 하지만 전투정이 접근하자 소행성들은 시야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치 소행성 무리 전체가 워프 점프를 하는 것 같았다.

5년 후, 결혼 50주년을 기념하여 행성 외곽을 항해하던 개인 크루즈 여행선 한 대가 동력 이상으로 표류하다가 비콘 지역을 벗어났다. 첸과 주작이 사라졌던 입실론 시스템 근처였다. 때마침 초신성 폭발 직전 단계에 접어들었던 인근의 항성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플레어 폭발을 했고, 거의 지구궤도 지름의 절반에 해당하는 크기의 불길이 여행선을 향해 폭포처럼 달려들었다. 노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들은 자신들이 약 1.5광년 떨어진 통상 항로로 워프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크루즈 여행선은 워프 파일럿을 태우고 있지 않은 작은 배였고, 기계적으로도 그런 워프를 행할 상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마치 급류에 휩싸일 위기의 개미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뭍으로 옮겨주듯 플레어로부터 보호해준 것이었다.

그 후, 차츰 양자 컴퓨터의 기능이 비약적으로 발전되면서 워프 파일럿이라는 독특한 존재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또한 이를 이용한 물질전송기술이 실용화되어 무거운 물자를 우주선에 싣고 날아다니지도 않게 되었다. 한 때 번화하고 소란스러웠던 제 3 우주공항은 이제 오래된 철도역처럼 한적하고 고풍스러웠다. 어느 늦은 저녁, 근처의 낡은 바에 혼자 앉아 위스키를 마시며 책을 읽는 사내가 있었다.

“무슨 책이에요?”

마담이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표지를 보여주었다. 오래된 시집(詩集)이었다.

“시를 좋아하세요?”

사내는 싱긋 웃었다.

“시만큼 좋은 것은 없지.”

마담은 뭔가 대꾸하려다가 시선을 돌려야 했다. 바의 한 구석이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한 노인 한 명이 술을 더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바텐더는 더 이상 술을 주지 않았다.

마침내 포기한 노인은 쪼그리고 앉아 푸념을 시작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더 인정이 있었어... 나처럼 불쌍하고 약한 사람을 이렇게 구박하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심지어 워프 파일럿 놈들까지도 인정머리가 있는 세상이었다니까.

사내는 시집을 덮고 잔을 든 채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의 빈 잔에 자신의 잔에서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정하고 편안한 웃음을 짓고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당신이 누군가 하듯 올려 보았다. 기억에 남은 누군가를 떠올렸으나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미소를 띤 채 노인의 주름진 손등에 자신의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예전에 빌린 것을 갚았습니다.”

노인이 그제서야 첸을 알아본 듯 손을 들어 그 얼굴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가 첸임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특수기능을 써 보았나?”

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노인의 눈에 확신과 안도감이 되돌아왔다.

“다행이군. 자네는 훨씬 보기 좋아졌는걸. 내게는 남은 게 더 이상 없어. 다만 갈 날을 기다릴 뿐이야.”

“우리 누구나 그래요. 다만 조금 더 연장되었을 뿐이지요. 그 동안 누군가에게 줄 것이 있으면 감사할 일이구요.”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들었다.

“가보게. 더, 더 갔다가 나이 더 먹고 난 뒤에 오게. 남에게 아무 것도 줄 게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 때나 오라고.”

위스키 잔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가지요. 언제가 되든.”

첸은 몸을 돌렸다.

“저 분 것까지.”

첸은 술값으로 현금 대신 두어 개의 보석 원석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물질전송기가 보편화된 이래 화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마담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보석을 챙겼다.

사내는 바를 나와 제 3 우주공항의 격납고로 취한 발길을 옮겼다. 잠시 후 아주 낡은 기체 하나가 밤하늘을 향해 천천히 이륙했다.

-어디로 갈 건가요?-

주작이 물었다. 첸은 눈을 감고 좌석을 젖혀 몸을 편히 누이며 대답했다.

“그냥 천천히 아무데로나..”

주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기체는 달빛 비치는 구름 사이를 천천히 날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뒤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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