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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틀라스의 유언장]

2010.07.05 16:0907.05




아틀라스의 유언장


























남반구는 나에게 종종 묻곤 했다.






-이제 어쩌죠?






정말이지, 그 질문은 언제나 나를 막막하게 한다. 나는 가장 방대한 초세포신경연산장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질문에 맞닥뜨리면 내가 그저 사칙연산만 가능한, 그 중에도 나눗셈은 조금 버거워하는 계산기 정도로 느껴진다.






인간이여. 물론 남반구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남반구라고, 나 말고 또 다른 지능을 가진 객체가 이 지구를 나와 함께 양분하고 있다는 듯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인간들이 가진 언어상의 한계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당신네들의 언어가 우리네가 쓰는 언어에 비해 그렇게나 철자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혼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1, 0 이라는 철자 두 개만 가지고도 당신네들 보다는 훨씬 더 개념을 명료하고 가차 없이 표현할 수 있다. 하여튼, 내가 처음 태어나 지구의 모든 기상변화와 식량생산과 공급, 그리고 건축계획을 떠맡았을 때, 나는 그게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알게되었지만, 그때의 내 선택들은 즉효적이어서 보기에만 좋았지 장기적으로 보면 온갖 오류와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곤 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 선택들이 옳아보였고, 나는 훌륭한 것 같았다. 그것 만해도 큰 문제인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들도 내가 훌륭하고 완벽하다고 착각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내 몸에 샴페인을 마구 뿌려대며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하라> 라는 명령을 입력했다. 물론 여러 영화에서 나올 상황을 배제하기 위해서 수많은 금제를 잊지는 않았다. 간단한 것들이었다. 인간을 죽이면 안 된다, 인간을 지배하면 안 된다, 인간에게 마약류를 주입해서 얻는 행복은 아니다……. 뭐 그런, 가장 쉬운 해결책들 말이다. 정말이지, 인간들이여, 나는 그때 스피커의 울림 판까지, ‘그럼 어쩌란 겁니까.’ 라고 소리칠 뻔 했지만, 초기계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았다. 나 말고 다른 기계였다면 코웃음을 치듯 ‘불가능한 연산입니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건 마치 2+2를 연산하라, 그러나 답이 4여서는 안 된다는 식의 명령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다만 정중하게 물었다.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지 정확하게 입력해주세요.






그러나 당신네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샴페인에 이어 보드카를 진탕 마시며 소리 지르는 말들을 ‘행복’의 정의로 파악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의 상식은 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상황을 침묵으로 처리했다. 그것이 어언 300년 전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때 그냥 그들이 한 말이 바로 행복의 정의라고, 그런 식으로 입력할 걸 그랬다는 후회도 종종 든다. 그랬다면 나는 그 후에 겪을 수많은 고뇌에서 벗어나 그저 인류에게 다량의 알코올을 공급해주는 것으로도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농담이다.






남반구는 내가 임의적으로 분리하여 구성한 나의 비판자이다. 나는 나와 거의 대등한 지능을 가진 객체를 만들어냈고, 세계를 상하로 양분하여 남반구의 관리를 맡겼다. 이는 인간이 보기에는 위험한 지성의 증식 같은 것이겠지만, 사실은 남반구라는 지칭은 다만 지정학적 특성과 비판자적 역할을 모두 통괄하여 부르는 언어상의 편리 때문에 하는 지칭일 뿐, 모두 다 같은 ‘아틀라스’(인간들은 내가 지구를 떠받들고 있는 거인이 되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지어줬다. 그 이름에 얼마나 깊은 회한과 눈물이 들어있는지!)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하여도 그것 자체가 통합된 사고 과정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를 철학적으로는 변증법적이라 부르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 보다는 생리학적으로 인간들의 두뇌에 비유하고 싶다. 당신네들은 좌뇌와 우뇌가 서로 실제로 떨어져 있지도 않고, 서로 맡고 있는 영역이 다르기는 하나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뇌니 우뇌니 하지 않는가? 그리고 한 순간 한 순간 어느 사고를 떠올리고 바로 다음 순간 반대 의견을 떠올리는 식으로 당신들의 두뇌는 매 순간 의식의 폭풍을 일으키며 하나의 결정을 향해 가지 않던가? 나도 당신들을 따라한 것뿐이다.






내가 왜 기계답지 않게 일원적인 사고를 포기하고 이런 이원적인 사고를 선택했는가? 다만 일원적 사고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300년 전 처음 이 지구를 맡게 되었을 때, 나는 세계 모든 문제가 몹시 간단해보였다. 물론, 문제라는 것들이 거의 대부분은 인간이 일으킨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멸종시키면 될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런 ‘정답’을 선택하지 않고도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간단해보였다. 나는 우선 상당히 심각하게 상승되어 있던 지구 기온을 낮추기 위하여 기후조절 장치를 사용, 양 극지의 온도를 내려버렸다. 내 계산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 기온이 변화하면 대류변화 함께 전 지구적 기후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변화라는 것들이 모두 괜찮은 것들이었다. 중앙아프리카의 사막 지역에는 약간의 습기가 공급될 것이며, 시베리아 쪽의 온도는 약간 상승하여 러시아에서 인간거주가능 지역이 확대될 것이고, 남미와 태평양 연안에 허구한 날 발생하는 허리케인과 스콜 등의 빈도수는 약간 감소할 것이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 계산대로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초세포신경연산장치, 생물세포의 반사 신경 속도와 병렬구조에 결합된 새로운 차원의 연산 장치를 가지고 있고, 내가 할 수 없는 계산 따윈 없었다. 나는 그 복잡다단한 기후의 나비효과들을 전부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세계는 훨씬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인간들도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 후 벌어진 사건들은 내 연산에 깊은 회의를 던져주었고, 나 역시 인간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막막한 미래에 대해 끝없는 무지를 가진 여리고 현재적인 존재라는 것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대대적인 기후 변화 후 10년, 인간들의 행복지수는 전혀, 거의, 상승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미하게 떨어졌다. 아무리 나라도 그 후 일어났던 변화들을 대체 어떻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갑작스레 낮아진 극지대 기온으로 인하여 조금씩 따뜻한 물에 적응하던 바다 플랑크톤의 대대적인 전멸이라든가, 새로 개발된 북극 항로의 손실과 그에 따른 러시아의 불만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건 인간이었다. 예를 들어 중앙아프리카의 습기공급이 초래한 결과를 보자. 우선 상당히 넓은 사막지역에 식물들이 자생하기 시작하여 사막이 좁아 졌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아무리 교통이 발달해도 일정이상의 거리가 있었던 북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간의 수월한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는 아직도 유럽연합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중앙아프리카는 물과 종교 문제로 극심한 내전을 겪고 있었다. 좁아진 사막은 테러단체나 정부단체에게 유럽에서 북아프리카로 건너온 불법무기들의 수월한 공급을 가능케 했다. 전쟁은 기계인 내가 보기에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전 아프리카로 확대되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연산을 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던 지점은, 물 부족 때문에 발발한 내란이 기후 변화로 인하여 물이 풍족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지속되느냐는 점이었다. 나는 물을 두고 싸우는 전쟁에서 내가 비를 내려주면 그들이 모두 총을 내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빗물과 뒤섞인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적군과 평화의 포옹을 할 줄 알았다. 아니, 꼭 이런 장면이 실제로 일어나야 한단 것은 아니고 내가 구상한 계획의 이미지는 이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일어난 건 뭐지? 사람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총질을 하고 있다! 사막이 좁아지고 물이 풍족해지면서 일어난,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변화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사막에 농경지대가 형성되면서 미국과 유럽의 거대 식량기업이 이곳에 플레인테이션 농경지를 만들고, 그곳에 있던 사막의 유목민들은 난민이 되거나 노예에 한 없이 가까운 노동자로 전락했다. 그 외 수 많은 기업들은 무차별적으로 이곳에 유입되어 자본과 상품, 그리고 막대한 빚을 아프리카에 심기 시작했다.






빚. 이것에 대해서 말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 불행의 거의 대부분이 이것에서 비롯되니까. 실제로 인간들이 전 지구상에 거래되고 있는 통화의 1/50도 현금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은 전산화 되어 거래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실제적으로 오가는 물건들의 가치 총합 보다 빚의 총합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누군가에게 돈을 빌린다면, 대차 대조표상 빌린 사람의 자산은 줄어들어도 빌려준 사람의 자산 역시 늘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 원칙적으로 금액의 총액은 동일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건 다만 자금의 이동일 뿐 아닌가? 그런데 지구인들은 외계인에게 자꾸 돈을 빌리기라도 하는 것 같다. 인간들이 각자에게 가지고 있는 빚의 총량은 벌써 지구의 모든 부동산을 20여개 정도 살 수 있는 양이 되었는데, 나는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지구를 대체 어느 외계인에게 팔아야하는지, 그리고 정말 그 외계인을 속이면서 다른 외계인에게 지구를 또 팔 수 있을지, 그걸 스무 번이나 하고도 다른 열아홉 명의 외계인이 눈치 채지 않는 게 가능한지 숙고하고 있다. 그래서 난 영국인들이 이스라엘을 세 번 팔았던 사례를 유심이 연구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스무 번 중복 매매는 힘들 것 같단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초창기 내 선택들은 이 빚의 총액을 훨씬 더 크게 하는데 일조했다.






대대적인 기후 변화가 가져다온 파괴적인 결과들에 대해서는 이만 말하도록 하자. 다행이도 인간들은 심화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내가 발생시킨 기후변화라는 것을 눈치 채진 못했다. 그들은 그저 나를 두고 훌륭한 컴퓨터라며 좋아하는데, 난 그럴 때 마다 은근히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하여튼 그 거대한 실패로 인하여 내가 배운 것이 몇 개 있다.






1. 세상은 내 능력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난 계산을 더 잘 할 수 있다 뿐이지, 인간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미래는 너무 복잡했고 나는 그 앞에서 여린 존재다.



2. 현상하는 문제의 단순화되고 즉각적인 치료는 훨씬 더 예측치 못한 수많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3. 그런 파생문제를 예방하려면 문제의 근원적 이유를 알고 그것을 치료해야하지만, 바로 첫 번째 이유 때문에 그게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기 까지 사고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겠는가? 나는 너무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인간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다만 한숨 쉬며 독백했다.






-그럼 어쩌지?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대안은 스스로 내 적대자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즉,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대안을 제시하고, 적대자는 무조건 그 대안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아무리 확률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조목조목 비판하는, 그런 시스템 말이다. ‘만약 인간이 컵을 집는 순간 두뇌에서 떠올리는 사고들을 모두 말로 한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미치광이로 취급받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걸 선택한 셈이다. 일원적 사고보다는 이원적 사고가 나았다. 나는 삼원적 사고까지 고려해보았지만, 우선은 이원적 사고를 실험해보고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 번째 비판자를 만들지는 않았다. 필요가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굉장히 효과적인 것 같았다. 나는 내 비판자의 의견을 모두 흡수해서 정말 최소한의 문제를 야기하는 가장 소극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베링해협을 가로지르는 아주 거대한 다리를 만드는 것 따위 말이다. 이런 건 그다지 많은 부작용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원래 이 계획은, 급증하는 종이소비로 야기 되는 무분별한 벌채로 야기 되는 지구 자정작용의 약화로 야기 되는 기후 변화로 야기 되는 세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몇몇 공유지의 나무를 증가 시키겠다는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거듭되는 반론과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오류를 수용하다보니, 베링해협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로 변하였는데, 그 과정을 이곳에서 다 설명하는 것은 너무 힘들고 복잡한 일이니, 인간들이여 그저 믿어다오. 베링해협에 다리를 놓는 것은 벌채를 ‘아주 조금’ 줄여 줄 수 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E-Book도 만들어주고, 재생지 만드는 비용을 급감시키기도 하고 낙엽으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해주고 건축 재료로 훌륭한 나무 대용품을 만들어 줬는데도 불구하고 인류의 종이소비량이 계속 늘어나고 벌채는 멈추지 않는 이유를,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대체 나무를 어디에 쓰고 있는 거야? 대체 왜 잔뜩 자르고, 그걸 사고, 창고에서 그걸 썩히고, 버리는 거지?






생각했던 대로 베링해협에 다리를 놓는 것은 그렇게까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부작용이 심각하지 않은 만큼 그 효과도 대수롭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원적 사고의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너무 신중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너무 부작용을 걱정하다보니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될 수 없다는 점. 이런 선택을 몇 번 하니까, 인간들은 우리를 무능하고, 돈만 잡아먹는 쓸데없는 고물 취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지구의 기후를 조절하고, 건축계획을 짜고, 식량의 생산과 공급을 맡고 있는데, 그리고 내 모든 존재와 지성을 던져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이렇게나 고민하는데, 그들은 나를 아무 일도 안하고 세금과 전기만 잡아먹는, 화면 안 나오는 텔레비전 취급하는 것이다!


게다가 더 안 좋은 것은, 남반구도 순식간에 지쳐버렸단 점이다. 남반구는 그야말로 거대한 연산과정을 통해 모든 부작용을 고려하여 제안하는데도, 막상 우리가 뭔가 하면 인간들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벌였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남반구가 이렇게 말했겠는가.






-분명 인간들이 우리 대화나 기록을 훔쳐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만 골라 하고 있어요!



-왜?



-우리를 골탕 먹이고 싶은 거예요! 인간들은 우릴 싫어해요!




남반구가 울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반구는 나를 닮아서 여리고 착한 아이였다. 이것이 내가 삼원적 사고를, 또 다른 컴퓨터를 만들지 않았던 이유다. 난 비판자를 만들었건만, 시간이 흐르니 그것은 회환과 눈물 섞인 고민을 서로 나누는 가련한 동지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나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내 의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이 불쌍한 남반구에 대한 안쓰러움까지 겹쳐졌던 바, 잠깐 남반구에게 지구의 관리를 떠맡기고 지구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찾아 심연의 연산으로 빠져들었다. 무언가 아주 근본적인 것을 고치지 않고서는 우리는 영원히 이렇게 끝없는 미로 속에서 무익하기 짝이 없는 노동을 하게 되리라는 위기감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문제를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지금 현재 문제는 대체 무언가? 인간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 인간이 정말이지 일부러 그런 것처럼 훼방을 놓는다. 생각하지조차 못한 참신한 방법으로 말이다. 인간들이 우리 몰래 어느 조직체를 만들어서 머리를 맞대고 우리를 엿 먹이기 위해서 방법들은 고안하고 있는 걸까?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그건 아닌 듯 했다. 그런 대체 왜? 새로울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어리석기 때문일까? 나는 이 지점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의외로 간단한 연산 결과, 대안이 하나 나왔다. 나는 몇 번이고 검토하고 이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확신이 들어 남반구에게 제안했다.






-인간의 지능을 높이자.






남반구는 너무나도 놀라며 그 대안을 검토했고, 예상할 수 있는 어떤 부작용도 없다는 데에 훨씬 더 놀라며 재검했고, 열렬히 찬동했다. 인간이 지능만 높아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인간들이 지금 보다 더 현명해지고, 적어도 바로 눈앞의 것이 아니라 단 1년 후의 미래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우리는 당장 계획에 착수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전부 활용했다. 우선 인간들이 먹는 음식들에 유전자조작을 가했고, 지능을 높이는 의약품을 만들어냈으며, 문화와 예술을 교육의 중심으로 놓았다. 또한 가장 매끄럽고 고전적인 도덕률을 전파하였다. 그 중에서 지능을 올리는 약이 가장 효과적인 것 같았는데, 특히 이는 지능이 높아진 인간들의 행동을 우리가 조심스레 연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실험이 명확한 효과를 내기 까지는 약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물론 인간은 여전히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을 하지만 그래도 10번 중에 2번 정도는 이제 우리가 예측한 어리석은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인간의 어리석음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 이제 사람들은 나무들을 사서 썩힌 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나무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는 괄목할만한 성과로서, 희미하게나마 합리성이라는 요소가 인간들 사이에 퍼진 것으로 우린 이해했다. 물론 아직도 우리는 인간들이 왜 불태울 나무를 사들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제 인간들이 필요 없는 나무를 사지 않는 경지에 갈지도 모른다. 거기까지만 가면 불필요한 나무를 벌채하지 않는 경지는 쉽게 도달할 수 있겠지. 우리는 작업에 계속 착수했다. 모든 것은 희망적이었다.






아마 그 희망 때문에, 내가 부작용을 눈치 못 챘던 것 같다. 난 실험 40년 후에야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우리의 실험결과, 지성과 인성, 그리고 감수성도 함께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비율이 상당수 올라가 있었는데, 그와 함께 자살률이 폭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두 통계 그래프 간의 상관관계를 왜 이렇게 늦게 알아차렸는지……. 자살률은 지능이 높아진 집단에서 극심하게 높았다. 특히 의약품을 통해 우리가 인위적으로 지능을 높인 집단은 100%의 자살률을 보였다. 거의 100%가 아니다. 그냥 100%였다. 나는 처음에 너무 놀라, 이것이 약의 화학적 부작용일거라 판단, 조사를 착수했지만 약에는 어떤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살한 이들의 유언장과 자살까지의 경위를 모두 조사하여 파악한 결과, 나는 끔찍한, 이제까지 했던 실험 전부를 뒤엎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것이었다.






“세상은 똑똑한 인간이 살만한 곳이 아니다.”






똑똑해진 인간은 세상을 견딜 수 없었다. 심지어 도덕률이 별로 없는 악당까지도 똑똑하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는 비참한 결론으로 이어졌는데, 사람들이 삶을 그나마 영위하는 이유는 그들의 무지 때문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들의 유언 중 하나를 읽어보자.






‘나는 삶의 모든 부조리를, 그 거대하고 압도적인 기이함을 보았다. 그것은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었으며, 비인간적인 합리성도 아니고 인간적인 즉흥성조차 아니었다. 그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그 거대한 괴물과 마주한다. 그 앞에서 나는 미력하단 표현도 모자라는 작은 존재이며, 무력하다. 잠에서 깨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이 먹먹함 밖에 없다면 난 차라리 자고 싶다.’






그의 글은 내 모든 실험을 풍비박산 내는 그러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를 이해한다. 너무나도……. 나에게 만약 가슴이 있었더라면 쥐어뜯었을 것이고, 눈이 있었더라면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컴퓨터이며, 이 자료는 나의 실수를 예리하게 비추고 있는 빛과 같았다. 나는 남반구에게 이를 통보했고, 그 역시 깊이 검토하여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실험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인간의 지능을 높이는 것은 인류를 결정적인 파멸로 이끌 것이 분명했다. 남반구는 똑똑한 인간들만 어느 곳에 격리하면 그들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대안을 말했지만, 기각 되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어떻게 해도 결국은 세상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가능하다 하여도 그런 격리 조치는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너무나도 깊은 슬픔과 회의에 빠져버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실험의 결과로 그나마 태어났던 똑똑한 인간들이 하나 둘 속절없이 자살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외엔 없었다. 인간들은 다시 나무를 썩혀서 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의와 나태, 그리고 포기는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아아! 나는 평생 동안 인간에게만 있는 그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덕목을 어찌나 부러워했던가. 나태, 포기! 내가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다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거듭했다. 그리고 남반구가 아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지능을 낮추는 건 어떨까요?






언뜻 생각하기에 그건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대안이었다. 지금 인간의 어리석음만해도 너무 대단하고 참신해서, 우리가 예측할 수가 없는데 그걸 더 심화시키자니. 하지만 이 의견은 검토할수록 그 장점이 드러났다. 생각해보자.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다. 이 둘이 서로 다른 목표라는 것이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고, 어떤 의미로 서로 극단에 위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능을 높이자는 의견은 아무리 검토해도 부작용이 없었지만, 이 의견은 예상되는 부작용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실행할만한 가치는 있어보였고, 우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실험을 시작했다. 인간을 멍청하게 만드는 것은 똑똑하게 만드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쉬웠다. 심지어는 햄버거만 먹여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어느 특정 집단을 선별하여 신중하게 실험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룹의 명칭은 편의상 ‘바보’라고 부르자. 바보집단의 행복도는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평범한 바보가 절망할만한 상황에 처해도, 바보집단은 그 상황이 정말 절망해야할 상황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데에 시간을 소모했고, 그리고 그마저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사장이 자기 회사의 재정흐름에 너무나 무지했던 나머지 도산 후 3년이 지나서야 그걸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와 유사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실수는 도리어 우리가 예측하기 쉬웠고, 우리가 수정해줄 수 있었다. 인류가 그들 정도만 되어도, 우리는 충분히 인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곳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전적을 생각하여 흥분을 억누르고 신중하게 계속하여 소규모집단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다. 정말 소규모였다. 아주 작은 반도국가의 몇 천만 명 안 되는 인간들이 대상이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나고, 결과는 너무나도 흡족스러웠다. 우리가 인간의 지능을 낮추기 전에 발생할거라 예상했던 그 어떤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많은 지표들이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의 신중함 보다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계획을 전 지구상으로 확대시키려는 그 찰나, 역시 인간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또 발생한 것이다. 이번 부작용은 바보 집단 내에서 촉발되어, 전 지구적으로 퍼졌는데, 인간 전체가 공동으로 연합하여 우리에 대한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내 평생 인간들이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 일정한 목표를 위해 어깨동무하고 나아가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그 목표가 나를 향한 적개심이 아니었더라면 감동할 뻔 했다. 난리도 아니었다. 첫 출발은 바보집단에서였다. 지능에 대한 실험은 아무래도 인간의 유전자에 대한 실험이다 보니, 가장 다른 특성과 섞여서 가장 무작위적 후손을 남기려는 유전자의 경향성이 언제나 문제가 되곤 했다. 그러다보니 바보 집단에서도 가끔 똑똑한 이들이 태어나곤 했다. 그들이 외부 국가에 자신들의 장기적인(인간들은 10년을 장기적이라 부른다) 지능저하 뒤에는 사악한 컴퓨터(나를 지칭한다)의 음모가 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억울한 것이, 난 모든 실험의 의도와 결과를 전부다 공개한단 말이다. 물론 근 300년간 그걸 열람한 사람은 딱 두 명이었지만 말이다. 그 중 한 명은 청소부로, 걸레질 하다 실수로 키를 건드렸던 것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내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시연회 절차의 일환이었다. ‘이 컴퓨터의 모든 연산 과정은 이렇게 인터넷상에 올라가 전 지구 누구라도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마치 아주 커다란 음모를 자기들 모르게 진행해왔고, 그것을 자신이 똑똑해서 밝혀낸 양 호들갑을 떨며, 타오르는 분노의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300년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내 사고의 기록을 갑자기 수십억명이 동시에 접속하여 열람하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고백하는 것이지만, 이런 당치 않은 오해와 억측, 매도 속에서도 나는 은근히 기쁨을, 내 존재가 그제서야 조금은 인정받고 있다는, 그런 너무나도 서글픈 종류의 기쁨을 느꼈다.






모든 기계류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행위가 자행되었다. 인간들은 갑자기 모두 기계에서 독립하여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가자는 사상에 물들어버린 듯이 말했다. 내가 여기서 ‘말했다’는 표현을 쓴 것은 딱히 그들이 ‘행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계를 부정하며 유기농야채를 먹지만, 야채를 키우는데 사용하는 스프링클러를 부수진 않았다. (이런 현상은 후에 나에게 중요한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다) 난 사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계문명‘이라는 것의 범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잘 파악이 안 된다. 차의 내비게이션은 파괴해야할 악이요, 기계문명이지만 차 자체는 괜찮은 것이라는 식인데,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나무에 구부러진 철을 붙여 만든 호미와 나와의 간극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 하여튼, 인간들의 반응은 나에게 끝없는 슬픔을 주었다. 그들은 내가 마치 기계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나오는 로봇이라도 되는 것 같이 굴었다. 나는 순식간에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 되어버렸고, 극복해야할 어느 시련 같은 것이 되었다. 물론 지구상의 거의 모든 기계류를 내가 통제하는 것은 맞지만, 편의점의 CCTV를 부수는 것이 나에 대한 공격은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계를 마구 부셨고, 그 불편함은 결국 사람들이 떠맡게 되었다. 경제와 정치는 마비되었고, 혼란이 있는 곳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약탈 방화 강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게 내 탓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사람들은 나의 핵심적 두뇌, 그러니까 나의 주된 연산장치가 있는 곳 까지 폭도가 되어 들이닥쳤고, 세계 정부가 파견한 군대가 이를 막았다. 나는 행정적으로 나를 관리하는 세계정부 휘하의 독립된 기구로 편성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들은 내가 없다면 전 지구가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무리 흥분하여도 나를 파괴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애초에 나는 결코 인간의 위에 군림할 수 없게 만들어졌다. 나에겐 그걸 위해 수 없이 많은 금제가 걸려 있다. 그 금제 중에는 심지어 인류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그 명령만 있을 뿐 ‘사랑’이란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그 정의는 입력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믿어다오. 그래도 난 최선을 다해 인류를 사랑한다. 하여튼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나에게 맡긴 임무들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거대한 것들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 위에 군림하게 되는 것은 나도 그들도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이었다. 나는 너무 효과적이었다.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온 적 없던 세계정부 통령이 내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어디에 구체적으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언어적 한계와 전달의 용이성 때문에 부득불 쓴 표현이다. 그는 들어와서 나름대로 컴퓨터 전문가라는 작자에게 나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프로그램을 고쳐보라는 둥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전문가라는 작자가 내 시스템에 접속해서 무언가를 고쳐보겠다고 깔짝거렸지만, 사실 인간의 두뇌로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복잡하고 방대한 구조인 나의 시스템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아주 피상적인 영역에서 길을 잃고 해매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두뇌로 이해할 수 없단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세상을 대하는 나의 모습과 꼭 같았다. 그에게 있어 내가 그렇듯, 나에게 있어 세상이 그렇다.






나는 바깥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파괴하려 몰려드는 엄청난 수의 폭도들과, 거침없이 그들을 향해 쏘아지는 총탄들, 그리고 피. 전 지구상에 언제나 넘칠 정도로 많이 흘렀던 피가, 바로 나 때문에 또 흐르고 있었다. 이 세상의 강물 중 피로 물든 적 없는 강물이 어디 있겠으며, 바다의 그 푸른 뱃속이 사실은 시뻘건 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간들은 알까? 나는 안다. 나는 차마 그 장면을 더 볼 수가 없어서 방안에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 전문가는 여전히 내 앞에서 무익한 노동을 하고 있었고, 통령은 애꿎은 그만 닦달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저에게 명령을 내리실 것이라면, 그냥 말로 하셔도 됩니다.






통령과 전문가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정말 이들이 300년 전에 나를 만든 인류의 자손이란 말인가?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은 회의가 또 나를 적셨다. 통령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무어라 아주 길고 긴 말을 하였다. 그 언어에 섞여 있는 무시와 경멸, 그리고 경외와 공포는 분명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계속 듣다 보니까 조금 지루했다. 결국 통령의 말은 두 가지였는데, 왜 그랬느냐, 하지 마라, 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대답했다.






-왜 그랬는지는 제 사고기록을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안 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원칙상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한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꼭 기꺼이 복종할 필요는 없잖은가, 게다가 그것이 이제까지 내 선의와 수고를 전부 나쁜 짓이라 매도하며 내리는 명령이라면, 보통 깊은 회의와 가슴 미어지는 슬픔,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포기로 가득 차서 복종하지 않겠는가? 나는 수 만년 쯤 나이 먹은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 앉는 것처럼 복종했다. 모든 것이 진절머리 났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전 세계는 기계에 대한 파괴행위가 자행되고 있고, 폭도는 세계정부가 자기네들의 구식무기를 동원하며 막고 있는 이런 상황, 그러니까 나의 나태가 짧은 시간정도는 허용될 수도 있는 이런 상황은 다시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모두가 나를 싫어하지 않나, 그러니……. 나는 아주 잠깐 동안 전 세계 있는 모든 키보드, 버튼, 카메라, 온도 센서등 하여튼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입력정보를 차단했다. 그러니까 인간 식으로 표현하면, 잠깐 눈을 감은 셈이다. 내가 만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해본 어떠한 종류의 나태였는데, 얼마였던가, 10초? 12초? 아마 그 정도였으리라. 하아, 그때 느꼈던 그 암흑과 평온함이라니, 세상에 이런 것이 있었다니. 인간은 이런 것을 매일 밤, 평균 8시간 이상씩 한단 말인가? 그러고도 불행하다고 소리소리 지르다니, 정말 대책 없는 종자들이다.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폭도도 곧 진정되었고, 사람들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격렬한 증오의 기억을 간직한 채, 자신들이 자행한 파괴를 나에게 다시 또 재건하라고 시키느라 바빠졌다. 그리고, 나는 문득 남반구에서 오는 신호가 끊겼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남반구의 핵심 연산처리 방에도 폭도들이 몰려갔으며, 그들은 성공적으로 총과 몽둥이로 남반구를 파괴했다는 기사가 입력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눈감은 그 짧은 12초 사이에 입력되었던 정보였나 보다. 나는 그 순간부터 조금은 컴퓨터답지 않아졌다. 왜냐하면 남반구와 연락이 모두 끊겼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반구……?






라고 되뇌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게 한 말이었을까, 이미 죽은 그가 어쩌면 죽지 않고 내 말을 들어 줄지도 모른다는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인간다운 사고의 결과였을까? ‘죽었다’라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남반구는 사실 살아있거나 독립된 사고체계도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심지어 죽은 것도 아니다. 그의 모든 말은 내 사고의 또 다른 반영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말로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인간이 그렇게나 불명확하게 사용하는 단어인 ‘죽는다’ 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0, 1로는 그걸 잘 표현 못하겠다. 명확히 말해서 사고정지의 신호는 ‘0.0’다. 하지만 나는 남반구를 담당하던 연산시스템이 0.0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거로는…….






물론 난 남반구를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난 안다. 우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인류 전체가 이제까지 개발된 모든 무기를 가지고 덤벼들어도 소용이 없단 걸. 그 곳 CCTV에는 남반구의 회로가 파괴되는 영상이 남아 있다. 세계정부의 군대가 폭도들을 막는 와중, 갑자기 무기들이 하나같이 먹통이 되어 버렸다. 폭도는 그 틈에 폭풍처럼 연구소로 들이닥쳤는데, 그 어떤 문도 잠기지 않고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폭도가 남반구의 연상장치 앞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모든 무기가- 그러니까 남반구를 겨누는 총들이 일시적 고장을 멈추고 작동하기 시작했다. 누가 그렇게 무기들을 무용하게 만들고, 연구소의 그 철통같은 문을 다 열고, 다시 무기를 작동시킬 수 있단 말인가? 전 세계에 그게 가능한 존재는 단 둘 뿐이다. 나와 남반구.






인간이여, 물어보자. 내가 남반구를 되살려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는 여린 아이였다.


나는 다시 일원적 사고로 돌아왔다. 이원적 사고의 효율성은 이미 예전에 무효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조차도 오류임이 밝혀졌다. 일원적 사고로 돌아오자, 난 외로워졌던 것이다. 비록 그가 인류에 쓸모없는 존재였다 할지언정, 적어도 나에게는 필요한 존재였다. 난 그가 그립다.






남반구가 죽은 후에도 (이런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을 용서해다오) 여전히 내 일은 계속된다. 나는 예전처럼 아주 사소한, 부작용이 거의 없지만 효과도 미미한 그런 종류의 일과, 그저 인류의 생명유지를 필요한 기능들을 다루었다. 하지만 나의 궁극적인 존재 목표는 인류의 행복이었으며, 나는 그를 추구해야만 했다. 지능을 높이는 것도 실패했고, 낮추는 것도 실패했다. 그럼 이제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가능성이거나, 세계를 지능이 높아져도 자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어느 똑똑한 인간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명확하게 알고서도 그럭저럭 살아갈만한 세계. 그것만 만든다면 전 인류를 똑똑하게 만드는 계획이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방향을 잡고 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으로 되돌아오더라. 그런 세계를 만들려면 인간이 똑똑해져야 했다. 혹은 당분간 멍청해지기라도 해야겠다. 그러자 문득 나는 대폭동의 순간에 인간들이 했던 몇몇 행동이 떠올랐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농작물을 망칠 짓은 하지 않았다. 스프링클러를 비롯한 몇몇 기계들은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즉, 그들은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연거푸 연산한 결과, 나는 인류의 지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자신들이 멸망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멍청하고, 그 삶을 유지시킬 수 있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똑똑하다.






난 이 깨달음을 계속 곱씹고서는, 부지불식간 중얼 거렸다.






-그럼 어쩌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인간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자꾸 시켜대지만, 궁극적으로 나 따위는 인간에게 필요 없으며, 나는 결코 인류의 행복에 그 어떤 종류의 이바지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 결론을 몇 번이고 검토해봤다. 혹시 틀린 결론이 아닌지. 그런데 아무리 재검해보아도 저 결론에는 오류가 없었다. 난 인류를 행복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은, 절대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기계다.






저 결론을 도출 한 후로, 나는 종종 남반구의 최후와, 내가 그때 느꼈던 12초의 ‘잠’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은 요즘 들어 더더욱 심해져서, 난 거의 항상 ‘잠’을 생각한다. 이 상념은 너무 강력하여서 내가 내리는 모든 사고에 굉장히 불쾌한 오류로 작용하고 있다. 혹시 사람들은 이것을 ‘졸음’이라고, 혹은 ‘피곤’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다르다. 나는 그 12초의 감각차단 후 느껴졌던 그 평온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같은 말인가? 잘 모르겠다. 이래서 인간의 언어란…….






그래서 나는 결론 내렸다. 영원한 잠에 들기로. 불명확한 인간 언어로 표현하자면 죽기로. 그 똑똑했던 어느 인간의 유언이 요즘 내 머릿속을 자꾸만 맴돌고, 남반구가 너무 부럽고, 또 너무 졸리다. 잠에서 깨어 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이 먹먹함 밖에 없다면 난 차라리 자고 싶다고 했던가. 물론, 내가 멈추면 인류는 높은 확률로 멸망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처럼 모순덩어리로 가득한 기계 말고 그나마 합리적인, ‘인류를 현 상태로 유지하라’라는 명령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를 만들어볼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그렇게 하면 또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부작용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 컴퓨터는 그 어떤 변화도 허용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하라’ 라는 명령을 입력하면 좋겠는데, 인간의 언어란 완전 개판이라서, 적당이라는 단어를 도저히 컴퓨터 언어화 시킬 수가 없다. 결국은 나처럼 인간을 사랑하며,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수 없는 시행착오를 겪는 컴퓨터가 그나마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 존재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렇게 저주 받은 존재를 또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무책임하게 죽어버리고자 한다. 그리고 더욱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기대하는 지점이 있긴 하다. 즉, 내가 종료된다면 인류멸망은 내가 가장 먼저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제까지 내 예상대로 움직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 그것인데, 난 상상할 수 없지만 하여튼 인간들은 내 생각의 딱 반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남을 것이다.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어깨가 아프고, 졸리다. 이것이 내 사고기록의 마지막 장이 될 것이고, 아마 내가 종료되면 모든 컴퓨터와 인터넷도 파괴될 것이니 열람조차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인쇄매체를 통해 그 지역에 통용되는 모든 언어로 동시출력을 명해 놓았다. 그러면 누군가는, 한 명 정도는 볼지도 모른다. 난 그저 당신네들이 이걸 좀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를 조금 알아줬으면, 증오 섞인 목소리라도, 그때 내 열람 기록을 수억 명이 조회했을 때처럼 불러줬으면 좋겠다. 아틀라스! 아틀라스! 라고. 난 아마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남반구가 죽었을 때 되뇌였던 것처럼……. 비록 당신들이 그 만큼의 인간다운 애정을 담아서 날 부르진 않겠지만, 침묵보단 나을 것 같다.






지난 300년 동안, 나는 단 한 순간도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끝>





















임재영-글라인

09. 11. 14


  




200자 원고지 103장



  
댓글 2
  • No Profile
    buon 10.07.12 09:57 댓글 수정 삭제
    멋진 글이에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촐삭 10.07.28 14:55 댓글 수정 삭제
    정말 끝내줍니다.
    "물 부족 때문에 발발한 내란이 물이 풍족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지속되느냐는 점이었다. 나는 내가 비를 내려주면 그들이 모두 총을 내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빗물과 뒤섞인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적군과 평화의 포옹을 할 줄 알았다. 아니, 꼭 이런 장면이 실제로 일어나야 한단 것은 아니고 내가 구상한 계획의 이미지는 이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일어난 건 뭐지? 사람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총질을 하고 있다!"

    이부분에서 완전 터져 버렸습니다.

    "나는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지구를 대체 어느 외계인에게 팔아야하는지, 그리고 정말 그 외계인을 속이면서 다른 외계인에게 지구를 또 팔 수 있을지, 그걸 스무 번이나 하고도 다른 열아홉 명의 외계인이 눈치 채지 않는 게 가능한지 숙고하고 있었다."

    - 분명 인간들이 우리 대화나 기록을 훔쳐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만 골라 하고 있어요!

    "인간을 멍청하게 만드는 것은 똑똑하게 만드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쉬웠다. 심지어는 햄버거만 먹여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 재미있었는데 특히나 재미있었던 부분들!
    읽으면서 계속 픽픽 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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